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3대 왕 정종은 신명순성황태후 소생 차남이자, 태조 왕 건의 셋째 아들입이다.
모후 신명순성 왕 태후는 충주의 유력 호족 유 긍달의 딸로 왕 건에게서 태자 무,
왕자 요, 왕자 소 등의 3남을 연이어 출산합니다. 혜종이 집권하던 시기에 황위를
엿보던 중 945년 혜종의 측근이었던 박 술희를 제거하고, 동시에 거병한 왕규의 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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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한 후 945년 혜종이 죽자 군신들의 추대로 위에 올랐습니다. 혜종에게 세자와
공주가 있었는데 그는 태조의 사촌이자 서경의 군벌이었던 왕 식렴등의 도움을 받아,
외척으로서 세도를 부리던 왕 규의 정적을 제거하고 호족들의 발호를 억제하는 데
주력하였으나 개경의 호족들이 호응하지 않는 등 여전히 왕권이 확립되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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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규가 자신의 외손자를 위에 앉히려는 음모를 꾸미는 사이 정종은 비밀리에 서경에
있던 왕 식렴을 불러들여 대책을 세웁니다. 정종은 혜종이 죽자 본격적으로 왕 식렴
세력을 등에 업고 위에 오르고자 했습니다. 정종의 배후 세력인 왕 식렴은 삼중대광
왕 평달의 아들이며 태조의 몇 안 되는 종친입니다. 군부서리가 된 이래 많은 관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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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하였으며, 태조 원년에 서경 (평양) 진수의 책임을 지고 혜종이 사망한 945년까지
27년간 그 임무를 담당했습니다. 왕 식렴은 오랜 기간 서경에 있으면서 강력한 세력기반을
쌓고 있었는데 자신의 힘만으로는 왕위계승이 힘들다고 판단한 정종은 왕 식렴의 세력을
끌어들이고자 하였습니다. 정종(요)은 서경에 있는 왕 식렴이 군대를 거느리고 개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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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자 왕규는 힘을 쓰지 못하였습니다. 혜종이 병으로 누웠을 때 왕 식렴과 함께
왕규의 난을 진압하였는데 왕규의 난에 관해서는 혜종 지지 파였던 왕규와 정종·광종
지지 파이자 서경 귀족인 왕 식렴 세력 간의 정쟁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즉위 직후 왕 식렴을 시켜 왕규를 사살하였고 정종은 945년 즉위 후 반란 진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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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을 치하하여 왕 식렴에게 광국익찬공신에 서훈되었으며, 거기에 다시 대승을 덧붙여
주었습니다. 946년 초 재계하고 현릉에 성묘하였으며 즉위 기념으로 대사면령을 내려
죄인을 방면합니다. 또한 개국 사까지 불사리를 봉행하는데 동참하였고, 불교 경전 간행
목적으로 사원에 불명경보와 광학보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나 개경 귀족들의 호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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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자 그는 왕 식렴의 주 근거지였던 서경으로의 천도를 단행하려 하였습니다.
그는 임금으로 즉위하자마자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과 개경의 귀족 세력들을 견제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서경으로의 천도를 천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오히려
개경의 호족들과 옛 공신들의 불만을 고조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했습니다. 그는 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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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해했고 친동생인 왕 소마저 의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서경 천도를 위해 장정을
징발, 시중 권 직을 보내 궁궐 영건의 감독하였습니다. 개경의 민호를 서경의 역부로
삼아 백성들에게 원망을 사게 되었습니다. 947년 봄 대광 박 수문을 보내어 덕창진에
성을 쌓게 하고, 서경성과 철옹·박릉·삼척·통덕 등의 성을 축성, 정비하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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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7년 후진에서 유학하다 거란에 붙잡혀 그곳에서 벼슬하던 최 광윤이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거란이 고려를 침입할 준비를 한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종은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광군사를 조직하고 군사 30만을 양성하기도 했습니다.
그해 가을 대광 박 수경을 보내어 덕성진에 성을 수축했고, 거란의 사신으로 귀성에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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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광윤을 통해 정종에게 서신을 전달하였으며, 동시에 유사에게 명하여 군사조직인
광군사를 신설하였습니다. 948년 9월, 동부 여진에서 말 700필과 토산물을 바치자,
직접 공물을 검열하던 중 갑자기 닥친 우레와 천둥소리에 놀라 경기가 든 이후 계속
병석에 있다가 949년 1월 왕 식렴의 부음 소식을 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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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9년 3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정종은 동생 왕제 소를 불러 양위하고 죽었습니다.
능은 개성의 안릉입니다. 고려사에 따르면 그의 죽음 소식에 노역에 시달리던 서경의
일꾼들이 기뻐 날뛰었다고 합니다. 그의 죽음으로 서경으로의 천도계획은 그의 동생
광종에 의해 즉각 백지화 됩니다. 자신의 사후 동생 소의 찬탈을 염려하여 위를 넘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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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경춘 원 군의 목숨을 유지케 하였지만 광종은 이후에 발생한 왕족 숙청 때에 경춘
원군을 혜종의 아들인 흥화궁 군과 함께 처형 시켜버립니다.
최승로의 정종에 대한 평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종은 태자로 계실 때부터 훌륭한 명성이 있었습니다. 혜종이 병석에 누워 오래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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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되지 않자 재신 왕규 등이 몰래 모의하여 왕실을 넘보았습니다.
정종이 이를 먼저 알아차리고 은밀히 서도(西都)의 충성스럽고 절의가 있는 장군과 함께
계책을 정하여 대비했습니다. 내란이 일어나려 하자 호위하는 군사가 많이 도착했으므로
간악한 계략은 실패로 돌아가고 흉악한 무리들은 죽음을 맞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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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비록 천명에 따랐다고는 하나 사람의 계책도 있었으니 어찌 뛰어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태조로부터 지금까지 38년 간 왕위가 끊어지지 않았던 것은 역시 정종의
힘이었습니다. 정종은 임금의 형제로 왕위를 이어받아 밤낮으로 노력하여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구했습니다. 때로는 촛불을 밝혀들고 조정의 선비를 접견하였고, 또 어떤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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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에 바빠서 늦게 식사하면서 모든 정사를 듣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즉위한
초기에 사람들이 모두 서로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도참을 그릇되게 믿게 되자 도읍을
옮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게다가 천성이 굳세어 고집을 굽히지 아니했고, 급박하게
백성들을 징발하여 역사를 일으키고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니, 비록 임금의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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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다고 해도 사람들의 마음은 이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원망과 비방이 이로 인해 일어났고
재난이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재빨리 응하여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지도 못하고 임금의
자리를 영원히 떠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만합니다.
2016.6.2.thu.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