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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 ‘유비무환’의 대표주자 태종기사입력 2015.09.17 9:17 AM
/하늘땅한의원 장동민 원장
문1. 매주 목요일은 <조선왕조실록>과 <동의보감>을 통해 <왕의 건강법>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입니다. 원장님, 오늘은 3대 임금이니 그 유명한 태종 순서이겠군요?
답1. 네 맞습니다. 사실 나라를 연 임금은 태조였지만, 조선을 제대로 자리 잡게 한 임금은 역시 태종 이방원이라 할 수 있는데요. 두 차례 왕자의 난을 통해 결국 왕위를 차지한, 불굴의 집념을 가진 임금이었죠. ^^;
절대 권력에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는데요, 다음 왕위를 맏아들인 양녕대군에게 넘기지 않고 세종에게 넘긴 이유도 이러한 권력의지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실제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아버지도 여러 여자를 취하면서, 왜 나는 여러 여자를 취하면 안 되느냐?’고 항의한 문건이 제일 강력하게 작용했었기 때문인지라, 이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주장입니다.
또한 태종은 실제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다음에도 4년간이나 줄곧 국정을 감독하였는데, 병권과 인사권을 장악하여 계속 권력을 행사하는데도, 세종은 이에 군소리 않고 순순히 따랐다고 합니다.
문2. 원래 나라를 세운 창업 군주에게는 ‘태조’라는 시호가 주어지고, 기반과 틀을 다진 왕에게는 ‘태종’이라는 시호가 주어진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 말이 맞군요. 그렇다면 혹시 태종이 의학적으로도 기반을 다진 것들이 있는지요?
답2. 네, 태종의 ‘왕권 다지기’는 정말 가차 없었는데요,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방해될 형제들을 제거시킨 것뿐만 아니라, 왕위에 오르자 자신을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해준 공신과 부하들마저 여러 가지 구실을 대서 모두 숙청합니다. 심지어 처가와 외가 그리고 나아가 며느리 집안까지 몰살시켜서 왕권에 위해가 될 소지를 모두 다 잘라버립니다.
반면에 의학적으로는 이바지한 바가 있습니다. 태종 6년 3월 16일의 <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제생원(濟生院)에 명하여 어린 여자아이에게 의약(醫藥)을 가르치게 하였다고 되어 있는데요, 이는 ‘부인이 병이 있는데 남자 의원으로 하여금 진맥하여 치료 하게 하면, 혹 부끄러움을 머금고 나와서 그 병을 보이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여 사망에 이르게 되는 폐단이 있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유명한 ‘장금이’의 시초가 여기서부터 비롯된 것이지요.
문3. 아 소위 ‘의녀’제도가 여기서부터 비롯되는군요. 잘 알겠습니다. 혹시 또 다른 것은 없는지요?
답3. 네. 의료 인력이 부족해 늘리는 기록도 있습니다. 태종 9년 2월 7일의 <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그 당시 의원 수가 부족하다 보니 , 대소 병인(大小病人)을 일일이 치료할 수 없어서, 병이 깊어져 치료하기 어렵게 되어 일찍 죽는 자가 많아서 대책을 강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정식으로 의사 시험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들도 실력에 따라 환자를 치료하게끔 배려하여 벼슬을 주게끔 했습니다.
문4. 아, 그렇군요. 하지만 의료 인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함부로 의사 수를 늘리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요? 정식 시험을 거치지 않고 진료를 하게 하는 것은, 자칫 소위 돌팔이를 늘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답4. 옳은 말씀이십니다. 그래서 이 당시도 무조건 의사로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실력에 따라 낮은 직책을 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실력이 뛰어난 사람은 시험을 통해 정식 관리가 되게 했습니다.
사실 태종은 어의가 잘못 침을 놓거나 약을 써서 부작용을 일으켰던 적이 몇 번 있어, 의사들의 학문과 실력을 증진시키는 것에 매우 큰 관심을 가졌었습니다. 실제 특정 의서를 지정해서 어의들에게 공부하게끔 하거나 중국에서 동인을 들여와 국내 한의사들에게 공부를 시키기도 했습니다.
문5. 자, 태종이 힘쓴 의료제도에 대해서는 알아봤고요, 정작 태종 스스로의 건강상태는 어땠는지요?
답5. 네, 일단 태종 사망 당시의 모습을 잠깐 보겠습니다. 세종 4년 4월 22일의 <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태종이 세종과 더불어 매사냥을 하고 돌아온 후에, 태종의 몸 상태가 갑자기 나빠져 세종이 급히 찾아와 간호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사실 태종은 책만 좋아하고 운동을 하지 않는 아들 세종의 건강을 걱정해서 수시로 함께 사냥을 다녔습니다. 실제 정종이 살아 있을 때는 세 명의 전 현직 임금이 함께 나란히 사냥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상황이 좋지 못했습니다. 태종의 병세가 워낙 심해서 24일에는 세종이 태종의 병을 간호하느라 외교행사에 참석치 못했고, 25일부터는 고기반찬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6일에는 죄인을 석방하고 추방했던 양녕대군을 불러 간호하게 합니다. 급기야 5월 1일에는 점을 치고, 2일에는 전국의 사형수 이하 죄인을 석방하라고 지시하지만, 결국 5월 10일에 태종은 사망합니다.
문6. 너무 갑자기 사망하네요. 태종이 평소 지병을 앓고 있었는지요?
답6. 원래 태종이 평소에 풍질(風疾)을 앓았다고는 하지만, 수시로 아들과 사냥을 나갈 수 있을 정도였으니, 후유장애가 심하지 않거나 아예 중풍이 아닌 다른 풍질을 앓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보다는 사냥을 갔다 온 이후에 갑자기 고열이 나타나고 혼수상태에 빠진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마도 급성 감염성 질환이 사망의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실제 편도선염과 같은 상기도 감염이나 인플루엔자 등의 바이러스감염은 고열을 일으키므로, 사인이 감염성 열병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고 하겠지요. 몇 년 전 ‘사스’나 ‘신종 플루’와 같은 감염성 질환으로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던 사례들을 생각해보면, 보다 설득력이 높아진다고 하겠습니다.
문7. 고열 증상 얘기가 나온 김에 말씀드리는데요, 일반적으로 몸에 열이 나면 자연스럽게 열을 떨어뜨리는 노력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이마에 차가운 수건을 올려놓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얼음주머니나 얼음 욕조에 몸을 담그기도 하는데요. 혹시 한의약적으로 열을 떨어뜨리는 다른 방법이 있는지요?
답7. 네 물론 열이 심할 때는, 열을 내리는 한약 치료를 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차가운 성질의 것으로 열을 식히는 치료만 하지는 않습니다. 일례로 경락에 침치료를 하거나 자락 출혈을 시켜서 열을 내리기도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따뜻한 성질의 약이나 치료법을 사용하기도 하는데요, 목이 붓고 열이 날 때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먹어 식히기도 하지만, 따뜻한 차나 물을 머금어 완화시키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과도 유사합니다.
다시 말해 체질과 증상에 따라 열을 내리는 치료도 다양한 방법을 이용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문8. 네. 잘 알겠습니다. 역시 어떠한 치료도 일단 제대로 된 진단부터 필요하다는 말씀이군요. 자, 마지막으로 이러한 급성 감염성 질환을 예방하는 방법에 대해 간단하게 짚어주시죠.
답8. 네 모든 병이 다 그렇지만, 걸린 다음에 뒤늦게 치료하는 것보다는 예방이 최선의 방법이겠지요. 바이러스나 병균이 우리 몸에 쳐들어온다고 해도, 내 몸의 저항능력이 강하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것이겠지요. 다시 말해 자주국방이 튼튼하면 무장공비가 침입해도 초전박살 내버리게 되는 것과 유사하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평소에 충분한 휴식과 수면, 그리고 적절한 운동과 균형 잡힌 영양섭취를 통해 체력과 기운을 보강시켜두는 것이 예방법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