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의용수비대는 누가 주도했나?
국가보훈처는 독도의용수비대를 홍순칠이 주도했다는 입장이다.
국가보훈처가 예산을 지원하여 설립한 독도의용수비대기념사업회는 국가보훈처의 입장을 답습하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홈페이지에 <독도위인전>을 개설에 운영했고, 홍순칠은 안용복 등과 함께 위인으로 소개했다.
주요 내용은 홍순칠의 수기를 근거로 삼았다.
국가보훈처가 제시하는 유일한 근거는 홍순칠의 수기다.
홍순칠의 수기가 허위라는 것은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그렇다면 독도의용수비대는 언제, 누가 주도했을까?
1954년 4월 25일 1만5천 울릉도민이 궐기대회를 열고 독도방위대책위원회와 독도에 상주 경비하는 독도자위대를 결성했다.
독도자위대는 독도의용수비대의 모체이고, 독도자위대는 울릉군민의 결의에 따라 창설되었다.
"울릉도 1만5천 도민은 독도자위대를 결성해서 한국의 영토인 독도를 결사방위하기로 결의하였다"
독도방위대책위원회와 독도자위대는 이정윤 독도개발주식회사 사장이 주도했다.
궐기대회는 국민회 울릉군 지부가 주최했고, 이정윤은 울릉군 지부장이다.
독도의용수비대원, 전 울릉경찰서 경찰관, 주민의 증언도 한결 같이 이정윤씨를 주인공으로 인정하고 있다.
독도개발주식회사 사장 이정윤씨는 궐기대회에 앞서 정부에 독도를 보호해달라면 진정을 했다.
1. 독도,울릉도에 등대를 가설해 줄 것
2. 무선시설이 있는 감시초소를 설치 할 것
3. 해안경비정을 보급해 줄 것
치안국장은 "이제까지 독도를 해안경찰대에서 경비해왔고, 국가적인 견지에서 한층 더 경비를 강화하겠다"고 했다.
4개월후인 1954년 8월, 정부는 독도경비 강화 결정에 따라 동도 정상에 독도경비초사와 영토표석을 설치했다.
궐기대회 이후 울릉군민은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고, 백두진 총리는 '훌륭한 조직'이며 내무부 장관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지시했다.
"백두진 총리는 백 내무부 장관에게 울릉도 도민의 독도자위대 조직을 적극 후원하라고 지시하였다...
엄연한 한국의 영토인 독도의 주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울를도민이 궐기대회를 열어 독도자위대를 조직하기로 한 그 결의야 말로 훌륭한 것.."
백두진 총리의 지시에 따라 울릉군청에서는 구휼미로 식량을 지원하고, 울릉경찰서에서는 무기와 탄약을 지원했다.
독도자위대는 6.25전쟁에 참전한 제대 군인으로 구성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이규현 대원은 1925년생, 하자진 대원은 1926년생, 정원도 대원은 1929년생으로 모두 20대 후반의 혈기방장한 청년들이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그러나 제3대 민의원 선거로 선거일인 1954년 5월 20일 이후로 정해졌다.
이때 이정윤과 홍순칠이 입후보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정보)
기호 1, 최병권(40세), 신문기자, 자유당- 1,741표(32.08%) 당선
기호 2, 허필(36세), 도의원, 무소속-1,119표(20.62%)
기호3, 서이환(59세), 민의원, 무소속-1,315표(24.23%)
기호4, 김하우(63세),약종상, 무소속-0표
기호5, 이정윤(26세), 회사원, 무소속-1,251표(23.05%)
기호6, 홍순칠(25세), 무직, 무소속-0표
기호7, 전석봉(39세), 자유업, 무소속-0표
이정윤은 독도 경비강화를 위한 정부에 진정을 하고, 독도자위대를 결성하고 도민궐기대회를 주도했다.
그러나 독도자위대(독도의용수비대)가 독도에 들어갈때 함께 하지 못했고, 독도자위대 결성을 주도했다는 사실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독도의용수비대원과 울릉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여기에서 밝히기 어려운)사정이 있었다.
인원과 장비가 마련된 독도자위대의 책임자가 필요했다.
이때 재향군인회 회장이었던 홍순칠이 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나 홍순칠은 1952년부터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을 준비했다고 수기에 남겼다.
(홍순칠 수기의 문제는 따로 밝힌다.)
독도의용수비대의 모체는 독도자위대이고, 울릉도민이 자발적으로 만든 조직이다.
따라서 독도의용수비대 창설의 주역은 울릉주민과 이정윤으로 기록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