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4일. 화요일. 비
내일은 아이들과 부산 인디고 서원에 가기로 약속한 날이다. 영양으로 가기로 했던 휴가도 취소된 터여서 휴가겸 방문겸, 겸사겸사 다녀올 계획을 세웠다. 서둘러 저녁을 먹고 성당으로 향했다. 내일 성모승천대축일 미사에 참례하지 못하므로 특전 미사에 미리 참례하기 위해서였다. 베로니카 언니, 데레사.. 반가운 얼굴들이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준다. 미사를 마치고 "빵 굽는 남자"에 가서 팥빙수를 사 먹었다. 내일을 위한 간식으로 과자도 샀다. 누네띠네와 카스테라 크림빵. 집에 오는 길에 오렌지 쥬스, 데미소다, 우유를 사고 등산용 가방도 작은 것으로 하나 장만했다.
집에 와서는 분주했다. 물을 얼리기 위해 냉동실에 넣어두고 해수욕에 대비해 여벌 옷도 준비하였다. 아이들은 들떠서 왔다갔다 하다가 11시가 지나서야 잠이 들었다. 나는 빵 썰어놓기, 옷 준비하기, 기차 시간 확인, 부산 지하철 노선도 확인, 내일 일정을 알아보다 1시 30분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내일 일정은 [무궁화 기차를 타고 --> 인디고 서원 --> 자갈치 시장 --> 해운데 --> 광안리 --> 집으로] 이다. 자갈치 시장이 언제 문을 닫는지 언제 여는지 정확한 설명이 없다. 그냥 가 보고 몸으로 부딪혀야 한다.
부산엔 가 보고 싶은 곳도 많다. 올리베따노 수녀원, 오륜대 성지(박효주 선생님이 프랑스 수녀원에 입회하기 전에 같이 하였던 성지 순례 중 첫번째 성지여서 감회가 새로울텐데...)시립 미술관 등. 아쉽지만 다음에 가야겠다.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오늘 하루 너무 피곤했나보다.
8월 15일 수요일 성모승천대축일 아침
요란한 자명종 소리에 잠이 깨었다. 긴장한 탓인지 별 뒤척임 없이 일어나 준비를 했다 예약 취사 덕분에 밥솥은 "칙칙" 소리를 내며 밥을 짓고 있었다. 얼른 일어나 화장을 하고 아침밥과 함께 오늘 먹을 간식을 준비하였다. 오징어는 어제 구워 놓았다. 달걀을 삶고 떡을 전자레인지에 데워놓았다. 참외를 깍아 통에 넣고 식빵은 구워 딸기잼을 듬뿍 발라 넣었다. 덥고 지친데는 달콤한 것이 활력소가 될 터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깨웠다. 아침밥을 먹고 역으로 향한 시각은 7시 20분. 애시당초 계획했던 7시 30분 기차를 타는 것은 무리다. 8시 30분 기차를 타야겠다.
7시 45분에 역에 도착했다. 표를 사고 철도 회원권을 새로 나온 제도에 맞게 교환하래서 그렇게 했다. 처음 가입금 2만원 중에 만원만 돌려주었다. 나머지 만원은 카드 발급 수수료라나.. 카드 발급하는데 만원이나 든다니. 우리에게는 엄청 불리하고 철도청에는 억수로 유리한 제도다. 나쁜 놈들.. 각설하고 애들을 화장실에 보냈다. 애들과는 잠깐을 움직여도 먹이고 누이는 것이 가장 큰일이고 신경을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행을 망친다. 여기서 말하는 애들의 범주에는 중딩이든 고딩이든 초딩이든 젖먹이든 모두 속한다. 가끔 덜떨어진 남자들도 이 범주에 속한다. 일단 위로는 배불려 놓고 아래로는 비워 놓으면 두 시간은 조용하다.
8시 30분. 기차를 타고 바로 삶은 달걀을 까먹인다. 아이들은 두개씩 먹었다. 함께 앉은 총각에게도 권했다. 무지 먹고 싶었는지 사양않고 웃으며 넙쭉 받아 먹었다. 매실차도 권했다. 두 잔을 거푸 마셨다. 잘 먹는 사람은 착해 보인다. 이것도 내 편견이겠지?

10시 30분에 부산 역에 도착했다. (아~! 옛날 생각난다.) 부산역 광장은 상당히 넓다. 단순하고도 대범하게 조경해 놓았다. 우리나라 두번째 도시답다. (역사 안은 동대구역이 더 좋은 것 같다. 더 최근에 지어서 그렇겠지?) 아이들 사진을 찍어 주고 서둘러 지하철을 타러 갔다. 지하철 표 판매기 앞이 아수라장이다.너무 덥고 좁고 사람이 많아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옷이 순식간에 흠뻑 젖었다. (이건 부산시에서 시정해야한다. 부산에서는 지하철 표 사는 내내 사우나 하는 기분이었다.) 1호선을 타고 서면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남천에서 내렸다. 밖으로 빠져 나오기 전에 2차 간식을 먹었다. 빵과 우유. 막내는 좀 창피해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뭐 어때. 우리는 여행중인데.

인디고 서원은 10평 정도 될까말까한 작은 청소년 대상으로 한 인문학 전문 서점이다. 신문을 통해이 서점을 알게 되었고 "인디고잉"이라는 간행물도 받아본다. 이곳에는 명성에 걸맞게 각종 인문학책이 빼곡이 쌓여있다. 더러는 바랬고 더러는 손때도 묻어있다. 잉크 냄새가 나는 새 책도 있다. 책이 살아 있는 것 같다. 꽂혀 있는 책 수준이 매우 높다. 큰 애가 방문하고 싶다고 해서 마음 먹은 걸음이지만 중2인 큰애에게는 부대끼는 수준의 책이다. 내게도 마찬가지지만.. 그 많은 책들 가운데 나는 1,20권 정도나 읽었을까? 이름은 들었으되 내용은 알지 못하는 책들이 부지기수다. 한 30분 지나니 큰애가 보고 싶은 책들을 빼내기 시작한다. 7,8권 되나? 10만원이 훨씬 넘는 액수다. 2만 5천원은 큰애의 상품권으로 사고 나머지는 내가 부담하기로 했다.

책을 읽을 때는 행간을 읽으라고, 자신에게 집중하라고, 미래를 꿈꾸라고 말 해 주었다. 무슨 뜻인지 이해했을까? 어쩌면 그 말은 내게 하고 싶은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다. 그 많은 책들을 보며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았나 싶었다. 변변히 읽은 책도 없이, 변변한 꿈도 없이, 어찌 이리 물도 아니고 술도 아니게 살아 왔나 싶다. 전업 주부도 아니고 전문인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자유를 주지도 못하고 완전히 틀어 쥐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삶.이제 늦은 것은 아닐까? 지금부터라도 꿈을 꾸어도 될까? 잘 해 낼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였다. 답답하였다. 김점순 책을 사고 싶었으나 못샀다. 김점순. 자신의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불우한 처지마저 대단해 보인다. (집으로 오는 길에 윤석화가 학력을 위조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대단해 보였던 윤석화의 과거와 현재가 초라해 보였다.)

2시. 인디고 서원에서 20분 정도 걸으니 광안리 해수욕장이 나왔다. 시간 관계상 해운대는 가지 않기로 했다. 광안리는 광안 대교와 현대식 건물들과 찻집이 어우러져 바다와 함께 꽤 괜찮은 풍경을 만들어 내었다. 공기만 깨끗하다면, 시야만 맑다면 세계에 내놓아도 될 것 같다. 그런데 바다에서 썪는 냄새가 난다. 비릿한 시궁창 냄새가 두세시간이 지나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막내는 신나게 바다에 몸을 맡긴다. 막내는 항상 자신을 몰입한다. 먹을때도 완전히 몰입, 놀때도 몰입, 책 읽을 때도 그렇다. 부모로서 보기 좋다. 두 시간 정도 간고등어처럼 바닷물에 절어 놀았다. 나는 바닷물을 싫어하는 관계로 밖에서 바닷 바람만 쐬며 앉아있었다. 불편한 샤워를 하고 다음 일정인 자갈치 시장으로 향했다.

4시. 광안리에서 나와 금련산 역에서 자갈치 시장으로 향했다. 역시 서면에서 1호선으로 갈아탔다. 시장의 규모는 역시나 듣던대로 굉장했다. 생선은 갈치, 고등어, 조기, 등 흔하게 먹는 생선이 주를 이루었고 오징어, 문어, 게, 가리비, 맛조개, 새우, 상어고기 등도 있었다. 수입산도 많이 섞여 있었다. 다양한 구색은 아니지만 생선 가격은 우리 동네의 1/4 정도로 저렴했다. 애들이 많이 신기해했다. 살아있는 문어들이 화난 표정으로 고무 다라를 탈출하는 사건도 빈번했다. 상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들의 탈출을 번번히 좌절 시켰다. 식당에는 생선을 많이 구워 팔았다. 그것도 신기했다.

'여기까지 왔는데...'하면서 회를 먹었다. 왠지 모를 억울함과 바가지 썼다는 느낌과 속았다는 느낌이 섞인채로 찜찜한 마음으로 회를 먹었다. 그래도 양념 일인당 천원, 공기밥 일인당 2천원, 매운탕 7천원에서 만원-하는 바가지는 면할 수 있었다. 하마터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클 뻔 하였다. 무서운 동네다. 그러니 사람들이 백화점으로, 이름나고 번듯한 식당으로, 몰리는거다. 재래 시장은 들어갈 비용을 예상할 수 없다. 돌아나오면서 계산해 보면 항상 예상보다 많은 비용을 지출했다는 사실에 속이 쓰리다. 갈치와 고등어도 샀는데 살때는 포장해준다고 꼬셔놓고(?) 계산할 때는 포장비 천원을 더 받았다. 또 한 번 더 속상했다. 어이없는 표정을 해 봐야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먼 산만 바라보고 있다. 그래도 동네보다는 싸다고 주장하며 낑낑거리고 집까지 가져왔다. 무거운 생선과 얼음이 든 통을 운반한 비용까지 합하면 비슷한 가격일지 모르는데도 나는 애써 잘 샀다고 위안했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
배낭 사고 책 산 돈까지 합해서 부산 여행에 든 돈은 모두 21만원 정도. 준비해간 간식은 모두 먹었다. 오렌지 쥬스는 모두 남겨서 집에 와서 버렸다. 모두 미지근하고 텁텁한 쥬스는 마시지 않았다. 떡도 버렸다. 다음 여행을 위해 참고할 사항이다. 집에 와서 샤워를 하는데 온몸에서 자갈치 시장 특유의 꼬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주변 사람들이 왜 그리 몸을 뒤척였는지 좀 이해할만하다. 미안하다. 하루 종일 땀을 비오듯 흘린데다가 광안리의 썩은 바닷 냄새와 자갈치 시장의 생선냄새를 고스란히 묻히고 더운 공기에 발효까지 시켰으니 오죽했겠나 싶다. 샴푸를 두 번이나 하고서야 냄새가 가셨다. 생선을 씻어서 냉장고에 넣고 정리를 하고나니 늦었다. 오늘도 한 시 반이다.
첫댓글 푸하하...간고등어처럼 저려 놓았다니...하긴 대구사람들은 바다 구경도 힘들겠네요^^ 그리고 변함없는 사실...역시나 부지런하신 언니야답네요. "위대한 영도력"이 묻어납니다^^♥
아이고야, 반가워라... 잘 지내고 있죠? 대구에 한 번 오지.. 맛있는거 사 줄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