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하회마을 안에 있는 '옥류정'이라는 식당으로 갔다.
필자가 미리 예약을 해두어 시간절약이 되었다. 단체로 '안동헛제사밥'이 미리 차려져
있었다. 식사후 본격적인 하회마을 구경이 시작되었다. 1.3km의 출입도로를 걸어서
마을입구까지 갔다. 논에는 참새를 쫓기위해 허수아비가 늘어서 있고 초가지붕 위에는
큼직한 박이 메달려 있었다. 그리고 잎이 진 감나무에는 빨갛게 익은 감이 주렁주렁
탐스럽게 달려 있다.
박이 얹힌 초가
정승들이 입구를 지킨다.
허수아비가 참새를 지키고-
하회마을 안내도
탈방
고택
하회(河回)마을
하회마을은 낙동강이 'S'자를 이루며 굽이치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민속마을이다.
'하회(河回)'라는 마을 이름도 물이 돈다는 뜻이며, 우리말로는 '물도리동'이라 한다.
하회마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민속마을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외에도 하회마을
은 '하회별신굿' 등의 전통탈놀이가 만들어진 곳이고, 또 서애 류성룡 등을 배출한 풍산
류씨의 집성촌이라는 점,그리고 옛 모습이 잘 보존되어 국보급 가옥들이 즐비하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 하회마을은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봉정
사와 함께 이곳 하회마을을 들러 더욱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하회마을은 서애 류성룡을 위시한 많은 학자를 배출시킨 양반골이다. 집집마다 문화재
로 지정된 곳에는 설명문이 있어 전체를 다 돌아보는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
이곳 하회마을은 물(水),들(野),산(山)이 함께하는 살기좋은 고장이다. 고려말엽 김해허
씨와 안씨가 집단마을을 이루며 살았는데 이사를 가고 류씨만 거주하게 되었다.
류운룡은 시조에서 14대의 종손이며 류성룡은 시손인데 모두 문중의 거봉이어서 이 두
계손들을 경암파, 서애파로 부르기도 한다.
그의 부친 류중영(仲郢,호:立巖,정주목사,황해도 관찰사,승지,예조참의,경영관 역임)은
두아들 류운룡(雲龍)과 류성룡(成龍)을 두었다.
형 운룡의 호는 겸암(謙菴)으로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릴 때부터 총명해
모든 경사(經史)를 통독함으로써 사문의 촉망을 받았다. 진보,인동 현감을 지냈다. 효심
이 대단하여 임란때도 어머니와 가족을 지켰다. 겸암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유림들
이 화천서원을 건립하였다.
서애(西涯) 류성룡(柳成龍)
서애 류성룡은 퇴계학파(영남학파)로 남인의 거두이다. 온건파 학자로, 북인으로 강경
파인 이산해와 정적인 셈이다. 재야에 묻혀 학문연마만 하는 기호학파 남명 조식 등과
함께 학문에서도 최고봉을 이루고 정치도 뛰어나 임진왜란시 영의정으로 선조를 보필
하고 나라를 구한 명재상이다. 인재등용에 뛰어나 권률,이순신을 발굴 등용하였다.
이순신이 순직하는 날 유성룡은 59세 나이에 파직당하였다.
낙향하여 글쓰기와 후학에 힘썼다. 초가삼간에서 7년동안 징비록 등 12권의 저서를
남겼으나 그중 4권만 남아 있고 임진왜란 회고록인 '징비록'은 임란의 고증책으로 유
명하다. 하회마을에는 형 운룡과 아우 성룡의 정자가 각각 2개씩 있다.
하회마을 안내도 순서에 따라 골목길을 걸어가면서 삼신당(參神堂),양진당,충효당,영모
각,담연제,원지정사,연좌루 등을 둘러 보았다. 그리고 엘리자베쓰여왕이 73회 생신을
이곳에서 치루었는데 생일잔치상 사진이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삼신당(參神堂)
삼신당은 마을의 신이 깃들어 있는 곳으로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의 안녕을 비는
동제(洞祭)가 이루어지며 하회별신굿 탈놀이의 춤판이 가장 먼저 행해지는 곳이다.
때때로 마을주민들은 이곳에서 아기잉태의 소원을 비는 곳이기도 하다.
이 느티나무는 풍산류씨 입향(入鄕)시조인 공조전서 류종혜공이 하회마을에 들어올 때
심었다고 전해지며 수령은 약 600여년으로 추정된다. 나무둘레에 쳐진 줄에는 수많은
소원들이 꽂혀 있다.
수령 600년의 보호수 느티나무는 삼신당으로 소원을 기원하는 장소로 많은 관광객을 모은다.
내 소원은 무엇인가?
빈틈없이 줄에 메달려 있는 수많은 소원들
일행들도 나무그늘에서 잠시 휴식
코를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다 닳아 납작해졌다.
무병장수 등 각기 소원을 쓰고 있다.
하늘 높이 감나무가 감을 메달고 있다.
양진당(養眞堂)/보물 306호
겸암 류운룡(1539 - 1601) 선생이 살았던 풍산류씨의 대종택이다. 부친 입암(立巖) 류
중영의 호를 빌어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당호인 양진당은 겸암
선생의 6대손인 류영의 호를 따랐다.
충효당과 함께 하회를 대표하는 이 집은 건축의 수법과 양식, 그리고 건물의 배치 등이
조선조 초, 중기 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자좌오향, 정남의 99칸 집이었으나 53
칸이 남아있다. 현재 전면 대보수공사 중이다.
양진당이 대보수공사에 들어갔다.
충효당(忠孝堂)
충효당은 서애 류성룡 선생의 종가이다. 평생을 청백하게 지내신 선생이 삼간 초려에서
별세한 후 문하생과 사림이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여 졸재 원지공을 도와 창건하였으며,
그 후 증손 익찬 선하공이 확장,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충효당(忠孝堂)은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충효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던 西厓의 유
언에서 따온 당호(堂號)이다.
조선시대 중기의 대표적인 사대부 집으로 현재 52칸이 남아있으며 전서체의 충효당 현
판은 당대의 명필인 미수 허목 공의 친필이다.
서쪽을 앞면으로 긴 행랑채를 두고 안쪽으로 ㅁ자 모양의 안채와 一자형의 사랑채가
연이어 있다. 사랑채는 남자주인이 생활하면서 손님들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왼쪽에서
부터 사랑방, 대청마루, 방,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안주인이 생활하면서 집안
살림을 돌보던 공간으로 동북쪽에 부엌을 두고 ㄱ자로 꺾여서 안방, 대청, 건넌방이 있
다. 또한 건넌방 앞에는 마루와 2칸의 온돌방, 부엌이 있으며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충효당에는 현재 서애 14대손 유영하(柳寧夏)옹이 살고 있으며 문패가 붙어 있다.
안채에는 종부(91세)와 차종부(75세)가 거주하고 있다. 작년에 기회가 있어 차종부와
얘기를 나눈 기억이 있다. 차종부는 경주 최부자의 따님으로 가난한 양반댁에 와서
고생한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범상할 정도로 기품이 있고 귀태가 나는 여인이었다.
조용조용한 그의 언동에서 압도하는 그 무엇이 느껴졌다. 몇년 전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 집을 방문 했을 때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여왕을 위해 마루디딤돌을 놓았다고 한다.
신발을 벗지않는 영국의 관례를 깨고 신고있던 구두를 벗고 마루로 올라 왔다는 점에
서 여왕의 한국의 문화예절을 기꺼이 받아들인 장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충효당
충효당에 대해 설명
충효당은 보물 414호. 선생을 흠모하든 유림의 힘으로 지어졌다.
안채
1999년 4월21일 영국 엘리자배스여왕을 위해 설치한 계단마루
올해 75세의 차종부 최여사(경주 최부자집 따님이다)
<추신: 서애 류성용 종택에 사시던 13대종부 박필술여사(91세)께서 10월22일 노환으로 운명하셨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위 사진에 나오는 최여사는 14대 종부가 되십니다>
영모각(永慕閣)
충효당 사랑채를 돌아 뒷마당으로 가면 서애와 관련된 유물이 전시된 영모각이 있다.
단아한 기와집의 뒤뜰에 단을 높인 시멘트 건물이다. 1966년에 건립하였고 당호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글씨체가 돋보이나,가로로 쓴 것이 흠이다. 영모각 안에는 풍산류
씨가에 전해내려오는 귀중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서애가 임진왜란 때 일을 기록한 '징비록(懲毖錄 국보 제 152호)'이 있으며 그밖에 진사
록,군문등록,침구요결,관화록 등 문서 19권이 보물 제160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다.
또 서애가 생시에 쓰던 갑주,가죽신,갓끈 등도 보물 제460호로 지정되어 전시되고 있다
영모각 입구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
서애의 생전모습
류성룡의 영의정 임명교지/홍문관,예문관,춘추관 관상감사 및 세자스승을 겸직
담연제(澹然齊)
한류스타 탈렌트 풍산류씨 13대손 류시원(柳時元)의 생가로 창덕궁을 복원한 인
간문화재 도편수 신응수 선생이 건축한 전통 가옥이다.
담연재는1999년 한국을 방문한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곳에서 73번째 생일상
을 받고 하회별신굿 탈놀이를 관람해 세계적인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류스타 류시원(13대손)의 문패가 붙어있다.
담연재 담구멍에 손을 넣어보세요 -객손들을 위한 배려(필요한 용전을 빼쓰도록 했다고 한다)
원지정사(遠志精舍)와 연좌루(燕坐樓)
원지정사는 조선 선조6년(1573)에 서애 류성룡이 옥당 홍문관 재직중 부친상을 당하고
고향에 내려와 지내면서 세운 정사이다. 정조 5년(1781)에 다시 연좌루를 지었으며
1979년에 전체를 보수하고 사주문을 신축하였다. 현판글씨는 일성(一聲) 권응룡이 썼
다. 연좌루 는 사방을 개방하여 난간을 설치하였고 앞쪽으로는 부용대의 아름다운 경치
를 볼 수 있다. 원지정사 앞에 400년된 보호수 소나무가 서 있다.
원지정사
원지정사를 설명하고 있다.
원지정사에서
연좌루
400년 수령의 보호수 소나무
연좌루에서 바라본 부용대
원지정사에서 나와 입구쪽으로 걸어가다 엘리자베스 영국여왕 방문기념관에 들렀다.
여왕이 다녀간 이후로 하회마을은 국제적인 관광명소가 되었다.
기념관 안에는 하회마을 방문시 여왕의 73세 생일상을 비롯해 여왕의 거취를 볼 수 있
는 각종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생일상
돌탑에 돌을 얹고 있다.
기왓장에 싸인을 남겼다.
방명록에 '조용한 산사 봉정사에서 한국의 봄을 맞다'로 서명
하회마을 방문당시의 환영객들
병산서원을 향해
병산서원(倂山書院)-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건축,한국건축사의 백미
입구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타고 병산서원으로 갔다. 하회마을에서 6km의 거리이다.
병산서원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교적 건축물로서, 류성룡(柳成龍)과 그의 셋째아들
류진(柳袗)을 배향한 서원이다.류성룡(柳成龍)선생이 살아계실 때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류성룡 선생의 문집을 비롯해 각종 문헌 1000여종 3000여책이 소장 되어 있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선생의 제자들과 유림이 뜻을 같이 하여, 서원 안에 사당(존덕사)
을 세우고 위패를 모셔서 선생의 학덕을 이어받고 추모하며 향사(제사)를 올리던 서
원이다. 이 제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고려 때, 안동의 풍산현에 풍악서당이 있어 지방 유림의 자제들이 모여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후 고려말, 공민왕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왕의 행차가 풍산을 지날무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