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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康津) - 유배지로 손꼽혔으나 실상 그곳은 더없이 편안한 나루
전라남도 서남부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은 장흥군, 서쪽은 해남군, 남쪽은 강진만, 북쪽은 영암군과 접하고 있다. 주생업은 농업이지만 내륙 깊숙이 파고들어 온 강진만은 풍파가 없어 좋은 어업 근거지를 이루고 있다. 연안에는 염전과 양식업이 발달하여 이곳 경제에 곧 도움을 주고, 특히 도자기 제조는 예로부터 유명하다
강진 문화관광 http://tour.gangjin.go.kr/tour/
무위사[無爲寺]
영상포엠 한국 100경
http://www.ktv.go.kr/common/popup/vodplayer.jsp?cid=377745
하멜기념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052&aid=0000173566
강진 고려청자 요지(康津 高麗靑瓷 窯址)
고려시대 집단적으로 청자를 생산했던 곳으로 이곳 강진과 부안 등을 들 수 있으나, 전국적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400여기의 옛 가마터 중 대부분이 이곳 강진에 분포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사당리는 제작기술이 최절정을 이룬 시기에 청자를 생산하였던 지역으로, 우리나라의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청자의 80%이상이 이곳에서 생산되었을 정도로 그 기법의 천재성과 예술적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왔으며, 프랑스 루부르 박물관에도 보관되어 있다. 또한, 강진은 다른 지방에 비해 태토, 연료, 해운, 기후 등 여건이 적합하여 우리나라 청자 문화를 주도해 왔다.
강진청자축제 http://www.gangjinfes.or.kr/
청자문화의 맥을 잇고 고려청자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한 축제이다. 고려청자는 당시 청자문화를 주도했던 중국에서도 그 아름다움을 극찬하여 고려청자를 천하명물 중에 으뜸으로 삼았다.
강진 청자 박물관[康津靑瓷博物館]
도자기(陶瓷器, Porcelain)는 흙을 빚어 높은 온도의 불에서 구워낸 그릇이나 장식물을 말한다. 크게 1,300℃이하의 온도에서 구운 도기(陶器)와 1,300∼1,500℃에서 구운 자기(瓷器)로 나눌 수 있으며, 도기와 자기를 통들어 도자기라고 한다.
청자를 처음 만들기 시작한 것은 중국 사람들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옥이 군자를 상징하며 부귀와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옥을 무척 좋아했지만 옥은 너무 비싸고 귀한 물건이어서 아무나 지닐 수 있는 게 아니었죠. 그래서 흙을 이용해서 옥과 비슷하게 만들려고 노력을 하다 보니 청자를 만들게 되었다고도 합니다.
고려청자(高麗靑瓷) 는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푸른빛의 자기를 통틀어 이르는 말. 세계적인 명품으로, 고려 초기에는 비색(엷은 청색)이 가장 아름답고 조형감각이 특히 뛰어난 '순청자(純靑磁 순수청자 그림이나 장식이 전혀 없는 청자)'가, 중기에는 세계 초유의 '상감청자(象嵌靑磁)'가, 그리고 후기에는 순청자(純靑瓷)에 철과 산소의 화합물인 산화철(녹슨철) 안료로 문양을 나타낸 청자인 회청자(繪靑磁-철화청자(鐵畵靑瓷))가 유행하였다.
철화란 산화철(FeO) 혹은 제이산화철(Fe2O3)을 주 안료(顔料)로 하고 점토와 유약 등의 보조제와 혼합하여, 분쇄·정제한 후 이를 붓으로 기면(器面) 위에 문양을 그리는 기법을 말한다
분청사기(粉靑沙器) 분청사기는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의 준말로 의미를 따져보면 '분으로 장식한 회색과 청색이 나는 사기 그릇'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얘기하는 분은 밝은 노란색이 나는 흙을 얘기합니다. 즉 회청색이 나는 그릇의 표면을 밝은 노란색, 즉 아이보리 색과 같은 흙으로 겉면을 장식한 도자기입니다. 분청사기는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약 200년간만 만들어졌고 16세기 중엽 이후에는 분청사기의 생산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백자만이 남아 조선시대 도자기의 주류가 되었다.
분청사기의 특징은 청자나 백자에서는 볼 수 없는 자유분방하고 활력에 넘치는 실용적인 형태와 다양한 분장기법(粉粧技法), 의미와 특성을 살리면서도 때로는 대담하게 생략, 변형시켜 재구성한 무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분청사기의 특성은 아주 서민적이고 소박합니다.
백자(白瓷) 순백색의 바탕흙[胎土] 위에 투명한 유약(釉藥)을 씌워서 번조(燔造)한 자기. 백자가 분청사기와 달리 조선시대 전 시대에 유행했던 이유는 조선시대의 유교, 즉 선비의 정신과 백의민족인 우리의 정서와 백자가 잘 맞아서 사랑을 받은 걸로 추정합니다. 백자는 화려하진 않지만 깨끗하고 맑은 아름다움이 있고 특히 페르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유입된 코발트로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는 백자중에서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화 백자(靑華白磁) 조선 후기의 도자기. 하얀 색의 도자기에 청색의 그림을 그린 도자기
강진다원
강진만[康津灣]
<강진만 풍어제>
금곡관광농원
남미륵사
현재 남미륵사에는 동양 최대 규모의 황동 아미타불 불상이 있으며, 일주문에서부터 경내에 이르는 길에는 500 나한상이 배치되어 있다. 이 밖에도 대웅전, 시왕전, 33관음전, 만불전, 천불전, 팔각 13층 석탑, 사각 33석탑, 18m 해수 관음보살, 5m 부부코끼리상 등 아름다운 시설물이 풍동 마을 경관과 잘 어우러져 불자뿐만 아니라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다산유물전시관 도암면 만덕리
영정, 다산연보, 가계도, 학통, 다산의 일생, 다산의 업적과 유물 등이 판넬과 조형물로 입체감 있게 전시되어 있으며, 좀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을 때는 컴퓨터를 활용한 터치스크린에서 검색해 볼 수 있다. 영상실에서는 다산의 일생과 강진을 소개하는 영상물이 약 7분 동안 상영된다.
1800년 6월에 정조가 죽자, 정약용을 둘러싼 화기(禍機)가 무르익어 1801년 2월 책롱사건(册籠事件)으로 체포, 투옥되니, 이로써 그의 득의시절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책롱사건(冊籠事件) 홍교만과 정약종은 사돈 간으로 정약종의 아들 정철상은 그의 사위이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사돈 정약종의 책 상자를 자신의 집에 숨겨 두기도 하였다. 한 신자가 책 상자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과정에 박해자들에게 발각되는 사건(책롱사건)을 통하여 체포된 그는 의금부로 압송되었다가 문초와 형벌을 받고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았다. 그의 나이 63세였다.
1801년 11월 21일 목포 쪽과 해남 쪽으로 갈라지는 삼거리 주막거리인 나주 율정점에 도착한 죄인 정약전(44)과 정약용(40) 형제는 다음날 아침 그 곳에서 헤어져 각자 자기의 유배지로 떠났다.
다산초당[茶山草堂] 도암면 만덕리
다산이 남긴 이야기 - 여유당에서 다산초당까지
茶山艸堂’이라는 현판은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로 유명하다. 경내에는 다산선생 직접 병풍바위에 「정석(丁石)」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바위, 직접 수맥을 찾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藥泉),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茶竈), 연못 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등이 있다
목민심서의 저작목적은 “현행의 법 테두리 안에서라도 우리 백성들을 살려내보자”(因今之法而牧吾民也)라고 하여 법과 제도를 고치고 바꾸지 못한다면 공직자들이 마음과 몸을 제대로 수양하여 청렴한 생활을 하면 세상이 바르게 되고 백성들이 숨을 돌리게 된다는 것이다. 즉, 실제 행정에서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펴서 아사지경의 인민들을 살려내자는 의도였다.
경세유표의 저작목적은,‘신아지구방(新我之舊邦)’이라고 하여 오래된 조선이라는 나라를 통째로 개혁해 보겠다는 뜻이다. 나라를 완전히 개혁하여 새로운 체제로 바꾸려는 의사로 경세유표를 저작했다는 것이다.
흠흠신서의 저작 목적은 법의 집행에서 억울한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뜻이라고 했다. 형사사건에서 재판관이 제대로 법을 집행하지 못하거나,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지 못해 수 없이 많은 억울한 자가 나오게 된다면서 그러한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한 저술을 남겼다.
다산제
도룡마을
마량항 마량면 마량리 987
무위사[無爲寺]http://www.muwisa.com/
무위사 극락보전[極樂寶殿] [국보 제13호] 무위사에 현존하는 대부분의 건물들은 이 사찰의 4번째 중건인 1555년에 건립된 것이나, 이 극락전만은 1956년경의 수리공사 때 본존(本尊) 뒷벽의 벽화 명문(銘文)에서 “十二年 丙申 三月初 吉畵成”이란 기록을 통하여 적어도 1476년(성종 7)보다 앞서는 건물임이 밝혀졌다. 조선시대 건물 중 오래된 건물 중의 하나이다
무위사극락전 백의관음도(白衣觀音圖 보물 제1314호) 수월관음도, 수월관음벽화
1476년(성종 7)경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화면을 가득 채운 둥그스름한 광배를 지니고 바다 위에 떠 있는 관세음보살이 자신을 예배하는 노비구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관세음보살은 떠가는 듯 넘실대는 파도 위에 연잎을 타고 서서 오른손에는 버들가지를 살짝 잡고 왼손에는 정병(淨甁:깨끗한 물이나 감로수를 담는 병)을 쥐고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천의(天衣) 자락은 간략하지만 강약의 표현에 변화가 있어 화면을 꽉 채운 파도의 곡선과 함께 매우 율동적이며 생동감이 있다. 넓적한 얼굴, 굵은 목, 넓은 어깨, 커다란 발 등 체구가 당당하고 팔찌와 가슴장식의 표현이 화려하면서도 절제미가 있으며, 필치가 활달하고 유려하여 긴장감이 넘쳐난다.
백의 관음도의 앞쪽 아래 구석쪽으로는 승복 차림의 늙은 비구는 무릎을 꿇은 채 합장하고 있는데 그 표정은 관음을 예배하며 구원을 바라는 염원이 매우 절실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스님의 어깨 위에는 새 한마리가 앉다. 아마도 고개를 돌려 관음보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 것이다.
전설은 전설일 뿐, 자세히 보면 분명히 눈동자가 있다. 아마도 이 그림에 대한 신비감을 부여하기 위해 누군가가 만들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무위사극락전 아미타후불벽화(보물 제1313호) 아미타삼존불도
일반적인 고려불화의 구도는 모든 보살이 부처의 무릎 아래에 배치되며, 16세기 이후에는 보살과 나한 등이 부처를 빙 둘러 화면 가득히 배치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 그림에서는 두 협시불의 키가 부처의 어깨까지 올라와 있고 또 화면 위 양쪽에 각각 세 비구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점이 특징이다.
더구나 굵고 가는 선과 밝고 부드러운 색채를 자유자재로 구사해 생동감 넘치는 종교예술로 승화시킨 최고의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백련사[白蓮寺] http://www.baekryunsa.net/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까지는 동백림을 지나 800m의 오솔길(좁은 산길)이 있는데 이 길은 다산 정약용선생께서 초당에 거처할 당시 백련사의 명승 혜장과의 교우를 위해 이용했던 길로 약 20분정도가 소요되며, 이곳은 자연생태 학습장으로 걸어가는 코스로 제격이다.
사의재(四宜薺) 강진읍 동성리 495
영랑생가[永郞生家] 강진읍 남성리 211-1
영랑문학제 강진이 낳은 20세기 한국의 대표적 서정시인 영랑 김윤식 선생에 대한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 그의 높은 민족사상과 심오한 시심을 널리 알리고자 모란꽃이 만개한 봄을 맞이하여 문학제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전라 병영성[全羅兵營城] 병영면 성동리
전라 병영성 병영마을
병영마을의 담장은 전체적으로 돌과 흙을 번갈아 쌓은 토석담으로 하부는 비교적 큰 화강석을, 중단 이후로는 어른 주먹 크기 정도의 비교적 작은 돌을 사용하여 쌓아 올렸다. 담 위에는 기와로 지붕처리를 하였다. 담장의 높이는 2m 정도로 높은 편이고 특히, 하멜 일행이 1656년부터 1663년까지 7년간 이 곳에 머무는 동안 그들로부터 습득한 것으로 전해오는 담 쌓기 방식인, 중단 위쪽으로 얇은 돌을 약 15° 정도 눕혀서 촘촘하게 쌓고, 다음 층에는 다시 엇갈려 쌓는 일종의 빗살무늬 형식(이 곳에서는 이 형식 을 '하멜식 담쌓기’라 부른다) 은 타 지방과 다른 독특한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지역은 네델란드인 하멜일행이 1656.3 ~ 1663.2월까지 약 7년간 억류생활을 했던 곳이다. 하멜일행 33명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몇몇은 결혼해 살기도 했으며, 생계를 위해 잡역을 하거나 나막신을 만들어 팔았고 춤판을 벌여 삯을 받기도 했다. 우리나라 나막신이 일본의 나막신과 달리 네델란드와 같이 통으로 만들어진 것을 볼 때 이들이 나막신을 전래한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하며, 또 이 지역 일부에 남아있는 담장 중에 빗살모양으로 쌓인 담장이 있어 하멜일행이 잡역을 하면서 쌓았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홍교의 상단 중앙에 돌출된 용머리 조각은 여의주를 입에 물고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모습인데, 그 모습이 매우 해학적이다. 이러한 다리는 전남지역에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데, 특히 병영성 홍교는 그 자태가 우아하여 18세기 다리 중 수작으로 꼽을 만하다. 또한 홍교 입구에는 문인상과 무신상의 석장승 2구가 세워져 있는데, 병영성을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하는 듯 늠름하고 야무진 병사의 모습을 띠고 있다. 석장승과 홍교, 그리고 그 앞에 펼쳐진 배진강이 서로 어우러져 평화롭고 아름다운 정경을 연출한다.
천일각[天一閣]
다산이 이곳에 머무르던 당시에는 없던 건물이지만, 유적지를 정비하면서 강진군이 스스로 판단해서 1975 년에 세운 건물이다. 천일각에 앉아 멀리 흑산도로 유배간 둘째형 정약전을 그리워하며 귀향살이의 괴로움을 달랬다.
칠량봉황옹기 칠량면 봉황리 122번지
하멜기념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052&aid=0000173566
하멜표류기 1653년(효종 4년) 네덜란드의 상선(商船)이 일본으로 향하는 도중 풍랑을 만나 제주도 부근에 난파하였다. 선원 중 생존한 일행은 제주도에 표착하고 이듬해 서울로 호송되었다. 그 후 1666년(현종 7년), 하멜 이하 8명은 야음을 틈타 탈출하여 1668년(현종 9년)에 귀국하였다.
이 책은 조선에서의 14년 동안의 억류 기록으로, 부록인 《조선국기》(朝鮮國記)는 조선의 지리·풍토·산물·정치·군사·법속 등에 대하여 실제로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한 것이다. 하멜의 이 기록은 유럽인에게 처음으로 한국을 소개하여 한국에 대한 인식에 많은 기여를 했다. 또한 당시의 사회사정·풍속·생활의 일면을 이양인(異樣人)의 눈으로 투영시킨 것으로 자료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한골목의 담장은 황토와 돌을 이용하여 빗살무늬 방식으로 쌓아 다른 지역과 비교되는 이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마을 사람들은 일명 ‘하멜식 돌담’이라 하여 하멜 관련 유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한골목은 2006년에 등록문화재 264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향토문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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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맛집 청자골 종가집
고래 등 같은 기와집 마루로 올라서면 방방마다 예스러운 멋이 한껏 풍겨나는 종가집은 전통 있는 한옥 집을 자랑으로 언제나 예약손님이 북적이고 기념 촬영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눈에 띈다.
밥상을 둘러보니 버섯탕수. 구절판. 전복. 장어구이. 육회. 은행구이. 낙지볶음. 가오리찜에 남도인들이 잔치상에 빼놓지 않는 홍어회(삼합)가 자리 잡고 있다. 육·해·공 산해진미가 30여 가지에 이른다.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점 100선 선정의 집
강진 맛집 해태식당
전남 강진군은 예전부터 양반의 도시로 한정식이 유명해요 강진군에서도 유명한 해태식당. 강진만의 청정해역에서 생산된 각종 어패류에다 채소, 육류 등을 고루 갖춘 전통 한정식집으로 돔배젓, 토하젓 같은 토산젓갈 뿐 아니라 깻잎묻침하나라도 정성이 깃들여 있다.
탐진강 은어축제
제1급수인 탐진강에서 서식하는 우리고장의 특산물이자 조선시대 임금님께 진상된 천하 일품인 은어를 지역특산물로 상품화 및 청정 탐진강의 여름철 물을 이용한 자연친화적인 체험중심 및 탐진강 은어축제를 개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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