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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규 집필 [서구사] 2013년 복사불허함
서곶의 지명 유래
1.서곶
개관
인천광역시 서구는 지난날 서곶(西串)과 검단(黔丹)이라 불리던 지역이다. 1995년 검단지역이 인천광역시 서구에 편입되기 전, 인천의 서구 전역은 지난날 서곶으로 불리던 곳이었다. 1914년 4월 1일 부평군 모월곶면과 석곶면을 통합해 서곶면이라 하였다. 1789년(정조 13) 간행한 《호구총수》기록을 보면 모월곶면은 354가구에 1,196명, 석곶면은 305가구, 1,015명의 인구를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225년 전 지금 서곶지역 인구는 2,211명이었다.
서곶 지명은 군소재지인 부평에서 서쪽 해안에 길게 뻗어있으므로 그렇게 지어졌다. 서곶은 ‘서쪽으로 길게 뻗은 해안’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동아출판사《국어사전》에 의하면 우리말의 ‘곶’ 또는 ‘고지’는 바다나 호수로 길게 뻗은 육지의 끝부분을 가리킨다. 그리고 장산곶이나 장기곶처럼 지명 뒤에 붙어 바다로 뻗어나간 곳이라는 의미로 확장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인천이라는 고유지명에 ‘곶’자를 붙이면 인천의 한 해안지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지칭되는 것인데, 서곶은 그렇지 않다. 한자로 표기할 때는 땅이름을 나타내는 ‘곶(串)’자를 차용하는 것이 위의 장산곶이나 장기곶처럼 일반화되어 있다.
서곶 지역은 오늘 인천 중심가에서 보면 서쪽이 아니라 북쪽에 위치하므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것은 위에서 말한 바처럼 이 지역이 부평군에 속해 있던 시기에 부평 중심으로 명명되었기 때문이다.
서곶은 지형이 바다를 끼고 남북으로 길게 놓인 형상이다. 계양산(桂陽山)과 철마산(鐵馬山)을 품고 있는 원적산맥(元積山脈)이 바다를 향해 퍼져 내리며 남북으로 뻗쳐 있기 때문이다. 고려대에는 서곶의 북쪽지역이 황어현(黃魚縣)에 속했으며, 남쪽지역은 부평현(富平縣)에 속했다. 조선시대에는 남쪽과 북쪽이 모두 부평부(富平府)에 속했으며, 오늘의 가정동, 신현동, 석남동, 원창동, 가좌동을 포함하는 남쪽을 석곶면(石串面), 오늘의 백석동, 시천동, 검암동, 경서동, 공촌동, 연희동, 심곡동을 포함하는 북쪽을 모월곶면(毛月串面)이라 하였다. 이 두 면의 경계는 승학현(昇鶴峴. 싱아고개라고도 한다)을 중심으로 구분되었다.
모월곶이라는 지명은 이 곳의 지형이 마치 반달처럼 생겼는데 작은 맥이 터럭(毛)같이 뻗어내려서 ‘터럭이 많은 반달과 같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전설을 보면 물이 많은 고장이라 물곶이〔水串〕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석곶이라는 지명은 속칭 돌곶이를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다. 이 곳의 지형이 꼬챙이같이 길게 뻗어있으며 돌이 많다고 해서 그런 지명이 붙었다. 돌곶이가 어디인가는 한 장소를 잡아 지칭하기는 어렵다. 대체로 보아 가좌동, 원창동, 가정동의 해안이 형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모월곶면은 면소재지가 현재의 검암동의 윗마을〔上洞〕에 있었음이 확실하나 석곶면의 소재지가 어디였던가는 알 수가 없다. 이 두 면은 일제가 1914년 3월 1일, 부천군을 만들어 부평군 전체와 인천의 일부를 흡수하면서 부천군 소속이 되었다. 그리고 동년 4월 1일 두 면이 합병되어 서곶면(西串面)으로 명명되었다. 서곶이라는 지명을 갖게 된 것은 이 때가 처음이다.
부천이라는 지명은 인천 일부와 부평을 통합해 만든 지역이라 조합식으로 만든 지명이었다. 이 때, 부평군 군내면 부평리(현재의 계산동)에 있던 부평군 청사를 폐지하고 옛 인천읍의 소재지(현재의 관교동)에 부천군청을 개설하였다. 서곶을 통치하던 행정력의 중심이 부평을 떠나 원인천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서곶은 1940년 4월 1일, 인천부(仁川府)에 편입됨으로써 부천이란 지명과도 멀어졌다. 인천부는 이 지역이 인천의 중심지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행정편의를 위해 서곶출장소를 설치하였다. 이 서곶출장소는 1968년 인천이 구제를 실시하면서 북구에 편입되었다. 1988년에 전체 서곶 지역이 서구로 독립되었으나, 서곶이라는 유서 깊은 지명은 1968년 구제 실시와 함께 내무행정의 지명에서 공식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서곶초등학교와 서곶중학교의 교명 속에, 그리고 민간의 고유명사 속에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서곶면의 청사는 모월곶면의 자리를 이어받아 연희동의 옛 연희진 자리에 있었다. 이 곳을 서곶출장소가 다시 계승했으며, 1970년대에 마을을 관통하는 48번 국도에서 가까운 곳으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서구청이 이를 계승하였다가 서구 보건소로 물려주고 현재의 위치로 신축해 나갔다.
서곶은 길게 해안을 끼고 있는 터라 연안에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이 있었다. 청라도(靑羅島 파렴), 사도(蛇島, 뱀섬), 일도(一島), 장도(獐島 노렴), 곰의바위, 쟁끼섬, 까투렴, 율도(栗島, 밤염) 소염도(小鹽島), 세어도(細於島), 장금도, 목섬, 호도(虎島,범염) 등이 그것이다. 서곶의 앞바다는 경사가 매우 완만하여 밀물과 썰물이 빠르게 드나들었다. 섬들은 밀물 때는 바다에 잠겨 푸른 수평선 끝에 보이기도 하고 썰물 때는 망망한 갯벌의 끝에 얌전히 앉은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 밀물과 썰물의 시간차를 이용하여 드넓은 갯벌에서 게와 조개와 맛조개를 잡았으며, 썰물을 따라서 섬까지 걸어가 한두 시간 일을 보고 밀물에 앞서 해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섬들은 갯벌 매립으로 거의 모두 사라졌다. 1차로 원창동과 석남동 앞바다가 매립되어 율도와 소염도가 사라졌으며, 2차로 검단 지역 앞바다와 백석동, 검암동, 연희동 앞바다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이 청라매립지에 포함되면서 세어도를 제외한 청라도, 일도, 장도 등 거의 모든 섬들이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이 매립사업으로 인해 서곶의 면적은 원래보다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1)섬과 산하, 고개의 지명 유래
(1) 섬
(가)매립되어 뭍이 된 섬들
ㄱ. 난지도(蘭芝島)
난지도는 경서동의 서단(西端)인 금산의 정북 300m에 놓인 큰 섬이었다. 뭍에서 가까워 경서동의 한 마을로 여겨져 왔다. 형체는 몸을 크게 편 해파리 같은 모습이었다. 금산과의 사이에는 큰 갯골이 하나 있어 밀물이 들어찼을 때는 건너가지 못했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한 《호구총수》에 난지도(蘭芝島)라는 지명이 보인다. 한약재의 명약 난지초(蘭芝草)가 자생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난점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난지염’의 음운변화이다. 사멸된 우리말에 ‘염’이라는 것은 섬과 동의어였다.
난점에는 옛날에 세곡미를 저장하는 창고가 있어 흥성한 때가 있었으나 그 뒤에는 인구가 줄어들었다. 50~60년 전에는 30여 가구가 어업으로 삶을 영위하였으나 어획량이 많지 않아 무척 가난하게 살았다.
난지도는 뭍과 워낙 가까운데다 간척사업을 하면서 만든 방죽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섬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육지화되었다. 현재는 인천공항고속도로가 난지염의 절반을 차지하고 놓여 있다.
ㄴ. 사도(蛇島)
경서동의 서단인 금산에서 정북쪽 700m, 연희동 용의머리 반도의 서단에서 북서쪽 800m에 자리잡고 있던 섬이었다. 뱀이 유난히 많아 그런 이름이 붙었고 말뜻 그대로 ‘뱀섬’이라고도 불렀다.40~50년 전 그 곳에서 백사(白蛇)가 여러 마리 잡혀, 땅꾼들이 드나들었다.
서곶의 대부분의 섬이 그랬듯이 썰물 때 뭍에서 걸어 나갈 수 있었으나 경작지도 적고 밀물 때 물살이 빨라 배를 대기 어려웠다. 그래서 거의 민가가 없이 놓여 있다가 매립지로 들어갔다.
ㄷ. 거참도(巨懺島)
경서동의 서단 금산에서 서쪽 4km, 썰물 때 드러나는 갯벌의 맨끝이었다. 섬의 바로 등뒤(서쪽)는 밀물 때나 썰물 때나 바닷물이 머무는 큰 갯골이 있었다. 사도처럼 썰물 때 뭍에서 걸어 나갈 수 있었다.
ㄹ. 장도(獐島. 노렴)
경서동 서단 금산에서 서남서 3km, 연희동 용의머리 서단에서 4km 떨어진 섬으로 서곶 사람들은 ‘노렴’이라고 불렀다. 이 섬에 노루가 많이 살아 ‘노루염’이란 지명이 붙었다가 ‘노렴’으로 축약이 되었고, 한자로 뜻을 살려 장도로 표기했던 곳이다. 꽤 먼 섬이었지만 거참도나 사도처럼 썰물 때 뭍에서 걸어나갈 수 있었다. 경서동에서 가려면 갯골이 없었으며, 연희동에서는 3개를 건너야 했다.
지금은 매립지에 포함되어 육지가 되었다.
ㅁ. 자치도(雌雉島. 까투렴)
까투리처럼 생겨 그런 이름이 붙었다. 원창동의 갯말 서쪽 갯벌에 있던 섬이다.
ㅂ. 청라도(靑羅, 파렴)
청라도는 원창동 환자곶 해안에서 3.5km, 연희동 용의머리반도 서단에서 2.5km 떨어진 섬이었다. 푸른 넝쿨 관목들이 무수히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서곶 사람들은 파란 섬이라는 뜻으로 ‘파렴’이라고도 불렀는데 멀리 보이는 그 섬이 유난히 푸른색이기 때문이었다. 서곶 앞바다의 섬들 중 가장 컸다.
썰물 때 부지런히 갯벌을 걸으면 밀물이 오기 전 섬에 이를 수 있었다. 원창동에서 가려면 갯골을 3개, 연희동에서 가려면 갯골 5개를 건너야 했다. 김포매립지가 만들어지면서 육지의 끝이 되어 버렸다.
원창동 환자곶 해안과 이 섬 사이에는 자치도, 소도, 소문점도, 대문점도 등 작은 섬들이 놓여 있었다.
ㅅ. 일도(一島)
청라도 등뒤에 숨듯이 앉아 있던 섬이었다. 위의 호도처럼 육지에서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매립되어 한국가스공사 기지와 한국전력공사의 인천복합 화력발전소가 앉아 있다. 그리고 위의 장도와 청라도와 더불어 방조제로 연결되어 서곶의 새로운 해안선을 형성하고 있다.
0. 율도(栗島)
원창동 환자곶 해안에서 서남서 2km에 있던 섬이다. 머리서 보면 밤알처럼 보여 밤염이라고도 불렀다. 그 사이에 갯골이 하나 있었으며 해안에서 썰물 때 갯벌을 걸어 섬까지 갈 수 있었다.
율도는 매립되어 1974년 인천화력발전소가 세워졌고 경인에너지의 정유시설과 발전 시설이 들어앉았다. 경인에너지는 지금 SK에너지로 바뀌었다.
ㅈ. 소염도(小鹽島)
가좌동 해안에서 1.5km 떨어져 있던 섬이다. 어린아이 팔뚝만한 지네가 살고 있어, 이 섬에 나물 캐러 건너간 여인이 물려 죽은 일이 있다.
(나)지금도 살아 있는 섬들
ㄱ. 세어도(細於島)
세어도는 뭍에서 먼 섬으로 매립지에 포함되지 않아 아직 섬으로 살아 있다. 경서동 서단 금산에서 서쪽 6km 떨어져 있으며 밀물 때나 썰물 때나 바닷물이 머무는 큰 갯골 건너편에 있다. 그러므로 썰물 때 갯벌을 걸어나가도 이 섬에는 갈 수 없다.
가늘게 늘어진 섬이라 세어도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세루, 또는 서천도(西遷島)라는 별칭도 있다. 세루는 ‘서쪽에 멀리 머물다’의 뜻으로 ‘서유(西留)’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세루로 음운이 변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서천은 서쪽 멀리 귀양가 있는 섬이라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ㄴ. 호도(虎島)
장도에서 3km 서쪽, 밀물 때나 썰물 때나 바닷물이 머무는 넓은 갯골 가운데 앉아있다.‘범염’이라고도 했으며, 생긴 모습이 호랑이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뭍에서는 장도와 청라도에 가려져 볼 수 없었으니 뱃사람들이 붙인 이름으로 짐작된다. 인천공항고속도로가 바로 이 앞으로 개설되어 있어 쉽게 바라볼 수 있다.
(2) 산
ㄱ. 계양산(桂楊山)
해발 표고가 395m로 인천에서 제일 높다. 수주악(樹州岳), 안남산(安南山), 아남산(阿南山), 노적종(露積峰), 환여금(環如金), 용장자산(鏞獐子山) 등의 별칭을 갖고 있다.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망해지(望海誌)》에는 산정에 올라가 보면 삼면이 모두 물이라고 하였다. 남쪽 부평평야는 바닷물과 한강물이 혼합되어 드나들고 서쪽은 서해가 있고 동쪽은 한강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예로부터 문장가들이 말한 부평 8경이 있다. 8가지 모두 서곶과 관련이 있고 대부분은 계양산을 소재로 삼고 있다.
1.계양고종(桂陽孤鐘):계양산 중심성 공해루에 걸린 종의 고적한 모습
2.경명낙조(景明落照):계양산 서쪽 경명현 너머로 지는 해
3.난포영약(蘭浦靈藥):난지도에서 나는 영약 난지초
4.계산현폭(桂山懸瀑):계양산 서쪽 암벽에서 떨어지는 폭포
5.미도낙조(尾島落照):서해 꼬리섬(필자주. 부평 매립지에 묻힌 호도(虎島) 옆으로 떨어지는 해)
6.응봉조휘(鷹峯朝輝):계양산 매바위에 뜨는 아침해
7.탁옥성문(琢玉成文):탁옥재에서 수도하여 성공한 문장
8.천마황서(天馬皇瑞):천마산 천마 발자국의 상서스러움
계양산은 양질의 부싯돌이 생산되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임진왜란에서 참패한 조선 조정이 화승총을 만들고 화약과 함께 신속히 발화하여 심지에 불을 붙일 수 있는 부싯돌을 연구하게 되었다. 무관 정두원(鄭斗源)은 부하 정효길(鄭孝吉), 박무길(朴武吉)과 더불어 계양산 돌을 원료로 군사용 부싯돌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고 전한다.
계양산에는 3~4부 능선에 회양목이 지천으로 많았다. 관상용으로 쓰기 위해 마구 캐 나갔다. 심지어는 서곶초등학교 학생들이 동원되어 어디로 보내는 것인 줄도 모르고 캐내 가마니에 담았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남아 있던 회양목 군락은 그 뒤 주택 건축경기가 일어나면서 마구 캐서 멸종되어 버렸다. 지금 환경단체들이 복원사업을 벌이고 있다.
계양산에는 12개의 사찰이 있었는데 그 중 만일사가 제일 컸다. 고려 때 지어졌으며 문장가들의 시문에도 나오는 것을 보면 전국에 알려진 명찰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산의 서쪽 기슭에 자리잡은 터라 도량에 서면 서해를 굽어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절이 헐린 이유를 설명하는 전설이 있다.
정부의 세곡을 실어나르던 뱃사람들이 일부를 빼돌리고는 ‘계양산의 만일사가 눈에 보이기만 하면 난파가 되어 세곡을 잃어버린다’고 관청에 진정하였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정부에서는 이 절을 서해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기라고 명하여 문들 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곶 앞바다에는 유명한 강화수로의 선돌목 같은 소용돌이 뱃길이 있었다는 전설은 없다. 혹시 그런 위험한 곳이 있었더라도 지금은 확인할 수가 없다. 서곶의 앞바다는 모두 매립지에 포함되어 뭍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ㄴ. 철마산(鐵馬山)
표고 266m의 산으로 북쪽이 심곡동에 닿아 있다. 동쪽은 효성동(曉星洞)이고 서쪽은 가정동(佳亭洞)이며, 남쪽은 원적산(元積山)으로 이어진다. 심곡동 쪽은 산세가 완만하고 적당한 높이의 구릉과 골짜기로 되어 있어서 마치 심곡동이 품에 안기듯이 앉아 있다.
이 산의 본래 이름은 천마산(天馬山)이었다. 산중턱에 하늘을 향해 내달리다가 도약하는 말발자국 형상이 있어 마제봉(馬蹄峯)으로도 불리는데다, 심곡동 동쪽 골짜기에서 아기장수가 태어나고 천마가 날았다는 설화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그렇다.
이름이 바뀐 것은 측량기사의 무심한 실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전한다. 1915년을 전후하여 일제가 한반도 전체 토지의 정밀측량을 하였고, 그 때 서곶 지역을 측량한 기사가 주민들에게서 ‘천마산’이라고 듣고 ‘철마산’이라고 지도에 기록해버렸다. 대동여지도 등 그 이전의 고지도는 분명히 천마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더구나 그 때 만든 지도는 오늘의 부평구 산곡동과 청천동, 서구의 가좌동과 석남동에 걸쳐 있는 원적산(元積山)과, 부평구 일신동과 남동구 만수동에 걸쳐 있는 금마산(錦馬山)도 철마산으로 표기함으로써 인천에는 3개의 철마산이 있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그 부작용으로 인한 후유증도 있다. 가좌동에서 산곡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만들고는 지도상에 있는 그대로 ‘철마산관통도로’라고 부르게 된 것이 그것이다.
ㄷ. 원적산(元績山)
해발 표고가 165m에 이르는 작은 산이지만 가파른 편이다. 지금 서구와 부평구를 경계 짓는 산으로서, 옛날부터 남으로는 장고개, 북으로는 안아지 고개를 안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애당초 이름은 ‘원적(怨積)’이었다고 한다. 조선 중기에 경인운하를 팔 적에 원통현의 바위 때문에 실패하고, 안아지 고개는 고개가 90개나 되어 역시 실패의 원인이 된 터라 원(怨)이 쌓여서 원적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산은 대동여지도 등 고지도에 원적산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오늘날 철마산이라는 뜻밖의 이름이 붙어버렸다. 위의 철마산에서 설명한 것처럼 1915년을 전후하여 전국적으로 실시한 일제의 토지측량에 참가한 일본인 측량기사가, 천마산을 철마산으로 잘못 기록하고, 이 산이 천마산의 지맥에 닿아 있어 이 산마저 철마산으로 지도에 기록함으로써 비롯되었다.
그 결과로 생긴 지명오류 중 가장 큰 것이 오늘날의 철마산 관통도로이다. 가좌 주공아파트 앞에서 시작해 고개를 넘어가서 명신여자고등학교 앞으로 가는 길이다. 1969년에 개통하여 1972년 10월 2일에 준공된 이 도로의 개통으로 인하여 인천과 부평간의 거리를 16km에서 5km로 줄었다. 시간도 1/3 로 단축되었다.
ㄹ. 축곶산(축#月+丑 串山)
해발 표고가 160m에 달한다. 가정동 봉화재 마을 앞에 있으며 싸리나무가 많아 붙여진 지명이다. 가정동과 심곡동에 사는 원로들은 ‘싸리뫼’라는 우리말 지명도 사용한다.
계양산 지맥이 서쪽으로 뻗어와 철마산을 만들고 더 나아가 승학현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이 산까지 나아가 뚝 끊어진다. 한자 표기에 곶(串)자가 사용된 것을 보면 이 곳 또한 바다까지 돌출했던 것 같다. 이 산 앞에 펼쳐진 들판을 ‘봉화재들’이라 부르는데, 형태로 보아 방죽을 막아 만든 간석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옛날에는 뭉툭 끊어지듯이 솟은 이 산이 육지의 끝이었다는 것이다.
이 산에 봉수(烽燧臺)가 있었다. 봉수란 변방의 급한 소식을 중앙에 알리던 통신방법이었다. 밤에는 횃불이 잘 보이지만 낮에는 안보이므로 연기로써 신호하였다.《세종대왕실록》 제148권은 ‘경기 부평도호부의 축곶산 봉수는 부평 서쪽 10~15리에 있는 봉수로 남쪽으로 25리 떨어진 인천 성산(成山. 문학산. 필자주) 봉수대에서 연락을 받아 북쪽 25리 지점에 있는 김포 백석산 봉수로 전달했다’고 나와 있다. 이 산의 봉수는 세종 5년(1423)에 세워졌다. 조선 말기까지는 별로 빈번하지 않게 사용되다가, 병인양요 후 이양선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로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의 봉수는 서울 남산의 봉수를 중심점으로 삼아 5개의 축이 작동되었다. 그것을 거준(炬準)이라 하였다. 축곶산 봉수는 제5거준에 속했다. 즉 서울남산 제5봉에서부터 양천 개화산-김포 북성산-통진 남산-강화 송악산-하음 성산-교동 화개산-강산-진강산-대모성산-통진 수안성산-백석산-축곶산에 이르는 체계였다.
ㅁ. 금산(金山)
경서동의 바다 쪽에 박힌 산으로 ‘범머리산’ 또는 한자음으로 호두산(虎頭山) 또는 금산이라 불렀다. 금산은 여기서 금이 많이 났다 하여 붙은 이름이고, 범머리산은 형용이 호랑이 머리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산에는 병인양요 후 이양선의 출몰을 관측하는 망루와 봉수대가 있었다.
이 산에 동록(東麓)에는 조선 세종대에 대제학을 지낸 류사눌(柳思訥)의 묘(인천 지방문화재)가 있다. 그는 이 마을 태생으로 소년기에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 슬하에서 자라다가 계양산 서록에 있던 만일사(萬日寺)에서 공부해 대과에 올랐다.
(3) 하천
ㄱ. 빈정천(濱汀川)
계양산 서록에서 발원하여 서해로 흘러가는 하천이다. 서곶의 하천으로서는 가장 크다. 상류에서 공촌동을 지나고, 연희동, 공촌동, 경서동의 경계가 있는 과기평 마을 서곶로의 빈정교 밑을 지나 드넓은 ‘닭우리’ 들판을 가르며 바다까지 흘러갔다. 지금은 아시안게임 주경기장이 닭우리 벌판에 건설되어 빈정천의 형질도 변경되었다.
발원하자마자 공촌동 앞을 지나므로 ‘공촌천’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빈정내’라고 부르기도 한다. 국립지리원의 지도에 표시된 지명은 빈정천이다.《부평읍지》에는 빈장천(濱長川)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한자의 ‘빈(濱)’이 ‘물가’를 뜻하니, 길게 세 동리를 거치고 물가를 이루며 길게 흐른다는 뜻으로 기록자의 자의에 따라 표기한 듯하다.
바다에까지 이른 이 하천은 연희동 용의머리 마을 북쪽에서 갯골이 되어서 드넓은 갯벌을 구불구불 가르며 서쪽으로 뻗어, 장금도와 소문점도 사이를 거쳐 썰물 때도 조수가 머무는 큰 갯골에 합류된다. 합류지점은 율도의 남서쪽이었다. 이 갯골은 지난날 어선이 쉽게 정박하는, 서구의 가장 큰 뱃길이었다. 40~50년 전에는 선착장이 있었다. 닭우리 들판도 바다에 방파제를 막기 전에는 갯벌이었을 것이므로 고대에는 밀물이 과기평 마을까지 올라왔고 선착장도 거기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매립지에 포함되었으므로 지금 갯골의 모습은 찾기 어렵다.
ㄴ. 심곡천(深谷川)
철마산 주봉과 탁옥봉(琢玉峯) 사이 골짜기에서 발원한다. 심곡동과 연희동의 비옥한 샘내〔泉川〕들판을 가르고 흐른 서해로 흘러가는 하천이다. 이 하천의 옛이름이 샘내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샘내’라는 지명은 상류에서는 수량이 풍부하던 서곶로의 심곡교(深谷橋)에 이르러 급격히 수량이 줄어들며 땅속으로 잦아들고, 하류에 이르러서는 둑 바깥에서 샘이 되어 분출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천을 보호하는 둑의 폭이 좁아 폭우 때는 자주 범람하여 주변 무논을 자갈밭으로 만들었으며, 가뭄 때는 하천이 말라버려 무논에 물을 댈 수가 없었다. 대신 둑 밑에 저절로 형성된 3개의 웅덩이의 물은 사시사철 물이 풍부하여 샘내 들판을 충분히 적시었다. 1970년대에 한강 수리조합 관개수로가 이 곳까지 유도되었으므로 웅덩이들의 그런 기능은 불필요해졌다.
심곡천의 상류는 심곡동을 거치지만 하류에서는 연희동 경계를 이루며 흐른다. 샘내 벌판 아래 바닷물을 막은 둑을 샘내방죽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복개되었다.
(4) 고개
ㄱ. 경명현(景明峴)
징맹이고개라는 우리말 지명으로 더 알려진 이 고개는 서곶에서 계양산 산록을 거쳐 부평지구로 넘어가는 길에 있다. 삼국시대 이래로 개성과 인천,안산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으며 길이가 8km에 달한다. 김정호의 《대동지지》 부평조에는‘경명원서십리석곶로(景明院西十里石串路)’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홍명희의 대하소설 《임꺽정》에도 나온다.
이 곳에는 고려 때 국영응방(國營鷹房)이 있었다고 전한다. 고려 때에는 매사냥이 성행하였다. 국영 응방이 서울인 개경에 있었다. 그런데 사육하는 매가 민가의 닭이나 오리를 공격하여 피해가 커서 원성이 커졌다. 응방 책임자였던 이탁(李擢)과 그의 부하 박향(朴鄕), 윤수(尹秀)는 왕명에 따라 장소를 물색하던 중 부평 계양산의 경명현을 지목하였다. 그래서 이 곳에 국영응방이 생겼다.
경명현에는 중심성이라는 성이 있었다. 이 고개를 중심으로 동서로 쌓은 성으로 계양산성이라고도 한다.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攬)》에는 ‘부평과 서곶 사이에 경계를 이루는 경명현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쌓여진 성벽으로 1866년(고종3년) 병인양요 직후 강화수로와 인천만의 국방 강화책으로 계획하여, 1870년(고종 7년) 10월 부평부사 박희방(朴熙方) 등이 축성했다. 축성의 유래는 중심성 사적비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데, 현재는 성은 전부 무너지고 문루 공해루 초석만이 원위치에 남아 있다. 중심성 사적비는 625동란 후 인천시립박물관에 옮겨 진열하던 중 그 건물이 전재(戰災)로 소실되면서 없어졌다’고 쓰고 있다.
공해루에는 부평팔경도를 그려 걸었다고 전한다.
ㄴ. 안아지고개
안하지고개 또는 아흔낮은고개〔九十峴〕라고도 한다. 가정동에서 효성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가좌동의 철마산 관통도로가 뚫리기 전까지는 인천 동구 방향에서 부평지구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물론 공촌동의 계양산 관통도로(경명로)가 뚫리기 전 서곶에서 자동차를 타고 부평지구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그리고 인천교가 개설되기 전, 서곶 사람들은 인천 다운타운에 가려면 옛 서곶로를 타고 가좌동에서 십정동을 거쳐 주원고개와 주안을 경유해 갔다. 그 곳의 버스편이 매우 드물었으므로 일부는 이 안아지고개를 넘어 산곡동까지 가서 인천행 버스로 갈아탔다. 가정동에서 서운동까지의 길을 아나지길이라고 부른다.
안하지 또는 아나지라는 지명은 조선 태조가 새도읍지를 찾으려 할 때, 이 고개 너머 피네미골짜기가 아흔아홉번째 골짜기가 되어 그렇게 이름지었다고 전한다.
ㄷ. 승학현(昇鶴峴)
가정동에서 심곡동으로 넘어오는 높고 긴 고갯길로 싱아고개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멀지 않은 연희동 용의머리 앞바다가 수백 년 전부터 두루미 도래지였으니 이 고개에서도 두루미가 날아올랐을 것이다. 그래서 붙여진 것이 승학현이고, 싱아고개는 싱아풀이 많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다. 의미로 보아 둘 다 타당하나 수십 년을 서곶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거의 모두 싱아고개라고 부른다.
이 고개는 지난날 남쪽의 석곶면과 북쪽의 모월곶면을 가르는 경계였다. 이 고개 남쪽 사람들은 석남초등학교를 나오고 북쪽 사람들은 서곶초등학교를 나온 터라 유대감도 고개를 중심으로 분리된다.
구불구불 여러 개의 굽이를 가졌던 높은 고개였으나 새서곶로가 뚫리면서 통행도 뜸해졌다.
2)마을의 지명유래
(1)가좌동(佳佐洞)
지난날 부평부 석곶면 소속으로 가재울과 건지(乾池)골, 감중절리(甘中節里), 그리고 능안말이라는 세 개의 자연취락이 있었다. 그리고 썰물 때마다 길이 열리는 앞바다에 소염도(素鹽島)라는 작은 섬이 있었다. 이 지명들은 부평부가 관할 동리명을 확정할 때, 가재리(佳裁里)와 감중절리로 합해졌다.
1789년(정조 13) 면단위 호구, 인구수와 법정리를 기록한 《호구총수》에는 지금과 다른 한자로 표기되어 가좌동(加佐洞)으로 실려 있다. 아름다울 ‘가(佳)’ 자인가, 더할 ‘가(加)’인가, 가좌리였나 가재리였나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우리말 지명 ‘가재울’의 음차기록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지명은 아사마쪼(淺間町)였다.
가재리는 옛날에 ‘가재올’ 또는 ‘가재울’이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 이 곳에 맑은 시내(佳佐川)가 있어 가재가 많이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시내 아래쪽에 연못이 있었는데 시내의 물이 흘러 들지 않아 마른 연못이 되어서 건지(乾池)라고 불렀다. 이 건지에서도 큰 가재 한 마리가 나왔다고 한다. 가재올은 크게 보면 가좌동 전체를 말하며 좁은 의미로 보면 건지골 마을을 지칭한다.
건지골은 가좌동 전체를 놓고 볼 때 북쪽이 된다. 달성서씨(達城徐氏)가 뿌리내리고 살아 왔다.
윗말은 박씨가 많이 살아 ‘박촌말’이라고도 했는데 가좌동 본마을의 위쪽이다. 지금 주공아파트 1단지 지역이다.
아랫말은 가좌동의 본마을이다. 윗말의 남쪽 아래 있으며 현재 주공아파트 2단지가 자리잡고 있다.
감중절리는 이 곳에 감중사(甘中寺)라는 절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절은 빈대가 많아 승려외 신도들이 견디지 못해 문을 닫았다고 전해진다. 취락이 큰 편이어서 큰감중절과 작은감중절로 나누어 불렀다. 큰감중절은 아랫감중절로도 불리며 지금 가좌1동 사무소가 있는 부분을 가리킨다. 작은감중절은 윗감중절로도 불렸는데 현재 가좌3동 사무소 근방이 된다.
보도진(步道津) 마을은 나루터를 끼고 생성된 취락이었다.
아사마쪼는 구한말에 한반도를 침탈할 때 자주 이용된 군함 아사마마루(淺間丸)를 기념하여 그렇게 지었다.
보도진 나루는 동구 송림동과의 사이 300m의 해협에 놓인 나루였다. 흔히 ‘보두지’라고 불렀는데 한자 뜻 그대로 썰물 때는 배를 타지 않고 징검다리로 건너도 가능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인천교의 아래쪽 1km 부근이 이 나루터 자리였다.
윗나루와 아랫나루 두 곳이 있었으며 윗나루를 수도나루, 아랫나루를 그냥 보두지라고 불렀다. 수도나루란 인천의 수도관이 매설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윗나루는 징검다리 통행이 가능해 배삯이 쌌고, 하류의 아랫나루는 거의 물에 잠겨 있어서 걸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
이 나루는 처음에는 개인이 경영하다가 인천부에서 관장하였고 부천군 서곶면에서 관장하기도 하였다. 1961년 윗나루 자리에 인천교가 준공되면서 없어졌다.
40년 전, 인천 중심가에서 서곶으로 가려면 이 나루를 건너 보도진 구릉을 타고 공동묘지 서쪽 옆길을 거쳐 능안 마을로 들어가거나, 감중절 마을으로 나가 국방도로를 탔다. 국방도로를 타고 북진하면 감중절과 가재울을 거치게 되고, 능안과 원적산 사이를 지나서 건짓골을 거쳐 왼쪽으로 번작리, 오른쪽으로 박가외말을 스치면서 옻우물까지 나아갔다. 그대로 직진하면 가정동이 나왔다.
원적산은 해발 표고가 165m에 이르는 작은 산이다. 지금 서구와 부평구를 경계 짓는 산으로서, 옛날부터 남으로는 장고개, 북으로는 안아지 고개를 안고 있다. 원적산을 올라 산곡동으로 넘어가는 언덕길을 원적산 고개라고 불렀다. 이 고개는 오늘날 철마산 관통도로라는 이름으로 개설되어 있다. 이 곳의 철마산 명칭은 잘못된 것이다.
해망산(海望山)은 멀리 서해와 팔미도까지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산에 감중사가 있었다고 전한다.
가좌동에서 산곡동으로 가는 고개를 장고개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고개 앞의 마을을 장끝마을이라 부른 데서 비롯된 지명이다.
구루지고개는 가좌동에서 산곡동 화랑농장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국방도로는 일제 때 서울과 인천 사이의 군사연락을 위해 만들었다. 가좌동에서 가정동까지 지금 경인고속도로의 직선으로 뻗친 구역이 그 후신이다. 경인고속도로가 열리기 전에도 이 곳은 지금처럼 넓었으며 ‘국방도로’라고 불렀다.
이 국방도로는 1941년에 공사를 시작하였다. 부평에 조병창(造兵廠)을 세우던 해였다. 인천항으로 군수물자를 신속히 수송하기 위해 만들었다. 국민총력연맹(國民總力聯盟)의 지도 아래 근로보국단이 만들어지고 서곶의 청장년들이 대거 동원되었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본군의 감시를 받으며 고된 노동을 하였으며 잡곡밥을 먹으며 길가에 임시로 세운 천막에서 잠을 잤다. 이 공사는 3년 계획으로 착수하였으나 태평양전쟁에 청년들이 다수 징병 또는 징용당하여 지연되었다. 그리하여 8․15 광복 때까지 중단되었다. 이 도로에 육교 구실을 하는 검정다리가 있었다.
건지골 드넓은 들판을 건지들이라고 불렀으며, 가좌천이 그 곳을 가르며 흘렀다. 옛날에는 그냥 ‘큰내’라고 불렀으나 1910년대에 일본이 토지측량을 한 뒤에 지금처럼 가좌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금은 복개되어 있으며 물은 가좌 하수 종말 처리장까지 흘러간다. 이 가좌천이 끝나는 곳은 옛날에 갯벌이었고, 이 곳은 매립되어 제재단지가 앉아 있다.
건지골은 하천과 마른 연못이 있어서인지 습기가 많았다. 이 마을에 결핵환자가 많았는데, 사람들은 그 이유가 습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지금 진주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물론 옛날처럼 습하지도 않고 폐결핵 환자가 많을 리가 없다.
이방뿌리라는 곳이 있었다. 가재울 마을에서는 악귀를 쫓기 위해 예방을 하며 해안에 밥을 해서 버렸다. 그래서 예방부리라 했는데 변음되어 이방뿌리가 되었다.
건지골에는 수령 300년의 엄나무 한 그루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그 주변에 건지터가 있다.
소염도에 열녀의 정절을 기려서 만든 각시당이라는 절의 옛 터가 있었으나 매립공사와 시가지 확장으로 사라졌다.
(2)석남동(石南洞)
원적산(元積山) 기슭에 발달한 법정동으로 지금 석남1동, 석남2동, 석남3동 등 행정리를 안고 있다. 지난날 부평부 석곶면 소속으로 번작리, 고잔(高棧), 옻우물, 박가뫼말〔朴家墓村〕등 네 개의 자연취락이 자리잡고 있었다. 1789년 간행한 《호구총수》에는 대표 취락인 번작리(番作里)가 법정리로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지명은 무라가미쪼(村上將町)였다. 러일전쟁 때 인천 앞바다 해전을 지휘한 함대사령관 무라가미(村上)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번작리는 번지기로도 불린다. 옛날에 포구였고 군대의 기지와 초소가 있어 근무당번을 정해 번을 섰던 터라 그런 지명이 붙었다. 포구 앞에는 노송(老松)들이 무성하게 우거진 둥근 형의 동산이 앉아 있었다. 두루미와 백로 들이 마치 널어놓은 빨래처럼 앉아 있던 평화로운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오늘날 ‘거북시장’이라 이르는 저자와 그 아랫쪽 마을이 옛날의 번작리이다.
고잔은 해변을 향해 쭉 뻗어간 지역을 이르므로 많은 동명이소(同名異所)가 있다. 인천에도 오늘의 중구 일대, 남구 고잔동, 그리고 경서동까지 4곳이나 있었다. 석남동의 고잔이 특이한 것이 있다면 유독 높을 고(高)자를 쓴다는 것이다. 이 곳 고잔은 1960년대만 해도 인가가 두세 채에 불과했다.
바다가 보이는 둔덕에 주로 옻우물 마을 사람들이 사용하던 상엿집이 있었는데, 석남동 사람들 모두에게 두려운 곳이었다. 1960년대에만 해도 어떤 청년이 머리를 산발한 여자귀신에게 홀려 그 곳에 들어갔다 나와서는 며칠 동안 열병을 앓으며 헛소리를 한 일이 있었다.
구레방죽이라 부르는 제방이 바닷물을 막고 있었고 꽤 넓은 무논지대를 형성했다. 지금 고속도로변으로, 화공단지가 들어서 있다.
옻우물은 북쪽 마을이다. 발음되는 대로 ‘오두물’이라고도 불렀다. 옛날에 우물이 있었는데, 옻이 오른 사람이 와서 몸을 씻으면 잘 낫는다 하여 붙여졌다. 옛날에는 계곡에 숲이 우거지고 맑은 샘물이 흘렀다. 작은 규모의 간장공장이 있었고 노송들이 키를 자랑하며 서 있었다. 지금 석남초등학교가 들어선 곳부터 거북시장의 위쪽(북쪽) 끝, 그리고 신도로 옆의 지금 강남시장이라 부르는 곳까지가 옛날의 옻우물 마을이다. 지난날 병을 낫게 한 우물샘이 있던 그 자리는 지금도 석남약수터라 불리며 물통을 든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다.
박가외말은 동쪽 산밑에 있었으며 ‘바그메’라고도 불렀다. 이 곳에 박씨의 묘가 있어 그런 지명이 붙었다고 전하는데, 이 곳에서 평생을 산 주민들은 박씨보다는 배(裵)씨가 더 많았다고 말한다. 이 곳에서는 초콜릿 빛깔의 찰흙이 많이 나와 아이들이 맛있게 먹기도 했다. 이 곳에는 약 40년 전부터 ‘마가의 다락방 기도원’이 자리잡고 있다.
검정다리마을은 큰길 옆에 있었다. 일제 때 주민들을 강제부역시켜 만든 국방도로에 검정색 콜타르를 칠한 목제 육교 2개가 1960년대 초까지 놓여 있었다. 저절로 이 육교 근방에 가옥들이 들어서고, 그 취락을 검정다리마을이라 불렀다.
독굴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옻우물 마을에서 원창동 쪽으로 나갈 때, 도당재산 밑의 골짜기를 바라보며 걷게 되어 있었다. 이 골짜기에서 독을 구웠다 하여 독골이라 하였고, 여기 취락이 들어서자 독굴마을이라 불렀다.
무라가미쪼는 러일전쟁 때 인천 앞바다 해전을 지휘한 함대사령관 무라가미(村上)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오늘의 행정동명인 석남동은 옛 석곶면의 남쪽에 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번작리 포구는 사람을 실어 나르기보다는 인근 밭에 줄 인분을 실은 ‘똥배’가 많이 와서 서 있었다.
원적산이 마을의 동쪽을 감싸고 있는데 이 산은 북구 산곡동(山谷洞)에 닿아 있다. 석남동에서 오래 살아온 노인들은 철마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심곡동과 가정동에 닿아 있는 철마산의 한 지맥이라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고잔산은 바닷가에 있는 산이다.
고작천(高作川)은 이 곳이 고작리로 불리던 시절에 명명된 이름이다. 원적산에서 발원하여 석남동의 중앙을 흐르는 작은 하천이었는데 지금은 복개되어 있다.
지난날 석남동 아래쪽은 광활한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둔전(屯田)들’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군대에 소속된 토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위의 번지기라는 지명과 연계하면 옛날에 이 곳이 상당한 규모의 군대가 주둔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들판에는 윗방죽, 아랫방죽, 안방죽 등 세 개의 제방이 있었다.
석남동에는 위에서 설명한 독골, 박가의 묘가 있던 박가뫼골, 갯가에 있었다는 먼갯골, 이렇게 세 개의 골짜기가 있었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하천, 들판과 함께 모두 도시화되면서 시가지로 변해 버렸다.
(3)신현동(新峴洞)
석남동과 가정동 사이에 위치하며 지난날에 새오개 마을, 큰말, 작은말로 나뉘어져 있었다.
신현동을 지금도 나이 많은 서곶 사람들은 새오개라고 부른다. 원창동(옛 지명은 포리 浦里)에 세곡의 하역과 보관을 위한 포리항을 만들고 큰 창고를 지었다. 서울까지 육로로 실어가기 위해 새로 길을 닦으면서 고갯길을 만들고 그 고갯길을 ‘새고개’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음운변화되어 새오개가 된 것이다. ‘새고개>새오개’의 음운변화 등식은 ㅣ모음 아래에서 ㄱ이 탈락하는 현상으로 국어에서는 흔한 것이다.
새오개 마을은 큰말과 작은말로 나누어 불리기도 한다. 북쪽 취락을 큰말 또는 큰새오개라고 하고 남쪽 취락을 작은말 또는 작은새오개라고 불렀다.
양금머리라는 작은 취락의 지명도 있다. 새오개에 서서 바라볼 때, 평투고개라는 작은 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그 고개를 솔앗너머라고 불렀다. 그 솔앗너머로 넘어가면 양지바른 남향의 작은 취락이 나오는데 그곳을 양금머리라고 불렀다. 지금 신현동과 석남동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요굴이라는 작은 취락이 새오개 서쪽에 있었다.
구석말이라는 취락이 있었다. 구석지게 들어가 있어 그런 지명이 붙었다. 현재 신현북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옛날의 새고개길은 마을 서쪽에 있으며 지금 도시화되어 알아보기 힘들지만 법정동인 원창동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도당굿을 하던 도당산에 있어 도당재고개라고도 한다.
멍개골 고개가 있었다. 도당산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려온 구릉인데 석남동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평투고개는 양금말에서 새오개로 넘어가는 고개였다.
요굴고개는 새오개 마을에서 요굴마을로 가는 고개였다.
굴앗고개는 세오개마을에서 석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였다. 지금 한화에너지로 가는 길과 네거리를 이룬다.
신현동에는 앞방죽과 너머방죽이라는 두 개의 방죽이 있었다. 앞방죽은 지금 신현아파트가 들어앉아 있고 너머방죽은 가정동 봉화재 방죽까지 이어지는 길고 높은 둑으로 지금 신현중학교 북쪽 평지였다.
수령 500년이 넘은 회화나무가 신현동 131-7번지에 있다. 천연기념물 315호로 지정된 보호수이다. 높이 22m, 둘레 5.3m에 이르는 거목으로 멀리 보아서도 자태가 매우 장려하다.
(4)원창동(元倉洞)
조선시대에 삼남지방에서 배편으로 올라온 세곡을 하역하고 보관하던 해안 마을이다. 지난날 부평부 석곶면 소속으로 갯말과 환자곶(還子串) 등 두 개의 자연취락이 자리잡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법정동 명칭이 히사미즈쪼(久水町)였다.
갯말은 원창동의 본마을이다. 포리, 포촌 등으로도 불렸다. 바닷가에 있는 마을, 선착장이 있어 배가 머물 수 있는 부두라는 의미를 담은 지명들이다. 1789년(정조13) 간행한 《호구총수》는 포촌리(浦村里)라는 법정리로 적었다.
갯말은 간뎃말, 아랫말로 나누어 부르기도 했다. 갯말은 바닷가에서부터 산의 구릉 위로 길게 자리잡았었는데 구릉 위에 있던 취락이 윗말이었다.
아랫말은 윗말 바로 밑에 위치했다. 1884년 이 곳에 전조창(轉漕倉)을 세우기 전에는 작은 섬이었는데 그 때 갯벌이 메워져서 뭍이 되었다. 그래서 이 곳을 도촌(島村)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그 당시 이도촌에 조수가 드나들어 허옇게 노염(露鹽)이 서려 있어서 노염밭이 되었던 터라 노염말이라는 이름도 생겼다. 이 마을의 원로들이 늠말이라고 하는 것도 노염말의 음운변화인 듯하다.
간뎃말은 윗말과 아랫말의 중간지대를 가리켰다.
환자곶말은 조정의 대여양곡 보관창고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환자(還子)란 가난한 백성들이 춘궁기에 관으로부터 곡식을 빌어간 뒤 추수가 되면 갚는 차용제도를 말한다.
율도는 우리말로 밤염이라고 불렀다. 뭍에서 보면 밤톨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898년에 화약고가 만들어졌으나 곧 폐지되었다. 원창동 환자곶 해안에서 썰물을 따라 갯벌을 걸어나가 섬에 가고, 밀물에 앞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갯벌은 매립으로 지금 육지가 되었다.
세어도는 우리말로 세루섬이라 하였다. 뭍에서 보면 가늘게 늘어져 누워 있는 모습을 보여 그렇게 지어졌다.
히사미즈쪼는 러일전쟁 때 인천 해전에 참가한 장군 히사미즈(久水)의 성을 따서 지은 지명이다.
포리 포구 뒤의 옛날 도당굿을 하던 산을 도당산이라 하였다.
환자곶 마을 뒷산을 환자곶산이라 하였다.
율도에 있는 구릉을 밤산이라고 불렀다. 이 산에는 품질 좋은 향나무가 자생하였다.
세어도에 있는 나지막한 산을 세어산이라 불렀다.
갯말에 갯말방죽, 율도에 밤염방죽, 세어도에 세루방죽이 있었으나 매립되어 사라졌다.
환자(還子)를 저장한 환자 창고터가 해변에 있었으나 매립공사로 사라졌다.
전조창 터가 포리 해안에 있었다.
도당산에 외국 함선을 막기 위한 포대가 있었다.
(5)가정동(佳亭洞)
가정동은 철마산(鐵馬山) 옆을 넘어가는 승학현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여기부터가 북서곶, 지난날 석곶면이었다.
지난날 가정마을과 산밑마을, 그리고 봉화촌이라는 세 개의 자연취락이 자리잡고 있었다. 1789년(정조13) 간행한 《호구총수》는 봉현리(烽峴里), 가정리(佳亭里), 두 개의 법정리를 기록했다. 봉현리는 지금 봉화촌,봉화재라고 부르는 곳이고 가정리는 본마을이다. 뒷날 부평부가 관할 동리명을 확정할 때, 세 곳을 합해 가정리(佳丁里)로 명명하였다.‘가정(佳亭)’을 잘못 쓴 것인데 한동안 그냥 통용되었다.
일제강점기 지명은 지요다쪼(千代田町)였다.
가정은 이곳의 본마을이다. 조선조의 개국공신 조반(趙胖)이 말년에 여기 와서 가정(佳亭)이라는 정자를 세운 것에서 유래한다. 그 뒤 이 마을은 가정촌으로 불리웠으며, ‘가경주’ 또는 ‘개경주’라는 변형된 지명도 사용되었다. 지금 루원시티 도시재생사업으로 형질이 바뀌어가고 있다.
봉화촌은 마을 서쪽 바다에 가까운 마을이다. 부락이 등지고 있는 축곶산(#木+丑串山)에 봉수(烽燧)가 있어서 그렇게 지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취락은 축곶산에서 방아머리까지 서쪽으로 뻗쳐간 능선 아래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봉화재’,‘봉화촌,‘봉오재’ 또는 ‘봉우재’라는 변형된 지명도 사용되었다. 인근에 청라신도시가 건설되어 본래의 모습이 사라져가고 있다.
산밑마을은 산밑주막이라고도 불렀다. 승학현 밑에서부터 지금의 경인고속도로 서인천 인터체인지까지 자리잡았던 마을을 가리키는 지명이었다. 승학현을 넘어가는 고개 입구(현재의 한국전력 건물과 주유소 시설 뒤편)에 주막이 있었다고 전한다.
개발단 마을이라는 취락이 축곶산 서쪽 와지선에 자리잡고 있다. 1950년대 한국전쟁의 난민들을 주축으로 한 철거민들이 인천 시내에서 떼밀려나와 이 곳에 자리잡고 살았다. ‘수용소 마을’이라고도 불렀다.
지요다쪼는 러일전쟁 때 인천 앞바다의 해전에 참가한 일본 군함 지요다마루(千代田丸)에 이름을 딴 것이다.
철마산이 마을 앞에 우뚝 솟아 있다. 그리고 철마산에서 발원하여 서해로 흐르는 가정천(佳亭川)이 있는데 지금은 복개되었다.
축곶산(#月+丑 串山)은 싸리나무가 많아 붙여진 지명이다. 서해 쪽 봉화재 마을 앞에 있는 산으로 봉수대가 있었다. 이 산의 활개가 능선을 이루며 서쪽으로 뻗쳐가다가 뚝 그치는데 이 곳을 방아머리라고 부른다. 이 곳에서 해안을 조망하며 방어하였기 때문에 방어(防禦)머리라고 한 것이 그렇게 변음된 것으로 보인다.
마살뫼라는 작은 산이 오늘날의 신현동과의 경계지역에 있었으나 도시개발로 인해 형체마저 사라졌다.
승학현(昇鶴峴). 싱아고개라고도 한다)이 가정동 산밑마을에서 철마산과 축곶산 사이 협곡을 가르며 심곡동까지 뼏쳐 있다. 매우 길고 높은 고개였지만 남쪽 등성이 너머에 새 도로를 개설하면서 한가해졌다. 옛날에는 이 고개를 중심으로 북쪽의 모월곶면과 남쪽의 석곶면으로 나뉘었다.
아나지 고개가 철마산과 계양산을 연결하는 지맥을 타고 효성동 쪽으로 넘어가는 산길에 있다.
수루너미고개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고개가 있다. 가정동에서 심곡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승학현과는 구별된다. 승학현은 서쪽이며 심곡동의 서곶로 길가 마을 ‘양가말’로 이어지지만, 이 고개는 보다 동쪽이며 심곡동의 깊숙한 곳(절골)로 이어진다.
용난골이라는 골짜기가 철마산 남서쪽에 있다. 이 곳에서 용마(龍馬)가 날아올라 승천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피네미골이라는 골짜기가 철마산 너머에 있다. 안아지고개를 넘어 철마산 동쪽 깊은 곳에 있는 깊은 골짜기를 큰피네미골, 남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를 작은피네미골이라고 부른다.
방까시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경인고속도로 옆 카톨릭 본당과 수녀원 건물 일대를 지칭한다. 이 곳에 밤이 많고, 지나가려면 늘 짚신 틈으로 밤가시가 찔러와 그런 지명이 붙었다.
가정천(佳亭川)이 철마산에서 시작하여 축곶산을 에워돌며 봉화재들을 비옥하게 적시고 바다로 흘러간다. 마을 쪽은 복개되어 있다.
봉화재들은 축곶산 아래 넓은 들판을 지칭하는 지명이다. 1925년에 축조된 봉화재 방죽이 바다를 막고 있다. 이 곳 해안에도 광대한 천일염전이 있었으나 지금은 폐전이 되었다.
조선의 개국공신 조반이 이 곳에 이주하여 세운 정자인 가정(佳亭)터가 가정동 456번지의 네거리 서쪽 100m에 보존되어 있다.
가정동 뒷산 밑에 도당굿 제단이 있다. 주민들은 옛날부터 이곳을 외경스럽게 여기고 여러 가지 금기를 지켰다.
(6)심곡동(深谷洞)
철마산(鐵馬山)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지난날 부평부 모월곶면 소속으로 기피울과 양가말(梁家村)이라는 두 개의 자연취락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1789년(정조13) 간행한 《호구총수》에 심곡동은 서구의 다른 법정동들과 달리 기록이 없다. 당시 호구 수가 적었음을 알 수 있다.
심곡은 옛 이름 기피울을 한자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가정동에서 승학현을 넘어와 연희동으로 가는 서곶로 국도 위쪽은 철마산 골짜기로 깊숙이 뻗어갔다. 그래서 기피울이라고 한 것이다.
서곶로 국도에 인접한 마을을 양가말이라 했다. 지금 극동아파트가 있는 자리이다. 양씨(梁氏)가 많이 살아 그렇게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에는 고려 때부터 남원양씨(南原梁氏)가 많이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조선초기에 이주해 온 김해김씨(金海金氏), 전주이씨(全州李氏), 풍천임씨(豊川任氏) 등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서부소방서와 경찰서가 있는 새로 개설된 8차선 새 서곶로 도로 근방을 모모퉁말이라 불렀다.
모퉁말에서 더 깊이 들어간 곳, 저명한 지형지물을 말하면 현재 인천시 인재개발원이 있는 부분을 절골말이라고 불렀다. 옛날에 절이 있어서 그렇게 부른 것으로 보인다. 80세가 넘은 원로들이 그 곳에 절이 있었다는 전설을 모르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오랜 지명인 셈이다. 이 절골말은 임씨(任氏)가 집성촌을 이루며 오랜 세월 살고 있어 임촌말이라고도 부른다.
절골말에서 바라보아 탁옥봉을 너머에 있던 작은 취락을 뒷말이라고 불렀다. 뒷골은 뒤에 숨듯이 자리잡은 마을이라 그렇게 불렀다. 이 곳은 이씨가 오랜 세월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어 앞의 임촌말과 호응시켜 이촌말이라 부르기도 한다.
히쓰미쪼은 러일전쟁 때 인천 앞바다에서 러시아 함대를 격파한 일본 군함 히쓰미마루(日進丸)에서 딴 것이었다.
철마산 북쪽이 심곡동에 닿아 있다.
탁옥봉(琢玉峯)은 마을 앞산이다. 신라시대에 어떤 도인이 정자를 세우고 수도했다는 전설을 안고 있다.
심곡천(深谷川)이 철마산과 탁옥봉 사이 골짜기에서 시작하여 샘내들을 적시고서해로 흘러간다.
바다를 막아 샘내 벌판을 개척하게 한 방파제를 샘내방죽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아시안게임 주경기장 공사로 복개되어 있다.
승학현(昇鶴峴)은 가정동에서 넘어오던 높고 길었던 고갯길로 싱아고개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멀지 않은 연희동 용의머리 앞바다가 수백 년 전부터 두루미 도래지였으니 이 고개에서도 두루미가 날아올랐을 것이다.
철마산 산록 바위에 말 발자국 형상이 있어 천마가 승천했다는 전설이 아기장수전설과 함께 구비전승되고 있다.
택재고개라는 고개가 심곡동에서 곧바로 공촌동으로 넘어가는 산길에 있다.
조선 문종(文宗)의 후궁인 숙의문씨(淑義文氏)의 묘가 탁옥봉 산록에 있다.
수령 1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철마산 와지선에 있다.
(7)연희동(連喜洞)
연희동은 근대 서곶의 중심로서 연일과 샛말 등 두 개의 자연취락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바다를 향해 반도처럼 뻗쳐나간 곳이 있는데 그 곳을 ‘용의머리’라고 부른다. 거기에도 작은 취락이 있었다.
1789년(정조13) 간행한 《호구총수》에는 한자 표기가 지금과 달리 연희리(延希里)라고 기록했다. 이것이 언제부터인가 연희(連喜)로 한자표기가 바뀌었는데 의미가 중요하지는 않다.‘연일’이라는 본마을의 음차기록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마을 출신인 이훈익의《인천지명고》는 ‘연일이 신라시대부터 여자들이 모여 비단을 짰던 곳이라고 전한다. 근방 여인들을 모아 직조 기술을 가르치던 교습소 구실을 했다고도 전한다. 그래서 본래 여희(女姬)라는 지명을 가졌었는데, 그것이 연일로 바뀌었다. 이 마을의 형상이 베틀에 앉아 베를 짜는 여인과 같아서 여희라는 지명이 붙었다는 전설도 있다.’고 기록했다.
두 가지 전설이 모두 여인과 직조에 연결하여 지명 유래를 설명하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연희동에 정작 비단과 베 직조의 근원이 되는 뽕나무밭이나 삼밭은 남아 있지 않고 원로들도 그런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샛말은 연희동과 공촌동의 사이에 끼여 있어 그렇게 붙여졌다. 1991년부터 시작된 도시개발로 인해 큰 도로가 관통해 나가고 자연취락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연희동 본말에서 샛말과 공촌동으로 가는 고개를 새꼬랄고개라고 불렀다. 그리고 고개 밑에 있는 작은 취락을 새꼬랄말이라고 불렀다. 고개의 모습이 새의 꼬리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그런 지명이 붙었다. 지금 연세병원이 있는 곳이다.
용의머리는 연희동 본말에서 뻗어간 땅의 모습이 용과 같고 바다에 이른, 마치 용의 머리 같은 곳에 취락이 있어 그렇게 붙여졌다.
옛날 연희동이 시작되던 곳은 현재의 연희감리교회가 들어선 작은 고개였다. 심곡동에서 뻗어온 서곶로 길은 이 고개에서 오른편으로 휘어지며 내리막길이 시작되고 갈마산과 연희동 본마을 사이를 지나 다시 활처럼 휘어지며 고개를 올라갔다. 연희교회 근방 고개를 군인길 또는 군잇길이라고 불렀다. 이 곳은 삼거리였다. 서곶로를 타고 와서 휘어지지 않고 서곶초등학교와 옛 연희진 터로 곧장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아마도 서곶로가 닦여지기 전에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길을 타고 가면 서곶초등학교와 서곶면사무소(옛 연희진 자리)와 서곶지서(서곶면사무소의 건너편)에 곧바로 닿을 수 있었다. 그리고 군인길 언덕에서 갈 수 있는 또하나의 길은 용의머리 반도로 가는 것(줄안마루길이라고 불렀다)이다.
옛날에 군인길은 중요한 교통로이자 군사도로였다. 고려 때는 이 길을 타고 북으로 가서 개경으로 통하고, 조선시대에는 이 길을 타고 와서 연희진에서 동쪽길을 잡아 계양산 옆 경명현을 거쳐 부평부(富平府)나 서울로 갔다. 그리고 1883년 조선 조정은 연희진을 설치하고 용의머리 반도 끝에 용두돈대를 만들고 아울러 이 곳에 기연해방영(京畿沿海防營)이라는 병영을 설치했다. 군인길이란 지명은 아마 그런 연고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상급기관에서 연희진이나 용두포대로 긴급 전령이나 파발이 달려오고 달려가고 군병력도 대오를 맞춰 이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옛날의 군사도로 군인길은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뚜렷하게 있어 옛일을 더듬을 수 있게 했으나 지금은 도시개발로 가옥들 사이로 난 하나의 골목길처럼 되어 버렸다.
연희동에는 수군기지인 연희진(連喜鎭)과 해안 포대가 있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뒤에 서해로 침범해 오는 서구 열강의 함선을 격파하기 위해 1878년에 만든 것으로서 연희진은 연희동 247번지에 있었다. 포대는 용두산에 있어서 용두포대라고 불렀는데 군사적 요충이어서 앞바다가 매립되기 전까지만 해도 국군의 해안 경비초소로 사용되었다.
서곶면사무소가 1914년에 연희진터에 들어섰다. 이 건물은 1940년에 인천부 서곶출장소로 바뀌었다. 1945년 광복 직후 명칭이 바뀌어 인천부 서곶지청이 되었다. 이것은 1948면 8월 15일 정부수립과 함께 다시 출장소로 바뀌었다.
그리고 출장소가 현재의 서구 보건소 자리로 이전한 뒤 한동안 건물이 보존되었으나 1990년대의 도시 개발로 없어졌다.
연희동의 본마을 연일은 세 개의 야산과 하나의 하천을 끼고 발달했다.
갈마산(渴馬山)은 마을을 관통해 가는 국도의 남쪽에 있던 야산인데 그 모습이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도시 개발로 인해 없어졌다. 서구청이 그 자리에 서 있다. 연일 마을에서 보기에 왼쪽(동쪽)이 높고 오른쪽(서쪽. 군인길 쪽)이 낮았는데, 그런 연유로 동쪽의 높은 산 정상을 윗뫼라고 불렀다.
닭우리산〔鷄鳴山〕은 마을 북쪽에 있는 작은 구릉이다. 계양산을 관통해 내려와 인천공항으로 가는 큰길에서 왼쪽 무논지대 건너편에 보이는 산이다.
샘내〔泉川〕들은 연희동과 심곡동 사에에 있는 들이다. 철마산에서 발원한 심곡천(深谷川)을 젖줄로 삼고 만들어진 곳이다.
닭우리들은 닭우리산 아래, 빈정천을 끼고 형성된 드넓은 무논지대를 말한다.
위의 샘내들판과 닭우리들판은 2010년경부터 시작한 아시안게임 주경기장이 들어앉으면서 형질이 사라졌다. 공사 시작 전 문화재청에서 지표조사를 하니 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다 한다.
용의머리산〔龍頭山〕은 용의머리 반도의 바다 쪽 끝에 있는 야산이다.
빈정천(濱汀川)은 계양산 서록에서 시작되어 공촌동을 거치고 연희동과 경서동 사이를 흘러 서해로 빠져나가는 하천이다.
고로수고개와 고로수골이라는 곳이 있었다. 연희동 본마을의 앞산 갈마산의 위쪽(동쪽)등성이를 넘어가는 고개와, 그 곳에 있던 골짜기를 가리켰다. 지금은 시가지로 변했다.
능안이라는, 용의머리보다 작은 반도가 있었다. 현재의 서부경찰서 연희파출소가 있는 옛 새꼬랄말에서 서쪽 소로를 타고 들어가면 도당재 언덕에 이르고, 그 언덕 언저리에 서곶면사무소와 서곶지서가 있었다. 오래 묵은 엄나무(도당굿을 하던 도당나무이다) 밑을 지나 계속 서진하면 1km쯤 되는 길이 바다를 향해 뻗어갔다. 그 곳을 능안이라고 불렀다. 능안에는 옛날에 왕릉이 있었다고 구전되고 있는데 확인할 길은 없다.
이 능안 길은 서곶초등학교 뒷편으로 뚫려 있다. 그 북쪽으로 뻗어간 산줄기 하나가 봉긋 솟아올라 넓은 벌판을 바라보며 뚝 끊어진다. 이 봉우리가 닭우리산이고 넓은 벌판이 닭우리들이다. 그리고 능안의 남쪽 들판을 대평두리 또는 대평들이라고 부른다.
용의머리 마을 앞바다는 김포 매립지에 포함되기 전 두루미 도래지로 유명했다. 1977년 천연기념물 252호로 지정되었으며 해마다 늦가을에 용두산에서 서면 장려한 모습으로 날아다니는 두루미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청라매립지가 조성되어 갯벌이 사라지자 두루미들은 오지 않았다.
연희동 해안에 상애(相愛)염전이라는 천일염전과 저수지가 있었으나 1960년대에 무논으로 개척되었다.
연희동 산 85번지, 옛 연희진 및 서곶출장소 터 위쪽 언덕길을 도당재라고 하는데, 그 곳에 도당굿을 지내던 제단터와 300년 된 엄나무가 있다. 이 엄나무 고목에는 큰 그네가 걸리고 해마다 단오 때는 그네 타기 대회가 열렸다.
(8)공촌동(公村洞)
부평과 서곶의 진산인 계양산의 서록(西麓)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옛 이름 고현리(古縣里)가 삼국시대 부평지역의 통치 중심지여서 붙여진 이름이라 전하는데 확인할 길은 없다. 공촌이라는 최초 지명은 1789년(정조13) 간행한《호구총수》에 오늘처럼 공촌리(公村里)로 실려 있다.
지난날 본마을과 갈뫼(葛山) 마을, 그리고 하천 건너편 과기평 마을 등 세 개의 자연취락이 자리잡고 있었다. 위의 경서동에서 설명한 것처럼 과기평은 공촌, 경서, 검암동의 경계가 합쳐진 곳이다.
일제강점기의 일본식 지명은 구로다쪼(黑田町)였다.
고현리는 삼국시대에 이 곳이 부평과 김포의 옛 지명인 주부토현(主夫吐縣)의 소재지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부평에 읍호가 처음으로 붙은 것은 이 ‘주부토현’이 처음이고, “고구려 장수왕 58년(470) 김포반도에 주부토군을 설치했다”는 기록 한 줄이 역사서에 있다. 이것은 신라 경덕왕 16년(757) 장제군(長堤郡)으로 개칭되었고, 고려 태조 23년(940)에 다시 수주(樹州)로 명칭이 바뀌었다.
주부토군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3세기 가까운 세월과 장제군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2세기 가까운 기간에 통치 중심지가 공촌동이었을 것이라고 인천의 원로 향토사가들은 추측하고 있다. 옛 문헌기록에 ‘경명현폐현지 계앙산북록 만일사하평탄지 민호이백야(景明廢縣址 桂陽山北麓 萬日寺下平坦地 民戶二白也. 경명현의 옛 현소재지는 계양산 북록의 만일사 아래 평탄한 땅에 있었으며 200호의 백성이 살았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런 추측이 유력하다. 실제로 이 마을에는 그런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주춧돌과 기와 조각 따위가 자주 발견되고 있다. 지금도 이 곳 사람들은 ‘고현이’, ‘고련이’ 또는 ‘이십만평’이라고 부른다. 마을 동쪽 산중턱의 드넓은 지대를 이르는데, 이 곳이 면적이 20만평이 되며 지난날 읍소재지였다고 마을 원로들은 추측하여 말한다.
2001년에 발간된《계양사》는 고대 계양지역의 읍소재지를 계양산 서쪽 고현펄〔古縣平)로 추정하고 있다. 그 근거로, 읍지 부근인 경명현 서쪽에서 근래에 돌도끼가 출토된 점, 읍지로 짐작되는 곳에서 온돌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석판이 여러 개 출토된 점, 읍지 추정 장소와 가까운 갈뫼산과 허암봉에서 고인돌이 발견된 점, 읍지 위 산중턱에 신라시대부터 존재했다는 만일사(萬日寺) 터가 있다는 점, 그리고 고대 족보에 고현(古縣)이라는 글자가 나온다는 점 등을 들었다.
그리고 공촌동이 읍지로서 타당한 지리적 여건을 가졌음을 열거하고 있다. 군사적 요충이라는 점,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은밀한 장소라는 점, 육로 교통이 좋다는 점, 서해의 조수가 빈정천까지 밀려왔을 것이므로 이 곳을 작은 포구로 삼을 수 있었으며 이 곳에서 멀지 않은 경서동 금산 아래 큰 배를 댈 수 있는 포구가 있었다는 점 등이다.
공촌동에만 국한하여 생각하지 말고 근방 검암동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공촌동에서 검암동, 시천동으로 이어지는 드넓은 계양산 산록이 중심지였던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발아장과 구슬원이라는 여각(旅閣), 장모루에 관련된 이야기들과 함께 묶으면 이 곳이 옛 부평지구의 통치 중심지였다는 추정이 더 유력해진다.
공촌은 ‘고현’에서 음운이 변한 것이 아니다. 마을 형태가 한자의 공(公)자와 같아서 지어졌다고 전한다. 한 능선의 동서에 마을이 앉아 계양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과기평은 경서동에서 기술했으므로 설명을 생략한다.
갈뫼는 ‘공(公)’자를 이루는 능선 너머 마을로 칡이 유난히 많아 붙여진 지명이다.
구로다쪼는 임진왜란 때 왜군 지휘관이었던 구로다나가마사(黑田長政)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었다.
장자터라는 곳이 있다. 검암동과 경계를 이루는 허암봉의 남쪽으로, 옛날에 부자들이 모여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도당미라는 곳이 있다. 지금 계양산 관통도로 길가 서구 정수사업소가 있는 부분이다. 옛날 이 곳에 도당할머니를 모셨던 터라 지어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길마산이라는 산이 계양산과 철마산 사이에 있다. 마치 짐을 잔뜩 실은 길마처럼 두 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은 산이라 그렇게 부르는데, 이 산을 게양산 너머 계산동 사람들은 중구봉(重九峯)이라고 부른다. 고려시대에 불교행사인 중구절(重九節. 9월 9일) 행사를 이 산에서 지낸 연유로 그렇게 부른다고 전해진다.
공촌동의 유명한 지형지물은 모두 계양산과 연관되어 있다. 계양산은 공촌동과 북구의 계산동(桂山洞), 방축동(防築洞), 목상동(木霜洞)의 경계지역 안에 있다. 서구에서는 검암동과 시천동이 산과 가깝지만 주봉(主峰)에서는 떨어져 있고, 공촌동이 가장 가깝다. 깊숙이 산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자리잡고 있는 형상이다.
계양산에는 세 개의 깊은 골짜기가 있다. 호랑이가 출몰했다는 범골, 경명현이 아래의 깊은 계곡인 산곡(山谷), 계양산 서쪽 산자락 아래에 옛날 절이 있었다는 불당골, 이 세 가지 지명은 지금도 사용된다.
계양산 옆으로 난 낮은 구릉을 타고 넘어가는 경명현(景明峴)이라는 유명한 고개가 있다. 서곶과 부평을 이어주는 유일한 고개였으나 거의 같은 방향으로 경명로가 개설되어 의미가 사라졌다. 이 고개는 고려시대부터 매사냥으로 유명했다. 고려 충렬왕은 경명현에 와서 매사냥을 자주 하였고, 경명현 서쪽에 국영 매방을 두었다고 전한다. ‘징매’라는 지명은 충렬왕이 매를 징발(徵發)했다 하여 징매〔徵鷹〕라고 한 것에서 유래한다고 설이 유력하다.
이 경명현을 중심으로 동서로 쌓은 성을 중심산성(衆心山城. 계양산성이라고도 했다)이라 했다. 고종 7년 서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는데 공해루(控海樓)라는 문루도 세웠었다. 공해루 200미터 남쪽에 ‘중심산성 사적비’가 세워졌었는데,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계양산은 예로부터 전국적으로 알려져 문장가들의 글에 등장한다. 고려 때 이규보(李奎報)의 《망해지(望海誌)》, 풍수가 김위제((金謂磾))의 남경(南京. 오늘의 서울) 천도 상소문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근방의 문인들이 부평팔경을 시문으로 묘사하였는데 거의가 서곶지역의 것들이고 계양산의 절승에 대한 것이 제일 많다.
이 산에서 생산되던 부싯돌과 회양목은 품질이 좋아서 전국적으로 팔려 나갔다 한다. 부싯돌은 이제 불필요해져 원석이 남아 있겠지만 30~40년 전까지 산록에 지천으로 많던 회양목은 멸종되어 버렸다. 환경단체와 서곶초등학교 동창회 등이 복원사업을 벌이고 있어 다시 부활될 전망이 보인다.
계양산에는 만일사를 포함해 12개의 사찰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공촌동은 서곶의 남북을 관통하는 국도에서 깊숙이 들어간지라 한적하고 낙후된 마을이었으나 계양산 관통도로가 생기고, 1991년부터 시작된 연희지구 도시개발로 인해 그 고유의 형질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9)경서동(景西洞)
지난날 부평부 모월곶면 소속으로 고잔(古棧), 범머리〔虎頭〕, 심포리(沈浦里), 빈정촌(濱汀川) 등 네 개의 자연취락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앞바다에 난지도(蘭芝島), 청라도(靑羅島), 세어도(細於島) 등의 섬들을 안고 있었다. 이 섬들은 경사가 약한 갯벌 위에 놓여 있어서 썰물 때는 걸어서 왕래할 수 있었다. 1789년(정조13) 간행한《호구총수》에는 당시의 행정 면단위로 호구와 인구수와 행정리 지명을 기록한 자료인데 고잔리(古殘里)와 난지도(蘭芝島)가 실려 있다. 한동안 고잔리가 법정동으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식 지명은 리가쪼(李家町)였다. 8·15 광복 후 경서동이라는 오늘과 같은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경명현의 서쪽에 있다는 의미였다.
경서동은 서곶의 다른 마을들에 비해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아 예전의 형질이 크게 변하지 않았으나 지난 2005년 경부터 결국 개발이 시작되어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고잔은 경서동의 본마을이다. 계양산의 활기가 바다를 향해 뻗쳐나가 작은 반도를 이룬 지역에 앉은 마을로 넓은 의미로는 경서동의 여러 소규모 취락을 포괄하기도 한다.
곰말은 마을의 북쪽에 있지만 중심 노릇을 해왔다. 지금 태평 샹베르 아파트가 앉아 있다.
아랫말도 곰말처럼 경서동의 원마을이라 이를 수 있다. 마을의 남쪽 아래에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지금은 빌라촌이다.
넘말은 아랫말에서 동쪽으로 더 들어가 고개를 넘으면 나타난다. 고개 너머 마을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현재 태평 샹베르 아파트와 빌라가 절반씩 차지하고 있다.
앞말은 넘말과 이웃하고 있다.
범머리〔虎頭〕는 산 이름이자 마을 이름이다.‘버머리’라고도 불렀는데, 인근 연희동의 바다로 뻗어간 반도를 용의머리라고 부른 것과 대칭이 된다. 2~3km 떨어진 두 마을은 그렇게 바다로 뻗은 반도가 대응되어 조화를 이루었다.
심포리는 고려시대에 수군기지가 있었던 바다 쪽 포구 마을을 가리킨다. 심포(沈浦)란 포구가 물에 잠겼다는 뜻이다. 곰말과 골프장 사이로 길게 자리잡은 마을이었다. 현재 우정아파트 단지가 앉아 있다.
빈정촌과 독점마을, 과기평 마을은 서곶로에서 서쪽으로 뻗어간 경서동 반도로 향하지 않고 서곶로에 인접한 지역을 가리키며 서로 이름이 혼용되기도 하고 매우 가깝게 바라보고 있다.
빈정촌은 빈정천이 지나가는 빈정교 주변 마을을 가리킨다.
서곶로에서 국제컨트리클럽 간판을 보고 서쪽으로 진입하는 길의 오른쪽은 윗독점(검암동 쪽)이고 왼쪽(연희동 쪽)은 아랫독점이라고 부른다. 지난날 이 곳에 카톨릭 신자들이 모여들어 공소(公所)를 열고 옹기를 구웠는데 가마가 위아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빈정촌과 아랫독점은 동일하다고 보아도 된다.
과기평(過騎平)은 위의 빈정촌, 독점 등을 아우르는 지명이기도 하다. 병인양요 후 이곳에 계우정(桂虞停)이라는 군사기지가 설치되고 기병들이 말을 달려 지나는 곳이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 이 마을 출신 원로들은 괴기펄이라고도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과기벌’의 음운변화로 보인다.
위의 빈정촌, 독점, 과기평은 오늘의 행정구역으로 경서동과 공촌동과 검암동의 경계가 겹쳐 있다.
경서동의 복잡한 취락을 그 마을에 진입했던 순서대로 설명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검단과 김포를 거쳐 강화로 가는 서곶로 국도의 빈정천을 건너면 빈정촌 또는 과기평이라는 마을을 만난다. 빈정교를 건너자마자 다가오는 취락이 아랫독점이다. 조금 더 걸어 올라가 서쪽으로 난 길(지금은 국제골프장 입구로 설명된다)을 잡아 걸으면 오른쪽에 있는 마을이 윗독점이다. 이 길을 타고 5리쯤 걸으면 정면에 곰말이라 부르는 취락이 나타나고, 오른쪽에는 도당재, 왼쪽에는 아랫말이 자리잡고 있다. 아랫말에서 더 깊이 들어가 있는 촌락이 넘말과 앞말이다. 도당재에서 정면의 둑길을 따라 바다 쪽으로 더 들어가면 반도의 끝 범머리가 나온다. 이상을 통틀어 고잔, 쑥뎅이고잔, 또는 쑥뎅이라고 불렀다.
도당재에서 오른쪽으로 비껴서 갯벌의 징검다리를 건너면 난지도에 갈 수 있었다. 범머리에 서면 정면 바다 가운데 떠 보이는 섬이 세어도이다. 썰물 때면 10분만에 걸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범머리에서 더 멀리 바다를 바라보면 우전방에 섬들이 보였다. 왼쪽부터 청라도, 범염, 까투렴, 노렴 등 네 개의 섬이었다. 이 섬들도 밀물이 적게 밀려오는 조금때면 썰물을 따라 걸어갈 수 있었다.
위에서 인용한 조선 정조 때 문헌 《호구총수》에는 고잔(古殘)으로, 이후의 다른 자료는 고잔(古棧)으로 한자 표기가 다르나 그것은 큰 의미가 없다. 순우리말 지명 ‘고잔’의 음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복 후 우리말 지명을 회복할 때 고잔이라는 재래의 지명을 버리고 경서동을 선택한 것은 국내에 같은 지명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었다. 고잔의 어원은 이렇다. 해변을 향해 쭉 뻗어간 곳을 ‘고지’ 또는 ‘곶(串)’이라고 부르고, 곶 바로 앞에 우묵하게 패여 있는 곳을 ‘곶+안’으로 합성하여 만든 말이다. 그래서 리아스식 해안이 발달한 서해안에는 많은 동명이소(同名異所)가 있다. 인천에도 오늘의 중구 일대, 남구 고잔동, 서구의 석남동, 그리고 이 곳 경서동까지 4곳이나 있다.
빈정천은 계양산 서록에서 발원하여 서해로 흘러가는 수량이 풍부한 하천을 가리킨다. 이 하천은 상류에서 공촌을 지나오기 때문에 공촌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국립지리원의 지도에 표시된 지명은 빈정천이다.
일제가 옛 경서동에 리가쪼라는 명칭을 붙인 것은 이 곳이 지난날 이씨 왕가의 땅이기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경서동의 전체 토지가 조선 왕조의 종친들의 봉토(封土)로서, 이 곳 주민들은 대대로 소작에 종사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난지도는 옛날에 한약재의 명약 난지초(蘭芝草)가 자생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난점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난지염’의 음운변화인 듯하다. 사멸된 우리말에 ‘염’이라는 것은 섬과 동의어였던 것이다. 난지도는 뭍과 워낙 가까운데다 간척사업을 하면서 만든 방죽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섬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육지화되었다. 그나마 절반은 옛 모습이 살아 있는데 절반은 인천공항으로 가는 고속도로가 자르고 나갔다.
청라도는 난지도와 달리 뭍과 상당히 떨어진 섬이었다. 푸른 넝쿨 관목들이 무수히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육지에서 그 섬이 유난히 푸르게 보여 ‘파렴’이라고도 불렀다.
바다 쪽에 박힌 범머리산은 한자음으로 호두산(虎頭山) 또는 금산(金山)이라 불렀다. 금산은 여기서 금이 많이 났다 하여 붙은 이름이고, 범머리산은 형용이 호랑이 머리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설에는 이 산에 병인양요 후 이양선의 출몰을 관측하는 망루와 봉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이 봉수는 국내의 전체 봉수를 계통적으로 집성한 《한국의 성곽과 봉수. 상.중.하》(한국보이스카웃연맹 발행. 1989년)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양선 침범을 보고 받기 위한 연변봉수(沿邊烽燧)의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연변봉수란 국경선이나 해륙 연변에 제1선을 설치하여 기점 구실을 하였다. 통신이외에 국경의 초소와 수비대 기능도 가졌다.
이 산에 동록(東麓)에는 조선 세종대에 대제학을 지낸 류사눌(柳思訥)의 묘(인천 지방문화재)가 있다. 그는 이 마을 태생으로 소년기에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 슬하에서 자라다가 계양산 서록에 있던 만일사(萬日寺)에서 공부해 대과에 올랐다.
이 마을에는 양촌(陽村)길이라는 소로가 북쪽을 향해 나 있다. 신작로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인천에서 김포 양촌으로 가던 길이었다.
고잔마을 옆에 위치한 국제골프장 안(경서동 산 146번지)에는 사적 221호로 지정된 녹청자도요지가 있다. 고려조 중기에 개설되어 조선말기에 폐지되었는데 한국에서 유일하게 남은 녹청자 가마터이다. 1965년부터 2년에 걸쳐 발굴되었으며 폭 1.5미터, 길이 7.3미터의 가마터가 완전하게 남아 있다.
난지도와 청라도에서는 패총(貝塚)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두 섬에는 지난날 삼남지방에서 징수해 실어온 세곡을 저장하는 야적장이 있었다. 그리고 이 마을 주변 산야에 좋은 목재가 많아 조선 초기부터 궁궐 건축용 양목지(養木地)로 지정되어 벌목이 금지되었다.
이 마을에서 생산된 약쑥은 약효가 좋아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쑥뎅이고잔 또는 쑥뎅이라는 지명이 붙었다.
바다 쪽에 서주(西州)염전이라는 소규모의 천일염전이 있었다.
독점에서 만들어진 옹기도 명성이 높다. 바닷가 쪽에 극동요업주식회사 공장이 들어섰던 것도 녹청자 도요지나 독점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10) 검암동(黔岩洞)
검암동은 공항철도 검암역이 개설되고 상전벽해가 될 만큼 형질이 달라졌다. 지난날에는 바로뫼, 검바위, 간재울 등 세 개의 자연취락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 정조 때 문헌《호구총수》에는 검암리(黔巖里)로 등재되어 있다. 오늘의 한자표기가 ‘암(岩)’이 아닌 ‘암(巖)’으로 기록됐는데 의미가 거의 같고‘검바위’라는 우리말 지명의 훈차(訓借)이므로 큰 차이는 없다.
바로뫼촌 국도를 중심으로 하여 위쪽(동쪽)이고 상동(上洞)이라 부른다.‘바로 산 아래 있는 마을’의 의미였다고 원로들은 말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발아현(發阿峴)이라는 고개 이름도 있고 발아장(發阿場)이라는 저잣거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의 한자 표기 발아(發阿)는 위의 ‘바로’의 음차로 보인다. 오늘의 우리말 부사 ‘바로’는 중세어에서 ‘바’였다.
발아현은 고려시대부터 지금의 신작로가 생기기 전까지 국도 구실을 하는 길의 고개였다. 지금의 서곶로에서 오른쪽(동쪽)으로 올라가는 고개를 가리킨다.
발아장은 그 길 옆에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길을 따라 올라가 지금 상동이라고 부르는 마을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이어온 이 저자에서는 우시장(牛市場)이 서고 농산물과 일용잡화가 팔렸다고 한다. 계양면에 황어장(黃魚場)이 개설되면서 폐지되었다 한다.
추측하기에 중세에는 이 곳에 인접한 시천동이 수주(樹州)의 소재지였고 여각이 있었으므로, 그리고 그 조선시대에는 이 곳이 면소재지였으므로 이 마을의 저자는 오랜 세월 흥성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황어장이 활기를 얻으면서 폐쇄되었던 것이다.
검바위는 중동(中洞)에 있다. 검암동의 세 취락을 대표하는 지명이 되었지만 이 마을에 거대한 검은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 이 바위를 서인천고등학교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파트 한 채가 누워 있는 것만큼 큰데, 색깔이 완전한 검정색이어서 이 마을의 가장 저명한 지형지물이 됨을, 그래서 검바위란 지명이 붙여졌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이 검바위 위쪽에는 고인돌도 있다. 이 마을을 벗쩍말이라고도 하는데 까닭을 알 수 없다. 중동에는 검암역이 들어서 서울역까지 30분밖에 안걸리는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간재울은 하동(下洞)이다. 검바위의 아랫마을이다. 이훈익의《인천 지명고》는 이 마을이 북동쪽을 등지고 앉았다는 뜻의 간방(艮方)에서 유래한다고 설명한다. 동양의 전통적인 방위개념으로 보면 간방은 북동을 중심으로 한 15도 범위 내의 방위를 말한다. 풍수지리에서 이 간방을 등지고 앉음은 매우 안정된 것이다. 이 마을이 처음에는 간좌울이었다가 간재울로 음운이 변화한 것이라고《인천지명고》는 설명한다.
바로뫼라는 예스러운 명칭이나 검바위, 그리고 간재울와 관련하여 고인돌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마을의 유래가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정도로 매우 깊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한편 검암동의 일제강점기 지명은 우라바에쪼(瓜生町)였다.
허암산(虛庵山)은 검암동의 마을 남쪽 앞산이다. 일부 주민은 호암산(虎岩山)이라고도 하나 허암산이 맞다. 호암산은 근처의 다른 야산인데 발음이 유사해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허암산은 조선 연산군대에 허암(虛庵) 정희량(鄭希良)이 사화(士禍)를 피해 은둔한 것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허암산의 산정 좌우에 토성 흔적이 보인다. 조선 초기에 축조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길이는 1.5킬로미터쯤 된다. 호암산은 우리말 그대로 범바위산이라고도 한다. 검암동 윗마을에서 계양산 방향에 보이는 산이며 계양구 목상동과 경계가 된다. 이 산에 호랑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그런 지명이 붙었다.
작은징맹이라는 고개가 있다. 고개 아래가 고려 때에 바로뫼 마을의 저자(발아장)이 있던 곳으로, 이 고개를 넘어 왕도인 개성까지 갔다고 전해진다.
구슬재 또는 피고개라고 불리는 고개가 있다. 검암동이나 시천동에서 출발해 꽃뫼 옆을 스쳐서 계양구 목상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옛날에 고개 아래 구슬원이라는 여각촌(旅閣村)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숫돌고개라는 고개가 있다. 마을 북동쪽으로 가서 산맥을 넘어 계양지구로 가는 곳에 있는 작은 고개인데, 칼을 가는 숫돌을 늘어놓고 팔았다 한다. 검암동 근방에서 숫돌로 쓰는 돌이 많이 생산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검바위고개라는 고개도 있다. 건들고개라고도 하는데 상동에서 공촌동의 장자터로 넘어가는 길에 있다.
웃골은 상동 위에 있는 골짜기로 검바위고개와 연결된다. 윗말과 가까워 웃골이라는 지명이 붙었다.
산양골은 윗말에서 범바위산으로 가는 첫번째 골짜기이다. 옛날에 사냥을 하던 곳이었거나, 산양이 나타난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칡밋골이 범바위산 방향에 있다. 칡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시천천은 검암동의 유일한 하천이다. 이 시내는 계양산 서북록에서 발원해 오늘의 시천동과 검암동을 경계 지으며 흐른다.
해머리방죽이라는 둑이 간재울 아래 바닷가에 국제컨트리클럽을 끼고 있다. 바다 머리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방죽 아래로 천일염전이 있었으나 논으로 개간되었다.
검암동의 도당굿과 산신제를 지내던 당산(산70번지)에는 수령 300년의 상수리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11) 시천동(始川洞)
시천동은 옛날에 황어현(黃魚縣)에 속한 시기도 있었다. 그만큼 깊숙이 동쪽으로 치우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부평부 모월곶면 관할로 들어왔다. 1789년(정조13) 간행한《호구총수》에는 당시의 행정 면단위로 호구와 인구수와 행정리 지명을 기록한 자료인데 시천동을 모월곶면 관할 법정리로 기록했다.
1914년 일제는 행정구역을 개혁하면서 시천동을 하루히쪼(春日町)라고 명명하였다. 러일전쟁 때 인천 앞바다에서 러시아 군함 와리야크 호를 격파한 하루히마루(春日丸)에서 이름을 따왔다.
시시내는 시내가 시작된다는 뜻을 가진 지명이다. 계양산 서쪽에서 시작되는 큰 계곡을 끼고 있어 그런 지명이 저절로 붙었다. 한강의 서쪽 방향에 우뚝 솟은 계양산 쪽으로 깊숙이 들어앉은 지형적 특성 때문에 고려시대 전략상 요충지였다고 전한다.
점말은 동이를 구워 파는 동이점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최근에도 이 지명이 사용된다. 그러나 지금은 민가가 거의 없다.
안골은 갯골에서 동쪽 성황당 고개로 올라가는 곳에 있다. 갯골은 시천동의 끝부분, 지난날 방파제를 막기 전에 이곳까지 배가 들어와서 붙여졌던 이름이다.
윗말은 시천동의 본마을 북쪽 위에 있다.
오룡산(五龍山) 큰 줄기라고 부르는 산이 이 마을을 품고 있다. 오룡산은 계양구 둑실동 쪽에서 다섯 개의 활개를 뻗으며 퍼져 나갔는데 그 중 가장 큰 지맥이 시천동까지 뻗쳐오는 것이다.
꽃뫼 또는 화산(花山)이라고 부르는 작은 산이 있다. 마을 앞산으로, 계양구 목상동으로 넘어가는 쪽에 있다. 꽃봉오리 형상이어서 붙여졌다.
구슬원(球瑟院)이라는 여각촌이 꽃뫼 밑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는 왕도 개성과 삼남지방을 왕래하는 길목으로, 손님을 끌기 위해 공치기 놀이와 비파를 뜯었다고 전한다.
화산 앞에서 검암동 바라뫼 마을까지를 장모루(長牟婁)라고 부른다. 일설에 이 곳이 고려 왕조 때 부평을 통치하던 수주(樹州)의 소재지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장모루 바로 옆에 삼국시대와 고려 때 역마를 관리하던 구슬역(球瑟驛)이 있었고, 주변에 나그네들을 위한 여각 구슬원과 함께 크게 번창하였다 한다. 원로들의 회고에 의하면 역사에 사용되었던 주춧돌 8개가 수십 년 전까지 있었다고 한다.
삽작굴 또는 삽자골〔揷紫谷〕이라는 골짜기가 꽃뫼 바로 밑에 있다. 나무를 꽂아 심었다는 뜻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지금은 변전소가 들어와 있다.
꽃뫼골이라는 골짜기가 계양구 목상동으로 넘어가는 곳에 있다.
계동골이라는 골짜기가 삽작골 북쪽 능선 너머에 있다.
서낭당 고개가 계양구 둑실동을 거쳐 장기동으로 가는 방향에 있다. 지난날 성황당이 있었다.
시천천(始川川)이 마을의 앞자락으로 흐른다. 계양산의 서북쪽 계곡에서 발원한 것으로 ‘시천들’이라는 들판을 비옥하게 적셔준다.
지난날 점말로 불리던 곳에 옹기 가마터가 있었다. 그리고 마을에 두 그루의 보호수가 있다. 시천동 56번지에 200년 된 산수유나무가 있으며, 56-4번지에 250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서곶로에서 시천동을 스쳐 동쪽으로 뻗어가 계양구와 옛 황어장 쪽으로 가는 소로는 포장되어 쓰레기 매립지 도로와 연결된다.
인천국제공항 고속도로가 시천동을 관통하고 경서동 쪽으로 뻗어간다.
시천동는 진주류씨(晉州柳氏)가 대대로 집성촌을 이루며 산다. 조선조 중엽 대사간을 지낸 류태동(柳泰東), 독립투사 류인무(柳寅茂) 선생과 한국 근대 서예의 걸출한 인물 류희강(柳熙綱) 선생이 이 문중 출신이다.
(12) 백석동(白石洞)
백석동은 조선 정조 때 문헌《호구총수》에는 오늘처럼 백석리(白石里)로 등재되어 있다. 지난날 부평부 모월곶면 소속으로 한들, 독정이, 거월리, 넘말, 도마매, 소댕이, 종알마을 등의 자연취락이 자리잡고 있다. 그 후 지명은 일제강점기 운요오쪼(雲陽町)라고 부른 것 외에 큰 변화가 없었다. 운요오는 일본 군함 운요오호(雲陽號)에서 유래한다. 고종 12년(1875)에 운요오호 사건을 일으킨 바로 그 군함이다.
백석(白石)은 마을의 행정 지명으로 흰 돌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한돌, 한둘, 한들 등으로도 불린다.‘흰돌’이라는 마을의 뒷산인 한뫼산에 흰 돌이 많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재래지명 ‘한들’의 해석 오류라고도 볼 수 있다. 이 곳의 한들부락은 검단으로 가는 서곶로 국도를 타고 달리면 왼쪽에 보이는 마을인데 커다란 무논지대를 끼고 발달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마을의 원로들은 ‘한들’ 또는 ‘한둘’이라고는 하지만 ‘흰돌’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넓은 벌판을 가로지르는 큰 둑을 ‘한들방죽’이라고 일컫는다.
1961년 정부는 한자식 표기로 인해 사라지고 있는 순우리말 지명에 대한 일제조사를 하고 이를 관보로 표준지명으로 공시한 바 있다. 그 자료에도 ‘한들’로 되어 있다. 당시의 마을 원로들이 그렇게 증언한 것이다.
그렇다면 《호구총수》에 백석리가 아니라 ‘한들’을 훈차(訓借)한 대야리(大野里)로 정해졌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백석의 지명이 생기고 이미 2백 년이 지났으니 어원이 어떻든 백석동인 것은 분명하다.
독정이는 독재이 또는 음달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백석동의 중심이 되는 곳, 그러니까 남북으로 관통하는 서곶로가 왼쪽은 쓰레기 매립지로 가고 오른쪽은 천주교 묘지와 서울방향 매립지 도로로 가는 고가도로와 만나는 지역이다. 독쟁이라는 지명을 가진 한국의 많은 지역이 그런 것처럼 옹기 가마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하는 원로들도 있다. 50~60년 전에 이 곳에 옹기 가마가 있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마을과 인접한 검암동과 공촌동에 워낙 유명하고 큰 가마가 있었던 터라 구태여 이곳을 그렇게 불렀을 이유는 약하다.
《인천지명고》는 그 점을 주목하여 다른 해석을 하였다. 이 곳에서 대를 이으며 살고 있는 광산 김씨(光山金氏) 선대에서 관찰사를 지낸 사람이 이주해 와서 자기의 아호 대로 독정(篤亭)이라는 정자를 지은 뒤 붙여진 지명이라고 했다. 독정은 인근인 검단동에도 있는데, 백석동 독정을 윗독정, 검단동 독정을 아랫독정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백석의 윗독정을 음달이라서 음달말, 검단동의 아랫독정을 양달말이라고 불렀다.
거월리(巨月里)는 독정이 사거리에서 서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나타나는, 지난날 해안에 닿아 있던 부락이다. 한 쪽 면은 왕길동에도 닿아 있다. 물론 지금 바다는 매립되어 없고, 이 오솔길 옆으로는 매립지 도로가 관통하고 있다. 거월은 큰 달이라는 뜻 그대로 이 마을에서 달이 유난히 크게 보이기 때문이라고 원로들은 유래를 설명한다. 《인천의 지명유래》의 서구편을 집필한 조찬석 교수(인천교육대학교)는 ‘달’이 들어간 지명이므로 농사의 풍요와 마을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천신제를 지낸 마을의 뜻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넘말은 너머말이라고도 부른다. 한들마을 서남쪽 너머 마을이다.
도마매는 넘말의 서쪽 끝 한들 방죽 가까이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소댕이는 거월리와 인접해 있으며 지금 매립지 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상고시대 천신에게 제사 지내는 특별구역 소도(蘇塗)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소도는 솟대, 솟터, 솔터, 등으로 불리웠는데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고유신앙의 징표였다. 김포군 《지명유래집》은 인근 왕길동에 솟대가 있었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골말〔谷洞〕은 마을회관 북쪽 골짜기에 드러앉은 마을이다. 골짜기에 깊숙이 들어앉아 그런 지명이 붙었다.
한뫼산, 백석산(白石山) 또는 상산(象山)이라는 이름을 가진 야산이 마을을 안고 있다. 이 산의 형상이 코끼리를 닮았는데 기슭에 흰돌이 유난히 많다. 이 산에는 봉수의 자취가 남아 있다.《세종대왕실록》 제148권은 ‘김포 서쪽 20리에 있는 봉수로 남쪽 부평의 축곶산에서 연락을 받아 북서쪽 통진(通津) 약산(藥山) 봉수로 전달했다’고 나와 있다. 두 곳에 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등 다른 문헌에도 나와 있다. 백석산 봉수는 해발 표고 가 73.6m로 낮은 편이지만 통진 약산의 봉수까지는 이보다 높은 지형이 없어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둥굴재산은 동구재산 또는 중구현(中丘峴)이라고 불린다. 한들마을 뒷산으로 형태가 둥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와우산(臥牛山)은 독정마을 뒷산이다. 형상이 누워 있는 소와 같아서 그렇게 지어졌다. 송장이 누워 있는 것과 비슷해서 송장혈이라고도 부른다.
행자산(杏子山)이 둥굴재산 서쪽에 있다. 행주산, 도마매산, 골말산이라고도 부른다.
맨대울 골짜기가 있다. 현재의 백석초등학교 뒤 목장이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맹대울이라고도 부른다.
각골〔角谷〕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오늘날의 백석초등학교 북쪽이며, 골짜기가 모가 져서 생긴 이름이다.
우골〔牛谷〕이라는 이름의 골짜기가 있다. 윗독정, 즉 음달말이 들어 있는 골짜기이며 와우산에서 비롯된 지명으로 보인다.
안골이라는 골짜기가 우골 동쪽 능선 너머에 있다.
쇵골 또는 소용곡(召容谷)이라고 불리는 골짜기가 있다. 오늘날 한진실업고교가 앉아 있다.
오령대골, 오랑대골, 또는 오량대골이라고 부르는 골짜기가 있다. 쇵골 아래 큰길을 따라 길게 뻗은 곳으로, 백석고등학교가 앉아 있다.
잣굴이라는 고개가 쇵골 북쪽에 있다.
도당재고개는 당산고개라고도 하는데 서곶로에서 한들마을로 넘어오는 도중에 있다. 옛날에 이 곳에서 도당굿을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도당굿은 지금은 지내지 않으나 터는 남아 있다.
종알고개는 종알거리며 넘는다하여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고개이다. 쇵골에서 거월리로 넘어가는 도중에 있다.
행주고개가 둥굴재산과 행자산 사이에 있다.
이 마을에는 한들 벌판과 한들 부락을 왼쪽으로 보며 독정이를 관통해 김포로 가는 서곶로 도로가 있고, 백석동과 검단동을 구분지으며 쓰레기 매립지로 가는 길, 그리고 한들마을을 왼쪽으로 우회해 김포 양곡으로 가는 새 도로가 있다.
한들방죽은 이 마을에 부(富)를 가져다 준 보물이다. 이 둑으로 바닷물을 막고 간척사업을 하여 한들 벌판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방죽은 구한말에 시작하여 1919년 송병준(宋秉畯)이 완성하였다고 전한다.
천일염을 생산하던 넓은 백석염전이 이 방죽 안에 있었으나 십여 년 전에 사라지고 그 곳은 김포 매립지에 들어갔다. 매립 이전에 전국에 이름이 알려진 백석 낚시터와 저수지가 있었으나 지금은 메워지고 없다.
한들 방죽 밖에 인포염전(仁浦鹽田)이 있었다. 인천과 김포 사이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첫댓글 선배님, 귀한 자료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번에 너무 길~게...너무 많은 내용이라... 좀 힘들어요.
그래도...귀한 자료이니 감사한 맘으로 읽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 수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