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나들이]고령에서 합천까지 경북과 경남을 잇는 도로 여행
대가야 고분군에서 바람흔적미술관까지
[출처 : http://www.ohmynews.com]
여름휴가철이다. 전국 휴양지 근처의 도로란 도로는 어김없이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해 버렸지만 다행히 난 그 곳에 있지 않다. TV, 라디오에서 보고 듣는 혼잡, 무질서는 그저 먼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 작지만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는 대가야 왕릉 전시관 전경
여름휴가지로 고령을 택했다. 대학시절 잠깐 드나든 적이 있었던 '문화공간 가라'에서 전통 각 문화체험을 하고, 고령의 대가야 유적지를 답사하기로 했다.
여름휴가지로는 그리 매력있지 않은 곳이라 짐작했지만, 오히려 그 짐작이 내겐 더할 수 없는 매력이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내 짐작은 적중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곳에서 문화의 향기에 흠뻑 취해도 보고, 옛 사람들의 흔적을 되짚어 보기도 하고, 산과 호수를 사이에 둔 길을 따라 가보기도 했다
▲ 발굴 당시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해 놓고 있다
지금까지 고령하면 수박과 딸기로만 유명한 줄 알았다. 그저 그런 농촌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고령은 대가야(大伽倻)의 유적이 산재해 있는 볼 것 많은 곳이 되어 있다.
특히 그동안 학계에 문헌으로만 알려져 있던 순장의 모습이 확인된 고분군이 발견돼 학계의 이목을 단숨에 집중시킨 곳이 바로 고령이다.
사실, 고령에서 대가야 고분군이 발견된 것은 지난 1977년이라고 한다. 언뜻 생각해도 최초로 순장이 확인된 고분이라면 그 충격이 상당했을 텐데 26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만 모르고 있었나 보다. 어찌됐든 경상북도의 그리 크지 않은 군인 고령은 지금 이 땅의 고대문화를 꽃피웠던 대가야의 도읍지로 점점 유명해지고 있다
▲ 순장(殉葬)이 마네킹으로 재현돼 있다
둥그런 반구형태의 대가야 왕릉전시관은 고분군에서 발굴된 각종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중앙에는 발굴 당시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고 있어 옛무덤에 대한 신비감 마저 들게 한다.
왕이 죽으면 왕이 부리던 사람들을 각종 부장품과 함께 묻었다는 순장. 생각과는 달리 산채로 묻은 것이 아니라 죽여서 묻었다고 하고, 당시로서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장례방법이라지만 생각만 해도 끔찍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대가야 왕릉 전시관을 나와 옆으로 난 계단을 5분 정도 올라가면 고분군을 볼 수 있다. 발굴되기 전 도굴이 빈번하게 이뤄졌다고 하니 문화재에 대한 의식이 부족했던 옛날의 일이라고만 생각하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다. 지금은 이렇게 잘 정비돼 보존되고 있으니 마음 속으로 고령군의 노력에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 본다
▲ 잘 정비돼 있는 실제 고분군
차를 합천 쪽으로 돌렸다. 합천하면 해인사가 아니었던가. 나는 예전부터 불국사면 그냥 불국사지 경주 불국사라고 하지 않고, 부석사라면 그냥 부석사지 영주 부석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해인사는 꼭 합천 해인사라고 생각했었다. 합천하면 해인사가 떠오르고, 해인사 하면 합천이 떠올랐던 것이다.
해인사에 가본 적도 한 손으로 세기에는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였고, 해인사에 보관돼 있는 팔만대장경에 대해서도 고령에서 1박 2일 동안 다시한번 배웠기에 나름대로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왕 합천으로 방향을 잡았으니 이번엔 해인사와 합천을 떼어놓고 보기로 했다.
혼잡을 피해 여름휴가지로 바다를 피했지만, 합천 쪽으로 가니 바다와 같이 넓은 합천호가 아쉬움을 달래 준다. 넘실대는 합천호의 푸른 물과 함께 가야산과 황매산의 빼어난 풍광을 감상할 수 있어 너무 좋다. 더구나 1시간을 달려도 앞서거나 뒤서는 차가 거의 없다. 그야말로 나만을 위해 준비된 곳이라는 오만한 착각이 생기기도 한다
▲ 합천호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송씨고택이 있다
멀리 보이는 황매산도 절경이라 할만 하다. 황매산의 정상에서 영화 단적비연수를 찍었다는데 영화에서 봤던 황량한 원시의 풍경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합천댐 아래에는 역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세트장이 있다고 하니 좋은 장소 찾는데에는 귀신들인 영화제작자들의 눈에도 이곳의 절경이 맘에 쏙 들었나 보다
▲ 송씨고택 앞에 활짝 꽃을 피운 배롱나무
▲ 바위로 이루어진 황매산
합천호를 끼고 차를 달리다 보니 옛날 지체높은 양반의 집인 것 같은 고택이 눈에 들어온다. 내려서 보니 이곳은 대병면 역평리란 곳이고 집은 송씨고택이라고 한다.
요즘엔 이 집 후손들이 만드는 송주(松酒)란 술이 합천지방의 명주(名酒)로 불린다고 한다. 고택 앞에 환하게 서있는 배롱나무가 이채롭다. 이 나무는 간지럼나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나무 밑에 들어가 큰 줄기를 간지르니 진짜로 잎과 꽃을 흔드는 것 같다. 아마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본 것이겠지 라고 생각해보지만, 그래도 간지럼나무라고 하니 진짜 간지럼을 타는 듯 느껴졌나 보다.
송씨고택을 지나 합천댐 전망대를 찾아 물전시관을 둘러 보고 전망대에 올라 드넓은 합천호를 내려다 본다. 바다처럼 넓고 시원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댐이라고 하면, 그 밑에 수몰된 마을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오늘 본 마을들은 하나같이 시골마을 같지 않게 반듯하고 새 것의 느낌을 주었다. 댐 건설로 고향마을이 수몰돼 옮겨와 새로 만든 마을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아까 본 송씨고택도 원래는 합천호 물밑에 있던 것이었다
▲ 합천군 가회면에 있는 바람흔적미술관
▲ 22개의 키큰 바람개비가 눈길을 끈다
▲ 산 속의 명태. 바람흔적미술관의 앞뜰에 있다
날이 어두워지려고 한다. 길을 서둘러 가회면에 있는 바람흔적미술관을 찾았다. 오늘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로 점찍어둔 곳이다. 빨간색 2층 건물과 함께 넓은 잔디위에 서있는 22개의 키큰 바람개비가 멀리서 눈에 띈다.
털보 관장님은 인사하는 내게 사람좋은 웃음을 아끼지 않는다. 그 웃음이 얼마나 해맑고 편안한지 이곳에 대해 궁금했던 여러 가지를 묻고 싶었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심지어는 털보 관장님의 성함도 여쭙지 못했다. 그저 “편히 쉬다 가세요”라는 말이 함박웃음과 함께 내게 전해져 올 뿐이다.
바람도 흔적을 남긴다. 어떤 흔적일까? 그러면 난 오늘, 이 곳에, 내가 다닌 길에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옛 것, 흉내 한 번 내봅시다. 고령 ‘문화공간 가라’를 찾아서
▲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 305번지에 '문화공간 가라'가 있다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 305번지는 월막초등학교가 있던 자리였다. 단층짜리의 조촐한 건물에서 시골분교의 정취가 흠뻑 묻어난다. 오래 전에 폐교된 이 건물에 전통 각 기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문화체험공간을 열었다. 지난 1999년 6월에 문을 연 ‘문화공간 가라'가 그 곳이다
▲ '가라(아래 아로 표기됨)' 는 가야(伽倻)의 옛이름이다
'가라’란 가야(伽倻)의 옛 이름이다. 고령은 옛날 대가야국이 있었던 자리였다. 그동안 구전과 문헌으로만 전해져 오던 순장(殉葬:임금이나 귀족이 죽으면 그가 부리던 사람들을 같이 묻어 장사지내는 것)이 실제 고령에서 발견된 고분군에서 확인돼 학계에 일대 충격을 가져오기도 했던 곳이다
▲ 복도에 각종 판각체험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고령은 대가야 관련 유적 뿐만 아니라 팔만대장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 경남 합천 해인사에 보관돼 있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적지 않다.
그 중 팔만대장경이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한 실정이다. 여기에 대해 최근 설득력을 얻고 있는 학설 중 하나가 팔만대장경을 고령의 장경나루를 통해 합천 해인사로 운반했다는 것이다.
실제 경북 고령과 경남 합천은 차로 3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다. 고령군에서도 이 곳의 가치를 인정해 이곳 폐교 건물을 무상으로 임대해주고 있다
▲ '문화공간 가라'에는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고인쇄 관련 물품들이 전시돼 있다
'문화공간 가라'는 그 옛날 고려인들이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불심을 모아 만들었던 팔만대장경에 주목하고 있다. 5천만자에 달하는 실로 어마어마한 분량의 팔만대장경에 사용된 각 기법을 연구하고 재현하는 것이다.
다행히 당시 각(刻) 기법은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맥이 끊기지 않고 내려오고 있다. '문화공간 가라'와 이산 각연구소를 함께 운영하고 있는 안준영 소장은 우리나라에 몇 안되는 전통 각수(刻手) 중 한명이다. 그는 이미 팔만대장경의 일부를 옛날 방법 그대로 재현해 낸 바 있다.
▲ 차실(茶室)에서는 각종 판각작품들을 감상하며 전통차를 즐길 수 있다
특히, 지난 2000년에는 팔만대장경의 주재료가 산벚나무인 것과 판각을 위한 최적의 목재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바닷물에 3년 이상 묵힌 후 작업했다는 것을 학계 전문가들과 함께 밝혀 내고, 직접 시연해내기도 했다.
그동안 팔만대장경에 대해서라면 그저 ‘대단하다’, ‘어마어마하다’라는 단순한 반응이 일반적이던 때 최초로 실증적이고도 구체적인 방법을 동원해 일군 성과였다.
그리고 세계 최고 수준의 목판인쇄술을 가졌던 우리나라의 문화적 자긍심을 살리고, 인류문화의 보고라 일컬어지는 팔만대장경을 창조해낸 전통 각 기법을 일반인에게 전파하고자 '문화공간 가라'를 열었다
▲ 상당한 수준에 오른 한 회원의 작품들과 그리고 추사 김정희의 새한도를 판각했다
안준영 소장은 다른 수련원처럼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쉬어 갈 수 있는 숙식시설만 갖추어진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전통 각 문화와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기술을 제대로 알릴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와 함께 그는 '문화공간 가라'가 존재하고 있는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고려인들은 팔만대장경을 만들면서 한 자를 새기고 세 번 절했다고 합니다. 일자삼배(一字三拜)의 정신이 바로 그것이죠. '문화공간 가라'는 단순히 옛날의 각 기술만을 전하는 곳이 아닙니다. 바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온 나라가 하나가 돼 지극 정성을 다했던 선조들의 정신도 함께 전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것은 소중한 것’이라는 외침이 점차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는 때 ‘'문화공간 가라'의 옛 것, 우리 것 흉내내기가 오늘날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