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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푸른 낙엽- 청의 이야기
석진원 (부석고등학교 2학년)
1장. 이야기
13살 이전의 계절은 모두 길었다. 모든 계절은 1년 같았고 사계절은 4년 같았다. 신년의 첫 주인인 봄은 친절하면서도 엄격했다. 봄은 지난해에 얼어붙었던 땅을 모두 녹여 깊은 잠에 빠져있던 생명들이 일어나게 한다. 하지만 가끔은 겨울을 잊지 말라며 강한 추위를 불러오기도 하며 겨울과 얼마나 친한지 알려주곤 한다. 그렇게 추위가 햇빛을 피해 달아나면 두 번째 계절인 여름이 찾아왔다. 여름은 햇빛과 공기 심지어 사람들까지 너무 뜨거웠지만 밤새 같이 놀아주는 태양 덕분에 오랫동안 놀 수 있었다. 더위에 지쳐서 달리는 걸 멈출 때면 바람이 함께 뛰어줘서 기분이 좋았다. 그렇지만 해는 점점 지쳐갔고 더 빨리 지쳐가기 시작하자 그에 맞춰 가을이 찾아왔다. 가을은 친절하면서도 냉혹했다. 그저 우리에게는 천천히 여름을 잊게 해주고 많고 풍족한 음식들을 주었지만 식물들에는 입을 닫으라고 강요하였다. 명령받은 식물들은 겨울이 올수록 서둘렀다. 그래서 때때로 주황색 단풍잎 같은 따뜻한 색이 아니라 청명하고 푸르른 색의 잎이 떨어질 때도 있었다. 그래도 가을은 신경 쓰지 않았고 나무들은 겨울의 시작에 맞춰 모든 잎을 떨어뜨린다. 멀쩡하건 말건 그건 그들이 신경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슬픈 나날들이 지나면 겨울이 찾아왔는데 나는 겨울을 가장 좋아했다. (여름아 미안해. 너도 아주 좋아!) 첫눈이 내리면 거리에서 엄마 손을 잡고는 막 뛰어다녔다. 곧 눈이 더 많이 내리고 쌓이기 시작하면 아침 일찍부터 밥을 먹고 나가 집 근처의 오르막으로 갔다. 주변에 있는 아무 상자를 썰매 삼아 형, 누나, 친구들하고 해가 질 때까지 썰매를 신나게 타고 놀았다. 신발과 양말을 아무리 두껍게 신어도 겨울이 끝날 때쯤이면 발가락들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승현아 이제 집에 가자”
“민주야 너도 이제 집에 가야지”
“우리도 그럼 이제 갈까?”
다른 친구들은 해가 질 거 같으면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해가 세상을 떠나고 가로등이 제힘을 보여줄 때가 되어도 오랜 시간을 거기서 놀았다. 그리고 혼자 남아 가로등 불빛에 의존한 상태로 놀다가 배가 고프면 상자를 나무 밑에 두고 눈으로 덮어 숨겨두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오면 바로 놓을 수 있었다.
우리 집은 오르막을 내려가 밭을 가로지르면 빌라가 보이는데 거기 3층에서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면 우리 집이 나왔다. 추워서 빨리 빌라 안으로 들어가면 계단의 동작 등들이 친절하게 반겨줬다. 몇몇 애들은 졸렸는지 지나가고서야 반겨주었지만 그래도 친절하려고 하는 노력에 미소를 지었다. 동작 등 6개를 지나고 우리 집에 도착하면 나보다 키가 큰 손잡이에 손을 위로 뻗어 열쇠를 꽂아 넣기 위해 맨날 싸웠다. 작은 다툼 끝에 문이 열린다고 문을 바로 닫지 않았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가서 거실의 불을 켤 때까지 문을 열어두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그리고 환해지면 문을 닫는다. 동작 등은 문이 닫혀야지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달하고 노는 건 좋은 게 아니다. 달은 항상 조용하고 어떨 때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밤이 긴 겨울은 싫다.
춥긴 하지만, 이제 얼음은 얼지 않고 핫팩도 들고 다닐 필요가 없는 날이 될 때 겨울 동안 휴식을 취했던 해는 그제야 모습을 드러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리고 점점 모습을 보이는 시간이 길어지고 길어지다 어느새 보니 여름이 되었다. 하천을 덮었던 검은 풀들은 이제 사라지고 모두가 자신의 색을 찾아 인사를 하며 즐거워했다.
“엄마 이건 무슨 꽃이야?”
여름은 태양이 우리 모두를 기다려주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아침 이른 시간부터 놀이터에 나와 친구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친구들이 꽤 모이고 할 놀이가 정해지면 우린 그때부터 쉬는 시간 없이 계속 놀이를 했다. 술래잡기, 좀비 놀이, 숨바꼭질, 숨바잡기, 경찰과 도둑, 마법 세계 등등 한 놀이가 몇 시간씩 계속 이어질 때도 있었고 새로운 친구가 와서 몇 분 전에 시작한 게임이 바로 끝날 때도 있었다. 우리가 노는 데는 성별은 중요하지 않았고 나이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부르는 호칭만 붙을 뿐 뭐가 달라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이가 많고 돈이 많다고 군림하려는 태도는 전혀 없었다. 그냥 달리기가 빠르면 그게 갑이고 머리가 좋아 숨기를 잘하는 것도 갑이었으며 몸을 잘 다뤄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는 곳에서 당당하게 손을 흔들고 있으면 그건 신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잘났다는 말이나 행동을 보여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상대가 지쳐 보이면 어설픈 연기를 펼치며 잡혀주었다.
“숨바잡기 하자!”
“100초 세고 찾아!”
“야! 거길 어떻게 가라고!”
“너 뒤에 지나간다.”
“너 이로 와!”
여름은 지금도 오기 때문에 마지막이라고 하는 게 약간 이상하지만 나는 그해의 여름을 마지막 여름이라고 부른다. 그때 그 친구들에게도 마지막 여름이라고 말하면 그때를 떠올린다. 아무도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모르지만, 모두가 그해의 마지막 여름을 알고 있다. 그때 마지막 여름은 몹시 더웠다. 바람도 우리가 더워한다는 걸 아는지 뛰어다닐 때마다 함께 뛰어줬다. (물론 바람도 더워서 금방 멈추긴 했다) 이상하게했다.) 이상하게 우리는 태양이 아무리 작열하며 이글거려도 햇빛에 노출된 쇠가 아주 뜨겁게 달궈졌어도 덥다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았고 집에 가겠다는 말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냥 뛰어다니다가 지치면 잠시 쉬고 술래가 쫓아오면 다시 뛰는 것일 뿐이었다. 대부분 나는 술래가 아니라 도둑이었는데 몸을 잘 다뤄서 애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물론 적일 때만)이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아무도 못 오는 엄청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는 손을 흔들고 있다가 잠시 술래가 자리를 비우면 잡힌 애들을 살려주었다. 잡힌 애들은 신을 영접한 것만 같은 표정을 지으며 넌 우리의 구세주라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반대편에서는 똥을 밟아서 속상해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머리에 머가 날아와서 만지는데 알고 보니 새똥이었다는 사실을 알아 체념해버린 사람처럼 웃지 않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와 함께 도망친 애들은 어느 정도 멀리 떨어진 후 약속하지 않은 약속으로 외치고는 했다
“아디오스!”
“너희 이번에 잡히면 밧줄로 묶어버릴 거야....”
2장. 만남
친구들은 나에게 교복이 진짜 안 어울리는 얘라고 했다. 몸은 교복 때문에 어른스러운데 얼굴은 아무렇지도 않게 어려서 나조차도 이질감을 느꼈다.
“너 진짜 안 어울린다.”
“놀리지 말라고..”
“미안. 근데 진짜 안 어울려”
학교가 바뀐다는 경험은 처음이고 새로운 친구가 기존에 있던 친구들보다 많은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모든 게 낯설었다. 학교의 정문, 높은 층들과 넓은 건물, 교실, 교실 안의 책상과 칠판 그리고 창문 바깥의 새로운 풍경도 낯설었다. 게임 속에서 캐릭터가 능력을 발동시키려면 조건이 필요하듯이 내 성격도 드러나려면 조건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최소 이런 상황에서는 쭈뼛거리고 조용히 지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근데 나 같은 친구들도 꽤 많았던지 일주일이 지난날이 되도 아무도 반장을 하려 하지 않았다. 침묵이 30분까지 길어지자 선생님은 무작위로 3명을 뽑았다. 그중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앞에 나와서 간단히 말을 했다. 딱히 말을 잘했다던가 길었다던가 의지가 내포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간발의 표 차이로 나는 반장이 되었다. 일단 된 거 기본만 지키자는 생각으로 활동을 했다. 그렇기에 다음 선거에서는 당연히 안 뽑힐 줄 알았는데 그다음에는 압도적인 표 차로 당선되었다. 그때는 기본만 지키자는 생각 말고도 열심히 하자는 생각을 했다. 겨우 하나만 추가했을 뿐이었지만 애들은 나를 좋아해 주었고 2학년 때는 2번 다 반장이 되었다. 3학년이 되자 선생님은 나를 따로 부르셔서 전교 회장에 나가보라고 하셨고 바로 수락했다. 그 소식을 들은 애들은 알아서 홍보해주었다. 나는 공약을 적은 연설문을 작성하고 선생님들께 실현 가능할지 물었다. 그렇게 학교가 학생의 의견을 발언할 기회를 주는 것, 사용하지 않는 교실을 바꿔서 학생들이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는 것 등 모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없었던 것들과 시각장애인용 보도블록 재정리, 학교적인 활동량 증가추진 등을 연설문에 올렸고 600명 중에서 450이라는 표를 얻었다. 기본만 지키자. 열심히 하자. 차별이 일어나게 하지 말자. 불편한 건 바꾸자. 라는 생각은 나와 내 친구들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어느새 친구들도 기본만 지키자. 열심히 하자. 차별을 반대한다. 불편한 건 바꾸자. 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렇게 전에는 없었던 서로서로 돕고 발전시키며 자신을 존중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모두가 이웃이고 소외되는 사람이 없어지고 싫어하는 친구가 싫다고 단순히 피하는 게 아니라 싫은 점을 당당히 말하고 개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우연히 그 시기에 자기 주도적인 학생들이 입학한 것이고 우연히 그 시기에 활동을 더 많이 하려고 노력한 것일지도 모르며 우연히 소외되는 친구들이 없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고등학교에 원서를 넣는 날이 왔다. 나는 과학자를 꿈꿨고 성적도 높았기에 과학 중점학교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에게 높은 곳으로 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고 낮은 곳으로 가서 내신이나 따라고 했다. 특히 형편이 어려웠던 부모님은 장학금을 타는 게 좋겠다고 말씀을 하셨다. 돈은 부모님이 내시기 때문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고등학교에 원서를 넣었다. 울먹이는 얼굴을 본 선생님은 그저 등을 토닥여줄 뿐이었다. 그렇게 겨울방학이 찾아오고 졸업식을 마치면서 3학년은 끝이 났다.
“너 어떻게 지내?”
“나는 그저 그래”
“그게 뭐야”
“너는”
“난 저번보다는 바쁜 거 같아”
봄방학 끝이 다가오자 나에게 전화를 거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모두 말하는 게 비슷했다. 안부를 묻고 바쁘게 지낸다는 말. 겨울이 다 끝나가고 찾아오는 봄에 시간이 지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아이들의 불안과 걱정이 절정을 이룰 때 나에게 바랐던 말은 ‘나 바쁘게 살아’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래야지 현실을 더 직시하고 자기 스스로 했던 그 시절을 잊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전혀 하지 못했다. 이런 기간은 나에게는 처음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갑작스럽게 주어진 많은 책과 어려운 내용. 알지도 못했는데 모두가 알고 있던 기본. 그렇게 저버리는 봄을 보내고 저버리는 새로운 학교에 갔다. 외로울 것이라고 말했던 선생님의 말씀. 그건 과연 무슨 뜻이었을까. 혼자 공부하는 건 힘들다? 차라리 그게 외로웠다면 좋았을까. 과거로 돌아간다면 좋을까. 어떻게든 부모님을 설득했다면. 다른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나만 아니었다면.
3장. 보이지 않는 이유
“또 물이 안 나오네..”
물이 잘 나오지 않기 시작한 지 2달 정도 됐다. 종종 아침에 물이 나오지 않았는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따 보면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그날은 괜찮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심각해졌다. 빨래 주기를 늘려도 샤워 주기를 늘려도 식물에 물 한 모금 주기가 쉽지 않았다. 뉴스에서는 울상을 한 농민들의 인터뷰와 나라의 입장을 보도했다. 시청자들은 댓글로 반응을 보였는데 원래 우리나라에 한국어 말고도 한국 욕설이라는 공용어가 있었던지 욕설을 모국어로 사용하는 댓글로 도배가 돼 있었다. 각 지자체에서는 가정에 물을 공급하기 바빴고 말라 죽을 것만 같은 나무를 살리기 위해서 치열하게 싸웠다. 언제 내릴지도 모르는 비를 가지고 비가 오면 꼭 물을 최대한 많이 받아주세요! 라는 포스터를 이곳저곳에 붙여두었다. 학교 급식이 중단되고 농장도 망해버리고 공장까지 중단되자 나라는 사태가 생각보다도 더 심각하다는 걸 알고 인공강우를 시도하고 댐을 닫아걸었지만, 그 어디서도 효과가 있다는 말을 들려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변기에 벽돌을 쌓아두고 심지어 몇몇은 기우제까지 지냈지만 그걸 보고 뒤 떨어진다는 말은 없었다. 오히려 한탄만 할 뿐 누구 하나 원망하거나 탓을 떠넘길 수도 없기에 더 암담해 보였다. 하천의 돌다리는 쓸모가 없어졌고 겨울에 눈에 맞고 쓰러져버린 것처럼 부들과 갈대들은 처참하고 검게 죽어갔다. 슬플수록 하늘을 바라본다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빛나는 태양의 태도 때문에 앞을 보려고 더 노력했다. 그래도 하늘을 보게 되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한낮에 갑자기 충동스럽게 동네 당산을 올랐다. 어릴 때는 엄마가 항상 내 손을 잡으시고 데려가 주셨었다. 집에서는 충동스럽게 나오고 천천히 당산으로 향하자 등산로 중간에 작은 약수터가 있었던 게 기억났다. 아직 마르지 않았을까. 산의 나무들은 죽지 않았을까. 흙은 다 약해지지 않았을까. 걸으면 걸을수록 여러 가지를 확인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산을 오르기 시작하니 확인하고 싶었던 것들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산을 계속 올랐다. 정상에 빨리 올라야겠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었다. 나무에 가려졌던 하늘이 풀리고 푸른 하늘이 보이기 시작하자 더 서둘렀다. 무슨 마음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숨을 가쁘게 쉬며 정자에 앉았다. 아파트 하나 없는 시골 마을은 장난감 같았다. 체계적으로 모든 게 정해져 있고 앞으로 할 일을 예약해두고 시간이 되면 실행하는 마을 장난감 같았다.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도 안 보이고 바람조차도 안 불며 변함없는 마을을 보는데 질리지 않았다. 도시라면 끊임없이 움직이는 차들과 건물을 짓는 모습들이 보일까. 생각도 해보고 저기 한가운데에 아파트가 있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도 해보았다. 상상 속에서는 계속 다른 모습이었지만 언제나 그 상상 끝에는 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저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작은 시골 마을. 상상 속에서는 무언가가 달라지기 쉬운 작은 시골 마을은 어릴 때와 비교해도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산에서 내려가려고 몸을 돌리자 갑자기 미소가 지어졌다. 비웃는 것 같지만 그래도 기쁨이 있는 미소가 지어졌다. 내려오니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구름 없는 하늘. 사람들이 소리쳐도 변함없는 해가 지는 시간. 사람들이 소리치는 이유. 가뭄. 가만히 서서 생각하니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았다는 게 생각이 났다. 기억을 그렇게 빠르게 잊어버렸다는 것과 당당한 하늘의 태도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다섯 걸음이나 멀어졌지만 산으로 올라가는 작은 길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작은 노란 꽃도 보였다. 푸른 잎들과 어두운 몸통들과 흙 사이에서 작은 노란 꽃은 유독 눈에 띄었다. 다시 몸을 돌렸다. 현관을 열고 오늘 하루를 생각해보니.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산길에 나무들이 멀쩡했는지. 새가 지저귀었었는지. 정자는 어떤 색이었는지. 마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포스터는 어떤 색이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두려운 마음에 커튼을 다급히 걷고 바깥을 봤다. 회색의 건물들과 도로. 바짝 말라 갈라진 논밭. 주머니에 손을 넣고 가는 꼬마가 보였다. 커튼을 다시 치니 순간적으로 남은 1cm의 풍경에서 집 앞이 아니라 정상에서 봤던 풍경이 떠올랐다. 빌라 아래로 내려가서 3층의 우리 집을 보니 불이 켜져 있음에도 보이지 않았다. 창문이 새카매져 보였다. 커튼을 쳤던 게 생각나 다시 올라가서 커튼을 걷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내려가려 했지만, 다리가 아파져 왔다. 내려가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그리고는 다시 커튼을 쳤다.
4장. 잎이 떨어지는 것도 높이가 있어야 했구나.
중학교 때 친구들은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라고 말했다. 처음이라서 실수한 거라고 말하며 위로를 해줬다. 시골 촌구석 중학교에서는 전교에서 놀아 다닐 정도로 공부를 잘했는데 전국적으로는 그냥 말단에서 쭈그리고 있었다. 너무 놀랐다. 봄방학 때 공부량이 줄어든 건 맞지만 이렇게 낮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런데도 중학교 때 친구들은 괜찮다고 말해주었고 자기들도 대부분 그 정도 아니면 더 낮다는 말을 덧붙였다. 놀란 마음에 그날 하루를 계속 허망한 표정과 함께 지냈다. 주변 애들이 성적을 물어봐서 답해줄 때면 잘 나왔다고 했는데 의도가 어떤 것이든 좋은 말은 아니었다. 위로의 의미로 하던 정말로 잘 나왔다고 하든 높다는 말은 정말 죽어도 듣기 싫었다. 낮은 걸 아는데 높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한두 개쯤은 실수로 틀릴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 문제를 몰라서 틀렸다. 단 한 번도 모른다는 건 없었다. 시험 전에 이미 모든 걸 다 끝내서 시험 때가 되면 이미 다 아는 문제였다. 그런데. 그런데. 아니. 그런데. 아는 문제가. 그런데. 아니. 아니. 학교 안에서는 1등이라는 말도 안 되는 숫자가 그렇게 적혀있는데 정말 암담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는 우는 소리가 울렸다. 울리고. 울리고. 달이 그 소리를 듣고. 울리고. 달도 잠깐 가려진다.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도시에 있는 학교로 간 친구였는데 나와 성적이 비슷했다. 학교 안에서도 거의 꼴찌라며 울어댔다. 그러다가 자기 스스로 진정하고 학교 얘기를 했다. (원래 감정 기복이 심하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럴 때면 항상 놀란다) 우리 학교에는 담배 피우거나 일진 같은 애들은 없는 줄 알았는데 그런 애들이 너무 많다고 했다. 중학교 내에서는 성적 낮은 애들이 대부분 일진이거나 불량했는데 고등학교에 와보니 성적이랑 불량한 거랑은 전혀 관계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당연한 거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그 친구는 그냥 성적이 낮은 애들은 주변에서 몰아가니까 그렇게 변한 게 아닐까. 높은 애들은 다들 칭송하니까 담배 하나만 물어도 경악을 하며 치를 떠는데 낮은 애들은 당연한 거라고 보는 것처럼 보니 그런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도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가진 것만 같아서 부끄럽다고 했다. 전화를 끊었다. 학교에서는 맨날 싸움이 일어났다. 학기 초반에는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익히 들어왔지만. 싸움이 일어나는 게 적응이 안 되기는 하다. 오늘만 해도 싸움을 3번이나 말렸다. 항상 옆으로 던져졌지만 그래도 계속 말렸다. 모두가 친구면 안 되는 걸까. 내가 아니더라도 너희는 왜 말리지 않는 거니. 모두가 타인인 거니. 선이 왜 그렇게 앞에 있는 거니. 힘없는 나도 말리는데. 나보다도 건장한 너희는 왜 지켜만 보니. 아야. 아파라. 주먹에 맞고서야 싸움을 말리는 걸 멈췄다. 멈춰졌다고 하는 게 더 좋을 듯하다.
5장. 관성 부수기
중학교를 졸업할 때는 그 학교 내에서 더는 차별이 일어나지 않게 만들었다. 장애인이라고 움직이는데 제약이 없고 남들과 다른 자신이라고 차별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만들었다. 그 상황을 만들고 그 상황에 적응되니까 언젠가부터는 당연하다고 느꼈다. 나와 내 친구들이 그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힘을 들였었는지 잊어버렸다. 당연한 것을 얻는 게 왜 그렇게 힘든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해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안 됐다. 이해한다고 변하지도 않으니 설득하고 변화시키기 위해 활동하는 것이 답일 뿐이었다. 중학교 마지막 연설로 다시 겪으라면 한숨 먼저 쉬고 다른 사람이 바꾸길 바랄 것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또다시 차별이 일어나는 곳에 오게 되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마음이 답답하고 화가 치밀었다. 시각장애인 보도블록도 이상하게 박혀있고 계단 손잡이는 중간중간이 부서져서 장애인이 아니라고 해도 누구에게나 위험했다. 선생님들도 종교나 성적지향을 차별하는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학교 안에 있는 문제는 교장 선생님께 건의를 했다. 잘못된 발언을 하는 선생님들께도 옳지 않다고 말씀을 드렸다. 이유도 말하고 그 피해가 어떨지도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매일 수요일 마지막 교시일 때면 장애인 교육을 했다. 차별은 나쁘다던가. 도움을 주어야 한다던가. 듣고 싶지도 않았다. 중학교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많아진 공부와 당연한 것을 얻기 위한 투쟁을 함께 하는 건 힘들었다. 처음에는 반장도 되어서 계속 소리쳤지만 바뀐 건 없었다. 평범하게 살아. 조용히 좀 하고. 다 그렇게 살았어. 왜 그러는 거니?. 시간이 갈수록 입이 다물어졌다. 기운 없이 교실에서 나오자 플라스틱의 노란색 작은 공을 실수로 톡 쳤다. 공은 복도 끝으로 데구르르 굴러가다가 멈췄다. 불이 꺼진 쪽에 있어서 어두웠다.
공부에 집중하다 보니 잊어버리는 게 많이 생겼다. 반장이면 어떤 활동을 해서 반 학생들을 기쁘게 하는지. 싫은 짓을 골라서 하는 친구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지. 고민을 말하는 친구를 어떻게 상담했었는지. 모두 잊어버렸다. 부당한 걸 겪어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잊어버려서 넘어가는 일이 많아졌다. 다시 기억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반장 활동을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하고 상담 동아리에 가입해서 상담 기법을 다시 배웠다. 부당한 것에 잘 대처하는 법도 배웠다. 한 번다 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익히는 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지만, 공부와 병행하는 건 힘들었다. 그래도 그렇게 바쁘게 지냈기에 1년이 빠르게 지나갔고 과거처럼 성적도 높아지고 많은 것을 다시 기억하게 되었다. 하지만 2학년이 된다는 건 새로운 학년을 맞는다는 뜻이었다는 걸 잊고 있었다.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올라갔지만, 걱정은 다 맞아떨어지고 기대는 다 떨어졌다. 애들은 많이 싸웠다. 힘에 우열이 결정되자 항상 말단에 있던 애들이 올라가고 싶다는 욕망에 불을 지폈다. 이번에도 말단이라면 마음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외치며 더 크게 아주 크게 불을 지폈다. 불에 활활 아주 뜨겁게 타버리고 있는 말단에 있는 아이들은 위치를 건드리지 말면서도 올라가야 했다. 그 유일한 방법은 그 어디에도 있지 않은 아이 중에서 약한 아이들을 짓밟는 것이었다. 특히 뭔가 시끄러웠던 적이 있는 애들. 나서기를 좋아하고 저항하는 것을 좋아하는 애들이 좋은 타깃이다. 짓밟아도 복종하지 않고 계속 저항하면 그 꼴은 오히려 보기 좋기 때문이다. 타깃이 복종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타깃과 말단의 아이를 그냥 피하면 된다. 그렇지만 복종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은 피할뿐더러 말단의 아이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한다. 그 아이들은 타깃을 찾기 위해서 눈을 굴렸고 조건에 딱 맞게 떨어지는 아이가 떡하니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 아이는 자리에 앉아 공부는 어떻게 하고 학교에서 할 활동은 어떤걸 할지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그 아이는 누군가가 손으로 책상을 쾅 하고 치길래 놀랐다. 갑작스럽게 숙제를 대신 하라는 말. 시발. 너 요즘 재수 없다는 말. 넌 좆같이 왜 그렇게 잘난 척하냐는 말. 갑작스러운 욕설과 말도 안 되는 말에 한 번 더 놀랐다. 그렇지만 그 아이는 욕설로 맞받아치지 않고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 말했다. 지금 다짜고짜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냐고. 너한테 재수 없던 말던 내가 신경 써야 하는 거냐고. 날 만만하게 보냐고. 그리고는 그 친구 반대편으로 몸을 돌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옷의 목덜미 카라가 잡혀서 뒤로 끌리더니 머리가 바닥으로 내려 찍혔다. 상황을 파악하려는 순간 발로 차였고 계속 발로 차였다. 그 아이는 선생님께도 말씀을 못 드리게 학교가 끝난 후에도 계속 끌려다녔다. 저항하면 맞고 계속 맞았다. 골목에서 한 번. 길 중앙에서 한 번. 편의점 뒤에서 한 번. 계속 맞았다. 그 아이는 피기 싫은 담배를 강요받았고 폐가 타는 듯한 고통에 기침해댔다. 그 아이는 온몸에 상처를 입었지만 전부 옷에 가려져 있는 위치였다. 그 아이는 계획을 세웠지만, 전혀 이행하지 못했고 맨날 끌려다니니 공부를 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성적도 떨어지고 항상 불안해했다. 주변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아이가 그랬다. 그 아이가 그랬다. 그 아이가 그랬다. 내가 아니라 그 아이가 그렇게. 내가 아니라 그 아이가 당했다. 내가 아니다. 내 이야기가 아니다. 아니다. 내가. 내 이야기가 아닌. 내가 아니다. 그냥. 친구. 그래. 친구 이야기다. 제발 나 좀 도와줘.
6장. 단비
식당 주인이 도둑이 들었었다며 경찰에 신고를 넣었었다. 아침에 출근하니 식당 문이 열려있었고 계산대에 있는 돈이 모두 사라지고 주방도 난장판이 되어있었다며 경찰에 신고를 넣었다. 그 식당은 마을에서 유일한 중식당으로 독점하여 가격도 아주 비쌌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별로 신경 쓰지는 않았지만, 그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소문은 나에게도 들려왔는데 방식이 약간은 달랐다. 일반적으로는 지나가다가 듣거나 만나서 듣거나 우연히 관련 글을 보게 되는 방식인데 나는 경찰이 알려주었다.
괴롭힘을 당하고 있어도 잘 해내겠다며 악착같이 공부를 했다. 잠은 보석보다도 더한 사치였다. 온전히 완전히 집중해서 공부했다. 다행히 성적 발표날 하교 시간에 받은 성적표에는 높게 나왔고 성적이라도 높게 나온 것에 고마웠다. 그렇게 고마운 마음으로 의자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담임 선생님이 부르셨다. 오랜만에 성적이 잘 나와서 부른 것일까. (살려줘). 다른 할 말이 있으신가. (내 셔츠를 잠시 올려봐). 교무실 상담실로 들어갔다. 선생님은 나에게 소파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소파에 앉자마자 말을 했다.
“솔직하게 말해. 너 커닝했지”
다짜고짜 하는 말이 커닝이라는 어이없는 말을 지껄였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때려 박고 싶은 얼굴을 쳐다보니 말을 계속 이었다.
“맨날 입만 시끄러운 얘 성적이 어떻게 갑자기 올라? 그게 가능해? 솔직히 말해. 너 커닝했지”
“안 했어요”
“구라치지 말고”
“구라 아니고 안 했어요”
“시험공부를 안 했다고?”
“커닝을 안 했다고요. 이거 말고 다른 용무 없으시면 돌아갈게요. 방학 잘 보내세요.”
그 상태로 교실로 들어가 가방을 들고 학교를 나갔다. 나가면 그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 뻔했지만 학교에 있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했다.
“야. 거기 멈춰”
“꺼져. 이젠 나 너 말 안 들을 거야”
그 애들은 나를 쫓아왔고 나를 잡았다. 어디론가 끌려가 구타를 맞았고 그곳에서 온몸이 묶인 채로 감금당했다. 하루에 한 번 묶은 걸 풀어줬는데 풀 때마다 계속 때렸다. 그리곤 삼각김밥과 물 하나를 주고는 먹게 했다. 한 입 먹을 때마다 발로 차댔기에 빨리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왜 이렇게 느리냐면서 발로 차댔고 한입에 삼키면 다시 묶고서는 때려댔다. 그런 나날을 7일 동안 보냈다. 그러다 어느 날 매일 새벽에 찾아오던 애들이 한낮에 찾아왔다. 후광 때문에 어떤 놈이 들어왔는지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들어오자마자 나를 일으켜 세우고는 밧줄을 풀었다. 그는 밧줄을 다 풀고 내 팔을 그의 어깨에 걸치도록 했다. 그리고는 일어났다. 갑자기 앞이 안 보였다. 앞이 전부 새 카 맞게 변해서 보이는 게 전혀 없었다. 어깨에 걸친 채로 쓰러졌다. 마지막 기억으로는 그도 갑작스럽게 무거워진 나 때문에 휘청거렸던 게 기억난다.
정신없이 깨어나자 기운이 없었다. 지금 또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힘이 없었다. 나지막하게 말했다.
“살려줘.”
누군가 내 몸을 흔들었다. 그러면서 무슨 말을 했는데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이미 그들에게 귀를 하도 맞아 귀가 터져버린 탓이었다. 그래도 확실한 건 나를 흔들면서 말하는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설마 하는 마음에 살며시 눈을 떴다. 하얀 침대에 햇살이 비추고 있었고 앞에는 어떤 훤칠한 형이 내가 눈을 뜬 것을 보고는 좋아했다. 어찌나 좋아하던지 아이들의 미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일어나자마자 상황에 대해 설명을 들었지만 중간씩 끊기는 소리 때문에 제대로 된 맥락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퇴원할 때쯤에 귀가 다시 회복되었는데 그때 들은 바에 따르면 식당 주인이 도둑을 신고해서 경찰이 범인을 찾아다녔는데 범인이 3, 4명이라는 걸 확인하고 동선을 찾아본 결과 내가 있던 버려진 폐가가 주거지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폐가를 기습하자 범인들이 아니라 내가 발견되었고 경찰들은 나를 병원으로 데려와 치료를 받게 했다. 훤칠한 형이 경찰이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내가 있던 곳이 폐가였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때 머리를 딱 스쳐 간 게 있었다. 범인 대신 내가 있었다면 범인은 어디에?
“걔들은 어디 있어요?”
“아직 못 찾았어. 꼬맹이들이 뭐 그렇게 잽싼지 CCTV에도 안 걸리고 어디에도 안 보여”
“아... 네..”
“걱정하지 마. 우리가 최대한 빨리 찾을게. 너는 치료나 잘 받아.”
“퇴원했는데요..?”
“어느 상담사 한 분께서 너를 치료해주고 싶으시다고 하셨어. 네가 원하면 치료받을 수 있는데. 받아볼래?”
“네”
상담실 문을 밀고 들어가니 맑고 청량한 소리가 들렸다. 시골마루의 풍등조차도 눈을 돌릴 정도로 맑았다. 그리고 그 소리에 맞춰 바람이 불어와 나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내 발에 발이 걸릴뻔했는데 바람이 그것조차도 풀어주었다. 소리를 듣고 창문을 보다가 뒤를 돌아본 여자는 후광으로 인해 신비스러워 보였다. 그저 비만인 여성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신비스러움은 그녀를 풍만하고 따뜻하며 말을 걸게 만들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서 있기는 힘드니까 여기 잠시 앉아볼까요?”
상담사는 나의 기분에 관련된 질문을 몇 가지 하고 내가 나의 상황을 말하게끔 유도했다. 내 기분과 상황은 암울하고 슬펐기에 눈물이 쏟아졌다. 말을 하려고 머리를 지나는데 눈물이 입을 막았다. 상담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빠르게 진정이 되었고 상담을 계속 진행했다. 한 시간 십 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상담을 하였고 나는 병원을 나왔다. 상담실에서 나오니 무언가가 건물을 툭툭 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가벼운 것들이 약간의 속도를 가지고 내려오고 있었다. 밖으로 뛰쳐나가니 바닥이 젖어있었고 곳곳에 물웅덩이가 있었다. 비는 갈라진 땅 틈으로 들어가서는 흙을 다시 부드럽게 했다. 딱 적당하게 내렸다. 땅을 적실 정도로 사람들이 빗물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내렸다. 병원 바깥에서는 사람들이 비를 맞으며 좋아하고 있었다. 빗속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모두가 기뻐하고 있었다. 옷이 젖는다는 게 얼마 만인가. 우산이 없어서 당혹할 수 있었던 것이 대체 얼마 만인가. 가로수들과 식물에 물을 줄 수 있다는 게 대체 얼마 만인가. 나도 그 무리에 껴서 춤을 추었다. 옷을 확 적시고 싶었다. 몸까지 젖어버려 샤워도 못 하는 몸을 닦아버리고 싶었다.
7장. 푸른 낙엽.
비는 며칠 동안 계속 내렸다. 그러다가 예보상으로 마지막 날에 폭우가 쏟아졌다. 비가 계속 쏟아지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갑작스럽게 중학교가 생각이 났다. 내 현재 삶의 최고 작품. 내 모든 철학과 마음이 담긴 공간이면서 작품인 곳. 그곳이 지금 아름답게 비에 젖어있다. 라고 생각을 하니 마음이 그렇게 들떴다. 정말 마음이 몸을 벗어나 하늘 위에서 둥둥거리며 뛸 정도로 중학교를 볼 생각에 기뻤다. 우산을 들고 빌라를 내려갔다. 낮인데도 어둡다며 길을 밝혀주는 동작등들을 지나고 곳곳에 생긴 물웅덩이를 지났다. 곳곳에 생긴 작은 물길들도 넘어갔다. 그래도 신발이 젖고 바지가 젖었지만 상관없었다. 오히려 좋았다. 몸이 비에 젖고 비에 젖은 학교를 본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생각이 머리를 스칠수록 이 기쁨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물웅덩이를 모두 다 밟아가며 뛰었다. 윗옷에도 비가 왔지만, 비 한 방울. 한 방울이 섬유에 퍼지듯이 기쁨도 그에 맞춰 퍼져갔다. 학교가 보였다. 다 젖어서 색이 진해진 학교가 보였다. 저게 본색일까?? 학교에 도착하자 우산을 접었다. 아직 방학을 하지 않았는지 학생들이 있었다. 동아리 활동이나 학교 활동 또는 멘토 멘티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너무 좋았다. 학교 정문을 들어가니 뭔가가 달라져 있었다. 학생들이 변한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이질감이 들지만, 계단을 올라 2층 교무실로 갔다. 세 번 똑똑똑. 나만의 암호였다. 전교 회장 때 교무실 문을 이렇게 두드려서 선생님들이 미리 준비하도록 한 것이다. 문을 두드리자 과학 선생님께서 문을 여셨다. 나는 선생님을 뵙자 너무 기쁜 마음에 두 팔로 콱 안았다. 고개를 들어 선생님을 보자 선생님은 웃고 있지 않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너 얼굴을 볼 자격이 있나 싶어서 말이다.”
“네? 무슨 소리세요?”
“너도 변했나 보구나. 가장 변화를 주도했던 아이였는데”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각장애인용 보도블록은 곳곳에서 뜯기고 없어져 있었다. 계단에 있던 점자 표시는 다 마모되어있었다. 교무실 안에 놓여 있는 학교 활동 및 동아리 활동 기록서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멘토 멘티 활동은 2년 전으로 끝이 났고 토론, 독서, 철학 동아리 활동도 2년 전을 마지막으로 모두 끝이 난 상태였다.
“이게 뭐예요?”
“미안하다.”
“아니.. 이게 대체..”
“선생님들은 네가 변화를 주도했다고 학교 자체를 변화시켰다며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정말 그 누구보다도 우리는 좋아했고 어떻게든 그 순간을 이 공간과 함께 묶어버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우린 실패했고 구성은 바뀌어 갔다. 새로운 힘이 계속 들어왔고 간신히 정지시켰던 시간은 반대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는 흔적만 있을 뿐 옛날하고 다른 게 전혀 없단다. 나는 더 이상 너를 볼 면목이 없구나.”
뒷모습을 보여주시는 선생님을 막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문은 닫혔고 난 거기서 당혹한 상태로 서 있었다. 잠시 비켜달라고 하는 아이들에게 밀려나자 계속 밀리고 밀려 정문까지 밀려졌다. 복도 끝에서는 폭우에 벽에 물이 새어 물이 흥건했다. 곰팡이는 좋다면서 피어댔다. 우산을 펼 때서야 내 손이 떨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우산을 쓰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전화가 왔다. 경찰 형이었다.
“애야 미안해..”
“네?.....”
“애들을 잡았는데.. 이상한 곳에서 잡아버렸어.”
“왜요. 왜요! 뭐가요! 그냥 말해요!”
“상담실에서 잡혔어.”
“걔들이 대체...”
머리에 스친 생각. 온몸이 경직돼버린 순간 핸드폰은 비와 함께 떨어졌다. 주워야 한다는 생각은 몸을 움직이게 충분한 명령이 아니었다. 최소한, 이 상황에서는 그 말은 전혀 충분하지 않았다. 눈을 깜빡이자 핸드폰을 집었고 눈을 다시 깜빡이자 정문을 벗어났다. 흔들리는 손은 우산을 제대로 집지 못했고 결국 접어서 어깨에 끼었다. 비에 흠뻑 젖으며 길을 걸었다. 학교에 왔던 지름길이 아니라 가로수 길을 걸었다. 그 공간은 거기서 멈춰주어야 했다. 가로수 길에는 낙엽들로 새로운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최악의 가뭄으로 휘청휘청하던 잎들이 폭우를 견디지 못하고 모두 떨어져 버렸다. 초록색의 푸르른 낙엽들 사이를 계속 걸었다. 계속. 계속. 계. 계. 넘어져서 무릎이 까였다. 무릎으로 주저앉은 상태로 계속 앞을 향했다. 그러는 내 눈앞에 잎이 하나 더 떨어졌다. 나선을 그리며 천천히 그리고 또 아름답게 떨어졌다. 나뭇잎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너에게.. 대체. 대. 무슨 죄ㄱ. 난 또 무슨. 죄. 가. 잠시 비가 잦아지더니 소리가 달라졌다. 바닥에 부딪히면 튕겨댔다. 우박이 떨어지자. 내 눈앞으로 나뭇잎들이 휘날렸다. 앞으로 옆으로 옆으로 그리고 뒤로 모두가 져버렸다. 눈을 깜빡였다. 걷고 있다. 눈을 다시 한번 깜빡였다. 횡단보도 초록 불. 눈을 다시 한번 깜빡였다. 급하게 회전한 차. 놀란 목소리로 다급하게 나를 흔드는 어떤 사람. 눈을 깜빡였다. 온통 온 곳이 하얗게 빛이 나고 가운데에 긴 가로수 길이 있는 다양한 색의 꽃들이 피어있었다. 횡단보도에는 다양한 색들의 꽃들이 쌓여 푹신하게 했다. 횡단보도를 지나니 초록색으로 파릇파릇한 잎들이 나무 위에 있었다. 횡단보도를 지나자 이번에는 주황색으로 칠해져서는 모두를 따뜻하게 감쌌다. 횡단보도에는 주황색 잎들이 모두 쌓여 있었고 그다음에는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보였다. 외로워 보이지만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길을 지나고 또다시 횡단보도를 건넜다. 눈을 깜빡이자 침대에 차 안 같은 곳에서 누워있었다. 선반 안에 이름 모를 약들이 많았고 옆에는 단풍나무들이 나를 만지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자 소리가 엄청 높은 기계음이 들렸다. 삐삐삐삐. 다시 한번 깜빡이자 기계음이 더 빨라졌다. 삐. 삐삐삐ㅣ삐ㅃㅣ삐 눈을 깜빡이자 집이 보였다. 집 문을 열었다. 밝았다. 그렇다면 문을 계속 열어둘 필요가 없다. 문을 닫고 도어락 소리가 들리자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왔니?”
신발장에 가만히 서 있었더니 다시 들렸다.
“우리 청이 왔니?”
신발을 벗고 거실로 가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에서 여자 한 명이 나왔다. 옆 모습이 머리로 가려져서 누군지 안 보였다. 그 여자는 머리를 걷고는 내 앞에 섰다.
“엄마가 부르는데 대답도 안 할래?”
눈을 감겼다. 눈을 뜨려고 했는데 필사적으로 막았다. 뜨면 바뀔 것이다. 불안했다. 그래도 엄마를 보고 싶었다.
“엄마?”
“왜?”
“내 손 좀 잡아줘”
엄마의 따뜻한 손이 나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기운이 온몸으로 빠르게 퍼졌다.
“엄마. 안아줘”
엄마가 따뜻한 품으로 나를 안았다. 그리고선 들어 올리셨다. 눈을 떴다. 바닥에 떨어졌다. 무릎을 꿇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고 앞에는 엄마의 사진이 있다. 작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주변에서는 소리가 들린다.
“애들 어떡하니”
“그러게 말이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그쪽 사장은 망할 거야”
“사람 한 명 죽였는데 당연히 망해야지”
“당연한 게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이제라도 되겠지”
“그럴까?”
“사람 하나 죽였으니 되겠지”
“한 2초 정도?”
“그…. 래.. 2초 정도”
창문으로는 푸른 잎들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눈을 감았는데 다시 떠지지 않았다. 보이지도 않는 거.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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