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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 이익 삶과 사상을 따라] 3.성호 이익의 가계-경기일보20130128
명문집안서 태어나…불합리한 제도 개혁 꿈꾼 '실학의 별'
경기일보 | webmaster@kyeonggi.com 승인 2013.01.28
평안도 지도
조선 실학의 별로 반짝이는 성호(星湖) 이익은 찬바람이 몰아치는 1681년 음력 10월 18일, 평안도 운산에서 이하진과 안동 권씨의 사이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이익이 태어날 때 그의 아버지 이하진(李夏鎭, 1628~82)은 유배를 살고 있는 처지였다.
그러나 유배를 오기 전인 1680년 봄만 해도 그는 진주 목사였고, 이전에는 사헌부 대사헌과 도승지를 역임한 실세였다. 비유하자면 대통령비서실장과 검찰총장을 지낸 권력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이하진은 머잖아 조정으로 복귀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1680년 여름, 이하진이 속해 있던 남인 정권이 무너지고 서인이 조정을 장악하는 경신환국이 일어났다. 영의정 허적, 대사헌 윤휴, 훈련대장 겸 공조판서 류혁연 등 남인의 핵심들이 사형을 당하고 유배를 떠났다. 이하진의 동지이자 훗날 이익이 스승으로 모신 동래 부사 이서우도 이때 파직되었다. 경신환국은 이하진과 첨예하게 대립하던 병조판서 김석주가 벌인 정치공작이었다. 김석주는 명신으로 이름을 떨친 잠곡 김육의 손자였으나 조선 역사상 최고의 공작정치가였다.
이하진에게 조정으로 복귀하라는 명이 아니라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를 떠나라는 어명을 받았다. 운산은 진주에서 2천리나 떨어져 있었다. 이하진은 아내와 자식들을 이끌고 그 멀고 먼 길을 걸었다. 이익의 유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1682년 여름, 아버지가 유배지 운산에서 운명했다. 《숙종실록》6월 26일자에 이하진의 죽음을 전하고 있다.
“운산으로 멀리 귀양 보냈던 죄인 이하진이 죽으니, 나이가 55세였다. …경신년 가을에 대간이 아뢰어 멀리 귀양 보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분한 마음에 가슴이 답답해하다가 죽었다. 사람의 성품이 거칠고 객기가 많았는데,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있어 함부로 자랑하고 잘난 체하였다.”
그러나 아들 이익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공은 기백이 충실하여, 일찍이 친족 가운데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공이 응시하자 귀신이 바로 피하였다. 기억력도 출중하였다. 그러나 재주를 믿고 스스로 태만하지 않았다.” 아들이 그리는 아버지의 풍모와 정적들이 중심이 되어 기록한 실록의 기사는 이처럼 큰 차이를 보인다.
모친 권씨는 어린 아들과 남편의 시신을 이끌고 남편 조상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광주군 첨성리(瞻星里)로 돌아왔다. 이익은 평생 부친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것을 매우 원통하게 여겼다. 이익이 평생을 살았던 첨성리는 광주군의 ‘비래지(飛來地)’인데 ‘날아가서 길게 이어진 곳’이란 뜻이다. 광주군은 바다를 접한 곳이 없어서 첨성리를 통해 바다로 통하였던 것이다. 첨성리는 반농반어의 한적한 마을이었다. 첨성리는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1906년에는 안산군, 1914년에는 수원군, 1949년에는 화성군에 속했다가 1986년에 다시 안산시에 속하게 되었다.
이상의 초상화
이상의 계회도
이익의 본관은 여주이다. 그의 8대조 이계손(李繼孫)은 병조판서를 지냈고, 증조부 이상의(李尙毅)는 의정부 좌찬성을 지냈으며, 할아버지 이지안(李志安)은 사헌부 지평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된 남인계 명문이었다. 증조부 이상의의 집이 서울 서대문 안 소정동에 있었기 때문에 ‘정동 이씨’라고도 불렸다. 이익은 “8세조 경헌공(이계손)은 집안을 일으킨 개조(開祖)”라 하여 사당을 종손의 집에 새로 세우고 해마다 한 차례씩 제사 지냈다.
이익은 어렸을 때부터 잔병치레가 잦았다. 어머니 권씨는 약주머니를 가지고 다니며 아들을 돌보았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병약했던지 권씨는 글도 읽지 못하게 말렸을 정도였다. 다행히도 이익은 어린 시절 자연과 호흡하며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었다. 바닷가는 이익의 집에서 1km 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성호사설》 ‘게’라는 항목을 보면 “갯가와 바다 연안에 게가 많은데 내가 본 것은 열 종류나 된다”는 기록이 있다.
이익은 열 살이 넘어 둘째형 이잠(李潛)에게 글을 배웠다. 이잠은 그의 이복형으로 22살이나 많았다. 형의 교수법이 뛰어났던지 이익은 이내 학문의 즐거움에 빠져들었다. 이하진은 자녀들에게 귀한 유산을 물려주었다. 이하진이 1678년에 사신으로 연경에 갔다가 청나라 황제에게 선물로 받은 은으로 사온 수천 권의 장서가 그것이다. 어머니 권씨도 공부에 열중하는 막내를 보고 “이 아이는 감독할 필요 없구나. 이처럼 학문을 좋아하니 이제 나는 걱정할 필요조차 없게 되었다”라며 기뻐하였다.
이익은 25세가 되는 1705년에 증광시 초시에 합격했다. 그러나 답안지에 이름을 쓰는 것이 격식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탈락되어 2차 시험인 회시에는 응시하지 못했다. 그런데 1706년 둘째형 이잠이 역적으로 몰려 의금부에 체포되어 곤장을 맞다가 숨을 거두는 사건이 생겼다. 진사였던 이잠은 상소를 올려 장희빈의 아들의 원자 책봉을 반대하는 노론 중진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화를 당했던 것이다.
이잠의 죽음은 성호의 인생행로를 바꾸어 놓았다. 그는 이후 과거를 통해 벼슬에 나서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대신 그는 셋째형 이서(李?)와 사촌형 이진의 문하를 드나들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옥동선생’으로 불리는 이서는 중국 필법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필법인 ‘동국진체’를 창안한 서예의 대가였다. 그보다 열 살 많은 친형 이침(李沈)이 숙부 이명진에게 양자로 가는 바람에 어머니는 성호가 모시게 되었다. 이침의 아들이 영조대 문단을 주도했던 이용휴이며, 손자가 정조대에 정치가로 활약한 이가환이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그는 몸소 농사를 지으며 집안 살림을 돌보아 어머니의 근심을 덜어드렸다.
성호는 둘째형이 죽은 뒤 삼각산과 관악산을 유람하고, 경상도로 내려가 백운동서원과 도산서원을 둘러보고 청량산을 유람하며 울적한 마음을 달랬다. 33세가 되던 1713년에 기다리던 아들을 얻었다. 당시 그는 경전을 재해석하는 첫 과제로 《맹자》를 읽고 있었다. 그래서 ‘맹자가 아름다운 재산을 내려주셨다[孟錫嘉用]’는 뜻에서 ‘맹(孟)’자를 따고 항렬인 ‘휴(休)’를 붙여 ‘맹휴’라고 이름을 지었다. 맹휴가 3살이 되던 1715년에 모친 곽씨가 일흔의 나이로 별세했다. 홀어머니 슬하에서 애지중지 자란 그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큰 슬픔이었다.
아들 맹휴는 매우 총명하고 영특했다. 성호는 아들에게 깊은 사랑을 쏟았지만 가르침만큼은 반드시 법도대로 하였다. 조금만 잘못해도 용서하지 않고 엄히 꾸짖었다. “자제가 재주가 있어도 항상 가르침이 잘못될까 봐 매양 걱정한다. 두려운 게 없기 때문에 망가지는 것이다.”
맹휴가 30세에 장원 급제하여 예조 정랑을 거쳐 만경 현령에 제수되었다. 성호는 아들이 임지에 함께 가기를 청했으나 목씨를 모시고 가서 봉양하게 하고 자신은 고향 집에 남았다. 아들이 남은 녹봉으로 음식물을 보내오면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백성에게 거두는 것은 열에 여덟아홉은 옳지 못한 것이니, 이것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이 옳겠느냐? 내가 내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내 밭을 갈면 굶주림과 추위는 면할 수 있다”며 생선과 술만 받아 이웃과 친척, 제자들과 함께 모여 같이 마셨다.
그러나 아들은 노년의 성호에게 시름을 안겨주었다. 맹휴의 병이 갈수록 깊어갔기 때문이다. 성호가 71세 되던 1751년 여름, 맹휴는 39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손자 구환을 두었던 것이다. 부인 목씨도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성호의 애제자 윤동규는 부인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부인 사천 목씨는 성품이 유순하여 지아비를 받들 때 한결같이 순종하여 어김이 없었고, 집안 식구들과 화목하여 내조의 공을 이루었다. 내가 선생의 문하에 수십 년을 출입하였지만 비복을 꾸짖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성호의 시름은 깊어졌지만, 그의 명성은 널리 퍼져나가 ‘성호장’으로 젊은 선비들이 몰려들었다. 안정복, 권철신, 신후담, 이가환 등이 그의 제자들이다. 성호는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아울러 사회제도의 불합리한 점을 개혁하고자 경전을 재해석하는데 몰두하였다.
1763년 12월 17일, 마침내 성호는 영원한 안식을 찾았다. 향년 83세. 그가 몸이 약했음에도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농사를 짓고 음식을 적게 먹으며 자기관리에 철저했기 때문이다. 이익은 성호라는 호처럼 조선을 밝힌 별처럼 빛나는 학자들을 모여들게 한 맑고 넓은 호수 같은 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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