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숙 연재수필
산과 나 ‧ 1
원고 연재 요청을 받은 뒤 무엇을 쓸까, 고민하다가 나에 대해 쓰기로 했다. 나를 둘러싼 이야깃거리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무엇을 고를까, 생각하다가 먼저 ‘산과 나’부터 쓰기로 했다. 산에 대해서는 동서고금 너무 많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써 봐야 뻔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아 두려운 마음도 들었지만, 그래도 써보기로 작정했다.
산을 가까이 하고 친하게 지내면 건강에 좋다는 것, 누구나 다 아는 것이지만 우선 그 이야기부터 해보고자 한다. 우리나라는 산 부자이고, 게다가 오를 생각만 있으면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 대부분이다. 한국인으로서 산을 오르지 않는다면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되고, 자연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30대 후반부터 등산하기 시작했는데 대체로 대구 근교 산을 다녔다. 당시 앞산을 주로 올랐는데, 하루 종일 산에서 지내는 셈이었다. 10시쯤 앞산 자락에서 시작하여 정상이나 주능선에서 준비해 간 점심을 먹고 오후 내내 하산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40대부터는 팔공산 비슬산 가야산 등 대구 주위의 산을 다니다가 가끔 지리산 설악산 오대산 덕유산 등 비교적 유명한 산을 등산했다. 그런데 나는 걸음이 늦은 편이라 친구들과 등산하다 보면 항상 꼴찌 그룹에 속해서 뒤 따라가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헐떡거리며 능선에 올라서서 조금 쉬려고 하면 먼저 온 친구들은 다시 출발하려고 한다. 늘 뒤에서 따라가다 보면 주위의 경관을 보기보다는 앞선 사람의 궁둥이만 보고 걷는 셈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궁리를 낸 것이 처음 출발 때, 힘이 있을 때 앞서서 걸어 보는데 이내 추월을 당하고 만다.
이때 주말이나 공휴일에 항상 같이 다니는 고교 동창생 김명환 군은 누구보다도 잘 걷는 친구인데, 늘 내가 쉬다가 걷자고 하면 조금 더 가서, 저 능선에 올라가서 쉬자고 한다. 그러면 너는 먼저 가라, 나는 쉬고 가겠다고 떼를 쓰곤 했다.
40대 후반, 백무동에서 참샘을 지나 장터목 산장에서 일박하고 천왕봉 오르고 중산리로 내려가는 코스를 택했다. 참샘을 지나면 가파른 오르막이 있는데, 나도 모르게 한 발 내딛을 때 숨을 길게 마시고, 또 한 발 내딛을 때 숨을 길게 내뱉고 오르니 숨이 덜 가쁘고, 능선에 올라서도 쉬지 않고 천천히 걸으니 친구들과 보조를 맞출 수 있게 되었다.
평지를 걸을 때는 이런 방법을 쓰지 않고 적당히 호흡하면서 걸으면 되지만 경사가 있는 산을 오를 때는 항상 스스로 터득한 방법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복식호흡 전문가들이 그것은 복식호흡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등산 초보일 때는 가파른 오르막이 있으면 걱정도 되고 고생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오르막을 만났을 때 심호흡을 하고 오른다. 그렇게 하면 땀도 많이 나고 등산하는 기분이 나서 즐기는 편이다.
2004년 엘부르즈(5,642m)를 오를 때 내가 쓰던 호흡으로 걷고 있는데, 현지 가이드가 다른 호흡법을 가르쳐 주었다. 엘부르즈는 코카서스 산맥에 있는 주봉으로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이 산의 3,000m 이상은 만년설로 덮여 있다. 눈 위를 걸을 때는 발이 눈 속으로 깊이 빠지기 때문에 눈이 없는 곳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힘이 많이 든다. 그래서 한걸음에 숨을 깊이 내쉬고 마신다. 이렇게 걷지 않으면 20걸음도 못 가서 지쳐버린다. 호흡도 주어진 상황에 따라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등산할 때 사용하는 호흡법을 부지불식간에 잠잘 때에도 사용하게 되었다. 36세부터 40세 때 대학의 사무처장을 맡았는데, 맡은 업무를 처리하려 하니 능력에 부치는 것도 있고, 해결이 불가능한 것도 있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일에 몰두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불면증이 생기기도 했다.
그 무렵, 산에 오르는 호흡법으로 호흡을 하다 보면 쉽게 잠이 들곤 했다. 호흡이 짧으면 잠이 잘 오지 않는다. 등산하면서 배우고 느끼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숙면으로 이
끄는 호흡법이 으뜸이라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산에 오르면서 다리를 삐거나 다친 적이 없는데 2, 3년 전부터 왼쪽 무릎과 발목에 약간의 이상이 있어서 조심하고 있다. 세상만사가 좋은 것이 있으면 나쁜 것도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 같다. 83세 때 박병춘 교수와 함께 지리산 천왕봉을 올랐는데, 그 후 한 번 더 천왕봉을 오르고 싶지만 무릎과 발목이 허용할지 모르겠다.
산은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가 더 위험하고 다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가능하면 해가 있을 내려오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야 말할 필요도 없다. 해질 무렵 하산할 때의 풍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풍광인데, 고려 때 문신 정지상이 그런 풍광을 읊은 시가 생각난다.
石頭老松一片月
바위 끝 소나무에 뜬 조각달
天末雲低何處山
하늘 끝 구름 아래 어디가 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