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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이다. 이름은 용(瑢), 字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 낭우거사(浪玗居士), 매죽헌(梅竹軒)이다. 문종과 수양대군 세조의 친동생이자, 금성대군의 형이었다.
1428년 (세종 10) 안평대군에 봉해지고, 1430년 여러 왕자들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았다. 평소 안견(安堅), 박팽년 등 당시의 서화가들과 자주 교류를 가졌으며, 詩文에 뛰어났고, 서화에도 매우 능하였다.
글씨는 조맹부체로 활달하고 자연스러우면서 획(劃), 골(骨)이 들어 있으며, 풍류와 문화를 알던 그의 높은 인품이 그대로 반영되는 듯하다. 현존하는 서적(書跡)으로는 경기도 여주의 세종대왕 신도비, 용인의 청천부원군 심온(沈溫)의 묘표(墓表), 과천의 임영대군 구묘표 등이 있다.
주요 활동
문종 시절 조정의 배후에서 실력자로 역할하였으며, 1438년 야인을 토벌하여 황보인, 김종서 등 주요 문신과 친밀하게 지냈다. 인사행정기관인 황표정사(黃標政事)를 장악하여 둘째 형 수양대군과 은연히 맞서 있었다. 황표정사(黃標政事)란 조선전기의 변칙적 인사행정으로서, 1451년(문종 1)을 전후하여 왕자들의 정치적 세력이 강대할 때, 이들이 추천하는 사람의 명단을 적어 왕에게 올리면, 왕은 적임자를 골라 노란색 표시를 하여 임명을 허락하였다.
당시 인사행정은 이조(吏曺)이 소관이었으나,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정권다툼을 벌이자 자기 측근의 사람을 요직에 앉히기 위하여 인사원칙을 무시하고 다투어 벌였던 것으로, 1452년 단종이 즉위한 후, 수양대군은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오고 난 뒤 황표정사를 폐지하였다. 안평대군은 이에 반발하여 황표정사 회복에 주력하였으나, 이듬해 계유정난으로 오히려 죽음을 당하고 만다.
안평대군의 죽음
그러나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꾸며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였을 때 안평대군 역시 반역을 도모했다고 하여 강화도로 귀양을 갔다. 그 후 교동도(喬桐島)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36세를 일기로 사사(賜死)되었다.
이후 그의 아들 의춘군 이우직(宜春君 李友直) 역시 연좌제에 의하여 처형되었고, 아내는관비(官婢)가 되었으며, 아들의 아내이자 며느리인 오대(五臺)와 딸 무심(無心) 등은 권람의 집의 노비로 분배되었다.
안평대군 ... 최고의 컬렉션
그는 팔방미인이었다. 서예로 一家를 이루었으며, 탁월한 학문적 소양과 재주를 바탕으로 당대의 예술계를 주도하였다. 그러한 면모 중에서도 특이한 점은 컬렉터 안평대군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10대 시절부터 書畵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소장하고 있던 책들은 1만여권에 이르렀다.안평대군의 병적인 수집벽은 그가 꾼 무릉도원 꿈 속에 함께 등장할 정도로 막역한 관계이었으나, 결국 그를 배반하고 수양대군편에 섰던 申叔舟가 傳하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도 있을을 것이다.
신숙주는 그의 저서 보한재집(保閑齋集) 14권 화기(畵記)편을 통해 안평대군이 소장하였던 서화 200여점을 소개한다. 만 17세경인 1435년부터 그 글이 쓰여진 만 27세 때인 1445년까지 10여 년간 모은 것만을 정리한 것이다. 畵記에 있는 목록만 하더라도 매우 방대하였고, 국제적이었다.
당시는 세상의 유일한 선진국이 중국이었다. 안평대군은 중국 서화가의 작품들을 東晉에서부터 宋나라, 唐나라, 元나라에 이르기까지 시기별로, 그것도 이름만 들어도 귀가 번쩍 뜨이는 大家의 작품들만 소장하고 있었다. 중국 회화사상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동진의 화가 고개지의 작품을 비롯하여 唐나라의 오도자 왕유, 宋나라의 곽충서, 이공린, 소동파, 곽희 元나라의 조맹부, 선우추 등등 소장품 전체 174점 중 136점이 중국이 서화이었다. 시기상 가까운 원나라 화가의 작품이 가장 많았는데, 개인으로 치면 곽희(郭熙)의 작품이 가장 많았다. 조선 화가로는 안견의 작품이 유일하였는데, 무려 30점이나 갖고 있어 安堅에 대한 그의 애정을 짐작하게 한다.
서예가의 작품도 소동파, 조맹부 등 중국 명필가 작품 일색이다. 그림에 미치지 않았다면 이만한 걸작들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을 터.. 그것도 27세의 젊은이의 방대한 수집이었다. 안평대군 스스로 자신의 그림에 대한 사랑을 병적인 수준이라고 토로한다. 신숙주의 畵記, 첫머리에서 전하는 안평대군의 수집병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런데 안평대군의 마지막 언급이 자신과 소장품의 不吉한 운명을 예언하는 것 같아 섬뜩한 기분이 든다. 서예의 대가 안평대군의 명성은 이 蒐集病이 한 몫하였다. 안평대군의 글씨는 고려 말에 들어온 원나라 말기 학자 조맹부(趙孟부)의 송설체(松雪體 .. 서실 이름 松雪齋에서 따온 것)를 토대로 자신의 서체를 개발한 것이다.
조맹부는 당나라의 안진경 이래로 송나라에서 성행하였던 書風을 배격하고, 왕희지의 글씨로 복귀할 것을 주장했다. 안진경체는 풍만하고 화려한 여인의 느낌을 준다. 반면 300년대 동진 사람인 왕희지의 글씨체는 굳건하고 우아하면서 마른 듯한 남성미의 글씨체이다. 왕희지체를 이어받은 조맹부체는 조선전기 사회 분위기에 딱 맞아 떨어지는 필법이었다. 개국의 젊은 기운이 넘쳐나며 사회기강을 바로잡고, 문물을 정비하려는 시점이라 마르고 강건한 필치는 시대정신과 일치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이 필법을 가장 잘 구사한 이가 바로 안평대군이다,
畵記의 목록을 보면, 안평대군은 조맹부의 작품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 중 그림은 묵죽도 2점뿐이고, 행서가 26점이나 됬다. 조맹부의 진적은 웬만한 양반들도 갖기 어려운 귀한 것인데, 이를 무더기로 갖고 있었으니, 이를 보고 필법을 터득해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중국 황제도 극찬한 안평대군의 글씨
안평대군의 글씨는 중국 황제도 반했다. 세종 32년(1450), 명나라 사신들이 왔을 때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연회를 열었다. 명나라 사신 예겸(猊謙)은 안평대군에게 글씨를 써달라고 졸랐다. 이에 안평대군은 하룻밤 사이에 해서, 행서, 초서 수백장을 써서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중국 사신들은 일필휘지 휘갈리는 솜씨에 놀라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그들은이 때 구해 간 안평대군 글씨를 황제에게 바쳤다. " 참으로 좋도다. 진정으로 이것은 조맹부 서체로다 "황제의 극찬, 어찌 안평대군의 글씨가 명나라의 조야에 알려지지 않겠는가. 이후 안평대군의 글씨는 중국 사신마다 달라고 하는 통에 궁중에서 구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김안로(金安老)가 쓴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남아 있다. 중국에서 온 사신 예겸(예겸)이 신숙주가 들고 있는 책 표지에 "범옹 (泛翁.. 신숙주의 字)"이라고 쓴 안평대군의 글씨를 보고 " 필법이 아주 신묘한데, 누가 쓴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 신숙주가 강희안이 쓴 것이라고 둘러대었다. 예겸의 요청 끝에 강희안의 글씨를 받아 주었더니, 정작 그는 " 같은 사람의 글씨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세조가 이 말을 듣고 " 王孫과 公子는 건전한 문예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니 예술에 있어서 기피할 까닭이 무엇인가 "하고 안평대군을 시켜 글씨를 써서 주도록 하였다. 그 후 조선사람이 중국에서 좋은 글씨를 구하려고 하면 " 당신 나라에 제일 가는 사람이 있는데, 무엇때문에 멀리 아서 글씨를 구입하려 하오"라고 했다. 이것을 보면 예겸이 안평대군의 작품 감정은 물론 그를 중국 최고의 작가로 등장시킨 주인공인 셈이다.
풍류객이자 호쾌한 대장부
안평대군은 詩, 書,畵에 모두 능하여 사람들은 그를 삼절(三絶)이라고 불렀다.그러나 그는 또한 대단한 풍류객이자 호방한 사나이로서의 면모도 보여 주고 있다. 성현(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용재총화)에서는 안평대군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술을 마시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줄 아는 인간적인 면까지 갖추었으니 주변에 사람이 끓을만도 하였다. 연못의 물이 맑으면 물고기가 놀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또 함경도에 六鎭이 설치되자 다른 왕자들과 몸소 야인(野人)을 정벌하러 가기도 했던 그는 대장부이었다. 글씨는 사람을 닮는 법, 안평대군의 글씨체에는 힘이 넘치면서 날렵하고, 아취가 있으면서도 여유가 있는 그의 풍모가 배어난다.
소원화개첩 小苑花開帖 ... 국보 제238호
소원화개첩(小苑花開帖)은 안평대군이 그의 兄 수양대군과의 정권다툼에 말려들어 35세의 젊은 나이에 죽임을 당하기 전에 쓴 작품이다. 그는 시, 글씨, 그림에 모두 능하여 작품을 많이 남겼지만, 죽은 뒤 모두 불태워져 현재 남아있는 작품은 일본에 있는 "몽유도원도"의 발문(跋文)과 소원화개첩(小苑花開帖)뿐이다.
안평대군은 당대 제일가는 서예가로 조선시대 4대 명필로 거론된다. 그는 송설체(松雪體)라고도 불리는 조맹부체의 대가이었으며, 당시 조선의 대표 활자인 경오자(庚午字)의 원본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그는 시문과 글씨, 그림에 모두 뛰어났지만 그가 수양대군에 죽임을 당한 뒤 그의 글씨로 만든 금속활자인 경오자(庚午字)마저 부수어 녹여 버려질 정도로 철저하게 파손되었던 것이다. 수양대군은 更午字를 녹여 새로 을해자(乙亥字)를 만들게 하였다.
소원화개첩은 비단에 행서체로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恩)이 지은 칠언시를 쓴 것으로 글 끝에 낙관과 도장이 찍혀있다. 몽유도원도 발문의 서체에 비해 힘이 약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조선 전기 행서체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웅장하고 활달한 기품이 느껴진다.
소원화개첩은 가로 16.5cm, 세로 26.5cm로 비단 위에 행서체로 쓰여진 것으로 모두 56字가 들어 있다. 원래의 시는 당나라 이상은(李商恩)이 쓴 것이나, 원문과 다른 곳이 몇 군데 있다. 물론 조맹부체의 영향을 받았으나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웅장하고 활달한 기품이 있어 국보 제238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낙관과 도장이 찍혀있어, 안평대군의 진본임이 확실한 국내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그의 유일한 작품으로 귀중한 가치가 있다.
안평대군의 글씨
우리나라 역대 최고의 명필 중에 안평대군을 빼놓을 수 없다. 안타까운 것은 안평대군의 친필을 쉽게 접할 수없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안평대군의 진품으로 확인된 것은 국보 제238호 " 소원화개첩 (小苑花開帖) "이 유일하다. 하지만 이마저도 1987년 분실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 공식적으로 안평대군의 진품으로 감정된 작품은 한 점도 없는 셈이다. 안평대군의 우아한 서체를 감상하기위해서는 일본까지 가야 한다. 일본 천리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몽유도원도"의 발문이 그것이다.
위의 묘갈(墓碣)은 세종임금의 장인 심온의 묘이다. 즉 안평대군의 외할아버지이다. 수양대군은 왕권을 탈취한 다음, 역모의 죄로 죽임을 당한 안평대군의 글씨를 모두 없앴지만, 차마 외할아버지의 묘갈만은 어찌 할 수 없었다.
만리관산계영추 萬里關山桂影秋 만리 관산에 계수나무 그림자 드리운 가을
하인횡옥의고루 何人橫玉倚高樓 누가 높은 누각에 기대어 옥피리를 부는가
일성취입광한전 一聲吹入廣寒殿 그 소리 은하수 끝까지 퍼져가니
자유지음재상두 自有知音在上頭 아 ! 저기 내 친구가 있구나
가을의 고독이 생생한 이 작품(위 사진)은 쪽물을 들인 종이에 금니(金泥 .. 금박가루를 아교에 갠 것으로 왕실이나 사찰에서 寫經을 할 때 애용한 재료)로 썼다. 전체적으로 유려한 필치에 법도에 충실한 모습이나, 둘째 줄의 "하(何)"자는 파격적인 결구를 취하고 있다. 人 변은 길게 긋고 오른쪽 방은 한참 밑에다가 자리를 앉힌 독특한 자세이지만 조금도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전체와 잘 어울리는 멋들어진 모습에 눈이 시원하다.박팽년은 안평대군의 글씨를 두고 " 꽃 같이 아름다운 글자 자태가 무궁하고 (美質揷花無盡態), 햇살 같은 신채 기이함도 가지가지 (神光射日更多奇) "라고 노래하며 인상적인 평가를 내렸다.
짓밟힌 안평대군 태실(胎室)
태실(胎室)은 왕실에서 아이가 탄생하면, 전국의 吉地를 골라 태실을 만들어 태(胎)를 보관하는 태무덤이다. 경북 성주에서 김천으로 향하는 길에 유난히도 자녀가 많았던 세종대왕의 18왕자, 胎가 묻혀 있다.
뒷줄에는 소헌왕후(昭憲王后) 沈氏의 적자(嫡子)인 大君 7명이, 앞줄에는 빈국의 소생인 君 11명의 태실이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세종의 왕위를 이어받은 文宗의 태실은 없고, 세손인 단종의 태실이 모셔졌다는 것이다.
세종대왕 왕자태실에서는 수양대군 세조의 왕위찬탈의 역사를 고스란히 짚어 볼 수 있다. 문종의 짧은 치세와 죽음 그리고 어린 단종의 즉위는 수양대군에게 왕위찬탈의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결국 수양대군은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시작으로 왕위를 찬탈하기에 이른다.
계유정난을 통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아울러 숙적이자 자신의 친동생인 안평대군마저도 강화도로 유배를 보내 결국 사사(賜死)시키게 된다. 이후 단종 복위운동이 일어났지만, 거사 직전 들통나 실패로 돌아가고, 단종은 결국 영월로 유배된다. 이후 세조의 형제인 금성대군(金城大君)이 또 한번 단종복위운동을 일으키려 하였지만 또 다시 좌절되고 죽임을 당하게 된다. 또한 어린 단종에게 젖을 먹이고 동정했다는 이유로 혜빈 양씨의 소생인 한남군과 영풍군, 영빈 강씨의 소생인 화의군도 죽임을 당하게 된다.
훼손된 안평대군의 태비(胎碑)
세종대왕 왕자태실 가운데 태실이 훼손되었거나, 태비(胎碑)가 없는 안평대군,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은 바로 세조의 왕위찬탈에 대한 반동의 대가를 받게 된 것이다. 왕위와 권력에 대한욕심은 피를 나눈 형제끼리 물불을 가리지 않게 하니, 그 욕심이 가져다 주는 두려움은 이루 말 할 수없는 것이다.
세종의 世孫인 조선 6대 임금이었던 단종의 태실도 이곳에 있다. 왕자가 아닌 세손의 태실이 왜 이 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나이에 숙부로부터 왕위를 빼앗긴 설움을 간직한 듯 세종의 왕자 7기의 태실보다 한칸 뒤로 밀려나 구석에 외로이 자리잡고 있다.
온전한 수양대군의 태실
태실 胎室
태봉(胎封)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태실도감(胎室都監)을설치하여 이 일을 맡게 하였다. 왕실에에서 아이가 출생하면, 태는 깨끗하게 씻은 후 항아리에 봉안하고 기름종이와 파란 명주로 봉했다. 붉은 색 끈으로 밀봉한 다음, 항아리를 큰항아리에 담았다.
이렇게 두 개의 항아리에 태를 보관하였다. 항아리에 보관된 태는 태봉지(胎封地)를 선정하여 묻는다. 이것을 안태(安胎)라고 한다. 태봉지가 정해지면 궁에선느 태봉출(胎奉出) 의식을 행하고, 안태사 행렬이 태봉지로 출발하였다. 안태사 일행이 태봉지에 도착하면, 그곳의 지방관들은 태를 봉안하는 의식이 끝날 때까지 지원하였다.
왕세자의 태실은 석실을 만들고 비석과 금표(禁標)를 세웠다가 국왕으로 즉위하면 태실을 가봉(假封)하였다. 국왕의 태실은 8명의 수호군사를 두어 관리하였으며, 태실 주변은 금표(禁標)로 접근을 제한하였다. 胎峰, 胎山, 胎封址 등의 명칭이 있는지명은 이곳에 태실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태실의 설치는 군현(郡縣)의 승격, 위상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었고, 영역 확대 등의 특혜가 주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므로 태실을 자기 지방으로 유치하고자 지역 간에 분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태조 이성계의 태실
안평대군의 취미 .. 비해당(匪懈堂) 그리고 담담정(淡淡亭)
안평대군이 주택이나 별장을 아름답게 꾸미고 완상하던 취미는 그가 역적으로 몰려 처형된 뒤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고, 수양대군 측이 그를 모반의 첫번째 이유로 그의 별장을 거론하였으며, 성종 때에는 호화주택과 별장을 금지하라는 명령까지 내릴 정도이었다.
안평대군이 결혼하면서, 경복궁에서 살림을 내어 나간 뒤에 인왕산에 저택을 짓기 시작하였다. 1442년 6월 어느 날 경복궁에 들어가자 아버지 世宗이 안평대군에게 물었다. " 네 堂號가 무엇이냐? " 안평대군이 대답을 못하자, 세종이 詩經에서 증민(蒸民)편을 읽어 주었다.
지엄하신 임금의 명령을 / 중산보가 받들어 행하고 / 나라 정치의 잘되고 안됨은 / 중산보가 가려 밝히네 / 밝고도 어질게 자기 몸을 보전하며 /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 게으름 없이 임금 한 분만을 섬기네
위 詩는 노나라 헌왕(獻王)이 둘째 아들인 중산보(仲山甫)가 주나라 선왕(鮮王)의 명령을 받고 제나라로 성을 쌓으러 떠날 때에 윤길보(尹吉甫)가 전송하며 지어준 것이다.
비해당 匪懈堂
비해당은 안평대군이 살던 집의 堂號이기도 하고 그의 호(號)이기도 하다. 世宗이 부지런히 공부해서 타고난 재주를 충분히 펴라는 의미에서 내려준 호다. 당호 安平이 안일하고 안이하다는 의미라 게으르지 않은, 즉 부지런하다는 의미의 비해(아닐 匪, 게으를 懈)로 바꾸도록 한 것이다. 이는 후세의 헤석일 뿐, 世宗의 眞意는 다음과 같다.
위에 적은 詩의 마지막 구절 원문은 "숙야비해 이사일인(夙夜匪懈 以事一人)"인데, 세종이 여기서 두 글자를 인용하여 " 편액을 비해(匪懈)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재주가 뛰어난 안평대군이 長子가 아니었기에, 자신이 왕위에 있는 동안은 물론, 동궁이 즉위한 후에도 "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으름 없이 임금 한 분만을 섬기라"는 당부를 "비해(匪懈 .. 게으름없이)" 두 글자에 담아 집의 이름으로 내려준 것이다.
인왕산 기슭 수성동에 비해당을 지은 뒤에 안평대군은 집 안팎의 아름다운 꽃과 나무, 연못과 바위 등에서 48景을 찾아냈다. 중국에서 소상팔경(溯湘八景)을 그림으로 그리고 詩를 짓는 문인들의 관습이 유행하자 조선에서도 그런 풍조가 생기게 되었다.
안평대군은 무려 48가지의 아름다운 경치를 찾아냈다. 48경은 다양한 장소와 시간에 따라 " 매화 핀 창가에 흰 달빛(梅窓素月)" 또는 "대나무 길에 맑은 바람(竹徑淸風)" 등의 네 글자로 명명되었다. 누군가가 그림을 먼저 그리고 안평대군이 칠언 화제시를 지었다. 그리고 당대의 문인학자들을 인왕산 기슭 비해당으로 초청하여 48경을 함께 즐기며 차운시를 짓게 하였다.
담담정 潭淡亭
안평대군은 한강가에도 담담정(淡淡亭)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동국여지비고"에는 담담정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 마포 북쪽 기슭에 있다. 안평대군이 지은 것인데, 서적 1만권을 저장하고 선비들을 불러모아 12景 시문을 지었으며, 48詠을 지었다. 신숙주의 별장이다 "
안평대군은 서적만 1만권을 소장한 것이 아니라, 수 많은 서화,골동품을 수집하였다. 신숙주가 1445년에 쓴 "畵記"를 보면 안견의 그림 30점, 일본 畵僧 철관(鐵關)의 그림 4점, 그리고 송나라와 원나라의 명품 188점을 소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곽희(郭熙)의 그림이 17점이나 되는데, 이 그림들은 안견(安堅)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수양대군은 정권을 잡은 뒤 안평대군에 사약을 내려 죽이고, 이 정자를 빼앗아 신숙주에게 주었다.
흥룡지지(興龍之地)의 무계정사는 안평대군의 별장이며, 창의문(彰義門) 밖 무계동(武溪洞)에 있었다. 무계정사는 자하문고개를 넘어 부암동사무소를 끼고 돌아 올라가면 오른쪽 언덕 위에 위치해 있고,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카다란 바위 앞면 윗 부분 가운데에 안평대군의 글씨로 알려진 "무계동(武溪洞)"이라는 글씨가 옆으로 음각되어 있다.
안평대군은 몽유도원도의 계기가 되었던, 꿈 속에 거닐던 복사꽃 동산을 인왕산 기슭에서 실제로 찾아 별장을 지었다. 안평대군과 사육신의 문장들은 상당수 없어졌는데, 다행히 박팽년(朴彭年)이 그 별장에서 지은 詩 아래에 안평대군의 글이 덧붙여 있어, 그가 별장을 지은 사연을 알 수 있다.
"나는 정묘년(1447년) 4월에 무릉도원을 꿈 꾼 일이 있다. 그러다가 지난해 9월 우연히 유람을 하던 중에 국화꽃이 물에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칡넝쿨과 바위를 더위잡아 올라 비로소 이곳을 얻게 되었다. 이에 꿈에서 본 것과 비교해 보니 초목이 둘쭉날쭉한 모양과 샘물과 시내의 그윽한 형태가 거의 비슷하였다.
그리하여 올해 들어 두어칸으로 집을 짓고, 무릉계(武陵溪)라는 뜻에 취하여 무계정사(武溪精舍)라는 편액을 내걸었으니, 실로 마음을 즐겁게 하고 은자들을 깃들게 하는 땅이다. 이에 잡언시 5편을 지어 뒷날 이곳에 찾아오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비하고자 한다 "
무계정사(武溪精舍)라는 집의 이름은 글자 그대로 " 무릉계에 자리잡은 정사"라는 뜻인데, 한시 5수 끝에 "경태(景泰) 2년 신미"라고 쓰여있어 1451년에 이 별장을 지었음을 알 수있다. 지금의 종로구 수성동에 있던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의 본래 살림집)에서 인왕산 기슭을 넘어 무계정사까지는 가는 길이 그다지 멀지 않다. 그는 꿈 속에 노닐던 곳이라고 하며 이곳에 별장을 지어 문인학자들을 초청하고 詩를 읊거나 활을 쏘며 놀았다.
무계정사는 몽유도원도 속 隱者的인 풍경과는 달리 활기가 넘쳤다.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박팽년, 성삼문, 신숙주, 이개, 최항 등 젊은 집현전 학사들이 이곳 詩會의 주요 멤버이었다. 수양대군과의 정권 경쟁에서 그를 지지해 주었던 훈구대신 김종서, 황보인 그리고 참모 역할을 수행하였던 풍수지리가 이현노 등이 수시로 드나 들었다.
결국 무계정사는 안평대군이 당대 최고 문인들과 문학과 예술을 논하며 풍류를 즐겼던 예술적 공간이자, 형 수양대군과의 건곤일척 권력투쟁을 벌였던 정치적 무대이었던 것이다.
무계정사의 철거
하지만 단종실록 원년 5월19일 기록에는 이곳을 "방룡소흥지지(蒡龍所興之地)"라고 하며, 안평대군을 비난하였다. 왕기가 서린 곳인데, 長子가 아닌 왕자가 왕위에 오를 곳이란 의미이다. 계유정난 직전에도 수양대군파에서는 안평대군이 무계정사를 지은 뜻은 왕권탈취에 있다고 여긴 것이다.
실제로 계유정난이 성공한 뒤인 10월12일에는 "처음부터 지을 장소가 아니었으니, 무계정사를 철거하라"고 사간원(司諫院)에서 아뢰었으며, 10월25일 의정부에서 안평대군을 처형하자고 아뢴 죄목가운데 첫번째가 바로 이 자리에 무계정사를 지었다는 점이었다.
무계정사는 곧 무너지고, 지금은 안평대군의 예언 그대로 그림만 千年을 넘어 전하고 있다.
자하문 터널 위 부암동사무소 뒷길을 따라 올라가다 돌계단을 오르면 무계동(武溪洞)이라고 새긴 바위가 나타나고 그 뒤에 정면 4칸, 측면 1칸반의 오래된 건물이 서 있다. 주소로는 종로구 부암동 329-1번지. 안평대군이 주택이나 별장을 아름답게 꾸미고 완상하던 취미는 그가 역적으로 몰려 처형된 뒤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성종 때에는 호화주택과 별장을 금지하라는 명령까지 내릴 정도가 되었다.
안평대군 무계정사에서 역모의 꿈을 !!!
안평대군은 1452년 단종 즉위 후 이징옥(李澄玉) 등을 시켜 함경도 경성(鏡城)의 무기들을 한성으로 옮기고 이곳 무계정사에서 장사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하며 무력 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失權하였고, 이듬해 계유정란으로 김종서 등을 죽일 때 역모로 몰려서 강화도로 유배갔다가 교동(喬洞)으로 옮겨져 죽음을 당했다.
안평대군과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도화(桃花.. 복사꽃)는 미인의 상징이었다. 詩經의 "도지요요작작기화(桃之夭夭 灼灼其華)"로부터 도요(桃夭)는 여자가 혼기가 된 것을 뜻하게 되었다. 중국 晉나라의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는, 무릉(武陵)의 어부가 고기를 잡으러 강을 따라 올라가다가 복사꽃 숲을 만나게 되자 경치에 취하여 끝까지 갔다가, 이 세상과는 다른 마을을 발견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로부터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는말이 생겼다.
이 그림 몽유도원도는 1893년 이전 일본으로 반출된 것으로 보는 것이 다수 의견이다. 이 그림을 1893년 이전에 "수입"하였다는 물표가 소장경위의 결정적 근거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그후 일본에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다음, 1950년대 초반에 천리대(千里大)가 구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그리고 일본에서는 이 그림을 자기 나라의 國寶로 지정하고 있다.
안평대군의 꿈
1447년 4월20일 밤에 안평대군이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朴彭年)과 함께 봉우리가 우뚝한 산 아래를 거닐다가, 수 십그루 복사꽃이 흐드러진 오솔길로 들어섰다.
숲 밖에서 여러 갈래로 갈리며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랐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나타나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휘어져 골짜기에 들어서면 도원(桃源)입니다'하고 일러 주었다. 말을 채찍질하며 몇 굽이 시냇물을 따라 벼랑길을 돌아가자 신선마을이 나타났다. 그러자 첩첩산중에 구름과 안개가 서려 있고, 복숭아나무 숲에는 햇빛이 비쳐 노을이 일고 있었다.또 대나무 숲에 있는 집은 사립문이 반쯤 열렸는데, 사람도 가축도 없었다. 냇가에 빈 배만이 물결에 따라 흔들리는 매우 쓸쓸한 곳이었다.
안평대군이 박팽년에게 "여기가 바로 도원동이구나."하고 감탄하며, 마침 함께 하던 최항(崔恒)과 신숙주(申叔舟)도 詩를 지으며 내려왔고, 그러다가 안평대군은 꿈에서 깨어났다. 복사꽃이 우거진 낙원에 다녀온 이야기를 도연명(陶淵明)이 "도화원기(桃花源記)"라는 글로 소개한 뒤에, 무릉도원은 중국과 조선 문인들에게 이상향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안평대군은 꿈에서 처음 가본 곳이지만 그곳이 바로 무릉도원임을 깨닫고, 화가 안견(안견)에게 꿈 이야기를 하며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안견이 사흘 만에 그려 바친 그림이 바로 일본 천리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이다.
안평대군이 꿈이야기를 적은 몽유도원도의 발문(跋文)
몽유도원도의 무릉도원 부분
몽유도원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왼편으로부터 보면 현실세계의 일상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가운데 부분에는 깎아지른 절벽과 무릉도원으로 가는 동굴 등 험난한 길이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오른쪽에 복숭아꽃이 활짝 피어있는 무릉도원이 나타난다.
몽유도원도 부분 상세도
안평대군과 안견(安堅)
계유정난(癸酉靖難) 이후, 안평대군은 강화도 교동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는데,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安堅)만은 살아남은 일화가 백호전서(白湖全書)에 전하고 있다. 안견은 충남서산의 지곡(지곡) 사람으로 안평대군의 총애를 받으며 산수화를 열심히 그렸다. 안평대군은 특히 안견을 좋아하여 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할 정도이었다.
그 와중에 안견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려는 기운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목숨을 건지고자 안평대군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안평대군은 안견을 끈질기게 곁에다 두고 싶어했다. 생각다 못한 안견은 꾀를 내었다.중국에서 용매묵(龍煤墨)을 구해 오자, 안평대군은 안견을 불러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안견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다. 잠시 안채로 들어갔다가 돌아 온 안평대군은 깜짝 놀랐다. 귀하게 여기던 용매북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안평대군은 즉시 종과 여종을 꾸짖었다.
그러자 그들은 한사코 모른다고 하며 안견에게 혐의를 돌렸다. 그러자 안견은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해 보이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용매묵이 그의 품 속에서 떨어져 나왔다. 화가 난 안평대군은 안견을 내쫓고는 다시는 출입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안견은 아무 말도 안 하고 물러나왔다. 그리고 얼마 되지않아 계유정난(1453년)이 일어나고,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킨 다음 사약을 내려 죽였다.
또 그 집을 드나들던 사람들도 모두 모반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했다. 하지만 안견만이 禍를 모면한다. 그러자 비로소 사람들이 안견의 예지를 감탄하였다. 어떤 사람은 덕을 품고서도 더러운 행실을 저질러 화를 면했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높은 식견과 멀리 보는 안목으로 세상을 살았다고 평하였다.
도연명의 무릉도원기
진나라 태원(太元) 연간(376~396)에 무릉(武陵)에 고기잡이를하는 사람이 살았다. 어느 날 시내를 따라 배를 타고 가다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갑자기 복사꽃숲을 만나게 되었다. 냇물 양편 기슭은 수백 보에 걸쳐 복숭아나무 이외에는 잡나무가 일체 없고, 향기로운 풀들만이 산뜻하고 아름다우며 떨어지는 꽃잎들이 펄펄 날리고 있었다.
그 어부가 매우 이상하게 여기며 복사꽃 숲이 끝나는 곳까지 가 보았다. 숲이 끝나는 곳에 물이 흐르고 산 하나가 나타났다. 그 산에는 조그마한 굴이 있는데, 그 뒤에서 빛이 비치는듯 하였다. 어부는 곧 배를 버리고 굴을 따라 들어갔는데, 처음에는 아주 좁아서 사람이 겨우 들어 갈 수 있을 정도이었으나, 수십 보를 가니 확 뚫리며 밝아졌다.
땅은 평평하고 넓으며, 집들이 또렷하고 좋은 밭과 예쁜 연못, 줄지은 뽕나무와 대나무 등이 있었다. 길은 사방으로 뚫려있고, 닭이 울고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곳에서 왔다갔다 하며 씨 뿌리고 농사짓는 남녀의 옷모양새는 모두 다른 세상 사람들 같았는데, 노인이나 아이나 모두 기쁙고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사람들이 어부를 보고 놀라며 어디서 왔는가를 묻자, 어부가 사실대로 대답하였더니 집으로 데려가서 술을 내고 닭을 잡아 음식을 대접하였다. 온 마을사람들이 어부가 왔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왓는데, 그들 스스로 말하기를. " 옛 조상들이 진나라 때의 난리를 피하여 처자와 마을사람들을 이끌고 이 절경에 와서는 다시 나가지 않았소. 그래서 결국 바깥세상 사람들과는 영영 멀어진 것입니다. ' 하면서 " 요즈음은 어떤 세상이요?"하고 물었다. 한나라가 있었던 것도 모르니 위진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부가 일일이 들은바를 말하니 모두들 놀라고 탄식하였다.
그 후 다른 사람들도 각각 자기 집으로 청해 술과 음식을 대접하였다. 이렇게 며칠을 머물렀다 떠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깥 사람들에게는 얘기하지 마시오"하였다. 그러나 어부는 밖으로 나와 찾아온 길을 되짚어가면서 곳곳에 표시를 해두었다.
郡에 이르러 태수를 뵙고 이같은 사실을 말하였다. 태수는 사람들을 보내 표시를 찾도록 했지만 끝내 그 길을 다시 찾을 수는 없었다. 남양에 사는 유자기라는 사람은 고상한 선비이다. 이 얘기를 듣고 기꺼이 도원을 찾아보고자 했으나 이루지못한채 얼마 안되어 병으로 죽었다. 그 뒤로는 그곳으로 가는 길을 묻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안평대군의 장인 ... 정연(鄭淵)의 묘==경기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산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