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干支와 陰陽五行의 結合時代
김학목(강남대)
【주제분류】주역철학, 중국고대철학
【주제어】10天干, 12地支, 甲骨文, 陰陽, 五行, 北斗七星
【요약문】干支의 밑그림이 陰陽五行說로 여겨질 정도로 간지와 음양오행설은 간결하면서도 서로 정교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런 특성 때문에 간지가 음양오행설과 결합하는 시기가 전국시대말기라는 기존의 연구결과에 의문이 생긴다. 干支는 甲骨文 발굴을 통해 이미 殷代에 흔히 사용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런데 학계의 일반적인 결론은 음양과 오행이라는 서로 각기 다른 범주가 전국시대말기쯤에 하나의 범주로 체계화되면서 간지와 결합하게 되었다고 한다. 필자는 간지가 음양오행과 서로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결합하기 위해서는 간지 제작 당시부터 음양오행설이 고려되었다고 여긴다. 간지가 상고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여러 전적의 기록을 석기시대의 천문에 관한 유물과 비교해 볼 때, 간지는 전적의 기록처럼 殷代 이전에 이미 만들어져서 殷代에 성행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런데 음양오행설은 하나의 이론 체계이기 때문에 고고학적인 단순한 유물만으로는 그것이 상고시대에 이미 있었다는 논증을 하기가 쉽지 않다. 좌전의 기록을 분석할 때, 음양오행설은 이미 춘추시대부터 간지와 결합되어 있었다. 비록 춘추시대 이전에 간지와 음양오행이 결합되었다는 근거를 찾지 못했지만 이것만으로도 간지와 음양오행의 결합시기를 전국시대말기보다 훨씬 더 위로 끌어올릴 수 있다. 전국시대말기에 鄒衍과 같은 음양가들이 등장해서 이전의 음양오행설을 정교하게 다듬은 것은 시대적인 추이에 따른 것이다. 춘추시대부터 치열해지는 패권전쟁에서 시급한 것은 실질적인 부국강병책이기 때문에 음양가들은 무대의 전면에서 점점 사라진다. 그러나 전국말기에 천하통일의 대권이 몇 나라로 압축되자 부국강병책 외에 각국의 왕들에게 자신이 대권주자라는 음양가들의 명분이 필요해진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 편승해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하는 것이 鄒衍과 같은 학자들의 학설인데, 그 설명이 정교한 체계를 갖추고 있을지라도 이전시대에 있던 것을 종합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I. 들어가는 말
10天干과 12地支를 음양오행과 연결해서 그 상징적 의미를 살펴볼 때,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간결하고 정교한 유기적 구조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게 된다. 10干은 氣로 이루어진 하늘의 흐름을, 12支는 質로 이루어진 땅의 흐름을 상징하는데, 모두 계절의 흐름을 상징하는 오행의 끝없는 반복과 순환이다. 氣와 質이라는 구성 요소의 차이로 비록 하늘과 땅의 흐름이 ‘봄(木) → 여름(火) → 계하(土)→ 가을(金) → 겨울(水)’과 ‘봄(木-土) → 여름(火-土) → 가을(金-土) → 겨울(水-土)’로 다소 다르지만 계절의 끝없는 순환·반복일 뿐이다.
하늘은 ‘봄(甲·乙木) → 여름(丙·丁火) → 계하(戊·己土) → 가을(庚·辛金) → 겨울(壬·癸水)’의 반복·순환이고, 땅은 ‘봄(寅·卯木-辰土) → 여름(巳·午火-未土) → 가을(申·酉金-戌土) → 겨울(亥·子水-丑土)’의 반복·순환이다. 천간과 지지에서 土의 역할은 변화나 전환을 중재하는 것이다. 곧 하늘의 흐름은 맑고 가벼운 氣로 이루어져 木·火의 陽운동에서 金·水의 陰운동으로 바뀔 때 土(戊·己)의 중재가 필요하고, 땅의 흐름은 탁하고 무거운 質로 이루어져 계절이 바뀌기 전에 언제나 土(丑·辰·未·戌)의 중재가 필요하다.
氣와 質의 차이 때문에 土의 위치가 다소 달라졌지만, 천간이나 지지 모두 계절마다 오행을 배치하고 또 그것을 陰·陽으로 세분했다. 干支는 정교하게 陰陽五行과 결합함으로써 천지가 土의 전환을 토대로 木·火로 생장하고 金·水로 소멸하는 구조를 상징한다. 木은 사물이 나무처럼 생기발랄하게 분출되는 것을, 火는 불처럼 성대하게 확산되는 것을, 土는 생장에서 소멸로 전환되는 것을, 金은 열매처럼 지금까지의 노력을 수렴으로 결실하는 것을, 水는 물처럼 응축되어 숨는 것을 상징한다. 물론 이것들은 다시 각기 음·양으로 세분된다.
기존의 연구결과를 참고할 때, 간지가 음양오행론과 결합된 것은 전국시대말기쯤인데, 干支는 殷代에 이미 익숙하게 사용되었음이 갑골문 발굴을 통해 확인되었다. 간지와 음양오행의 정교한 결합은 기존의 연구결과처럼 선대 철학자들이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 전국시대말기쯤에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들이 서로 너무 정교하게 결합되었기 때문에 北周末에서 隋나라 초기에 생존했던 蕭吉의 말처럼 처음부터 서로 결합되어 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긴다. 10천간·12지지에 처음부터 음양오행의 유기적 결합이 없었는데, 후대에 이처럼 정교하게 결합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필자의 의심에 조금이라도 부합하는 자료들이 발굴된다면, 음양오행의 체계적인 성립연대를 전국시대말기보다 훨씬 더 위로 소급해 올릴 수 있다. 음양오행론이 전국시대말기쯤에 체계화되어 나타나는 것은 자료를 통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확인이 그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음양오행의 씨앗마저도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는 그 숨어있는 씨앗을 찾아 간지 그 자체에 처음부터 음양오행의 구조가 내재할 수 있었는지 그 가능성을 탐구해 보겠다.
Ⅱ. 干支와 陰陽五行의 起源
1. 干支의 起源
기록으로만 볼 때, 간지의 기원에는 고대의 성인들 곧 黃帝·天皇氏·大撓氏가 관련되어 있다. 元末明初의 인물로 추정되는 徐大升의 저술 評註淵海子平에서는 黃帝가 蚩尤와의 전쟁으로 낭패를 당해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 예를 행하자 하늘에서 10천간과 12지지를 내려주었다고 한다.
치우와 전쟁으로 흘린 피가 백리가 되었으나 다스릴 수 없었다. 이때 황제께서 처음으로 방패·창·칼·검이라는 무기를 제작하셨다. 황제께서 이 때문에 목욕재계하고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네모 모양의 언덕을 만들어 땅에 예를 행하시니, 하늘이 이에 10간 곧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와 12지 곧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를 내려주셨다. 이에 황제께서 10간을 하늘의 모양대로 둥글게 12지를 땅의 모양대로 네모나게 펴놓고 비로소 干을 하늘로 支를 땅으로 삼으시고는 세력을 합해 직분을 받들며 (치우를) 문밖으로 내친 다음에 다스릴 수 있었다. 이상이 10간과 12지의 유래이다.
明代 萬育吾의 저술 三命通會에서는 반고씨를 이어 天皇氏 집안에서 대대로 세상을 다스리면서 만들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오늘날 사용되는 甲·乙·丙·丁…壬·癸 또는 子·丑·寅·卯…戌·亥와 다른 알봉·전몽·유조·강어…현익·소양 또는 곤돈·적분약·섭제격·단알…엄무·대연헌과 같은 10간과 12지에 대한 고대의 이름이 있다.
옛날에 반고씨가 천지의 도에 밝고 음양의 변화에 통달하여 천·지·인의 첫 임금이 되셨다. 천지가 이미 나누어진 다음에 먼저 하늘이 있고 다음에 땅이 있어 이것들로 말미암아 기운이 변화하여 사람들이 태어났다. 그러므로 천황씨 한 가문의 13명이 반고씨를 이어 다스리셨으니, 이들을 하늘의 신령이라고 한다. 고요히 있으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지만 풍속이 저절로 교화되었으니, 처음으로 干支의 명칭을 지어 세월이 어디에 있는지를 바로잡았다. 10간은 알봉·전몽·유조·강어·저옹·도유·상장·증광·현익·소양이고, 12지는 곤돈·적분약·섭제격·단알·집제·대황락·돈장·협흡·군탄·작악·엄무·대연헌이다. 後漢 말기의 채옹이 홀로 단정하여 말했다. “干은 ‘근간’[幹]으로 그 이름에 10개가 있어 10母라고 한다고 했으니, 곧 지금의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가 이것들이다. 支는 '가지'[枝]로 그 이름에 12개가 있어 또한 12子라고 한다고 했으니, 곧 지금의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가 이것들이다.”
北周末에서 隋나라 초기 蕭吉의 저술 五行大義에서는 軒轅의 시대에 大撓가 ‘五行의 진상’[五行之情]으로 북두칠성의 자루 방향을 점치기 위해 간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서는 대부분 60갑자를 大撓가 만들었다고 하는데, 蕭吉은 五行을 바탕으로 干支가 세워졌다고 하면서 황제가 세상을 다스릴 때 大撓가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특이하다.
干支는 五行에 따라 세워졌다. 옛날 황제 헌원씨가 세상을 다스릴 때 大撓가 만든 것이다. 채옹의 월령장구에서 “대요가 ‘오행의 진상’[五行之情]을 가려내 북두칠성의 방향을 점치면서 처음으로 甲·乙을 일으켜 日에 이름 붙이고는 그것을 幹이라고 하고, 子·丑을 일으켜 月에 이름 붙이고는 그것을 支라고 하였다. 하늘의 일에는 日을 사용하고, 땅의 일에는 ‘지지’[辰]를 사용하여 음양을 구별하였으므로 간지라는 이름이 있다.”고 했다.
연해자평에서는 황제가 간지를 만들었다고 언급한 다음에 大撓가 60갑자를 만들었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황제께서 …, 하늘이 이에 10간 곧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와 12지 곧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를 내려주셨다. …. 그 후에 大撓가 후세의 사람들을 위해 근심하셨기에 ‘아! 황제께서는 성인이셨음에도 악살을 다스릴 수 없으셨구나. 만일 후세에 재앙을 당하고 고초를 겪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라고 말하고는 마침내 10간과 12지를 60갑자로 배분했다고 한다.
삼명통회에서도 大撓가 60갑자를 만든 것에 대해 黃帝와 무관하지 않게 말하고 있다.
黃帝가 大撓에게 ‘五行의 진상’[五行之情]을 찾아 천신이 내린 책의 三式을 상고하도록 하니, 10간과 12지를 배열해서 60갑자를 만들었다.
앞의 설명에서 보았듯이 三命通會의 「論支干源流」에서는 干支를 천황씨가 만들었다고 하고, 60甲子는 黃帝의 명령으로 大撓가 ‘五行의 진상’[五行之情]을 찾아 60갑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논문의 핵심과 관계되는 것으로 삼명통회와 오행대의에서 ‘五行의 진상’[五行之情]이라고 한 말이 주목된다. 元代 鮑雲龍의 저술 天原發微 등에도 大撓가 황제의 명을 받아 북두칠성의 자루 방향을 점치기 위해 60갑자를 만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黃帝가 大撓에게 甲子를 만들어 북두칠성의 방향을 점치도록 하니, 甲·乙을 일으켜 日을 명명해 幹이라고 하고, 子·丑을 일으켜 月을 명명해 支라고 하고는 천간과 지지를 서로 짝지어 60갑자를 만들었다.
간지의 기원이 이상의 기록처럼 모두 전설적인 상고시대 특히 黃帝나 大撓와 관계되면서 북두칠성의 자루 방향과 연관이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 이미 석기시대와 같은 상고시대부터 중국에서는 북두칠성을 비롯하여 천문을 관측하고 있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신석기시대보다 다소 앞선 細石器時代·중석기시대·신석기시대 후기의 仰韶文化나 大汶口文化 유물에 북두칠성을 나타내는 문양이 있고, 또 갑골문을 통해 殷代에 간지가 이미 사용되었음이 증명되었으니, 간지의 기원 역시 殷代보다 훨씬 이전 석기시대와도 무관하지 않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殷代에 널리 사용된 간지가 전설 속의 天皇氏·黃帝·大撓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문헌상으로 밝힐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는 없다. 그렇지만 석기시대의 고고학적인 유물의 발굴을 앞에서 인용한 여러 전적의 기록과 연결할 때, 殷代에 보편적으로 사용된 간지가 그 이전 시대부터 이미 존재했다는 추측은 확실히 가능해진다. 이 때문에 전설상의 기록 또한 단순히 전설로만 보이지 않고 우뚝하고 무게 있게 다가온다. 하여간 갑골문의 발굴 덕분에 간지가 殷代에 익숙하게 사용되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니 이어서 계속 살펴보자.
2. 陰陽五行의 起源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음양오행설은 음양과 오행이 각기 다른 범주로 발전되다가 전국시대 말기쯤에 하나의 범주로 결합되어 체계화된 것이다. 문재곤은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를 정리하여 이것에 대해 논증하고 있다. 그 결정적인 근거의 하나가 陰陽은 詩經에서 날씨의 맑고 흐림이나 따뜻한 방향으로 사용되었고, 이런 점이 後漢 許愼의 說文解字에 그대로 정리되어 철학적이고 우주론적인 의미 없이 단순히 양달과 응달의 의미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시경에 나타난 의미를 근거로 그 시대의 陰과 陽이라는 말에 철학적이고 우주론적인 의미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에는 문제가 있다.
요즘처럼 추상적인 의미가 발달한 현대에도 철학적인 개념으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하물며 아득한 옛날에 그것도 정치의 득실을 알아보기 위해 수집된 노랫말의 구절 속에서 철학적으로 심원한 개념을 찾겠다는 발상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사실 시경 구절의 음·양에 철학적으로 고차원적인 의미는 없을지라도 단순한 의미의 陰·陽 개념은 그대로 내포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양달과 맑음은 양기로서 응달과 흐림은 음기로서 소박한 의미가 있다. 이런 의미를 사람의 감정에 적용하면, 마음이 밝은 날씨처럼 화창하게 기분 좋은 것을 君子陽陽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음과 양이라는 말에 철학적이고 우주론적인 색채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좌전과 같은 춘추시대의 기록인데, 여섯 가지 氣 중에 陰과 陽이 속해 있다는 구절과 같은 것이다. 이후에 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천지만물을 구성하는 원리로 음·양을 이해하는 구절들이 노자·장자주역 등에서 나타난다. 사실 이런 구절들은 전국시대말기에 음양론이 체계화되었다는 학설을 강하게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증거들이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는 이런 구절들마저도 다시 검토해야 한다. 당시의 시대적 추이에 따라 이전에 이미 있던 개념들을 학자들이 단지 더 정교하고 세련되게 논의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한 비판은 오행의 기원을 살펴본 다음에 마지막으로 진행하겠다.
五行이라는 말은 僞書 논쟁과 관련 있는 尙書의 「甘誓」와 「洪範」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甘誓」에서의 五行은 그 의미 파악이 어려우니, 직접 그 구절을 살펴본 후에 다른 자료들과 비교해 보자.
왕이 “… 有扈氏가 五行을 위협하고 업신여기며 三正을 소홀히 하고 버려두어 하늘이 그 명을 거두시니 이제 나는 하늘의 벌을 삼가 거행하겠다.”고 말했다.
문재곤은 여기에서의 五行은 단순한 물질보다는 神格이나 人格을 대상으로 한 말로 본다. 그리고 國語「魯語上」에서 제사 대상의 선별기준에 대한 비판을 근거로, 또 左傳 「昭公」 29년에 五行의 官과 社稷五祀를 논한 것을 근거로 「감서」의 오행을 五行의 神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니, 이것은 상고시대 夏나라 때의 사건을 춘추시대 위헌자와 채묵의 대화를 통해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소공」 29년의 일은 龍과 관계된 일로 문재곤이 인용한 내용보다 훨씬 더 많은 개략이 필요할 정도로 중요하니,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도록 내용을 간추려 보겠다. 晉에 용이 나타난 것과 관계해서 魏의 獻子가 蔡墨에게 여러 가지로 질문하면서 五行의 관을 언급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29년 가을에 龍이 晉의 수도 絳의 郊外에 나타났다.
魏의 獻子가 蔡墨에게 물었다. : 내가 동물들에 대해 들었지만 용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은 나면서부터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용을 알고 있어 믿는다고 말해야 하겠는가?
채묵이 대답했다. : 사람들은 용을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님을 진실로 모릅니다. 옛날에 용을 사육했으므로 나라에 豢龍氏와 御龍氏가 있었습니다.
헌자가 물었다. : 그 두 성씨에 대해서는 나도 들은 적이 있지만, 그 옛일에 대해 모르니,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채묵이 대답했다. : 옛날 飂나라의 叔安과 그 자손들을 董父라고 합니다. 진실로 용을 아주 좋아해서 용들이 좋아하는 것을 구해다가 먹이니, 용들이 대부분 그들에게로 왔습니다. 용들이 원하는 대로 먹이고 키움으로써 천제께 복종하며 섬기니, 舜 천제께서 그들에게 성을 하사하여 董氏라고 하고, 豢龍이라고 하며 ‘모든 물가’[諸鬷]를 그들의 봉지로 주었습니다. 川鬷夷氏가 그들의 자손들입니다. 그러므로 천제 舜氏는 대대로 용을 키웠습니다. ….
헌자가 물었다. : 지금은 무엇 때문에 용들이 사라졌는가?
채묵이 대답했다. : 사물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물에는 관이 있으니, 관은 그 방법을 연구해서 아침저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루라도 직분을 잃어버리면, 죽게 되니, 관을 잃어버림으로 식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관이 자신의 일을 편안히 여기면 사물이 옵니다. 만약 (관이 해야 할 일을) 소멸시키고 끊어버리면, 사물이 멈추어 숨고 막혀서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행이라는 관이 있습니다. 이것이 五官이니, 진실로 성씨를 대대로 주며 상공으로 봉하고 제사에서 귀한 신으로 대접하며 社稷과 五祀에서 받듭니다. 木의 君長은 句芒이고, 火의 군장은 祝融이며, 金의 군장은 蓐收이고, 水의 군장은 玄㝠이며, 土의 군장은 后土입니다. 龍은 ‘水의 속성을 가진 사물’[水物]인데, 水의 官이 끊어버렸으므로 용은 나면서부터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龍이 晉에 나타났다는 소식에 魏의 헌자가 채묵에게 그것을 믿을 수 있는 것이냐고 하니, 채묵은 옛날에 상제가 특정한 사람들에게 관직을 내려 용을 키웠었다고 하면서 그 후손들의 성씨까지 거론한다. 헌자가 다시 그럼 왜 요즘에는 용을 볼 수 없냐고 하자, 채묵은 관직을 맡은 사람이 사물을 제대로 키워야 나타난다고 하면서 五行이라는 관을 언급한다. 그리고 그 관직이 귀중하기 때문에 성씨를 주고 상공으로 봉하며 제사를 지내며 받든다고 하고는 龍은 ‘水의 속성을 가진 사물’[水物]인데 水의 官이 끊어버려 옛날에 이미 사라졌다고 한다.
필자가 보기에 이상의 인용문을 참고할 때, 「감서」의 오행은 문재곤처럼 굳이 오행의 관으로 해석하지 않아도 된다. 곧 오행이라는 의미 그대로 봐도 된다. 위의 인용문에서 채묵의 마지막 설명 곧 “龍은 ‘水의 속성을 가진 사물’[水物]인데, 水의 官이 끊어버렸으므로 용은 나면서부터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라는 말은 「홍범」에서 箕子가 周武王께 아뢰는 오행의 속성과 연결해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箕子가 말하였다. “…. 먼저 五行은 첫 번째가 水이고, 두 번째가 火이며, 세 번째가 木이고, 네 번째가 金이며, 다섯 번째가 土입니다. 水는 스며들며 내려가는 것이고, 火는 뜨겁게 타오르는 것이며, 木은 구부러지고 펴지는 것이고, 金은 말미암아 바꾸는 것이며, 土는 심고 거둬들이는 것이다. 스며들며 내려가는 것은 짠 맛을 내고, 뜨겁게 타오르는 것은 쓴 맛을 내며, 구부러지고 펴지는 것은 신맛을 내고, 말미암아 바꾸는 것은 매운 맛을 내며, 심고 거둬들이는 것은 단 맛을 냅니다.”
좌전에서 龍에 대해 水의 속성을 가진 사물이라고 한 것은 龍이 水와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천제가 용을 키우는 董氏에게 ‘물가’[鬷]를 봉지로 하사한 것에 이런 의미가 바로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감서」의 오행은 구체적인 사물보다는 「홍범」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물의 다섯 가지 속성에 대한 상징으로 봐야 한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상징은 사물 전체를 다섯 가지로 대표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이니, 그 관직을 훌륭하게 수행한 자들에 대해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그런데 有扈氏가 관에서 해야 할 오행에 관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업신여기고 위협했다면, 당연히 정벌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오행은 단순히 하나의 사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을 그 속성에 따라 다섯 가지로 분류한 상징으로 봐야 한다. “하늘이 다섯 종류로 재료를 내놓으니, 백성들이 그것들을 함께 사용하고 하나라도 없애서는 안된다.”라는 좌전의 말은 필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근거이다.
이상에서 주목해야 되는 사실은 “水는 스며들며 내려가는 것이고, 火는 뜨겁게 타오르는 것이며, 木은 …… 신맛을 내고, 말미암아 바꾸는 것은 매운 맛을 내며, 심고 거둬들이는 것은 단 맛을 낸다.”라는 「홍범」의 구절이다. 지금까지도 우리가 오행의 이와 같은 속성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곧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오행의 속성이 벌써 殷末周初 인물들의 대화를 기록한 상서에 이미 이처럼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것의 기원을 선대에서 찾아야지 후대로 끌어내려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Ⅲ. 干支와 陰陽五行의 結合時代
1. 陰陽과 五行의 결합
전설 속의 天皇氏나 黃帝 및 大撓氏가 북두칠성의 방향과 관계하여 간지를 만들었다는 기록은 일반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고고학적 유물의 발굴로 干支의 기원이 殷代임이 이미 입증되었고, 또 북두칠성이 석기시대부터 관측되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여러 기록에 남아 있는 간지의 기원을 간단히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자. 이제부터 간지와 음양오행설의 결합시기에 대해 논의하자면, 이에 앞서 순서상 먼저 음양과 오행의 결합 시기부터 살펴야 하니, 간략히 앞에서 이미 논의한 내용을 정리해보자.
기존의 연구결과로 볼 때, 陰陽과 五行의 결합 시기는 전국시대말기쯤이니, 춘추시대부터 발달한 음양이라는 개념이 전국시대에 체계화되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는 시경의 구절에서 음과 양이 날씨와 관계된 개념이거나 응달과 양달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그 당시에는 철학적이거나 우주론적인 음양 개념이 없었다고 주장한 다른 학자들에 대해 비판했다. 곧 노랫말에 지나지 않는 시경의 문구를 근거로 철학적 개념을 찾는 것 자체가 상식에서 벗어났지만, 시경의 음·양에 소박한 의미의 음·양 개념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다시 말해 노랫말에 陰·陽의 철학적으로 고차원적인 의미는 없을지라도 일상적인 음·양의 의미가 그대로 녹아 있으니, 이것을 알고 기억하고 있어야 된다고 했다.
"陰陽家의 무리들은 모두 ‘희씨와 화씨의 관직’[羲和之官]에서 나왔다. 넓고 큰 하늘을 받들고 따르며 日月星辰을 역법으로 계산해서 백성들에게 공손히 때를 알려준다. 이것이 그들의 장점이다."라는 班固(32~92년)의 말과, “대개 黃帝가 천문역법을 자세히 조사하여 바로잡고 五行을 건립하였으며 천지의 변화를 일으키고 윤여를 바르게 하였다.”라는 사마천(B.C: 145?~85?)의 말로 봐도 음양과 오행이라는 개념은 전국시대말기에 체계화된 것이 아니다. 반고의 「예문지」는 사마천의 사기와 무관하지 않고, 사마천이나 반고의 시대는 전국시대(B.C : 475~221)말기와 시간적으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렇다면 그들이 음양과 오행이라는 범주에 대해 이렇게 기록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국어나 좌전의 내용을 살펴봐도 陰陽과 五行은 절대 전국시대말기쯤에 체계화된 것이 아니다.
여름 5월 을미 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재신이 “물이 범람할 것이다.”라고 하니, 소자는 “가뭄이 들 것이다. 해가 춘분을 지났는데도 陽이 아직도 이기지 못하고 있다. 이기면 반드시 심할 것이니, 가뭄이 없을 수 있겠는가? 陽이 이기지 않을 수 없으니 쌓이고 모일 것이다.”라고 했다.
위의 인용문은 노나라 소공(B.C: 541~510) 24년의 기록으로 분명히 춘분과 관계하여 이미 陰과 陽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곧 계절을 음양과 관계해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보다 불과 3-40년 후의 기록인 哀公(B.C: 494~468) 9년에 오행의 상극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하고 있다.
사묵이 말했다. “盈은 水의 속성을 가진 이름이고, 子는 水의 속성을 가진 위치입니다. 이름과 위치로 맞선 것은 막을 수 없습니다. 염제는 火의 스승인데, 姜씨가 그 후손들입니다. 水는 火를 이기니, 강씨를 정벌해도 됩니다.”
오행의 상극에 대한 완전한 내용은 아니지만, “水는 火를 이긴다.”는 구절은 틀림없이 상극을 전제한 말이다. 그런데 문재곤은 이런 구절들에 대해 경험의 관찰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오행상승의 완전한 체계를 갖춘 것은 아니라고 평가절하 한다. 그런데 이보다 앞선 기록인 국어「정어」에서도 이미 오행에 대해 정리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先王은 土를 金·木·水·火와 섞어 온갖 사물을 만든다.
위의 인용문은 西周말기 幽王(B.C: 781~771) 때의 기록으로 오행에 대해 분명히 언급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土를 木·火·金·水와 섞는다는 말은 地支에서 辰·戌·丑·未 곧 사계의 끝자락에 있는 土를 떠오르게 하는 구절이다. 「홍범」의 오행을 문제 삼지 않을지라도 전국시대말기보다 훨씬 앞선 西周 말기의 기록에 이처럼 五行에 대해 언급하고, 또 반고나 사마천이 음양오행을 羲和之官이나 黃帝와 관련시켜 역법과 함께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음양과 오행의 체계화가 전국시대말기에나 이루어진 것이라고 굳이 그 기원을 밑으로 끌어내릴 필요는 없다. 종합적인 체계를 갖추어 언급되지는 않을지라도 이미 단편적인 말 속에 체계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2. 干支와 陰陽五行의 결합
필자가 보기에 간지에는 음양오행의 구조가 밑바탕으로 깔려 있기 때문에 둘은 서로 분리되기 어렵다. 곧 간지가 음양오행과 간결하면서도 정교하게 결합된 점으로 볼 때, 간지를 제작할 때부터 음양오행과 긴밀한 유기적 구조를 전제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앞에서 이미 오행이 상서「홍범」에 나타나고, 음양에 관한 것이 좌전 昭公(B.C: 541~510)의 시대에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그 이전 곧 殷代에 이미 간지와 함께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여름 4월, 陳에 화재가 났다. 鄭의 禆竈가 말했다. “5년이 지나면 陳이 봉지로 돌아올 것입니다. 봉지는 52년이 지나면 망할 것입니다.” 子産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했다. “陳은 水를 이었습니다. 火는 水의 부인인데도 楚가 다스리고 있습니다. 이제 心星이 나타나고 陳에 불이 난 것은 楚를 추출하고 陳을 세우려는 것입니다. ‘왕비로 삼는 것은 다섯 번째로 이루기’[妃以五成] 때문에 5년이라고 했습니다. 歲星이 다섯 번째 돌며 鶉火星에 이른 다음에 陳은 마침내 망할 것입니다. 楚가 정복해서 소유하는 것은 하늘의 이치이기 때문에 52년이라고 했습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첫째 인용문의 “왕비로 삼는 것은 다섯 번째로 이룬다[妃以五成]”는 구절인데, 10천간은 앞뒤로 다섯 번째 있는 것과 음양으로 짝을 이뤄 합한다는 의미이다. 곧 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에서 甲은 己를, 丙은 辛을, 戊는 癸를, 庚은 乙을, 壬은 丁을 취해 합을 하니, 제각기 다섯 번째 있는 것과 합한 것이다. 妃 곧 왕비로 삼는다고 한 것은 丁火는 壬水의 처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10천간을 ‘甲·乙·丙·丁·戊’라는 양운동 구간과 ‘己·庚·辛·壬·癸’라는 음운동 구간으로 나눌 때, 다른 구간에서 서로 극하면서 음양이 다른 것끼리 음양이 맞아 부부처럼 합을 한다. 이 구절은 명리학적인 바탕이 있으면 바로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천간의 합은 음양합 곧 부부의 합을 나타내는 것이다. 陽木인 甲은 자신이 극하면서 음양이 다른 陰土인 己를 부인으로 삼고, 陰土인 己는 자신을 극하면서 음양이 다른 陽木 甲을 남편으로 삼는다. 다른 것들의 관계도 동일하니, 陰火인 丁에게 陽水인 壬은 남편이고, 陽水인 壬에게 陰火인 丁은 부인 곧 왕비이다. 그러니 “왕비로 삼는 것은 다섯 번째로 이룬다[妃以五成]”라는 구절 속에는 천간의 상극관계가 전제되어 있다. 춘추시대에 이미 이렇게 간지와 음양오행을 결합하여 사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으니, 이는 음양오행에 대한 체계가 이미 그때 정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여름 5월 을미 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재신이 “물이 범람할 것이다.”라고 하니, 소자는 “가뭄이 들 것이다. 해가 춘분을 지났는데도 陽이 아직도 이기지 못하고 있다. 이기면 반드시 심할 것이니, 가뭄이 없을 수 있겠는가? 陽이 이기지 않을 수 없으니 쌓이고 모일 것이다.”라고 했다.
위의 인용문 역시 昭公(B.C: 541~510) 때의 기록인데 陰·陽이 절기와 관계해서 언급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절기는 천문 관측과 관계가 있다. 그런데 상서를 참고하면, 요임금 때 이미 천문을 관측해서 절기를 정함으로써 백성을 다스렸다.
희씨와 화씨에게 큰 하늘을 공경하며 日月星辰이 운행하는 것을 曆數로 헤아려서 백성들에게 때를 알려주라고 명하셨다. …. 임금께서 “아! 희씨와 화씨 그대들은 366일을 주기로 윤달을 넣고 四時를 정해 1년을 만듦으로써 진실로 모든 장인을 다스리고 모든 일이 모두 빛나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
천문 관측은 농업과 관계해서 생활의 주기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고고학적인 유물을 통해 신석기시대부터 역법이 상당히 발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성과를 근거로 할 때, 요임금이 희씨와 화씨에게 명령한 것을 더 이상 전설로 취급하기 어렵다. 전설상의 인물들에 대한 기록은 양보할지라도 좌전의 기록만은 가감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곧 기원전 6세기(昭公 9년)에 음양오행의 원리를 바탕으로 능수능란하게 미래를 예측하고, 또 간지를 음양오행과 결합하여 미래 예측에 활용하고 있었다면, 이런 기록만이라도 평가절하하지 말고 사실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鄒衍을 기점으로 음양오행론이 체계화되었다는 학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전국시대말기의 종합적으로 정리된 음양오행설을 접하고는 좌전·상서 등에 나타나는 기록들을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으로 여겨 무시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점에서 태사공 곧 사마천(B.C: 145?~85?)의 말은 반드시 귀담아 들어야 한다.
태사공이 말했다. “…. 황제께서 천문 역법을 완성하여 정립하였고 五行을 세웠으며, 消息을 일으키고 閏餘를 바로 잡았다. …. …. 이때 유독 鄒衍이 五德의 전이에 밝아 消息의 구별을 나누어 제후들에게 드러냈으니, 그 또한 秦나라가 6국을 멸해 전쟁으로 아주 혼란했기 때문이다.”
전국말기의 추연으로부터 음양오행설이 확립되었다면, 사마천이 ‘황제가 오행을 세우고 소식을 일으켰다.’는 말을 하면서 추연을 언급할 이유가 전혀 없다. 사마천의 말 속에는 추연이 이전부터 있던 음양오행론을 바탕으로 국가의 존망을 세련되고 정교하게 언급하니, 극도의 혼란으로 미래를 기약하기 어려운 통치자들의 불안한 심정에 부합했다는 의미가 은근히 숨어 있다. 사마천의 말로 추론할 때, 전국말기 이후 秦漢代에 음양오행론이 체계적으로 종합되는 것 역시 혼란했던 시대적 여파의 잔재이다.
춘추전국시대에 각국이 패권을 잡기 위해 전쟁이 치열해질수록 직접적인 부국강병책이 필요했기 때문에 음양오행의 소식에 대한 이론은 무대의 이면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국말기로 접어들어 소수의 나라로 힘이 집중되면서 천하통일의 왕권을 이어받아야 할 명분으로 음양오행가의 이론이 필요하게 되니, 역사의 전면으로 추연과 같은 자들이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추연의 이론을 계승한 것으로 보이는 여씨춘추의 오행설 역시 역사적인 추세에 따라 진나라의 천하통일을 미화하기 위하여 당연히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번째로 말한다. 모든 제왕이 나오려고 하면 하늘이 반드시 백성들에게 그 징험을 보여준다. 黃帝의 때에 하늘이 먼저 큰 지렁이와 땅강아지를 보여주셨으니, 황제께서 “토기가 넘치는구나!”라고 하셨다. 토기가 넘치기 때문에 그 색으로 누런 것을 숭상했으니 섬기는 것이 토이다. 禹임금 때에는 …, 우임금께서 “목기가 넘치는구나!”라고 하셨다. …. 文王의 때에 하늘이 먼저 불타듯이 붉은 새가 붉은 책을 물고 周社에 날아드는 것을 보여주셨으니, 문왕께서 “화기가 넘치는구나!”라고 하셨다. …. 화를 대신하는 것은 반드시 수이니, 하늘이 또 수기가 넘치는 것을 보여 주실 것이다. 수기가 넘치기 때문에 그 색으로 검정을 숭상할 것이니 섬기는 것이 수이다. 수기가 이르렀는데도 법도(數)를 갖출 줄 모르면 다른 곳으로 떠나갈 것이다.
춘추시대의 저술은 이론적 체계보다는 사건에 대한 단순하고 명료한 문구로 채워졌다. 그런데 전국시대나 그 이후의 저술은 논리적 설명이 복잡하게 덧붙여지면서 정교한 체계를 갖춘다. 이런 차이는 논어를 맹자나 순자와 비교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좌전이나 그보다 훨씬 이전 상서에 나타나는 음양오행설도 전국시대나 그 이후의 저술에 와서는 종합되어 정교하게 다듬어진다. 그러니 맹자· 순자에 나타나는 원시유학의 체계가 논어에 없었다고 말할 수 없듯이 추연과 그 이후의 음양오행설이 그 이전의 서적에 없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종합적으로 체계화해서 논의하지 않았을 뿐이지 좌전과 같은 책에 이미 체계적인 음양오행의 흔적이 산재해 있었다는 것이다.
Ⅳ. 끝맺는 말
추연을 기점으로 음양오행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이 종합되어 나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런 사실을 가지고 음양오행설이 전국시대말기에 나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음을 살펴보았다. 좌전이나 국어와 같은 책에 이미 음양오행설을 구체적으로 적용한 사례들이 나오고, 또 음양오행의 생극을 전제한 천간의 합에 대해 유추할 수 있는 내용까지 있다. 그리고 또 오늘날까지 그대로 적용되는 오행의 속성이 상서「홍범」에 이미 있다. 그러니 전국시대 말기 이전의 오행을 철학적인 내용이 없는 구체적인 하나의 사물로만 취급해서는 안된다.
황제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득한 태고시대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또한 상서의 「홍범」과 「감서」가 僞書 논쟁에 휘말려 있기 때문에 그 기록을 믿지 못하겠다면, 최소한 고고학적 유물과 합치하는 내용들만이라도 재고해서 그것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다시 진지하게 검토해 봐야 한다. 간지는 북두칠성의 자루 방향을 표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여러 기록에서 언급했고, 석기시대의 유물에서 북두칠성을 비롯하여 천문을 새겨놓은 것들이 발견되었다. 또한 간지는 이미 殷代부터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간지와 천문 및 음양오행에 대한 여러 전적의 기록은 믿기 어려운 전설이 아니라 사실일 확률이 훨씬 더 높으니, 이에 대한 재고가 반드시 필요하다.
간지와 음양오행의 관계를 분석해 볼 때, 간지가 제작될 당시부터 음양오행설이 그 밑바탕으로 없었다면, 서문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것들 상호간에 그토록 간결하고 정교한 유기적 구조는 만들어지기 어렵다. 필자가 보기에 간지는 우수한 문명 속에서 음양오행설을 전제로 하늘과 땅의 흐름을 10천간과 12지지로 상징해서 표현했던 것이다. “하늘의 일에는 日을 사용하고, 땅의 일에는 지지를 사용하여 음양을 구별하였으므로 간지라는 이름이 있다.”고 하고, 또 “干支는 五行에 따라 세워졌다.”고 한 오행대의의 말은 이런 점에서 의미가 아주 깊다.
간지가 음양오행설을 전제로 만들어졌다는 직접적인 자료는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나 아득한 상고시대의 일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고고학적인 유물이 발굴되기도 어렵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발굴된 유물들만 가지고 추론해 봐도 간지에는 처음부터 음양오행설이 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가능성은 배제하고 확실한 자료를 가지고 분석해 볼지라도 음양오행설은 전국시대말기가 아니라 이미 춘추시대에 간지와 결합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기존의 음양오행과 간지의 결합에 대한 연구는 반드시 재고되어야 한다. 곧 고고학적인 유물과 서로 연결해서 그 기원을 새롭게 추적해 봐야 한다.
참고문헌
春秋繁露, 太極解義, 國語, 說文解字, 詩經, 莊子, 周易, 左傳, 左傳杜林合注, 春秋左傳注疏, 前漢書, 呂氏春秋, 道德經, 尙書, 史記, 前漢書, 五行大義, 天原發微, 類經圖翼, 三命通會, 評註淵海子平, 子平真詮評注.
古史辨, 대만 藍燈출판사, 1993.
古藤友子, 「日本에서의 陰陽五行思想의 展開」, 도교학 연구1, 1990.
김상일, 「음양오행론과 러셀의 역설」, 과학사상 28호, 1999.
김충렬, 「周易과 陰陽五行」, 周易哲學과 文化 제 2집, 2004.
김학목, 「陰陽五行과 干支의 象徵, 동양고전연구 42집, 2011.
윤창렬, 「六十甲子와 陰陽五行에 關한 考察」, 논문집 5권 1호, 대전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6.
李聖愛, 「尙書硏究」, 중어중문학 5집, 1983.
이정재, 「陰陽五行論의 형성과 이의 응용」, 한국의 민속과 문화(구 한국문화연구) 7집, 2003.
劉國忠, 「試論陰陽五行理論在中國古代思想史上的地位与作用」, 동서철학연구 제34호, 2004.
金惠貞, 中國 風水地理學의 天文觀 硏究, 公州大學校 大學院 박사학위 논문, 2008.
文載坤, 漢代易學硏究,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0.
沈揆喆, 命理學의 淵源과 理論體系에 관한 硏究,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3.
劉明鍾, 中國思想史(Ⅰ), 이문출판사, 1983.
朱熹, 곽신환·윤원현·추기현 옮김, 太極解義, 소명출판, 2009.
김경일, 갑골문 이야기, 바다출판사, 2002.
<中文提要>
干支與陰陽五行的結合時期問題
金學睦 (江南大)
干支的根底是陰陽五行說. 干支與陰陽五行爲相互緊密地結合著. 因此, 對於把干支與陰陽五行說的結合時期認定爲戰國末期的從前硏究成果, 發生疑問. 通過甲骨文的發掘, 明白了干支已常用了在殷代. 然而學術界認爲, 陰陽與五行兩個槪念, 在戰國末期結合爲一個範疇, 因而其與干支再一次結合了. 論者以爲爲了干支與陰陽五行爲相互有機的緊密地結合, 當成立干支之時, 已考慮到陰陽五行說了.
將干支已成立在上古時代的諸典籍之記錄, 從石器時代有關天文的遺物來比較看, 如諸典籍之記錄, 干支旣在殷代以前成立, 而且在殷代盛行的可能性很高. 然而因爲陰陽五行說是一個系統的理論體系, 所以不容易論證其在上古時代已有的. 至於分析春秋左傳的記錄時, 從春秋時代以來, 陰陽五行說與干支已結合了. 在春秋時代以前, 雖然找不到干支與陰陽五行說相互結合的根據, 唯依據春秋左傳的記錄, 干支與陰陽五行說的結合時期可以推到更以前的時代.
在戰國末期, 如鄒衍類的陰陽家出現, 把從前的陰陽五行說進一步精巧地治學, 只是隨著時代的推移而已. 從春秋時代開始, 其於覇權戰爭局面, 社會的急要務, 當爲實質的富國强兵策, 所以在於社會政治舞臺陰陽家們逐點消滅了. 但在戰國末期, 出露天下大一統的幾微, 幾個强大國的君主, 各自需要以自己正爲統一君主的陰陽家的名分. 順便如此時代的推移, 出現在歷史的前面, 就是如鄒衍類的陰陽家學說. 而在此須可知, 其說雖然具有著精巧的系統, 只不過以前時代的産物之綜合.
Key words: 10天干, 12地支, 甲骨文, 陰陽, 五行, 北斗七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