이하라 히로미츠(井原宏光)는....
1995년 50여년전의 기억을 되살려 일제강점기 말기 감화원이었던 선감학원에 수용중인 조선 소년들이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억울하게 죽어간 사실을 증언하고, 그 시신을 인근 야산에 내팽겨치듯 버려진 장소를 찾아내 유골 몇구를 수습하기도 하였다. 그 후 이 장소에 억울하게 죽은 소년들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한 위령비 건립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고있다.
일본인들의 살해위협도 무릅쓰며 일본 각지를 다니며 강연회를 개최한 그의 뜻이 이루어지는 날은 언제가 될지...
이하라 히로미츠(井原宏光)는 부친(井原英一)이 함경남도 원산부 일본인 학교의 교장으로 재직 중이던 1935년 7월 20일에 원산부 남촌동에서 태어나 6년간 그곳에서 자랐다. 1941년 일본 오사카시의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이듬해인 1942년 여름에 선감도로 왔다. 현재는 민가가 된 대부초등학교 선감도 분교장에서 洪樣, 申樣과 함께 일본 패전까지의 3년간을 함께 공부하였다. 이때의 체험이 그의 인생을 결정하였다.
산해진미 넘치고, 사계의 자연의 혜택이 풍부한 선감도는 어린 그에게는 도원경(桃源境)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일본이 패망하자 1945년 9월 그는 선감도를 떠나 서울에서 1개월 이상(1945년 8월~10월 하순까지) 머물렀다. 10월 하순 경성역에서 경부선의 상자형의 화물열차를 타고 부산에 도착, 10월 25일 부산항에서 흥안호(興安丸)를 타고 큐슈 하카타항으로 귀국하였다.
귀국하여 산 곳은 모친의 고향이며 현재 그가 살고있는 岡山縣 阿哲郡 矢神村(현재는 岡山縣新見市哲西町)이었다. 당시 배타적인 마을 아동들은 외지에서 들어온 아이들에게 매우 악질적인 이지메를 가했다. 예를 들면 벗긴 모자를 물이 찬 논에 던지거나, 도시락에 든 밥에 모래를 끼얹거나, 등하교길에 가방을 들게 하는 등이었다.
‘타지에서 오자마자 우등생이 된다는 것은 건방지다!’라고 하여 상급생들에게 구타당하기도 했다. 소학교 4학년이던 이하라에게 이 마을은 결코 즐거운 곳이 아니었다. 그 때마다 즐거웠던 선감도에서의 날들을 생각하며 위안을 삼았으나 머지않아 그것마저 위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즐거웠던 선감도에서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왠지 마음 아려오는 슬픔도 함께 느꼈기 때문이었다. 당시 소년이었던 그는 그 까닭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이유없이 이지메를 당하는 자신과 선감도에서 매일 얼굴을 맞대던 조선의 청소년들의 고통을 겹쳐서 생각하게 되었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심신과 일상이 유린된 조선의 소년들의 신상(身上)은, 지금 내가 놓인 처지하고 똑같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느끼면서 그는 크게 깨달았다.
“지금 한국인들도 일본인들도 전혀 알지 못하는 선감도에서의 일을 나는 일생을 통하여 써야 한다!” 라고 생각하며 그는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그의 뜻을 전해 들은 부친도 꼭 동경의 와세다 대학의 문학부에 진학시켜주겠다며 격려하였던 부친이 고교 졸업 무렵 간암으로 쓰러져 그 희망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고교 졸업 후 아무 연고도 없이 동경으로 가서 점원이나 공원으로 하루 10시간이상 일하면서 중앙대학의 통신교육을 수강하였으나, 그것조차 학비를 납부할 수 없어 자퇴하고 귀향하였다.
그 몇 년 뒤 25세가 되던 1960년 여름에 결혼하여 요코하마에 44년간 거주하였다. 트럭 운전수를 하면서 요코하마에 살며 사회인으로 자립하여 생활도 조금 안정된 만 44세가 되었던 1980년 4월말 종전(해방)후 처음으로 선감도를 방문하였다. 이후 매년 한두번은 선감도를 방문하였으며, 이후를 합쳐 한국 방문은 30회가 되었다. 그는 한국이야말로 참된 의미의 그의 고향이며, 인생의 출발점이라고 누구에게나 가슴을 펴고 얘기하고 있다.
현재에도 이곳에 거주하는 홍석민 선생과 36년 만에 재회하였을 때 ‘이하라는 반드시 선감도에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이곳이 이하라의 고향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듣고 가장 기뻐했다고 한다.
위령비의 건립
“나에게는 천국이었지만 한국소년들에게는 지옥”
그가 자주하는 선감도에 대한 표현이다. 그는 항상 이 대목에서는 나이답지 않게(?) 눈물을 흘린다. 그런 지옥같은 생활을 하다가 죽어간 또래의 얼굴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1991년 ‘아! 선감도’ 소설을 출간한 뒤 살해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일본 각지에 연설을 하고 다녔다. 그리고 그들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하여 위령비를 세울 것을 결심하고, 동조하는 일본인에게 기부 약정서를 받기 시작했다. 현금으로 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위령비 건립이 가시화되기 전까지는 받을 수 없다며 약정서만을 걷었다.
1998년 당시 3천만원의 모금약정서를 들고 안산시를 방문하였다. 위령비 건립이 추진되며 그는 일생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느꼈다. 한양대학교 추원교 교수의 설계가 끝나고 1999년부터 위령비 건립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그는 좀 우울한 답변을 받았다. 일본인의 도움은 받지않고 안산시의 예산만으로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는 위령비가 세워진다는 사실에 만족하였다. 약 1억6천의 예산이 세워졌고 2000년 8월 15일 광복절에 제막식을 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본격추진이 시작된 서너달 뒤 안산시는 위령비의 건립 백지화를 선언하였다. 왜? 인지는 밝하지 않은채........
'아리랑'을 부르는 이하라
첫댓글 이하라 선생님의 삶은 제가 번역한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이란 책의 저자 다카하시 노보루의 아들 다카하시 고시로 씨의 삶과 너무 비슷합니다. 당시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의 삶이 대부분 그러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