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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시: 2020. 1. 18.~19.(주말)
- 음력(12. 24.~12. 25.), 일몰 17:47, 일출 07:40
●산행지: 호서정맥 4구간
●산행코스: 돌고개-한치고개-고려산-고등고개-돚고개-성요셉치매센터-양곡리 세종미래산업단지-국사봉-전월지맥분기점-되재(천왕사)-국수봉-차령고개-쌍령산봉수대-인제원고개-석지골고개(장고개)-개치고개-곡두고개-태화산천자봉삼거리(무성지맥분기점)-갈재고개-매봉-공동묘지-각흘고개-구만봉-탑골고개-봉수산갈림길-천방산-부엉산-머그네미 안부(오지재)-극정봉-명우산-불문리고개-절대봉-서재-볼모골고개-서낭당고개-차동고개
●먹거리: 생수1,500cc, 치즈크래커2, 크림샌드2, 딸기샌드3, 크림빵3, 보름달빵1, 맥스봉쏘시지3, 미니아몬드자유시간6, 사탕
●준비물: 우모복, 쟈켓, 바람막이조끼, 충전지1만2, 스틱, 헤드랜턴2, 경광점멸등, 손수건, 버프, 비니, 구급약, 수면용안대, 장갑, 귀마개, 휴지, 물티슈, 부직반창고, 우의, 예비 양말, 옷, 팔토시, 무릎보호대
●거리: 약 74.9Km
●소요시간: 약 24.44h
●누구랑: 나홀로
●경비: 하행버스6,900, 떡볶기3,000, 덕고개 매식12,000, 상행버스10,900, 뒤풀이15,000
●날씨: -4~6도
●산행경과:
- 09:34 : 경부고속도 굴다리
- 09:52 : 옥자봉
- 10:20 : 돌고개 (석곡배수지)
- 12:06 : 고려산 (307.2m), 정자
- 14:02 : 덕고개 (500m 아래 육교, 300m 위 건널목) 함박골식당 매식, 1,500cc
- 15:21 : 성요셉치매의집
- 15:41 : 양곡교 (세종미래산업단지)
- 17:00 : 국사봉 (402.7m)
- 18:00 : 국수봉 (383.3m)
- 19:00~19:10 : 차령고개, 건물 왼쪽 제이힐링타운 식당, 커피숍
- 19:35 : 쌍령산봉수대 (366.4m)
- 20:50 : 340m봉 (100m 다녀옴)
- 21:54 : 개치고개 (산신각, 절)
- 22:19 : 435m봉
- 22:58 : 섭밭봉 (480m)
- 23:48 : 468m봉
- 00:20 : 곡두고개 (곡두터널)
- 01:03 : 까막봉 (557m)
- 02:00 : 태화산 천자봉(646.3m), 삼면봉, 무성지맥분기점
- 02:24 : 갈재고개 (아스팔트 도로)
- 03:50~03:55 : 각흘고개 (1,700cc), 생태이동통로, 거산리 마을버스 승강장
- 04:45~05:01 : 노박
- 05:45 : 탑골고개
- 06:14 : 봉수산 (535.1m), 삼군봉
- 08:13 : 천방산 (478.9m)
- 09:28 : 머그네미 안부 (오지재)
- 10:00 : 극정봉 (424m)
- 10:37 : 명우산 (368m), 삼면봉
- 11:44 : 서재
- 11:59 : 서낭당고개
- 12:30 : 차동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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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서정맥: 378.2km
* 4구간 목천 굴다리-백월산 101km
- 경부고속도 굴다리~덕고개 14.7km
- 굴다리~돌고개 3.8km
- 돌고개~덕고개 10.9km
- 덕고개~각흘고개 32.5km
- 제11탄약창~각흘고개 29.1km
-. (5.5~6.5km 우회, 도보 1시간)
- 압실마을~차령고개 11.3km
- 차령고개~각흘고개 16.5km
- 각흘고개~차동고개 16.9km
※ 사전정보
- 성요셉치매센터 400m내려 국도, 좌로 500m 내려 삼거리
- 우로 신흥, 영당슈퍼~양곡슈퍼로 도보 1시간, 양곡교 경로당 다리건너 우도로 따라 철탑방향으로
- 국사봉 100m
- 342m봉 정안면 인풍리 사현리 경계
- 차령고개: 공주방향 700m 식당, 찜질방
- 곡두고개: 북쪽 500m 촌닭가든 (041-555-7869)
- 무성지맥갈림길-태화산 천자봉 120m
- 갈재고개: 공주 유구 불당리~천안 광덕면 광덕리
- 각흘고개: 주유소, 아산 송악면-공주 유구읍 시계
- 봉수산: 300m
- 봉수산: 아산시 송악면-예산군 대술면
- 천방산: 170m
- 명우산: 예산군 대술면-신양면 경계
- 절대봉 천연동굴
- 차동고개: 예산 신양 차동리~공주 유구 녹천리 경계, 휴게소
※ 식수조달 가능지역 :
- 경부고속도로 굴다리 동원시스템즈 수도, 자판기
- 전의산수련원 수위실앞 수도
- 우회도로 양곡리 국도변 편의점
- 양곡리 미래산업단지 입구 OK식당
- 무성지맥갈림길 200m 신비의샘 X
- 각흘고개 주유소 (뒤편 화장실)
- 차동고개: 예전 의학연구소 건물 지하수 X, 녹천가든휴게소 (041-841-9992)
※ 서울에서 천안 목천 응원리 가는길
* 서울남부-천안 06:55, 1.10h, 6,200
* 동서울-천안 06:00, 1.20h, 6,900
* 청량리-천안 급행열차
* 천안 시외버스터미널- 응원리
- 천안고속버스터미널 옆 30m 백화점 앞 정류소
- 목천방향 300번대 시내버스, 삼용동장례식장 지나 응원리(가구단지) 하차
※ 서울 오는길
- 차동고개~유구터미널 (히치, 택시, 버스)
- 유구터미널~서울남부 10,900, 2h
- 공덕재~화성면(도보30분)~청양 버스
- 공덕재~청양터미널 택시 15,000
- 041-943-8100, 041-943-2995, 041-943-0404
- 청양터미널: 041-943-7345
- 서울 강남, 16:10, 19:40, 10,900
- 서대전 19:55, 천안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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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정맥 4구간은 정맥길을 관통하는 경부고속도롤 지하도로 통과하는 목천읍 응원리에서 시작해 천안과 세종특별시 전의면, 소정면을 지나고 다시 공주시 정안면과 천안 광덕면 경계를 타고 아산 봉수산에 올랐다가 공주 유구읍 최북단 천방산에서 예산과 만나 그 경계를 타고 청양으로 내려가는 차동고개까지 다녀왔습니다. 그간은 연이틀 야근에 06시에 조퇴를 신청하고 첫차를 타느라 채 두시간을 편히 자지 못하는 강행군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느긋하게 03시에 업무를 마치고 동서울에서 07:35분 천안행 차를 이용하니 서너시간 잠을 잘 수 있어 철야 행군이 훨씬 덜 피곤했답니다.^^
공덕재까지 진행하면 다음에 장항까지 한번에 끝낼 수 있다는 야무진 생각은 바람에 산산이 흩어지고~ 여주재 까지라도, 청양에서 가까운 학당고개라도 아니야 분골마을이나 효제고개 만이라도 점차 줄어들더니 결국 차동고개에서 끝내고 말았습니다.
최소 15Km를 더 가야 탈출로가 나오는데 후반부에 3Km 이상의 평속을 구하기 힘들고, 택시비를 버리느니 두 구간으로 나눠 다소 여유있게 진행하기로 타협을 보았지요. 죽자사자 가자니 자칫하면 내몸이 먼저 박살이 나겠다는~
13시에 예산에서 유구로 차동고개를 넘어가는 버스를 우연히 잡아타는 행운도 만났습니다.
사전에 좀더 면밀하게 거리와 시간을 계산하였더라면 무겁게 1,500cc나 메고다니지 않았을텐데, 각흘고개에서 1,700cc를 보충하여 더 갈일을 생각해 아낀다는게 채 500cc도 소비하지 않고 차동고개까지 도착했네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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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산시
아산시(牙山市)는 동쪽은 천안시, 서쪽은 당진시, 남쪽은 예산군과 공주시, 북쪽은 경기도 평택시, 서북쪽은 아산만과 접하고 있다. 시청은 충청남도 아산시 온천동에 있다.
금북정맥이 시의 남부를 지나 높은 산지를 형성하는데, 이 산지는 오랜 침식을 견딘 잔구(殘丘)들로서 노년기 지형을 이룬다. 남부의 산지에는 광덕산(廣德山, 699m)·망경산(望京山, 600m)·봉수산(鳳首山, 534m)·설화산(雪華山, 441m)·배방산(排芳山, 361m) 등이 있으며, 북부에는 영인산(靈仁山, 364m)·고용산(高湧山, 294m)·연암산(燕巖山, 293m) 등이 있을 뿐이고 대부분이 화강암 침식으로 매우 낮아진 저산성 구릉이 발달하였다. 지대가 낮은 서북부에는 아산만이 내륙 깊이 만입해 있고, 아산만으로 흘러드는 삽교천과 안성천의 하구에 인공호수인 삽교호와 아산호가 있다. 곡교천(曲橋川)이 남쪽 산지에서 발원해 군의 중앙을 관통한 다음 북류해 아산만으로 흘러들고, 무한천(無限川)이 선장면과 예산군 신암면과의 경계를 따라 흘러 삽교천에 합류해 삽교호로 흘러 들어간다. 이 외에 둔포천(屯浦川)이 군의 북부 경계를 따라 서류해 아산호로 흘러든다. 이들 하천유역에 탕정평야 등의 넓은 퇴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지금의 아산시는 본래 백제의 탕정군(湯井郡)·아술현(迓述縣)·굴직현(屈直縣) 지역이었다. 백제의 탕정군은 신라 671년(문무왕 11)에 주(州)로 해 총관(摠管)을 두었고, 뒤에 주를 폐해 군으로 하였다. 아술현은 신라 경덕왕이 이름을 음봉현(陰峯縣 또는 陰岑縣)으로 고쳐 탕정군의 영현으로 했으며, 굴직현도 신라 경덕왕이 이름을 기량현(祈梁縣 또는 祁梁縣)으로 고쳐 탕정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탕정군의 배방(排芳)은 백제 개로왕 때 지략을 겸비한 성배(成排)·성방(成芳) 형제의 이름을 따서 지은 지명이라고 한다. 백제의 유명한 충신 성충(成忠)이 그들의 후손이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지금의 아산은 고려시대에는 천안부의 영현(領縣)이었던 온수군(溫水郡)·아주(牙州)·신창현(新昌縣) 등이 있었던 지역이다. 온수군은 백제의 탕정군을 고려 초에 온수군으로 고쳐 1018년(현종 9) 천안부에 내속시켰고, 1172년(명종 2)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이 지역에 온천이 있었다. 아주는 신라의 음봉을 고려 초에 인주(仁州)라 했다가 995년(성종 14)에 자사(刺史)를 두고 1005년(목종 8)에 폐했으며, 1018년(현종 9)에 천안부에 내속했다가 뒤에 아주로 개칭하고 감무를 두었으며 별호(別號)를 영인(寧仁)이라 하였다. 신창현은 신라의 기량현(祈梁縣)을 고려 초에 신창현으로 고쳐 1018년(현종 9)에는 천안부에 내속시켰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명상(名相) 맹사성(孟思誠)이 이곳 출신인데 청백리로 유명하였다. 구주정(九柱亭)에는 황희(黃喜)·맹사성·허조(許稠) 등 3정승이 심었다는 괴목이 남아 있다. 지금의 아산 지역에는 온수현·신창현·아산현이 있었다. 온수현은 1414년(태종 14)에 태종이 온수군을 신창군과 합쳐 온창(溫昌)으로 했다가 1416년에 다시 분리시켜 온수현과 신창현으로 정비하였다. 1442년(세종 24) 세종의 온천 행행(行幸) 후 온수현을 온양(溫陽)으로 고치고 군으로 승격시켰다. 이후 지금의 아산 지역을 1458년(세조 4)에 세조가 아산현을 온양·평택·신창에 나누어 소속시켰다가 1464년 아산현으로 복구시켰다. 1505년(연산군 11)에는 아산현이 경기도에 이속되었다가 중종 초에 충청도에 소속되었다. 세종 때 아산에는 공세관(貢稅官)이 전국 8개 수조처의 하나로 설치되었는데 이후 세조 때에는 전국 9조창(漕倉)의 하나였던 공세관창(貢稅官倉)을 설치해 인근 40개 고을의 조세를 운반하였다. 현재에도 인주면 공세리에 공세관창의 유지(遺址)와 석성이 남아 있다.
세종 때의 장영실(蔣英實)은 아산 출생의 관노(官奴)로서 우리나라 과학기술 분야에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간의대(簡儀臺)를 세우고 동활자인 갑인자(甲寅字)를 제작하였다. 또한 김빈(金鑌)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의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으며, 측우기(測雨器)·천평일구(天平日晷)·앙부일구(仰釜日晷) 등을 만들었다. 임진왜란 때 나라의 운명을 지탱해 나간 민족의 영웅 이순신(李舜臣)은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지만, 선조들이 대대로 살아오던 고향은 염치면 백암리였다. 1704년(숙종 30) 이곳 유생들이 건의해, 1706년 이순신을 봉안한 사당을 세우고 ‘현충(顯忠)’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를 겪은 뒤, 흥선대원군이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서울 종로와 전국 각지에 세운 척화비 가운데 하나가 신창면에 있다. 둔포면 신촌에서 태어난 윤치호(尹致昊)는 조선 말의 정치가로 활약하였다.
1895년 홍주부 소속의 온양군·아산군·신창군으로 개편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온양·아산·신창 세 군을 통합해 아산군이라 하고 관하에 12개 면을 두었으며, 군청 소재지는 온양이었다. 1944년 10월 1일 온양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73년 7월 1일 탕정면 모종·권곡리를 온양읍에 편입했으며, 1983년 2월 15일에는 배방면 남리와 탕정면 신리, 신창면 점량·득산·실옥리 등 5개 리를 온양읍에 편입시켰다. 1986년 1월 온양읍이 시로 승격되어 아산군으로부터 분리되었다. 1990년 염치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도농통합에 따라 아산군과 온양시가 통합되어 새로운 아산시가 되었다. 1997년 1월 1일 시청사를 온천1동 1626번지로 이전하였다. 2003년 9월 1일 아산시 동지역 행정 명칭을 온양1~6동으로 변경하였고, 2009년 5월 1일에 배방면이 배방읍으로 승격되었다.
2012년 7월 1일에 충청남도 연기군을 폐지하면서 인근의 충청북도 청원군과 충청남도 공주시 일부를 병합하여 우리나라에서 17번째 광역자치단체로 출범하였다. 동쪽은 충청북도 청주시, 서쪽은 충청남도 공주시, 남쪽은 대전광역시, 북쪽은 충청남도 천안시와 경계를 이룬다. 시청은 세종특별자치시 보람동에 있다.
산지는 목초지나 과수원으로 이용된다. 이들 산지 사이로 금남면에서 발원한 삼성천이 북서쪽으로 흐르다가 괴화산 근처에서 금강에 합류한다. 전의면에서 발원한 조천은 남동류하여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흘러내려오는 미호천과 합쳐진 후 남류하다가 합강정에서 금강으로 유입한다.
금강은 시의 남단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공주시로 흘러간다. 미호천과 조천이 합류하는 지점에서는 비옥한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금강 유역에도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하였지만,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과 함께 대부분의 농경지는 사라지고 시가지가 들어섰다.
이곳은 백제 초기부터 백제 강역에 속하였다. 376년(근구수왕 2)에는 적현성(赤峴城)이었고 그 뒤 두잉지현(豆仍只縣)이 되었으며, 백제 말에는 주류성(周留城)이었다는 설도 있다. 삼국통일 후인 757년(경덕왕 16)에 연기현(燕岐縣)으로 고치고 연산군(燕山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지금의 전의면 일대는 백제 때 구지현(仇知縣)이었는데, 당나라가 백제를 친 다음 구지(久遲)로 고치고 동명주(東明州)의 영현으로 삼았다. 같은 해에 금지(金池)로 고쳤으며 대록군(大麓郡: 현 천안시 목천읍)의 영현으로 삼았다. 전동면의 운주산성(雲住山城)은 신라 때 전주부(全州府)가 있었던 곳이다. 940년(태조 23)에 금지현을 전의현(全義縣)으로 고치고 청주에 소속되었다. 연기현은 1018년(현종 9)에 청주에 영속되었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임명하였으며 뒤에는 목주감무(木州監務)를 겸하게 하였다. 1291년(충렬왕 17)에 거란이 침입하자 원나라 세조에게 군대를 요청하고 한희유(韓希愈)·김흔(金忻) 등이 나가 정좌산(正左山) 아래에서 거란족을 무찔렀다. 그 전공을 기념하여 정좌산은 원수산(元帥山)이라 불렀다. 고려 말의 전서(典書) 임난수(林蘭秀)는 고려가 무너지자 삼기촌(三岐村)에 은둔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조선시대에 세종은 그의 정절을 기려 삼기촌 나성(羅城)에 신장(申檣)이 쓴 ‘임씨가묘(林氏家廟)’라는 사액을 내리고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비문으로 신도비를 세웠다. 1395년(태조 4)에는 전의현에 처음으로 감무가 임명되었다. 1397년에 목주감무와 분리하여 연기현에도 감무가 임명되었다. 1414년(태종 14) 전의현과 연기현을 합쳐 전기(全岐)라고 하였다가 1416년에 다시 연기현과 전의현을 분리하여 각각 현감을 두었다. 1680년(숙종 6)에 연기현은 문의(文義)에 병합되었다가 1685년에 분리·복구되었다. 1895년에 공주부 연기군과 전의군으로 개편되었고 1896년에 충청남도 연기군과 전의군이 되었다. 1914년에 연기군은 전의군 전지역과 공주군 일부를 편입하여 7개 면을 두었다.
1931년에 조치원면이 읍으로 승격하여 1읍 6면이 되었다. 1940년 7월에 서면의 반암·신동·내창·동리 등 4개 리를 조치원읍에 편입시켰다. 1973년 7월 1일에 공주군 장기면 나성리·송원리가 남면에, 반포면 도암리·성덕리·영곡리가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1986년 11월 1일에는 전의면에 소정(小井)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7년 1월 1일에 전동면의 신방리·영당리·양곡리·달전리·금사리·다방리가 전의면에 편입되었고, 7월 1일에는 서면에 봉암(鳳巖)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95년 1월 1일에 소정출장소가 면으로 승격하였다. 3월 1일에 동면 갈산리가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으로, 청원군 강외면 심중리는 연기군 전동면으로 편입되었다. 7월 1일에는 동면 문주리 일부가 서면 봉암리에 편입되었다.
2002년에 치러진 제17대 대선에서 서울에 입지한 국가행정기관을 지방으로 이전하여 국가경쟁력을 제고하고 지역균형발전을 촉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시되었다. 2003년에 정부에서는 「신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여 신행정수도 추진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고, 수도권에 입지한 행정기관을 지방으로 이전하여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를 해소하는 동시에 국가균형발전을 달성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에 의거하여 충청권에 4곳의 신행정수도 후보지(충청북도 음성·진천권, 충청남도 천안권, 충청남도 연기·공주권, 충청남도 공주·논산권)가 가려졌으며, 최종적인 후보지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충청남도 연기·공주권이 선정되었다. 그러나 2004년 11월에 관습법상 대한민국의 수도는 600여 년간 이어져 온 서울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신행정수도 건설특별법」은 위헌 판결을 받게 되었다. 신행정수도 건설이 위헌 판결을 받은 이후 후속 대책으로 2005년 3월 18일에는 신행정수도 이전 예정지였던 충청남도 연기군과 공주시 일대에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계획을 수립하였다. 행정중심복합도시는 신행정수도의 기능에서 수도기능은 배제하고 행정기능과 복합도시기능만을 포함하는 도시로 계획되었다.
행정기능·입법기능·사법기능의 세 가지를 모두 지니고 있어야 진정한 수도라 할 수 있지만, 행정기능만 입지하기로 한 것이다. 이후 행정중심복합도시는 ‘행복도시’로 약칭하여 불리기 시작하였다.
2010년 1월에는 중앙행정기능을 없애고 주거용지의 규모를 축소하는 대신 과학연구·대학·첨단녹색산업 기능을 강화하고 글로벌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는 방향으로 세종시 수정안이 발의되었다. 즉 행정도시에서 경제도시로 탈바꿈하는 계획으로 수정된 것이다. 수정안은 같은 해 6월에 국회 국토해양위원회에서 부결되었으며, 결국에는 행정중심복합도시 원안대로 개발이 진행되었다. 이후 2010년 12월에 「세종시 설치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공포되었다.
2012년 6월에 충청남도 연기군이 폐지되었고 2012년 7월 1일에 세종특별자치시로 출범하였다. 이에 따라 충청남도 연기군 전역, 공주시 의당면·장기면·반포면 일부 지역,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 일부 지역이 세종특별자치시에 포함되었다. 행정중심복합도시는 장군면, 연기면, 연동면, 금남면 등 4개 면과 13개 동에 걸쳐 조성되었다. 어진동에 자리한 정부세종청사로 이전하는 36개 중앙행정기관(18개 본부, 18개 소속기관)을 비롯하여, 15개 국책연구기관이 2012년부터 이전을 시작하였다.
세종특별자치시의 명칭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공모와 엄격한 심사를 통해 2006년 12월 21일에 확정되었다.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청은 행정도시가 지니는 지리적 특성, 역사성, 상징성, 대중성, 국제성 등의 도시특성을 고려하여 명칭을 선정하였다. 세종대왕이 세종특별자치시의 전의면에서 나는 초수(椒水)로 눈병을 치료했다는 역사적 관련성도 있고, 세상[世]의 으뜸[宗]이라는 의미는 나라의 중심이 되고 행정의 근간임을 잘 보여주는 지명이다. 2012년 8월에 1읍(조치원읍) 9면(연기면, 연동면, 부강면, 금남면, 장군면, 연서면, 전의면, 전동면, 소정면) 14개 법정동(반곡동, 대평동, 가람동, 한솔동, 나성동, 새롬동, 다정동, 어진동, 종촌동, 고운동, 아름동, 도담동 소담동, 보람동)으로 확정되었다. 14개의 법정동은 3개의 행정동(한솔동, 아름동, 도담동)이 관할한다.
♤ 공주시(公州市)
공주시(公州市)는 충청남도 중앙부에 있는 시이다. 1986년 1월 1일 출범해 1995년 1월 1일 공주군과 통합하였다. 동쪽으로 대전광역시 세종특별자치시, 서쪽으로 예산군, 청양군, 남쪽으로 논산시, 계룡시, 부여군, 북쪽으로 아산시, 천안시와 접한다. 시의 중앙으로 금강이 흐른다. 삼국시대에는 웅진(熊津)으로 불렸으며, 475년부터 538년까지 백제의 수도였다.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 등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매년 10월 부여군과 합동으로 백제문화제를 개최한다. 조선시대에는 충청도 감영이 있었고, 1932년까지 충청남도 도청소재지였다. 명소로는 공산성, 무령왕릉, 계룡산이 있으며, 시청은 봉황동에 있고, 행정구역은 1읍 9면 6동이다.
예산은 백제 때 오산현(烏山縣)이라 했는데, 삼국통일 후인 757년(경덕왕 16)에 고산현(孤山縣)으로 개칭하여 임성군(任城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대흥은 백제 때 임존성(任存城) 혹은 금주(今州)라 했고, 경덕왕 때 임성군으로 고쳤다. 덕산은 백제 때 마시산군(馬尸山郡)이라 했으며, 경덕왕 때 이산군(伊山郡)으로 고치고 웅주(熊州)에 예속시켰다. 조선 초에 덕산으로 병합되는 덕풍현은 백제 때 금물현(今勿縣)이었고, 경덕왕 때 금무(今武)로 개칭하여 이산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봉수산 마루에 있는 임존성은 백제 멸망 후 흑치상지(黑齒常之)가 백제부흥운동의 근거리로 삼았으며, 후삼국시대에도 왕건(王建)과 견훤(甄萱)이 격전을 벌였던 곳이라고 한다.
고산현은 919년(태조 2) 예산현(禮山縣)으로 개칭되었고 1018년(현종 9) 천안부에 속했으며,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임성군은 940년 대흥군(大興郡)으로 개칭되었으며, 1018년 홍주(洪州)에 속하였고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두었다. 이산군은 1018년 홍주에 속했고, 뒤에 감무를 두었다. 금무현은 고려 초에 덕풍(德豊)으로 고치고 현종 때 홍주에 속했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다. 1018년 거란의 침입 때 강감찬(姜邯贊)의 부장으로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격퇴시켜 공을 세운 강민첨(姜民瞻)은 벼슬이 지중추사병부상서에 올랐으며, 죽은 뒤 태자부에 추증되고 예산현 감천동에 예장되었다.
1405년(태종 5) 이산현과 덕풍현을 합쳐서 덕산(德山)으로 개칭했고, 예산현·흥현·산현에 각각 현감이 임명되었다. 이곳 출신 인물로는 권근(權近)의 외손이며 『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 등을 지은 조선 초기의 대학자로서 6대 임금 아래서 요직을 역임한 서거정(徐居正)·조선 전기 서도의 4대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김구(金絿), 불세출의 명필이자 고증학·금석학의 대가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등이 있다. 1868년(고종 5) 독일 상인인 오페르트(E.J Oppert.)가 우리나라와의 통상요구가 이루어지지 않자 덕산현 가야산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하고 민가를 약탈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의 쇄국양이정책(鎖國壤夷政策)이 더욱 강화되었다. 1895년 홍주부 예산군·대흥군·덕산군으로 개편되었다가 1896년 충청남도 예산군·대흥군·덕산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흥군과 덕산군의 11개 면, 공주군의 일부를 합하여 현재의 예산군이 성립되고 12개 면으로 개편되었다. 1940년 예산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근대의 인물로는 학문과 덕행이 뛰어났던 조선 말의 의사로서 일본의 침입에 항거하다가 투옥되어 아들과 함께 순국한 이남규(李南珪), 1932년 상해 훙커우 공원[虹口公園]에서 열린 일본의 상해사변전승축하회에 폭탄을 던진 윤봉길(尹奉吉) 등이 있다. 1973년 7월 1일 삽교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3년 2월 15일 오가면 효림리와 월곡리 일부를 합하여 월산리로 개칭하고, 좌방리 일부를 방아리로 개칭하여 삽교읍에 편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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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리(應院里/21번국도/160m) → (0.5㎞) → 216.1봉 → (1.5㎞) → 돌고개(石峴/(주)동성에프씨 공장/석곡배수지/123m) → (1.6㎞) → 한치고개(202m) → (0.7㎞) → 245.1봉
245.1봉 → (1.0㎞) → 애미기고개(187m) → (1.0㎞) → 고려산(高麗山/305m) → (1.0km) → 황골도로(155m) → (2.3㎞) → 전의산 연수원(242m) → (3.5㎞) → 덕고개(1번국도/87m) → (1.0km) → 성요셉치매센타(사각정자) → (6.0㎞) → 양곡2리 마을회관(압실임도)
양곡2리 마을회관(압실임도/148m) → (1.5km) → 356봉안부(갈림길) → (2.9km) → 국사봉(國師峰/402.7m) → (1.6km) → 송전탑 → (1.0km) → 국수봉(國秀峰/382.8m) → (1.3km) → 송전탑(118번) → (1.9km) → 차령고개(360m)
차령고개(360m) → (0.8km) → 봉수산 → (2.5km) → 430봉 → (1.9km) → 장고개 → (1.4km) → 개치고개 → (0.6km) → 420.9봉 → (1.5km) → 480봉
480봉 → (1.2km) → 440봉(헬기장) → (1.1km) → 곡두고개(629지방도로/332m) → (2.0㎞) → 태화산(泰華山/646m) → (1.5㎞) → 갈재고개(458m) → (3.5㎞) → 각흘고개(角屹고개/39번국도/213m)
각흘고개(角屹고개/39번국도/213m) → (0.5km) → 351봉 → (1.6km) → 구만봉(392봉) → (1.8km) → 봉수산갈림길(532m) → (0.1km) → 봉수산(鳳首山/535m) → (0.1km) → 봉수산갈림길(532m) → (3.5km) → 천방산갈림길(458m) → (0.1km) → 천방산(千方山/479m) → (0.1㎞) → 천방산갈림길(458m) → (1.1㎞) → 부엉산(400m) → (2.7㎞) → 극정봉(極頂峰/걱정봉/424m) → (1.5km) → 명우산(鳴牛山/368m)
명우산(鳴牛山/368m)→ (0.9km) → 절대봉(353봉) → (0.9km) → 340봉 → (3.1km) → 차동고개(車洞고개/차령고개/215m) → (1.9㎞) → 고재고개(古峴-) → (2.3㎞) → 장학산(長鶴山/381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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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구간의 취암산과 정맥길이 흘르는 동우아파트 울타리를 바라봅니다.
저 앞에 경부고속도로가 끊어놓은 정맥길을 동원시스템즈 회사로 다시 이어갑니다.
♤ 옥자봉
조금 올라서니 옥자봉이래요. 슈퍼 돼지가 살고있나 봐요.
돌고개 정상 위에 석곡배수지가 있습니다. 배수지 옆 울타리를 따라 올라갑니다.
♤ 돌고개(石峴/123m)
목천읍 도장리 진지골에서 성남면 용원리 사이의 포장도로가 이어진 고개로 석현이라 부르던 것을 순수 우리말로 돌고개라 하며, 돌고개 밑의 마을 고개도 돌고개라 하는데 고개부근에 돌이 많아 얻은 이름이라 한다.
♤ 한치고개(202m)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한티말 사람들이 목천읍 도장리를 넘나들던 고개로 대티고개, 한티고개라고도 한다.
♤ 굴머리고개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대정리 한티골과 동남구 목천읍 소사리 말미골 사이의 고개이다.
급우틀해야 하는 265m봉 여기서 우측 띠지를 놓치고 천안아산종주길을 따라 직진하다 되돌아 왔습니다.
애미기재 중간 내리막길에서 밤송이 위에 엉덩방아를 찧는 바람에 따끔따끔~
애매기재1에서 2로 짧게 질러서 가는 길이 있더군요. 우틀해야 하는데 아무 생각없이 앞만 보고 걷다가 처음부터 알바를 잔뜩합니다. 애를 미기는 재입니다.
♤ 애미기고개(187m)
천안시 동남구 풍세면 소사리에서 세종특별시 소정면 고등리 소시고개골 사이의 고개이다.
애미기재(2)에서 조금 내려서니 비닐하우스와 승합차가 있는 길이 나옵니다.
고려산 정상은 조망이 없다길래 직전에서 바라본 지나온 능선입니다. 취암산, 동우아파트, 그리고 우측 높은산이 흑성산입니다.
고려산 정상 그리 넓어보이진 않는데 산성 둘레가 250m 였군요. 잠깐 쉬어가기 좋습니다.
연기군은 세종특별자치시 연기읍으로 되고 여긴 전의면인데 옛날 세워둔 안내판입니다.
♤ 고려산(高麗山/305m)
충청남도 세종특별시 소정면 고등리(高登里) 및 대곡리(大谷里)와 천안시 목천읍 소사리의 경계부에 위치해 있는 산으로 고산(高山)이라고도 부르며, 높이는 305m이고, 곡교천과 조천천의 분수계가 되는 산이다. 『여지도서』(전의)에 "고려산과 운주산(雲住山, 연기군 전동면 소재) 둘 다 목천 월조산(月照山, 연기군 소종면 소재)에서 산줄기가 이어졌고, 고려산은 남쪽의 철성산(鐵城山)으로 이어진다. 월조산은 곧 이 세 산의 으뜸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전의현읍지』에는 "고려산이 전의현에서 북쪽 13리에 있으며 기우제를 지내던 제단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지형도』의 목천면 남쪽 소사리(所仕里)와 연기군 전의면 경계에 고려산(高麗山)이 있다. 이 지역이 고구려가 강성하였을 때 최남방의 국경 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 때 홍건적이 침입해 오자 백성들이 이곳에 성을 쌓고 피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홍건적의 포위가 풀리지 않았는데 성안의 물이 떨어져 주민들이 갈증으로 큰 고통을 받게 되었다. 이에 사람들이"아야 목이야"하고 울부짖었다고 하며, 산 남쪽 고등리에는 그로 인하여 생긴 이름이라는 아야목 마을이 있다.
고려산에서 조금 내려서니 아야목마을과 작은황골을 잇는 임도가 지나네요.
♤ 고려산성(高麗山城)
충남 연기군 소정면 대곡리 산27, 고등리 산113번지에 위치한 해발305m, 성둘레 250m, 토석혼축성, 퇴뫼식 산성으로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사비도성이 무너진 후 백제 부흥군이 3년여에 걸친(660-663년)항쟁본거지의 하나였으며, 그후 고려 충렬왕 17년(서기 1291년 5월) 정좌산에 침입한 합단적(哈丹敵)을 고려 3장군(한희유, 김흔, 인후)이 연기 전역에서 대승을 거두므로, 이는 고려태조(왕건)의 음덕이라 하여 연기군 조산성에 고려 태조묘(太祖廟사당)를 세워 모시고 高麗山城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합단적: 고려 충렬왕 때에 고려를 침입한 원(元) 나라의 반란군인 합단(哈丹)의 무리를 이르는 말
- 고구려가 남쪽까지 내려왔을 때 이곳에까지 내려와 성을 쌓았으므로, '고구려산성'이라 부르다가 줄여서 '고려산성'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 산성은 길이가 약 250m의 퇴뫼형 산성으로 성내에서는 삼국시대 토기편과 기와편이 출토되고 있다.
고려산성 안에 갇혀있던 아야목백성들이 갈증으로 모두 죽은건 아닐까요?
♤ 아야목
고려산성 아래 마을을 아야목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산성에서 전투를 하던 병사들이 성안의 우물이 모두 말라 갈증으로 괴로워하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 하늘에 기우제를 지냈다. 정성을 다하여 제를 지내자 하늘에서 비가 내려 모두들 춤을 추고 기뻐하면서 그 빗물을 받아 마셨는데, 갑자기 마신 물로 목구멍이 따가워서 "아야 목" "아야 목" 하고 외쳤다. 하여 마을 이름을 아야목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황골도로(155m)
1번국도인 세종로 대곡 삼거리와 SK은산 제2주유소 사이에서 대곡3리 마을과 작은 황골마을, 그리고 큰 황골 마을이 있는 고개를 넘어 고등사거리까지 연결되는 도로로 매실로라 부르고 있다.
얼마 높지않은 고개라 역설적으로 고등고개로 불르고 콧노래를 부르며 넘어다닌 모양입니다.
♤ 고등고개(高登고개)
충청남도 세종특별시 소정면에 위치한 고개이다. 고등리에서 대곡리(大谷里)로 넘어가는 고개라는 데서 지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대동여지도』에는 고등산(高登山)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일부 향토지에는 고등이고개, 고등현(高登峴), 고등고개, 고등재, 고등이재 등으로 기재되어 있다. 천안소로로 통하는 고개라서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들이 흥얼거리는 시조 가락에 들새가 잔잔했다는 옛 시조의 일절에 등장할 만큼 유명한 고개이다. 근대에는 경부선 소정리역(小井里驛)으로 가는 주민들과 학생들이 많이 오고 갔으며, 고개 정상에 오르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 '바람번들'이라고 전한다.
♤ 고등터널
아래가 고등터널입니다. 경부고속철도로 KTX가 씩씩거리며 엄청 빠른 속도로 지나다닙니다.
♤ 하나님의교회 전의산연수원
전의산연수원을 우회하는 길에 담장에 붙은 닭장인데 토종닭이 아니고 외래종입니다.
전의산연수원이 하필이면 정맥길에 눌러앉아 빙 둘러가야 합니다. 정문옆 초소에 수도시설이 보이는군요.
♤ 에머슨골프장
정맥길에 에머슨골프장, 건물을 가로질러 길을 따라 한참을 진행하다 산으로 들어갑니다.
돛고개와 덕고개 위치를 달리해 놓았네요.
덕고개에 내려섰습니다. 전의역쪽으로 갈까하다가 반대편 함박골식당에서 밥을 먹기로 합니다.
♤ 덕고개(87m)/ 돛고개
경부선철도와 옛 1번국도가 통과한다. ㄷ자로 200m 지하도로 우회
소꼬리곰탕, 공기밥 두그릇으로 반찬을 싹쓸이 합니다.
♤ 경원사
식당옆에 저렇게 경원사라고 전의이씨 시조할아버지(이도)를 모시는 제법 규모있는 사당이 있습니다. 고려시대 왕건을 도와 백제를 통일하는데 일조한 지역 토호세력으로 노를 젓어 고려 창업에 기여했다고 왕건에게 노도(도)자를 이름으로 하사받았답니다.
♤ 성요셉치매센터
세종특별시 전의면에 천주교대전교구 치매노인 요양시설 성요셉치매센터입니다. 시설이 훌륭한가 봅니다. 현대판 고려장시설이라 하면 넘 나갔겠지요?
♤ 제11탄약창
치매센터에서 아스팔트 포장도로로 걸어나오니 삼거리가 나옵니다.
여기서 정맥길은 뒤쪽 산능선을 따라야하는데 제11탄약창이 버티고 있습니다.
♤ 양곡리 양곡교
할 수 없이 5~6Km를 도로를 따라 걷든, 히치를 하든, 택시를 불러타든 양곡교까지 이동해야 합니다. 정맥꾼이 탄약창을 뚫고 지나갈 수는 없고 공식적으로 작전상 후퇴?이기에 자유로운 방법으로 이동합니다. 이동 중간에 도로가에 편의점이 보입니다.
저 아래 양곡교에서 능선위에 고압선 송전탑을 보고 세종미래산업단지로 조성한 도로를 따라 부지런히 20분을 걸어와 뒤돌아 봤습니다.
♤ 양곡리(陽谷里)
국수봉 기슭에 자리한 산촌마을이며 마을 남쪽으로 조천천이 흐른다. 압곡리, 상세곡리, 하세곡리, 양지리를 병합하여 양지와 압곡의 이름을 따서 양곡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가느실, 봉두미, 아래가느실, 주막뜸마을 등이 있다. 가느실마을은 가는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세곡이라고도 불린다. 봉두미마을은 봉의 머리와 같이 생긴 산인 봉두산 앞에 자리잡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아래가느실마을은 가느실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주막뜸마을은 마을에 주막이 있다 하여 칭하게 된 이름이다. 충남 연기군 전의면에 속해 있다가 2012년 7월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으로 편입되었다.
국사봉이 전월지맥분기점이라는데 좀 더 엄밀하게 따지자면 되재 부근 388m 분기봉에서 국사봉으로 지나간답니다. 아래 전월지맥에 잘 설명해 놓았으니 쭈욱 읽어보시고요.^^
국사봉에서 계룡산이 보일것도 같은데 아직 보았다는 사람은 보질 못했습니다. ㅋ
♤ 국사봉(國師峰/402.7m)
국사봉 아래 천안시 광덕면 원덕리는 북으로 오목하게 터진 골짜기로 곡교천의 발원지이다. 쇠(금)가 많이 났다고 하여 부르던 쇠내골마을은 탄약창이 들어서 골과 구릉마다 쇠를 많이도 담고 있는 즉 쇠를 품고 있는 마을이 되었다. 문득 되재에서 헛걸음을 친 지관의 예지력이 어디까지일까 궁금해진다.
♤ 전월지맥(轉月支脈)이란
전월지맥은 금북정맥이 차령고개를 5.5km 앞둔 세종시 전의면, 공주시 정안면, 천안시 광덕면 삼면의 지경인 되재 부근 분기봉(388m)에서 갈라져 국사봉(403.4m), 덕재고개, 공주고개, 돌고개, 국사봉(214.6m), 연기고개(1번국도), 오산(178m), 전월산(259.8m), 노적산(183m)을 지나 미호천(길이 89.2km)이 금강에 합류하는 세종특별시 전의면 월산리 월산교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30.8km 되는 산줄기로 미호천의 좌측 분수령이 되면 금강 건너 북동으로 팔봉지맥과 남동으로 관암지맥을 마주보고 있다.
♤ 전월지맥 개념도
올빼미(미친듯이 내빼는 올빼미)산악회 반바지님의 수고로 이름표를 달고 있는데 되재고개가 국사봉옆에 있어서 천왕사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으로 옮겨 두었습니다. 실제는 천왕사가 내려다보이기 2~300m 직전인데 마땅히 매달 곳이 없어 거기나거기나 싶어 여기다 달았습니다.
♤ 되재
되재마을은 급한 비탈길이 있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며, 되재는 되돌아간 고개라는 뜻이라고도 하고, 조선시대 중엽에 한양에서 널리 알려진 지관(地官) 한 사람이 묘자리를 찾기 위해 차령산맥 줄기를 따라 오다가 지금의 사현리에 이르러 광정리쪽(현 정안 농공단지)을 바라 보다가 지형이 장안천으로 인해 뚝 끊어진 것을 보고 묘자리가 없어서 한양으로 되돌아 갔다 하여 되재라 했다고 한다.
♤ 국수봉
해는 넘어가고 밤새 가야하는 나그네 똥줄은 타고... 쇄내골마을을 내려다보며 부지런히 달려오니 봉우리도 아닌 곳에 국수봉표지가 나옵니다. 국수봉은 좀전에 지나온 우회해도 되는 봉우리였는데 말입니다.
공주시 인풍리 야경을 바라보며 차령터널에서 차를 빨아들이는 소리가 가깝게 들리는가 싶더니 차령고개로 내려섭니다.
밥값하느라 개가 졸라 짖어대고,,, 폐휴게소 건물 옆으로 돌아가보니 팬션관리사무소가 있습니다. 정수기에 물도 한잔 마시고 젊은 친구들과 이바구를 깝니다. 아빠는 서울에서 사업하고 엄마는 공주에서 사업하고 휴게소에 고딩인듯한 아들이 엄마아빠 명함을 내밉니다. 재력가가 차령휴게소를 인수해 팬션을 차리고 소규모나마 영업을 하는 모양이니 이용하는데 불편 없으시기 바랍니다.^^
전화번호 보이시죠. 저렇게 차령고개에 식당도 있고, 팬션도 있으니 사전에 맞추기만 하면 되겠습니다.
뜬금없이 평화통일기원일붕시비가 차령고개에 서있을까요? 알아보니 조계종에서 나와 일붕선교종을 창종하고 세계불교법왕청을 창립한 불교계 아웃사이더 일붕스님의 일대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 차령고개(190m)/ 천안-공주간 시계
이 고개는 공주(公州)시 정안면 인풍리에서 천안(天安)시 동남구 광덕면으로 통(通)하는 시경계(市境界)로써 호남지방(湖南地方)에서 한양(漢陽)으로 넘나드는 삼남대로(三南大路)의 가장 큰 고개로 이름나 있었다. 차령 또는 원터고개라고도 한다. 차령고개는 높은 고개라는 뜻을 가진 수리고개에서 수리는 수레로 수레는 다시 한자어인 차령(車嶺)으로 바뀌었다고도 보기도 한다. 금북정맥의 고개로 서북쪽에 봉수산(366m)이 있고 동남쪽에 국수봉과 국사봉(國士峰, 403m)이 있다.
금강의 지류인 정안천과 곡교천이 여기에서 발원한다. 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곡교천(曲橋川)에 합류되어 아산만으로 들어가고,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정안천(正安川)에 흘러들어 금강에 합류된다. 차령고개는 천안~논산 고속도로와 23번 신국도가 생기기 전에 공주에서 천안으로 가는 가장 빠른 국도였다. 근래에 와서는 강진(康津)에서 천안(天安)까지 국도 23호선에서 가장 높은 고개로 알려져 있다. 1997년 착공하여 2002년 12월 23일 천안~논산간 고속 국도상에 차령터널 개통으로 통행량이 현저히 줄었다. 예로부터 차령을 경계로 하여 호서(湖西)와 호남(湖南) 지방을 구획해 왔으며, 호서지방의 범위는 동쪽으로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영남지방과, 남쪽으로 금강을 사이에 두고 호남지방과, 북쪽으로 한남정맥 및 금북정맥을 사이에 두고 경기지방과 구분된다. 충청북도 제천시에 있는 의림지(義林池)의 서쪽 지방이라는 의미로 호서지방(湖西地方)이라 불린다.
조금 오르니 무덤의 비석과 혼유석인즐 알았는데 망배단이랍니다. 새해 일출맞이 행사도 하는 장손가봅니다. 바빠서 그만 휘리릭~
급거 방향을 틀어야 되는데 쭉 직진하다 띠링띠링띠링~ 이게 아닌가베 하고 되돌아왔습니다.^^
♤ 쌍령산 봉수대(324m) /봉수산(366m)
공주시와 천안시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324m의 봉화산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는 봉수대다. 이 봉수대는 비교적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멀리 월성산 봉수대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이 봉수대에 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엥서는 "쌍령산 봉수대는 남쪽으로 고등산 봉수대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천안의 대학산(大鶴山) 봉수대에 이어진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봉수대는 비교적 잘 남아 있는 편인데, 둘레 93m에 이르는 반월형(半月形)의 방호벽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방호벽의 북쪽에 치우쳐 약간 높게 고대(高臺)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곳이 바로 봉수대의 불을 피웠던 곳으로 추정된다. 크기는 직경 4.5m이며, 높이는 약 1.5m 정도 남아 있다.
방호벽의 남쪽에는 출입구가 개설되어 있는데, 너비는 약 2m에 이른다. 산의 높이가 360m나 되고 고개 양쪽의 산봉우리가 쌍(雙)으로 솟아 있어 옛날에는 이 고개를 쌍령(雙嶺)고개라고 불렀다.
♤ 인제원고개(260m) : 비포장 임도, 좌측 골프장 휀스로 막혀있음.
인제원(人濟院)은 조선시대의 숙박시설로 신암사에서 경영하였다 한다. 차령은 관로(管路)이고 쌍령은 민로(民路)인데 인제원고개는 쌍령에 속한다. 차령고개에서 공주시로 넘어가다 보면 인풍리가 있으며 인제원과 풍정마을의 이름을 딴 것이고 인풍리의 “신암마을”은 인제원을 경영하던 신암사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 장고개(석지골 고개)
장티, 늦은목 고개라고도 하며 공주군 정안면 사람들이 온양장을 보러 다니기 위하여 넘어 다니던 고개이다.
저 아랫마을 개치로로부터 불빛이 올라오는, 개티고개 아래에 사진에서 보던 산신각과 절이 보입니다.
♤ 개티고개(蓋峙-/개치고개) /산신각, 절
개치 또는 개티는 두 개울의 물이 합쳐지는 곳을 일컫는 말이다.
석지골 남쪽에 있는 고개이며, 천안시 광덕면 지장리와 공주시 정안면 월산리의 개치골을 이어주는 고개이다. 예전에는 공주에서 온양온천으로 통하는 큰 길이었는데 갯골 뒤가 된다.
♤ 곡두고개(332m)/산성리마을 /광덕2리쉼터/ 마곡사
곡두고개는 도로가 닦이기 이전에는 공주시 정안면 주막거리와 천안시 광덕면 광덕리를 이어주는 유일한 길이였으며 고개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꼭두재라 불렀다고 한다. 고갯길이 구부러져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629번 지방도로 곡두터널(호계터널)이 지나고 있다.
곡두터널이 개설되기 이전에는 공주시 사곡면·유구읍 정안면·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주민들은 곡두재를 도보로 넘어야 했고, 마곡사와 광덕사를 찾는 관광객들은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의 서부와 공주시 정안면의 동부로 25㎞ 정도를 우회하는 등 시간적·경제적 손실이 컸다. 따라서 곡두터널을 지나는 629번 지방도가 개설되면서 공주시와 천안시 간의 거리가 단축되고, 광덕사와 마곡사를 찾는 관광객도 크게 증가했다. 특히 지방도 629호선 연변 농촌 지역의 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곡두재는 풍세천과 정안천의 분수계를 이루고 있다. 풍세천은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을 거쳐 풍세면이 이르러 풍세면 북동부에서 곡교천에 합류되고, 정안천은 공주시 정안면을 거쳐 우성면을 지나면서 금강에 합류된다. 곡두터널이 있는 곡두재 일대에는 마을이 곳곳에 형성되어 있는데, 곡두재 북쪽으로는 곰푸리, 곡두재, 안심대 등의 마을이 입지해 있고, 남쪽으로는 산방이, 주막거리, 문달안리 등의 마을이 입지해 있다.
♤ 까막봉
까막봉(557m) 정상의 경사가 장난이 아닙니다.
바람능선, 벼락바위, 삿갓바위, 도깨비쉼터, 안내판을 세워두었던데... 경사가 빡세 눈으로만 주워담고 일일이 사진찍을 시간과 여력이 없습니다.
드뎌 태화산천자봉갈림길이 나왔습니다. 100m 뿐이 안되는데 다녀와야겠죠....
에게머니나~ 정상석이라곤 쥐알탱이만이나 해가지고....
무성산으로 향하는 무성지맥분기점입니다. 안내판 신비의샘을 어느분 산행기에서 물이 보이질 않는다고 인증을 올렸더군요. 사시사철 펑펑 쏟아지는게 아니라 어쩌다가 물이 나는 샘인가봅니다.
♤ 태화산 천자봉(646.3m)
정상에는 앙증맞은 정상석과 3등 삼각점, 이정표가 있으나 전망은 전혀 없고 이곳부터는 천안시를 벗어나 온전히 공주시로 들어선다. 무성지맥 갈림길(638m)에서 약간 벗어난 태화산 천자봉이 무성지맥 분기봉이다. 이곳은 천안시 광덕면 광덕리와 공주시 정안면, 유구읍 문금리가 만나는 삼면봉(三面峰)이다. 이 봉이 실질적인 무성지맥 분기봉이며 무성지맥 중에서 제일 고도가 높은 봉이고 해서 근자엔 이 산을 태화산(太華山)이라 부르기도 하며 혹자는 태화십산이라 기록한 사람도 있는데 이는 華자의 간자체 ‘华’로 쓴 것을 이 ‘华’자가 웹상에 안 써지니 풀어서 ‘化+十’으로 쓴 것을 옮기는 과정에서 태화십산으로 잘 못 표기하는 경우인 것 같다.
태화산(太華山.泰華山)!! 크고 넓다는 뜻이니 광덕산(廣德山)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이 산줄기 북쪽에 있는 광덕사 일주문 현판도 태화산(泰華山) 광덕사이고 남쪽밑에 있는 공주 마곡사
일주문 현판도 똑같은 태화산(泰華山) 마곡사인데 이 태화산은 마곡사 앞쪽에 있는 높이 418m인
활인봉을 말한다. 헛갈리기 쉬운 금북정맥상 태화산 천자봉과 마곡사 태화산의 직선거리는 10km
♤ 무성지맥(武盛枝脈)이란/ 유구지맥
무성지맥은 금북정맥이 차령고개를 넘어 곡두고개와 갈재고개 사이의 646.3m(태화산 천자봉)에서 남쪽으로 가지를 쳐 내려가며 570m봉에서 서남방향으로 법화산, 철승산 줄기를 떨구고 629번 도로인 문안달고개를 지나 국사봉(590.6m) 어깨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604번 도로인 기름재를 지나 갈미봉(515.2m)에서 다시 방향을 남쪽으로 틀어 홍길동성이 있는 무성산(613.6m)으로 이어가 영천고개를 지나 또다른 갈미봉(309.2m)에서 계속 남동진하여 대전-당진 고속도로와 공주-서천 고속도로를 지나 채죽산(170m), 부엉산을 일구고 웅진대교 아래 금강에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30.3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수계를 기준으로 하는 산으로(박흥섭)님이 저술한 대한산경표에서는 유구지맥이라 부른다.
♤ 무성지맥 개념도/ 유구읍과 정안면의 경계
♤ 무성산성 홍길동성 이야기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정안면·사곡면 일대에서 전해지고 있는 홍길동 이야기로 공주시 우성면과 정안면 그리고 사곡면의 경계에는 높은 산이 있는데, 이 산을 일러 무성산이라고 한다. 이 산의 상부에는 예전에 쌓은 석성(石城)이 남아 있다. 사람들은 이 산성을 무성산성 또는 홍길동성이라고 한다.
아주 먼 옛날로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 축성 전설의 한 유형으로 전국 각지에 분포해 있다. 아들과 딸의 힘겨루기인 이 전설의 내용은 아들의 승리로 연계된다. 아들의 불리한 상황을 어머니의 계략에 의해 역전시킨다는 것이 하나의 전형이다. 「홍길동성 전설」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다만 홍길동과 그의 누나라고 하는 구체적 인물의 설정이 다른 지역 오뉘힘겨루기 전설과 다른 점이다.
♤ 태화산(泰華山/416.9m) /삼면봉
공주시 사곡면, 신풍면, 유구읍에 걸쳐있는 산으로 정상석과 삼각점이 있으며 좌측 아래에 건달이고개가 있어서 건달봉이라고도 표기된 지도가 있었지만 공주시 유구읍장과 동해동 주민일동이 태화산이란 정상석을 세워두었다. 산중턱에 있는 상원폭포와 마곡사가 유명하다. 태화산 마곡사는 우리 근대사의 거목인 백범 김구 선생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 갈재고개(458m)
충남 공주시 북서부에 위치한 유구읍 북부에 있는 고개로 불당골에서 천안시 광덕면 광덕리를 잇는 아스팔트 도로이다.
갈재고개를 지나 헬기장이 있는 480m봉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이 광덕산 분기점이다.
♤ 광덕단맥/ 천안과 아산의 경계
금북정맥이 안성 칠장산에서 분기하여 안흥진으로 가면서 천안시 광덕면 광덕리 광덕사에서 공주시 유구읍 문금리를 넘어가는 갈재고개에서 서북으로 잠시 올라간 등고선상 480m 지점에서 한줄기를 북쪽으로 분기하여 아산시 송악면과 천안시 광덕면의 경계를 따라 장군바위(571)-서귀봉(583)-석류봉(685)-광덕산(廣德山, 699.3m)-장군바위-장고개(530m)를 지나 아산시 배방면과 송악면 광덕면의 삼면 경계지점인 등고선상 570m 지점에서 서북쪽으로 아름다운 설화산(雪華산, 430m 여맥)을 떨구고 동진하여 망경산(望京山, 601m)을 지나 623번 지방도로 넓티고개(/높티고개, 210m)로 내려서 다시 오른 태화산(太華산, 464m)에서 배방면을 동서로 나누며 서북진하여 290.7m봉-솔치고개(130m)-배방산(排芳山, 361m)-266m봉-성재(250)를 지나고 아산시 남동 돌장골 사거리(30m)를 지나 동네 한가운데로 도로를 타고 진행하여 아산시 신동 윗배턱거리 온양천이 곡교천을 만나는 샛들다리(곡교천)에서 끝이나는 약22km의 산줄기를 그 산줄기중 가장 높고 잘 알려진 광덕산의 이름을 빌려 금북정맥에서 분기하여 10km 이상 30km 미만 산줄기이므로 금북광덕단맥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신경수님 글]
♤ 광덕산(廣德山) 부용(芙蓉)의 전설
운초 김부용(金芙蓉)은 송도 황진이, 부안 이매창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여류시인/시기로 운초시집등에 350여수의 주옥같은 한시를 남기고 있으며, 김이양 대감과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평안도 성천에서 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4살때 글을 배우기 시작해 11살때 당시(唐詩)와 사서삼경에 통한 문재로 알려졌다고 한다. 11살때 부친을 여의고 그 다음해 어머니마저 잃자 어쩔 수 없이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생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운초(雲楚)라는 시명(詩名)을 가지고 시문과 가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얼굴마저 고와서 천하의 명기로 이름을 드날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나이 19살때, 시문을 통해 일찍이 김이양의 인품을 흠모해 온 부용은 평양에 머물면서 77세의 평양감사 김이양의 신변을 돌보아드리라는 소개를 받았는데, 이에 김이양이 나이가 너무 많다고 거절하자,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한다면 연세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세상에는 삼십객 노인이 있는 반면 팔십객 청춘도 있는 법입니다." 라고 말하여 거두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호조판서가 되어 한양으로 부임하게 되자 부용을 기적에서 빼내 양인의 신분으로 만들었으며 이후 정식 부실로 삼았다. 김대감이 한양으로 간 다음 오랫동안 서로 떨어져 있다가, 애절한 부용상사곡을 통해 부용을 불러다 한양 남산 중턱에 신방을 꾸렸는데, 단촐하고 소박해도 숲이 우거지고, 기화요초로 정원을 꾸려 녹천당(祿泉堂)이라 불렀으며, 이후 사람들이 부용을 초당마마 라고 불렀다.
김이양은 83세로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한 생활을 하며 부용과 다정하게 지냈으며, 둘은 나이를 떠나 서로의 시(詩)세계를 이해하면서 깊은 애정을 지니게 된다. 1844년 2월 김이양은 회방(回榜: 과거 급제 후 60년이 되는 해)에 조상들의 성묘를 위해 고향인 천안 광덕사(廣德寺) 경내에 있는 자신의 장원(莊園)에 부용을 동반하고 순행한다. 그리고 그 이듬해, 그들이 깊은 인연을 맺은지 15년이 되는 1845년 김대감은 92세의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고, 이때 부용의 나이는 겨우 33세였다. 김이양 대감을 보내고 방안에 제단을 모시고 밤낮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며 애통한 심정을 시로 달랬다.
부용은 고인과의 인연을 회상하면서 일체 외부와의 교류를 끊고, 오로지 고인의 명복만을 빌며 16년을 더 살았고, 그녀 역시 님을 보낸 녹천당에서 눈을 감았다. 그녀는 임종이 다가오자 유언으로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대감마님이 있는 천안 태화산 기슭에 묻어달라’ 했다 한다. 49년의 짧은 생애동안 그녀는 운초시집, 오강루(五江樓) 등의 문집에 한시 350여 수를 남겼다. 마치 이황과 두향의 이야기 같은 애절한 느낌이 전해온다.
매년 이곳에서 부용의 추모문학제가 열려 그녀를 기린다. 그녀가 사랑했던 김이양 대감의 묘는 위 산행지도에 표시해둔것 처럼 명부전 뒤쪽 지능선 마루에 있다. 근래 다녀간분들 사진을 보니, 후손들의 발길이 끊겼는지 관리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운초 김부용의 시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일명 보탑시로 알려진 '부용상사곡' 이다. 김대감이 부용을 부실로 삼았으나, 훗날을 기약하며 한양으로 혼자 떠나게 되었는데, 부용은 몇달을 그리움과 외로움의 나날을 보내도록 소식이 없자 피를 토하는 애절한 시를 써서 인편으로 보내는데, 이게 바로 부용이 남긴 가장 아름다운시 '부용상사곡' 이다.
(*보탑시 - 글자로 탑을 쌓듯이 지은 시)
芙蓉相思曲 (부용상사곡)
別, (별) :이별하오니
思. (사) :그립습니다
路遠 (로원) :길은 멀고
信遲 (신지) :서신은 더디옵니다
念在彼, (념재피) :생각은 님께 있으나
身留玆. (신유자) :몸은 이 곳에 머뭅니다
巾櫛有淚, (건즐유루) :비단 수건은 눈물에 젖었건만
扇環無期. (선환무기) :가까이 모실 날은 기약이 없습니다
香閣鍾鳴夜, (향각종명야) :향각서 종소리 들려 오는 이 밤
練亭月上時. (련정월상시) :연광정에서 달이 떠오르는 이 때
倚孤枕驚殘夢, (의고침경잔목) :쓸쓸한 베게에 의지했다가 잔몽에 놀라 깨어
望歸雲恨遠離. (망귀운한원리) :돌아오는 구름을 바라보니 멀리 떨어져 있음이 슬픔니다
日待佳期愁屈指, (일대가기수굴지) :만날 날 수심으로 날마다 손꼽아 기다리며
晨開情札泣支頣. (신개정찰읍지신) :새벽이면 정다운 글월 펴 들고 턱을 괴고 우옵니다
形容憔悴把鏡淚下, (형용초췌파경루하) :용모는 초췌해져 거울을 대하니 눈물 뿐이고
歌聲嗚咽對人含淚. (가성오인대인함루) :목소리도 흐느끼니 사람 기다리기가 이다지도 슬픔니다
掣銀刀斷弱腸非離事, (체은도단약장비리사) :은장도로 장을 끊어 죽는 일은 어렵지 않으나
躡株履送遠眸更多疑. (섭주리송원모경다의) :비단신 끌며 먼 하늘 바라보니 의심도 많습니다
朝遠望暮遠望郞何無心, (조원망모원망랑하무심) :어제도 안 오시고 오늘도 안 오시니 낭군님께서 어찌 그리 신의가 없습니까
昨不來今不來妾獨見欺. (작불래금불래첩독견기) :아침에도 멀리 바라보고 저녘에도 멀리 바라 보니 첩만 홀로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浿江成陸地後鞭馬騎來否, (패강성륙지후편마기래부) :대동강이 평지가 된 뒤에나 말을 몰고 오시려 합니까
長林變大河初乘船欲渡之. (장림변대하초승선욕도지) :장림이 바다로 변한 뒤 노를 저어 배를 타고 오렵니까
見時少別時多世情無人可測, (견시소별시다세정무인가측) :이별은 많고 만남은 적으니 세상사를 누가 알 수 있으며
好緣斷惡緣回天意有誰能知. (호연단악연회천의유수능지) :악연은 길고 호연은 짧으니 하늘의 뜻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一片香雲楚臺夜神女之夢在某, (일편향운초대야신녀지몽재모) :운우무산에 행적이 끊기었으니 선녀의 꿈을 어느 여자와 즐기시나요
數聲良簫秦樓月弄玉之情屬誰. (수성량소진루월롱옥지정속수) :월하봉대에 피리 소리 끊기었으니 농옥의 정을 어떤 여자와 나누고 계십니까
欲忘難忘愁依牡丹峯可惜紅顔老, (욕망난망수의모단봉가석홍안로) :잊고자해도 잊기가 어려워 억지로 부벽루에 오르니 홍안만 늙어가고
不思自思强登浮碧樓每歎緣鬢衰. (불사자사강등부벽루매탄연빈쇠) :생각치 말자해도 절로 생각나 몸을 모란봉에 의지하니 슬프도다 검은 머리 자꾸 쇠해가고
孤處霜閨腸雖欲雪三生佳約寧有變, (고처상규장수욕설삼생가약령유변) :홀로 빈 방에 누우니 눈물이 비오 듯하나 삼생의 가약이야 어찌 변할 수 있으며
獨宿空房淚從如雨百年貞心自不移. (독숙공방루종여우백년정심자불이) :혼자 잠자리에 누었으나 검은 머리 파뿌리 된들 백년 정심이야 어찌 바꿀 수 있으랴
罷春夢開竹窓迎花柳少年總是無情客, (파춘몽개죽창영화유소년총시무정객) :낮잠을 깨어 창을 열고 화류소년을 맞아들여 즐기기도 했으나 모두 정 없는 나그네 뿐이고
攬香衣推玉枕送歌舞者類莫非可憎兒. (람향의추옥침송가무자류모비가증아) :베게를 밀고 향내 나는 옷으로 춤을 춰 보았으나 모두가 가증한 사내 뿐 입니다.
時出門望出門望甚矣君子薄情豈如是, (삼시출문망출문망심군자박정기여시) :천리에 사람 기다리기 이토록 어려우니 군자의 박정은 어찌 이다지도 심하십니까
千里待人難待人難悲哉賤妾孤懷果何其. (천리대인난대인난비재천첩고회과하기) :삼시에 문을 나가 멀리 바라보니 애처로운 천첩의 심정은 과연어떠하겠습니까
惟願寬仁大丈未決意渡江舊面燭下欣相對, (유원관인대장미결의도강구면촉하흔상대) :오직 바라건데 관인하신 대장부께서 강을 건너오셔서 구연의 촛불 아래 흔연히 대해 주시고
勿使軟弱兒女子含淚歸泉哀魂月中泣相隨. (물사연약아여자함루귀천애혼월중읍상수) :연약한 아녀자가 슬픔을 머금고 황천객이 되어 외로운 혼이 달 가운데서 길이 울지 않게 해 주옵소서
광덕산 부용묘...
150년이 지난 지금, 그녀가 남긴 주옥같은 시와 사랑 이야기를 전해들은 등산객이 지나다 들려 인사를 하고, 또 해마다 묘소에서 열리는 추모문학제를 통해 김이양 대감이나 정실부인 보다도 더 나은 대접을 받고 있다.
♤ 천안 호도나무
광덕산 광덕사에는 그 유명한 천연기념물 398호 광덕사 호두나무가 있다.
광덕산 초입에 자리한 묘소인 고흥류씨(高興柳氏) 가문의 류청신이 고려 충렬왕때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묘목과 열매를 가져와서 그 묘목을 이곳 광덕사 안에 심고, 열매는 고향집에 심었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호도가 전해진 시초가 되었다고 하여 이곳을 호도나무 시배지라 부르고 있다. 천안의 유명한 호도는 이곳에서 비롯된 것이다. 호두(胡桃)란 이름의 유래는 애초 원나라에서 가져온 복숭아 처럼 생긴것 이라고 해서 원도(元桃) 라고 해야 했지만, 이곳 스님들은 원나라를 오랑캐라 불러, 오랑캐 호(胡)자를 써 호도(胡桃)로 불렀다고 전한다. 지금은 호두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아우내장터에서 만세를 불렀던 유관순 열사도 고흥류씨다. 참고로 고흥류씨는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토종 성씨인 고흥유씨가 있고, 문화류씨에서 분가한 고흥류씨가 있다.
각흘고개에서 물을 보충해야 합니다. 주유소는 깜깜하고 안에 개가 서너마리 으르렁거립니다. 주유소건물을 한바퀴 빙 돌아보니 뒤쪽에 화장실이 있네요. 코딱지 많이나 넓은 화장실에서 물을 1,700cc보충합니다. 배낭이 무거워졌는데도 힘이 납니다. 이제 앞으로 얼마든 더 갈 수 있기에~
♤ 각흘고개(角屹고개/213m)
충남 공주시 유구읍 문금리(文錦里)·탑곡리(塔谷里)와 아산시 송악면 거산리(巨山里) 사이에 위치한 고개이다. 이 고개의 아래에는 문금소류지(文錦小溜池)가 있다. 지명은 매우 다양하게 불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가문현(加文峴)으로 불렸다. 이에 대한 기록으로 "가문현(加文峴)은 북쪽 84리에 있다. 온양(溫陽)과 경계이다."와 "동천(銅川)은 서쪽 20리에 있다. 가문현(加文峴)에서 발원하여 남으로 흘러 웅진(熊津)의 하류로 들어간다."라는 관련 기사가 있다. 『대동지지』에는 각흘치(角屹峙)로, 『공주승람』에는 가문현(加文峴)과 각클고개로, 『동국여지지』에는 각흘현(角屹峴)으로 표기되어 있다. 가큰고개로도 불렸다고 한다.
지명은 소가 누워 있는 와우(臥牛) 형상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하며, 금계산과 봉수산 사이에 있는 고개라 하여 금계령이라고도 한다. 각흘고개는 유구 땅 금계산과 봉수산 사이 온양으로 가는 길에 있다. 고개가 구불구불하고 험준하여 예로부터 외적에 대항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이 고개는 북쪽에서 쳐들어오는 역적이나 오랑캐들에게 죽음을 몰아다 주는 일을 한다는 전설이 있다.
♤ 각흘고개 전설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대중리에 전해지는 「돌고개전설」과 같이 남녀간의 애절한 사랑의 원한이 깃든 이야기이다. 1992년 공주시·공주문화원에서 간행한 『공주의 맥』과 1997년 공주대학교 지역개발연구소·공주시에서 간행한 『공주지명지』에 실려 있다. 고려 말엽,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이었다. 이 산중에서 숯을 구우며 살아가던 삼덕이가 잠자리에 들려던 차에 어디선가 들리는 여자의 비명 소리에 놀라 밖으로 뛰쳐나왔다. 몽둥이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여자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가보니 한 여자가 두 남자에게 포박당하고 있었다. 삼덕은 몽둥이를 휘둘러 포박하고 있는 두 남자를 죽였다. 방으로 데리고 들어온 여인은 자신이 이성계에 대항한 역적의 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방금 삼덕이가 죽인 두 남자는 포졸이라고 하였다. 그 소리를 듣고 놀란 삼덕은 포졸을 산에 묻고 여인은 산 속의 굴에 숨겨 놓았다. 며칠 후 또 다른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포졸은 삼덕에게 “도망가는 색시를 보지 못했느냐?”고 하였다. 그는 태연하게 “색시를 보았는데 남쪽으로 내려갔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며칠 뒤에 남쪽으로 내려갔던 포졸들이 다리를 절며 뒤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어느덧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삼덕은 여인을 굴에서 데리고 나와 집에 머물게 하였다. 세월이 가면서 두 사람은 친한 사이가 되었다. 여인은 삼덕을 따라 숯가마에 가고 그 곳에서 잠을 자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여인의 거처가 알려졌는지 포졸들이 삼덕의 집 주변에 매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숯을 구워 내려오는 여인을 발견하고는 포박하려 하였다. 삼덕은 짊어진 숯을 팽개치고 포졸들에게 달려들었다. 작대기로 저항하려 하였지만 결국 포졸의 창에 찔리고 말았다. 이를 본 여인이 쓰러진 삼덕에게로 다가가며, “여보, 여보!” 라고 외쳤다. 그리고는 포졸들에게 달려들었다. 포졸은 여인도 칼로 베어 죽였다. 이처럼 두 사람은 이 고개에서 숨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이렇게 죽은 두 사람이 이 고개를 지키는 혼령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고개를 지키는 문지기로 둔갑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북쪽에서 쳐들어오는 오랑캐를 죽음의 길로 몰아가는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이정표가 있던데 귀찮아서 그냥 지나갑니다.
♤ 구만봉(392m)
아산시 송악면 구만리에 있는 무명봉으로 높이가 392m인데, 산아래 마을이 아산시 송악면 구만리라고 해서 구만봉이라 부른다.
♤ 탑산리고개
충남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와 공주시 유구읍 탑곡리 조포골 사이의 고개이다. 방산리(方山里)는 천방산 밑이 되므로 방산리라 이름하였다.
누가 봉수산까지 100m라고 사기를... 어림짐작으로 300m는 되어보였습니다.
정상도 시원하니 넓게 생겼고 정상석도 두툼합니다.
♤ 봉수산(鳳首山/535m) / 삼군봉
충남 예산군 대술면, 아산시 송악면, 공주시 유구읍의 3개 시군에 걸쳐 있다. 이 산은 남북으로 날개를 펼친 채 동쪽에 있는 광덕산(699.3m)을 향해 날아가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북쪽에 있는 봉곡사 방향이 봉황의 왼쪽 날개에 해당되며, 남쪽의 천방산(478.9m) 능선이 우측 날개에 해당되며, 대술면 상항리 갈막고개가 봉황의 꼬리에 해당한다. 봉수산 정상은 봉황의 머리가 된다. 산의 규모가 작고 등산로가 뚜렷한 육산으로 비교적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봉수산 산기슭에는 887년(진성여왕 1)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봉곡사(鳳谷寺)가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47년(인조 24)에 중창하였다.
산악오토바이가 다니지 못하도록 예산군에서 바리케이트를 만들었습니다.
천방산 오름도 정상부 경사가 엄청납니다. 기를 쓰고 몇번을 쉬면서 올랐습니다. 170m 다녀옵니다.
♤ 천방산(天方山/ 千方山/478.9m)
충남 공주시 최북단에 있는 산으로 공주시의 유구읍 탑곡리와 예산군의 동부 대술면 방산리의 경계에 있다. 탑곡리는 남쪽을 보고 오목하게 터진 유구천의 발원지다. 옛날 천방사(千方寺)라는 절이 있어 유래한 지명이라고 전한다. 하늘을 찌를듯이 높이 솟아 천지사방을 볼 수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여지도서』(예산)에 "천방암(千房菴)이 관아의 동쪽 25리에 있다. 5칸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지지자료』(예산)에 천방산이 방산리(方山里)에 있다는 내용이 보이는데 '천방산(千房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지형도』(대흥)에서는 예산읍치 동쪽에 천방산(千方山)이 확인된다. 방산저수지, 방산리 등에서 그 지명을 엿볼 수 있다. 화강편마암·주입편마암·안구상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의 봉수산과 능선을 함께 하며, 남쪽에 극정봉과 명우산이 있다. 동쪽으로 유구천이 흐르고, 서쪽에 예산군에 속한 방산저수지가 있다. 산 동쪽에 있는 탑곡리 앞으로 39번국도가 남북 방향으로 지나가며, 북쪽의 각흘고개를 통하여 아산시의 송악면 거산리와 연결된다.
트랭글 뺏지가 띠리링~ 부엉산 정상석도 없고 천방산 1-몇 이런 지점표시만 있습니다.
부엉 부엉새가 우는밤, 부엉 춥다고서 우는밤, 우리들은 할머니 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옛날 이야기를 듣지요. 괜히 동요가 흥얼거려집니다.
♤ 부엉산(400m)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덕곡리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400m이다.
산골 평화로운 마을을 바라보며 지납니다.
♤ 오지재
예산군 대술면 이치리 소거리마을과 공주시 유구읍 덕곡리 머그네미 마을간을 잇는 고개이다. 머그네미는 오동나무가 많은 골짜기라 하여 유래된 지명이며, 과거에는 오동나무를 머그나무라 했다.
♤ 극정봉(極頂峰/걱정봉/424m)
극정봉은 충남 공주시 유구읍 덕곡리마을 서쪽에 있는 봉우리이다. 북쪽으로 천방산·봉수산과, 남쪽으로는 설대봉·차령고개와 연결되어 예산군 대술면과 공주시 유구읍의 경계를 이룬다.
동쪽 계곡에서 흐르는 하천들은 유구천으로, 서쪽 계곡에서 흐르는 하천들은 화산천으로 유입된다. 한편, 이 봉우리의 명칭은 홍길동의 설화와 관련이 있다. 옛날 홍길동이 이 부근에서 무술을 익힐 때 해발 575m의 금계산에서 활을 쏘고 화살이 빠른지 자신의 애마(愛馬)가 빠른지 시험을 하였다. 홍길동은 빨리 말을 달려 서쪽에 있는 두루봉에서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찾았으나 앞산 봉우리에 와서도 화살이 보이지 않자 걱정을 하였는데, 여기서 걱정봉이라는 명칭이 생겼고, 걱정봉이 극정봉으로 변하였다는 것이다. 이밖에 홍길동이 쇠로 만든 신을 신고 소를 몰고 한양을 다녀오는 동안에 그 누이는 금계산에 산성을 쌓는 내기를 하였는데, 누이가 산성을 다 쌓아가는데도 홍길동이 돌아오지 않아 어머니가 이 봉우리에 올라 걱정을 하였다고 하여 걱정봉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 사기장골
사기장골(沙器장골)은 조선시대 선조 때부터 이곳에서 백자를 구웠다는 사기소가 있었던 곳인데 구전에 의하면 깊은 골짜기 중앙으로 물줄기가 흐르는 냇물이 있었다. 도공은 가마에 불을 넣을 때마다 이 냇물에서 목욕을 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불을 가마에 지폈으며 소음이 없는 곳에서 조용히 기도를 하며 그릇을 구웠다고 전해 내려온다.
누군가 표지판에 매직으로 명우산이라 써놓았습니다.
♤ 명우산(鳴牛山/368m) /삼면봉
충남 공주시 유구읍 명곡리와 예산군 신양면 시왕리, 대술면 이티리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명우산이라는 명칭은 산의 형상이 소가 우는것 같은 형국이어서 유래되었다. 남쪽으로 절대봉과 국사봉, 북쪽으로 극정봉과 이어진다. 동쪽으로는 유구천이 흐르며, 이 하천을 따라 39번 국도가 지나간다. 이 산의 동쪽에 명곡리가 있는데, 산지로 둘러싸인 좁은 충적지에서 일부 논농사가 이루어진다.
♤ 배실마을
배실마을의 전설에 따르면 마을이 배(船)를 닮았다 해서 배실이라 부르는데 배가 바다를 항해하여 7년이 걸리는데 배에 물건을 싣고 육지에 닿아서 짐을 푸는 데에도 7년이 걸리는 그런 배(船) 형이라 한다. 배가 그만치 크다는 설인데 여기 사는 사람들은 이 마을에서 7년을 살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만 한다고 한다. 원인인즉 7年을 더 눌러 살면 배가 바다에서 항해할 때 폭풍우를 만나듯이 그렇게 어려움이 닥치는데 7년을 더 살다가 큰 재앙을 만나서 집안이 망했다고 하는 전설이 있는 마을이다.
절대봉 정상부가 저렇게 텅 비어 있네요. 천연굴이라는데 깊이는 8m정도 되어보였습니다.
♤ 절대봉(353m)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시왕리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353m이다.
♤ 불운리 고개
예산군 신앙면 시왕리 윗불운리와 명곡리 배실마을, 조산소 마을, 큰말마을을 잇는 고개이다.
♤ 서재(238m)
공주시 유구읍 명곡리 시앙골과 예산군 신양면 하천리 서재골을 잇는 고개이다.
♤ 불모골 고개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하천리 불모골과 유구읍 명곡리 잔대골을 잇는 고개이다.
♤ 서낭당고개
여기도 마찬가지 예산군 신양면 차동리 불모골에서 유구읍 명곡리 명곡저수지 잔대골로 넘나드는 고갭니다. 서낭당 터나 돌탑이나 커다란 당산나무나 아무런 서낭당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차동고개 도착하여 건물을 요리저리 살펴보니 부엌 같은 공간에 수도시설이 있습니다. 물론 물은 겨울이니 잠겨있었고요. 물은 각흘고개에서 1,700cc를 보충했는데 500cc 마셨습니다. 나머지는 괜히 무겁게 지고 왔네요. 최소 분골마을까지라도 갔으면 싶었는데 길이 어떤지도 모르고 속도도 안나고 거기 교통편도 안좋고 이른 시간이지만 여기서 끊기로 합니다. 스틱을 접고 히치라도 해볼까 하는데 마침 버스가 막 달려옵니다. 고맙게도 예산에서 유구가는 버스가 딱 걸려들었습니다.^^
♤ 차동고개(車洞고개/차령고개/215m)
충청남도 공주시의 유구읍 녹천리(鹿川里)와 예산군 신양면 차동리(車洞里)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남금강(南錦江)의 지류인 유구천(維鳩川)과 북서류하는 무한천(無限川)이 이곳에서 발원하며, 두 하천의 분수령이 된다.
고개의 남서쪽 녹천리(鹿川里)에는 상장천, 하장천 등의 마을이 있고, 동쪽 차동리에는 대촌, 송정, 불모골 등의 마을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차유현(車踰峴)은 서쪽 35리에 있다."라는 기사가 있어 당시 지명을 보여준다. 『대동지지』와 『대동여지도』에서는 차유령(車踰嶺)으로 수록되어 있다. 지명은 옛날 불왕골에 살던 효성이 지극한 차서방이 병든 어머님의 약값을 구하기 위해 산에서 나무를 하다 자던 중 꿈속에 하얀 할아버지가 나타나 "네가 지금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열 걸음을 가면 산삼이 있을 것이다. 산삼을 달여 어머님께 드리면 나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차서방은 꿈속 할아버지가 계시한 산삼을 캐서 늙고 병든 어머님께 달여 드려 병을 낫게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오른쪽 아래 뾰족한 부분이 국사봉이고 왼쪽 위 뾰족한 부분이 봉수산입니다.
이 구간 그다지 산이 높지는 않지만 경사도가 아주 심한 봉우리가 5~6개 되다보니 힘든 코스입니다.
호서정맥 다섯구간으로 할려던 계획을 여섯구간으로 변경합니다. 다음에는 스틱으로 세우는 여름용 그늘막을 개조한 A텐트와 침낭커버를 준비하여 새벽시간대 서너 시간이라도 수면을 취할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올겨울 이상하리만치 소한도 대한도 큰 추위없이 지나고 이제 설명절 지나면 봄기온이 올라올것 같습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이번 진행하신 구간은 고개(고등,차령,각흘,차동)며 봉 오르내림을 자주 만났던 기억이 납니다.
전 봄 무렵이었는데 어느 산님이 건네주던 막걸리 맛에 빠져들던 추억입니다.
예년과 달리 포근한 날씨로 산행에는 적기인 듯 합니다. 한북쪽과 달리 이곳에는 눈도 없네요.~
주야없이 박배낭메고 질주하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네! 방장님 설명절 지나면 봄기운이 완연할듯 싶습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요~^^
여름에 사용하는 그늘막으로 A텐트 특별제작에 들어갔습니다. 스틱으로 세우는 간편하고 경량의 텐트입니다. 안에서 침낭커버로만 견뎌볼려는데 올겨울과 봄,가을은 충분할듯 합니다.^^
대다나신 풍라라님 고생많으셧구요
새해복마니받으세요
감사합니다. 산조아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요.^^
공주에 정맥이 아래위로 두개나 통과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더 알아가는 재미가 있네요.^^
산길 200리를 거침없이 달리셨군요 장거리를 시속 3km의 속도를 유지하셨으니 대단한 체력이구요
담구간 비박 산행담도 기대되네요
수고많으셨고 퐁라라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happy마당쇠님!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요~^^
자꾸 해보니 70km는 거뜬하고 무릎도 점점 적응되는 느낌입니다.
다음엔 심야시간대 2~3시간 쉬어가도 일정은 소화가 가능해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70km가 넘는 거리를 걸으셨군요.
우리는 덕고개에서 철길을 무단횡단을 했었습니다.
뙤약볕에 도로길을 걸을 수가 없어서 버스를타고 갔드랫지요.ㅎㅎ
대단히 수고 많으셨습니다.
넵, 부뜰이운장님!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요~^^
함박골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건널목으로 건넜습니다.
반대편 전의역쪽에서는 지하도를 통과하는가 봅니다.
저도 양곡교 가는길에 히치를 계속 시도하며 걸어가다 다섯번째 성공하였습니다.^^
스크롤 압박이 대단합니다.
자세한 산행기 쓰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한구간 완성도 축하드립니다.
맛점 하세요^^
넵 감사합니다. 무영객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요~^^
산행기는 취합해둔 것이기에 필요한 부분만 보시면 됩니다.^^
이곳을 지날때 바이크 자국에
이리저리 옮기며 불편하게
걷던 생각이 나네요..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쭉쭉
나가시는 퐁라라님 응원합니다. ^^
네~ 너무 깊게 파여있더군요. 이쪽 저쪽으로 건너며 올랐습니다.
다류님도 새해 건강하시고 올 한해 더 많은 성취 이루시기 바랍니다.^^
갠적으로 고향친구가 산악오토바이 챔프인데요. 막 날러다녀요. 년중 절반은 정형외과에 누워있고요.^^
전용 경기장이 필요합니다.
장거리 박산행에 자세한 산행기까지 대단하십니다 항상 안산 즐산하세요 화이팅입니다 ~~~
네 세르파님~^^
슬관절 뚜껑이 열리지 않도록 단디 동여 매고 잡생각을 떨치고 한걸음이라도 더 뗄 수 있도록 마음을 모으며 가고 있습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건강하게 큰걸음 내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