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리랑카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스리랑카 개황, 2010.5, 외교부)
1. 스리랑카의 고대와 중세 역사
스리랑카에는 선사 시대부터 베다족이 거주하였다. 그러나 BC 6세기경 인도 북부에서 인도-아리안족이 스리랑카로 건너와 토착원주민 베다족을 정복하고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 왕조를 건립하였다. BC 248년 인도 아소카왕의 아들 마힌다(Mahinda) 왕자가 승려 4명을 이끌고 스리랑카로 왔다. 그들은 데바남피야티사(Devanampiyatissa) 왕에게 불교를 전파하였다. BC 2세기경 인도 남부에서 타밀족이 스리랑카를 침입하였다.
중세에 들어서 인도-아리아족의 후예인 싱할라족과 타밀족간의 대립이 더욱 심해졌다. 5세기~6세기 인도 남부 지방의 타밀족은 싱할라 왕족의 내분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끊임없이 싱할라 왕족을 침입하면서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스리랑카 북부지역에 타밀왕국을 세웠다. 북부지역에 자리잡은 타밀족은 힌두교를 믿으며 싱할라족과는 전혀 다른 문화와 관습을 유지하였다.
스리랑카는 1505년부터 약 440년 동안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으로부터 차례로 식민통치를 받았다. 1505년~1658년 스리랑카를 식민 통치한 포르투갈은 스리랑카 서부해안지방에 나타나 스리랑카를 무단통치하였다. 그러나 스리랑카인들에게 가톨릭 개종을 장려하고 유럽의 물질문명을 전파함으로써 스리랑카에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1658년~1796년 스리랑카를 식민 통치한 네덜란드는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중앙의 캔디왕국을 제외하고 해안지방을 거의 점령하였다. 통치의 주목적이 향료무역을 독점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포르투갈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온건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버거족(Burgher)은 네덜란드인 후예로서 운하·관계시설 정비에 종사하였다.
1796년~1948년 스리랑카를 식민 통치한 영국은 1815년 스리랑카의 최후 왕조인 캔디왕국을 멸망시키고 스리랑카 전 국토를 완전히 식민지화하였다. 식민통치에 싱할라족과 타밀족을 모두 참여시켰으나 타밀족을 우대하였다. 1860년대부터 커피재배가 시작되면서 영국의 지배를 받는 인도에서 다수의 인도계 타밀족(Indian Tamil) 노동자들이 스리랑카로 이주하였다. 영국은 1880년 커피나무 전염병이 퍼지자 커피재배를 차 재배로 전환하였다.
타밀족은 실론계 타밀족(Ceylon Tamil)1)과 인도계 타밀족(Indian Tamil)으로 크게 나뉜다. 실론계 타밀족은 독립국가(Eelam) 건설을 위하여 스리랑카 정부군과 무장 투쟁해 왔으며 힌두교를 신봉한다. 인도계 타밀족은 영국의 식민통치 하에서 스리랑카로 이주하여 플랜테이션(Plantation) 노동에 종사해 왔으며 성향이 온건하다.
이후 차, 코코넛, 고무 3대 농작물은 스리랑카 식민지 경제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스리랑카는 신경제제도의 채택과 영어 공용어화 교육을 비롯한 서구 문화의 영향으로, 19세기 전반 스리랑카 전통이 매우 약화되었다. 그러나 스리랑카인들 사이에서 자국의 고유문화에 대한 인식과 민족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서구 민주주의 발전과 인도의 독립운동의 자극으로 민족자결에 대한 요구와 독립을 위한 열망이 스리랑카인들 마음 속에서 높아졌다.
3. 스리랑카의 독립 이후
1) 세일론
스리랑카는 1948년 2월 4일 영국연방 내 자치국인 세일론(Ceylon)으로 출범하였다. 세일론은 영국 국왕을 국가원수로 하고 현지인 총독을 두어 국가원수의 권한을 대행하면서, 내각의 수반인 수상이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영국식 내각책임제를 채택하였으며 국가지속기간은 1948년 2월 ~ 1972년 5월이다.
스리랑카는 독립 후 돈 스티븐 세나나야케(Don Stephen Senanayake) 초대수상이 이끄는 통일국민당(UNP)1)의 보수정부가 집권하여 친서방 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1956년 4월 총선에서는 인민통일전선(후에 자유당으로 통합)이 1960년 7월 총선에서는 스리랑카 자유당(SLFP)2)이 집권하였다. 스리랑카 자유당은 기본적으로 진보적 보수 세력이었으나 점차 좌경화되었다. 1959년 9월 25일 솔로몬 웨스트 리지웨이 지아스 반다라나이케(Solomon West Ridgeway Dias Bandaranaike) 수상이 암살당한 후 미망인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Sirimavo Bandaranaike) 여사가 스리랑카 자유당의 당수로서 정권을 잡았다.
스리랑카는 1962년 "세일론화 정책"이라는 일련의 국유화 조치를 통하여 미국과 영국계 석유회사를 접수하고, 유력지 ANC 그룹(Associated Newspaper of Ceylon Ltd)을 강제로 국영화하였다. 그 결과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감이 높아졌다. 1965년 3월 총선에서 통일국민당(UNP)이 승리함으로써, 더들리 세나나야케(Dudley Senanayake) 정권이 재출범하였다. 통일국민당은 스리랑카 자유당(SLFP) 정부가 개척한 공산제국의 원조를 받아들였다. 또한 미국과 영국계 석유3사에 포상금을 지불하여 두 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하였다.
1970년 5월 총선에서 스리랑카 자유당(SLFP), 평등사회당(LSSP)3), 스리랑카 공산당(CPSL)4)의 야당통일전선이 승리함으로써,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여사를 수반으로 하는 3당의 연립정부가 출범하였다. 연립정부는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고 동독, 월맹, 북한을 승인하여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비롯하여 좌경사회주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1971년 3월 극좌 청년단체 인민해방전선(JVP)5)이 정부 전복기도 사건을 일으켰다. 이에 1971년 3월 16일 스리랑카 정부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반란을 진압하였다. 1972년 5월 20일 스리랑카는 신헌법을 공포하고 영국연방자치국에서 새로운 독립공화국으로 출범하였다. 국명도 스리랑카 공화국(Republic of Sri Lanka)으로 바꾸었다.
2) 스리랑카 공화국
스리랑카는 스리랑카 공화국(Republic of Sri Lanka)으로 출범하면서 총독제를 폐지하였으나 연영방 회원국 자격은 유지하였다. 스리랑카 공화국의 국가지속기간은 1972년 5월 ~ 1978년 9월이다. 스리랑카 공화국은 제5차 비동맹 정상회의를 콜롬보(Colombo)로 유치하고, 1976년 8월부터 9월까지 의장국으로 활동하며 대외적인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국내적으로 1971년 3월부터 1977년 2월까지 지속된 장기간의 국가비상사태와 사회주의 경제정책 수행으로 국민들의 지지기반이 약화되었다. 1977년 7월 총선에서 통일국민당(UNP)은 득표율 51%를 획득함으로써, 총의석 168석 중 140석을 차지하였다.
스리랑카 자유당(SLFP)은 득표율 30%를 획득하였으나 8석을 차지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타밀 통일해방전선(TULF)1)은 득표율 7%를 획득하였으나 16석을 확보하여 제1야당이 되었다. 통일국민당의 자예와르데네(Jayewardene) 당수가 수상으로 취임하였다. 자예와르데네 수상은 싱가포르를 경제 기적의 표본으로 삼아 스리랑카를 남아시아의 금융 중심지로 변모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친서방 비동맹 정책과 경제개발정책 수행에 역점을 두었다. 스리랑카는 1977년 10월 헌법을 개정하고, 정부 형태를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 중심제로 바꾸었다. 1978년 2월 자예와르데네 수상은 신헌법에 따라 스리랑카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스리랑카는 1979년 9월 7일 대통령 중심제의 신헌법을 공포하고, 국명은 스리랑카 민주사회주의 공화국(Democratic Socialist Republic of Sri Lanka)으로 바꾸었으며 1979년 9월부터 2012년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스리랑카 자예와르데네(Jayewardene) 대통령은 스리랑카 자유당(SLFP)1)의 사회주의 경제정책에서 벗어나 획기적인 친서방·자유개방적 경제정책으로 전환하고 외자도입을 확대하였다.
또한 외국인 직접투자나 합작투자를 장려하고, 투자촉진지대를 설치하고, 마하웰리(Mahaweli) 강유역 종합개발사업을 시행하였다. 그 결과 스리랑카는 연간 5%~9%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야당과 좌경 반정부 단체는 이러한 개방정책이 인플레이션을 촉진하여 국민들의 생활조건 악화를 이유로 파업을 선동하고 통일국민당(UNP)2) 정부에 도전하였다.
1982년 10월 20일 실시된 조기 대통령 선거에서 자예와르데네 대통령이 재선하였다. 1977년 7월에 구성된 국회의원들의 임기는 1983년 8월에 종료되었다. 그러나 1983년 12월 12일 실시된 국민투표에 따라 이 국회의원들의 임기를 1983년 8월부터 1989년 9월까지 6년 연장하는 헌법 개정안이 확정되었다. 1987년 7월 29일 자예와르데네 대통령은 타밀인종분규 종식을 위하여 라지브 간디(Rajiv Gandhi) 인도수상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1988년 1월 지방의회(Provincial Council) 선거법안이 의회를 통과됨에 따라 그 해 4월 28일 노스센트럴(North-Centra), 우바(Uva), 노스웨스턴(North-Western), 사바라가무와(Sabaragamuwa) 4개 주에서 지방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1988년 12월 19일 자예와르데네 대통령의 임기가 끝남에 따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개표 결과, 집권당인 통일국민당의 프레마다사(Premadasa) 수상이 257만 표를 획득하여 지지율 50.4%로 임기 6년의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89년 1월 2일 프레마다사(Premadasa)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프레마다사 대통령은 반정부단체들의 사회전복 활동으로 피폐해진 국가경제를 재건하고 사회불안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노력하였다. 1989년 2월 15일 총선에서 집권당인 통일국민당(UNP)은 총 225석 중 125석을 확보하여 지지율 55.5%를 획득함으로써 승리하였다.
1991년 5월 전국 규모로 실시된 지방의회 선거에서 여당인 통일국민당은 안정의석을 확보하였다. 프레마다사 대통령은 빈민규제(Janasaviya) 운동, 촌락재각성(Gamudawa) 운동, 이동행정(Mobile Service), 외국인 투자유치, 수출위주의 신산업전략(New Industrialization Strategy) 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스리랑카는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LTTE)3)와의 내전과 각종 테러 사건에도 불구하고 1990년부터 외국인투자 증가, 관광객 증가, 신산업화 전략 덕분에 경제가 5% 내외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2000년 신흥공업국가(NICS)4) 진입을 목표로 경제발전을 추진하였다.
1993년 5월 1일 프레마다사 대통령은 노동절 행사 진행 중에 타밀일람 해방 호랑이 자살특공대로 추정되는 청년에게 암살당했다. 프레마다사(Premadasa) 대통령 암살 후, 5월 7일 위제퉁가(Wijetunga)가 대통령을 승계 받았다. 1993년 5월 17일 북부-동부 주를 제외한 7개 주에서 실시된 지방의회 선거 결과, 통일국민당(UNP)은 의회의 총 380석 중 187석을 확보하였다. 이로써 통일국민당은 국민들로부터 전반적인 지지를 획득하였다. 스리랑카 자유당(SLFP)을 중심으로 한 야당 연합인 인민연합(PA)5)은 135석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위제퉁가 대통령의 약한 정치적 기반과 부족한 리더십 때문에 통일국민당의 내부 분열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1994년 8월 16일 총선에서 인민연합(PA)은 국회의석 105석을 획득하여 94석에 그친 통일국민당(UNP)을 누르고 승리하였다. 그러나 단독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통일국민당의 패배 요인으로는 리더십 부족, 경제발전 정책에 따른 빈부격차 심화, 집권층의 부정부패, 장기집권에 대한 젊은 층의 불만이 거론되었다. 인민연합은 스리랑카 이슬람회의(SLMC)6) 7석과 무소속 1석과 제휴하여 과반수 113석을 확보하여 내각을 구성하였다.
1994년 8월 19일 스리랑카 자유당(SLFP)의 찬드리카 반다라나이케 쿠마라퉁가(Chandrika Bandaranaike Kumaratunga)7)가 수상으로 취임하였다. 이로써 통일국민당(UNP)의 17년 장기 집권이 깨지고 정권이 교체되어 인민연합(PA) 정부가 출범하였다. 1994년 11월 9일 대통령 선거에서 인민연합 후보인 쿠마라퉁가 수상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1월 12일 취임하였다. 1997년 3월 21일 지방선거에서도 인민연합이 지방의회의 80%를 장악하면서 압승하였다. 1999년 1월 북서부지역의 5개 주 지방의회 선거, 1999년 4월 5개 주 지방의회 선거, 1999년 6월 남부 지방의회 선거에서 모두 인민연합이 압승하였다. 1999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인민연합의 쿠마라퉁가 대통령이 약 51%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하였다. 야당 대표인 통일국민당(UNP)의 라닐 위크레메싱게(Ranil Wickremesinghe)는 43% 득표로 2위를 차지하였다.
2000년 10월 실시된 11대 총선에서 집권여당인 인민연합(PA)은 제1당으로 재집권하는 데 성공하였다. 인민연합은 소수계 정당인 일람민족자유당(EPDP)8), 국민통일연합(NUA)9)과 연립하였다. 그러나 2001년 6월 스리랑카 이슬람회의(SLMC)가 연립정부를 탈퇴함으로써 인민연합은 소수당으로 전락하였다. 2001년 12월 12일 총선에서 통일국민당(UNP)이 대승을 거둠으로써 7년 만에 정권이 교체되었다. 이로써 스리랑카는 인민연합의 쿠마라퉁가 대통령과 통일국민당의 위크레메싱게 수상의 내각이 공존하는 동거(cohabitation) 정부 시대가 시작되었다. 통일국민당은 스리랑카 이슬람회의와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통일국민전선(UNF)10)으로 출범하였다.
2003년 11월 4일 쿠마라퉁가 대통령은 통일국민당(UNP) 내각이 타밀일람 해방 호랑이(LTTE)측에 지나치게 양보하여 안보상황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국방, 내무, 공보 3개의 안보장관직을 접수하고 2004년 2월 7일 국회를 해산하였다. 2004년 4월 2일 실시된 총선에서 쿠마라퉁가 대통령의 통일인민자유연합(UPFA)11)은 의회의 총 225석 중 105석을 확보하여 제1야당이 됨으로써 정부를 구성하고 통일인민자유연합 정부를 출범하였다. 총선 시 인민연합은 정당 인민해방전선(JVP)12)과 연합하여 통일인민자유연합을 형성하였다.
2005년 11월 17일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통일인민자유연합(UPFA) 후보인 마힌다 라자팍사(Mahinda Rajapaksa) 수상은 11월 19일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대선 당시 라자팍사 후보는 인민해방전선(JVP)과 불교승려정치조직(JHU)13)과 연합을 형성하였다.
2009년 5월 19일 스리랑카 정부는 타밀일람 해방 호랑이(LTTE)와의 내전에서 정부군의 승리와 전쟁의 종식을 선언하였다. 2010년 1월 26일 라자팍사 대통령은 재선한 뒤, 2월 9일 국회를 해산하였다. 2010년 4월 8일 총선에서 라자팍사 대통령이 이끄는 여당 통일인민자유연합(UPFA)이 225석 중 144석을 획득하여 압승하였다. 2010년 4월 22일 제7대 국회가 개원하였다.
1. 스리랑카의 1948년~1985년 주요사건
구분 | 주요사건 |
---|---|
1948년 | 2월 4일 영국으로부터 독립 |
1956년 | 싱할라어 공용어 법안 통과 |
4월 총선 결과 인민통일전선(UPF)1) 집권 | |
1958년 | 5월 23일 ~ 27일 스리랑카 최초로 인종 폭동 발생 |
1960년 | 7월 총선에서 스리랑카 자유당(SLFP)2) 집권 |
1965년 | 3월 총선에서 통일국민당(UNP)3)이 집권하여 타밀족의 연방당(Federal Party)과 연립내각 구성 |
1970년 | 5월 총선에서 스리랑카 자유당, 평등사회당, 공산당 3당이 연합하여 승리 |
1971년 | 헌법이 개정. 싱할라어는 스리랑카의 국어로, 불교는 국교로 규정. 타밀족이 스리랑카로부터 분리독립을 요구하기 시작 |
1972년 | 5월 20일 신헌법 공포 |
1977년 | 7월 총선에서 통일국민당 집권 |
1978년 | 9월 6일 대통령 중심제 헌법 공포. 스리랑카는 단일국가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지방분권을 규정 |
1979년 | 7월 반테러법이 제정, 자프나(Jaffna) 지역 비상사태령 |
1981년 | 6월 지방선거가 실시. 분규 발생, 비상사태가 선언, 무력항쟁 그룹이 타밀의 지도권 장악 |
1982년 | 10월 20일 조기 대통령 선거에서 자예와르데네(Jayewardene) 재선 |
1983년 | 11월 헌법이 6차 개정, 타밀 분리독립 주장 불법화로 타밀통일해방전선(TULF)4) 소속의원 16명이 사퇴, 타밀 정치인 인도로 피신 |
1985년 | 4월 타밀게릴라의 단체활동 격화, 내란 상태 |
구분 | 주요사건 |
---|---|
1986년 | 5월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LTTE)5)가 온건파를 압도하고 주도권을 장악. 콜롬보(Colombo) 국제공항에서 말레이시아행 스리랑카 민항기를 폭파. 중앙전신국을 연쇄 폭파 |
1987년 | 1월 1일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는 타밀게릴라 통제 하에 있는 북부 자프나(Jaffna) 지역에 독립행정지역을 수립 의도 발표 |
7월 29일 인도·스리랑카 평화협정이 체결 | |
7월 30일 인도·스리랑카 평화협정에 따라 인도 평화 유지군(IPKF)6)이 스리랑카에 진주 | |
1988년 | 12월 5일 스리랑카 동북부 지역에 지방의회가 최초로 구성 |
12월 19일 대통령선거에서 통일국민당(UNP)의 라나싱헤 프레마다사(Ranasinghe Premadasa) 후보가 당선 | |
1989년 | 1월 2일 프레마다사가 대통령에 취임 |
1월 12일 스리랑카는 비상사태를 해제 | |
2월 15일 총선에서 통일국민당이 국회 전체 의석 225석 중 과반수가 넘는 125석을 획득 | |
5월 11일 스리랑카 정부 대표와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 대표간의 제1차 평화회담 개최 | |
6월 20일 스리랑카 정부는 인민해방전선(JVP)7)의 테러에 대처하기 위해 비상사태를 선포 | |
6월 28일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는 대정부 적대행위를 청산한다고 통보 | |
7월 5일 동북부 주 합병에 관한 투표가 있을 예정이었나 1990년 1월 29일로 연기 | |
7월 28일 스리랑카·인도 공동성명이 발표. 양국은 7월 29일 인도 평화 유지군 600명의 상징적 철수와 인도 평화 유지군 철수 일정을 협의하기 위한 협상을 개시하기로 합의 | |
7월 29일 ~ 8월 21일간 인도 평화 유지군 2000명 철수 | |
9월 18일 인도 평화 유지군 철군에 관한 스리랑카·인도 공동성명 발표 | |
11월 12일 통일국민당 정부는 인민해방전선의 핵심세력인 로한 비제비위라(Rohana Wijeweera) 총책과 해라스(H. B. Herath) 군사위원회 책임자들을 소탕 | |
1990년 | 3월 1일 북동부주의 페루말(Perumal) 주 총리를 비롯한 엘람인민혁명해방전선(EPRLF)8)이 일방적으로 독립선언(Democratic Republic of Eelam) |
3월 24일 인도 평화유지군이 철군 | |
7월 7일 프레마다사 대통령은 북동부 주 의회를 해산 | |
1991년 | 3월 2일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LTTE)는 콜롬보 시내에서 위제라트네(R. Wijeratne) 국방담당국무장관(식산장관, 여당사무총장, 내각대변인 겸임) 암살 |
5월 11일 지방의회 선거에서 여권은 52.3% 득표율을 획득하여 의회에서 81%의 안정된 의석을 확보. 6월 2일 각급 단체장 임명 | |
5월 21일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는 인도 타밀나두 주에서 라지브 간디(Rajiv Gandhi) 인도 총리 암살 | |
6월 13일 동부 바티칼로아(Batticaloa) 지역 내 코카디초라이(Kokkadicholai)에서 타밀계 주민 약 100명 학살(현지 주둔 정부군의 소행으로 추정) | |
12월 21일 제5차 남아시아지역협력연합(SAARC)9) 정상회의가 콜롬보에서 개최 | |
12월 22일 ~ 31일간 제5회 남아시아연합회의(SAF)10)가 콜롬보에서 개최 | |
1992년 | 5월 15일 인도정부는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를 불법집단으로 공포 |
11월 16일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는 콜롬보 시내에서 페르난도(C. Fernando) 해군 사령관 암살 | |
11월 18일 ~ 24일 스리랑카 최초로 ‘엑스포(EXPO) 1992’ 행사가 개최 | |
1993년 | 5월 1일 프레마다사(Premadasa) 대통령 암살 |
5월 7일 위제퉁가(Wijetunga) 대통령 취임 | |
9월 28일 스리랑카 정부군은 북부지역에서 야르 데비(Yal Devi) 군사작전 전개, 엘레펀트 패스(Elephant Pass)를 북상하여 자프나(Jaffna) 호수 북쪽 킬라리(Kilali)까지 진격 | |
1994년 | 8월 16일 총선에서 인민연합(PA)11)이 105석, 통일국민당(UNP) 94석 획득 |
8월 19일 인민연합의 찬드리카 반다라나이케 쿠마라퉁가(Chandrika Bandaranaike Kumaratunga) 총리 취임 | |
10월 13일 정부와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대표 간 제1차 예비회담이 자프나에서 개최 | |
10월 24일 통일국민당의 대통령후보 가미니 디사나여켜(Gamini Dissanayake) 의원이 선거 유세 도중 암살됨 | |
11월 9일 대통령 선거에서 인민연합의 쿠마라퉁가 후보 당선 | |
11월 12일 쿠마라퉁가가 대통령 취임 | |
1995년 | 12월 2일 스리랑카 정부군 자프나 점령 |
구분 | 주요사건 |
---|---|
1996년 | 9월 29일 스리랑카 정부군은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LTTE)의 새 근거지인 킬리노치치(Killinochchi)12)를 함락 |
1997년 | 10월 6일 스리랑카 정부군의 대 반군 공격으로 정부군 96명과 반군 350여 명 사망 |
10월 8일 미국의 국무부는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를 테러 단체로 규정하고, 미국 내 선전활동과 독립자금 모금을 불법화함 | |
1998년 | 1월 27일 콜롬보 고등법원은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 지도자인 프라바카란(Prabhakaran)을 포함하여 78명을 살인 혐의 및 1996년 중앙은행 폭파 사건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 |
1월 29일 자프나(Jaffna)에서 지방선거 실시 | |
3월 5일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는 마라다나(Maradana) 역 주변에서 민간 버스에 폭탄 테러를 감행했으며, 이 사건으로 31명이 사망하고 235명이 부상을 당함 | |
5월 17일 사로지니 요게스와란(Sarojini Yogeswaran) 자프나 시장 암살 | |
7월 21일 제10차 남아시아지역협력(SAARC) 정상회의가 콜롬보에서 개최 | |
9월 11일 시바파란(P. Sivapalan) 자프나 시장 암살 | |
12월 29일 인도-스리랑카 자유무역협정(FTA)13)이 체결, 1999년 1월 25일 북서부 5개 주의 지방선거에서 집권당 인민연합(PA)이 과반수 이상을 획득하여 압승 | |
1999년 | 6월 9일 안톤 바라신감(Anton Balasingham)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 이론가, 거처를 와니(Wanni)에서 런던으로 이전 |
6월 17일 캔디(Kandy) 시가 유네스코(UNESCO)로부터 문화유산으로 지정 | |
9월 26일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는 물라티부(Mullativu) 해상에서 중국 상선을 공격 | |
10월 1일 미국의 국무성은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를 포함한 27개의 외국 테러조직(FTO's)을 테러단체로 재지정 | |
10월 3일 스리랑카-미국 「신 범죄인 인도조약」체결 | |
11월 20일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가 마드후(Madhu) 교회를 폭탄 테러하여 민간인 38명이 사망하고 56명이 부상을 당함 | |
12월 21일 대통령 선거에서 인민연합의 쿠마라퉁가(Kumaratunga) 대통령이 지지율 51.12%로 재선 | |
2000년 | 1월 19일 캐나다 연방법원은 캐나다에 거주하는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 활동가인 수레쉬 마니카와사감(Suresh Manickawasagam)을 스리랑카로 추방하기로 결정 |
1월 27일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가 바부니야(Vavuniya) 우체국을 폭탄 테러하여 8명 사망, 73명 부상 | |
3월 1일 인도-스리랑카 자유무역협정이 발효 | |
3월 25일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는 스리랑카 정부에게 평화회담을 개시하는 조건으로 적대행위중지와 국제사회의 감시에 의한 정전을 제시 | |
5월 3일 스리랑카 내각은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에 대해 전 국가적 임전 태세를 발표 | |
5월 17일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가 만가라라마야(Mangalaramaya) 사원 주변을 폭탄 테러하여 민간인 22명과 군경 6명이 사망 | |
5월 28일 유럽의회는 스리랑카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 국가는 스리랑카 내 테러 행위를 지원하는 조직을 테러 단체로 지정하기로 결정 | |
6월 28일 솔헤임(E. Solheim) 노르웨이 특사는 스리랑카 정부 지도자들과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와의 평화회담을 개시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시작 | |
10월 10일 총선에서 집권당인 인민연합이 109석을 획득하여 승리 |
구분 | 주요사건 |
---|---|
2001년 | 2월 28일 영국정부는 「대테러법(Terrorism Act 2000)」에 의거하여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LTTE)를 21개의 국제테러단체 중 하나로 지정 |
7월 4일 찬드리카 반다라나이케 쿠마라퉁가(Chandrika Bandaranaike Kumaratunga) 대통령은 「테러방지법」에 의거하여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를 테러 단체로 지정 | |
7월 17일 스리랑카는 20년 만에 인구센서스 실시 | |
10월 5일 미국정부는「외국테러조직 26개」에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를 테러 단체로 재지정 | |
12월 3일 총선에서 야당인 통일국민당(UNP)이 대승을 거둠으로써 7년 만에 정권 교체. 통일국민당은 스리랑카 회교회의(SLMC)14)와 연정을 구성하여 통일국민전선(UNF)15) 정권 출범 | |
2002년 | 3월 20일 지방정부 선거에서 집권당인 통일국민전선이 압승. 총 222개 위원회 중에서 217개를 석권 |
7월 31일 ~ 8월 1일 페르베즈 무샤라프(Pervez Musharraf) 파키스탄 대통령이 스리랑카 방문 | |
9월 4일 스리랑카 정부는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에 대한 제재 조치 해제 | |
9월 16일 ~ 18일 스리랑카 정부-타밀엘람 해방 호랑이간 제1차 평화회담이 타이 사타힙(Sattahip) 해군기지에서 개최 | |
10월 31일 ~ 11월 3일 스리랑카 정부-타밀엘람 해방 호랑이간 제2차 평화회담이 개최 | |
11월 22일 스리랑카-미국 간 국제형사재판소(ICC)16)에 관한 범죄인 인도협정이 체결 | |
11월 25일 오슬로(Oslo)에서 개최된 스리랑카 원조공여국회의에서 약 7000만 달러의 원조 서약이 이루어짐 | |
12월 2일 ~ 5일 스리랑카 정부-타밀엘람 해방 호랑이간 제3차 평화회담이 오슬로에서 개최 | |
2003년 | 1월 6일 ~ 9일 스리랑카 정부-타밀엘람 해방 호랑이간 제4차 평화회담 개최 |
2월 7일 ~ 8일 스리랑카 정부-타밀엘람 해방 호랑이간 제5차 평화회담이 베를린에서 개최 | |
3월 18일 ~ 21일 스리랑카 정부-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간 제6차 평화회담이 일본 하코네(Hakone)에서 개최 | |
4월 21일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는 평화협상과 6월에 열릴 동경 원조공여국회의에 불참할 것을 선언 | |
6월 9일 ~ 10일 스리랑카 원조공여국회의가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 불참한 가운데 동경에서 개최 | |
6월 11일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는 라닐 위크레메싱게(Ranil Wickremesinghe) 총리에게 잠정행정기구를 제안 | |
2004년 | 2월 7일 찬드리카 반다라나이케 쿠마라퉁가(Chandrika Bandaranaike Kumaratunga) 대통령 국회 해산 |
4월 2일 제13차 총선이 실시, 쿠마라퉁가 대통령의 통일인민자유연합이 승리 | |
4월 6일 마힌다 라자팍사(Mahinda Rajapaksa)가 총리로 임명 | |
4월 22일 제13대 국회가 개원. 통일국민당의 로쿠반다라(W.J.M. Lokubandara) 후보가 국회의장으로 당선 | |
12월 26일 스리랑카에 쓰나미(Tsunami) 피해 발생 | |
2005년 | 8월 12일 카디르가마르(Kadirgamar) 외교부장관 피살 |
8월 13일 스리랑카 정부는 긴급 사태(State of Emergency) 선포 | |
11월 18일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통합민주자유연합의 마힌다 라자팍사 후보 당선 | |
11월 19일 마힌다 라자팍사 대통령 취임 | |
11월 21일 라트나시리 위크라마나야카(Ratnasiri Wickramanayaka) 총리 임명 | |
12월 27일 ~ 30일 마힌다 라자팍사 대통령인도 방문 | |
2009년 | 5월 19일 스리랑카 정부군이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LTTE)와의 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내전이 종식. 일반시민 7000여 명과 군인 3000여 명 사망 |
2010년 | 1월 26일 마힌다 라자팍사(Mahinda Rajapaksa) 대통령 재선 |
2월 9일 라자팍사 대통령은 전후(戰後) 정국 개편을 위해 국회해산 | |
4월 8일 총선에서 라자팍사 대통령이 이쓰는 여당이 총선에서 압승 스리랑카의 주요사건 일지 (스리랑카 개황, 2010.5, 외교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