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2년 고구려에서 율령이 반포
391년 고구려 광개토 대왕이 즉위
392년 고구려 광개토 대왕이 백제를 침공, 백제 진사 왕 사망, 아신 왕 즉위
400년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이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
414년 고구려의 장수 왕이 광개토대왕릉비를 건립
427년 고구려가 평양성으로 천도
433년 신라와 백제가 나제동맹을 체결
475년 백제 문주 왕이 즉위,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
512년 신라의 이사부가 우산국을 병합
520년 신라에서 율령이 반포
532년 신라가 금관가야를 병합
538년 백제가 남부여(이하백제)로 개명, 사비성으로 천도
554년 백제와 신라의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하고, 나제동맹이 결렬,
백제 위덕 왕이 즉위
562년 신라가 대가야를 병합
598년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 여·수 전쟁이 시작
612년 수나라가 고구려를 재침, 을지 문덕 이 살수대첩에서 수나라 군대를 대파
632년 신라선덕여왕이 즉위
642년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 보장 왕이 즉위
645년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 양 만춘이 안시성 전투에서 당 태종의 군대를 대파
648년 신라와 당나라가 나당동맹을 체결
660년 백제가 멸망
661년 신라 문무 왕이 즉위
668년 고구려가 멸망
676년 신라가 당나라의 군대를 몰아내고 한반도의 남부를 통일
(고구려 고분벽화)
1.서론
오늘날 사람들에게 고분벽화는 친근한 문화유산이다. 어렵고 구체적인 내용을 몰라도 그림책을 보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보며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고분벽화를 통해 우리는 옛날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그 생활 모습을 보면서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알 수가 있다. 그 중에서도 고구려의 고분벽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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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많이 남아 있는데, 그 벽화들은 중국의 집안 지역과 북한의 평양 지역에 분포하고 있어 실제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적어 아쉽기만 하다. 이보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고분벽화의 관리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 집안 지역의 고분벽화는 중국 당국의 무관심으로 인하여 훼손되고 변형되어 버렸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수렵도와 무용도의 모습은 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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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때 찍은 사진들로만 감상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이다. 또한, 최근에는 벽화가 도굴되는 사건도 일어나 역사 연구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하지만 북한에 있는 고분벽화는 철저한 관리로 보존에 노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고분벽화의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어 역사 연구에 많은 보탬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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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벽화는 세계 최고의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 그러기에 더욱 보존에 노력해야 하며,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가치를 알고, 고구려 고분벽화에 한층 더 가까워지고자 발표를 준비했다. 그럼 앞으로 나올 내용을 통해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겠다.
2.본론
1)고분벽화의 의의
고분벽화란 옛 무덤 내부에 그려진 그림으로 고대 회화의 발달을 보여줄 뿐 아니라 다양한 내용으로 사상 신앙, 생활 풍습등 사회상을 반영하는 역사적 자료이다.
한국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분모에 벽화를 장식하는 풍습이 4세기부터 발생하여 7세기
전반까지 고구려에서 크게 유행 하였다
고구려 사 연구에 있어서 고분 벽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현대의 매스컴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가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기록으로 나타내 주는 신문이라면 벽화는 당시
사회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텔레비전 영상과 같기 때문이다.
2)고구려 고분 벽화의 발견
고구려 고분벽화가 1500년의 긴 잠을 깬 것은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진 다음 해인 1906년.
당시 강서군수 이우영과 일행 몇몇이 마을 사람들의 안내로 널방(무덤 칸)의 네 벽이 사신으로 장식된 강서대묘와 강서중묘의 신비한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면서였다.
1907년에는 프랑스의 고고학자 샤반이 중국 지안의 산연화총에서 벽화를 발견하고 다음해 이를 학계에 소개하면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됐다. 이 같은 발견 시기와 지역적 특성 때문에 이후 고구려 고분벽화의 발견·조사·연구는 자연스럽게 해방 전에는 일본인들이, 해방 후에는 북한과 중국인 학자들이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3)역사적 가치와 연구사례
고분벽화 1점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고고학·미술사·종교학·역사학·심지어 천문학까지 다양한 학문 제 분야의 지식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알면 쉽게 이해가 된다.
고구려가 4세기 초 낙랑과 요동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한(漢) 문화 및 유목 계 북방문화와의
접촉을 통해 새로운 장의 미술을 수용하면서 등장한 것이 고분벽화의 출현이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 사이의 경계에서 이뤄지는 단절과 유대의 표현 같은 것이다.
따라서 고분벽화에는 당대인들의 현실인식과 내세관이 그대로 반영 되고,그 내용은 대체로
생활풍속과 장식무늬와 그리고 사신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1)제1기 고분 벽화:
3세기 말에서 5세기 초 사이에 축조된 제1기 고분벽화에는 주로 생활풍속을 그렸다.
중국 지린 성 지안 현 각저총의 씨름도가 대표적이다. 각저총에는 널찍한 방에서 밥상을 받은 주인과 그 옆에 꿇어앉은 두 여인의 그림(주인실내생활도)도 보인다.
(2)제2기 고분 벽화: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초까지로 연꽃무늬 장식이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평양의 동명왕릉, 중국지린현의 통구 12호분, 장천 4호분이 대표적. 저자는 이 연꽃무늬를 당시 고구려에 전래된, 정토화생을 주제로 한 불교의 내세관으로 해석한다.
(3)제3기 고분 벽화:
사신도가 전면에 나서는 제3기(6세기 중엽~7세기 중엽). 그 유명한 평양의 강서대묘와 우산리 3호분, 지린현의 무용총과 통구사신총 등이다. 특히 무용총천장에 지금까지 선명히 남아있는 사신도의 위치를 통해 사신을 죽은 자의 새로운 삶터를 지키는 존재로 해석하는 대목은 KBS 1TV '역사 스페셜'의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을 연상시킬 정도로 정교하다.
3.결론
국사 수행평가 중에 생생하게 살아난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다시 한 번 고구려가 정치. 군사적 강국일 수 있었던 이유를 발견하고 우리 선조들의 기상뿐 아니라 문화와 예술세계에 대하여 경의를 갖게 되었다.
동시에 최근 고구려 사 왜곡과 관련하여 우리들의 바른 역사인식이 우선되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역사를 바르게 보존하고 지켜가는 지킴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