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참 스승 선비
- 대쪽재상 허조(1369 공민18 -1439 세종21) 조선의 청백리
드라마 세종을 보면 깐깐하게 말하는 허조 라는 분이 나온다. 탤런트 그분 연기 잘하고 캘릭터도 마음에 들었다. 본관은 하양이며 자는 중통, 호는 경암이다.
조선이 건국하자 처음으로 학당을 세웠으며 태조에서 세종까지 임금을 모시며 요직을 지냈다
특히 태종으로부터 강직한 성품을 인정받아 왕실의 의식과 일반 상제를 법전화 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세종 때 3차례나 이조 판서가 되어 죄인의 자식이라도 죄에 연좌되지 않았으면 같이 처벌 받지 않도록 하는 법제를 만들었고, 특히 공정하게 관리를 임명하는데 힘썼다. 이후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경사(經史)에도 밝아 후일 사육신(四六臣)의 스승으로 정신적 지주가 됐다. 시호는 문경이다.
출생하여 아이 때부터 의연히 빼어나서 어른과 같았다.
1. 닭이 울면 의관을 정제하고 꿇어앉아서 날마다 소학, 대학, 중용을 암송하고 내용을 갚이 생각하고 실천하였으며 자정이 넘어서야 잠시 수면을 취하였다. 성장하여 양촌 권근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고 15세에 진사거, 17세에 사마시로 벼슬길에 올라 세종시 좌의정에 이르렀다.
생긴 것도 꼬챙이처럼 마른데다, 등은 꾸부정했고, 눈은 크고 기묘하게 생겨서 말라비틀어진(말라깽이) 송골매 재상(瘦鷹) 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완고하여 자신의 주장을 절대로 굽히지 않는 고집불통처럼 인식된다.
<내안의 도둑이 문제요>
이분이 젊었을 때였다. 어느 날 그는 책상에 단정히 앉아 밤이 깊도록 책을 읽고 있었다. 그때 도둑이 집에 들어와 귀중한 물건을 모두 훔쳐가고 말았다. 그런데 허조는 졸지도 않으면서 허수아비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도둑이 물건을 훔쳐 달아 난지 한참이 지난 뒤 비로소 집안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뒤쫓아 갔다. 하지만 집안사람들은 도둑을 잡지 못하고 돌아왔다. 아내가 분통을 터뜨리며 허조에게 말했다. “당신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으면서 도둑이 다녀간 줄도 모르고 있었다 말이오? 도대체 집안을 다 뒤지는 동안 뭘 하고 계셨습니까?” 아내의 힐난에도 불구하고 허조는 태연하게 대답하였다.
“ 그 도둑놈 보다 더 심한 도둑이 내 마음속에 싸우고 있는데, 어느 여가에 바깥도둑을 걱정하리오.”
허조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것은 올바른 세계의 구축이었다. 누가 보아도 잘못된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 그는 세상에서 잘못된 일에는 조금도 손을 대지 않았고,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허조는 어느 시대이건 지켜져야 하는 원칙을 주장하였다.
2. 허조는 자기관리에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는 허기를 면할 정도의 식사에 만족했다. 여색을 가까이하지도 않았다. 자손들이 방만해질 것을 우려해 재산을 남겨주지 않았다. 옷은 몸을 가릴 정도로만 먹을 것은 허기를 면할 정도만 취하며 진실로 검소 청렴하게 살았다. 흉년이 들면 온 집안이 죽을 먹었으니 세상에서 어진 재상을 일컬을 때는 반드시 황허를 으뜸으로 하였다.
3. 부모 섬김에 효도를 지극히 하였고, 제사를 받들기에 정성을 다하였다. 어릴 때 어머니가 누에고치를 켜 명주옷을 만들어 입혀주었는데 부모 제삿날이면 반드시 어머니가 지어준 푸른 옷을 입고 눈물을 흘리며 제사를 지냈다
그의 형 허주는 판 한성 부사였다. 허조는 매일 새벽닭이 울면 형에게 가서 문안인사를 올렸다. 또 형의 집에 갈 때는 하인들을 멀리 떼어두고 동구 밖에서부터 수레에 내려서 걸어 들어갔다. 형 허조는 역시 동생이 찾아올 것을 짐작하고 그때마다 의관을 갖추고 초졸한 음식을 마련한 후 기다렸다.
허조는 형에게 조정에서 있었던 일을 알리고 조언을 구하였다. 그러면 형은 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그때마다 허조는 형의 집에서 물러 나오면서 말했다. “ 옛말에 이르기를 어진 아버지와 형님이 있음을 즐거워한다고 했는데 바로 형님을 두고 한 말이로다,” 형 역시 청렴하기가 동생 못지않았다고 한다.
4. 네 임금을 내리 섬겨 나라일 근심하기를 집안일 같이 하였으며,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능히 힘썼다. “말라깽이 송골매 재상“이라는 별명만큼 그의 철저한 업무처리 때문에 조정신료들은 늘 조심스러워 했으며, 10년간 이조판서를 하면서 추천된 인물들을 검증하는데 진력을 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세종께서 놀랍도록 슬퍼하시어 수라상에 고기반찬을 금하고 3일간 조회를 폐하고 사신을 보내 조제케하고 부의를 두텁게 하사하시었다. 관비로 장사지내고 시호를 문경이라하였다. 경륜과 성리의 학문으로 임금에게 충성스러움과 크게 곧음이었으며 광명의 준수한 위용으로 한세상을 밝게 빛냈으니 이른바 재상중의 진정한 재상이었다- ‘대쪽재상 인생의 참 선비’
그리고 세종과 조선시대의 바탕이 마련된 것이며. 후일 사육신과 자식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