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9일(토)
아침이 되어 부시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어 일어나보니 방글라데쉬인이 벌써 세면대에서 아침 일을 마치고 앉아 있었다. 밖은 아직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은 모양으로 푸르스름한 색깔이다. 간단히 세면일을 마치고 밖을 보니 프랑스와는 좀 다른 지형의모습이 눈에 띄였다. 이미 고개를 숙인 해바라기 밭이 자주 지나간다.이미 노란색을 너머 황토색에 다가갔다. 그리곤 포도밭이 넘어가고알 수 없는 나무들이 듬성듬성 널려있는 작은 구릉이 지나간다. 자세히 보면 야간의 사막지형다운 모양이 그려지고 있다. 이미 CD 음악에 맛들인 내 귀엔 이승철의 노래가 다시 흘려지고 있었다. 파리에서의 일정이 좀 힘들었던지 아니면 긴장감이 거셌던건지 흔들리는 기차속에서도 잠을 아주 달게 잤다. 간간의 기억으로 국경을지나가면서 두어번 기차가 섯던 것 같다. 물어보니 철로에 바위덩어리가 떨어져 있어서 그것을 치우느라고 연착이된 거란다. 시간을 보니 예정보담 2시간반가량 늦어지고 있는 것 같다. 조금있으려니깐 아침이 배달되어 오고...물론 아침이란게 빵 한조각하고 우유다. 8시 경에 역무원이 여권이랑 유레일패스를 돌려주기로 했던 것 같은데 6시가 넘어도 돌려줄 생각을 않는 것이다. 불안한 마음에 밖을나가보니 여러 곳의 방이 비어 있었고 역무원도 없었다. “이런...” 처음이라서 어찌할 방법이 생각나질 않아 불안에 떨고 있으려니 한 사람이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어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그 사람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띄우며 틀림없이 돌려주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란다. 조금은 안심이 되는 것 같아서 방으로 다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잠깐 잠이들었나? 역무원의 깨우는 소리에 일어나보니 곧 도착한다고 내릴 준비하라며 내게 여권과 유레일패스를 건네준다. 그래 이거야!!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반가운 것들..... 나 혼자 움직인 첫 여행지에로의 첫 이동구간에서 경험한 불안함이 이렇게 큰 줄은 몰랐다. 잠시 후 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는가 싶더니 마침내 서고 말았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차마르틴(Chamartin) 역!!! 프랑스에 이어 두 번째 나라다. 사실 여기 오기까지 한국에서야 아무런 걱정없이 당연히 들를 곳으로 생각하고 왔었지만 프랑스에 도착하구서는 이곳이 그리 쉽게 다녀갈만한 곳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간다해도 대부분 프랑스 남부지방에 가까운 바르셀로나지 서쪽으로 치우친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오긴 쉽지않다는 것을 느꼈다. 바르셀로나도 프랑스 남부도시 아비뇽이나 니스를 거쳐 이태리를 들어가기 위한 중간 거침목으로나 가능한 것이다. 또한 민박집 주인 학생말로는 내가 프랑스 파리에 도착하기 직전에 스페인에서 내전이일어났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것이다. 조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가지 말라고 아주 적극적으로 말리는 것 이었다. 물론 나라는 사람이 그런다고 해서 안갈 사람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거의 공포스러운 협박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 마드리드에 오기까지 총성이나 다른 시끌벅적한 소리와 소문 한번 들어보지 못했다. 물론 그런 소리를 할 때 조차 심히 믿어 의심하긴 했지만 지나고 보니 참으로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색이 유럽에서 생활한다는 사람이 소문만 듣고 그것도 유럽을 없는 시간내서 피같은 돈들고 온 사람들에게 그런 무책임한 이야기를 내밷고 있다는 것 말이다. 갔다와서 “그런 일 없더라”고 하면 분명히 “아, 그래요? 그럼 뜬 소문이었나보죠 뭐...”하고 아무런 죄책감없이 딴청을 부릴것이다.
챠마르틴역에 도착해서 민박집에 가는 방법을적은 메모를 보니 전철역으로 가서 .....행 기차를 타고 ...역에 내려서 전화하라고 써 있었다. 잘 살펴보니 건너편 역이다. 얼른 육교위를 돌아 건너편으로 가서 차편을 보니 좀 어렵다. 해석하기가.... 한참만에 겨우 이해되어의자에앉아 기다리니 햇빛이 꽤나 따갑다. 여긴 무척 더운 곳이라고 오기 전에 귀에 따갑게 들었다. 한 친구는 자기가 비르셀로나에 있을때 경험한 이야기를 공포어린 표정으로 내게 실감나게 들려주었다. 자기가 바르셀로나에 가서 오전 투어를 마치고 잠시 은행에 있다가 씨에스타(CIESTA: 스페인의 오수(午睡)시간으로 더운 날씨 때문에 시내의 모든 가게들이 12시부터 4시까지 문을 열지 않는다.) 시간에 걸려 문닫는 은행을 나서는 순간 더운 공기가 얼굴을 덥치는 순간 잠시 기절을 할 뻔 했다는 이야기...그래서 그 후로 5시까지 그늘진 곳을 찾아 벌벌 기어서 5시까지 꼼짝도 못하고 잠을 잤다는 이야기...나중에 알고보니 그때 온도가 48도였더라는 이야기......스페인의 날씨는 여름에 심하게는50도 가까이 올라갈 정도로 더운 곳인데 특히 그 심한 더위는 습기 때문에 더 심하게 느껴 진다는 것이다. 프랑스도 올해는 몇 십년 만의 폭서라고 야단인데 여기는 습기가 없어서 아무리 더운 날씨라도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한데다가 곧바로 바람이 부는 그런 괜찮은 날씨인데 더위도 더위지만 습기가 많다보니 체감온도가 더 높은 것이다. 특히 유럽의 대부분 도시가 일년중 해를 볼 수 있는 날이 그리 많지 않고 설혹 해가 뜬다 하더라도 구름에 가리우는 경우가 많아 일광욕에 매달리는 것인데 그 때문에 유럽인들은 여름 휴가때만 되면 이토록 강렬한 스페인의 햇살을 못내 그리워하며 줄지어 몰려 온다고 하지 않는가? 스페인출신이나 스페인을 다녀간 미술가들 중 피카소나 미로의 그림을 보더라도 스페인의 강렬함을 묘사하는데 무척이나 집착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1시간여를 지나니 차가 들어온다. 프랑스 파리에 들어 갈 때의 경험 때문에 유심히 차를 지켜 본 덕택에 차는 제대로 가야할 역에 도착했다. 이제는 전화로 사람을 부르기만 한다고 생각하니 좀 여유가 생겼다. 역에 도착해보니 작은 역이다. 교외 지역인가 보다. 사람이 없었다. 전화기를 찾으니 역사 뒤편에 2대가 놓여 있었다. 근데...아뿔사!!! 전화요금을 모르는 것이다. 물어볼 사람들도 없고.... 일단 갖고 있는 동전을 아무거나 집어 넣고 다이얼을 돌리니 전화가 안된다. 유럽의 전화기는 대부분 카드식이다. 그리고 동전식일 경우는 돈을 집어넣고 다이얼을돌리는것도 있지만 다이얼을먼저 돌린 후에 착신이 되면 돈을 넣는 경우도 있다. 또한 국가번호나 지역번호를 눌러서 통화하거나 그런 거 없이 그냥 누르면 되는 곳도 있다. 이곳은 돈을 먼저 넣고 지역번호를 눌러야 통화가 되는 시스템이다. 근데 기본 통화료를 모르는 것이다. 처음 것을 실패하니 20C 동전이 그냥 들어 가버린다. 다시 50C를 넣고 다시 거니 그것도먹었다. 와!!! 끓어 오르는 성질을 죽여가며 1?歷? 넣고 보니 그제사 통화가 된다. 일단은 화보담 안심이 먼저 왔다. 그래도 통화된 게 고맙기만 하다. 민박집 주인은 통화되자마자 그냥 거기 있으란다. 자기가 데리러 오겠다고.한 20분 정도를 기다리니 방울만한 차가 도착했다. 젊은 사람이었다. 다행히 학생은 아닌 듯해서 안심이 되었다. 꼬불꼬불한 길을 돌아 도착한 곳은 전원주택같은 외진 시골집이었다. 이 한국인 민박집 이름은 작은집. 선교사 부부가 운영하는 집인데 시내 교외에 집을 사서 여행자들을 위한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여름엔 이모님이란 분이 오셔서 음식을 해주신단다. 가면서 나눈 스페인 이야기 중 유럽 내에서 관광객 유치 1위 국가가 스페인이라는데 놀랐다. 대부분 유럽에서 관광 1위국 하면 프랑스나 이태리를 떠올리는데 색다른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 이우는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이 해가 나오는 날이 많지 않아 해만 나오면 미친 듯이 벌거벗고 볓을 쪼이느라 정신없는데 이 스페인이라는 나라는 해가 나오는 날이 많고 햇볓이 강한데다가 가깝고 물가가 싸고 해변을 많이 끼고 있고 밤늦게까지 놀 데가 많아 유럽인들에게는 천혜의 관광지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런 것 같다. 그리고 이 나라는 12시부터 낮 4시까지 씨에스타(Ciesta)라고 하는 오수시간이 있는데 그건 한낮의 기온이 50도 가까이 올라가다보니 쉬는 것이 오히려 효율적이라고 생각해서 생활화된 습관이다. 그러다보니 일하는 시간이 10-12시, 4-6시 즉, 하루 4-5시간 밖에 되지 않아 더군다나 주5일제가 시행되고 있어 거의 일하는 시간이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내가 들어 온 날도 토요일인데 전철역사에 직원들이 거의 없을 정도다. 그래서 주말에는 시민들이 거의 무임승차를 한다.
들어가니 내가 마지막 남은 방의 손님이었다. 배고프냐고 묻더니 밥을준다. 음식은 프랑스에 비해 진수성찬이었다. 잘된 밥에 국과 반찬 4-5가지...역시 가정을 이루고 있는 집안에서 운영하는 민박이라서 다르다. 식사 후 지하로 내려가서 짐을 풀었다. 이층 침대 하나와 일반침대 하나가 놓여 있는 3인용 방이다. 나이가 들어 보였는 지 1인용 침대를 쓰라고 한다. 샤워를하고 짐을 대충 정리하고 올라가니 한 여학생이 나와 있었다. 그녀도 혼자여행을 하는 친구였다. 나보다 2시간 전에 도착했다고 한다. 다른 지역을 가려고 계획했었지만 시간관계상포기하고 시내구경을 하기로 했다. 나가려면 주인장 차를 타고 나가야 했기 때문에 여학생과 동행하기로 했다. 처음 도착한 곳은 ...공원이다. 바다가 보이고 분수대가 있는 한적한 곳이었다. 물에 발을 담그고 휴식. 이어서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하여 거의 8시간여를 휘젓고 다닌 듯하다. 우선 처음 간 곳은 ‘왕궁(Palacio Real De Mdrid)’이다. 1738년 펠리페 5세의 지시로 만들어져 1764년에 완공되었다한다. 가이드투어를 한다. 하지만 Skip하고 앞에 벨라스께스가 ?藉훌構? 갈릴레오의 도움을 받아 설계한 펠리페4세의 기마상이 있는 ‘오리엔떼 광장(Plaza de Oriente)’을 둘러 보았다. 그리고 옆에 있는 ‘깜포 델 모로’ (Campo Del Moro) 공원을 지나 벤뚜라 로드리게스가 조성해다는 아름다운 쁘라도 산책로를 걸어‘쁘라도 미슬관(Museo del Prado)’을 만났지만 역시 Skip하고 말았다. 프랑스에서의 경험상 사전지식없는 미술관투어를 하지않기로 했었거든..... 이어서 시내 한가운데 있는 ‘쁘레시아도스 거리(Calle Preciados)’와 스페이의위대한 소설가 세르반떼스의 소설에 나오는 돈 끼호떼와 말 로시난떼, 산쵸의 동상이 서 있는 스페인 광장(Plaza de Espan~a), 가장 번화가에 놓여 있고 “태양의 문”이라고 불리우는 ‘뿌에르따 델 솔(Puerta del Sol)에 도착해서 주변을 살펴보니 커다란 사거리 좌우 편에 거대한 건물이 서 있었다. 자료를 뒤적거려 보니 이것이 1766년에 세워져 우체국으로 쓰였던 ’마드리드 지방청사(Communidad de Madrid)'와 스페인 최고의 백화점인 엘 꼬르떼 이글레스(El Corte Ingres)'였다. 잠시 사거리 공원 분수대에서 열기를 식히려 앉아 있으려니 분수물이 시원해 보여 좀 씻으려고 다다갔다가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 꼭대기에 비둘기가 죽어 있었던 것이다. 다시 용기를 내어 도착한 곳이 ‘시벨레스 광장(Plaza de Cibeles)'. 이곳 역시 쁘라도 산책로를 조성한 뻰뚜라 로드리게스가 설계한 분수광장으로 고딕조각의 걸작인 사자가 끄는 전차에 풍요의 여신 시벨레스가 탄 모습이 인상적이다. 저녁이 되면 조명을 받은 분수들의 모습이 환상적이라고 한다. 이어서 발길을 끈 곳이 ‘레띠로 공원(Parque del Retiro)'인데 이 곳은 16세기에 펠리페 2세가 지은 왕궁정원터라고 한다. 알폰소 12세의 상이 있는 레띠로 연못과 그 연못의 남쪽에는 스페인최고의 궁정화가 ’벨라스케스의 기념관(Palacio de Velazquez)'과 전면이 유리로 된 ‘수정궁전(Palacio de cristal)'이 있다. 그리고 길다란 산책로엔 노점과 카페가 있고 남쪽 끝부분에 있는 야외음악당에선 시민음악회가 자주 열린다고 한다. 오늘은 산책로 주변과 광장에서 몇 개팀이 연주를 하고 있어 그냥 바닥에 주저앉아 마냥 낭만을 만끽하고 있었다. 한시간 쯤 흘렀을까? 더위에 지친 몸이 약간 풀리는듯하여 용기를갖고 다시 일어나 과거 스페인의 정치.문화의중심지였던 '마요르 광장(Plaza Mayor)'으로 달려갔다. 도착했을 때 받은 첫인상은 화려한 프레스코 뱍화로 장식된 중세식 건물로 4면을 둘러싼 정사각형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과거 정치적인 집회 뿐만 아니라 축제와 투우는 물론 마녀재판도 이루어졌다고 한단다. 원래 이 광장은 펠리페 3세에 의해 1619년에 완성되었으나 1790년 대화재로 인해 재건축된 곳이다.광장 한가운데는 펠리페 3세의 기마상이 놓여 있고 그 뒤편에는 저녁의 공연을 위한 무대가 서 있었다. 처음 들어갔을 때에는 전면으로 햇빛이 들어와 건물 가까이 비친 그림자 밑으로 앉아 간간히 돌아다니는 연주자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더위를 피했는데 약 1시간쯤 지나자 광장 네면을 둘러싸고 있는 가게들이 파라솔과 테이블을 광장쪽으로 내놓기 시작하더니 언뜻 흥겨운 광장분위기가 살아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약 6시 정도가 되자 더위가 한 풀 꺽이는 듯 싶게 바람이 솔솔 들어오더니 8시쯤 되서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는 한무리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곧장 광장 분위기를 술렁이고 있었다. 이곳은 10시가 넘어야 해가지기 때문에 8시부터 사람들로 북적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때부터 시작해서 끝나는시간은 제한이 없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유일하게 밤새 사람들로 흥청망청한 곳이 된다. 우선 우리는 적당하게 그늘진 곳으로 가서 무대가 잘보이는 자리에 걸터앉아 맥주 한잔을 시켜놓고서는 안락을 취했다. 술기운이 약간 올라오니 그늘져오는 시원함과 살아오르는 스페인의 정열이 어우러져 묘한 흥분을 자아내고 있었다. 잠시간 몇마디를 나누는 사이 갑자기 주변 사람들의 술렁이는 소리에 둘러보니 우리가 앉은 건물 4층에서 두사람이 테라스에 나와 뭐라고 소리치며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자세히 지켜보니 즉흥극인 것이다. 잠시 후 광장에 내려와 극을 마치더니 배우들이 손님들 사이로 들어와 인사하며 모자를 돌리고 다녔다. 여자 주인공연을 한 아가씨가 예쁘고 매력적이어서 그 쪽 모자에 돈을 던져 넣었다. 기분 좋은 경험이다. 술이 좀 모자란 것 같아 와인을 주문하니 안주까지 시켜야 한단다. 와인값은 상당히 쌌다. 한병에 3유로던가? 근데 안주는 살벌했다. 최소 20유로다. 포기하고 자리를 나서니 벌써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무려 10시간 가까이 돌아다닌 것이다. 숙소로 가는 도중 여학생의 가방을 노리는 몇몇 아이들과 실랑이를 하며 숙소로 가는 전철을 타니 12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곳 소매치기 아이들은 3-4명씩 떼지어 다니는데 몰래 빼가는 것이 아니라 장난을 쳐가면서 노골적으로 가방지퍼를 열고 손을 넣는다. 황당하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해서 둘이 앞뒤로 해서 걸어다녔다. 숙소에 돌아오니 이미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다. 피곤하기도 했고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진 것도 있고 해서 샤워한 뒤 곧바로 침대에 쓰러져 잤다. 내일을 기약하며.....
7월 20일(일)
아침결,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깨 일어나보니 벌써들 나갈 채비다. 여기는 쥔장이 손님들을 실어나르는 구조라서 시간대에 맞춰 나갈 팀들을 짜고 물건 배달하듯 철도역사에 갖다 놓는다. 오늘도 혼자 움직이기 보단 그룹짓는게 좋을 것 같아서 팀에 묶여 나갔다. 오늘은 일요일이라서 벼룩시장에 나가보기로 했다. 우선 차마르틴 역에 내려 다른 여학생 두명과 함께 표를 바꾸러 갔다. 주말과 일요일에 플라맹고를 예약할 수 없다고 해서 부득이하게 하루 더 있기로 하고 스페인 마드리드- 포르투갈 리스본 구간의 출발 날짜를 하루 미루기 위해서였다. 나머지 여학생들은 같은 화요일날 바르셀로나로 가기 위한 표를 사기 위해서 들렀다. 하지만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예약을 할 수 없어서 손을 놓고 벼룩시장이 열린다는 La Latina역으로 갔다. 보기 힘든 광경이라서 줄지어 나가보니 아직 장이 서질 않았는지 좀 한산해 보였다. 잠시간 두리번 거리고 있으려니까 지척간에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인도변에 물건들을 풀어 놓은 잡상인들이 물건을 걷어 올리며 도망갈 채비를 하고 앞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곳 거리에는 대부분 모로코 흑인들이 와서 불법복제 CD나 핸드메이드 제품들을 보따리에 들고 와 길가에다 그냥 풀어놓고 팔고 있다. 가게를 마련할 만한 돈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조금 있으려니까 역시 경찰이다. 근데 좀 이상한 것은 보따리 상들이 도망가질 않고 보따리만 싸서는 그냥 주저주저 서 있는 것이다. 왜 그러는가 의문을 갖는 순간 금방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경찰들이 워낙 많은 보따리상을 주체할 수 없어서 그냥 와서 겁만 주고는 가버리는 것이었다. 경찰이 돌아가니 그답 그 많은 모로코 보따리상들이 물밀려 오듯 다시 돌아와 길가에 산더미만하게 물건들을 퍼붓고 있었다. 흥정하면서 물건을 골라야하지만 물건 자체가 워낙 가벼운 것들이어서 그냥 지나쳐 아래쪽 골목에 있다는 벼룩시장을 찾아서 내려갔다. 조금 내려가니 와~~~ 하는소리가 절로 날만큼 시끌벅적한 벼룩시장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올 초 실크로드 탐사코스 중 카슈가르(카스)의 바자르(이곳의 벼룩시장과 같은 곳)만 못미치지만 그 생동감은 비견될만 했다. 양 길가에는 돈 있는 사람들의 건물안 Shop이고 도로 양 옆 길가에는 포장마차같은 이동식 가게를 열어 관광객들을 현혹하고 있었다.그 길이가 족히 500m이상은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곳을 들어올 수 없는 모로코 흑인들은 벼룩시장 입구쪽에서 보따리를 펴 놓고 장사를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 두리번 거리다 이상한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각국 외국인들이 섞여있는 일단의 종교인집단인 듯한 흰색의까운을 입는 무리들이 조그만 종같은 것을 두드리고 노래를 부르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무슨 노랜지는 모르지만 그런대로 재미가 있었다. 물론 관광나온 외국인들의 카메라 후레쉬는 쉴 새 없이 번쩍거리고 있었고.... 조금 돌아다니다가 선물용 이어링과 허리쌕을 구입했다. 맘에 드는 것이 없지 않았지만 이제 처음 시작하는여행일정상 도저히 가지고 다닐 용기가 나질 않아 포기하고 말았다. 여행시에는 마지막 코스에서 가지고 들어갈 선물을구입하는 것이 좋고 중간에서는 가급적이면 싸고 조그마하고 잘 부서지지 않을, 그 지방의 특색을 잘 표현한 독특한 것을 조금씩 사둬야 짐이 되질 않는다. 약 한시간의 여유를 주고 다시 모여 우리는 투우장으로 가서 표를 예약한 후 남은 시간동안 각자 투어를 하다가 합류하기로 했다. 투우장엘 가니 마치 경기장이 그림에서 본 로마의 원형경기장인 콜롯세움과도 같았다. 재미있는 것은 5유로짜리 자리를 예약했는데 들리는 이야기로는 경기장에 가까운 정도와 그림자가 먼저 지는 쪽 순서로 가격이 매겨진다는 것이다. 즉 경기 내내 그늘인 곳을 솜브라(Sombra)라고 하고 그 반대의 경우는 솔(Sol), 차차로 그늘지는 곳을 솔 이 솜브라(Sol y Sombra)라고 한다. 또 제일 앞쪽은 뗀디도(Tendido), 가운데는 그라다(Grada:계단이라는 뜻), 제일 뒤는 안다나다(Andanada:지붕아래라는 뜻)라고 한다. 재미있는 얘기다. 일부가 축구장을 보려고 헤어지고(알고보니 여기가 스페인 프로축구의 본고장인 레알마드리드구단이 있는 곳임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나머지는 경기장 한쪽 계단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약 두시간여를 기다려 입장하니 싼게 비지떡인지 가장 위층으로 올라가란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맨 윗좌석인데 다행인 것은 오히려 그 자리부터 그늘져 있었다. 행운인가 보다. 잠시 있으려니 투우가 시작되었다. 원래 이 투우(Corrida de Toros)란 것은 목축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의식으로부터 출발하여 가장 오래된 기원은 1080년에 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18세기까지는 기사들과 귀족들의 여흥이었지만 왕위계승전쟁이후 투우를 싫어하던 부르봉 왕가가 서민의 경기로 격하시키면서 일반인들에게 보급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말을 타고 경기를 했으며 까를로스 1세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근세의 독재자 프리모데 리베라의 명령으로 말타고 하는 경기(레호네리아)의 비중이 적어지고 땅위에서 하는 마따도르가 정착된다. 투우의 순서는 팡파르와 스페인식악단의 연주와 함께 그 날 출연하는 마따도르(matador)와 반데리예로(Banderillero), 삐까도르(Picador) 등이 장내를 한바퀴 돌고... 이어 흥분을 시킨 소(또로스:Toros)가 등장한다. 이어서 소가 용맹하고 이상이 없다는 것을 관객에게 보여주며 빠까도르가 안잔하게 등장할 수 있게 반대방향으로 유인하는 방법으로 까뽀떼(Capote)를 든 투우사들이 소을 흥분시켜 공격하면 방어벽 뒤로 숨는 베로니까(Veronica)라는 묘기를 보여준다. 이어서 말 옆면에 가죽을 대고 긴창을 잡은 삐까도르가 등장하면 투우사들이 전부 경기장 밖으로 나간다. 이 때 소는 흥분하여 뿔로 가죽을 댄 말 옆구리를 공격하는데 이 때 삐까도르는 긴 창으로 소의 목덜미를 찢는다. 이 때 반대편에서는 3명의 단창잡이 반데리예로가 등장하여 어깨 근육이 찢어지고 선혈이 낭자해져 움직임이 둔화된 소의 등에 각각 2개씩 깃발달린 창을 꽂는다. 이 때 소가 가장 흥분한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흥분되고 피투성이가 된 소와 한판 승부를 벌이기 위해 마따도르가 새빨간 물레따(Muleta)를 들고 소를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묘기를 보여준다. 처음에는 가짜칼을 숨기고 하다가 중간에 진짜칼(에스빠따:Espada, 이 때문에 마따도르를 엘에스빠따(El Espada)라고도 한단다.)과 바꿔 적당한 시점에 소의 등을 향해 찔러 심장을 관통시키게 된다. 이것을 무에르따(Muerta)라고 한다. 여기서는 소를빨리 죽이는것보다 얼마나 멋있게 요리하는가가 관건이 된다. 또한 이 과정에서도 여기서 투우사들의 실력이 비견되는데 좀 떨어지는 투우사들은 한두번에 끝내질 못하거나 그 과정에서 오히려 소에게 받치는 경우가 있다. 오늘의 세 번째 투우사가 그렇게 실려 나갔다. 그 경우에는 보조투우사들이 한꺼번에 경기장에 나와 소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끈 다음 쓰러진 투우사를 빼내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전에 성공한 투우사 중 한 명이 다시 나와 소를 쓰러뜨리게 된다. 실력있는 투우사는 단 한번에 관통을 시키고 소를 그 자리서 고통없이 절명시킨다. 이어서 투우사는 스키 폴처럼 된 칼로 바꾼 뒤 소에게로 다가가 숨골을 찔러 소를 죽이게 된다. 숨골은 모든 동물들에게 치명적인 곳으로 한방에 죽게되는 급소다. 그리되면 소는 뒤집어져 발을 하늘로 향하게 된다. 고통을 줄이는 방법이다. 일년에 몇 번 되지는 않지만 잘 싸운 마따도르에게 소의 귀와 꼬리를 잘라주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하지만 오늘은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또한 잘 싸운 소는 마따도르처럼 인기가 좋아 소의 해채과정을 투우장 내 도살장에서 볼 수가 있다고 한다. 이 소의 고기는 일류 레스토랑에 비싸게 팔려나가는데 레스토랑에서는 “어느 경기에서 몇 번째로 싸운 고기요리”라는 식으로 메뉴에 표시한다고 한다. 야생으로 훈련된 소라서 맛은없기로 유명하단다. 경기가 끝난 뒤 마따도르가 만인들에게 환호를 받는 순간 화려한 치장을 한 마차가 다가와서 소를 끌고 경기장을한바퀴 돌아 나가게 되는데 잘 싸운 소는 관중들에게 기립박수를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경기장의 모래톱에는 장렬하게 전사한 소의 시뻘건 혈흔이 길게 남는다. 처음에는 잔인해보인 경기가 시간이갈수록 그 생각이 무뎌져가기만 하는 것이 인간의 요사함으로 느껴졌다. 투우장을 나와 찝찝한 기분으로 어정거릴 때 마요르 광장을 가자는 제안을 하니 모두 동의한다. 한참을 헤매(그곳으로 가는 길이 약간은 오리무중이다.) 도착하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고 광장 무대에서는 아이들이 나와 공연을 하고 있었다. 아마 집시들의 춤과 노래인 듯 싶었고 경연대회 같았다. 모두들 잠시 지켜보는 듯 하다가 지친 듯 돌아가자는 신호를 보내와 역으로 몰려갔다.벌써 11시가 넘었다. 역에서 한참만에 도착한 기차에 올라서는 순간, 어떤 한 친구가 내 앞에서 동전을 떨어뜨리더니 줍는 척하다가 갑자기 양손으로 내 바지 무릎쪽을 잡더니 마구 흔드는 것이었다. 순간 당황한 상태에서 녀석의머리를 잡고 일으키려는 순간 뒤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길래 돌아보니한 시민이 내 여권을 들고 내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그날 바지 뒷주머니에 여권을 넣은채로 관광을 했었는데 그 안에 카드와 돈이 조금 들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3인의 소매치기 그룹이 내 뒷주머니를 보고 쫒아와 지쳐있는 것을 보고는기차에 올라탈 때 한 놈이 내 다리를 흔들어 정신을 빼놓은다음 뒤에 쫒아 들어 온 놈이 그 사이에 내 뒷 주머니에 있는 여권을 뺀 것이다. 그 녀석이 빼다가 떨어뜨린 것인 지 아님시민이 채틀어 뺏은 것인 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순간적인 경황속에 다행스럽게 여권을 회수한 것이다. 남자가 나 하나였지만 내 앞에 있던 녀석은 머리를 부여잡고 기차 문을 나서는 순간까지 6명의 여자들에게 주먹다짐과 빽으로 구타세례를 받고는 기어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쥔장에게 이야기하니 이곳이 그런 일들이 많다고 하면서도 그런 식은 자기도 처음 듣는다고 한다.스페인이란 나라의 치안력이 관광객들을 상대로하는 소매치기들에게 힘을 못 쓰는 건지 안 쓰는 건지 모르겠다며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쨌든 마드리드 시내에서 경찰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지나가는 소리로 그 소매치기들이 관광객으로부터 절취하는 액수가 만만치않아 스페인 경제에 상당한 도움을 주는것도 사실이라고 한다. 그래서 국익에 도움이 되는 소매치기를 근절할 의사가 없고 그래 안해도 관광객들이 넘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믿거나 말거나.... 사실 아침에 나올 때 쥔장과 바르셀로나로 가는 도중 가방과 여권을 몽땅 분실해서 여기서 떠나 마침 다른곳을가고 있던 한국인 한 사람이 그광경을 보고는 그 여학생에게 차비를 주고 이곳 작은 집으로 가서 머물면서 임시여권 발급을 받아 움직이라고 하고 돌려보냈다는 전화를 받은 이야기를 했던 있었던 것이다.근데 그게 나의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실제로는가장 조심스러웠던 프랑스 파리에서 전혀 그런일이 없었기 때문에 경계심이 풀렸던 것 같고 오늘 하루의 스케줄이 워낙 피곤했었기 때문에 더더욱이 해이해져서 일어난 것 같다. 소매치기들한테는 좋은 먹이감으로 보였을테니까말이다. 더욱이 난 그들에게 물 좋다는 한국인 아닌가?
7월 21일(월)
뒤숭숭한 밤을 보내고 스페인에서의 이틀째를 맞이했다. 이젠 좀 익숙해졌을 법도 하건만... 지난 밤 관광을 나갔던 멤버 전원이 동의했던 똘레도(Tolledo)로 출발했다. 오늘은 쥔장 양반의 어린 처제가 동행했다. 방학을 통해 언니 집에 놀러왔던 것이다. 나가는 길에 차마르틴역을 거치기 때문에 (스페인 마드리드 차마르틴역- 포르투갈 리스본),(포르투갈 리스본- 스페인 마드리드 차마르틴역),(마드리드 차마르틴역- 세비야),(세비야- 그라나다),(그라나다- 바르셀로나)의 구간 기차 예약을 했다. 예약료는 각 구간별로 1인당 6+ 6+ 6+ 3+ 9.5= 20.5 유로가 들었다. 차종은 스페인, 마드리드와 포르투갈, 리스본 사이는 야간열차로 Talgo, 마드리드- 세비야는 초고속열차 AVE, 세비야- 그라나다, 그라나다- 바르셀로나 구간은 일반열차인 BBVA였다. 그리고 떠나기 전 차마르틴역에서 현금을 뺄려고 깜비오(Cambio:현금지급기)에 들러 카드를 집어 넣으니 이게 웬 일? 카드가 그냥 나오질 않는가? 다른 나라에서도 되었는데 여기서는 안된단다. 이런 황당함!!! 그 카드만 믿고 현금을 다 써버렸는데 낭패다. 한참을 헤매다가 혹시나 하고 씨티은행카드를 들이미니 300유로가 쌱하고 부드럽게 빠져나오는 것이 아닌가? 어째튼 다행이었다. 여분으로 가져온 또 한 장의 카드가 나를 위기에서 구해준 것이다. 한바탕의 난리를 끝내고 차마르틴역에서 아또차역(Atocha)으로 가서 똘레도행(7유로) 기차를 타고 약 1시간쯤 지나니 고대도시 똘레도가 우리를 반긴다. 이 도시는 세계에서 단위 면적당 문화유산이 가장 많은 도시중 하나란다. 역을 나와 버스정류장인 Autobuses를 찾는데 쉽지가 않다. 안되는 몸짓으로 물어물어 한참을 올라가니 시내로 들어가는 문이 무게있게 우리를 굽어보고 있었다. 스페인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 알까사르(Alcarzar:성)에 도착하니 보수중이라서 안으로 못들어가고 밖에서만 구경했다. 하지만 외벽 거의 전체를 공사하느라 비대를 설치해놔서 유적이라기보다는 흉물에 가까웠다. 이 성은 똘레도의 왕 알폰소 10세가 13세기에 세운 건물, 까를로스 5세는 이곳을 개조하여 왕궁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성뒤편으로 돌아가니 드넓게 펼쳐진 평원과 성 주위를 휘감아 돌아가는 강이 해자역할을 하면서도 그 서정성을 잃지 않고 있었다. 몇 장의 사진이 필수적인 곳. 주변 가게에서 그림엽서를 몇 장 사고는 돌아 들어가는 길을 따라 카테드랄(Cathedral:성당)로 찾아 들어갔다. 가는 길에 한 조그만 성당에서 전람회를 열었기에 더위도 숨길 겸 잠시 들렀다. 유럽의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미 신앙행위가 생활화되어 있기 때문에 성당에 특별히 나가질 않는다. 그래서 공동화되어 있는 성당을 유명한 유적지?? 아닌 이상은 이런 용도로 적절하게 활용하기도 한다. 한참이 지나도 사람들이 나올 생각을 않해 버럭 소리를 질러 싫은 소리를 해서 양떼 몰 듯이 몰고 나왔다. 시간 배분을 위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좁은 골목길을 이이저리 돌아가니 앞 쪽으로 광장이 있는 성당이 나타났다. 한참동안 입구를 찾다가 한 쪽 귀퉁이로 돌아가니 입구가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안으로 들어가니 기대하지 않았던 장중함과 아름다운 성당의 모습에 넋을 잃고 한참을 앉아 있고 말았다. 겉보기와는 다른 잘 보존된 성당의 내장이었다. 이 성당은 똘레도가 이슬람의 지배를 벗어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알폰소 8세가 세운 것으로 이 성당의 8각형 돔은 엘그레코의 아들 Jorge Manuel이 세웠다고 한다. 또한 내 눈을 현혹했던 내부의 아름다운 프레스코화와 스테인드글라스는 엘그레꼬나 티치아노, 고야의 작품이란다. 약 30분여의 기도아닌 기도시간을 보낸 뒤 둘러보니 한 무리의 멤버가 보이질 않는다. 이 성당으로 들어올 때부터사라진 것이었다. 성당 안팎으로 소리치며 돌아다녀 봤지만 보이질 않았다. 우째 이런 일이..... 그 중에는 아침에 보호를 부탁,부탁!!했던 쥔장양반의 조카도 끼어 있는데... 잠시 앉아 고민하다가 그냥 관광을 계속하기로 했다. 어차피 성곽도시기 때문에 코스만 다를 뿐 출구는 하나라서 먼저 마드리드로 가지 않는 한 출구에서 만날거라고 자위하며 예정된 코스로 전진했다. 골목길을 한참을 돌아가니 조그만 돔형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작지만 앙징맞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름하여 엘 그레꼬(Casa de El Greco)의 집!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태어나 똘레도에서 생을 마감한 그를 기리기위해 세운 곳이다. 그레꼬란 말은 스페인어로 그리스를 뜻하는 것으로 그리스출신이라는 말이란다. 역시 입장료 간판을 보고 지나치고 말았다. 그리고 엘그레꼬가 죽기 1년전에 그렸다는 ‘성모승천’이란 작품이 있는 산타크루즈미술관(Museo de Santa Cruz)과 역시 엘그레꼬의 작품‘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 있는곳으로 유명한 산또 도메교회(Igresia de Santo Tome)도 역시 지나쳤다. 외관만 감상하고는..... 약 2시간쯤 지났을까? 골목길 끝을 나오니 탁 트인 강가 산책로가 나타났다. 마침 지나가던 노부부에게 사진기를 맡기고 얼굴들을 박았다. 밝고 명랑한 부부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입구쪽에 다다르니 역시 붉게 상기된 얼굴로 잃어버렸던 일행이 서 있었다. 우리를 잃어버리고 찾다가찾다가 들어오기 전에 머물렀던 맥도날드에서 더위를 식히고 쉬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성당은 못 봤고.... 어쨌든 돌아오는 길에 쥔장양반의 처제애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물론 그 이면에는 오늘의 사건을 무마시켜 있는 동안만이라도 몸과 마음을 편안케하기 위한 응큼한 의도도 없진 않았지만.... 아이가 워낙 당돌한 면이 있어 스페인어를 배우기 위해 유학을 결심한 상태라는 말에 적극 지지를 표시했다. 한국에서 그냥저냥 있기보다는 언니가 외국에 나가있어 보살펴 줄 수 있는 형편이고 의사가 있다면 아나갈 이유가 없지 않는가? 언어 차원이라보담 유럽이라는 지역적인 배경과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유럽문화의 중심에서 젊음을 불태워 보는 것도 기회이며 행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두 명의 여학생과 포르투갈에 같이 가기로 한 여학생까지 합쳐 쥔장의 차로 플라맹꼬(Flamanco) 관람을 갔다. 입장료는 30유로를 받았다. 운임은 왕복으로 18유로로 1인당 4.5유로 꼴이다. 이름하여 '"Corral de Moreria". 대개 오후 11시- 새벽 1시에 스펙터클한 공연이 이루어지고 주말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댄서‘브랑카 델 레이’가 출연한다고 한다. 그래서 주말에는 늦깍기 예약이 거의 불가능하다. 안에 들어가니 사각형의 허리 높이의 무대가 구석에 있고 모서리있는 양 면에 좌석이 배치되어 있는 구조의 따블라오(Tablao)였다. 자리에 앉으니 예약 손님에게 주는 Menu를 내놓았다. 대개 예약금으로 제공되는 음료로는 ‘샹그리아’가 유명하다. 이것은 몇가지 과일 원액을 섞어 만든 쥬스형태로 맛이 독특하고 양이 많아 여러 명이 가면 먹기에 싸고 좋다. 공연을 기다리는 도중에 두명의 한국 여성여행자들이 들어와 앉았다. 그냥 Working인 것이다. 대충음식을 시키는 것과 관람하는 법을 알려주고는 공연을 기다렸다. 이 플라맹꼬는 인도에서 전란을 피해 중동과 아프리카를 거쳐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으로 넘어온 유랑민들의 슬픔과 이슬람적, 집시적 열정, 아프리카의 원시 그리고 안달루시아의 뜨거운 태양과 격렬한 스페인음악과 만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집시(Gypsy)란 이집트인을 뜻하는 영어식 표현으로 스페인에서 히따노(Hitano)라고 하고 집시 스스로는 롬(Lom,Rom), 돔(Dom)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인간’이라는 뜻이란다.) 공연은 기타리스트,가수, 무희가 등장하는데 한 손을 치켜든 무희가 나와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관객을 흥분시킨다. 이어서 플라맹고의 정수라고 하는 깐떼(Cante)라고 하는 가수의 폐부를 찌르는 노래가 이어진다. 그 뒤에 일급무용수의 독무가 이어지고 잠시간의 휴식뒤에 남녀 한쌍의 무용수가 나와 독무와 이중무를 추면서 관객들의 혼을 빼놓았다. 길게 이어지는 공연 중에 사진을 계속 찍어 댔지만 음악과 동작을 담을 수 없는 한계에 속을 끓일 수 밖에 없었다. 캠코더를 가지고 올 걸..... 정말 후회스럽다. 여기서 손뼉을 치는 것을 빨마스(Palmas)라고 하는데 이 불규칙적이고 빠른 손뼉치기는 관객을 가슴을 뒤흔들어대는데 모자람이 없다. 한 무용수가 춤을 추면 나머지들은 주변에 서서 손뼉으로 박자를 맞춰주며 ‘올레’,‘발레’,‘빠사’등의 추임새를 넣으며 흥을 돋군다. 또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발구름은 사빠떼따(Zapatete)라고 한다. 열정적인 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그 흥분이 가라앉질 않아 잠을 못이룰 정도였다. 아마 주말에 공연을 볼 수 있는 행운이 다가왔다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과 함께....
7월 22일(화)
아침에 알함브라궁전(Palace del Alhambra) 입장권을 인터넷(2인 예약료:17유로)으로 예약했다. 성수기에는 예약자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돌아서였다. 그리고 다시 차마르틴역으로 가서 어제 산 티켓을 교환했다.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으로 돌아오는 날을 하루 착각, 가자마자 돌아오게 되어 있어 싹싹 빈 결과로 하루를 미뤘다. 다행히 마드리드에서 세비야(Sevilla), 그라나다(Granada)로 가는 것은 날짜가 제대로 예약되어 있었고... 하지만 문제는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의 표였다. 날짜가 잘못되는 바람에 그라나다에 저녁에 도착하도록 되어 있어 오후 5시로 예약된 표를 저녁으로 미뤄야 되는데 그게 맘대로 안되는 것이다. 언어도 문제가 있고 전화받는 쪽에서의 관료적인 태도 땜에 전화비도 만만치 않게 들어가는 것이다. 결국은 최악의 경우 예약료 17유로를 날리고 그라나다에서 표를 다시 사는 것으로 결론 짓고 세고비아(17유로)나 다녀오기로 했다. 그 와중에 보여준 내 파트너의 행색이 앞으로의 일정을 어둡게 하고 있었다. 산만함이 극에 달해 하나하나 지시를 해줘야 하고 잘못된 일에 대해 전혀 초조함이 없는 무사태평이다. 찜찜한 마음으로 세고비아에 도착하니 도대체 버스 정류장이 어딘지를 몰라 한 30여분을 헤맸다. 짐까지 들고 나와 안들어 줄 수 없는 처지로 몰고간 것까지는 좋았지만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하는 빡빡함에 대해 전혀 부담감이 없이 행동하고 있어 속을 부글부글 끓게 만들고 있었다. 이제가 처음인데...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이 세고비아 유적지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우선은 그 입구에 서 있는 로마시대 수도교(Acueducto Romano)의 위용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이 건조물은 1세기 로마인들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어 약 2,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800m나 되는 길이와 165개나 되는 아치가 완벽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어 고대로마인들의 놀라운 토목기술에 입이 벌어질 정도다. 여기서 증명사진을 몇 장 찍고....카테드랄(8유로)로 향했다. 이곳은 원래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알려져 있는데 오히려 톨레도의 성당이 더 아름다웠던 것같다. 그리고 도시의 끝부분에 위치한 알까사르에 도착하니 절벽 끝에 매달린 아담한 성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똘레도의 알까사르가 웅장함이라면 이곳은 동화속의 성처럼 아릅답기만 했다. 실제로 이 성은 소설‘백설공주’의 무대로 사용된 성이라고 한다. 3유로의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니 박물관이다. 이슬람시대에 만들어져 각종 전쟁무기와 궁으로 쓰였던 유물들의 전람회와 같은 곳으로 아기자기한 게 보기 좋았다. 그리고 성의 창문으로 본 언덕 풍경은 황량하면서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바쁜 걸음으로 마드리드에 돌아와 역에서 저녁기차를 기다리니 몇몇의 메이트들이 찾아와 짐을 넘겨 주었다. 물론 내 짐은 아니고 스페인에서 포르투갈로 다시 스페인, 프랑스 아비뇽까지 동행키로 했던 그 여학생 것이다. 우리들 차가 맨 마지막이라 다들 아쉬운 이별을 고하고 늦은 차에 올라탔다. 그래도 이번이 두 번 째라 그런지 좀 여유가 생겼다. 일등석이라 그녀와 떨어져(유레일이 다름, 내 것은 Flexi-pass라 1등석이고 그녀의 것은 Youth- Pass라 2등석이다. 물론 돈을 더주면 1등석으로 Upgrade가 가능하나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아 그냥 뒀다.) 일단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짐을 올린 후 중요한 물건들은 허리 쌕에 가다듬었다. 대충 정리하고 자리에 앉아서 포르투갈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기 책을 보는데 한 유럽청년이 들어와 한 무리의 젊은이들에게 말을 걸?煮? 그냥 자리에 퍼질러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언뜻 드는 느낌으로도 부러움이 앞섰다. 언어가 좀 자유로왔다면 거기 끼어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과 여행에 관한 정보를 듣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는 마음에 그냥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한참을 읽고나니 눈이 아파 잠을 청하려고 CD를 집어 들었다. 시간이 얼마가 지났는 지는 모르나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깨 살펴보니 아까 그 친구들 중 한 놈이 흑인여자하나를 두고 꼬시느라 밤새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것이다. 말이 안되니 뭐라 항의 할 수도 없고 이곳의 분위기가 그런 거에 뭐라 안하고 참는 게 습관인 것 같아 귀마개를 기고 잠을 또 청했다. 이 신제품은 우연히 구입한 것인데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은 정말 몰랐다. 그 시끄러운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바르셀로나 Monfieller 3유로
7월 23일(수)
이번에도 역시 2시간여의 연착이다. 고장으로 2시간동안 서 있었다고 한다. 내가 잠자는 사이 기특하게도 2등실에 있던 그녀는 같은 열차에 있던 한국인 남자 2명 사귀어 리스본에 관한 정보를 캐고 있었던 것이다. 기차에서 내려 도착한 곳은 리스본의 관문 쌍따 아뽈로니아(Estacao de Santa apolonia)역, 역내 Information에서 숙소정보와 관광지 Map을 받으려 기다리는 동안 몇몇 숙박업자가 명함을 들이밀며 자기네 숙소로 오라고 유혹한다. 이곳은 여행자 숙소를 빤시온(Pension)이라 부른다. 기차가 도착하면 기다렸다가 두리번 거리는 여행자들에게 다가가 숙소의 조건에 대해 이야기하며 묵기를 권한다.위험하지는 않지만 처음 이야기와 다른 경우가 많아 하나한 꼼꼼하게 물어보고 현장에서 비교, 확인해야한다. 특히 방의 위치, 침대의 수, 욕탕의 구조와 조건, 취사조건 등등이 그것이다. 만약 얘기가다르면 가격을 낮추던지 아니면 가차없이 나와야 한다. 잠시간 고민하다가 남학생이 선택한 집으로 몰려 갔다. 이층침대가 2개인 4인용 창가 방으로 욕탕이 별도로 되어 있고 취사는 안되는 공동식당에 냉장고 공동사용이 가능하며 주인 여자가 꽤 친절해서 만족스러웠다. 4명에 50유로(각자 12.5유로)로 계약했다. 각자 샤워를 마치고 주변 상점에 가서 먹을 것을 사와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이 남자친구들은 독특한 아이들인 것이 디지털카메라로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는데 주변의 풍경은 단순한 풍경일 뿐 서로의 표정을 찍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사진촬영이다. 또한 서로가 상당기간을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여행을 시작해서 그런지 여행지에서 무조건 걷기, 먹는 것은 최소한으로 최소비용으로를 원칙으로 하 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나까지 덤태기로 고생했지만 부자집 딸같은 철없는 여학생보다는 그런대로 봐줄만한 털털한 아이들이었다. 오후가 돼서 숙소를 나와 리스본 시내투어를 하기로 하고 숙소 뒤의 성조르지 성(Castelo de Sao Jorge)으로 물어물어 올라갔다. 이 곳은 알파마(Alfama) 지구에 위치하는 데 이 지역은 리스본에서 가장 오래된 지구로 아랍인들 통치기에 귀족들의 주택가였다고 한다. 알파마란 이름도 아랍어인 ‘Al-hama:뜨거운 물(온천지역)'에서 온 것인데 대지진 후 귀족들은 바이샤지역으로 옮아가고 이곳은 서민들만 남게되었다고 한다. 이 곳 성 조르지 성에는 기원전 2세기경 페니키아인들이, 5세기에는 서고트인들이, 9세기에는 무어인들이, 12세기 포르투갈의초대왕 알퐁소 엔리께가 성의 주인으로 등장한다. 일몰이 아름답다고 해서 올라와 본 성의 모습은 리스본 시가 전체가 훤히 다보이는, 시원하게 트인 주변 정경이 우선 눈에 확 들어왔다. 잠시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사진을 찍다가 성에 올라가는 순간 머리를 치는 정적!!! 그냥 한마디로 뽕!!!이었다. 성안 마당에 딸인 듯한 아이와 함께 앉아 기타를 치고 있는 연주자의 모습은 그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노을져가는 금빛 성벽의 반향과 스페인과는 아주 다른 잔잔한 서정성이 어우러져 한폭의 환상적인 그림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성벽 꼭대기에 두다리를 쫙 펴고 걸터앉은 네 명의 신선들은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지 못한 채 아름다운 상념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 얼마만에 맛보는 포근함과 아름다움인가..... 그 진한 여운을 아쉬워하며 성을 내려오면서 그 연주자에게 감사의 표시로 동전을 모아 주고 나왔다. 이어 예의 그 단련된 걷기관광으로 시내를 향해 네 명의 전사들은 돌진에 돌진을 거듭하고..... 먼저 두 친구가 현금부족을 메꾸기 위해 여행자수표를 바꾸려고 시내에 있는 토마스 쿡 은행을 찾아야 한다고 해서 그곳을 먼저 찾기로 했다. 하지만 문제는 프랑스와는 달리 이곳에는 그 은행을 찾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결국 우리는 토마스 쿡 은행을 찾으면서 시내관광을 겸하기로 했다. 여기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만만치 않은 환전문제였다. 유럽에 오기 전이야 여행자수표가 현금교환률 높고 구입시 현금보다 싸게 살 수 있고 분실시 재발행이 가능하다는 이점 때문에 통화 환전량의 반 이상을 바꿔오지만 현지에서 토마스 쿡은행이 많은 곳(영국,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을 제외한 나라에서는 자칫 이중으로 손해를 보게 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토마스 쿡 은행이 없을 경우 현지 화폐로 바꿀 때의 환율과 현금화 때의 수수료로 이중의 손해를 볼 수 있다. 성 아랫길로 내려오니 조그만 성당이 눈에 띄였다. 칠흑같이 어두운 입구를 들어서니 서서히 눈이 밝아지며 그 내부가 들러왔다.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서 그런지 조용하고 담백한 멋이 있었다. 강가 쪽으로 나와보니 19C 바로크 양식의 개선문을 지나 리스본 최대의 광장인 꼬메르씨우 광장(Prasa Comercio) 이 나타난다. 중앙에는 18C말에 세워진 동 주제 1세(D. Jose 1)의 기마상이 있는데 그가 바로 뽕발 후작을 기용하여 리스본의 재건과 개혁을 추진했던 왕이란다. 널찍하게 트여 떼주강을 마주하는 광장은 보는 이의 마음을 후련케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는 듯하다. 드믈게 서 있는 조그만 나무 밑 그늘을 잽싸게 확보하여 아까 전에 대충 싼 점심을 뜯어먹고 있자니 이게 유럽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 잠시간의 휴식을 마치고 서둘러 일어나 아까 전에 들어왔던 개선문을 지나 곧바로 북쪽으로 올라가니 주변의 골목길마다 늘어선 음식점들의 노천 Table이 즐비하게 나와 있어 손님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이곳이 바이샤지구(Zona da Baixa)로 가장 번화가인 듯 하다. 얼마 되지 않아 도착한 곳은 로시우(Rossio) 광장. 이곳은 원래 동 뻬드루4세 광장( Prasa D. Pedro 4)이라고 불리우는 곳인데 바이샤(Baixa- 낮은 곳이라는 의미) 지구의 메인 광장이라고 할 수 있다. 광장의 동상은 초대 브라질 총독인 동뻬드루 4세의 것이고 북쪽의 큰 건물 (도나 마리아 2세(Teatro D. Maria 2) 국립극장) 앞에도 포르투갈 최초의 극작가인 질 비센뜨의 동상이 있다. 여기서 좀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레스따우라도리스 광장(Prasa dos Restauradores) 광장이 나온다. 이 광장은 1640년의 혁명으로 60년간의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한 것을 기념한 광장이란다. ‘Restauradores’는 ‘복구자들’이란 뜻으로 독립혁명을 주도한 이들을 뜻하고 그래서 광장의 중앙에는 그를 기념하는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그리고 서쪽엔 19C 초 이탈리아의 건축가에 의해 지어진 붉은 건물의 포스 궁(Palacio Foz)이 보인다. 이어서 리스본 시내의 중심가라고 할 수 있는 리베르다드 대로(Avenida da Liberdade)를 들어서니 5,000명 이상의사상자를 내고 도시를 폐허화 했던 1755년 리스본의 대지진을 극복하고 과감한 도시개발계획으로 리스본을 재건, 복구한 뽕발 후작의 기념상이 서 있는 뽕발 후작 광장(Praca Maques de Pombal)이 나타났다. 일단 이 대로에 들어서니 깨끗함과 널찍한 거리라는 생각에 후덕진 마음이 탁 트이는 듯했다. 스페인만큼 더운 나라에서 대로 상의 나무 그늘 및 벤취는 나름대로의 고즈넉한 정취를 느끼게 할 만큼 포르투갈이란 나라의 정서와 분위기는 스페인과 사뭇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스페인이 급하고 정열적이고 거칠다고 한다면 포르투갈은 차문하고 정적이며 부드럽다고나 할까? 멀리서 생각했던 별무차이란 생각이 크게 잘못된 것이었음을 절절히 느끼게 된 바다. 이래서 발품을 팔며 직접 보고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또 느끼고 있다. 벤취에서의 잠시간 휴시을 마치고 한참을 걸어 올라가 북쪽에는 에두아르드 7세 공원(Parque Eduardo 7)을 향해 가다 한 남자친구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옆길로 달려가길래 놀라 쳐다보니 거기에서 토마스쿡 간판을 발견했다는것이다. 잠시 휴식 겸 길거리에 주저앉아 담소를 나누는사이 처벅처벅 무거운 발길로 돌아오는그 친구를 보고선 아무 말없이 공원으로 향했다. 물론 문이 닫혔던 것이다. 1902년 영국의 에드워드 7세의 리스본 방문을 기념하여 조성되어 있는 프랑스식 공원이다. 지대가 높아서 멀리 남쪽으로 떼주강과 바이샤지구가 한눈에 보였다.
날이 어두워져오면서 우리들은 밤을 새워 타고 온 반기차의 여독을 채 풀기도 전 시내관광을 끊임없는 Walking으로 지새운 결과 학생들은 어떤지 몰라도 내겐 종이장같은 세상천지로 느껴졌다. 흐늘거리는 몸을 부여잡고 그래도 폼잡고 먹을 저녁거리 식당을 찾기 시작했다. 역시나 했던 기우가 현실로 다가왔다. 노자돈이 풍부하지 못한 학생들의 눈에 들어갈 만한 식당이 어디 있겠는가? 약 20-30여 군데의 식당을 훔쳐보면서 들어간 곳은 7-8유로 가격대의 식당. 부드러운 인상의 주인과 눈을 맞추면서 볶은밥 같은 것을 시켰다. 서로 다른 음식을 시켜 나눠먹어보기로 하고... 유럽에 와서 한가지 가장 불편했던 점은 식당에 들어와 물을 제대로 안심하고 먹을수 없는 점이다. 사 먹어야하고 그러자니 가격이 웬만한 와인값 이상이라서 결국엔 맥주나 와인을 시키고 마는 것이다. 왜 같은 값이고 그렇게 목마르면 물을 시켜먹지 술을 시키냐고? 글쎄 누가 아니래나 그게 맘같지 않다는 것이 함심한 노릇인 것이다. 우리의 습관적 의식에 있어 물을 돈주고 사먹기엔 너무나 아까워하는 알뜰함에 그 원인이 있다고 밖엔 설명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싼 식당을 찾는데 성공했다면서 서로 시킨 음식에 대한 품평회를 나누면서 오래간만의 화목함을 만끽했다.식사 후 파두공연을 보기위해 지도를 쳐다보다가 그 모양새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주인집 딸에게 슬며시 도움을 청하니 자기가 근처에 있는 파두 레스토랑(Fado Restaurant)을 안다며 친절히 가는 길을 아르켜 줬다. 감사를 표시하고 식당 문을 나서 그아가씨가 아르켜 준 길을 따라 내려가니 역시 길치인 내게 그 곳이 선뜻 나서 줄 리가 만무했다. 잠시간의 헤메임을 가진 후 버스정류장에 도착해서 정신을 차리려는 순간 맞은 편 골목에서 한무리의 사람들이 왁자지껄하며 나오는 폼이 뭔가가 있을 법한 느낌으로 희망섞인 기대감을 안고 설설 기어가보니 역시 파두레스토랑이었다. 평일이라서 자리도 넉넉한 게 가격도 스페인보담은 세지 않아서 만족할 만 했다. 동의를 얻고(동의라기보담은 고마워 함을 동반한 일방적인 리드였음) 자리에 앉으니 말로만 듣던 파두의 분위기가 몸주변으로 몰려오는 듯했다. 포르투갈 전통민요‘Fado'란 ’운명‘의 뜻을 가진 라틴어. 기원으로는 브라질 18C 토속음악에 식민지 흑인음악이 합쳐져 포르투갈로 넘어 온 선원들이 퍼뜨린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리고 가사나 멜로디는 따나간 사랑이나 향수를 그리는 애조띤 것이 대부분이다. (여기서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고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그래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갈등관계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갈등관계로 이전된 것이다.) 리스본에서는 파디스따(Fadista:검은 망토를 걸친 여가수)가 반주자의 포르투갈 전통 기타반주에 맞춰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고 코임브라(Coimbra:대학도시)의 Fado는 교복입은 여러 남학생들이 각자의 기타반주에 맞춰 부른다고 한다. 시간은 오후 9시가 다 되어가고... 각자 맥주를 시켜 놓고 있으려니 우리들 뒷자리로 검은 옷을 입은 아가씨 3명이 앉는다. 여가수들이다. 곧이어 기타를 든 2명의 남자가 나와 반주를 넣고 1명의 여가수가 나가 노래를 시작하니 기분이 아리하다. 대단히 부드러운 음악이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들었던 플라맹꼬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학생들도 그 분위기에 취한 듯 맥주가 연신 줄어든다. 3명의 여가수가 노래를 끝내자 아까 우리를 안내했던 남자가 무대로 올라가 예의 그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한다. 이런...이 남자도 가수 일줄이야! 뒤에 물으니 원래 가수였는데 돈을 벌어 이 집의 주인이 되었단다. 2시간쯤 지났는가? 잠시간의 휴식시간에 잽싸게 돌아가 여가수들과 사진을 찍고는 주인과 또 한 장을 찍었다. 학생들이 숙기가 없는 바람에 직접 나서 기념사진을 찍어주느라고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의도하지않게 주인장의 CD를 20유로나 주고 구입하게 되었다. 그 놈의 술기운 땜에...쩝!!! 하지만 입장료를 20유로라고 했지만 그 날은 평일이라서 그런지 계산은 먹은 것만큼만 받았다. 계산해보니 각자 맥주 1병에 두병 더 시켰었나??? 1인당 10유로가 약간 넘었던 것 같았다. 학생들은 돌아오는 길에 이런 경험을 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연신 악수를 한다. 하지만 이런 정보는 기본적인 것이 아닌가??? 아님 각자 취향의 차이 때문인 것 같다.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메뚜루: Metro)을 탔다. 편도 1.25유로 지불
7월 24일(목)
아침에 일찍 일어나 짐을 챙겼다. 이 친구들은 하루 더 있겠다고 좋은 방 값싸게 구하려고 주인장과 협상하다가 결국 미적미적하는 사이에 방을 놓치고 역으로 가서 라커에 짐을 맡겼다. 우선 지하철 역인 Cais do Sodre역으로 가서 까스까이스(Cascais)행 열차(9.8유로)를 탔다. 유레일 패스로 무료승차가 가능했지만 나는 Flexible Pass라서 현금 주고 타고 말았다. 아끄이.... Flexible Pass가 불편한 것이 이런 경우다. 기차를 타고 가다보니 차창으로 비추이는 해변이 정말 아름답다. 특히 물이 맑고 색깔이 정말 시퍼렇다. 잠시 후 고개를 들어보니 좌측으로 벨렝(Belem) 지구의 흰색 사각형의 아름다운 벨렝탑(Torre de Belem)과 발견기념비(Padrao dos descobrimentos)가 지나간다. 이 벨렝탑은 16C 초 항구를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마누엘 양식의 탑으로 대항해시절 식미지 개척을 위해 떠나는 항해자들의 자부심이었다고 한다. 이 탑은 직접 보진 못했지만 ‘제로니므스 수도원(Mosteirio dos Jeronimos)’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또한 발견기념비는 1960년 동 엔리께 서거 500주년을 맞아 떼주강변에 세운 기념비라고 한다. 거의 목적지까지 이어지는 해변은 그야말로 ‘환상’그 자체였다. 사람들이 포르투갈에 간다고하니까 그곳은 정말 아릅답다고 한거나 부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그렇거니했던 것이 이젠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시간쯤 가니 종착역이다. 내려서 사람들이 올라가는 곳을 따라가니 잘 지어진 별장들이 늘어서 있는 해변가 길을 걷게 되었다. 워낙 더운 날씨라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개울가 위 다리에 앉아 간식거리를 뜯어먹고 그늘을 즐겼다. 이 곳의 유명한 관광지는 리베이라 해변(Praia da Ribeira)과 긴슈해변(Praia da Guincho)의 중심에 위치한 ‘지옥의 입(Boca do Infermo)'이라고 하는 암초다. 그 곳을 물어보니 여기서 해안도로를 따라 30여분을 걸어야 한단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전거를 빌려 타고 올라가는구나 이해됐다. 한참을 올라가니 검은 색의 바위가 늘어선해변가가 나와 각자의 빼어나다는(?) 포즈로 모델연했다. 그렇게라도 하지않고선 지루함과 더위를 이겨 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독특한 이름은 세찬 파도에 의해 침식된 해안절벽의 동굴로 그 생긴 모양이 마치 괴물의 입처럼 보여 그렇게 부른 모양이다. 사실 가까이 가서 보니 거의 50여미터가 넘는 높이의 직벽으로 된 원통형 동굴로 그 안으로 밀려오는 세찬 파도가 절벽을 치는 소리가 성난 지옥의 사자소리같다고 해서 그렇게 붙여진 이름이었나보다. 들어가지 말라고 쳐 놓은 바리케이트를 의자삼아 그 안의 아슬아슬한 위치에서 각자 또 한번의 사진을 위한 인생을 걸고... 우리는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표정을 뒤로 하고 그 자리를 나섰다. 그렇게 힘들게 온 길을 다시 밟아야 한다. 쩝... 이곳은 예전엔 작은 어촌이었는데 이젠 부자들의 저택과 별장이 즐비한 해변 휴양지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버스정류장으로 내려와 로까 곶(Cabo da Roca)행 버스를 기다려 탔다. 30분쯤 지났나? 피곤한 몸이라서 그런 지 잠깐 조는 사이에 로까 곶에 도착했단다. 내려보니 우선 시원한 바닷바람에 졸리웠던 눈이 번쩍 뜨였다. 땅끝이라서 그런지 마음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이 로까곶은 유럽대륙의 최서단으로 우리나라 쵸코렛 선전에 나온 곳이라고 한다. 한번 본 듯하다. 포르투갈의 국민시인 까몽이스(Camoes)가 욾었던 시구절 “이 곳은 땅이 끝나는 곳 그리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라고 적힌 비석이 있고 해변가 끝에 커다란 하얀 동상이 서 있다. 무엇보다도 가슴에 와 닿는 것은 끝간데 없이 펼쳐진 바다 색깔이었다. 동남아 해변의 아름다움이 연두색 또는 녹색의 연한 물빗깔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부드러움과 따스함에 있다고 할 것이나 이 곳의 물빗깔은 차갑기만한 진청색임에도 불구하고 그 맑음과 청량함은 색다른 감동을 안겨주고 말았다. 절벽 끝으로 난 길을 걸어걸어 해변 막바지까지 다가가니 다른 사람들도 쭈삣쭈삣 우리를 따라 온다. 하여간 애들 앞에서는 숭늉도 못 마신다니까.... 약 한시간 여를 있기로 하고...그 두 남학생들이 포르투갈에 온 것은 순전히 이 로까곶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한시간 이상의 투자를 강력히 원했던 것이다. 주저없이 승낙을 하고 아름다움에 취해 사진을 몇장 박으니 필름이 끝나고 말았다. 한 통을 더 가져올까하다가 그만둔 것이 이런 낭패를 초래하게 될 줄이야! 휴게소에 가서 물어보니 5.5유로를 달랜다. 이런 젠장할..!! 그것도 24장짜리가..... 울며겨자먹기로 한 통을 사고 장전한 후 커피한 잔을 먹으려 자판기에 가니 벌써 여학생과 한명의 남자애가 그 앞에서 쉬고 있었다. 잠시 용변을 보고 나오니 여학생이 공중전화기앞에서 한참 실랑이를 벌인 뒤 점화를 끊고 웃으며 다가온다. 여인 왈 “아버지한테 지갑소매치기 당해서 돈이 없으니 돈을 빨리 부쳐달라고 앙탈을 부리니 아버지는 화를 내고 어머니는 걱정하면서 곧 부쳐주겠다고 했단다. 그래서 앞으로 여행에 필요한 용돈을 더 타게 되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 셋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그게 자기를 부러워하는 걸로 알았던 모양이었다. 잠시 기다려서 신뜨라(Sintra)god 버스를 탔다. 약 30분을 갔는가... 버스는 중세의 숲속으로 시간여행을 하고 있었다. 이 곳은 포르투갈 왕족과 영국의 귀족들에게 사랑을 받아온 산과 숲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마을이다. 여기서 그 유명한 왕궁(Palacio real)과 뻬나궁(Palacio da pena)까지는 셔틀버스(3.5유로)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도착하니 더 이상 차가 올라가지 못하게 막은 페나궁의 입구에서 내려준다.(입장료 3.5유로) 입구로부터 가파른 산길을 20여분 오르?? 울창한 나무에 둘러쌓인 아름다운 성이 눈에 들어온다. 1840년 도나 마리아 2세 여왕의 남편인 페르난두 2세가 16C 수도원의 자리에 왕궁의 재건축을 독일인 Eschwege에게 명해 지어진 궁전이다. 이 궁은 무어, 고딕, 마누엘,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이 모두 혼합되어 있다고 한다. 내부를 들어가려고 하니 우리가 산 표로는 볼 수 없다고 거절당했다. 궁 뒤로 돌아가니 성벽 아래로 온 산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올라가는 내내 안개가 끼어 앞이 안보였지만 한순간 안개와 구름이 걷히면서 리스본 시가와 떼주강, 멀리 대서양의 풍경이 그저 천국이다. 멀리 무어인의 성도 보였다. 한 친구가 자기는 항상 운이 좋다는 이야기를 입에 달고 다녔는데 그 순간도 자기 때문인 줄 알라고 주절거린다. 근데 그 때는 진짜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내려오면서 무어인의 성(왕궁)을 보려고 했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져 포기하고 버스를 기다려 까스까이스로 돌아왔다. 도착하니 무척 배가 고파 역 앞에 있는 중국집으로 가 가장 싼 누들(Noodle)을시켜 먹었는데 대단히 성공적인 만찬이었다. 유럽에서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거나 시켜 먹을 수 있는 음식에 대해 자신이 없을 때 중국음식을 먹으라고 한 말이 기억나 취한 행동이었는데 오늘은 직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의심스러웠던 것은 사실 메뉴에서 우리가 음식과 연계해 알 수 있었던 단어가 ‘Noodle' 그것 하나 뿐이었다. 그냥 운이 좋았던 거지... 리스본에 돌아와 우리는 마드리드행 저녁기차를 기다리고 두 남학생은 하루를 더 머물러 수영을 하고 가겠다했다. 헤어지면서 가능하면 사흘뒤 아침 바르셀로나 역에서 만나기로 하고 우리는 기차에 올랐다. 세 번째 타는 기차라서 그런지 이번엔 자못 의연했다.
7월 25일(금)
이번에도 서로 1.2등석으로 나눠 탔다. 그게 아마 서로 속편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출발하여 스페인 마드리드 차마르틴역에 ......도착, 바로 1시간 30분 내로 아토차역까지 가서 거기서 초고속열차 AVE를 타야하는 것이다. 리스본에 갈 때처럼 2시간여를 연착한다면 이후로 이어지는 모든 코스가 엉망이 되며 모든 예약이 취소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개 유럽에서의 야간열차가 1시간 정도 연착하는 것이 상례인데 이 경우는 그러면 안되는 것이다.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고 자다깨다 하다보니 벌써 날이 밝아온다. 다행히 예정된 시각에 정확히 도착한 것이다. 정말 하느님이보우하사!다. 하지만 내릴 때 표정을 보니 여전히 느긋하다. 그녀말이다. 아우~~ 앞으로 일이 걱정된다. 나 말이다!!! 내리자마자 바로 지하로 내려가 아토차역으로 가니 AvE 전용역사가 따로 있었다. 한참을 걸어갔다. 시간이 남아 휴게실에서 방으로 끼니를 때우고 커피를 한잔하니 기분이 끝내준다. 시간이 되어 전용출구로 나가니 기차표와 여권검사를 같이 한다. 뭔가 다르긴 다르군... 안에 들어가보니 2등석이라도 이건 황홀하다. 널찍하고 깨끗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유럽에서 처음 타보는 초고속열차의 꿈속 드라이브도 잠깐 2시간이 좀 지나자 벌써 세비야(Sevilla)다. 내려서 이곳을 잠깐 관광하고 여기서 ....3시간 후에 일반열차인 BBVA를 타고 그라나다(Granada)로 가야한다. 일단 내려 코인락(Coin Locker)에 짐을 맡기고 버스정류장을 찾으니 도대체 어디가 어딘지를 모르겠다. 더욱더 성질을 건드리는 건 날씨가 장난이 아니게 더운 것 뿐만 아니라 둘이 헤매도 모자랄 판에 이 여학생은 정신을 어디다 놓고 다니는 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는 것 같다. 더군다나 짜증도 나고 답답해서 그녀에게 헤매지 말고 버스정류장이 어디냐고 알아보랬더니 겨우 한 사람을 붙잡고서는 한다는 소리가 지도 한 장을 펴보이고서는 “Where am I?"라고 외치는 것이다. “Where is the Busstation?" 이라고 해도 알아듣기 힘든 판에...말이다. 치받쳐 오르는 것을 눌러 참고 몇몇에게 물어보니 역사 밖으로 나가 위쪽으로 가면 있다고 한다. 겨우 정류장을 찾아서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를 물으니 서로가 말이 다르다. 지친 것도 있고 해서 당근 그냥 탔다.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의 배경이 되는 세비야(Sevilla)는 마드리드에서 남서쪽으로 5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 내 세비야 주(州)의 주도로, 스페인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이다. 도시를 북에서 남으로 가로지르는 과달키비르강(Guadalquivir)의 상류 연안에 자리잡은 이 곳에는 오늘날 70만명에 가까운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과거에 이 곳 세비야 항은 스페인과 아메리카 대륙 간 무역거래에 있어 매우 중요한 기지 역할을 했다고 한다. 세비야의 옛이름은 히스팔리스(Hispalis)로, 처음 이 곳에 정착한 것은 타르테시안(Tartessian)인들이었다고 한다. 기원전 207년경, 로마인들이 세비야에 들어오면서 이곳은 이후 7세기까지 로마제국의 서부 지중해 거점도시가 되었고 서기 711년부터 1248년까지 계속된 무어(Moor)의 지배는 세비야를 비롯한 전 안달루시아 지방에 오늘날까지 지워지지 않는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7세기에 Velazquez, Murillo and Valdes Leal와 같은 화가를 비롯해 조각가인 Martinez Montanes가 이 시기 세비야 출신이고 또한 돈 후앙의 출생지로도 유명한 이 곳은 스페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투우와 플라멩고의 본고장이라고 한다. 3시간 동안만 허락된 관광이라서 그녀의 조건에 얽매이지 않고 그냥 내 뜻대로 끌고 다니기로 했다. 우선 시내로 들어가서 대사원(Catedral)을 들렀다. 사원을 빙 둘러 돌아가니 그 웅장한 자태가 점점 눈앞에 들어왔다. 들어가고 싶은 마음(입장료 6.5유로)을 꾹 눌러참고 광장에서 사원을 배경으로 증명사진 한장을 찍었다. 이 곳은 스페인이 500여년간을 지배해온 이슬람 교도들을 물리친 기념으로 이슬람 사원 자리에 1401년에 시작, 1511년에 완성한 폭 116m, 안 길이 76m의 스페인 최대의 사원으로 유럽에서는 로마 산 피에트로 대성당과 런던의 세인트 폴 성당 다음으로 큰 규모다. 내부는 에워싸듯 예배당이 들어서 있고 그 중에도 세비야의 수호신인 성모상이 안치된 왕실 예배당 Capilla Real은 특히나 유명하며 무리요의 <성모수태>가 있는 회의실과 고야, 수르바란의 그림이 있는 성배실, 무리요의 대표작 <산 안토니오의 환상>이 그려진 산 안토니오 예배당 등 유명 작품들이 많다고 한다. 특히 오른쪽 문인 산 크리스토발 문을 들어서면 아라곤 등 4명의 스페인 국왕이 받들고 있는 콜럼버스의 묘가 있다고 한다. 마음이 급해져 이어 들른 곳은 알카사르였다. 사원보다는 알카사르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과감히 입장료 5유로(학생은 무료)를 내고 들어갔다. 이 알카사르(Alcarzar)는 지나번에 보았던 것과는 다르게 아름다운 정원형 저택에 가까웠다. 이 곳은 대사원 건너편에 있는 성으로 8세기경에 만들어졌으나 몇 번의 개축 끝에 현재의 모습은 14세기 페드로 1세가 완성시킨 것이라 한다. 이 성 안에서 가장 화려한 곳은 '대사의 방(Salon de Embajadores)' 으로 아라베스크 모양의 장식을 한 벽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하지만 내 마음을 끄는 것은 성이라기 보다는 별장에 가까운 여유있는 배치의 정원과 주택구조였다. 나오는 길에 지나게 된 곳은 유대인 거리인 산타크루스 거리(Barrio de Santa Cruz)로 복잡하게 뒤얽힌 골목길에 흰벽의 집들이 서 있고 레스토랑, 바, 호텔 등이 들어서 있어 안달루시아의 정취를 물씬 풍기게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씨에스타 시간과 겹쳐 황량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역에 돌아와 짐을 찾고 기차를 기다리니 아직도 30분여가 남았다. 내가 봐도 참 알뜰하게 관광한 것 같다. ......가 되어 그라나다에 도착하니 벌써 해가 서산에 기운다. 일단 5시로 예약한 것은 날라간 것 같고 오늘 밤 늦게라도 볼 수 있는가가 관건이었다.시간 때문에 일단 역에서 빠져나와 Taxi를 타고 알함브라(Alhambra) 궁전 입구에 도착해서 숙소를 잡기로 했다. 그런데 시절이 그래서 그런지 1인 1실은 고사하고 2인 1실방조차 없는 것이다. 약 30분여를 헤매고 난 뒤 겨우 2인 1실 30유로짜릴 구해 짐을 풀었다. 유럽에 와서 여성과 첫 동거를 한 셈이다. 샤워 후 지갑가져갈까 물으니 자신있게 괜찮을 거라고 해서 놓고 방을 나섰다. 당시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일단 입구 스페인식 패스트푸드점에서 빵과 콜라로 저녁식사를 마치고 셔틀버스를 타고 궁전으로 올라갔다. 종점에 내리니 사람들이 한산해 보였다. 매표소에 가서 예약번호를 알리고 들어갈 수 있는지 물어보니 이건 완강하다. 이미 시간이 지난 상황은 인정할 수 없고 물려 줄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야간관광( 개관:09:00~18:00(야간 입장, 여름철, 화, 수, 목, 토 22:00~01:00))이 있으니까 생각이 있으면 새로 표를 구입해서 들어가라는 것이다. 이방인데다가 언어도 안되고 시간도 없는 터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다가 남은 시간은 20여분. 그마저 돈도 없다. 이런 때 뭔 생각이었는 지갑도 안가져 온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될 지도 모른다고 예상을 했으면서도 말이다. 아마 그순간에 더위를 먹었었나 보다. 허탈한 마음에 벤취에 주저앉으니 원죄를 느꼈는 지 그녀가 내려 갔다올까요?하고 묻는다. 평소 같았으면 내가 내려갔겠지만 지금 이순간은 그냥 갔다오라고 했다. 어이가 없어 밉기조차도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내려간 후 다시 매표소에 가서 천천히 물으니 뒤에 있던 스페인 사람이 안돼 보였던지 도와주었다. 한참을 나와 직원 사이에서 통역을하더니 내게 고개를 쭈삣 세우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It's your pity."란다. 표를 새로 구입해서 들어가라는 뜻이다. 고맙다고 한 뒤 그녀를 기다려 표를 사서 궁전으로 들어갔다. 예약료 1유로 포함 2인 요금인 17유로를 한순간에 날린 것이다. 현장에 와서 샀어도 될 일이었는데 내가 급하게 보채는 바람에 그리 된 것이고 결정적인 것은 기차표 날짜를 잘못 계산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다. 그래서 그녀를 탓해봤자 내 얼굴에 침뱉기일 뿐인 것이다. 다만 동행자로서의 자세에 불만이 있는 것이다. 입구에 들어서니 잘 차려입은 정장차림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면서 왼쪽 길로 대거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인가 자세히 보니 그 안에 공연장이 있고 거기서 플라맹꼬 공연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실소를 감추지 못하고 궁전을 향해 올라가기 정겨운 숲길이 나왔다. 밤에 구경하는 것도 시원한데다가 운치가 있어 좋았다. 더군다나 연인사이라면 더욱 끝내 줬겠다. 이 알함브라(Alhambra)궁전은 스페인 최후의 이슬람 왕국인 나사리 왕조의 무하마드 1세 알 갈리브가 고토회복의 꿈을 안고 13세기 후반에 시작하여 14세기에 완성하였으나 보아브딜 왕 때 이르러 스페인의 국토회복 운동에 굴복하여 평화적으로 이 성을 넘겨주고 아프리카로 떠났다고 한다. 이 때가 1492년 1월 2일, 바로 콜롬부스의 신대륙 발견이 있던 해이다. 이로써 스페인은 711년부터 시작된 약 8세기 간의 이슬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 근대 스페인의 탄생을 보게 된 것이다. ‘붉은 성’이란 뜻의 이 궁전은 성벽이 2km이고 길이가 740m, 넓이가 220평방미터인 성이다. 나사리 왕조의 번영기였던 14세기에 지어진 이 건물은 주로 세 개의 정원, 즉 마추카의 정원, 코마레스의 정원, 그리고 라이온의 정원을 기본축으로 하여 설계된 정원 형식의 건축물이다. 내부는 왕궁, 칼로스 5세의 궁전, 헤네라리페, 알카사바로 구성되어 있다. 이 l궁전은 18세기 한때 황폐화되기도 하였으나, 19세기 이후에 복원하여 변화가 많은 아치, 섬세한 기둥, 벽면 장식 등 모두가 정교하고 치밀한 무데하르 양식의 이슬람 미술의 정점을 형성하고 있다 약 500여년간 유럽을 지배하던 무어인들의 최후 저지선으로 고토수복의 꿈을 안고 이 궁전을 짓기 시작하여 아이러니칼하게도 완성 후에 가톨릭교도들인 프랑스인들에게 빼앗기고 지중해를 넘어 아프리카로 쫒겨난 것이다. 이 이슬람 문화의 총화인 성의 위대함은 자기 종교에 대한 편협한 집착만 간직한 가톨릭 교도들이 이교도들에게 보인 예외없는 파괴와 살육의 본성이 고토 수복후 이 궁전에 대해서도 여지없이 적용되었지만 자신의 눈으로 봐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가공할 만한 미적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아주 일부분만 개조한 뒤 나머지는 그대로 놔둔 채 자신들의 궁전으로 자랑스럽게 사용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
궁전에 들어서기 전 오른 쪽에 올라가 보니 나무와 분수가 아름답게 배치된 정원이 나왔다. 이것은 헤네릴리페 정원(El Generalife)이라고 하는데 불빛이 약하다보니 그 아름다운 정경이 눈에 다 들어오지는 않았다. 낮에 봄직한 곳이었다. 이 정원은 그라나다 성주가 14세기 초에 여름 별장으로 만든 곳으로, 궁전의 동쪽에 있으며, 입구에서부터 이어지는 사이프러스 나무에 둘러싸인 긴 통로가 인상적이다. 이곳의 분수와 주위의 흐르는 물은 네바다 산맥에서 녹아 내리는 물이라고 한다. 갖가지 모양으로 조형된 나무들과 정원 배치는 한여름에도 더위를 식혀주기에 충분할 정도다. 그 통로를 따라 들어가니 넓은 공간에 지어진 커다란 건축물이 보였다. 사실 이 건물이 알함브라궁전이리라 생각하고는 무척 실망을 했었다. 하지만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궁전을볼 수 있다는 말에 안심을 하고 이 건물을 매경으로 증명사진을 찍었다. 이 건물은 의도적으로 회교 건축물에 대항하기 위하여 16세기 무렵 카를로스 5세가 세웠고 그래서 일명 카를로스 5세 궁전(Palacio de Caros V)이라고도 한단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르네상스 양식으로 1층은 매년 이곳에서 열리는 국제 음악제의 무대가 되기도 한단다. 2층은 미술관 겸 박물관으로서 여러 유품과 회화작품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 미술관은 2개가 있다고 하는데, 알함브라 궁전 부지 안에서 발굴한 것과 시내의 저택을 허물 때 발견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스페인/이슬람 미술관과, 산체스 코탄 및 아론소 카노 등 그라나다파로 불리는 예술가들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는 베야스 미술관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높이 1.36m, 원둘레 2.25m나 되는 14세기 알함브라 항아리라고 한다. 하지만 늦은 시간 관계로 건물의 외양만 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야간 관광의 맹점이다. 다음으로 들른 곳은 알카사바(Alcazaba), 이 궁전의 서쪽에 있는 가장 오래된 ‘베라의 탑’에 오르면, 네바다의 봉우리, 들과 그라나다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저녁이라 그런지 야경이 아름다웠다. 많은 사람들이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연신 사진을 찍어대고 있었다. 성채의 유적에 들어가기 전 "오직 신만이 승리자다" 라는 문구가 새겨진 문이 이채로왔다. 이어서 왕궁안으로 들어서려니 티켓을 보자고 한다. 이윽고 그 불가사의한 희대의 예술품인 알함브라 궁전에 들어 온 것이다. 먼저 눈에 띈 곳은 왕궁(palacio real). 많은 사람들이 그룹지어 각국 언어로 가이드들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아가씨는 벌써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잘됐다 싶어 나는 영어가이드팀에 끼어 돌아다니기로 했다. 12마리의 사자가 떠받치는 분수로 인해 라이온 궁으로 불리는 이곳은 과거 왕가 가정생활의 중심이 됐던 곳이다. 아벤세라헤스의 방(Sala de los Reyees), 두 자매의 방(Sala de los dos Hermanas), 라이온의 안마당(Patio de los leonos) 등이 있으며 이슬람 특유의 섬세한 아라베스크의 무늬 장식으로, 이곳에서 가장 화려한 조각 예술을 감상할 수 있었다. 특히 지붕 안쪽의 돔과 벽과 기둥이 만나는 곳의 박쥐 집처럼 생긴 부조는 가톨릭계 건축물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양으로 조명과 함께 어우러져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또한 가운데의 분수대와 각방을 있는 물꼬나 각방 천정의 중심과 안쪽 원형 문양의 타일 바닥의 정점이 이어져 바깥의 정원과 이어낸 물길이 과학적인 상식이 뛰어났던 무어인들의 인상적인 모습이 어른거리는 것 같아 황홀할 지경이었다. 한시간 이상이 지나고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질 쯤에서야 정신을 차리고 좌우를 살펴보니 역시 그녀가 없다. 한참을 찾아 정신없이 헤매는그녀를 낚아채고 나오는 길이 그저 행복했다. 이 아름다움이란 바닥으로부터 벽면 그리고 천정의 끝까지 빈틈없이 이어지는 오밀조밀한 문양과 조각과 부조들의 조화!!! 한마디로 천상의 기억으로밖엔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완벽함이 건축과 미술에 무지몽매한 이 인간에게도 이러한 감동과 환희를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교교한 달빛을 온몸으로 흠뻑 받고는 완전한 숲의 요정으로 화해 인간세계로 내려오고 말았다. 하지만 역시 인간세계는 인간세계... 밤 늦도록 스페인을 떠난 후 유럽여행을 계획하고 남은 돈을 계산하는 그녀의 부시럭에 1시간여를 참다 못해 버럭 소리를 지르고 불을 끄게 했다. 남녀 혼숙의 긴장감보담은 말 안듣는 조카아이 데리고 온 느낌이다. 하지만 오늘은 너무나 행복하다. 7월 26일(토)
아침에 일어나 대충 씻고 짐 챙겨 나서니 아직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혹시나하고 이른 아침에 정원쪽이나다시 볼 수 있을까 해서 올라가보니 우리의 앞길을 막는 손이 있어 인상한번 더럽게 쓰고는 내려오고 말았다. 내려오는 길에선 바로 시내를 나오기 위해 다른 길로 나오다보니 빽빽한 주택가 골목길을 지나게 되었다. 한참을 내려오다보니 그제서야 시내 큰 도로가 보였다. 막 내려서려는 참에 눈에 보인 것은 카페같은 건물벽에 그려진 멋진 Grapity!!! 사진 한방 찍어대곤 시내로 들어갔다. 이 그라나다(Granada)란 곳은 에스파냐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 그라나다주의 주도로, 옛 그라나다 왕국의 수도였다.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북쪽과 과달키비르강의 지류 헤닐 강과 다르로 강이 합류하는 높이 670m지점에 있는 이 곳은, 711년경부터 스페인을 약 8세기 동안 다스렸던 이슬람 계통의 나사리 왕국의 최후의 거점지였다고 하고1492년 그리스도 교도의 국토회복 운동이 완료될 때까지 250여년 동안 그라나다는 이슬람 교도에 의한 이베리아 반도 지배의 마지막 거점으로 번영했었다고 한다. 시내에는 3개의 언덕이 있는데, 멀리 보이는 알바이신 언덕은 이슬람교도들의 마지막 도피처로서 오밀조밀하고 작은 골목길이 인상적이다. 또 사비카 언덕은 알함브라 궁전이 있는 곳으로 일명 알함브라 언덕이라고 불리우며 우리가 내려온 길이다. 이 언덕 중간에 있는 산 니콜라스 성당 앞은 그라나다에서 알함브라 궁전의 전체적인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끝으로 사크로몬테 언덕은 동굴 속에서 사는 집시들로 유명한 곳이다, 동굴 속을 주점으로 개조하여 관광객을 상대로 강렬한 리듬의 플라멩고를 보여준다고 한다. 시내 모 빵집에서 빵과 커피를 시켜 먹고 왕실 예배당(Capilla Real:개관 3~9월(10:30~13:00, 17:00~19:00), 10~2월(10:30~13:00, 15:00~18:00), 일요일 아침은 무료)을 갔다. 이 사원은 시내의 중심지에 있어 각종 민속공예품 가게와 레스토랑, 기타 잡화상들이 몰려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그라나다에서 이슬람 교도들을 몰아냄으로써 스페인 전성기로서의 발판을 다진 페르난도 공과 이사벨 여왕의 묘가 지하에 보존되어 있다. 이 건물의 건축양식은 르네상스식과 고딕을 절충한 것으로 왕실 예배당과 화려한 장식을 한 황금색 울타리가 있는 왕의 묘소가 눈에 띈다. 또 그들의 딸인 후아나와 남편 펠리페, 왕자 비겔의 묘도 볼 수 있다. 나오는 길에 몇가지 선물을 가볍게 사고 다음 관?ㅑ嗤? 물어 가려고하다가 필설로 이루 말할 수 없는 더위에 까무라쳐지는 바람에 다시 사원으로 들어가 담벼락 그늘에 기대 눕고 말았다. 프랑스 민박집에서 들은 스페인 남부지역의 더위에 관한 이야기가 떠 올랐다. 한 학생이 바르셀로나에서 버거킹에서 식사를 하고 문을 열고 나섰다가 순간적으로 밀려오는 열풍에 뒤로 까무러쳤다는 이야기인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때 온도가 49도였다는 이야기다. 믿거나말거나지만 오늘의 온도는 43도였다. 한참을 비몽사몽하니 어느덧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일어나서 시계를 보니 6시가 넘었다. 하지만 더위에 놀란 가슴을 진정치 못하고 다른 곳은 엄두를 못내고 주변 시장을 들락날락하고 말았다. 이 곳은 실크로드에서 본 바자르와 비슷한 모습의 시장인데 골목골목으로 많은 물건들을 내다 팔고 있었다. 나름대로 짭짤한 재미를 느끼며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저녁을 먹고 기차역으로 갔다. 이젠 스페인의 마지막 도시, 바르셀로나다. 예상 일정의 1/3을 돌게 된 것 같다. 아비뇽이 남았지만.... 몇군데 도시를 돌다보니 관광과 사진에 대해서는 요령이 붙는 것 같다. 실제로 유럽을 오게되는 경우 알려진 관광지를 오갈 때 묘한 갈등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이미 알려진지역의관광지라는 것이 굳이 눈으로 확인치 않아도 알 수 있는 곳이 대부분인데 짧은 일정에 비싼 비용을 생각하면 당연히 SKIP하고 다시 찾아오기 힘든 곳이나 자기에게 필요한 곳을 다녀봄이 당연지사이나 돌아가서 꽂혀지는 질문들이 “너, 거기거기 갔다오니 어떻든?”이고 여기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 “어떻게 거길 가고도 그곳을 못가봤느냐?”하는 질책성 투정이 눈에 뻔하다. 이런 것이 여행자의 딜렘마인 것이다. 그래서 찾은 방법이 하루 이상을 체류할 경우 첫날(당일이 될 수도 있다.)은 알려진 곳을 주야장창, 초고속으로 들러보고(내 경우는 다른 사람들보다 거의 1.5배내지 2배를 돌아다녔다.) 다음 날에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들러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일어나 발품을 더 팔고 더 속도를 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진의 문제인데 대부분 내부 촬영이 금지되어 있지만 플래쉬에 국한되어 있고 플래쉬 안터지는 디지털카메라는 허용되어 내 가져온 구식 카메라로는 필요한 장면을 확보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알려진 관광지에 대한 사진은 굳이 내가 나오지 않는 장면 같은 경우 서툰 실력으로 필름을 낭비하지 말고 잘 찍어 놓은 엽서를 사면 되는 일이다. 단지 잘 안 알려진 곳이나 시골같은 경우는 엽서의 질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자신의 사진으로 커버할 수 밖엔 없다. 이 경우 디지털카메라로 찍어두게 되면 비용면이나 수량의 면 그리고 편집의 간편성, 관광지 내부 촬영의 잇점 등으로 필름카메라보다 훨씬 유리하다. 더구나 수량이 찰 경우는 미박집이나 PC방에 가서 CD로 출력, 저장해두면 되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도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7월 27일(일)
새벽에 일어나 바르셀로나(Barcellona)로 도착하는 기차의 차장을 건네 보며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스페인의 들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약간은 황량한 듯한 붉은 땅거미와 그 위로 솜사탕처럼 몽실 피어오른 푸른 안짱다리 나무들... 그것이 포도나무이든 .....든 아무래도 좋았다. 삶의 한구석에서 만나게 이국의 흙냄새와 공기,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언제 우리가 이런 황홀한 시간을 보낼 것인가? 이런 저런 생각 속에 기차는 어느덧 멈춰 섰고 계륵으로만ㄴ 여겨졌던 아가씨도 줄 따라 플랫폼을 내려섰다.
이베리아반도 북동쪽과 지중해안에 자리 잡은 바르셀로나는 마드리드 다음 가는 스페인 제2의 대도시이다.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의 이베리아 반도의 북동부 지중해의 까딸로냐 지방의 수도이기도 한데, 바르셀로나에서는 까딸로니아에서 많이 쓰이는 까딸란오와 스페인어 두 가지의 공식언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온난한 기후를 나타낸다. 1469년에 아라곤과 카스틸랴의 통일로 지방도시가 되었으나, 고유의 카탈루냐어를 가지고 있는데다가 50년에 창립된 대학을 중심으로 한 에스파냐의 선진지역으로서, 카탈루냐 문화에 대한 긍지와 진보적 시민자치의 전통 및 강력한 상공업을 기반으로 번번이 독립을 요구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19세기 말부터는 에스파냐의 사회주의 및 무정부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스페인하면 에스빠냐, 까딸로냐, 바스크라고 하는 3개 인종의 연합국가로써 인종적인 갈등이 상존하고 있는 곳이다. 따라서 20세기 초에 독재자 프랑코가 바스크족의 분리독립운동을 분쇄했고 에스파냐지역과 까짤루냐지역의 갈등은 지금까지 국기인 축구에서조차 레알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팀과의 숙명적인 대결로 이어진다고 한다. 에스파냐지역의 중심지가 마드리드라고 한다면 그 까딸로냐 지역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바르셀로나다. 실제로 마드리드보다 크고 번성하다.
도착 후 역사를 뒤지니 과연 그 남학생들이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오늘 하루를 같이 행동키로 하고 코인락에 짐을 싣고 간단히 배를 채운 뒤 본격적인 구보관광을 나갔다. 뭐 그렇다. 큰 것을 얻게 되면 작은 것쯤이야 포기해도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아가씨...남자가 셋이나 되니깐 이젠 당연히 들어주겠지 하고 아예 자기 짐을 안 든다. 남학생들이 착해서 아무 내색 없이 짐을 들어준다. 난 정말 못 들겠더라고... 화가 나서.... 우선 도착한 곳은 길게 뻗은 까딸루냐 광장으로부터 시작되는 람플라스 거리(Las Ramplas). 이 곳은 북쪽의 카탈루냐 광장에서 남쪽 항구와 가까운 파우 광장까지 약 1㎞에 달하는 거리로서, 원래는 작은 시내가 흐르는 곳이었다고 한다. 중앙의 산책로에는 미로가 디자인한 모자이크가 바닥에 깔려 있고 주변에는 샘물을 마시면 바르셀로나에 매료되어 이곳에서 살게 된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카날레탄스라는 샘물과 장식 미술관, 1877년에 개관한 신고전주의 건물로 바르셀로나 최고의 오페라 하우스인 리세오 극장이 있다. 거리가 끝나는 파우 광장에 있는 콜럼버스 탑 꼭대기에 오르면 바르셀로나 항과 람블라스 거리를 한눈에 보인다 마드리드와는 다르게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씨에스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길거리 공연도 지나가는 사람들을 상대로 구전을 요구하며 매직, 퍼포먼스, 노래, 연주. 댄스, 서커스, 인형극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거기에 수많은 포장마차와 보따리 장사들까지 어우러져 마치 거대한 바자르같았다. 살아있음을 만끽할 수 있는 분위기다. 이어 점심시간이 되면 시민들이 이 광장에 모여 동그란 원을 그리며 전통 까딸로냐 춤을 춘다고 하는 왕의 광장(Placa del Rei)을 찾아 고딕지구를 헤맸다. 한 참을 헤맨 뒤에야 그곳엘 가보니 12:10분이 넘었는데도 사람들이 없는 것이었다. “아, 그새 끝났구나!” 하고 실망스런 눈빛을 교환하고 돌아서서 해변가로 가려는 순간 음악소리와 함께 그 춤이 시작된 것이다. 약 10여명의 사람들이 한조가 되어 스텝을 밟으며 원을 돌다가 방향을 바꾸고 안으로 좁혔다가 바깥쪽으로 넓히는 동작을 반복하는 춤이다. 음악소리와 함께 주변의 박수소리와 합쳐지니 내 마음도 솜털같이 날아오르는 듯했다. 이곳은 고딕 지구의 중심지로, 광장 안쪽의 14계단은 콜럼버스가 첫 항해를 마치고 돌아와서 이사벨 여왕을 알현한 곳이라고 한다. 14~ 15세기경 이 곳은 아라곤 왕가의 부지였으나, 현재는 산타아게다 예배당과 틴넬의 방, 그리고 아라곤 왕국의 문서관 등이 남아 보관되고 있는 곳이다. 이어 람블라스 거리로 다시 나와 남쪽 끝 레이알 광장(Raial)을 지나 바르셀로네타(Barcelloneta) 해변으로 갔다. 학생들이 난 물을 좋아하진 않지만 워낙 강렬하게 원하던 터라 가게 된 곳이었다. 시내에 수영을 할 수 있는 해변이 있다니... 물에 못 들어가니 나는 어쩔 수 없이 해변가 노천가페에서 자리를 잡고 커피를 시켜 먹으며 짐 보관소 역할을 자처했다. 원래부터 수영을 못했지만 항암치료 이후 그 후유증으로 자외선을 쬐지 못하게 된 것 때문도 있다. 이곳은 시내에 있는 유명한 해변으로 물이 깨끗하진 않지만 시내에 가깝다는 이유로 항상 사람들이 북적댄다. 스페인의 덥고 후덕진 여름 날씨에 해가 워낙 강렬하기 때문에 해변에 가질 않고는 못 배기는 유럽인들 때문이다. 토플리스 해변은 아니지만 20-30는 토플리스다. 하지만 그런 때문의 가슴설렘보담은 그렇게 쭉 빠진 몸매의 여인네들이 별로 없고 있다해도 대부분 여인네들의 가슴이 동양인에 비해 너무 풍만하다보니 아무런 느낌을 가질 수도 없었다. 그보단 오히려 내 앞자리에 앉은 까무잡잡한 동남아 지역 출신인 듯한 아까씨가 더 매력적이었다. 거의 완벽한 몸매와 매력적인 마스크가 보기에 좋았다. 몇 마디 물어보니 자신은 유학생인데 프랑스에서 놀러왔단다. 시간이 좀 지나니 남자친구인듯한 학생이 좀 질투하는 것 같아 몸을 돌리고 말았다. 짜식~~~ 속 좁기는.... 조금 있으려니 학생들이 왔다.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이 물이 생각보다 더럽다고 한다. 얼른 몸을 씻고 시내로 다시 나와 가우디가 마무리 공사 중인 그 유명한 바르셀로나 대사원으로 향했다. 내일 아침 차로 프랑스 몽필리에로 가서 아비뇽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관광시간이 별로 없다. 더군다나 오늘 밤 8시까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분수쇼를 보러 가야한다. 가우디 건축물도 유명하지만 난 분수쇼때문에 바르셀로나에 왔거든... 이 사원은 원래 1298년에 착공하여, 150년만인 1448년에 완공되었다. 대사원의 폭은 40m, 길이는 93m, 첨탑의 높이가 70m이며 3개의 출입문을 가지고 있으며 정면의 현관은 1408년의 설계도에 의해 500여년만인 1913년에 완성된 것이다. 내부에 보관된 예술품으로는 15C의 조각가 바르톨로메 베르메호의 피에타가 유명하며, 예배당마다 유명한 성인들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이곳에 도착하여서는 우리는 우선 대사원의 육중함과 규모 그리고 그 형상에 압도를 당했다. 겅은 빛이 주류를 이룬 괴이한 형상의 모양새를 지닌 성당의 외관은 마치 SF영화에 나오는 외계인의 우주기지같은 공포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저 잔디밭에 주저앉아 사진을 찍고 한번보고 누웠다가 일어나 사진 한번 찍고들 했다. 벌어진 입이 닫힐 때쯤 되서 우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끊임없는 고행 길을 나섰다. 그런데....이번 길은 정말 고행길이었다. 구엘공원(Parc Guel)! 정말 차 한번 타고 갔으면 소원이 없을 정도로 개략 한 시간을 올라간 경사길이었다. 보기도 전에 이미 진을 다 빼놓은 거나 마찬가지인 패잔병같은 우리들 눈앞에 드디어 그 모습을 나타낸 구엘공원이었다. 이 곳은 영국의 전원도시를 동경했던 구엘이 투자하여 가우디의 설계로 만들어진 공원으로 지중해를 내려다보는 언덕위에 세워져 있다. 착공 초기에는 미래의 이상적인 전원도시로 설계 되었지만 건설도중 자금난으로 규모를 축소하여 건설, 1922년 이후 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공원의 입구에 들어서 약 10여분을 올라가니 바위 위에 조성한 휴게 공간에서 한 사람이 바이올린으로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 분위기가 너무 좋아 한참동안을 앉아 있었다. 그리고 공원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니 바르셀로나 시의 전경이 다 보이는 듯 했다. 강한 바람을 느끼며 내려온 막바지 길에는 가우디의 혼이 담긴 집과 건조물들이 모여 있는 출구쪽 전시장이었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밀라 저택 (Casa Mila)인데 이것은 1905년 가우디의 설계로 5년 동안에 걸쳐 완성한 저택으로, 가우디가 자신의 설계 이미지를 작공들에게 석고로 만들어 설명을 하여 그대로 조각을 하게 하는 등 온갖 정성을 쏟은 건축물이다. 벽면의 소재는 특이하게 석회암인데, 지금은 약간 빛바랬지만 완성 당시에는 지붕의 흰 타일과 함게 저택 전체가 백색이었다고 한다. 까끌까끌한 하얀 벽면은 물보라가 이는 바다를 연상케 하고, 베란다의 손잡이는 파도 속에 떠 있는 검은 해조를 연상케 하는, 시적인 이미지를 주는 가우디의 건축 예술품이다.여러 가지 색깔이 선명한 타일로 장식된 외관과, 공원 위쪽으로 늘어선 86개의 기둥 및 천장의 모자이크는 가우디의 건축 이상을 느낄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예상했던 것보다는 많이 실망하고 나온 것 같았다. 우리는 공원을 내려와 바르셀로나 역에서 만나기로하고 찢어졌다. 서로가 가고자 하는 곳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식사를 하고 음료를 마시며 쉬기로 했다. 이 친구가 오늘은 하루종일 관광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난번 포르투갈에서 부모님에게 약속한 돈이 아는 사람 통장에 들어왔는지 확인해야한다고 하루종일 난리를 쳐댔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 전화 끊는 것 기다리느라고 길거리에 서 있던 시간이 합쳐서 족히 1시간은 되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도 남학생들이 질려서 따로 FC바르셀로나 구장에 갔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도 그 친구한테 2시간동안 혼자 일을 보라고 하고 역에서 쉬기로 했던 것이다. 8시 쯤 되자 남학생들이 돌아왔다. 이제 오늘의 마지막 대단원인 분수쇼를 보러가야 한다. 이 분수쇼는 몬쥬익 언덕 (Parc de Montjuic)에서 한다. 몬쥬익의 영웅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 우승의 영광을 안았던 곳으로 유명한 이 몬쥬익 언덕은 바르셀로나 시민들에게 서울의 남산처럼 시민의 푸근한 휴식처이다. 이 곳에는 언덕 끝에 몬쥬익 성이 있고 성의 오른쪽으로 돌아 올라가면 옛 건물들을 다시 재현해서 모아놓은 스페인 마을이 있다. 올림픽 주경기장은 스페인 마을 오른편에 위치하고 카탈로냐 미술관과 미로 미술관도 몬주익 언덕에 있다. 분수대가 보이는 도로의 입구에 서서 계단 맨 끝에 있는 몬쥬익 성까지의 길이 커다란 광장처럼 트여져 있고 인도와 차도 경계에는 중앙의 분수대를 사열하듯 작은 분수대가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이윽고 8시가 되니 길가 양쪽에 도열된 분수대에서 일제히 물이 뿜어져 나오고 언덕 끝 가운데 분수대에서는 하얀 포말을 이룬 물보라가 갖가지 조명과 어우러져 하나의 한상을 연출하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부랴부랴 달려가 분수대 뒤쪽의 계단에 자릴 잡고 열심히 사진을 찍어대고 말았다. 휘황한 조명을 배경으로 갖가지 형상을 기억한 컴퓨터에 의해 연출되는 물줄기의 연기는 빵빵한 오디오로 흘러나오는 장엄한 바그너의 서곡과 어우러져 정말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어찌 인간의 머리로 이러한 우주쇼를 연출할 수 있단 말가!!! 감동, 감동, 감동 뿐이었다. 한시간 반을 보여주고 30분을 쉬고 또 한시간 반... 총 두 번이다. 금. 토. 일요일 오후 8시부터 11시까지다. 그냥 맹숭맹숭하게만 보기가 너무 아까워 가게에 가서 캔맥주 4개를 사와 나눠 먹었다. 한참만의 감동을 뒤로하고 몬쥬익 언덕을 감회가 새로왔다. 제정신을 차리고 역으로 갔다. 오늘은 노숙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처음하는 노숙이라 그런지 기분도 그럴 듯했다. 날씨가 덥기 때문에 추위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더욱이 오늘이 스페인의 마지막날이기 때문에 기념으로도 괜찮을 법했다. 우선 배고픈 터라 역내 맥도날드집에서 먹을 것을 샀다. 남학생들은 예의 그 식빵을 들고 끼니를 때우겠다고 해서 그녀에게 그 친구들한테 도움받은 것도 있고 미안한 것도 있으니까 둘의 햄버거를 사라고 했다. 난 콜라를 샀다.가서 나눠주니 몸둘 바를 몰라한다. 참 순박한 친구들이다. 배를 채운 뒤 잠자리를 찾아 헤매다가 계단이 있고 그 아래에 연못이 있는 공원이 보였다. 그곳에서 한 시간쯤 앉아 노닥거리다보니 몸이 에려왔다. 이래도 밤공기는 차가운 것이다. 그래서 역 바깥쪽 차창(역사는 12-04시까지 폐쇄한다.)에 자리잡고 박스와 신문지들을 모아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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