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로 추대된 최초의 절도사, 당나라의 존망을 위협한 고구려 유민 이정기, 그리고 그가 당에 세운 고구려 왕국! 제齊 1300년 전, 불꽃처럼 살다간
제왕 이정기의 일생이 지금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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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년, 고구려가 패망했다. 20만 명의 고구려 유민들은 당나라로 끌려가 척박한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연명했다. 그러나 더 이상 유민들의 고통은 용남할 수 없다. 고구려의 혼과 숨결을 이을 것이다."
- 고구려인 이정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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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기, 병사들의 손으로 절도사에 추대되다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에 끌려온 고구려 유민들은 비참한 노예로 전락했다. 노예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구는 당나라의 군사가 되는 것이었다. 고구려 유민이었던 이정기는 당군이 되어 뛰어난 전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중국 칭화대 교수 |
이정기는 고구려 유민이 대다수였던 평로군을 이끕니다. 당나라를 위협했던 안녹산의 난을 진압히고, 포악하기로 유명한 위구르 군대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죠 |
그러나 병사들에게 신망 받는 이정기를 시기하고 경계하는 사람이 있었다. 당시 평로군의 절도사였던 후희일은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울 것을 염려해 이정기를 옥에 가둔다. 그. 런. 데.
지배선 교수 |
놀랍게도 후희일 휘하의 병사들이 감옥에 갇혀있던 이정기를 구출합니다. 요새 말로 얘기하면 쿠데타죠. 이정기가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들에게 믿음을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후희일은 도망을 가고 이정기는 병사들에 의해 절도사의 자리에 오른다. 쿠데타로 절도사가 된 최초의 인물, 이정기! 그 앞에 파란만장한 인생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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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기 왕국 - 발해와 신라를 아우르는 Center
이정기는 평로군을 이끌고 산둥반도에 정착하여 무역을 독점하고 독립 왕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춘다. 당나라는 이정기에게 여러 관직을 내리며 충돌을 피하고자 노력하지만, 이미 발해와 신라의 교역권을 완전히 장악한 이정기는 부의 축적과 강력한 군대로 당나라를 점점 더 무능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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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해 : 뛰어난 발해 명마 수입으로 군사력 증강 당나라에 인질로 잡혀있던 발해 왕자 귀국 호랑이, 표범 등의 가죽과 각종 약재 수입 통일신라 : 신라-당의 외교사절단 회수 감소 신라와 당의 교류 약화
이정기의 : 당과 발해, 신라, 일본의 교역 중심지 치청번진
막대한 생산력 : 당나라 소금 생산량1/2 비단 생산량 1/2 철, 구리 생산량의 1/10 |
그러나 병사들에게 신망 받는 이정기를 시기하고 경계하는 사람이 있었다. 당시 평로군의 절도사였던 후희일은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울 것을 염려해 이정기를 옥에 가둔다. 그. 런. 데.
후희일은 도망을 가고 이정기는 병사들에 의해 절도사의 자리에 오른다. 쿠데타로 절도사가 된 최초의 인물, 이정기! 그 앞에 파란만장한 인생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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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가장 강력한 절도사, 이정기
8세기 중반, 중국대륙은 연이은 반란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그러나 이정기가 다스리는 지역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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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기는) 열다섯 개 주를 소유했는데
그 구역 내에서 모두 같은 대우를 했다.
법령은 하나같은데다가
부세마저 가벼웠기 때문에 제일 강대했다.
-구당서 中 - |
이정기의 강력한 통치력과 군사력은 당나라 내 절도사들을 두려움에 빠뜨렸다. 심지어 이정기를 황제 라고 부르며 사신을 보낼 정도로 두려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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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기는 당 시대에 가장 강력한 절도사로...
다른 지역 절도사들이 몹시 두려워했으며…
백관을 스스로 임명하고 황실에 세금을 내지 않았으며 법률을 독자적으로 집행했다.
-청주시지 中- |
당시 이정기가 차지한 산둥 반도의 15개 주는 통일신라보다 넓었으며 인구수도 더 많았다. 이정기는 치정지역의 중심지인 청주에 높이 20m, 길이 13km에 달하는 성을 세워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이곳은 당나라 속, 고구려 왕국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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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왕국, 제(齊)
● 한 달 동안 숨긴 이정기의 죽음 경제적인 풍요로움과 안정적인 통치로 태평성대를 이룬 이정기 왕국! 이정기는 왕국을 유지하는데 그치지 않고 당나라의 황실을 넘볼 정도로 거대한 세력을 형성한다. 드디어 10만 군대를 이끌고 당의 수도로 향하는데 … 그러나 당과 일대결전을 앞둔 이정기는 뜻밖의 죽음을 맞게 된다. 이정기의 뒤를 이은 아들 이납은 한 달 가까이 아버지의 죽음을 속이는데…
● 당( 唐 )의 잔인한 보복, 1200명 학살! 이납은 왕국을 제(齊) 라 칭하고 대외적으로 독립왕국임을 선포한다. 그러나 55년 후인 819년, 결국 제(齊)는 당나라의 집요한 공격으로 패망한다. 제나라가 패한 후, 당은 고구려 유민이 대다수인 운주병사 1200명을 학살 한다. 사서에는 이 학살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무장한 병사들이 나와서 운주 병사 1200명을 둘러싸더니 즉시 뜰에서 살해하였다. 죽은 병사들의 피가 흘러 강을 이뤘다. 그 당시 문과 가리개의 사이에 붉은 안개가 자욱했는데, 높이가 한 장(약 3m)이나 되었다. 이 안개는 오래 지나서야 비로소 흩어졌다.
-구당서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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