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년 4월 초였든가?(내 나이 만 30이 되었을 해) 연구소 운동장에서 단지 내 아마추어 야구동호인들의 사이언스리그 출전을 위해 한참 연습 중일 때, 평소 안면이 있던 원자력연구소의 야구팀 주장이 나를 찾아왔다. 키가 작고 통통한, 아담한 사람이 같이 왔는 데 기실 그 사람이 내게 볼일이 있었다. 원자력연구소에 근무하는 유명환이라고 자신을 밝힌 그 사람은, 연구단지 내의 기관종사자 중에서, 정말로 산을 다니는 꾼들만으로 구성된 산악회를 한 번 조직해 보자는 제안을 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기분도 없쟎았으나, 순간, 기실 그 포부가 매우 가상하고 원대한 구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연구단지는 그 구성원들의 성격이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각 사업장마다 산악회라는 타이틀은 있으나, 그 활동이라는 것이 그저 니꾸사꾸에 벤또하나 넣고 단체소풍가는 정도이고, 게다가 단위산악회들의 지도급 인사(회장,총무)들도, 조금 형식적이고 단체유람 기획에나 능숙한 정도의 수준인지라, 좀 다닌다 하는 이들은 개별적으로 활동을 할 뿐인 실정이었다. 때문에, 그럴듯한 단지 내의 구심적인 역할을 담당할 전문적 단체가 하나 있기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판이었다(유명환씨가 그렇게 가상한 구상을 하게 된 배경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그의 장인 어른이 바로 우리나라 산악계의 큰 별이었던, 고 이희성 대장님이셨던 것이다. 사실 유명환씨 자신은 산에 대한 활동은 거의 없었으나, 그의 마음 한편에는 고인의 찬란한 업적에 대한 동경과 관심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러한 느낌들이 장인어른의 유지 비슷하게 자라나고 있었던 듯 하다. 유성에 Y-레포츠라는 장비점을 차리고, 단지 내 산악활동을 지켜보아 온 그로서는, 각 단위 산악회의 지도급 인사, 그리고 홀로 활동하는 전문적인 산악인들을 영입하여, 단지 내의 대표성을 띠는 모임이 필요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듯 하다). 헌데, 솔깃한 제안이기는 하나, 거리낌없고 홀가분한 취향을 즐기는 소극적 분위기인 나로서는, "회"라는 것이 영 구미에 당기질 않았다. 그래서, 당시 산이라면 밥 먹던 숟가락도 내던질 정도로 미쳐있던 우리 연구소의 장영진씨를, 우리연구소의 대표자격으로 소개하기로 하고, 약속된 장소에 동행했다. 유성 제주가든에서 첫 번째 모임을 가졌는 데,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각 연구소 산악회의 총무진들을 비롯하여, 얼추 열대여섯명 정도가 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모튼, 여러 이야기들이 오고가고, 고기먹고, 술 마시고 하면서, 일단 산악회를 만들자는 의견들이 확실 시 되었는 데, 영진이한테 총대 맡기려던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일동들에 덜미를 잡혔다. 산악회 회칙초안을 비롯, 몇가지 일들을 반강제적으로 한아름 안고 돌아온 나는, 이번 기회에 팔자에 없는 감투 한번 써 보자는 속물근성과 더불어, 이 산악회를 발판으로 쇳가루 때문에 못해보던 일(해외원정 등)들을 한 번 원 없이 해보자는 철 없는 기대감에 "차라리 잘 됐다"는 심정이었다.
창립준비로 Y-레포츠에 서너차례 오고가면서 여러사람들을 만났는 데, 그 때 만난 이들이 대부분 아직까지 산악회에 남아 있다. 준비기간 중에 우리는 맨날 존댓말로 품위있게 대화를 나눴는 데, 영판 어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내가 제안하길, "같이 일해 보려면 인간적으로 친구가 되는 것이 좋겠소 우리 술자리나 자주 가집시다"라고 제안을 하였다. 그렇게 해서, 원자력의 유명환, 조광훈, 김일권, 쌍용의 이봉한, 전자통신의 강승국, 럭키의 허기강, 동자(에너지 전신)의 장영진, 그리고 나 등이 거의 매일을 만나 술판을 벌렸다. 그런데, 술들이 얼마나 센지 모두 도토리 키 재기로, 먼저 낙오되는 이가 단 한명도 없었다(지금은 서로 먼저 떨어지는 지경이지만). 후에, 화학의 신현관씨를 만났는 데, 폼을 보니, 그는 제천출신으로, 이제껏 만난 사람들 중 가장 틀(산사람 냄새)이 그럴 듯 했다. 술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어느날은 한 5시쯤 만나, 술집따라 시내로, 유성으로, 포장마차로 전전하다가, 휘발유 뽑으러 나갔던 봉한이 형이 들어와 "어유 밤새 안녕들 하셨습니까?"하고 악수를 청한다. 왠 안녕? 하면서 포장마차 휘장 밖을 탐색해 보니, 정말로 날이 훤하게 새어 있었다. 그 당시의 시작이 이 지경이고 보니, 우리 산악회는 지금껏 새로 가입하는 선배님이나 후배님들 모두 고래들만 들어온다. 그래 회원들 사이에, 주악회라고 반 빈정거리는 불명예스런 자기별호를 지니게 되지나 않았는지?!
드디어, 5월 26일 Y-레포츠 지하에 소재한 백마다방을 전세내어, 창립총회를 치르게 되었는 데, 50여명이 넘는 인원이 가득 모여 대성황을 이루었다(당시 창립회원 수가 56명이었음). 지금도 웃기는게 명환이 형과 영진이 그리고 승국이던가? 하여간 적쟎은 인간들이 양복입고, 새끼줄 매고, 점쟎게 형식을 갖추었었다. 활동계획을 발표하다 보니, 맨 앞좌석 맨 좌측에 덩치 큰 산적몰골의 한 사나이가 대단히 자율적(?) 차림으로 삐딱하게 앉아 시선을 끈다. 그는 인하공대에서 산악활동을 한 바 있던 화학의 유병환씨로, 초창기 우리산악회의 산행능력 배양에 자양분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아쉽게도 생긴 것과 영 딴 판으로 술은 잘 못했는 데, 그래서인지 지금은 회원이 아님). 어쨋거나 우여곡절 끝에, 우리 연단산악회(당시의 회의 명칭)는 지역사회(연구단지 내)의 산악활동의 구심점으로써, 그리고, total mountaineering을 추구하는 전문산악회를 표방한 야심 찬 첫 발을 떼기 시작하였다.
창립총회에 이어, 6월 8일에는 창립시산제를 계룡산에서 치렀는 데, 거의 모든 회원이 참석하였던 걸로 기억한다. 산행이 끝나고 공주식당 지하에 모여 술 먹고, 노래하고, 임원선출을 했는 데, 모두 노래들을 끝내 주게 잘 부르고, 술도 정말 끝내주게 잘 마신다. 하여간에 무슨 산악회가 연예인들 모임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생각컨데, 단지 내의 구심적인 문화적 동아리가 전무했던 당시로서는, 연단산악회 자체가, 산사람보다는 진취적이고 활동적인 사람들의 숨통으로 인식되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싶다. 임원선출 결과, 유명환씨가 만장일치로 회장에 추대되고, 부회장에 나, 총무에 허기강, 기술부장에 인삼의 권우생씨, 기획부장에 강승국 기록부장에 원자력의 나삼희씨 등, 각 연구소에 골고루 지분을 분배하고 미선출 집행부는 추후 선출키로 했다. (추후 회계에 럭키의 서미숙, 장비부장에 신현관, 섭외부장에 장영진을 선출)
- 걸음마 배우기
첫 정기산행은 소백산으로 갔다. 지금도 그 당시를 기억하는 회원들은 생전처음 소속감이라던가 규율이라는 것, 그리고 산에서의 멤버 쉽, 행동양식 등 많은 것을 느꼈다고 토로하곤 한다.
운행버스 안에서 전통적 차림(니커보커에 조끼)의 사나이가 연단산악회의 산행정시출발에 감동하여 참 좋은 전통이 될 것이라고 말을 건다. 바로 쌍용의 임헌범씨로 향 후 회의 주당들의 모임에 커다란 일익을 담당하게 된 사나이다. 산행 전, 우리는 산행자체가 훈련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그리고 대다수 회원들이 산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매우 미숙한 상태였기 때문에, 몇가지 원칙을 정했다. 운행 중 남에게 물주지 않기, 제 수통으로 물마시기, 제 베낭 제가 메기, 야영 시 장비가 부족한 사람은 도와주지 않기 등, 일단 기본적인 것은 절대적으로 자신이 책임져야 할 것, 그리고 운행원칙으로 1일 운행거리는 가급적 20km이상 주파할 것, 1박 이상일 땐 어떠한 경우라도 야영, 50분 걷고 5분쉬기(될 수 있으면 서서 쉴 것), 운행 중 앞사람과의 간격을 2-3m 내외로 유지할 것, 취사시간은 1시간 이내로 속전속결 등 어떻게 보면 매우 비인간적이고 비민주적인 강요사항들로만 가득했다. 하지만 명색이 산악회인데 엄격한 규율을 통한 결속이 없으면 엉망진창이 될 것 같은 위기감은 엄연한 현실이었음에랴. 실제로 지금은 필자의 룸-파트너 열할을 담당하게 된 서미숙 회원은, 그런 원칙의 희생양으로 여러차례 고통을 겪었으며(당해도 싸지), 많은 회원들이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을 읖조렸었다. 산행다운 산행의 첫 산행, 우리의 첫 산행은 배점리에서 야영, 국망봉과 비로봉을 거쳐 희방사를 당일 내에(오전 9시 출발 오후 5시 완료) 주파하는 걸로 계획되었고, 그렇게 약 30여명의 새내기들이 상기의 원칙을 성실히 수행하여 주었다. 당시 집행부의 한사람으로서, 필자는 당시의 새내기회원들에게 감사와 경의와 죄송스러움을 표한다. 배점리 석정국교에서의 야영은, 앞에서 언급한 모 회원이 침낭없이 기웃거리는게 얄미워서, 원칙을 적용하자니 얼어죽을 것 같고, 할 수없이 침낭을 빌려주는 대신 실컷 쿠사리 퍼붓고, 파커 뒤집어 쓰고 날밤 깐 기억이 난다. 그런데, 승국이가 밤새 기적소리 울리는 바람에, 많은 회원들이 나 같은 신세가 되었었지... 승국이는 그 이후 악명높은 그대이름은 강코가 되었다. 운행 중에는 군대 유격훈련 같은 빡빡한 일정이 너무 벅차, 인삼의 주선일 회원이 자꾸 조 이탈을 해 후미에서 산행을 하였는 데, 라스트를 맡은 내가 엄청 잔소리를 쏘아댔다. 같은 연구소에 근무하는 죄로, 윤종혁 선배님과 권우생 장비부장께서, 그런 miss주가 안 쓰러워 돌보아 줄 요량으로 동행을 하였는 데,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미친 개가 계속 짖어대어, 매우 난감해하시며 그저 측은한 눈길(미친개와 miss주에게 보내는)뿐이었다. - 내가 왜 이럴까? 군대에선 안 그랬는데 -
아ꆽ든 첫 산행 이후, 회원의 1/3가량이 탈퇴하는 불상사를 가져오고, 연단산악회의 악명은 전 연구소에 퍼져, 좀 쓸만한 인재들이 겁을 먹고 들어 올 엄두도 내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드러워서 피하지). 이러한 후유증 덕에, 내부의 강경파들과 온건파들의 대립이 심심챦게 대두되기 시작했다.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강경파들의 산악회 모양잡기라는 논리가 나름대로 설득력을 갖는 바람에, 온건파들은 다소 위축되는 모습이었다. 그 해 여름휴가산행은 훈련등반의 명목으로, 일부 열성회원들의 휴가일정을 상반기, 후반기로 나누어 2개조로 편성, 설악산일원에서 강행군 하였는 데, 이 또한 참석회원들에게 실질적인 산행기술의 향상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연일 계속되는 강경파의 입김은, 상대적으로 온건파의 피해의식을 증대시켜, 내부적으로는 적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던 듯 하다. 창립초기 1년 간, 영진이와 나는 강경파의 선두에 서서 물 만난 고기처럼 설쳐 댔는 데, 우리의 정열이 부담이 된 회장님과 허기강씨 등, 몇 몇 회원은 말은 안했지만 심히 염려스러운 눈치였고, 그 와중에 봉한이 형이나 유병환씨, 그리고 현관이가 중도적인 입장에서 서로의 사이를 잘 조정해 주었었다. 영진이나 나는, 우리 산악회를 국내 유수의 club과도 견줄 만큼 회원들을 육성시켜야 한다는 견해였고, 명환이 형이나 허기강씨 등의 온건파들은 회원이 자꾸 줄어드는 것이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소위 질과 양의 대립이었던 듯 한 데, 참 어리고 철 없었다 싶지만, 당시는 우리 모두가 그만큼 회의 장래를 끔직이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회칙에 의거한 안내등반도 한차례 있었으며, 이는 애초의 목적에 잘 부합되어 우리 회의 위상을 단지 내에 알리는 데 좋은 역할을 했다. 원자력의 김일권회원이 오락담당으로, 시종 즐거운 재담을 선사하였고, 각 조의 리더급 회원들의 성실하고 자상한 가이드로, 단지 내에 좋은 평판을 얻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안내산행은 정통성을 기치로 한 우리 산악회의 창립이념에 비추어 볼 때, 일종의 외도이고 세속적인 행사였는 데, 직장을 다니는 산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우리 회의 현실적인 특수성이나 여건 상, 그로 인한 홍보의 덕을 톡톡히 볼 수 있었으며, 장래성 있는 젊은 회원들의 영입을 가능케 한 구실로 작용하였다. 이렇듯 산악회의 1년 차는, 말 많고 활기차고 의욕에 넘친 채로, 그리고 때 맞추어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끈들이 어우러져, 무난한 걸음마 연습를 마칠 수 있었다.
- 키 자라기
창립초기의 설왕설래를 뒤로하고, 제2대 집행부(`87)가 쌍용의 이봉한씨를 회장으로, 총무에 역시 쌍용의 김삼중씨를 필두로 출범되었다.
2대 집행부가 출범하면서, 그 간의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회칙개정을 통해 운영 상의 몇가지문제점을 보완하였다. 그 내용은, 집행부의 활동부서를 축소하고, 원칙적으로 빡빡한 내부 규정을 임시시행규칙을 한시적으로 발효하여 운영의 묘를 살리고, 형식적인 요식행위를 줄인 점이다.
지난 1년 간의 산악회 지도부의 고충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산행이나 행사에 있어서 일일이 회원들과 전화 상으로 통화하여 참석율을 올려야 했고, 각 부서장들의 활동도 매우 미미한 실정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산악회 자체가 직장인들로만 구성된 단체로서, 돌아버린 꾼들이 아니고서야 산악활동 자체에 자기시간을 쪼갤만한 여력이 매우 미흡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당시의 열정이 이해하지 못한 듯 하다. 하여튼 현실은 엄연한 현실, 우리 현실이 이런 다음에야 스스로의 자구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두 마리 토끼 중(산행능력배양, 회원보존), 질적요소를 포기하기로 하였다. 그 대신, 일부 회원의 능력배양을 위해, 주말산행을 활성화 시켜, 소수인원의 전문적인 면모는 갖추어나가자는 데 의견을 모으고, 클라이밍 위주의 연조, 워킹 위주의 단조를 편성하여 시행하기로 했다. 이는 조장의 책임 하에 주말산행 희망회원의 훈련을 담당한다는 시스템으로서, 연조는 유병환씨와 내가, 단조는 현관이와 쌍용의 헌범이가 책임지기로 했다. 하지만, 연,단조의 운영은, 애초의 목적과는 별개로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크라이밍을 원하는 신청자가 전무했었기 때문에, 주말산행은 그저 하이킹 정도의 일요산악회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일단 크라이밍 능력배양이라는 전제는 포기하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부사정으로 안달이 난 영진이와 나는, 나름대로의 훈련을 산악회 밖에서 모색하는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산악회의 구성 훨씬 이전부터 우리는, 평소 함께 활동을 하던 선배님과 친구가 있었다. 현재 우리 회의 회장인 ADD의 하득청씨와, 우리회의 노친네 열성회원이신 고창조 선배님이 그 분들로서, 우리에게는 사부님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나와 영진이의 활동은, 산악회와, 회와 관련없는 끼리끼리의 이중적 양상을 띠게 되었는 데, 회의 운영에는 큰 지장이 없었으나, 명색이 간부인 관계로, 회의 결속을 강조하는 적쟎은 회원들의 눈치밥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은자이기를 고수하시는 창조 형님을 제외하고, 득청이를 모임에 가담시키기 위한 작전이 필요했는 데, 여름 휴가를 이용한 훈련등반에 그를 업저버 자격으로 참석시키자는 아이디어가 동원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진이가 싱글거리며 찾아와서 멋진 친구 하나가 회에 가입했다고 한다. 원자력의 김태욱씨가 바로 그인데, 명환이 형이 발굴해서 회에 가입시키는 노력을 기울였다. 태욱이는 연세 대 OB멤버로, 인재 부족인 우리로서는 가뭄에 단비 격이었다. 드디어, 산악회의 처녀 바위가 설악산 석주길과 천화대에서, 꿈나무 삼중이까지 가세하여 3박4일에 걸쳐 성공리에 수행되어졌는 데, 당시의 산행의 시종 실질적 리더로서의 역할을 다하여 준 유병환씨에게 감사드리고 싶다. 결국, 이 때의 멤버들이 회의 크라이밍을 존속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하계훈련산행을 계기로, 득청이가 회에 가입하는 바람에, 우리의 주말 크라이밍은 자연스럽게 회의 활동으로서 운영되었고, 황송하게도 주객이 전도되 듯, 창조형님은 거꾸로 꼽사리가 되셨다. 아ꆽ든, 봉한이 형이 이끄는 2대 집행부는 상급단체인 대한산악연맹에 가입하여 명실상부한 국내산악계의 한 단체로서 데뷔를 하고, 회의 스타일도 매우 유순한 스타일로 변모되기 시작하였고, 회원의 유지도 안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크라이밍을 추구하는 소수정예들의 활동도 큰 불만 없이 정착되었다.
- 허니-문 시즌
하계 훈련산행 약 1달 후, 산악회 창립 이후 매우 중요한 행사가 있었다. 쬐끔 낯 간지러운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회원 3명이 한날 한시에 결혼식을 동시상영하게 된 것이다. 영진이와 나, 그리고 서미숙 회원이 그 주인공들로서, 나와 서미숙 회원은 산악회 커플 1호를 기록하게 되었다. 나는 대전에서, 영진이는 대구에서 식을 올리기로 되어 있었는 데, 결혼식 당일은 공교롭게도 산악회 3/4분기 정기산행일로서 행선지는 팔공산이었다. 결국 스테레오 빵빠르 관계로, 회원들은 어느 한 쪽을 포기하는 수 밖에 없었고, 다행히도 산악회 1호 커플이라는 그럴듯한 타이틀 덕에 영진이가 피해를 보았다. 명환이 형이 회의 대표격으로 서둘러 대구로 미리 떠나고, 대전에 소재한 식장은 왠 난 데없는 등산화로 짓밟혀졌다(?). 서미숙회원이 드레스 입고 낄낄거린다. 손가락이 가르키는 데로 시선을 옮기니 득청이가 양복입고 새끼줄 매고 있다(웃겨, 산에 간다는 녀석이 베낭까지 메고 와서...?)
제3대 집행부(`88)는 신혼을 핑계로 뺀들거리는 나를, 당사자도 참석하지 않은 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해 놓고, 총무에 태욱이를 앉혀 반강제적으로 출범되었다. 사건이었다. 상투 튼 총각이(?) 회장이 되고 보니, 필자 재임기간 중(88년부터 92년까지), 산악회 처녀, 총각들이 서둘러 각성하는(?!) 바람에, 끔찍하게도 싱글 구경하기가 천연기념물 대하기보다 더 어려울 지경의 대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허기는 노총, 노처들이 많긴 많았었지... 하여간에 극성들도 빈둥, 허니문-보이,걸(?)들도 빈둥, 난리도 생판 난리였다. 그래도 산바람은 세어서, 신랑이 맨날 바깥으로 나도니, 평화로와야 할 신혼방이 허구헌날 새벽 2시까지 전투다. 결국 지옥에서 보낸 한철은, 마누라나 나나 아픈만큼 성숙해져서, 아주 쬐끔씩 양보를 거듭하고, 서로 길도 들고 해서, 소강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영진이는 wife 메이커가 천사표라서 좀 나을 성도 싶었다). 그런데, 안방에서의 소강상태는 산악회 내부에서도 마찬가지로 초기의 열정이 시나브로 식어 차분히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놀기 좋아하는 처녀,총각들이 들어가는 나이와 함께 더블이 되다보니 이러저러한 일상의 load가 쌓여 회의 활성화 측면에서 커다란 딜레마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유병환씨도 몽매에 그리던 임과함께 그 어려운(!?) 결혼에 골인하고, 일본으로 학위 한답시고 매정하게도 훌쩍 떠나 버렸다. 아ꆽ든 나 스스로는, 이맘때쯤 해서 스스로의 산행관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일반인들과의 차별화를 구현시킬 수 있는 매력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고, 더불어, 이 차별화를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산악인으로서 인정받을만한 일을 저질러야 한다는 강박감 등이, 나와 회의 능력과 상관없이, 산악활동에 몰두케한 원동력이었는 데, 이러한 것들이 모두 부질없는 허상에 불과할 뿐, 자신 뿐만 아니라, 나와 더불은 다른 이들에게 큰 부담을 안겨 줄 뿐이라는, 깨달음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회의 대표자로서, 회원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작업이 필요했으며, 지고의 정치는 노.장의 무위,자연 그뿐이었다. - 서 있는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 의자 - 산을 필요로 하는 이들은 언제고 자유를 갈구하는 법, 떠난 이도 언제든 다시와서 손잡고 같이 걸을 것을, 열정의 불씨가 사그러들었을지라도 꺼지지만 않았다면 언제든 새로운 희망이 있는 것, 우리는 현재의 활동에 연연치 않고, 꺼지지 않은 불씨에 희망을 걸고, 나름의 활동에만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었다.
- 내 사랑 봉고, 활동사진 한 편
쌍팔년도에는 상기의 시발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산행의 교통수단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정기산행을 할 때는, 일명 모찌차를 이용하거나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는 등 북새통이었는 데, 경제성장과 더불어 my-car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필자도 없는 살림에, 중고 봉고(빨간색이었음) 1대를 구입(후에 하늘색 그레이스로 바뀌었슴)하여, 산행에 매우 요긴하게 사용하였다. 집권 말기까지 애용한 이 봉고는, 매 정기산행 때마다 열명 안팍이 모이는 우리 회의 현실에 아주 딱 들어맞는 애물단지였다. 가장 인상적인 일은, 천태산 암장개척 시 오락가락 할 적에, 그리고, `91 하계훈련등반(울산암 릿지) 시 공원 안에서 종횡무진하고, 귀가 길에 소양땜으로, 남한산성으로 유람한, 참으로 행복했던 추억들이다. 회원들의 살림살이가 안정을 찾아감에 따라 자가차량도 늘었는 데, 산행 시 동원되는 차량에 있어서 차주는 기사노릇하느라고 남들 골아떨어질 때 졸린 눈 부릅뜨고 안전운행 하랴, 유일한 낙인 하산주도 포기하랴, 기름값 걱정도 하랴, 물심양면으로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다행히 마음 착하고 사려깊은 회원들의 하해와 같은 배려로 기름 값은 회비에서 충당키로 하고, 가끔 싱싱하고 헌신적인 회원의 대리운행도 적쟎았다. 특히 창조형님은 초보임에도 불구하고 솔선수범하시는 모범을 자주 보이셨는 데, 그저 황송무지였다. 그러나 점차로 편의를 추구하는 세월의 추세는 어찌할 수 없었는지, 필자 역시 덩치크고 털털대는 이 봉고가 슬슬 귀챦아지고, 안락한 승차감을 보장하는 산뜻한 세단하나 부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결국 이 봉고는, 의리없는 주인의 매정한 결단에 따라, 한 4년남짓한 산악회의 애환을 가득담고 눈물의 작별을 고하게 되었다. 그런데 요즈음에도 그 놈이 그토록 보고싶을 줄이야...(아마 회원들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요즈음에는 봉고가 사라지고, 각개약진으로 약속장소에 나타나서는, 머릿수 세고 이차,저차 찍어서 동원되는 배부른 현실이 도래했지만, 필자는 당시의 부대낌이 더 소중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 다시 봉고한 대 구입? 안될까요 네? 흠, 어림없는 소리! 자네가 구입하게나 -
지난 과거사가 언제나 그렇듯, 누리끼리한 활동사진 더듬어 보노라면, 밤하늘 별 보듯, 수 많은 추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수많은 명작들이 많고도 많지만, 그 중 의미있는 활동사진 한 편 감상해 보자.
`90년 4월 직장산악회라는 한계를 극복하고파, 우리는 한가지 특별산행을 기획해 본다. 목적은 일반회원들의 산행기술능력 배양으로, 리지 종주를 통한 갖가지 형태의 난관돌파요령을 숙지코자 하는 행사였다. 일단, 많은 회원의 참여가 주요조건이었으므로, 대상지를 계룡산으로 정하고, 다양한 형태의 기술을 경험해 볼 수 있는 루트로서, 마치 말굽처럼 생긴 계룡산의 주릉(쌀개릉-자연성능-자작능선)을 택해, 1박2일에 걸쳐 주파하기로 계획하였다. 또한 비상 시의 비박훈련을 겸하기로 하여, 텐트를 휴대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이 행사를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 하루를 할애하여 시도함으로, 시간 상의 제약도 극복해 냈는 데, 궁하면 통한다고, 회의 현실을 한탄할 것만 아니라, 회원 각자의 조그만 정열과, 조직구성원으로서의 의무감만 동원된다면 충분히 가능한, 효율적인 훈련방법이었던 것 같다.
오후 1시에 야영장 입구의 도로변을 출발하여 능선에 돌입한 일행은 황적봉을 거쳐, 하이커들에게 악명높은 3단바위를 거쳐, 오르내리기를 반복, 비박지인 쌀개봉 안부에 도착하였다. 쌀개봉의 큼직한 바위봉우리 사이로, 제법 널찍한 동굴 아닌 동굴이 있음은 익히 알고 있는 바, 그 곳은 그 날의 막영지였다. 우리는 그 곳에서 아꼈던 수통을 모아 취사를 하고, 당연의례인 술타령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비박훈련을 도우려는 듯, 술좌석이 무르익어 갈 무렵, 가랑비가 으슬으슬 날리기 시작한다. 자정이 넘어 수십분 지났던가? 가는 빗방울이 왔다 갔다 하는 어둠 저 편에서, 으스스 짐승소리가 난다. 삼중이한테 살펴보고 오라니까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사라졌다가 한참만에 헤헤 웃으며 돌아온다. 어! 그 뒤로 헌범이가 랜턴도 없이 줄레 줄레 따라 들어온다. 헌범이는 나중에 합류하기로 하긴 했는 데, 막영지의 어프로치가 워낙에 험악한 관계로, 이 오밤중에 예까지 기어 오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는데... 관음봉 거쳐, 쌀개봉 바위 넘는 데 무서워 죽을 뻔 했다나 어쨌다나. 참 미쳐도 더럽게 미쳤지, 이 오밤중에 비까지 오는 데, 랜턴도 없이 그 길을 오다니, 위험은 고사하고, 귀신 생각은 또 어떻게 견뎠을까? 혹시 이거 여우 사촌 아냐? 퍼뜩! 옛날 행로 형님이 들려주시던 형님 선배님 얘기가 떠오른다. 삼불봉 밑의 오성대 입구에서 귀신을 보고 기절하셨다는(그 때도 자정무렵이었다나) 이야기. 머리풀어헤친 소복한 처녀귀신이었는 데, 이 귀신이 기절한 선배님을 두들겨 깨웠다고 한다. 알고보니 처녀귀신은 처녀도, 귀신도 아닌, 귀신한테 치성드리러 온 무당이었다고 한다. 아 그 귀신도 생사람 잡을 뻔 했다고 얼마나 놀랐을까?
반갑기에 앞서, 미심쩍은 기분으로 술잔을 건네고, 술 먹는 요량을 살펴보니, 털빠진 호랑이(헌 범)가 맞기는 맞는갑다. 그 날 지고 간 술이 제법 되었는 데, 그 얼(털)빠진 호랑이 덕에, 빈 티가 줄 줄 흐른다. 급기야 현관이가 나서서 음주군기를 잡는다. 치사한 놈이 병 뚜껑으로 한잔씩 돌리는 데, 그날따라 회원들이 풍년이라 한 순배 도는데 한 식경이나 되는 듯, 갑갑해 환장할 지경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산행은 매우 성공적인 행사로서, 비박 시 비까지 슬슬 뿌려주어, 비박훈련도 아주 제대로 했고, 이튿날 장군봉 침니도 한사람도 요령부리지 않고 게겨 주었고, 참 흐뭇한 활동사진이 아닐 수 없다.
그 활동사진은 두 가지 의미에서 산악회의 귀감이 되었다. 첫째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고, 갑갑한 현실 속에서도 노력하면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교훈이고, 둘째는 산친구의 질긴 우정을 우리모두 아주 진하게 경험했다는 점이고, 아! 또 한가지 세째는 세상에 귀신은 없으니 야간산행을 아주 절대 안심하고 하라는 이야기이노라. 싱겁기는?
- 후배 만들기, 본의아닌 억지
`89년 후반기에는 득청이가 미국으로 파견가는 바람에 크라이밍 멤버가 하나 줄어들었다. 뿐만 아니라 회의 브레인(그다지 좋은 머리는 아니지만도)이 비었다는 허탈감에 쓸만한 후배하나가 필요한 형편이었다. 하지만, 세상만사가 다 그렇겠지만, 내 마음 같은, 아니 물색 좋은 아우나 새끼하나 얻기는 하늘의 은혜인 듯 하다. 태욱이가 제 발로 걸어들어 오는 바람에, `88년 설악산 정기산행 때 길 잃은 양(?) 찾는 데, 길마산 꼭대기까지 생고생 시키고, 온갖 궂은 일 다 시키고 잔소리하고 했는 데, 쓸만한 산아가씨 쌍용의 안예순씨를 낚아 채 산악회 2호커플을 기록하고, 어리숙한 척한 삼중이까지도 우리 연구소의 땐땐한 처녀 황현정언니를 꼬셔 산악회 3호커플을 기록하는 등 모두가 영진이와 더불어 함께가는, 애아범까지 되서 무게잡는 데(?), 어떻게 하나? 참으로 한심하였다. 영진이 풀어서 후배한번 만들어 보라고 성화지만, 그게 어디 그렇게 만만한 일인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 날 구멍은 있다던가.
`90년 천태산 루-트 개척 후, 신입회원 환영 겸, 훈련 겸, 겸사겸사로 천태산으로 정기산행을 갔었다. 왠 차돌같은 녀석이 험한 바위길을 깡충깡충 겁없이 내 앞에서 알짱알짱 앞지른다. 어! 하면서 녀석의 뒤를 따르다 보니, 본래 소심한 나로서는 여간 조심스러운 길이 아니었다. 우리 회원은 회원인 데 하면서 바위할 마음은 없나?라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다. 그 며칠 후 바로 그 차돌한테서 전화가 왔다. 크라이밍을 배우고 싶은데 대구등산학교가 어떻겠냐는 것이다. 별 싱거운 놈, 지 산악회 놔두고 왠 등산학교? 하면서 우리한테 배우면 되지 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 즉, 영진이한테도 차돌의 전화가 왔었다고 한다. 차돌은 바로 전자통신에 근무하는 최동경씨였다. 이렇게 해서 차돌의 훈련을 영진이가 도맡아서 담당했는 데, 그 애비에 그 새끼였던 듯 했다. 동경이는 그렇게 고생길에 접어들었다. 바위하러 갈 때 짐꾼으로, 그리고 좀 쓸만해지자마자 톱으로(얼음에서나 바위에서나), 정기산행 때는 남들 싫어하는 공동장비담당(콕헬, 자일, 물주머니 등)으로, 등 등. - 미안하다 동경아, 굿세어라 동경아! -
동경이가 합류하자 얼마되지 않아서 우리 회는 그 해 9월 월출산으로 안내산행을 치렀다. 대절버스를 이용했는 데, 이놈의 차가 엔진오일을 연료사용에 비례해서 길거리에 싸는 바람에, 광주 조금지나 두시간가량 노상에서 허송세월이다(대전에서 새 차를 배차해서 다시왔다). 덕분에 배도 고프고 해서 길거리에서 밥해먹고, 길가의 구멍가게는 원채 이름난 주악회 덕분에 난 데없는 호황을 누렸다. 도갑사 야영장에 도착한 우리일행은 이미 반쯤 간 상태였는 데, 첫 실이 잘못 꿰어져 그저 밤새 부어라 마셔라... 동경이는 저능아 오수 육수하드끼 계속 빈대떡 공장이다. 다음 날, 왠 폭포수가 멈출줄을 모른다. 후퇴없는 회의 전통을 무기로 폭우 속을 뚫고 강행군 도갑재 정상이다. 등산로는 온통 시내로 변해 있었는 데, 폭포 속에서 왠 먼지가 풀썩! 한다. 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천황봉 거쳐 산너머의 목적지는 아직 먼 데 난감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뒤 늦게 도착한 일행의 몰골이 말이 아닌데, 그 와중에 현관이는 웃통까지 벗고 술 다 깼다고 의기충천이다. 맙소사! 어린아이 둘이 따라왔는 데 입술이 벌써 파아란 것이 하이포서미아 초기증세이다. 현관이의 의기충천이고, 산악회의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일단 후퇴다. 후퇴명령에 용기백배한 용사들이 부지런히 하산한다. 중도하차가 이토록 통쾌하고 멋있는 것이었는지, 우리는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폭포 속에서도 술 덜깬 동경이를 또 부려먹느라, 택시태워서 천황사에 대기시켜 놓은 대절버스를 몰고 오게 심부름 시켰다. 그토록 산세 수려한 월출산 보러왔던 우리의 고객들은, 월출산 바위한톨 구경 못했는 데도, 그래도 좋다고, 아주 좋다고 희희낙낙하신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선배가 선배 구실 제대로 못하는 가운데에서도, 회는 이렇듯 신의 은총을 입는다. 회의 살림꾼들이 시들해질만하면, 또 영락없이 멋쟁이 후배가 출현하는 데, 그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특별히 잘한 것 없었다는 이유로, 잘할 때까지 하라는 말도 안되는 억지로, 제 3대 집행부는 5대까지 별 볼일 하나도 없이 대물림하게 되었는 데, `91년 정기총회에서 집행부의 1년 임기가 너무 짧다는 중론에 따라 2년으로 임기를 조정하고, 임원선출에 들어갔다. 사실 당시, 필자는 지칠대로 지쳐, 이제는 정말 그만이라는 심정으로 현관이가 총대매기를 바랬었고, 한사코 꽁무니 빼는 현관이도 총회에서 밀어붙이기 하면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눈치없는 회원들이, 소위 그 잘할때까지라는 명분으로 또 나를 추천하고, 나는 현관이를 추천하였다. 자진 후보사퇴라는 한가함은 용납지 않는 것이 우리 회의 악습(?)인 관계로 그대로 투표에 들어갔는 데 재미난 사건이 발생하였다. 현관이의 악착같은 꽁무니에 겁먹은 철없는 회원들이 1표차이로 나를 선택했는 데, 무효표가 발생하는 바람에 과반수 득표는 아니었다. 눈치빠른 태욱이가 잽싸게 투표무효를 주장하고 재투표를 요구했는 데, 자 이제부터 길가던 개도 웃을만한 요절복통할 사건(내게 있어선 날벼락같은)이 벌어졌다. 술기운에 정신나간 회장님(?)이, 현관이가 1표차이의 리드라고 잘못 아시고 과반수는 무슨 과반수 법대로 해 하고 주장하신 것이다. 그야말로 법대로는 무신 법대로냐? 지금이 5공이지 문민정부야 뭐야...라는 얘기와 뭐가달라. 현관이와 회원들이 낄낄대며 희희낙낙 그래 맞어 법대로 해 하면서 박수치고 야단이다. 회장님은 너무도 기분이 좋아 그렇지 그래. 태욱이가 당선선포를 한다. 그러면 제 6대 회장으로 이순명 전회장님이 선출되셨습니다. 뭐야 이거? 이거 아니쟎아? 뒤늦게 하늘이 노래져 아우성이지만 되는게 없다.
- 아 내가 왜 이럴까? 총각 땐 안 그랬는데 -
이제 2년이란 부담이 더해져 제6대 집행부가 출범되었다. 시부렁 날부렁
- 이벤트 헤프닝 그리고 올드보이
벌써 앞에서도 언급했 듯 처녀,총각들이 희귀해짐에 따라, 개인적 시간을 내기 어려운 회원들의 주말산행 기피로, 주말산행은 주로 소수의 크라이밍 위주로 행하여졌는 데, 분기별 정기산행에도 그 영향이 있었다. 따라서 회원들의 불평도 늘고, 회의 활성화도 위축되는 모습이었으므로 집행부는 `90년 회기년도부터 분기별로 시행해 오던 정기산행을 월별로 시행키로 회칙을 개정하였다. 정기산행의 월별시행은 매우 좋은 효과가 있었다. 일단 어제 빠졌던 회원이 오늘 그리운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고, 단골멤버도 생기는 등, 이제껏 겉 도는 듯한 회원의 유대와 결속이 강화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산이 그리운 이들이 때가되면 모이고, 다시 일상의 부대낌을 살고, 그리고 또 때가되면 그리운 얼굴끼리 회포를 풀고, 그러나 산악인의 품위를 잃지않도록 서로가 노력하는, 참 아름다운 정경이 회의 새로운 미덕으로 정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창립초기 열병의 후유증은 우리로 하여금, 일상적인 매너리즘의 탈피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해외원정, 또는 고봉헌팅 등의 이벤트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는 금전적인 문제와 아울러, 직장이라는 시간적딜레마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에게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산을 매개로 한 적당히 요란한 활동은 어떤 것이 있을까? `91년도 때 맞추어 남북회담의 재개로 인한 남북대화의 바람이 솔솔 불어 올 즈음, 우리는 통일원을 통한 북한경유 백두산 등정이라는 아이디어를 도출해 냈다. 그러나, 영진이와 태욱이가 백방 알아 본 결과, 그렇게 여유로운 계획은 절대로 아니었다. 궁여지책으로 중국을 경유한 백두산 등정이라는 이벤트로 회원을 모집하였는 데, 우리회원은 신청도 안하고, 풍문에 들뜬 객들만 소란이었다. 회원들은 백두산 등정이, 그저 백의민족의 영산순례 정도일 뿐, 우리들이 추구하는 순수알피니즘의 정신에는 그닥 합당치 않은 이벤트임을, 이미 간파했기 때문이었던 듯 하다. 하지만, 이러한 와중에도 이 기획으로 인해, 이미 탈퇴하셨던 윤종혁 선배님이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연변의 우리 동포를 소개시켜 주시는 등, 도움을 주심과 동시에, 회의 면모가 철모르는 강아지 같던 초기에 비해, 많이 성숙해져 있음을 살피시어, 다시금 회에 합류하여 함께 활동할 수 있게 된, 매우 고무적인 수확이 있었다. 아ꆽ든, 백두산행이라는 기획은, 우리에게 순수한 마음을 가지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요란뻑적하고도 싱거운 헤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 해 7월, 가족동반으로 정기산행 겸 임시총회가 계룡산에서 열렸는 데, 그 자리에서 여지껏 음지에서 우리와 함께 활동하시던 창조형님이, 회에 가입하시겠다는 반가운 말씀이 있었다. 해서, 윤종혁 선배님과 함께, 이미 오래전에 가입하여 즐거운 웃음을 함께 나누시던 화학의 권혁시 선배님과 더불어, 산악회의 올드보이 그룹이 형성되었다. 필자는 참으로 흐뭇하고 또 흐뭇하다. 평생 산악인의 모습, 이야말로 이 분들의 모습이 아닌가? 당신들의 형편에 비추어 쓸데없는 열정에 스스로를 혹사시키지 않는 여유로, 나름의 알피니즘을 소중히 간직하고 지켜나가는 바, 이야말로 순수한 자유이고 우리의 비젼이 아닌가? 후배가 머리 숙이나이다. 세 분들은 술로 대변함이 좋은 데, 술은 좀 그만 드세요 네? 제발요.
또 한가지 즐거운 일이 있었는 데, `91 종산제 즈음, 득청이가 미국에서 썩은미소와 함께, 노랑내나는 장비를 한아름 안고 귀국했다. 11mm 주자일이 한 동 더 늘고, 프랜드, 쥬마르, 스토퍼, 아이스피톤 등 회의 크라이밍 장비가 난 데 없이 풍년이다. 이놈아 너 없는 동안 똘똘이 하나 키웠지 하고 우리는 동경이를 소개하는 등 거나한 자축을 벌였다.
또하나의 이벤트는, 글쎄 이벤트라고 하기는 좀 뭐하지만, 그 동안의 해묵은 현안이던 회지발간 건이었다. 물귀신 작전으로 출범된 6대 집행부지만, 그래도 이것만은 기본틀을 마련해야 되겠다는 마음이었다. 마침 ADD에 근무하는 시인 한종수씨가 입회하여, 그래도 그 방면의 전문가가 가세된 김에, 회지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법석을 떨었으나, 도무지 원고가 들어오지 않는다. 허긴 벌써 오래 전에도(`88년도) 한차례 시도한 바, 도일한 유병환씨에게 원고를 받는 등 야단을 부렸으나, 그 당시도 그 외엔 청탁한 원고가 함흥차사일 뿐, 별무신통이었던 기억도 있기는 했지만, 좀 너무하다 싶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원고란 것은 90%가 편집위원의 노가리로 시작해서, 10%가 편집위원의 잔소리로 끝난다는 걸, 그 당시는 전혀 몰랐었기 때문인 것을... 어쨌거나, 그렇게 회지발간 건은 장기집권의 독재가 끝나는 바람에 차기로 이관되었다.
- 장기집권의 끝, 회지 창간
`92년 드디어 코미디같던 6대 집행부의 지긋지긋한 임기가 끝나고, 아기다리 고기다리 던 제7대 집행부가 회장에 현관이, 부회장에 태욱이, 그리고 총무에 동경이 등의 젊어진 면모로 출범되었다. 7대집행부는, 산악회 모양잡기 같은 거창한 명분에는 그다지 큰 신경은 쓰지 않은 듯 하다. 그도 그럴것이, 이미 지난 세월들이, 회의 모양잡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고, 또 실제로도, 그냥 버려둬도 그냥저냥 굴러갈만한 저력도 갖추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회가 너무 늙어버려, 젊은 회원들의 활기찬 모습이 아쉬웠다. 산에서 대하는 능글맞은 쉰내나는 여유들이 이제 신물이 날 정도도 되었고, 젊은이들의 아기자기한 재롱이 참으로 아쉽고도 그리울 지경이었다. 그런 이유로 현관이는 젊은 회원의 영입을 위해, 아니 그 보다는 회를 젊게 가꾸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자기가 소속된 직장에서 이리두리번 저리두리번 싱싱한 놈, 남의 직장 근처에서 알짱거리며, 앉으나 서나 새파란 놈 고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현관이 재임시절에는, 자신의 소속직장 뿐 아니라, 단지 내에 새로 입주한 대림연구소를 비롯, 특허연수원, 항공우주연구소 등지의 회의 손길이 미치지 못했던 기관에 이르기까지 심심챦은 회원 영입이 가능해졌다.
암튼 현관이의 노력으로, 현재의 회계인 전자통신의 장은경씨(일명 짱가)를 비롯, 기록부장이신 대림의 변종휘씨가 새로 입회하여, 산악회 제4호 커플을 기록한다. 산악회 커플들은, 그러나, 산에서 모습 대하기가, 필자를 비롯하여, 가뭄에 콩나듯 한다. - 미안미안해, 정신차려 이 친구야 -
초기멤버들의 모습이 산에서 모습을 감추자, 정기산행 시에, 새로운 회원들의 모습이 자주 보이기 시작한다. 이것이 세대교체인가? 그 보다는 초기의 가입이 일종의 호기심의 발로였다면 현재는 좀 더 산꾼의 자질이 보이는 자발적인 가입동기가 그 원인은 아닐지?
또 한가지, 7대 집행부의 크나 큰 업적 중, 회지 창간호가 발간된 역사적 사건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진작 구성된 회지편집위원회에 의해, 집행부 초기부터, 회지발간의 논의가 보다 구체적으로 활기를 띠게 되었는 데, 한종수씨가 회지의 틀을 잡고, 창조형이 원고모집 및 삽화 등을 담당하시는 등, 편집위원장의 대임을 속 시원히 수행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특히 우리 재간동이 동경이가 그 동안 갈고 닦아 온 아래한글의 능숙한 활용 덕분으로 무난히 작업이 이루어졌다. `92년 5월 창간호가 발간되던 날, 나는 밤새 이것을 보듬고, 읽고 또 읽고, 얼마나 대견스럽고, 또 얼마나 감사했던지...
- 고목과 신세대
현관이의 임기가 다하자, `94년 회의 대권은 회의 왕노총각 득청이에게로 돌아갔다. 부회장에 태욱이, 총무에는 여전히 이제는 고목(노총의 닉네임) 소릴 듣는 동경이 차지였다.
바햐흐로, 짝없는 늙은 외기러기들의 놀이가 시작된 것이다. 득청이는 장기적인 노총각태세로 들어 갈 만반의 준비가 벌써부터 철저하게 마련된 탓으로, 회의 유부남들보다 훨씬 더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으로 깔끔한 리더십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첫째로 보이는 활동은 대외적인 활동으로, 역대 대권주자 중 가장 착실한 연맹이사로서 회의 마케팅이 그 중 돗보이는 듯 했다. 그 간의 필자재임 기간 중에는 바깥세상에는 도통 무관심 뿐으로 일관하여, 현관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연맹 측에서 보는 우리산악회는 완전 내논 자식이었을 것이다. 하여간에 연맹으로서도, 우리산악회로서도 여간 고무적인 일이 아니었다. 둘째로 또한가지 일신된 면모는, 회원들에게 매월 배포되는 정기산행안내서와 산행보고서가, 깨끗하게 정리되어 꼬박꼬박 발송되어 온 점이다. 아마 회원들은 속으로 이젠 뭔가 되가네 했을 것이고 옛날 임원들 참 개팔자였네 했을 것이다. 원 더럽게 결벽한 늙은 총각 하나가 왕년의 집행부 얼굴에 똥칠을 해도 유분수지... 셋째로 내실을 다해 산행인원 모집 시 회원들을 들들 달달 볶는 일이 사라졌다. 놈은 참 복도 많지. 득청이 취임 전 후, 그리고 동경이가 청송가든에서 흰색연미복입은 같쟎게 안 어울리는 꼴을 하고(꼴에 화장까지 했다) "장가 못가는 줄 알았어유"하면서 이빨보이기 전 후, 아주 쓸만한 후배들이 대거 입회했기 때문이다. 생각나는대로 열거하자면 화학의 김해수씨, 길기현씨, 그리고 바지런하고 호기심 많은 막내 김현주씨, 떠오르는 별 과기대의 이재하씨 등이 그 후배들이다. 재하를 처음 보았을 때 야 우리산악회에 왠 신세대? 하는 기분이었다. 녀석은 후줄근한 몰골의 촌티나던 우리세대 산쟁이들하곤 영 딴판으로, 늘씬하게 잘 빠진 몸매와 더불어, 귀티나는 준수한 용모의 요즘 잘 나가는 스포츠클라이머 스타일이었다. 기현이나 현주도 마찬가지다. 일단 풍기는 인상이 흑백영화관람보다는 칼라TV보는 기분인 것이다(해수는 회장님과 더불어 작은 고목인 터수지만). 기현이가 쬐끄만 놈(실제론 우람한 덩치)이 상투틀었음에도, 이제는 산에가도 쉰내는 다소 없어졌다. 후배들의 알뜰한 보살핌에, 요즘 선배들은 조금 살 맛도 난다. 나 역시 산행 시, 베낭에서 콕헬이나 식량 찾아보기가, 요즘세상 제비 찾기보다 어려워졌으니 말이다. - 오 하나님 아니 후배님 만만세 -
그리하여 쫀쫀하고 복 많은 노총각 덕분으로, `95년 하계특별산행(훈련등반의 명칭을 바꿈)은 그동안 크라이밍 유경험자만을 가려서 시행해 오던 암릉길(용아릉)을 일반회원까지 가세하여 무사히 시행되는 바람직한 결과를 기록했다.
- 겸허 그리고 극기
우리 산악회의 회칙 제2조 목적 「본 회는 산사람이라는 자부심으로 겸허와 극기로서 산을 대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
멋 모르던 시절에 폼나는 말 없을까? 사전 찾아가며 궁리해낸 이 조문, 지금 보면 참으로 멋드러진 조문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 진짜배기치고, 극기없이 산 다니는 사람이 어디있고, 겸허한 마음 없이 산 찾는 이가 또 어디 있을까마는, 이거 생각만큼 쉽지않은 말이다. 산쟁이치고 좀 다닌다 하면 이제됐어 하고 나자빠지고, 좀 다닌다 하면 건방져버리는 것이 인간사가 아닌가 말이다. 나만해도 좀 시건방지고, 좀 게을러터졌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를두고 만든 말이구나도 싶다. 아ꆽ든 겸허와 극기는 이제 산활동에 있어서 필자와 필자의 산친구들의 평생의 화두는 아닐까?
형님들, 알피니즘은 형님의 추억에 있지않고, 현재도 미래도 항상 있는 법입니다.
아우님들, 알피니즘은 넓고도 큰 산에만 있지않고, 좁고도 나지막한 우리네 산하에도 지천입니다.
친구들, 알피니즘은 미치지 않고도 추구할 수 있는, 우리네 자유입니다.
그러고 보니, 산악회의 시작은 10년전도 아니고, 어제도 내일도 아닌, 언제나 오늘인가 보다. 창립초기 왁자한 열정은, 이제 조용하지만 더 뜨거운 열정으로 자라나고 있는 듯 하다. 우리 산악회는 크라이밍과 담을 쌓은 회원이 화학의 하창수 박사님을 비롯하여, 올드보이그룹의 윤종혁, 권혁시 선배님 등 대부분이지만, 간부나, 크라이밍 그룹의 산행리더급 회원들보다 훨씬 더 회의 행사나 산행에 열심이시다. 그 분들의 회나 산을 대하는 태도는 우리모두의 귀감으로, 그저 묵묵히 자신의 산행관을 실천할 뿐인 것으로, 통속적인 skill보다는 산악인으로서의 내면의 품위를 간직하고 계신 듯한 인상이다. 그 분들의 모습을 뵈면, 필자는 스스로 외소해지고, 회를 이끌었었다는 과거가, 너무도 부끄러워지곤 한다. 그 분들의 산 활동의 의미는 그저 산사랑 뿐이고, 진정 무상의 행위일 뿐으로, 자유룰 향한 무애행에, 산친구를 사랑하는 이타행에 그 누가 배움이 없을까?
돌이켜보면, 초기의 행동원칙이 수동적인 형태의 남에게 피해주지않기였다면, 현재의 행동원칙은 능동적인 형태의 남에게 베풀기라고나 할까? 또한, 초기에 추구했던 바, 산악활동의 의미나 양식을 추구함에 있어, 타인으로부터의 구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를 모토로 했다면, 현재는, 타인으로부터의 구속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그들을 위한 베품을, 즐거움으로 승화시키는, 진정한 자유를 향유하는 비젼일 것이다.
지금에 있어서, 나는 자신있게 모두에게 말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원칙이나 규칙, 더 나아가 형이상학적 의미(철학,종교)일지라도, 타인에게 그것을 강요한다면, 진정한 계도가 못 된다는 것을...! 또한 만일 그러한 모든 것들을, 뭇인들에게 가르치고저 한다면, 우리는 가르치는 행위에 있어서 아무일도 하지 말아야 하고, 그저 자신이 깨달은 바대로, 묵묵히 행하기만 하는 것이, 지고의 미덕일 것이라고...!
산악회 10년만에 무얼 그리 크게 깨달았다고 시건방이야 시건방이 - 아 내가 왜 이럴까? 아 나는 아무리 해도 안돼 안돼 -
글쓴이 : 이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