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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일맥)
과속 운전이 성경적 죄가 되는 이유
미국 서부의 가장 큰 도시인 LA는 지진이 잦기로 유명하다. 가정집은 지하실을 짓지 못하게 되어 있고 내진(耐震) 시설에 경비가 많이 들기에 고층빌딩도 그리 많지 않다. 필연적으로 도시가 아주 넓게 퍼져있다. 도시가 너무 커서 아무리 미국이라도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 시설을 하기가 벅차고 거의 모두가 자기 자동차로 출퇴근한다.
년 중 날씨가 따뜻해서 살기 좋기에 이민자의 천국으로 인구집중현상이 심하다. 자연히 자동차는 넘쳐나고 도시 고속도로를 비롯한 도로망이 잘 발달되어 있긴 해도 러시아워엔 밀리기 일쑤다. 사고라도 나면 한두 시간 늦어지는 것은 예사다. 약속 시간에 다른 이유로 늦더라도 오는 도중에 차가 밀렸다는 거짓 핑계를 대어도 쉽게 양해 될 정도다.
따라서 어쩌다 고속도로가 밀리지 않고 소통이 잘 되면 혹시라도 다시 막히거나 사고가 날까봐 정신없이 빨리 달린다. 그렇게 서두르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다. 괜히 여유부리다가 늦어서 거짓 핑계 대는 것보다 낫다. 또 모든 것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선 남들보다 뒤떨어지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러나 신자의 경우 혹시라도 다시 교통체증에 걸려 늦을 수 있으니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에는 결정적 하자가 있다. 성경은 심지어 그런 생각을 악하다고까지 말한다. 성경에 교통체증에 관한 가르침까지 있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그와 유사한 경우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장사꾼이 다른 도시에 가서 장사하여 돈을 벌겠다고 말한 것을 두고 악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렇게 계획해서 실행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은 아니다. 신자 장사꾼은 아무 소원도 계획도 없이 두 손 놓고 기도만 한다고 하나님이 성공하게 해주지 않는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 보듯이 계획을 세워 작은 일에서부터 충성하며 성실히 일해야 한다.
사도는 지금 “허탄한 자랑”을 하는 것을 두고 “다 악한 것”이라고 했다. 장사치가 한 말은 단지 계획일 뿐인데 왜 자랑이라고 표현했는가? 가서 큰 이익을 남긴 후에 사람들 앞에 뻐기지도 않았고 이제 그러겠다고 자기 소원과 계획만 말했을 뿐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의 말을 곰곰이 따져보면 몇 가지 자랑이, 그것도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다고 할 만한 자랑이 분명 포함되어 있다. 그 말만 떼어내어 다시 잘 살펴보자.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利)를 보리라.”
우선 “오늘이나 내일이나” 또 “일 년을 유하며”라고 이주해서 장사할 시기와 체류 기간을 자기가 한정지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자칫 새로운 사업에 대한 일정계획을 짜는 것까지 잘못이라고 오해해선 안 된다. 신규사업계획에 시간표가 붙지 않으면 상상이나 꿈으로 끝난다. 연도별 사업 진행 계획이 따라야 함은 필수적이다.
초점은 “이(利)를 보리라”는 말에 있다. 바로 허탄한 자랑이자 악한 것의 핵심이다. 신자가 사업 개시 날짜를 정하고, 어느 도시에서 장사할지 그 장소도 정했고, 일 년이라는 사업 기간도 정하면서, 그 기간 안에 그곳에서 얼마든지 이익을 볼 자신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 같은 천재 사업가는 아무리 장사가 잘 안 되는 곳에 가서, 어떤 신규 사업을 벌이더라도, 단 일 년 안에 궤도에 올리는 것은 물론 이익까지 낼 수 있다는 뜻이다. 요체는 자기라면 얼마든지 쉽게 이익을 낼 수 있다고 큰소리친 것이다.
요즘으로 쳐서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워렌 버핏 정도도 안 되는 사람이 건방지게 그런 말을 했다고 교만하다거나 잘못이라는 뜻이 아니다. 신자이면서 자기 세운 계획대로 이뤄지고 안 이뤄지고는 오직 하나님께 달렸음을 잊고 있다는 것이다. 또 계획을 세워 시행을 하더라도 그분의 선하신 간섭과 인도를 간절히 구해야 함에도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일 일을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단정 짓지 말라고 한 것이다.
LA에서 신자들마저 혹시 고속도로가 다시 막힐까 염려되어 뚫리기만 하면 급하게 내닫는 것도 같은 성격이다. 일 분을 빨리 가려고 과속하다 사고를 내어 평생을 먼저 가게 된다는 위험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그 생각에는 자기가 가고 있는 전방(前方)에선, 그것도 자기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사고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확고한 전제가 되었다. 모든 일을 오직 하나님의 주관에만 맡겨야 함에도 그러지 않았기에 악한 것이다.
맹세도 악한 것이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5:33-37)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같은 맥락의 가르침을 주셨다. 야고보 사도가 자기가 계획한 대로 이룰 수 있다는 장담을 허탄하고 악한 것이라고 했듯이, 예수님은 맹세하는 것도 “악으로 좇아 난다”고 하셨다. 이전의 율법사들은 단순히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또 맹세한 것을 꼭 지키라고만 가르쳤다. 주님은 더 나아가 아예 맹세 자체를 도무지 하지 말라고 하신다. 맹세의 내용이 아무리 선하고 의로워도, 또 꼭 지켜야만 할 큰 담보를 걸더라도 결코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다.
실은 구약에도 그와 비슷한 가르침이 이미 있다.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 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전5:5,6) 서원을 갚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에 아예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이 더 나아가 맹세를 악하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의 머리카락 수자는 최하 십만이며 하루에 빠지는 개수는 정상인의 경우도 40여개라고 한다. 그렇게 흔한 머리카락도 인간이 제 멋대로 할 수 없다. 희고 검게는 물론 빠지는 것조차 막지 못한다. 그런데 어찌 앞날을 인간이 미리 알고서 특정사실을 예단(豫斷)할 수 있는가? 특별히 맹세를 해야 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일 텐데 그럴 수는 정녕 없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는 더더욱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한다. 하나님께 맹세를 건다고 해서 인간이 그 맹세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더 늘어나거나, 그렇게 맹세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꼭 이뤄지도록 간섭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일 뿐이다. 정말로 우주에 오직 한 분인 절대적 존재다. 그분은 오직 당신 스스로에 의해서 존재하고 유지하는 유일한 분이시다. 다른 모든 존재는 그분의 피조물이자 반드시 그분께로부터 자기가 존재할 수 있는 근거와 힘을 공급받는다. 모든 피조물의 시작과 끝은 물론 그 사이의 전체 과정은 그분이 은혜를 베풀어야만 가능하고 또 지속된다.
반면에 피조물이 그분에게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의로운 신자가 아주 선한 뜻으로 맹세했다고 해서 그대로 이뤄지게 해준다는 보장은 절대 없다. 자신의 능력으로 온전히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신자의 경건한 기도의 응답도 오직 그분의 절대적이고 온전한 뜻과 계획에 따른 것이지 신자의 소원, 열정, 갈급함, 믿음, 의로움 등도 기도응답의 일차적 조건이, 그분의 부차적인 고려 사항은 될지 몰라도,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치려는 목적으로, 엄밀히 말해 신자가 믿고 소원하고 기대하는 마음속에서조차, 뭔가 강제력을 사용하려 시도하는 것은 금물이다. 예컨대 40일 작정 기도, 일주일 금식기도, 합심통성 기도 등이 기도 응답을 신속히 받아내는 수단이나 통로로 동원되어선 안 된다. 우리의 진심과 소망과 열정을 있는 그대로 그분께 올려드리는 방안은 될지 몰라도 말이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선교지에 들어가서 복음 전파의 열매를 맺으려고 뜨겁게 기도했는데 가자마자 풍토병이나 사고로 죽는 경우도 많지 않는가? 물론 그 선교사의 진심만은 하나님께 온전히 받아들여진다. 또 당신의 계획이 있었다면 그런 순교 후에 당신만의 방법과 때에 부흥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신다. 즉 선교사의 기도가 당신의 고려사항이 된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어쨌든 그런 부흥도 일차적으로 하나님만의 절대적 계획과 섭리 때문인 것이다.
만약에 평소에 아주 의로우며 믿음이 신실한 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는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지키지 못했다고 치자. 믿는 자들 사이나, 주변의 불신자들 사이에 어떤 반응이 생기겠는가? 기독교의 하나님은 당신의 충실한 종의 요구도 들어주지 않는 아주 매정한 신이라고 오해 내지 매도하지 않겠는가? 대부분의 신자들이 그분은 절대적으로 그분일 뿐임을 모르니까 본의 아니게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되는 꼴이다. 결과적으로, 법적 용어로는 미필적 고의로 십계명의 제 3 계명,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를 어기는 죄를 짓게 되는 셈이다.
이단 교파의 결정적 잘못 간혹 일부 이단교파에서 법정에서 선서하는 것이나, 국가에 대한 맹세마저 거부하는 경우를 본다. 이는 성경을 해석하는 영적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말 단어에 대한 뜻도 미처 모르는 너무나 어리석은 경우다. 또 그런 가르침에 어지간히 깨인 사람들도 넘어가니 웃을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하다. 정말로 사단이 그 영을 미혹한 결과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
성경에서 맹세를 금지하는 근본 이유는 살펴본 대로 장래 일을 인간이 절대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법정선서, 국기에 대한 맹세, 또 단적 예로 병원의 수술 동의서 같은 서류에 사인하는 것은 미래의 일을 예단하는 일이 아니다. 본인이 충분히 그대로 지킬 수 있는 사항에 대해서 사람들 앞에서 서약 혹은 서원하는 것일 뿐이다. 맹세와 서약은 그 단어적인 의미조차 다르지 않는가?
알기 쉽게 설명해보자. 법정에서 증언 선서는 재판 과정 중에 절대로 거짓 증거를 하지 않겠다는 본인의 진심과 각오를 밝히는 일이다. 이미 일어난 과거 일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는 작업에 참여하는 아주 의로운 일이다. 그런데도 사람의 장래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선서하면 안 된다고 하면, 그 의미는 실상 자신의 마음이 변하여 거짓 증거도 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럼 결과적으로 그 교파에선 신자더러 법정에서 거짓말해도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꼴이다.
법정 선서는 하나님의 절대 주관 아래 있는 장래 일을 인간인 주제에 미리 예단 보장하는 맹세와는 차원이 전혀 다르다. 자신이 자신을 충분히 제어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일에 대해 더 큰 진정성을 내포시켜서 자신과 사람들 앞에서 약속하는 행위일 뿐이다. 자기와 사람들에게 약속마저 못하게 하는 계명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국기에 대한 맹세나 수술 동의서 등도 똑 같은 성격이다. 스스로 국가에 충성하겠다는 뜻이며, 수술로 혹시 부작용이 일어나거나 치료가 불가능해도 반발하거나 배상청구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의사만 면책하려는 뜻이 아니라 여러 부작용이 있지만 지금껏 밝혀진 모든 의학 정보를 정확하고 충분히 제공했기에 본인과 가족이 수술하기 원해야만 시술하겠다는 뜻이다. 이런 것들마저 맹세이니까 하지 말라고 하면 국가에 반역하겠으며, 수술하지 않아서 환자가 더 악화되어도 좋다는 뜻이 된다.
“예나 아니오”만 하라. 문제는 간혹 신실한 신자 가운데도 성경 말씀의 문자적 의미조차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성경 속의 화자(話者)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나 내용에 맞추어서 앞뒤 문맥을 검토 분석하지 않는다. 예의 예수님의 말씀 중에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이는 일차적으로 대인관계에 적용되는 말씀이다. 하늘에 대고 맹세하지 말라고 해서 하나님에게까지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다. 하늘에 대고 맹세하는 것도 상대편 인간을 설득시키려는 뜻이지 이미 설명한 대로 하나님께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가 아니지 않는가?
따라서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이 확실히 지킬 수 있는 일이라면 예하고, 지킬 수 없는 일은 아니오라고 하면 되지 구태여 맹세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미 살펴본 대로 악한 것이므로 도무지 맹세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서 아니오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에게 솔직한 진심을 밝혀야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다고 버티기는 물론, 공개적으로 아니오라고 거절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분의 계명은 어디까지나 신자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우리를 더 아름답고 거룩하며 진실하게 변모시키려는 뜻이다. 물론 우리가 연약하고 죄의 본성이 남아서 그대로 지킬 수 없는 경우는 종종 있다. 그럴 때는 우리의 영적 연약함과 가난함에 대해 애통해 하고 또 순종할 수 있는 힘과 열정을 달라고 기도하면 된다. 어떤 계명이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그대로 순종하려고 예 해야지 아니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성경은 분명히 그분의 계명을, 특별히 인간 사회에 지켜야 할 계명은 약속 있는 계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대로 따르면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한다고 약속하셨다.(엡6:2) 절대자로서 자기를 따르는 교인에게 일방적으로 종교적 의무와 책임만 강요하려는 뜻이 아니다. 아바 아버지의 입장에서 당신을 순전히 따르는 자녀들에게 사랑과 은혜로 복 주시려는 계명이다. 아니 정말로 계명대로 사는 자라면 별도의 은혜가 따르지 않아도 그 자체로 얼마나 복된 삶인지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바울 사도도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20)고 권면하지 않는가? 또 그 바로 앞에서도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고후1:18)고 강조했다. 하나님의 약속은, 또는 약속 있는 계명은 그대로 믿고 순종만 하면 된다. 아니 그만한 축복도 이 세상에는 없다. 바울은 그 이유를 한 마디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1,32,38,39)
신자는 하나님에게는 항상 예로, 사람들 사이에는 맹세는 말고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예하고 그렇지 않으면 아니오라고 해야 한다. 또 예라고 한 것은 끝까지 지켜야 한다. 정작 항상 아니오라고 거부해야할 상대는 따로 있다. 하나님의 정 반대편에 있는 사단과 죄악에 대해선 언제 어디서 어떤 경우에도 단연코 No라고 해야 한다. 요컨대 인간은 하나님과 동료인 사람은 사랑하고 사단과 그 세력은 저주하라는 것이다.
신자의 교만과 겸손 예수님이 신자더러 맹세를 금지한 뜻과 연관시키면 신자의 교만과 겸손에 대한 이해도 이젠 달라져야 한다.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나 예의를 규정하는 차원에 그쳐선 안 된다. 쉽게 말해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정도가 성경적 겸손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것은 신자 이전에 인간이면 누구나 지켜야 할, 비록 신자가 되어서도 제대로 못 지키지만, 도덕적 기준이다.
실은 아주 예의 바른 겸손을 가장한 지극히 악한 교만도 많다.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점잖게 물러서는 모습이 겸손한 것 같지만 그 마음에 조금이라도 까마귀 노는 골에 백로는 가지 않겠다는 뜻이 있다면 사악한 죄다. 다른 이들을 까마귀로 낮춰 본 것도 잘못인데, 자기를 백로로 높였으니 두 배의 교만이기 때문이다. 간혹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었기에 불신자들 앞에서 자신을 높이며 사단에 미혹된 영인 그들을 괄시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똑 같은, 아니 더 심한 죄다.
예수님은 산상 수훈에서 마음의 숨은 동기까지 들춰내어서 죄로 정죄하셨다. 예쁜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으면 간음한 것이라고 했다. 신자의 겸손은 숨은 동기까지 겸손해져야만 온전한 겸손이다. 진정으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주께 하듯 자신을 낮추어서 온전한 사랑으로 섬겨야 한다.
그런데 진짜 성경적 겸손은 여기서도 하나 더 나아가야 한다. 신자의 모든 행동, 말, 생각의 선하고 악함이 반드시 하나님만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이 하나에서 열까지 그분의 거룩하고 완벽한 손 안에 붙잡혀 있음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그런 철저한 인식에 따라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분의 의로운 통치를 온전히 받아서 그분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따라서 교만과 겸손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따져야 한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5:5-7) 베드로 사도는 교회 안에서 젊은이들이 장로에게 순복하는 겸손을 먼저 권했다.
하나님이 그런 겸손한 자에게 은혜 주신다고도 했다. 그런데 곧 이어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고 한다. 단순히 인간관계에서 서로 태도가 낮아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염려를 완전히 주께 다 맡겨 버리는 것이 참 겸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다 맡기지 않으면 겸손이 아닌 것 즉, 교만이라는 것이다. 신자 특유의 교만과 겸손의 기준이다.
거기다 자세히 보면 장로도 젊은이에게 순복해야 한다는 뜻의 말씀이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했다. 청년들만 겸손하라는 뜻이 아니다. 청년이 장로에게 겸손한 것은 쉽다. 그 반대로 장로들이 청년에게 겸손하는 것은 솔직히 힘들다. 교회 내의 모든 문제를 자신들의 경험이나 지식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완전히 맡기지 않고는 어지간해선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신자가 스스로의 힘으로 해치우겠다고 덤비면 교만이다. 신자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능력을 무시한 셈이다. 때로는 아주 의롭고 경건한 일인 것 같아 기도도 하지 않고 당연히 해버리면 그것도 교만이다. 신자더러 성경이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라고 권한 근본적 이유다.
다른 말로 신자가 단순히 그분의 계명만 지켜선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 일에 총력을 쏟으면 자칫 종교적 의무를 다한 것뿐일 수 있다. 그분의 사랑을 충만히 받아 누리고 또 그분의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결코 어려운 과제가 아니다. 그분의 능하신 손 아래 모든 것을 맡기면 된다. 만약 그러지 못하면 신자로서 가야할 길을 못가는 셈이다. 바로 그것이 교만인데 신자가 신자답지 못했기 때문이다.
천성이 급한데... 조급함이 죄라고 해서 체질상 성격이 급한 것까지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천성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심지어 체질적으로 빨리 서두르는 그 자체가 은사와 재능이 될 수도 있다. 베드로의 예에서 보듯이 일단 믿음이 생기면 하나님께 열성적으로 순종하는 특성이 있다. 자칫 전체를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우를 부르긴 해도 말이다.
그러나 그 반대되는 느긋함도 반드시 선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자칫 게으름을 불러올 뿐이다. 반면에 매사에 세밀하게 검토 분석해서 실수를 가능한 줄일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서로 돕는 배필로서 힘을 합쳐 섬기며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들은 예수님을 머리로 모신 공동체를 이루어서 그 안에서 각기 역할만 다른 지체로서 충성해야 한다. 성격이 급하든 느리든 그분의 뜻에만 예하면서 그분의 나라를 확장시켜야 한다.
지금 논하는 조급함은 그런 천성적 급한 성격이 아니다. 천성이 급하든 느긋하든 상관없이 어떤 일을 진행하면서 자꾸만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급하고 초조해지는 증상을 말한다. 그렇게 되는 원인이 무엇인가? 그 일이 자기가 예상하거나 계획해 놓은 일정대로 잘 진행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기가 정하거나 예상한 대로 반드시 그 일이 진행되어야 정상이라는 고집이 자기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야고보 사도가 말한 장사꾼과 같은 인식이다. 만약 일 년 안에 이익을 볼 것이라고 예상 내지 계획했는데 그렇게 안 되니까 조급해진다면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는 악한 일이 되지 않는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16:9)
베드로 사도는 더 놀라운 진술을 한다.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라고 했다. 그리고는 바로 이어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8절)라고 했다. 근신하고 깨어 있는 것은 일차적으로 죄를 멀리하고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여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앞 절과 연결시킨 문맥상의 적용은 우는 사자 같은 사단이 가장 삼키기 좋은 자는 염려를 주께 완전히 맡기지 않는 자라는 뜻도 된다.
사자가 운다면 배가 고파 환장을 한 것이다. 신자를 향한 사단의 음흉한 탐욕에는 포만감이란 영원토록 생기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모든 세대의 신자를 미혹시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 균열, 왜곡, 약화 시키려는 것만이 그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신자의 가장 기본 의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을 갖고서 그에 따라 행동하는 자이다. 그런데도 그분의 능하신 손 아래 모든 것을 맡기지 않고 염려하고 있다면 신자의 본분을 벗어난 것이다. 다시 불신자의 자리로 떨어지는 셈이다. 사단이 구태여 사냥할 필요가 없이 이미 그의 먹이 창고에 들어 가버린 꼴이다. 천성이 급하든 느긋하든 자기가 정한 일정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고 조급해지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시 강조하자면 신자가 신자답지 못하면 이미 죄에 빠졌거나 빠지고 있는 중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으로 하나님다우심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만이 참 믿음이자 또 참 겸손이다. 하나님 대신에 자기가 해치우겠다는 것만큼 큰 교만이 없다. 또 그만한 죄도 없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것도 죄이며, 조급증도 그에 못지않은 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조급함이 죄가 되는 이유가 성경에 의하면 최소 둘은 더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