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환경윤리] J.R. 데자르뎅 지음/김명식 옮김
6장 동물에 대한 의무 191페이지-194페이지의 내용을 발췌.
1. 싱어와 동물해방운동
동물에로 철학적 윤리학이 확대된 것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사람은 피터 싱어(Peter Singer)이다. 지난 20년 동안, 싱어는 도덕적 고려 대상에서 동물을 제외하는 것은 옛날에 여성과 흑인을 제외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해 왔다.
싱어는 종차별주의(speciesism)라는 용어를 유행시켰는데,
이것은 인종차별주의(racism) 및 성차별주의(sexism)와 유사한 개념이다.
우리 종 구성원이 아니라는 것을 근거로 해서 평등한 도덕적 지위를 부정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그르다는 것이 싱어의 주장이다.
싱어는 모든 이익관심(interests)은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전제에서 그의 논의를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이성을 갖는 것이나,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가이다.
고통과 쾌락의 감수능력이 이익관심을 갖는 전제조건이
된다. 고통과 즐거움을 느낄수 있는 능력은 어떤 존재가 이익관심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는 필요조건일 뿐만 아니라 충분조건이다.
싱어는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능력을 지칭하는 것으로
유정성(有情性, sentience)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유정성을 갖고 있지 않은 것, 예를 들면 바위는 이익관심을 갖지 않는다.
싱어에 따르면, 오직 유정적 존재만이 이익관심을 지니기 때문에, 유정적 존재만이 도덕적 지위를 갖는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유정적 존재를 동등하게 도덕적으로 고려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말의 등을 채찍으로 때리는 것은 말에게 별로 고통을 느끼지 야기하지 않으며, 따라서 특별히 비윤리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어린이의 얼굴을 채찍으로 때리는 것은 이와 다르다. 인간은 정신적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어떤 행위에 대해서 인간은 동물보다 고통이 더 크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고통을 감수하는 능력과 고통의 양이 도덕적인 것을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싱어는 고통을 비교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다. 특히 서로 다른 종의 고통을 비교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하지만 만일 인간의 편의를 위해 동물에게 심각한 고통을 주는 경우로 우리의 관심을 국한시킨다면,
"우리는 동물에 대한 우리의 행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우리의 식생활, 동물들의 사육방식, 과학에서의 실험절차, 야생생물과 사냥, 함정, 모피, 그리고 서커스, 로데오, 동물원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의 태도가 변한다면, 고통의 양은 엄청나게 줄어들 것이다."
벤담을 인용하고 고통의 최소화를 강조하는 데서 보이듯이, 싱어의 접근은 기본적으로 공리주의에 입각해 있다.목적적선 (쾌락의 증진과 고통의 감소)에 대한 설명이 그렇고, 전체고통의 양을 줄여야 하는 윤리적 의무를 강조한 것이 그렇다.
[ 레건과 동물의 권리 ]
톰 레건은 권리론에 기초하여 동물의 권리를 옹호했다.
레건은 사냥,식품,상업,애완,동물원용으로 동물을 사용하는 관행이 비윤리적이라 믿었는데, 그 이유는 그러한 관행이 고통을 산출하기 때문이 아니라, 원리(principle)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동물이 갖고 있는 목적적인 윤리적 가치를 부정함으로써 동물의 권리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공리주의적인 입장에서는 송아지 사육방식의 변화로 송아지의 고통을 최소화 하고 인간의 즐거움을 크게 할때 송아지 산업을 허용할 수 있다.
물론 싱어주의자들은 이것이 부당한 비판이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반론은 아마도 고통과 쾌락을 계산하는 방법과 관련된 것일 것이다. 하지만 싱어의 입장에서 송아지를 먹기 위해 사육하고, 도살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다. 레건은 바로 이 점에 항의하고 있다.
"식용송아지의 운명을 보고 우리는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고통이나 박탈이 아니다. 이것은 무엇이 잘못인지를 혼동한 것이다. 이것은 때때로 상활을 더 악화시킨다.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은 동물을 먹을 수 있고, 조작할 수 있고, 스포츠나 돈을 위해 임의대로 이용할 수 있는 우리의 자원으로 보는 관행 자체이다.
불우아동을 안락한 상태에서 고통없이 사육하여 일정한 때에 아무 고통없이 도살되어 찌고, 굽고, 튀기고, 끓여진다면 이 경우 아무리 고통보다 쾌락의 총량이 많다 할지라도,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에 모두들 동의할 것이다.
이것이 도덕적으로 그른 이유는 인간은 일정한 유형의 가치, 즉 '고유의 가치' 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레건은 주장한다. 고유의 가치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이익관심과 욕구, 사용과 무관하게 가치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유의 가치는 스스로 자기안에서 갖는 가치이다. 이것은 다른 것에 의해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도구적 가치와 대비된다.
고유의 가치를 갖는 대상은 그 자체 목적이고, 다른 것의 수단이 아니다.
인간을 다른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대우하는 것은 잘못이다.
설사 이것이 고통보다 쾌락을 더 많이 산출한다 할지라도 그렇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고유의 가치를 갖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아와 정신지체아, 혼수상태의 인간의 경우, 이해하고 선택하는 능력이 없다. 그들은 도덕행위자라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의무를 가질 수 없으며, 그들이 하거나 하지 못한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들은 실로 도덕 무능력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마음대로 그들을 대해선 안된다. 그들은 비록 도덕행위자는 아니지만 도덕적 지위는 갖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행위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들에 대해 도덕적으로 행위 해야만 한다.
도덕 무능력자를 음식과 사냥표적, 오락, 노예로 삼는 것은 왜 원리적으로 잘못된 것인가? 레건의 대답은 그들이 삶의 주체(subject-of-life)라는 것이다.
단순히 살아 있다(live)는 것과 다른 의미의 삶을 산다는 것이고, 이러한 삶은 매우 복잡한 일련의 특징을 포함한다.
"삶의 주체라는 것은 단지 살아 있다는 것, 또는 단지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삶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믿음, 욕구, 지각, 기억, 자신의 미래를 포함해 미래에 대한 의식, 쾌락과 고통 등의 감정을 느낄수 있다는 것, 즉 선호와 복지에 대한 이익관심, 자기의 욕구와 목표를 위해 행위할 수 있는 능력, 순간순간의 시간을 넘어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느낄 수 있고, 타자와는 별개로 자신의 삶이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복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존중의 원리로 말미암아 레건의 견해는 평등주의적(egalitarian)정의론이 된다. 레건은 동물들 또한 자기의 삶의 주체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최소한 몇몇 포유류는 '자기의 삶을 사는데' 요구되는 자격을 갖는다. 따라서 이들 동물들은 고유의 가치를 지니며, 그들을 존중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최소한 이것은 그들에 해를 가해서는 안될 직견적(直見的,prima facie)의무가 있음을 의미한다.
[ 동물복지의 윤리적 함축 ]
싱어와 레건의 윤리적 네가지 주제
1. 상업적인 동물 사육을 사회 전체 차원에서 금지할 의무가 있다
동물을 취미, 영양, 편의, 효율성, 소유권으로 사용할 수 없다.
2.동물을 음식으로 사용할 수 없다.
3. 과학적 연구에 동물을 사용해선 안된다. 사람을 실험용으로 쓰는 전범들의 그런 행위에 대해 우리는 유죄판결을 내린바 있다.
4.종이 도덕적 지위를 갖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레건의 견해는 개체동물을 위해로부터 보호하자는 것이지,
종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개체 동물이 삶의 주체이지, 종이 삶의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싱어 또한 개체 동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지,
종이 고통을 느낀다고는 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