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실 밖을 나온 불교 이야기3
목경찬(불광사 불광교육원 교수) 씀
* 주위에서 접하는 단어로 불교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일반인을 대상으로 쉽게 적어볼까 합니다.
물론 저는 몇 년간 한문경전 중심으로 불교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 용어에 파묻혀 살다보니, 일반대중에 대한 언어감각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를 통해 일반인과 서로 호흡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해와 조언 바랍니다.
'팔자'로 시작하는 불교 이야기3
새해마다 사람들이 심심풀이 오징어 땅콩으로 보는 가운데 하나가 토정비결 아닌가 합니다.
즉, 사주팔자를 가지고 올해의 운세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사주팔자란 본인의 생년월일시를 조합하면 여덟 글자가 되는데 이를 팔자로 합니다.
그러면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있는 저의 입장에서 팔자를 어떻게 보는가 하면,
자기 팔자는 있다고 봅니다.
즉, 그 시간에 태어날 전생의 사건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중국 어디서 나비가 날개 짓 하면 미국 어느 곳에서 홍수가 난다는데,
인간 몸을 받고 이 땅에 태어난 이 몸이 아무런 이유 없이 태어났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그 시간에 태어날 이유가 있고,
그 태어난 시간은 미래를 어느 정도 열어 놓고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팔자에 관한 해석이 모두 맞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점쟁이도 한사람의 헤아릴 수 없는 전생의 모습을 알 수 없을테니.
그리고 그 놈의 팔자라는 것이 늘 현실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찌 보면 하나의 가능성이죠. 씨앗이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팔자는 이 열린 세상에서 새로운 변화되고 새로 만들어져 가는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 이상 팔자에 대한 제 소견을 이야기 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불교집안 내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있기 때문에 제 소견이라고 했습니다. -
다 아시다시피 불교 용어이자 생활화된 용어 가운데 업(業)이 있습니다.
업. 그 옛날 강수연 주연의 '업'이란 영화처럼,
또는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영화처럼,
숙명적이고 고정적인 것이며 순환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업은 범어로 카르마karma라고 합니다. 풀이하면, 행위, 활동 등을 말합니다.
즉, 우리의 행위가 바로 업입니다. 그런데, 이 놈의 업은 그 행위 그 자체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다음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 때문에 사람들은 업이라고 하면 숙명적이고, 고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업은 늘 우리 현실 생활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또 새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다시 팔자로 들어가면,
팔자라는 것은 전생의 나의 여러 가지 행위로 인해 그렇게 농축된 모습으로 그 시간에 이 땅에 온 것입니다.
(물론 불교 하는 사람이 모두 전생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 윤회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 하나, 불교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비유로써 설명합니다.
이 지구가 모두 물바다가 되어 있는데, 그 망망대해에 구멍 뚫린 판자 하나가 둥실둥실 떠다닙니다.
그런데, 100년 동안 잠수하다가 한 번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거북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거북이는 눈이 멀었습니다.
이런 거북이가 물 밖으로 나올 때
거북이의 머리가 둥실둥실 떠다니는 판자의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확률 보다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더 어렵다고 합니다.
- 이 경을 눈먼 거북이의 비유라 하여 맹구경(盲龜經)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삶이 어떻든,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물론 지옥중생이나 축생이었다가 인간이 되는 경우도 있고,
하늘에서 잘 놀다가 그 업이 다 하여 인간으로 태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일까요. 이쪽이든 저쪽이든, 인간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수행할 수 있는 다시 말하면 도전할 수 있는 힘이
즉, 지옥이나 축생들은 그 삶이 하도 괴로워서 수행할 마음의 여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그 삶이 너무나 풍요하기에
자기 복 다 까먹는 것도 모르고 띵까띵까 하다가 인간으로 다시 내려옵니다.
그러니, 이 인간의 몸이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다시 팔자 이야기.
팔자, 다시 말하면 운명이란 그 상태로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제가 늘 인용하는 경전 말씀 하나.
옛날 어느 절에 동자승과 주지스님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주지스님이 동자의 모습을 보니 일주일 안에 이 생을 다할 운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지스님은 동자승이 이 생을 마치기 전에
어머님이라도 한 번 보고 가게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동자승에게 집에 다녀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10일 뒤.
.
.
동자승은 콧노래를 부르며 절로 돌아 왔습니다.
눈이 둥그래진 주지스님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스님 판단에는 분명히 일주일 안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야 할 동자가
스스로 씩씩하게 걸어 왔으니 말입니다.
주지스님은 동자승에게 그 동안 일을 물었습니다.
동자승이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 합니다.
그 가운데. 졸래졸래 집으로 가는 길에 개울을 건너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그 거센 개울위로 나무가 하나 떠내려오는데,
개미들이 잔뜩 타고 있었답니다.
자초 일보 직전에 동자승이 나무를 당겨 자그마한 나뭇가지를 걸어주었답니다.
그 가지를 따라 개미들이 뭍으로 무사히 탈출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주지스님은 아! 하였답니다.
무슨 소리인지, 감이 옵니까.
안 오면 말고 머리 나쁜 것, 내 팔자 소관이거니 하세요.
다시 하면 요약하자면,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게 됩니다.
그것을 인과법이라고 하지요.
그렇다고 그 결과가 반드시 똑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그 결과는 받겠지만요.
요번 생에 일어날 수도 있고,
다음 생에, 아니면 그 다음다음 생에
(물론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다르게 풀이합니다. 이 현재의 삶에서 풀이합니다),
그리고 다른 행위에 위해 새로운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겠습니다.
여기서 고민해 봅시다.
이 땅에 못하는 사람도 전생의 업 때문이고,
나쁜 짓하고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도 전생의 업 때문입니까.
전생에 못된 짓 해서 그렇고, 전생에 착한 짓 해서 그렇겠습니까.
그러니, 팔자 탓이거니, 하며, 팔자타령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사항을 모두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행복의 기준에서부터 과거의 삶, 그리고 앞으로 삶 등등.
그래서 가끔 이런 부분이 악용되니. '종교는 아편'이라고도 하지요.
그런데 처음이 좋다고 마지막까지 지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이 모습만을 가지고 기나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런 문제는 다같이 고민해 봅시다.
불교에서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과거를 보면 현재를 알 수 있고,
현재를 보면 미래를 알 수 있다.
다음에 뵈요^^
첫댓글 ^*^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