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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기획 총무 임동규
1. 미완의 혁명! 4월 혁명
4월 혁명! 그것은 우리의 역사에서 민의에 의해서 통치자를 권좌에서 몰아내는 최초의 역사적 사건 이
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4월 혁명세대는 나름대로의 역사관, 패기, 그리고 사명감이 있었다.
친일파들의 추대를 받아 단선, 단정으로 성립한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평화통일론까지를 거부한 극단적
반공적, 근대적, 권위주의의 권력이었다. 따라서 이와 같이 극단적 억압적 권위주의 정권을 무너뜨린 그
패기로 학생운동의 주류는 [민통련]이 주도하는 통일운동으로 표출되었다. 그들은 이민족의 기본적 요구
가 당연히 민족통일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의 제기의 선구자로 자임했을 것이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파문점에서!]라는 구호가 이 시기의 운동 양상을 집중적으로 표현
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4월 혁명으로 조성된 상대적 자유의 공간은 일년만에 군사 구데타에 의하여
무참히 짓밟혀 버리고 운동관련자들이 모두 검거되어 학생운동의 부재상황을 맞게 된다. 그것은 혁명주
체가 학생이어서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고 선거에 의하여 성립한 장면 민주당 정권도 완벽한 궐력 장악을
하지 못하는 취약성이 가져온 필연적 결과였다.
이와 같은 엄혹한 상황에서도 학생운동은 존립하여야 하고, 사회운동으로서 농민운동이 준비되어 농민
대중이 정치적으로 각성하여 민주적 토대를 확고히 하여야 혁명을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우리들은 대
학 입학과 더불어 생각한 농촌활동을 기반으로 [서울대학교 향토개척단]을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군사 정권 하에서 성립하였다 하여 어용적이지 않느냐? 하는 일부의 오해가 있었지만 운동사적
흐름에비추어 민주 민족 운동에 있어서 한 축을 이루면서 끊임없이 운동가를 배출해 온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향토개척단은 70년대 후반까지 존립하면서 현재의 학생 농활로 이어지고 농업문제
에 대한 사회과학적 접근, 사회운동으로서의 농민운동의 존립기반을 형성하면서 이를 이론적으로 지도
하여 왔고 3․24, 6․3 투쟁에 있어서 인력동원의 원천이 되면서 4․19에서 6․3으로 이어지는 가교 역
할을 다 한 것이다.
이점 4월 혁명의 사회 경제적 배경에 대하여 잠시 언급할 필요가 있다. 4월 혁명이 그토록 통치자를 교
체할 수 있었던 것은 전혀 학생의 힘만으로 성사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당시 한국의 재정은 무상으로
공여 된 미국의 잉여농산물의 판매대전으로 충당하여 왔는데 이 때문에 국내 농산물 가격은 폭락하여 농
촌 몰락을 재촉하고 있었던 데서 사실상의 재정 부담은 농민의 희생 위에 이루어지는 구조였다.
당시의 농민은 과다한 상환양곡의 부담(당시 농지개혁은 유상 분배였음으로 분배받은 땅의 값을 분할
상환 해야 했다.) 각종 잡부금, 노력 제공 등으로 전쟁으로 인한 피해까지를 전부 전가 받은 셈이었다.
그러면서도 농민들은 상환 양곡만 완납하면 내 땅이 된다라는 신념 하에 진정 뼈를 깎는 증산 행진을 지
속하면서 부모 공양, 자녀 교육까지 말없이 부담하고 있었다. 사실 한국의 경제적 기적은 이처럼 근면한
농민의 힘 속에 잠재되어 있었다 할 것이다.
그런데 증산하면 할수록 농촌몰락으로 이어지는 모순된 사회구조 속에서 농민들도 정치적으로 각성되
어 가고 있어서 지금까지의 권위주의적 통치방식으로 권력유지가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여촌야도(與村野都)라는 표현처럼 농촌은 당시까지 자유당 정권의 기반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자유당 정권은 권력승계를 위하여 3․15부정선거를 획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다. 그것도 야당 대통령 후보가 서거한 마당에 부통령선거에의 승리를 위해서 말이다.
어찌되었던 자유당은 자충수로 국민적 분노를 폭발시켜 몰락하게 된 셈이다.
그런데 미국의 잉여농산물의 원조 자체의 논리로서도 무상원조-→유상 및 상업차관→ 현금구매로 전
개되면서 장기적으로는 안정적인 미국 농산물의 수요확대를 도모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점이 바
로 전후 긴급복구과정을 경과하면서 유상 및 상업차관으로 전환할 시점이었다.
이와 같은 미국의 정책 전환은 선행적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를 이룩하여 일본으로 하여금 청구권 자금
및 상업차관을 제공하게 할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그런데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이승만은 일본에 대하
여 만은 완강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어서 한․일 국교 정상화에 걸림돌이 된 것이다. 이것은 아마 친일파
와의 야합에 의해 단선, 단정으로 집권한 컴플랙스의 발로일 지도 모른다.
이승만의 하야가 당시 주한 미 대사였던 매카나기의 강한 종용에 의해서 이루어 진 것이 바로 이러한
정황을 말해 주고 있다.
2. 향토개척단의 전사(前史) 및 이면사(裏面史)
향토개척단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조직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각 단과대학 중심으로 농업, 농촌, 농
민문제를 대상으로 활동하던 각 단위 단체들이 이미 20여개(?)나 되었다. 그리기고 여기에 참여하는 각
단위단체의 대표나 대의원들 대부분이 대학입학이래 곧장 이러한 단체들에서 활동해 온 사람들이었다.
물론 이들 모두가 동일한 지향 점을 갖는 이념집단이 아니어서 일정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형성하고는 있
었지만 공통적으로 현실에 대한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농민들에게는 무엇인가 도움을 주어서 민주
의식을 일깨워 주어야 명실상부한 민주화와 빈곤탈피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
다.
이 시기에 학생들에게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한 분 중에는 유달영 선생, 함석헌 선생, 최문환 선생이 있
었다고 생각이 되는데 개척단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상록수, 민주투사, 민족 간부를 지향했고 급진적인
일부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내 자신 대학입시를 목적으로 맨 처음 서울에 왔을 때 우선 자신이 살아왔던 빈곤한 농촌과 서울 (당시
의 200만의 인구)과의 격차에 분노하였고, 야박한 서울의 인심에서 이념지향성을 가졌다고 생각된다.
입학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남산 농촌사회 연구회]라는 곳에서 이우재, 김주숙. 서호연 등을 만나게 되었
고, 방학 때 귀향하여 마을에 4H를 조직하여 농촌활동이 시작되었는데 겨울 방학 때부터 농촌봉사대를
조직하여 졸업 때까지 7차례의 활동을 줄기차게 전개하였다.
4․19이후에는 약간 들뜬 분위기 속에서 파고다 공원 뒤 [국제 학술 연구원]이라는 낡은 건물이 있어서
이곳에 자주 출입하게 되었는데 이 곳에서 홍갑표, 강위직(강경선), 조문제, 심재익 등을 만나게 되었는데
여늬 정치 지향적 학생들과는 달리 농촌문제라는 동질성과 순박성이 끈끈한 인연으로 연계되어 [救農會]
라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이 향토개척단의 창립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였음은 더할 나위가 없는
데 우리는 이를 모태로 하여 향토개척단 내의 이면 조율은 말할 것도 없고 동국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의 농촌 활동자도 연계하여 전국적 조직화를 끊임없이 전개하였다.
어찌되었던 우리는 무엇 때문인지 낙원동 국제 학술연구원]서 열심히 모였고 밤새워 토론하고 끼니가
되면 수재비나 싸구려 백반으로 주린 창자를 채웠다. 나로서는 고향에서 하숙비라도 보내 와서 하숙에
가면 먹고 자고 할 수 있었음에도 궂이 그 곳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모래알 같이 많은 말들을 주고받았
다.
당시 이우재 선배는 수의과 대학 학생회장을 맡고 있으면서 열열한 민통련(민족통일 연맹)의 조직자였
다. 그리고 4․19 1주년 기념일을 전후해서부터 5․16 전야에 JP와의 비밀회동 등 우리를 놀라게 할 만
한 학생 정치꾼의 기량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확실히 우리 현실문제에 대하여 진지하게 접근할 것 같
은 성실성을 보여주었고 일정한 카리스마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서호연의 장황할 정도의 끈질김, 홍갑표의 언변, 그리고 나의 추진력 등 이런 것들이 소박한 형
태로 결합하고 조화를 이루었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들의 이러한 조직력이 선배사회에서 도 인정을 받
아 향토개척단 조직이전에 안병규(문리과 대학 학생회장), 이돈영, 김한초 등의 선배들과도 결합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로서는 학생운동의 정통성 확보에 주력하는 한편 여러 가지 조언을 구하는 것을 통하여 인
간적 유대까지를 강화할 수 있었다.
어찌되었던 조직적 준비 그것으로 우리는 짧은 기간 내에 서울대학교 개교이래 최대의 학생조직인[향토
개척단(처음에는 공식 명칭을 [향토개척연합회]라 칭하고 방학중활동을 위해 [향토개척단]을 일반학생까
지를 포함한 봉사단을 조직하였다가 다음에 [향토개척단]으로 통합하였다)을 창설하고 그 조직적 위상을
내외에 과시 할 수 있었다.
다만 이때의 국내 정치적 상황이 5․16군사 구데타의 주체세력이 정당성 확보를 위해 학내의 지지세력
의 확보를 필요로 하였을 것이다. 맨 처음 육사의 지지 데모가 있었고 대학생 농촌 활동을 지원하여 지
지세력을 확보를 과시하고자 하였음도 사실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노력은 시청 앞에서 거판스런 환송
회를 획책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당시 재건국민운동본부 서울시지부 차장이었던 강상욱은 공식석상
에서 자주 접촉하였고 그들은 환송회의 참석을 강력히 요구하였고 개척단 사무실까지 찾아와 매달리기까
지 하였다. 그는 특히 상대 선배임을 과시하면서 선후배끼리 잘 해보자고 꼬드기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나는 서울 시청에서 거물대접을 받기도 하였다. 군사 구데타 주체들은 구데타 직후 이른바 재건국민운동
이라는 것을 통하여 민심을 돌려보려 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재건국민운동본부는 초법적 존재였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나름대로 역사 의식에 투철하였고 우리의 학생운동
사에 오점을 남길 수는 없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물론 환송식에 참여 여부를 놓고 격론을 벌인 것도
사실이다. 당시 당국은 농촌 봉사 활동에 참여하는 모든 학생에게 교통편 철도이용 8할 할인권과 약간의
활동비를 지원해 줄 것을 약속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환송식의 참석 자체를 전면 적으로 거부 할 수는
없었다 . 그렇다고 해서 액면그대로 그들의 장단에 놀아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진퇴 양난의 어려움을 극
복할 수 있는 지혜는 곧 농민들의 속 깊은 처신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곧 환송회에 참가는 하되
우리는 대규모 시위를 조직한 것이었다. [Machine OK! Wheat No!] [구농 구국!]등의 여러 가지 구호
가 적힌 피켓을 준비하고 리어카에 마이크장치를 준비하고 만반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기동경찰대는 교문
을 막고 가두 진출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당국으로부터 왜 참석하지 않느냐고 독촉이
빗발쳐 왔고 실제 박정희 최고회의장이 3시간 동안이나 시청 앞 뙤약볕아래 기다리고 KBS의 아나운서
는 장황한 소리만 되풀이 할 수밖에 없었고 타 대학 학생들도 역시 뙤약볕아래서 역시 기다리는 촌극이
벌어진 것이다. 이에 우리들은 능청스럽게 우리들의 참가를 방해하고 있는 기동경찰을 철수하라고 요구
하였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길을 내 주었고 우리는 준비된 피켓과 유인물을 뿌리면서 그리고 리어카에 설치한
마이크에 [구농 구국!] [잉여농산물 원조 반대!]를 웨치며 시청 앞까지 기동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보무
도 당당한 시위를 할 수도 있었다. 어찌되었던 5․16구데타 이후 최초의 시위였다고 자부하는 것이다
이날 행사가 끝나고 이돈영 선배와 내가 동대문 경찰서에 연행되어 정보과 형사들과 말도 되지 않는 입
씨름으로 몇 시간을 싸우다가 자정 무렵에 사무실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나는 후배
동료들에게 영웅 대접을 받았고 아직까지 [향토개척단]을 부정적으로 보는 선배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해
나갔다. 그럼에도 끝까지 지원 협조를 거부한 김진균 선배의 일은 잊을 수가 없는 추억으로 남고 있다.
그분도 그것이 마음의 짐으로 남았던지 1980년대 4월 혁명회서 만나 [그때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했다]라
는 애정 어린 후회의 말을 들을 수 있어서 반가웠다.
진실은 시간의 완급이 있을 뿐 언젠가는 통할 밖에 없다는 확신이 있다.
3. 향토개척단 이후의 농촌 운동 전개 상황
군사 정권이 그 권력적 정당성과 정권의 운명을 새마을 운동에 걸었던 것은 시대 정신과 시대 상황의 반
영의 측면이 있다고 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아이러니를 그들은 바로 다름 아닌 우리 향토 개척단
에서 도용하기로 하였다.
군사 구데타 이후 각료의 배정에 있어서 유일하게 논문을 한번 써 보았다는 경력으로 문 모씨가 문교부
장관에 피임되고 농촌에 위문품을 전달한 것이 유일한 경력인 장 모씨가 농림부 장관에 배정된 예에서 보
듯이 그들은 그야말로 우리의 구쳬적 현실문제에 대해서 문맹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무력과 우격
다짐으로 권력을 빼았은 것이다. 우리는 당시 비록 학생신분 이었지만 농민문제, 노동자 문제, 통일 문제 ,
민족문제, 민주화 문제 , 더 나아가서 는 국가 경영에 대한 문제를 염두에 두고 발로 뛰는 자세를 견지해
온 것이다. 그것은 당시의 상황이 사회과학의 불모지로서 우리의 구체적 현실을 과학적으로 접근할 안목
과 연구풍토의 불모지에서 오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당시의 의식수준에서 우
리가 결집할 수 있는 예지를 다해 [향토개척지침서]를 마련하였고 최문환 학장(당시는 상과대학 학장이었
으나 다음에 총장으로 승진)님으로부터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갖는 학생이야말로 서울대생중의 서울대생
이고 ,그래서 우리는 장래가 있다, 이러한 탁월한 문제 의식은 바로 때묻지 않은 순수성 때문이다"라고
격찬해 마지 아니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개척지침서가 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군사 정권 당국으로부터 혁명백서가 발표되었다.
정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그것은 우리가 사용하한 용어나 개념자체가 그대로 도용 당했기 때문인 것
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우리의 순수 의지를 고집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우리 역사를 지
탱해 온 선비 정신의 발로인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각의식은 바로 이때 형성된 자부와 긍지 때문
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여담이 되겠지만 그후 나는 최문환 총장님으로부터 특별한 지우를 받았다. 길을 가시다가도 나를 발견
하면 차를 세워 어디 가는가를 확인하셨고 인격적 예우를 다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향토
개척단 외의 어떤 사적 부탁이나 아첨의 말을 해 보지 아니하였다. 이 고집 역시 이 땅의 선비가 지켜야
할 마땅한 자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우리는 향토개척지침서를 통하여 당시의 농정의 기본방향, 나아가서는 우리 사회의 기본문제를 선
도적으로 제시하여 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단위 단체 중심의 단순봉사활동, 그것도 다분히 주관적,
목가적, 지엽적, 시혜활동에서 한국의 농업구조를 개혁하고 우리 사회의 민주화의 토대를 구축하는 사회
운동으로서의 농민운동을 지향하는 것으로 전환한 것이다. 당시 우리의 소박한 염원은 농민이 자기 조직
을 갖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회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고 소망하였고 그러한 의미에서 농민 문화를 발
굴하여 농민의식을 고취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러한 의미에서 농민 문화를 발굴하여 농민의식을 고
취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당시의 한국농업을 제약하는 결정적 요인은 외부적으로는 잉여 농산물이었지만 내재적으로도 과소농(過
少農)체제 때문이었다고 우리는 인식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한국적 상황하에서 상공업이 농업분해 능력을
아직 갖추지 못한 조건과 함께 농업과 공업이 국민경제의 양대 주축을 이루면서 균형적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농업의 협업화가 유일한 길이라고 인식하였다 이와 같은 구조 개혁사업은 사실상 정책적 밑받
침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민간운동을 통하여 5개 산악농장을 선정 지원하여
이른바 농업구조 개선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산악농업은 특수 농업으로서 구조개선 사업의 중심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백운산 농장 등 이상을 추구하는 집단도 있었다. 백운산의 경우 홍갑표 강
위직 등 향토개척단의 주동자가 직접 참여하기까지 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다를 경우는 정부의 보조나
융자 그 지원 때문에 모였을 뿐 구조개선 사업에 자발적의지가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당국의 지원자체
도 당시의 산악농업 실정에는 걸맞지 않은 경운기 트랙타 등 전시성을 면치 못하였다.
이리하여 우리의 문제의식은 구조개선 사업의 주 대상을 마땅히 주곡농업 이여야 하고 이를 중심으로
축산 과수가 연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우리의 문제 의식은 미작지역에서 이를 시도하되
다만 신 개간지(간척지)와 기성 농지에서 동시적으로 병행해야 한다고 결론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리하여 보령군 천북면 신덕리에서 15개 농가 협업으로 54,000여 평의 바다를 막는 사업이 진행되었고
전남 광산군 지산리에서의 협업 시도, 경북 영천군 사동에서의 시도 등이 동시 병행적으로 착수되었다. 보
령 농장의 경우 현지에 향토개척단을 조직하고 바다를 막는 엄청난 사업이어서 처음 리어카 두 대의 지원
으로 착수되었고 공사의 진척과 함께 [갯벌이 옥토된다]는 구호아래 거교적인 지원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다음에 농림 장관이 된 박동묘 교수의 비상한 관심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지원까지를 결집하여 평균
높이 10ㅡm의 이상, 밑폭15m, 길이500m의 거대한 제방이 2년여만에(63년 7,8월경) 축조되어 바다가 옥토
되는 꿈의 실현을 가시화 하게 되었다. 단순히 삽과 리야카 15대 만의 도구로써 엄청난 작업이 이루어 진
것이다.
앞에 말한 기성 농지에서의 협업시도는 1년도 못되어 좌절되었지만 보령의 경우는 우선 신규 농지의 조
성이라는 꿈 때문에, 그리고 향토개척단의 집중적 지속지원으로 협업화의 가는성을 꾸준히 키워 올 수 있
었다. 참여한 농민도 호당 1정보 이상의 농지가 조성된다는 희망으로 그처럼 엄청난 노동력을 끈질기게
제골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꿈을 가진 사람이 현지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 협업을 창출해 나가기를기 대한 것이 화상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간척지의 염분의 제거
기간 때문에 본격적인 영농이 5~6내지 7~8년간까지를 기다려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었다.
참여 농가들은 우선 형편이 어려운 사람 우선으로 민물이 흘러 염기가 희석된 곳 즉 단기간 내에 영농
이 가능한 지역부터 개별 경작케 하고, 이것이 결국은 타성이 되어 버려 완전 개답 후에도 분할 경작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령농장은 개척단과 학교의 거교적인 관심과 지원 협력을 유도하였고 개척단이 존
립하는 정신적 기둥역할을 해 왔던 것이다.
4) 後記
나는 졸업 후 고향사람 10여명과 더불어 미사리에 입주하여 신규 농장을 개척하여 협업을 시도하였지만
이 역시 반년이 못되어 철수하지 안을 수가 없었다. 자금 등에서부터 토지문제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일이 없이 부딛치고 보는 과잉 열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학사 주점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붐을 일으키는 대성을 거두기도 하였으나 이 역시 내부의 배신
으로 그 다음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이어서 목노주점을 개업하였지만 이번에는 경영자체에 실패하였다.
모든 것을 일단 정리하고 인본 유학의 길을 추구하였지만 이번에는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유학의 길
이 막혔다.
귀향하여 향토학원을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다시 서울에 와서 [양산박] 이라는 주점을 개설하여 나름대
로 성공작이었으나 이번에는 동업자와의 어려움이 있어 그것마저 떠나 버리고 [화성 협업 농장](이건우
씨 설립)에 들어가서 다시 그 길을 추구하였지만 이번에는 [통혁당]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어 중앙정보부
에서 엄중 수사를 받았다. 그 사건은 주동자로부터 그 구성원에 이르기까지 잘 아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직접 가담하는 않았지만 [구농회]가 포섭의 대상이 되었다 해서 수사를 받게 되었지만 기소 유예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들의 농촌을 향한 집념은 [농업근대화 연구회]의 창립으로 표출되었는데 초대 사무국
장에 이우재 선배가 선임되었다. 이 역시 향토개척단 운동에서 형성된 사회적 관녑과 기반에서 가능햇던
했던 것이고 1972년 유신을 전후하여 내가 사무국장자리를 승계하여 매주 금요강좌를 통하여 학생 농촌
활동을 총괄적으로 지도하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배양된 진보적 인자들이 이른바[남민전]
의 조직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은 나 자신은 남민전에서 지도부와 이견으로 구체적 행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연유로 해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하여 무기 징역을 2개나 선고받고 10년 만에 사회 복귀
하였다. 그런데 복역 중에서나마 [무예도보 통지]소재의 24반 무예를 복원하여 국방부의 전통의장대를 비
롯하여 내외에 보급하고 있는데 이것도 알고 보면 향토개척단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자신은 젊은 나이에서부터 60이 넘은 이 나이에 이르기까지 뭔가를 향하여 열열히 노력하였고 공
동체를 구성해 보겠다는 의지를 버리지 않고 있었지만 그런 노력이 번번히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진홍 목사가 건설한 두레공동체라던지 화성의 山岸會에서 운영하는 협업체에는 성공적이라고
평가되었고 윤구병 교수가 추구하는 공동체도 그 사상적 실마리가 [향토개척단]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
다. 곡성군수가 된 고현석 후배가 농협중앙회의 요직과 승진 가능성을 박차고 고향 땅에서 추구하는 지역
사회 개발 의지라던지, 정진석 후배가 전개하는 [흙살리기 참여 연대] 같은 것은 막바로 향토개척다 정신
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학계, 재계, 정계, 관료사회에서 핵심적 중진이 되어 세계적 명성을 가진 사람도 있고 각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어 사회적 중진으로 활약하는 사람이 그처럼 많으면서 지금까지 부정 비리에 연루되어 사회적 지탄을
받는 사람이 더욱이나 한 사람도 없다. 이것도 바로 청렴 결백한 선비정신의 무언적 발로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려 했었던가? 우리가 젊은 시절 우리 나라의 GNP $70로 세계에서 가장 가
난한나라의 대열에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빈곤, 자유당의 권위주의적 횡포, 분단 조국에 대하여
절망하고 분노하였었다. 온 몸을 던져 그에 저항하고 그에 매달렸다. 그렇다면 뭔가 이룩한 것이 있는가?
구체적으로 빈곤! 해결되었는가? 민주주의! 이루어 졌는가? 조국분단! 극복되었는가?
확실 아직도 완벽하게 이루어 진 것은 없다. 그러나 분명히 달라진 것만은 확실하다. 절대적 빈곤은 상
대적 빈곤으로, IMF와 신자유주의의 횡포로 보다 심화되어 가고 있다. 권위주의! 지역감정으로 왜곡되고
청산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조국통일! 실마리가 풀린 듯 말 듯 한데 반통일적 수구 세력이 교묘하게
음해하고 있다. 그리고 총체적으로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 사람은 무엇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려 했느냐가 중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확실히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려고 하였던 것만큼은 사실
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아무 것도 이룩한 것은 없다. 그리고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도덕적 각서의 문제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도덕적 타락은 장기적으로 경제적 번영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IMF와
신자유주의는 횡포를 통하여 확실히 자각하게 될 것이다.
군사 정권이 자기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이른바 개발독재라는 방식으로 경제 건설을 시도하였고 이와 같
은 방식 하에서 독점재벌체제는 형성되었다. 그러나 독점재벌은 온갖 특혜와 부정비리 속에서 민족경제의
자생적 싹을 짓뭉개 버리고 막상 국제 경쟁력을 기르지 못하였다. 따라서 오늘의 총쳬적 위기는 독점재벌
체제 바로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 우리가 했던 일들은 정당화되었고 해야 할 일들도 명백해 졌
다. 흙의 정신, 향토개척단 정신으로 돌아가 총체적 부정 비리의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희망을 주
는 것이다. 맑은 샘물 줄기가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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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단배경
개척단 창단 및 활동의 회고와 금후의 과제
들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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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4.03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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