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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B개핀 스크랩 ?개혁주의 전통에 대한 은사운동의 도전들-상 / 리챠드 개핀
헤렘 추천 0 조회 24 16.03.16 14:2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개혁주의 전통에 대한 은사운동의 도전들-상 (리챠드 개핀)

진실 2010.06.24 01:14  http://blog.daum.net/kkho1105/8055 

 

 

 

개혁주의 전통에 대한 은사운동의 도전들
                                                      

         리챠드 개핀 박사**) 이 논문은 1997년 10월 15일-23일까지 서울 서문교회에서 개최된 제4차 국제개혁교회대회(the International Conference of Reformed Churches)에서 발표된 것이다. 발표자 리챠드 개핀(Richard B. Gaffin, Jr)은 미국 정통장로교회(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의 대표로 참석했으며, 현재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조직신학 주임교수로 가르치고 있다.
        번역 대본은, Proceedings of the International Conference of Reformed Churches, 1997 (Alberta: Inheritance Publications, 1997), pp. 162-183.


        발표자에게 주어진 과제는 은사 운동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 특히 은사 운동이 개혁주의 신학과 교회 생활과 차이를 나타내는 부분, 그렇기 때문에 도전이 되는 부분들에 대해서 성경적이고 개혁주의적인 관점에서 검토하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 문제들은 사실상 우리 대회(conference)에서 새로운 안건은 아니다. 전에도 성령으로의 세례(Langley 1989, J. van Bruggen 교수)와 신약의 예언(Zwolle 1993, N. Wilson 교수)에 관한 논문을 읽었기 때문이다. ICRC Proceedings, 1989, Winnipeg, 1989, 186-205; ICRC Proceedings, 1993, Neerlandia, 1993, 116-135.

        우리가 논의할 주제는 대체로 두 부분으로 집약된다:
1) 오순절/성령으로의 세례의 중요성, 그리고
2) 성령의 어떤 은사들의 중단에 관한 문제.
이 자리에서 두 영역에 관해 면밀히 검토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선택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개혁 교회들의 대회로 모인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갖고 있다고 판단되는 부분에 집중하면서 논의를 시작하겠다. 여기에는 은사 운동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개혁교회 공동체 안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차이점들도 포함될 것이다. 우리가 마땅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문제에 대해서 의견이 서로 다를 수 있는 여지는 분명히 존재한다. 본인은 이어지는 토론에서 이 발표의 불균형이 시정되기를 기대한다. 말을 명료히 하기 위해서, 본인은 “은사 운동”을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로, 즉 오순절주의자뿐 아니라 스스로를 비(非) 오순절 은사주의자로 자처하는 자들을 모두 포함하는 말로 사용함을 밝힌다.

1. 오순절/성령으로의 세례; 그리스도, 성령, 그리고 교회/기독교인들
1.1 오순절은 구원의 서정(序程, ordo salutis)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historia salutis)이다.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가르치는 신약의 모든 구절은 사실상 오순절을 지향하거나 회고한다. 따라서 그때 실제로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 그 사건의 중요성이 무엇인가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으로의 세례”(1:5), “성령의 임함”(1:8), “성령의 부어 주심”(2:33), “성령의 선물”(2:38) 등이 다양하게 또한 서로 바꿔 쓸 수 있게 기록되었고, 본인도 그리하겠다.
하는 것은 크고도 중차대한 문제인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바른 대답을 내는 것은 사실상, 구원의 역사(historia salutis)와 구원의 서정(ordo salutis)라는 한 가지 근본적 구분을 인식하고 그 구분을 흐리게 하지 않는 것에 달려 있다. 달리 말하면, 모든 사람을 위해 ‘단번에 모두’(once-for-all) 성취된 구원과 죄인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적용되는 구원을 구분하는 것, 그리스도의 성취된 사역과 하나님의 백성이 지속적으로 그 은택을 받아 누리는 것을 구분하는 것에 바른 대답이 걸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범주적 구분을 여기에서 도입하면서, 본인은 또한 구원의 서정이라는 표현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 물론 그 구분이 여전히 유용하다고 생각하지만 - 다소 넓은 의미로 사용함을 밝힌다. 여기에는 모든 신자들에게 동일한 중생과 회심과 칭의, 그리고 모든 신자들에게 정도의 차이가 있는 성화가 포함될 뿐 아니라, 신자들에 따라 차이가 있는 성령의 은사와 힘주심도 구원의 서정에 포함된다. 환언하면, 여기에서 사용하는 구원의 서정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적 경험과 공동의(corporate) 경험을 모두 포함한다.
오순절/성령으로의 세례에 대한 정당하고 전반적인 이해를 하는 데 필수적인 것은 오순절/성령으로의 세례가 구원의 서정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에 위치함을 인식하는 것이다. 오순절의 중요성은 일차적으로 구원 역사적이며 경험적인 것이 아니다. 이 두 측면을 양극화시키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지만 - 이에 대해서는 후론할 것이다 - 오순절 날 일어난 일의 요점은, 반복될 수 있는 패러다임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며, 개인으로든 공동으로든성령을 특정하게 경험하는 것에 대한 기준을 정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1.2 “주”와 “영”[성령]의 관계의 중요성
“개혁교회의 성령론은 주(Kurios)와 영(Pneuma)의 관계를 정당하게 알 때에야 비로소 바르게 될 수 있다”고 펠러마(W. V. Velema)는 주장했다. De leer van de Heilige Geest bij Abraham Kuyper ('s Gravenhage, 1957), 246: "Een gereformeerde pneumatologie zal alleen dan zuiver kunnen zijn, wanneer ze het verband tussen Kurios en Pueuman goed ziet." L. Floor (Hy wat met die Heilige Gees doop [Pretoria, 1979]의 표지 다음 면에서 재인용했음.
이 진술의 참됨, 추축(樞軸)과 같은 진실성은 더 이상 과장하기 어렵다. 이제 승귀하신 그리스도와 영[성령] 사이에 존재하는 독특한 관계를 나타난다는 점에서, 이 진술은 특히 오순절의 일차적 중요성이 놓인 곳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즉 부정적으로 표현하여, 그 관계가 적절히 인식되지 않고, 그에 따른 매우 중요한 결과들이 적절히 평가되지 않는다면, 오순절/성령으로의 세례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오해될 수밖에 없다.
이 점에 대한 지속적인 오해가 은사 운동의 독특한 강조점들을 특징 지우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여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오순절에 관한 유사한 오해들 혹은 적어도 비슷하게 부적절한 이해가 몇몇 개혁주의적 모임이나 장로교 모임을 포함한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따라서 다른 논의에 앞서서, 그리스도와 영의 관계에 집중함으로써 오순절의 의미를 명료하게 해야 할 것이다.

1.3 고린도전서 15:45
신약 전체에서 이 관계에 대한 다소 난해한, 그러나 매우 놀랄만한 핵심적 선언은 고린도전서 15:45의 마지막 구절에 나온다: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이 확언은 바울의 기독론과 성령론에 핵심적일 뿐 아니라 또한 실제적으로 오순절과 그 중요성에 대한 한 문장의 주석과 같다. 어떤 사람에게는 꼼꼼한 주해가 필요하겠으나 그 방향의 노력은 각주에서 제시하도록 하고, 여기에서는 다음의 몇몇 요점만 살펴보겠다.
1) 고린도전서 15:45의 영(Πνε?μα)은 한정적이며, 성령을 가리킨다. 바울은 성령 이외의 다른 “살려주는” 분을 알지 못한다. 특히 최근에 들어서는 다양한 교파의 주석가들이 이러한 견해를 취하지만, 개혁주의 진영에서 이러한 해석을 취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H. Bavinck, Our Reasonable Faith (Grand Rapids, 1956), 387/Magnalia Dei (Kampen, 1931), 369; R. Gaffin, Jr., Resurrection and Redemption [=The Centrality of the Resurrection] (Phillipsburg, NJ, 1987/1978), 78-92; J. Murray, The Epistle To the Romans (Grand Rapids, 1959), 1:11; H. Ridderbos, Paul. An Outline of His Theology (Grand Rapids, 1975), 88, 222-3, 225, 539/Paulus, ontwerp van zijn theologie (Kampen, 1966), 90, 243, 247, 602; J. Versteeg, Christus en de Geest (Kampen, 1971), 특히 43-67; G. Vos, The Pauline Eschatology (Grand Rapids, 1979/1930), 10, 168-69, 184, 312/『바울의 종말론』(엠마오, 1989), 25-26, 242-44, 263, 424.
        고린도전서 15:45의 영이 성령을 가리킨다는 결론은 중복되면서 서로 강화하는 몇몇 고려에 근거한 것인데, 필자에게는 결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a) 45절의 영(πνε?μα)과 신령한(πνευματικ?ν, 44a, b, 46절)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명사와 형용사이다. 형용사 πνευματικ?ν은, 특히 본문처럼 육적(ψυχικ?ν, 혹은 “육의”)과 대립되는 쌍으로 쓰일 때, 다른 신약에서 한 번만 더 나오는 이 대립(고전 2:14-15)의 빛에 비취어볼 때, 성령의 사역과 그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을 가리킨다. 이 사실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 이 형용사를 일관되게 사용한 것에 의해서도 더 분명히 확정된다(예를 들면, 롬 1:11; 엡 1:3; 골 1:9). 그런데 에베소서 6:12는 유일한 예외인 것처럼 보인다. 고린도전서 2:6-16에서는 성령의 활동, 즉 하나님의 계시된 지혜를 주고받는 일에 있어서 성령의 주권적이고 독점적인 사역이 근접 문맥의 일차적인 관심사이다.  불신자(ψυχικ?? ?νθρωπο?, 육에 속한 사람, 14절)에 대비하여, 신령한 자(? πνευματικ??, 15절)는 성령에 의해 내주(內住)와 조명과 동기 부여와 지도를 받는 신자이다(4-5절). 이 구절을 삼분법적 인간론의 근거로 삼으려는 오래된 노력은, 특히 여기에서 πνευματικ??를 절정에 도달한 인간 영혼을 지시하는 것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은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며, 따라서 포기되어야 할 것이다. J. Murray,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2 (Edinburgh, 1977) 23-33, 특히 23-9를 보라.
        b) 45절 후반부의 분사 수식어도 동일한 결론을 가리킨다. 마지막 아담은 단지 “영”(πνε?μα)이 된 것이 아니라 “살려주는” 영(πνε?μα ζ?οποιο?ν)이 되었다. 살려준다는 이 동사에 대한 바울의 다른 용례는 결정적인데, 특히 고린도후서 3:6의 총괄적인 선언에서 그리하다: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여기에서 “영”(τ? πνε?μα)은 3절의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주석가는 거의 없다. 또한 로마서 8:11에서도 고린도전서 15장 구절과 비슷하게 진술하여, 신자의 몸을 일으키는 “살려주는” 사역을 성령에게 돌린다(참조. 요 6:63).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표준적인 영어 번역은 πνε?μα(성령)을 소문자 에스(s)로 시작하는 영(spirit)으로 번역하여 45절의 뜻을 적어도 모호하게 만들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주목할 만한 예외로는, 대문자로 시작하는 “Spirit”으로 정당하게 번역한 The Living Bible(이제 새로 바뀌어 The Living Translation으로 출간되었다)과 Today's English Version이 있을 뿐이다. 비록 샅샅이 조사한 것은 아니고 개략적으로 한 것이지만, 대문자와 소문자가 구별되는 언어 - 화란어, 남아프리카 공화국어(Afrikaans),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 의 번역들에도 동일한 애매성이 노정된다. 본인이 찾을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예외는 Die Bybel (Kaapstad: Verenigde Protestantse Uitgewers, 1959)였다.

2) “살려주는 영[성령]”은 그리스도에 대한 무시간적 서술이 아니라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분으로 “되었다.” 이렇게 “됨”의 시점은 그의 부활, 혹은 좀더 넓게 그의 높아지심이다. 고린도전서 15장의 논증의 흐름은 이점을 매우 명확히 드러낸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말하자면, 그의 선재하심이나 성육신 때문에, 혹은 그의 부활을 제외한 다른 고려 때문에 “살려주는 분”이 되셨다면, 바울이 15장에서 하듯이 신자의 부활을 논증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물론 이 말은 그리스도의 선재하심이나 성육신이 바울에게 있어서 중요하지 않거나 근본적이지 않음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여기에서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15장에 나오는 핵심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부활-추수’의 “첫 열매”(20, 23절)로서 그는 “살려주는 영[성령]”(45절)이며, “살려주는 영[성령]”으로서 그는 “첫 열매”이다.
        부활하신 분으로서 마지막 아담은 승천하셨다. “둘째 사람”으로서 그는 이제 그의 승천 때문에 “하늘로부터” 나셨고(47절), 근접 문맥을 살펴보면 이 전치사구는 거의 확실하게 높아지심에 대한 서술어이지 기원에 관한 서술은, 즉 이전 존재로부터 성육신 하신 것에 대한 서술은 아닌 것이다. 하늘에서 나신 자와 하늘에 속한 자로서(47, 48절), 그는 신자들(하늘에 속한 자들, 48절)이 그의 형상을 입을 자인 것이다. 신자들은 육체적인 부활을 할 때 그의 형상을 완전히 입게 될 것이다(49절, 참고. 빌 3:20-21).
“하늘에 속한 자”(48절)이시다. 이 모든 것은, “살려주는 영[성령]”이 된 마지막 아담은 바로 ‘승귀하신’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한다.
3) 근접 문맥에서(42-49절), “살려주는”은 그리스도의 미래의 행동, 즉 그가 신자의 죽을 몸을 일으킬 것(22절)을 예기한다. 그러나 바울의 가르침의 전반적인 맥락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현재’의 사역도 또한 여기에 암시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들의 부활의 생명은 미래의 일일 뿐 아니라 현재의 일이다(예를 들면, 갈 2:20; 골 2:12-13; 3:1-4). 부활하신 자로서 그리스도는 이미 성령의 종말론적이고 부활시키시는 능력으로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계신다. 바로 여기에 오순절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고려가 놓여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론하겠다.
4) 그렇다면, 부활/승귀는 그리스도 자신에게도 중대하고도 획시대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음이 고려되고 있다. 즉 그리스도 자신이 성령에 의해서 극적으로 변화된 것과 그리스도가 성령을 받는 것은 양자 사이에 새롭고 영원한 동일시, 혹은 하나됨의 결과를 가져왔다. 바빙크가 이 진리를 서술하는 방식은 인상적이다: “그러나 성령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소유(property)가 되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 안으로 흡수되었으며, 혹은 그리스도에 의해 동질화된 것이다 [...als het ware door Christus in zichzelven opgenomen]. 그의 부활과 승천으로 그리스도는 살리는 영이 되었다” (Our Reasonable Faith, 387/Magnalia Dei, 369).
이것은 이전에도 그리스도와 성령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함께 사역했음을 부인하는 말은 아니다. 이 시대 이전에도, 심지어 옛 언약 아래에서도 이미 전(前) 성육신의 그리스도(Christ preincarnate)와 성령이 공동으로 함께 하면서 사역하였다. 고린도전서 10:3-4는, 이 구절에 대한 주해가 어떻든지간에 그 사실을 가리킨다. 참조. 베드로전서 1:10에서는 구약 선지자들 안에서 포괄적으로 사역하였던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특별히 지칭된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는 그들의 연합 활동에 안정되고 완성된 근거가 구속의 역사 안에서 부여되었다. 결국 그러한 사역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이제 역사 안에서 실제적으로 또한 명확하게 성취하신 사역에 영화로운 관을 씌우는 결과인 것이다. 이 완성된 관계를 포착하여, 바울은 그리스도, 즉 마지막 아담이 살리는 영[성령]이 되었다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하나됨 혹은 연합은, 비록 포괄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어떤 특정한 면에 제한된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 연합은 그들의 활동, 즉 부활의 (=종말론적인) 생명을 주는 활동에 관계한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연합은 “기능적”(functional) 혹은 과거의 신학적 범주를 사용하면, (“존재론적”인 언급한 바와 같이, 그의 진정한 인간성에 관한 한, 그리스도에 의해 경험된 실제적인 변화/변형이 관련되기는 한다. 부활과 승천으로 말미암아 그가 이전에는 갖지 못했던 것, 즉 ‘영광스러운’ 인간성을 그는 이제 소유하게 되었다(참조. 고후 13:4).
것이 아니라) “경륜적”(economic)이고, 혹은 “종말론적”(eschatological)이라고 부를 수 있다. 삼위일체의 제2위와 제3위의 구분은 결코 없어지지 않았다. 바울의 논증의 범위와 구속 역사적 초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본질적-영원적, 본체론적-삼위일체적 관계는 여기에서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무시간적이고 영원하게) 누구인가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이 ‘되었는가,’ 역사 안에서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것도 특히 “마지막 ‘아담’”과 “둘째 ‘사람’”으로서의 그의 정체성에 대해서, 즉 그의 진정한 인간성의 관점에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역사 비평학의 전통이 오랫동안 특징적으로 주장한 것처럼, 여기에서 “기능론적” 기독론을 찾으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일이다. “기능론적” 기독론에서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위격적 차이를 부인하고, 따라서 고대 교회의 삼위일체 교리의 공식과 어긋난다. (성부) 하나님, 주로서의 그리스도, 그리고 (거룩한) 영을 나란히 위격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 이것이 후대의 교리적 공식의 기초를 놓는 것인데 - 바울에게서 명백히 나타난다 (예를 들면, 고전 12:4-6; 고후 13:13; 엡 4:4-6). 특히 최근의 문헌에서는 G. Fee, God's Empowering Presence. The Holy Spirit in the Letters of Paul (Peabody, MA, 1994), 825-45, 특히 839-42를 참조할 것. 그는 바울의 하나님에 대한 명백한 삼위일체적 이해를 훌륭하게 입증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바울의 삼위일체론적 개념이 지금의 논점은 아니지만, 고린도전서 15:45의 해석에 대한 정당한 전제가 된다.

5) 고린도전서 15:45의 마지막 구절은 고린도후서 3:17의 상반절에서 이어지는 바울의 진술과 밀접히 연결된다: “주는 영이시니.” 여기에서 “주”(? κ?ριο?)는 분명히 그리스도를 지칭할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와 성령의 동일시가 지지된다. 이것은 또한 각주 4에서 인용된 다른 학자들의 견해이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에 점점 더 많은 수의 주석가들이 17절 상반절의 “주”는 16절에 인용된 출애굽기 34:34을 성령에게 적용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래서 17절 하반절에서 18절까지의 기독론적 언급을 최소화하거나 심지어 삭제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의 예를 들면, L. Belleville, Reflections of Glory (Sheffield, 1991), 256ff.; J. Dunn, "2 Corinthians III.17 - 'The Lord Is the Spirit,'"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N.S., 31/2 (Oct. 1970), 309-20; Fee, Empowering Presence, 311-14; S. Hafemann, Paul, Moses, and the History of Israel (T?bingen, 1995), 396-400; R. Hays, Echoes of Scripture in the Letter of Paul (New Haven, 1989), 143-4; N. Wright, The Climax of the Covenant (Edinburgh, 1991), 183-84. 그러나 17절 하반절은 이미 “주의 영”이라고 하면서 “영”과 “주”를 구분한다. 따라서 바로 이어지는 18절에 비취어 보면, “주”는 그리스도를 지칭할 것이다. 18절에서 “주의 영광”은 그리스도와 구분되는 성령의 영광은 확실히 아니고,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그래서 그 영광을 보면서, 혹은 깊이 묵상하면서, 신자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감을 바울은 계속하여 가르치는데, 그 형상은 높아지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형상 이외의 다른 것은 아닌 것이다. 계속되는 구절에서, 특히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말하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가르치는 4:4은 그 결론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또한 로마서 8:29와 고린도전서 15:49도 주목하라). 바울이 알았던 바, 신자가 “수건을 벗은 얼굴”로 볼 수 있는 변화를 일으키는 유일한 영광은, 확실히 성령에 의해 그들에게 또한 그들 안에 전달된  “그리스도의 얼굴에 [복음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4:6)인 것이다.
여기에서 본질적이고 삼위일체적인 정체성과 관계성이 부인되거나 흐릿해지지는 않지만, 사실 그것은 바울의 고려 밖에 있다. 근접 문맥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처럼 (특히 18절을 보라) 성령과 ‘영광스럽게 된’ 그리스도의 연합 활동이 바울의 관심사이다. 우리는 고린도후서 3:17의 “주는 영이시니”의 “이시니”(?στ?ν)는 고린도전서 15:45의 “되었다”에 기초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경험한 승귀는 성령과의 새롭고 전례가 없는 친밀한 (활동적) 관계를 낳았다. 그리스도와 성령은 여기에서 특히, 고린도전서 15장의 부활 생명(the resurrection life)과 유사한 상관어인 (종말론적) “자유”(3:17 하반절)를 주는 사역에서 하나이다. 그 상관 관계는 특히 로마서 8:2의 표현에서 명약관화하게 드러났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이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1.4 성령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사역의 상관 관계
그리스도의 승귀에 근거한 이 동일시가 바울이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가르치는 모든 것의 기초를 이루고 있음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사역이 아닌, 신자 안에서의 성령의 사역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로마서 8:9-10에서 그러한 것을 볼 수 있다. 짧은 구절이지만, “너희가 영에 있고”(9a), “영이 ...... 너희 안에”(9b), “그리스도에 속한”(9d, 한글 개역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번역되었음. 빈번히 나오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과 실질상 동의어이다),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10a) 등이 ‘상호 교호적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모든 가능한 경우의 조합인 셈인데, 이러한 표현들이 각기 다른 경험을 서술할 리는 없는 것이고, 동일한 실체의 여러 차원들을 모두 묘사한 것이다. 동시에 성령과의 교제가 아닌 그리스도와의 교제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성령의 현존은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것은 성령에 의해 소유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에 있어서 이러한 일치는 소 자의적인 신적 합의(divine arrangement) 때문은 아니고, 일차적으로는 우리의 경험보다 진실로 ‘우선하는 것’ 즉 그리스도의 경험 안에 있는 것 때문이다. 즉 성령이 이제 “그리스도의 영”(9c)이고, 그리스도가 이제 “살려주는 영”이 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와 성령의 위격적 구별을 부인하고 절대적인 동일성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뒤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즉 신자들 안에서의 성령의 중보 기도는(26-27절)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중보의 기도와(34절) 구별된다.
다른 곳에서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는 것”이다(엡 3:16-17).

1.5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의 성령
지금까지 살펴본 바울의 주장은 예수님의 교훈에서 볼 수 있는 강조점과 연결되고, 뿐만 아니라 강화한다. 요한복음 14:12 이하에서 예수님의 임박한 떠남과 승천은 - “이는 내가 아버지께 감이라”(12절. 참조. 20:17) - 승천하신 예수님의 간구에 의해 성부 하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을 수반한다. 이 구절들에서 “너희”는 시간과 장소의 구별이 없이 모든 신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나[예수]와 함께 있었던”(15:27)이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지금” 그가 “아직도” 그들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감당치 못할” 자들이었다(16:12). 예수님께서는 직접적으로는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이루셨고(20:22), 그 보냄을 통하여 만대의 교회에 보내셨다.
(16절) 참조. 26절: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이러한 과정은 이미 앞의 7:39에서 암시되었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지금 생각하고 있는 성령의 임재 이전과 이후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축으로 결정된다. 즉 전자는 후자의 함수(function)이다(참조. 7:39). 오순절은 “요한복음의 오순절”(20:22)과 사도행전 2장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다룰 수 없겠다. 본인의 Perspectives on Pentecost (Phillipsburg, NJ, 1979), 39-41/『성령은사론』(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44-48를 보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획시대적이고 ‘단번에 모두’의 중요성을 지녔다.
그러나, 이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는 것은(14:16-17) 그와 함께 다른 약속을 수행한다. 예수께서는 계속 말씀하시기를(18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문맥에서 이 말씀은, 지금 고려하는 성령의 오심은 그 자체로 예수의 친히 오심을 포함함을 분명히 의미하고 있다. 예수의 떠남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유익”이다(16:7). 왜냐하면 이어서 성령을 보내는 것은 또한 예수께서 친히 다시 오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육체적) 가심은 그의 (성령의 인격 안에서) 오심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혹은 그 대신으로 그의 짧고 일시적인 부활 후의 나타남은 이 오심에 적합하지 못할 것이다. 근접 문맥에서(17-23절) 이 오심은 세상과 구별되어서 신자들 안에/에게/함께 하는 성령(과 아버지, 23절)의 내주/나타남/임재의 임박함(“조금 있으면” 19절)과 적어도 밀접히 연합되어 있다(비록 동일시는 아니지만).

그러면 이제 우리는 성령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말할 수 있다. “진리의 성령”으로서 그는 자기 자신의 안건은 없다.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자신을 감추고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다(16:13-14는 특별히 이 점을 지적한다). 성령은 실로 철저히 그러하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현존은 대리적으로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인 것이다.
실제적으로 동일한 맥락에서, 이제 ‘부활하신’ 예수는, 그러한 분으로서 우주적인 권위와 능력(?ξουσ?α)이 “주어진” 즉 이러한 능력이 전에는 없었으나 부활의 결과로 이제 주어졌다는 것이다.
후, 잘 알려진 대위임령의 말씀에서 선언하셨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니라”(마 28:20). 이 선언은 적어도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편재를 확언하는 말씀으로 읽어서는 안 되고, 오순절과 그 결과가 지속될 것을 약속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제대로 읽은 것이다. 또 다시, 성령의 임재는 그리스도의 임재이다. 즉 예수는 세상 끝날까지 성령의 능력 안에서 교회와 함께 할 것이다. 만일 오순절이 다른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높아지신 예수가 여기에, 즉 그의 교회와 영원히 함께 머문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유사한 강조점을 인식하는 것이 누가복음-사도행전을 바울 (혹은 요한) 신학으로 부적절하게 읽은 것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간략히 말하자면, 복음서 끝 부분(24:44 이하)과 사도행전 처음 부분(1:3-11)이 중복되는 것은 승천 전의 40일 중간 기간 동안 부활하신 예수께서 구약을 가지고(눅 24:44-47) 사도들을 가르쳤음을(행 1:2) 보여주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다. 즉 자신에 관한 최근의 사건이나 곧 일어날 사건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있어서 획시대적이고 결정적인 국면임을(참조. 특히 행 1:3)을 가르쳤다. 따라서 예수가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는 것/성령으로의 세례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마찬가지로, 한 절정의 사건이며,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적 구원 사역에 근본적인 것인 것이다.
베드로는 이 핵심을 - 사실상 주된 강조점인데 - (특히 그리스도 중심적인) 그의 오순절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강화하였다. 예수의 지상 생애와 죽음 그리고 특별히 부활에 초점을 맞춘 후(22-31절), 베드로는 사도행전 2:32-33에서 이러한 것들을 차례로 밀접하게 연결시킨다: 부활 - 승천 - 성령을 받음 이 받음은 누가가 앞에서 서술한 것과 충돌하지 않는다. 즉 예수는 이미 요단에서 성령을 받았고(눅 3:22) 심지어 수태될 때에도 받으셨다(1:35). 여기에서는 승천에서 (또한 그 반영으로 오순절에 성령을 부어주신 것에서) 극적으로 실현된 단계의 원칙, 혹은 승귀의 원칙이 연관되어 있다.
- 성령을 부어주심. 마지막 사건인 오순절은 다른 사건들과 대등하게 놓여 있고, 특히 친밀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오순절은 이 순서에서 정점에 있고 최종적이다. 따라서 더 이상 다른 사건들처럼 반복될 수 있는 패러다임은 아니다. 비록 시간적으로는 구별되지만, ‘부활 - 승천 - 오순절’은 사건들이 연합된 하나의 복합체(a unified complex of events), 즉 ‘단번에 모두’의 구속 역사적 통일체를 구성하며, 그렇기 때문에 분리될 수 없다. 하나는 다른 것과 함께 주어졌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의 큰 원을 돌아 사실상 고린도전서 15:45에 다시 돌아왔다. 베드로가 사도행전 2:32-33에서 서술한 순서를 바울 사도는 압축하여 표현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분으로서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성령]”이 되었다.

1.6 구원의 역사의 부분으로서의 오순절
오순절은 한 사건인데, 구원의 역사에서 한 필수적인 사건이며, 구원의 서정에서의 한 측면이 아니다. 따라서 오순절의 자리는 ‘단번에 모두’ 완전히 성취된 구속에 있으며, 그것의 계속적인 적용에 있지 않고, 또한 개개인의 신자가 경험해야 할 패러다임은 아니다. 은사 운동이나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예를 들면, J. Williams, Renewal Theology (Grand Rapids, 1990), 2: 177, 189, 특히 205-7을 보라.
오순절의 일차적 중요성을 어떤 신자가 다른 신자들과 달리 경험하는 능력, 혹은 죄사함으로 이해된 구원 그 “이후” 경험하는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은 심각하게 부적절하다. 그러한 평가는 사실상 오순절을 너무 높이는 것이 아니라 너무 낮추는 것이다. 오순절에 관한 한 “두번째 순서” 혹은 “보충적인 것” 혹은 “부가된 것”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오순절이 없다면 구원도 없다. 마침표. 왜 그런가? 오순절이 증거하는 것이 없이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반복될 수 없는 결정적인 사역은 미완성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앞에 놓인 과업은 죄 사함을 획득하는 것뿐 아니고, 좀더 궁극적으로는 그의 구속 사역의 주요한 결과로서 또한 생명을(예를 들면, 요 10:10; 딤후 1:10), 영원하고 종말론적인 부활의 생명, 다른 말로 표현하여 성령 안에서의 삶을 바울이 성령을 “보증”(고후 1:22; 5:5; 엡 1:14)이나 “첫 열매”(롬 8:23)이라는 은유로 표현한 것은 특히 교회와 신자 안에서의 성령의 임재와 사역이 본질적으로 종말론적 특성임을 강조한다.
획득하는 것이었다. 그 생명이 없이는 “구원”은 분명 끝이 잘려진 것일 뿐 아니라 무의미한 것이다. 오순절에 명백히 계시된 것은 다름이 아닌 그 생명, 그 완결된 구원이고, 그리스도가 그 생명의 수여자라는 세례 요한이 누가복음 3:16에서 예언한 것처럼, 성령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오순절에 능동적인 주체였다는 사실이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이었다. 오순절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최종성과 완전한 충족성을, 즉 그가 “살려주는 영[성령]”이 되었다는 것을 공적으로 증거하였다. 오순절은,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서 획득한 죄사함과 종말론적인 생명에 대한 구원 역사적인 그리스도의 영의 인침(the redemptive-historical Spirit-seal of Christ)이다(참조. 엡 1:13).
부활과 승천과 함께 오순절은 그리스도를 성령을 주기 위해(행 2:33) -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순종한 결과와 그 상급으로서(참조. 빌 2:8-9) - 성령을 받으신 분으로 특징 지운다. 즉 오순절은 높아지신 예수가 메시야적인 성령 수납자와 수여자(the messianic receiver-giver of the Spirit)가 되심을 보여준다. 좀더 공식적 용어나 분명한 교리적인 용어를 쓴다면, 오순절의 구원론적 “새로움”은 적어도 일차적으로는 인간론적-개인적-경험적인 것이 아니고 기독론적이며 교회론-선교학적이다. 오순절은 특히 다음의 두 가지를 의미한다:
1) 성령은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의 근거에서 이제 최종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임재하신다. 그는 ‘종말론적’ 영이시다.
2) 성령은 이제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모든 육체에 부어졌다”(행 2:17). 그는 ‘보편적인’ 영이시다. 필자의 Perspectives on Pentecost, 13-41/『성령은사론』, 13-48을 보라.

오순절이 만들어낸 차이란 일차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지 신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오순절 이전과 이후에 관한 한, 대조가 되는 상(像)이 떠오른다. 즉 구원의 역사의 시각에서는 밤과 낮, 거의 전부와 전무의 급격한 차이가 나타난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이루신 구원의 성취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 이전에는 전무였고,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역 이후에는 전부이다. 그러나 구원의 서정의 시각에서는 근본적인 연속성이 있다. 그 이전과 이후 (옛 언약과 새 언약에서) 성령을 경험하는 데에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본인이 살펴본 바에 따르면, 성경은 그 차이를 드러내는 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한 차이점들은 깔끔하고 명료한 범주화를 거부하고, 단지 “더 좋은” 히브리서 기자가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하면서 이 용어를 썼다 (예를 들면, 11:40).
혹은 “확대되어” “더 크게” “더 충만히”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서술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20장 1항)에서 사용한 비교급.
등의 용어로 느슨하게 포착될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순절/은사 운동 저자들이 누가복음의 끝맺는 말(24:52-53)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 매우 놀랄 정도로 없다는 것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렇지만 이 부분은 누가가 다음 서신을 기대하게 하기 위해서 쓴 것이고, 데오빌로에게 제2부가 도착할 때까지 그러한 인상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쓴 것이다. 이 끝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요소를 포함한다: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이(33절) 부활하시고 막 승천하신 예수를 만난 후 이제 그들의 마음이 뜨겁고(32절) 열려져서(45절) “큰 기쁨으로” 경배하고 “늘” 그리고 공적으로(“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 모든 것은 매우 인상적인데, 또한 오순절 ‘이후’의 그들의 (성령에 충만한) 경험과 완전한 연속성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또한 오순절의 일차적 요점이 - 중생 후이든 어떠하든 - 그리스도인 개인의 경험이 아님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가 된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고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현저한 경험, 즉 오순절 날의 120명과 이후 사도행전에서 오순절 사건의 복합체로 바르게 간주되는 일에 참여한 사람들의 경험은 어떠한가? (행 8:14 이하; 10:44-48/11:15-18; 19:1-7)  많이 논란이 되고 있는 이 문제에 대해서 여기에서는 간략히 언급하고 지나가겠는데, 특히 지금 은사 운동 안에서의 경향, 즉 사도행전의 이러한 경험들은 중생과 구별된, 혹은 중생 이후의 개인 신자들이 능력을 얻기 위해서 따라야 될 지속적이고 규범적인 모델을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은 실제적으로는 구원의 역사와 구원의 서정을 적절히 구별하는 일을 실패한 데서 파생된 것이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32-33의 사건-복합체에서 한 사건(오순절)은 개개의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위해 반복할 수 있는 모델로 간주하고 다른 세 사건(부활과 승천과 성령을 받은 일)은 반복될 수 없는 ‘단번에 모두’의 사건으로 파악하는 것은 아무리 줄여서 말해도 변칙적인 것이다. (너무도 빈번히 사도행전은 “기독교인들이 ‘진정한’ 기독교인이었던 옛날의 좋은 시절”의 느슨한 삽화(揷話) 모음집 정도로 여겨져서 경험적 모델을 찾기 위해서 탐구되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1:8) 누가가 충분하게 명백히 드러낸 것처럼, 사도행전은 사실상 ‘완결된’ 역사이고, 구원의 역사에서 독특한 시기였다. 즉 ‘사도적인’, ‘단번에 모두’의 복음 전파가 “땅 끝까지,” 이스라엘에서 이방까지 이루어진 역사적 시기이다. (8절은 모든 신자나 모든 세대의 교회에 차별이 없이 주어진 약속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즉 8절의 “너희”(?μ??)가 구체적으로 받는 것은 2절의 “사도들”(το?? ?ποστ?λοι?)이다. 또한 이사야서 49:6의 “이방”과 “땅끝까지”의 병행구가 13:47에 인용된 것을 참조하라.) 골로새서 1:6, 23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교회의 이러한 세계적이고 ‘사도적인’ 팽창이 완결되었음을 암시한다(물론 완결된 팽창은 그 너머의 후기 사도적 미래에도 열려 있지만).
        예를 들어, 오순절에 제자들이 능력을 입히운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회심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의 성격상 한 번만[한 세대만] 있을 수 있는, 교회의 그 세대의 독특한 경험, 표적과 기사로 확정을 받았던(참조. 히 2:3-4) 독특한 경험의 일부였기 때문에 회심 이후 이러한 경험을 한 것이다. 그러한 경험은 “때의 참”(갈 4:4)이 시작된 그 시대, 즉 ‘단번에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 실제로 성육신하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살아나시고 승천하시고, 그 결과 이것과 분리할 수 없게 교회에 성령을 보낸 그 시대에 살게 되었던 사람들의 것이다. “그들의 경험은 획시대적이며, 따라서 본질상 비(非) 유형적이며 비(非) 패러다임적이다.” S. Ferguson, The Holy Spirit, (Leicester, 1996), 80. 또한 Perspectives on Pentecost, 22-28/『성령은사론』, 24-32; R. Gaffin, Jr. in W. Grudem (ed.), Are Miraculous Gift for Today? (Grand Rapids, 1996), 37-41 등을 보라.

끝으로, 오순절이 절정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중요성을 가졌다는 사실에서 오순절은 “아버지의 약속”(행 1:4; 참조. 2:33; 눅 24:49)을 성취한다. 이 표현은 오순절에 대한 우리의 구원 역사적 조망에 그 완전한 외연(外延)을 제공한다. 오순절은 모든 옛 언약의 기대의 핵심에 있는 그 언약, 언약 역사의 그 이후의 과정과 그 결과를 형성했던 최초의 언약, 즉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복을 얻으리라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창 12:2-3)의 성취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갈라디아서 3:14에서 오순절을 보았던 그 관점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통하여 “성령의 약속”은 이방인에게 미친 “아브라함의 복”에 적어도 절대적인 부분이거나, 아마 바로 동일한 것이다. 이것은 두 목적절을 어떻게 연결시키느냐에 달린 문제이다. 창세기 12:3의 언약의 약속이 갈라디아서 3:8에서 어떻게 인용되었는지를 주의해서 보라.

요약하면, 충만한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오순절은 하나님의 언약의 목적들이 궁극적으로 계획하고 기대했던 것을 획시대적으로 성취한 것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께서 삼위일체적 충만함 가운데서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오순절은 종말론적이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규모로 임마누엘 원칙이 최초로 실현된 것, 즉 “첫 열매의”(참조. 롬 8:23) 실현을 교회에 가져다 주었다.

1.7 성령의 경험
오순절이 구속 역사적으로 획시대적이며 ‘단번에 모두’의 중요성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령으로의 세례가 어떠한 경험적 중요성이나 함축을 갖지 않음을 주장하는 것이라는 인상이 특히 은사 운동 안에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그 인상은 진실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오순절에 오신 성령은 신자가 경험하는 다양하고 심오한 실체의 원천이시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은 몇몇 신자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근원이시다. 신약의 관점에서 보아도, 생명력 있고 변혁적이고 따라서 능력 있는 방식으로 성령을 경험하지 않는 것은 전혀 성령을 갖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개혁주의 전통과 은사 운동 사이의 문제도, 혹은 개혁주의 진영 내의 문제도 아니며, 또 적어도 문제가 되어서도 안된다.
고린도전서 12:13은 개개의 신자가 오순절에 오신 성령에 참여함을 가리킨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제외하고 신약에서 단 한번 더 “성령으로의 세례(baptized with 여기에서 전치사 ?ν은 확실히 세례의 요소를 가리키는 “으로의(with)” 혹은 “안에(in)”의 의미를 지니며, 도구적 의미의 “으로(by)”가 아니다. 예를 들어, 오순절주의 주석가인 G.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Grand Rapids, 1987), 605-6을 보라.
the Spirit)”가 언급된 이 구절은 획시대적이고 ‘단번에 모두’의 의미를 지닌 사건이(구원의 역사) 결과적으로 신자의 삶에서 어떻게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구원의 서정). 다음의 두 가지 요점이 명백히 드러난다:
1) “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신자. 참고. 12절) 성령으로의 세례를 받았지 단지 몇몇 신자만 받은 것이 아니다. “다” 오순절의 은사에 참여하였다.
2) 그 경험은 그리스도의 몸의 교제 “안으로” 들어올 때 (즉 회심할 때) 발생했지 그 이후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오순절주의 주석가들도 회심 후의 분명한 경험으로서의 성령 세례를 이 구절에서 가르치고 있지 않음을 점점 더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Fee의 명쾌한 주석을 보라. First Corinthians, 603-6; Empowering Presence, 178-82.

이 은사에 참여한 것에서 흘러나오는 포괄적인 경험의 일부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는 (교회에 대한) 바울의 명령에 특히 잘 포착되었다. 그리이스어에서 현재형으로 표현된 이 명령은 이러한 성령의 “충만케 하시는” 임재가 모든 신자의 계속적이고 항상 반복되는 관심이어야 함을 분명히 밝힌다. 바로 이어지는 구절들에서(5:19-6:9) 본문의 구성에서, 19-21절의 네 분사 구문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18절)을 확대한 것이고, 5:22-6:9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21절)는 네 번째 분사 구문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다.
밝히듯이, 신자마다 다르고 굴곡이 있는 상황 가운데서, 이 충만은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의 - 교회 안에서의 예배와 인간 관계, 혼인과 가정, 그리고 직장의 영역에서의 - 태도와 행동을 변혁시키는 능력, 즉 모든 것을 조정하는 원동력이며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신자는 교회의 건덕과 선교를 위해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성령의 다양하고 잘 배분된 은사를 구할 것을 다른 곳에서도 가르친다(예를 들면, 롬 12:3-8; 고전 12:1-11, 28-31; 엡 4:7-13). 부정적으로 표현하여, 신자는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고”(엡 4:30) “소멸하지 말라”(살전 5:19)는 권고를 받는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계속적인 사역을 소멸하거나 근심케 하는 것이 진정한 위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언은 여기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발전될 수 있고,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위의 이야기가 적어도 오순절의 ‘단번에 모두’와 기독론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오순절에 오신 성령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원천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참으로 강조하는 것과 모순이 되지 않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기독교인의 경험에 대한 오순절의 중요성을 생각함에 있어서, 오순절을 성령의 활동의 다른 면과 구별되는 어떤 특정한 면(들)로만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그리스도의 성취하신 사역에 근거하고 그 사역의 절정의 열매로서, 오순절은 성령을 교회 안의 - 신자들 안의 - 모든 활동 영역으로 이끈다.

1.8 오순절은 단 한번의 유일한 사건
이 점에서, 우리는 최근 몇몇 개혁주의적 저자들이 오순절은 우리의 구속을 ‘단번에 모두’ 성취한 단일한 사건이라는 생각을 거부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다. 실제에 있어, 그들의 거부는 매우 강하다. 1989년의 본 대회에서 읽은 논문의 중요한 결론의 하나로, 판 브럭헌(van Bruggen) 교수는 “‘성령으로의 세례를 받는 것’은 ‘단번에 모두’의 사건이 아니다......”고 주장했고, 그 앞부분에서는 단일성이란 “불가능하다”고 평가하였다. ICRC Proceedings, 1989, 205, 참조. 195, 199.
마틴 로이드 죤스 박사는 이에 대해서 좀더 강하고 좀더 혹독한 말로 반대하였다. “오순절에 일어난 것에 대해서 매우 느슨하고 위험한 이야기와 글들이 요즈음에 많이 생겼다. 오순절에 일어난 것은 ‘단번에 모두’를 위한 것이며 따라서 반복될 수 없다는 설명을 사람들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Revival [Westchester, IL, 1982], 15). 동일한 논조의 반대가 차영배 교수의 논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본인은 들었다. 그의『한국 개혁 신학의 미래』참조. 또한 J. Byun, The Holy Spirit Was Not Yet (Kampen, 1992), 105-6을 보라. (한역, 변종길, 『성령과 구속사』[한국개혁주의신행협회, 1997], 126-128. 여기에서 변종길 교수는 개핀 교수의 once-for-all이란 용어가 “모호하게 보이며 때로는 혼란스럽기까지 하다”(128)고 비판한다. 그러나 변 교수는 이 용어에서 “모두”를 빼고 “영단번(永單番)”이라 번역함으로써 “단번에 ‘모두’”(once-for-allness)를 강조한 개핀 교수의 생각과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드러내었다. 역주)

본인이 이상의 저자들을 바르게 이해했다면, 그들의 반대는 어느 정도 ‘구원의 역사’와 ‘구원의 서정’의 구분을 분명하게 유지하지 못한 데에서 나온 오해에 근거해 있다고 여겨진다. 오순절이 ‘단번에 모두’를 위한 사건이라는 개념에 의해서 위협되거나 부정된다고 그들이 여기는 것에서 그 오해를 엿볼 수 있다. 판 브럭헌에게 있어서, “신자들이 지속적으로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하는 영원한 실체” 그리고 “그의 신자들 안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지속적인 실체”가 바로 오순절(“성령이 부어지고 성령으로의 세례를 받는 것”)이었다. ICRC Proceedings, 1989, 200, 204.
로이드 죤스도 만일 오순절이 단번에 모두를 위한 사건이었다면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는 매우 놀라운 (본인의 생각에는, 매우 이상한) 결론을 내렸다. Revival, 15.

왜 이러한 분열이 생겼는가? 그들은 ‘단번에 모두’라는 표현이 의도한 것에 대해서 다소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고 생각된다. ‘단번에 모두’는 ‘단번(once)’라는 말의 강세 동의어는 아니다. 이러한 저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과거에 발생한 어떤 일로서 현재에 대해서는 어떤 결과도 갖지 못한”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성령으로의 세례에서 진실이 아닌 것처럼, 우리가 살펴본 대로(행 2:32-33) 오순절과 함께 단일한 사건의 복합체를 구성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대해서도 - 오순절은 특히 승천과 긴밀히 연결되었다 - 사실이 아니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단번에 ‘모두’”(once-for-allness)에 놓인다. 즉 과거에 명백히 그리고 반복할 수 없게 일어난 것이 모든 시간이나 장소를 지나서 계속되는 실체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최종성과 지속되는 효력을 강조하기 위해서 신약에서 ?παξ와 ?φ?παξ를 특히 그리스도의 죽으심뿐 아니라 그의 승천에 사용한 것과 정확히 같은 의미이다 (롬 6:10; 히 7:;27; 9:12, 26, 28; 10:10; 벧전 3:18; 참조. 유 4).
사실상 교회와 모든 신자 안에 성령이 ‘영구히’ 임재하는 것을 보장하는 것은 바로 오순절의 단번에 ‘모두’의 성격 때문이다(또한 참조. 고후 1:22; 5:5; 엡 1:3-14). 오순절의 획시대적이고 단번에 모두에 대한 이해가 바빙크의 Our Reasonable Faith의 19장에 특히 강조되어서 잘 나타났다. 19장은 이러한 말로 시작한다: “그리스도가 성부의 우편으로 오르신 다음에 처음 한 일은 성령을 보내는 것이었다”(386). 이어지는 글에서 그는 이 주장을 더 다듬어서 성령 보내심의 최종성과 한정된 성격을 강조하였다. 또한 특히 Ferguson, The Holy Spirit, 79-92를 보라.

그리스도인 생활의 언약 구조적인 면에서 볼 때, 성령으로의 세례는 명령법이 아니라 직설법이다. 신약에서 성령으로의 세례를 받기를 추구하라고 명령한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우리가 방금 살펴본 것처럼, 오히려 그 세례에 참여하는 것이 모든 신자들에게 전제되어 있고(고전 12:13 Van Bruggen에 따르면, 이 세례는 신자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부여하는 성령의 활동이다(Proceedings, 1989, 201). 그러나 여기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럽 보인다. 고린도전서 12장을 전체로 보면, 통일성과 다양성이, 즉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음이 동등한 관심사임에는 확실하다. 그러나 12절의 생각을 이어 받는 13절에서는 분명히 강조점이 다양성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통일성에 놓인다 (예를 들어, 13절에서 “한”이 세 겹으로 사용되었고 “다[모두]”가 두 번 강조되었으나 다양성에 상응하는 용어가 나타나지 않음에 주목하라.) 더 나아가서, 여기에서의 성령의 세례 주는 활동은 이미 현존하는 실체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며, 그들이 그 실체(그 “한 몸”) “안으로”(into) 들어오게 된 성령의 행동을, 즉 그들이 (최초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그 행동(참조. 12절)을 가리킨다. 따라서 전치사 ε??의 힘이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며, 상태의 “in”과 동의어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아마 여기에서 한 가지 덧붙여 말할 것이 있는데, 13절 상반절의 세례는, 비록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은 유익들 중의 하나이고 물세례로 인침을 받은 것이지만, 물세례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변종길 교수는 Holy Spirit, 107-108/『성령과 구속사』129-130에서 그렇다고 추정하였지만] 적어도 본인이 의식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는, 본인의 견해가 바울에게 부과된 “집합적 인간”(corporate personality)이라는 낯선 개념과 무관하다.)
), 그들이 오순절에 오신 성령의 선물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성령이 지속적으로 그들의 삶의 ‘모든’ 측면에서 활동하도록 신자들에게 권할 절대적으로 중요한 근거가 된다.

1.9 결론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여 볼 때, 후기-사도 시대에도 역시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는 또한 진정으로 오순절적인 교회이다. 그러한 교회로서, 스킬더(Schilder)가 오래 전에 상기시킨 것처럼, “Niet terug naar Pinksteren!,” Om woord en kerk (C. Veenhof [ed.]; Goes, 1949) 41-43 (1920년대의 논문 시리즈에서).
교회는 (구속 역사적으로 시대착오적인) “오순절로 돌아가자”는 향수에 젖어서는 안될 것이다. 대신 그 구호는 이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오순절로부터 전진한다......그리스도를 본받게 하는 살려주는 성령의 힘 안에서.”

2. 중단의 문제
개혁의 전통과 은사 운동을 대체로 나누고 있는 쟁점은 독특한 은사적 영성에 필수적인 성령의 어떤 은사들이 오늘날의 교회에도 계속되는가에 대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논쟁은 예언과 방언에 집중되어 있고, 병 고치는 은사에 대해서는 좀더 덜한 편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밝히고 넘어갈 것은, 논쟁점은 모든 성령적 은사가 정지되었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다’라는 점이다. 모든 성령적 은사가 중단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 쟁점은 계시적 성격을 지닌 언어의 은사들이 계속되느냐에 대한 것이다. 또한 예언이나 방언과 같은 은사의 중단을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창조계나 신자 안에서의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초자연적인 활동을 부인하는 계몽주의나 이신론적 사고 방식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그러한 주장을 한다는 것도 논점이 아니다 (물론 일부 중단주의자의 경우에게는 사실이겠지만). 성령께서 지금 행하시는 일, 즉 다름 아닌 “죄와 허물로 죽은 자”(엡 2:1, 5)를 오늘날 다시 살리시는 일보다 더 급진적이고 더 인상적이며 더 기적적이고 더 철저히 초자연적인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합리적-자기 반성적인, 직관적-신비적인 (혹은 다른 방식으로) 능력 등, 인간의 어떤 능력을 넘어서서 성령은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롬 6:11)로 만드신다. 또한 의학으로는 소망이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참조. 약 5:14 이하) 오늘날도 고치실 수 있는가에 대한 것도 논점은 아니다. 논점은 병고침의 은사가 다른 사람과는 구별되게 어떤 일부의 사람들에게 오늘날도 주어졌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 문제의 복잡성과 주어진 시간의 제한을 고려하여서, 오늘날 개혁 교회 안에 나타난 불일치, 즉 사도들이 교회의 삶에서 떠난 후에도 이 은사들, 특히 예언의 은사가 중단되었다는 것을 성경에서부터 믿을 만하게 증명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불일치에 한정하여 검토하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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