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환자에게 손목쓰지 말라고? 밥해야 하는데?"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10328135807
돌이켜 보면 기자에게도 감기약 몇 알 삼키기가 버거운 어린 시절이 있었다. 성인용 알약이 너무 커서 쓰디쓴 약이 물에 녹아 작아질 때까지 몇 번이고 억지로 넘기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성인약에 비해 어린이약 개발이 덜 활성화됐다는 이야기는 어른이 돼서야 들었다.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의약품 연구는 주로 서구에서 이뤄져 왔지만, 백인에게 필요한 적정량과 동양인에게 필요한 적정량은 다르다고 한다. 또한 우리가 흔히 안전하다고 믿는 의약품은 임산부에게는 안전성이 확인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의약품 연구가 '특정 나이대에 속한 성인, 백인, 남성'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사례들이다.
의학이 '특정한 기준에 속한 사람들' 중심적으로만 이뤄지지 않도록 대안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여성주의적인 관점으로 진료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직접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살림의료생활협동조합'의 시작이다. 서울 은평구에서 살림의료생협설립을 추진하는 유여원 씨를 만났다. <편집자>
사례 1. 산부인과나 항문외과에 가야 할 때, 자궁경부암이나 유방암 검진을 받아야 할 때 여성들은 여의사를 찾는다. 진료를 받기에도 덜 부담스럽고, 여의사는 왠지 자기 몸을 잘 이해해줄 것 같기 때문. 하지만 모든 여의사가 기대한 것처럼 만족할 만한 진료를 제공해 주지는 않는다.
사례 2. 네 살 난 아이를 둔 A씨. 요즘 병원에서 항생제를 오남용한다는 소식을 듣고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항생제 처방은 어릴수록 신중해야 한다던데, 어린이에게 꼭 맞게 적정 진료를 하는 믿을 만한 병원 없을까.
여성주의적인 의료란?
서울 은평구에서 살림의료생활협동조합 설립을 준비하는 유여원 씨는 이러한 고민에 대한 해답을 '여성주의 의료'에서 찾았다. 유 씨에 따르면 현대 의학은 과학이지만 '객관적'이지 않다. 남녀가 다 걸리는 질병에 대해서도 '건장한 성인 남성'의 신체나 삶을 중심으로 연구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여성주의 의료의 철학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그 개인의 특성에 가장 맞는 진료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어린이가 감당할 수 없는 특정한 약을 '어른 기준'에 맞춰 과다 투여해서는 안 된다. 노인, 여성, 장애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유 씨는 여기에 덧붙여 "가난하거나 성정체성이 다르거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진료 과정에서 사회적 편견에 노출되지 않도록 대응하는 것이 여성주의 의료"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이런 거죠. 의사는 환자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특정한 약을 복용하는 동안 금연해야 한다는 정보를 안 줄 때가 있어요. 여성은 당연히 담배를 안 피울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의료인 입장에서 당연히 주어져야 할 정보가 여성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주어지지 않는다면 안 되죠. 성별이나 성정체성에 따른 편견이 없어야 합니다.
또 다른 예도 있어요. 집 안에서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여성 환자에게 의사가 '손목 쓰지 마라니까 왜 손목 쓰셨어요?'라고 질타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 사람은 집에서 밥해야 하는데, (의사가 그렇게 대응하면) 답이 없죠. 여성의 입장에서 생각해서 진료도 하고 돌봄도 이뤄졌으면 해요."
건강 공동체에 대한 구상이 여성주의 의료생협으로
여성주의적인 의료를 지향하는 살림의료생협은 처음에는 건강 공동체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됐다. 대학에서 여성주의 운동을 했고, 여성단체인 언니네트워크에서 일했던 유여원 씨는 "여성주의자로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고민이었다. 그러다 유 씨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부장적인 가정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지 않되, 개개인이 뿔뿔이 흩어져 진공 상태에서 살지 않는 삶"에 대한 지향이 모였다. 이들은 그 실마리를 '건강 공동체'에서 찾았다. 아플 때 서로를 돌봐줄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자는 것이 핵심이었다.
여기에 '여성주의 의사 모임'이 합류하면서 '건강 공동체'에 대한 구상은 '여성주의 병원'의 형태로 구체화했다. 새로운 고민도 생겼다. "여성주의자인 의사가 진료하고 여성주의자들이 환자로 오면 여성주의 병원인가"라는 의문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의료생협을 알게 됐다. 유 씨는 "생협은 협동적이고 민주적으로 운영된다는 측면에서 소유구조나 운영방식이 여성주의적이라고 느꼈다"며 "우리가 여성주의 병원을 만든다면 의료생협 형태여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의료생협은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조합원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나의 욕구가 반영되는 병원'에 '내 건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나의 주치의'가 생기는 셈이다.
2009년 여성주의 의료생협 준비모임이 시작됐다. 은평구에 사무실을 마련했고, 2년이 넘는 준비 끝에 조합원 140여 명을 모았다. 조합원의 절반은 은평구 주민이었다. 여성주의에 관심이 있는 사람도 대거 조합원에 가입했다. 유 씨는 "우리는 은평이라는 지역과 여성주의 지역, 이렇게 두 가지 정체성이 공존하는 의료생협"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