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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 김기림
1930년대 조선일보에서 문인기자들의 시대를 화려하게 연 사람은 김기림(金起林)이다. 김기림의 선배 문인이자 기자였던 염상섭은 기자와 작가는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라 생각했다. 기자들의 글쓰기란 기능적인 것이고 순수함이 거세된 글쓰기로 이해되는 측면이 강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문인들에게 예술은 생활과 분리되는 것이었다. 문인이 기자라는 직업을 갖는 것은 생활을 위해 예술을 희생하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그것은 부끄러움 그 자체였다. 일본에서도 “신문은 번창해가고 문장은 졸렬해진다”는 속언이 유행했다.
염상섭은 이 이중생활을 ‘쌍수집병(雙手執餠, 양 손에 떡을 쥐는 것)‘의 두 갈래 물결이라 불렀다. 그는 “기자 생활을 하면서 창작 생활을 겸무겸직으로 하자면 머리의 조직부터 달라야 하고 체질과 건강이 쬔병아리나 골생원으로 생겨서는 안 될 일”이라고 기자와 문인을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갈라놓는다.
그러나 김기림에게 오면 상황이 달라진다. 김기림은 신문기자와 작가라는 존재의 양 둔덕 중 어느 곳이 자신의 등을 편안하게 뉘어 주는 곳인지 알려 하지 않는다. 그에게 ‘신문기자/작가’는 멀리 있는 양극단이 아닌 서로 겹치면서 지우는 지점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염상섭이 신문기자와 작가를 ‘역설’의 측면에서 이해하려 했다면, 김기림은 ‘평행’의 차원에 두고 있었던 셈이다. 김기림은 현대생활의 총체를 이루는 작업이 신문기자임을 표나게 내세운다.
김기림은 ‘신문기자의 꽃’이라는 사회부 기자에서 출발해 학예부로 진입해 들어간다. 그는 선배 문인들과 달랐다. 이 ‘다르다’는 의식은 김기림을 비롯한 신세대 문인기자들의 선명한 자기 정체성을 형성했다. 이원조, 백석, 함대훈, 박팔양, 이여성, 한설야, 이석훈 등이 조선일보에서 김기림과 함께 혹은 앞서거니 혹은 뒤서거니 하면서 기자 생활을 했다. 그들은 직장 동료이자 친구였으며 내면적 소통이 가능한 문학적 동지들이었다.
▲ 김기림(왼쪽)과 신석정. 사회부 기자부터 시작한 김기림은 기행문에서부터 모더니즘 시론, 비평, 수칠,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다.
김기림은 일본대학 문학예술과를 졸업하고 돌아와 1930년 4월 20일 조선일보 1기 공채기자로 입사했다.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은 “일류라고 손꼽히는 인물”(《김기진 문학전집 Ⅱ》들의 경연장이었다. 사장 신석우, 부사장 겸 주필 안재홍, 편집국장 한기악, 정치부장 이선근, 교정부장 장지영, 학예부장 염상섭, 경제부장 정수일, 사회부장 이여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김기림이 속한 사회부에는 홍종인, 박윤석, 양재하, 신영우, 이원용 등이 있었고, 정치부에는 함대훈, 홍양명, 학예부에는 안석주 등이 있었다.
김기림은 그의 시대가 필요로 하는 기자상에 적합한 품격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시인이자 수필가로 문단에 이름을 등재했던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문학적 인간형이기도 했지만 문학 이론가, 비평가, 시사논평가로서 충분한 역할을 해 보일 만큼 이지적이고 분석적인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것이 사회부 기자를 하면서도 학예면에 문학사에 기록될 많은 문학적인 성과물을 남긴 한 요인이기도 했다. 동료 기자 이원조는 김기림이 “숫자투성이의 통계표만 가지고도 재미있는 기사를 만들어 낼 줄 아는 재주를 가졌다”(조선일보 1939년 12월 15일)고 말했다.
당대의 문인, 기자들에 대한 스케치를 남긴, 여류 작가이자 조선일보 여기자였던 이선희는 <작가 조선인 군상>(《조광》 1936년 4월)이라는 글에서 김기림을 한 마디로 “모범청년”이라 불렀다. 신문사 동료들은 김기림이 단 한 번의 지각이나 조퇴를 한 적이 없을 정도로 성실한 인물이며 능력 또한 탁월하다고 평가한다는 것이다. 그는 혼자서 4~5명의 일을 거뜬히 해치울 정도로 일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회사 간부들의 김기림에 대한 신임도 두터웠다. 김기림은 결혼해서 남매를 두고 있었는데, 사윗감을 찾던 장안의 명문가들이 이 사실을 알고는 한숨을 쉴 정도였다는 것이다.
“기자 채용시험에 입격(入格, 합격)하야 사회부에 재근(在勤) 중이다. 출생지가 함북 성진인 만큼 기질조차 씩씩한 북도의 기품을 타고나 어디로 보든지 튼튼하고 믿음성 있는 청년으로 보인다.“ ― 《철필》 1931년 2월
김기림은 “노는 자리에는 유쾌한 면모를, 맛있는 음식 앞에서는 즐겁게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는 자신을 과장하거나 자신의 일을 엉뚱하게 포장하지 않았다. 정주 출신인 이석훈은 처음 김기림을 만나보고 놀랐다. 이지적이고 분석적이며 감성적인 그의 글에서 풍기는 김기림의 인상은 창백하고 연약한 성격의 문인기자의 풍모였다. 그러나 실제의 김기림은 그와는 달리 “북구적인 굵은 선과 축구 감독 같은 스타일”의 풍모였다는 것이다. 어쩐지 글쟁이로서의 인간형과 어긋나 있다는 느낌이었다. 근심, 우울, 센티멘털리즘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명랑성과 그 이면에 “가만히 흐르는 나이브한(순진한) 성품의 감각”이 김기림을 매력 있는 인간으로 기억되게 했다.
김기림은 무엇이든 시험을 쳐서 되는 일이라면 자신 있다는 태도였다. 수재형이었다. 그는 조선일보 공채 합격 통지서를 받아들고 “만약 종로의 보신각에 불이 났다면 어떻게 기사를 쓰겠느냐는 문제가 나왔는데, 그때 내가 쓴 답이 맞은 모양이지” 하면서 유쾌한 웃음을 웃었다(《김기림 평전》). 《철필》은 그를 소개하면서, “신문계에는 초보이면서도 외근 구역으로 가장 까다로운 종로서를 맡아 맹렬히 활동하고 있고 앞날의 많은 기대를 갖고 있다”고 했다. 김기림은 종로경찰서 외에도 동대문서와 각 사회단체를 출입하였고 각 사건 현장에 특파돼 필명을 날린다.
그가 공채기자가 된 후 처음 특파원으로 간 곳은 간도 5·30 폭동 현장이었다. 그곳을 취재하고 그는 <간도기행>을 남기는데, 이 글에서 민족주의적이고 지식인다운 현실 감각을 뚜렷하게 보여 준다. 그래서인지 <간도기행> 11편에는 검열에 걸려 연판이 삭제된 흔적이 있다. 문학사 기술에서 ‘모더니스트’로 평가되는 측면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젊고 패기만만하면서 민족주의적인 시각을 가졌던 기자 김기림의 감수성이 잘 드러나 있는 글이다.
우리는 돌아간다.―포학한 자연의 학대 속에 그러고 무지한 중국인의 압박과 탄환 속에 동만에 산재한 백만의 형제를 남기고―
(중략)
잘 잇거라 해란강아―
용정 시민 제군 건재하여라―청춘의 피를 불이는―그러고 그들의 영광스러운 ‘죽엄’을 유혹하는 광야여 너의 달콤한 속삭임하고도 작별하자. 조국에서 ‘일’이 우리를 부르고 있다.
(중략)
떠날 때 만개하엿든 뜰 앞에 한 포기 월계화의 ‘영광’도 한 떨기 꽃송이도 남기지 않고 무참히도 시들었다. 뜰 위에 이리저리 흩어진 꽃잎새의 시체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홀홀한 용정에의 여행을 회고한다.
― 조선일보 1930년 6월 20일
김기림은 서양 문예에 대한 깊고 폭넓은 시각으로 모더니즘 시론이나 문학이론, 비평, 수필, 시 등을 발표하면서 학예면의 중요한 필진이 된다. 시인이자 수필가, 시론가로 김기림이 이름을 얻게 된 데에는 조선일보에 실린 그의 글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글쟁이로서의 김기림의 욕심은 소설에까지 월경(越境)해서 <번영기繁榮期>(조선일보 1935년 11월 1~13일), <철도연변鐵道沿線>(《조광》 1935년 12월~1936년 1월) 같은 소설을 남긴다.
그는 1936년 4월 조선일보를 휴직하고 일본 동북제대 영문학부에 입학한다. “무엇이든 시험만 치면 되었던” 김기림은 와세다대학 영문학부에도 합격했지만 동북제대를 택했다. 김기림은 회사에 사표를 내지만 방응모 사장은 휴직 처리하고 학비를 장학회(서중회)에서 보조해 주도록 한다. 김기림이 일생동안 금전적인 보조를 받은 일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방응모의 김기림에 대한 인상은 학구적인 면과 지적인 면이 결합된 것이었다. 장학 사업과 인재 양성, 그리고 그 인재들을 신문사에 끌어 오는 ‘방응모 식 인재 등용술’ 원칙에 김기림은 적합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김기림은 1938년 경성으로 돌아온다. 보성전문과 연희전문에서 교수로 초빙했지만 조선일보와의 인연을 끊을 수 없었던 그는 복직해 학예부 차석을 거쳐 1940년 학예부장이 된다. 학비 보조를 받은 것이 마음의 짐이 되기도 했을 테지만, 학문 연구자나 문학가로서의 길 못지않게 신문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중요성을 간파했던 것이 기자라는 직업을 다시 택하는 데 주저하지 않게 했을 것이다. 신문 학예면에 학술 논문과 비평이 실릴 정도로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고 서로 장단점을 보충하고 있던 당시 언론의 성격도 김기림의 선택을 도왔을 것이다.
문우 박태원은 김기림의 귀경을 소리 높여 축하했다.
“돌아오셨으니 반갑소. 오랜만에 서울 거리를 함께 거닙시다. 술은 배우셨소? 당신의 <철도연선>은 나와 함께, 죽은 이상이도 매우 좋게 본 작품이었는데, 그 뒤로 다시 창작 활동이 없는 것은 술을 배우지 못하기 때문인가 하오.” ― 《여성》 1939년 5월
김기림을 비롯한 문인기자들은 일제 말기로 접어들면서 우리 말로 된 문학을 발표하기는커녕 일상적인 차원에서조차 조선어를 말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힌다.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폐간되고 조선어 잡지들도 줄줄이 친일을 강요당하거나 서서히 폐간되었다.
1940년 8월 10일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김기림은 경성(서울)에서의 모든 것을 접고 함북 경성으로 들어간다. 환멸과 분노와 우울이 그의 내면을 지배했을 것이다. 함북 경성중학에서 김기림은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어린 학생들의 눈엔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지낸 유명한 시인이 시골학교 교사로 온 것이 의아하게 보였던 보양이다. 당시 학생 중에는 훗날 시인이 된 김규동과 영화감독이 된 신상옥이 있었다. 어느 날 김규동이 “저, 선생님 같으신 분이 왜 여기 내려오셨어요?”라고 물었다. 도수 높은 안경을 쓴 시인 선생은 하늘에 허한 눈길을 주며 답했다.
“조용히 혼자 울 곳을 찾아왔다.”
▲ 광복 후 대학에서 강의하던 김기림은 6·25 때 납북되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았다.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외출 시에는 단정하게 정장을 하고 꼿꼿한 걸음으로 멀리 앞을 내다보며 스포티한 걸음으로 “영국 신사처럼 걷던 훤칠한 키의 스승”으로 제자들에게 기억되던 김기림은 그렇게 경성을, 조선일보를 떠나갔다. 그가 남긴 시 <청동>의 한 구절처럼, “도도히 흘러온 먼 세월”이 “가지가지 향기를 피우는” 꽃으로 피어나게 하는 그런 청동 그릇 하나를 그는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조선일보 폐간 이후 김기림의 글은 《여성》, 《조광》 등에 간간이 보이다가 1942년 《춘추》지 7월호에 <청동>, <분원유기>를 끝으로 사라진다.
광복이 되자 김기림은 서울로 돌아와 임화가 주도해서 조직한 좌파 문학단체 ‘문학가 동맹’에 가입해 시부(詩部) 위원장을 맡아 해방 공간의 여느 지식인들처럼 정치적인 삶에 뛰어든다. 기자가 아니었으면 학자가 되기에 적합했던 김기림으로서는 어쩐지 ‘과한 활동’ 이었다. 그는 좌익 통신사인 공립통신의 편집국장을 역임하기도 한다.
해방 공간에서 좌파 문인들의 월북 회오리가 거세게 몰아쳤고 종로 뒷골목에는 월북 문인들이 남기고 간 전단이 나뒹굴었다. 김기림은 고독하고 적막했다. 이제 그가 돌아가야 할 곳은 지친 정신을 뉘일 글의 곳간이었다. 그는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학교의 전신)에서 강의를 맡기로 돼 있었다.
“공연히 바람 부는 거리를 헤매면서 허송세월을 산 셈이지요. 이제부턴 대학에 들어앉아서 착실하게 내게 알맞은 일에 마음을 담아봐야겠어요.” ― 《김기림 평전》
그러나 6·25가 터지자 좌파 문학 활동과의 끈질긴 인연은 결국 그의 납북으로 이어졌다. 납북 이후 그의 행적은 묘연하다. 남한에서 1988년 월북 문인 해금조치가 단행되었을 때 김기림도 해금됐다. 그가 조선일보에 발표한 수많은 시, 수필, 시론 등도 그때서야 자유롭게 읽힐 수 있었다. 김기림이 조선일보 기자 생활을 하면서 남긴 많은 글들은 한 시대의 지성의 성채(城砦)로서 기억되고 보존될 것이다.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靑 무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책 『조선일보 사람들』 중 발췌 p.455~462
[출처] 조선일보 사람들 - 김기림 편|작성자 도짱
길
나의 소년시절은 은(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喪輿)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호져,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江)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주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덕과 그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애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태양의 풍속
태양아,
다만 한 번이라도 좋다. 너를 부르기 위하여 나는 두루미의 목통을 빌려 오마. 나의 마음의 무너진 터를 닦고 나는 그 위에 너를 위한 작은
궁전(宮殿)을 세우련다. 그러면 너는 그 속에 와서 살아라. 나는 너를 나의 어머니 나의 고향 나의 사랑 나의 희망이라고 부르마.그리고 너의
사나운 풍속을 좇아서 이 어둠을 깨물어 죽이련다.
태양아,
너는 나의 가슴 속 작은 우주의 호수와 산과 푸른 잔디밭과 흰 방천(防川)에서 불결한 간밤의 서리를 핥아버려라. 나의 시냇물을 쓰다듬어 주며
나의 바다의 요람을 흔들어 주어라. 너는 나의 병실을 어족들의 아침을 다리고 유쾌한 손님처럼 찾아오너라.
태양보다도 이쁘지 못한 시. 태양일 수가 없는 서러운 나의 시를 어두운 병실에 켜 놓고 태양아 네가 오기를 나는 이 밤을 세워 가며 기다린다.
연가(戀歌)
두
뺨을 스치는 바람결이
한결
거세어 별이 꺼진 하늘 아래
짐승처럼
우짖는 도시의 소리 피해오듯 돌아오면서
내
마음 어느 새 그대 곁에 있고나
그대
마음 내게로 온 것이냐.
육로(陸路)로
천리(千里) 수로(水路) 천리
오늘
밤도 소스라쳐 깨우치는 꿈이 둘
가로수
설레는 바람소리 물새들 잠꼬대……
그대
앓음소리 아닌 것 없고나.
그대
있는 곳 새나라 오노라. 얼마나, 소연하랴*
병
지닌 가슴에도 장미 같은 희망이 피어
그대
숨이 가뻐 처녀같이 수다스러우리라.
회오리
바람 미친 밤엔
우리
어깨와 어깨 지탱하여
찬비와
서릿발 즐거이 맞으리라
자빠져
김나는 뭉둥아리
하도
달면 이리도 피해 달아나리라.
새나라
언약이 이처럼 화려커늘
그대와
나 하루살이 목숨쯤이야
빛나는
하루 아침 이슬인들 어떠랴.
나비의 여행
ㅡ 아가의 방 5
아가는
밤마다 길을 떠난다.
하늘하늘
밤의 어둠을 흔들면서
수면(睡眠)의
강(江)을 건너
빛
뿌리는 기억의 들판을,
출렁이는
내일의 바다를 날으다가
깜깜한
절벽,
헤어날
수 없는 미로(迷路)에 부딪치곤
까무라쳐
돌아온다.
한
장 검은 표지(表紙)를 열고 들어서면
아비규환(阿鼻叫喚)하는
화약 냄새 소용돌이
전쟁은
언제나 거기서 그냥 타고
연자색
안개의 베일 속
파란
공포(恐怖)의 강물은 발길을 끊어 버리고
사랑은
날아가는 파랑새
해후(邂逅)는
언제나 엇갈리는 초조(焦燥)
그리움은
꿈에서도 잡히지 않는다.
꿈길에서
지금 막 돌아와
꿈의
이슬에 촉촉히 젖은 나래를
내
팔 안에서 기진맥진(氣盡脈盡) 접는
아가야!
오늘은
어느 사나운 골짜기에서
공포의
독수리를 만나
소스라쳐
돌아왔느냐.
공동묘지
일요일
아침마다 양지 바닥에는
무덤들이
버섯처럼 일제히 돋아난다.
상여는
늘 거리를 돌아다보면서
언덕으로
끌려 올라가군 하였다.
아무
무덤도 입을 벌리지 않도록 봉해 버렸건만
묵시록의
나팔 소리를 기다리는가 보아서
바람
소리에조차 모두들 귀를 쭝그린다.
조수(潮水)가
우는 달밤에는
등을
일으키고 넋없이 바다를 굽어본다.
아롱진 기억의 옛바다를 건너
당신은
압니까.
해오라비의
그림자 거꾸로 잠기는 늙은 강 위에 주름살 잡히는 작은 파도를 울리는것은 누구의 장난입니까.
그리고 듣습니까. 골짝에 쌓인 빨갛고 노란 떨어진 잎새들을 밟고 오는 조심스러운 저 발차취 소리를―
클레오파트라의 눈동자처럼 정열에 불타는 루비빛의 임금(林檎)이 별처럼 빛나는 잎사귀 드문 가지에 스치는 것은 또한 누구의 옷자락입니까.
지금 가을은 인도의 누나들의 산호빛의 손가락이 짠 나사의 야회복을 발길에 끌고 나의 아롱진 기억의 옛 바다를 건너 옵니다.
나의 입술 가에 닿는 그의 피부의 촉각은 석고와 같이 희고 수정(水晶)과 같이 찹니다.
잔인한 그의 손은 수풀 속의 푸른 궁전에서 잠자고 있는 귀뚜라미들의 꿈을 흔들어 깨우쳐서 그들로 하여금 슬픈 쏘푸라노를 노래하게
합니다.
지금 불란서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검은 포도송이들이 사라센의 포장에 놓인 것처럼 종용이 달려 있는 덩굴 밑에는 먼 조국을 이야기하는 이방(異邦)
사람들의 작은 잔채가 짙어 갑니다
당신은 나와 함께 순교자의 찢어진 심장과 같이 갈라진 과육(果肉)에서 흐르는 붉은 피와 같은 액체를 빨면서 우리들의 먼 옛날과 잊어버렸던
순교자들을 이야기하며 웃으며 이야기하며 울려 저 덩굴 밑으로 아니 오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