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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5월 21일 화요일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홍] 성 크리스토포로 마가야네스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말씀의 초대
야고보는 세상과 친해지면 하느님과 멀어진다고 신앙인들에게 경고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논쟁한 것을 아시고,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깨우쳐 주신다(복음).
제1독서
<청하여도 얻지 못한다면 잘못 청하기 때문입니다.>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4,1-10
사랑하는 여러분,
1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2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4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5 아니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을 열렬히 갈망하신다.”는
성경 말씀이 빈말이라고 생각합니까?
6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더 큰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신다.”
7 그러므로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8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
9 탄식하고 슬퍼하며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고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
10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30-37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사이의 ‘서열 논쟁’으로 생긴 갈등을 정리하여 주십니다.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는데, 사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욕심”에서 비롯합니다. 독서는 이를 매우 날카롭게 묘사합니다.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복음은 이러한 갈등과 불화를 해결할 방법으로 세 개의 이미지(꼴찌, 종, 어린이)를 제시합니다. “꼴찌”로 옮긴 그리스 말 ‘에스카토스’는 끝이나 종말 또는 마지막을 의미하며 맨 끝자리의 ‘무의미한 존재’나 ‘쓸모없는 존재’를 가리킵니다.
“종”으로 옮긴 그리스 말 ‘디아코노스’ 또한 식탁에서 봉사하는 이를 뜻합니다. “어린이”로 옮긴 그리스 말 ‘파이돈’은 세 살에서 다섯 살 정도의 아이들, 어린이라고 보기에는 아직 어리고 연약한 이들을 말합니다. 결국 이 세 개의 이미지를 통하여 “첫째가 되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노력 대신 힘 없고 나약함을 받아들이는 겸손을 가지도록 제안하는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그것이 바로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독서에서는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꼴찌가 되고 누군가의 종이 되며 연약한 아이처럼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가식이나 위선 없이 진심으로 하느님께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야말로 구원의 초대이고 은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로소 그때 하느님께서는 바닥에 있는 우리를 들어 올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어린이 하나를 가운데 세우시고 안아 주셨듯이 말입니다.(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겉으로는 주님과 가장 가까이 있지만, 실제로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두번째 수난 예고를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마르 9,31)
당신 입으로 직접 수난과 죽음을 예고를 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묵상해봅니다. 예견되는 끔찍한 상황이 눈앞에 떠올라 마음이 엄청 산란하셨을 것입니다.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다고까지 말씀하실 정도로 두려우셨습니다.
이런 스승님의 마음과는 달리 제자단의 반응은 한심할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스승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해 질문하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그간 자신들이 꿈꿔왔고 상상해왔던 길이 아니었기에 때문에 일부러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추구하고 있는 왕국과 제자들이 기대하고 있는 왕국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하나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보이고있는 극단적 미성숙과 스승님의 정체와 사명에 대한 몰이해는 점점 커져만 갑니다. 카파르나움에 위치한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집에 도착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을 하였느냐?” 앞서 걸으시던 예수님께서 뒤따라오던 제자단의 분위기를 눈치채셨던 것입니다. 계속 티격태격하며 뒤따라오던 제자들의 대화를 가만히 들어보니, 예수님 당신 얼굴이 다 화끈거릴 정도였습니다.
제자들은 부끄럽게도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는 문제로 길에서 한바탕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노상에서 서열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주님과 동고동락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 대목은 교회 깊숙한 곳으로 들어와 봉사하는 성직자 수도자들이 깊이 성찰해야 할 부분입니다.
매일 교회 안에 머물면서, 매일 거룩한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겉으로는 주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정작 마음과 정성이 없기에, 그저 타성과 매너리즘에 빠져있기에 가장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은가 진지하게 돌아봐야하겠습니다.
제자들은 부지런히 스승님을 따라가고 있었지만, 허깨비같은 몸만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정신과 영혼을 전혀 따라가고 있지 않았습니다. 말로만 제자, 무늬만 제자였던 것입니다.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마음이 심란해진 예수님이신데, 그래서 이미 두 번씩이나 제자들에게 수난 예고를 하셨는데, 그렇다면 스승님이 걸어가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에 대해 함께 진지하고 숙고하고 고민할 법도 한데, 제자들은 스승님의 수난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일말의 양심이 있는 제자라면 스승님이 겪고 계신 고뇌에 조금이라도 참여하기 위해 노력할텐데, 그래서 스승님을 따뜻한 말로라도 위로해드리고자 노력할텐데, 제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누가 큰 사람인가? 스승님의 나라가 서면 누가 오른쪽 왼쪽에 앉을 것인가에만 관심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갈길이 까마득한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절대로 굽힐 수 없으며, 어쩔 수 없는 당신의 운명과 사명, 핵심 사상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코, 9,35)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체의 호르몬 중에 ‘도파민’이 있습니다. 이 호르몬은 즐거움과 쾌락을 느끼게 해 준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새로운 여행과 모험을 떠나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게임을 하고, 스포츠를 보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노래하고 춤추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도박과 마약도 즐거움입니다. 연애도 즐거움입니다.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조금 고상하게 맹자는 인생의 3가지 즐거움을 이야기했습니다. 첫째 부모가 모두 살아계시고 형제들이 아무런 일없이 건강한 것이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지 않고, 땅을 내려 보아 남에게 창피하지 않게 사는 인생이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셋째 천하의 똑똑한 영재들을 모아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류학자는 인간을 ‘Homo Ludens(즐거움을 찾는 존재)’라고 정의하기도 합니다. 인류의 문명과 문화는 즐거움을 추구하고, 즐거움을 찾으면서 발전했습니다. 문학, 미술, 음악, 예술은 이런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발전하였습니다.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그렇게 이끌기도 하고, 즐거움을 추구하기에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인체의 호르몬 중에 ‘세로토닌’이 있습니다. 이 호르몬은 안정과 평화를 느끼게 해 준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안정과 평화를 주는 것이 있습니다. 피정은 ‘피세정념(避世靜念)의 줄임말입니다. 세상을 피해서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찾는 것입니다. 측은지심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고, 여관으로 데려간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선교회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 아프리카 수단의 이태석 신부님, 꽃동네의 오웅진 신부님, 요셉 의원의 선우경식 선생님은 평생 어려운 이웃을 도왔습니다. 그들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인류의 문명과 문화는 안정과 평화를 추구하면서 발전하였습니다.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이 그렇게 이끌기도 하고, 안정과 평화 그리고 헌신과 나눔을 추구하기에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이 나오기도 합니다.
자동차에 비유하면 도파민이 가속 페달이라면 세로토닌은 멈춤 페달입니다. 가속 페달이 없는 차는 움직이지 않지만 멈춤 페달이 없는 차는 사고가 납니다. 둘의 조화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도파민이 이끄는 삶과 세로토닌이 이끄는 삶의 균형을 도모해야 합니다. 본당의 사목도 이런 균형을 유지하면 좋습니다. 교우들의 친교를 도모하기 위해서 체육대회, 본당의 날, 음식 나눔을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주일학교 학생들을 위해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습니다. 적당한 유머와 놀이는 집의 창문과 같아서 활력을 줍니다. 본당에 도파민과 같은 호르몬이 함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가하면 성경공부와 피정, 봉사활동이 있어야 합니다. 주일학교 학생들은 가난한 나라에 가서 집을 지어주기도 하고, 영어를 가르쳐 주기도 하면서 신앙의 자긍심을 얻기도 합니다. 어른들은 가난한 나라에 가서 의료봉사를 하면서 복음의 기쁨을 얻기도 합니다. 재미와 의미라는 두 날개로 본당이 균형을 이룬다면 활력과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설 때, 하느님은 우리의 직책이나, 우리의 업적을 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보실 것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살았던 우리들의 삶을 보실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직책이나 자리를 가지고 다투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불편한 것을 참을 수 있다면, 잠시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소중한 것을 먼저 생각 할 수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은 어쩌면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 돈, 명예, 권력, 성공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경쟁해야 하고, 이겨야 하고, 이기기 이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 않도록 강요합니다. 나눔, 사랑, 겸손, 봉사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온통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곳입니다. 우리 또한 서로 사랑하고, 서로 믿으며, 같은 곳을 향해서 가는 동반자입니다.
제자들은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였고, 그 의미를 묻지도 않았습니다. 재미만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고 있을까요? 오늘 사제들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을까요?
<아름다운 다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마르 9,33)
우리 가운데
누가 더 믿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실천하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희망하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기뻐하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사랑하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감사하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착한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고운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바른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참된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환한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맑은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깨끗한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올곧은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굳건한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부드러운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보듬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돌보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섬기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베푸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살리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북돋우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아우르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헌신하는가?
오늘의 성인
성 크리스토포로 마가야네스 하라(Christopher Magallanes Jara)
신분 :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멕시코(Mexico)
활동연도 : 1869-1927년
같은이름 : 끄리스또발, 크리스또뽈, 크리스터퍼, 크리스토발, 크리스토퍼, 크리스토포루스, 크리스토폴
크리스토발 마가야네스 하라(Cristobal Magallanes Jara)로도 알려진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 하라(Christophorus Magallanes Jara, 또는 크리스토포로 마가야네스 하라)는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 중에 반란을 선동했다는 날조된 혐의를 받고 미사를 봉헌하던 중에 체포되어 재판도 없이 죽임을 당한 순교자로서 가톨릭 교회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1869년 7월 30일 멕시코 서부 할리스코(Jalisco) 주(州)의 토타티케(Totatiche)에서 농부였던 라파엘 마가야네스(Rafael Magallanes)와 클라라 하라(Clara Jara)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목동으로 일하던 그는 19살 때에 과달라하라(Guadalajara)에 있는 산 호세(San Jose)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30세에 과달라하라에 있는 산타 테레사(Santa Teresa)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후 같은 도시의 한 학교에서 교목신부로 봉직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토타티케의 본당신부로 임명된 후 학교와 목공예품 상점을 설립하고, 칸데라리아(Candelaria) 댐 건설을 돕는 등 고향의 발전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멕시코 서부 시에라마드레 산맥(Sierra Madre Mts.)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인 후이촐족(Huichol)의 복음화도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아스카프탄(Azqueltan)에 있는 아메리카 인디언 마을에 선교 기관을 설립했다. 1914년 정부로부터 과달라하라의 신학교를 폐쇄하라는 결정이 내려졌을 때, 그는 자신의 본당에서 신학교를 열 것을 제의하였다. 1915년 7월 토타티케에 개교한 신학교는 빠르게 성장해 다음해 이미 17명의 학생이 등록했고, 학칙과 두 명의 교수를 파견해준 과달라하라 교구의 호세 프란치스코 오로스코 이 히메네스(Jose Francisco Orozco y Jimenez) 대주교로부터 승인도 받았다.
그는 무장반란에 반대하여 많은 저술과 설교를 했으나 오히려 그 지역의 크리스테로 반란을 도모했다는 부당한 고발을 당해 체포되었다. 1927년 5월 21일 농장에서 미사를 봉헌하던 중에 체포된 그는 얼마 안 남은 소지품마저 사형 집행인에게 주었고 그들의 죄 또한 용서해주었다.
그리고 아무런 재판도 없이 4일 후인 5월 25일 할리스코의 콜로틀란(Colotlan)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 칼로카 코르테스(Augustinus Caloca Cortes) 신부와 함께 순교하였다. 그는 사형 집행인에게 “나는 결백하며, 나의 피로써 나의 멕시코 형제들이 일치할 수 있기를 하느님께 간구한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 하라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크리스테로 전쟁과 관련하여 희생된 24명의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시성되었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성 크리스토포로 마가야네스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멕시코 정부 당국은멕시코에 어용(用) 천주교회를 세우려고 음모를 꾸몄다.
그리고 이에 동조하지 않는 고위 성직자들과 성교회에 충실한 주교들을 추방하고 그 자리에 자신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앉히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멕시코에서 활동하던 외국인 선교사들을 모두 추방하였고 공권력을 이용하여 각종 학교와 신학교를 강제로 폐쇄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자 교황 비오 11세(재위 1922-1939)는 멕시코의 주교들과 함께 멕시코 국민이 신앙을 지킬 수 있는 방안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멕시코 권력자들은 로마 가톨릭의 이러한 노력에 대한 보복의 일환으로 공권력을 강압적으로 이용하여 교회를 강제로 폐쇄하였다.
또한 사제들을 잡아 가두었고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여 온 평신도들에게는 교회를 떠날 것과 앞으로는 미사에 참례할 수 없다고 엄중하게 경고하였다.
이때 교회 당국의 지도하에 이루어지는 평신도의 조직적 활동인 ‘가톨릭 액션’은 이러한 사태에 저항하면서 정부가 홍보하는 세속적인 인본주의가 허구라는 것을 알리고 이러한 때일수록 신앙생활을 더 잘해야 한다고 신자들을 격려하였다.
멕시코 정부는 가톨릭 액션에 속한 사제와 평신도들을 박해의 표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할리스코에서 15명의 사제가 순교하였고, 사카테카스에서는 4명이 순교하였으며,치와와) 콜리마.두랑고. 과나후아토. 게레로. 모렐로스.)에서는 각각 한 명씩 순교하였다.
순교자 모두 순교하기 전 소름 끼칠 만큼 참혹하게 고문을 당하였고 순교자 대부분은 총살형에 처해졌다.
세 명의 평신도인 다비드. 마누엘. 살바도르는 그들의 교구 사제 루이스 바티스 사인스와 함께 순교하였다.
이 모든 순교자는 그 가혹했던 박해 시기에 참된 신앙을 위해 죽기까지 모든 희생을 감수한 또 다른 멕시코 사람들의 표상이 되었다.
‘가톨릭 액션’ 활동에 속한 순교자들은 다음과 같다.
크리스토발 마가야네스 하라(1869-1927), 로만 아다메 로살레스. 로드리고 아길라르 알레만. 훌리오 알바레스 멘도사. 루이스 바티스 사인스. 아구스틴 칼로카 코르테스. 마테오 코레아 메가야네스. 아틸라노 크루스 알바라도. 미겔 데 라 모라. 페드로 에스케다 라미레스. 마르가리토 플로레스 가르시아. 호세 이사벨 플로레스 바레라. 다비드 갈반 베르무데스. 살바도르 라라 푸엔테. 페드로 데 헤수스 말도나도 루세로. 헤수스 멘데스 몬토야. 마누엘 모랄레스. 후스티노 오로나 마드리갈. 사바스 레예스 살라사르. 호세 마리아 로블레스 우르타도. 다비드 롤단 라라.
토리비오 로모 곤살레스. 예나로 산체스 델가디요. 트란쿠일리노 우비아르코 로블레스. 다비드 우리베 벨라스코 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2년 11월 22일 크리스토발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을 시복하였고, 2000년 5월 21일 그들을 모두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시성식에서 신앙을 위해 순교한 이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늘 성인으로 선포된 분들 대부분은 재속 사제들이며, 세 분의 평신도들은 그 어려운 박해의 시기에 사제들을 돕는 데 열성적이었습니다.
이분들은 당신들이 사랑하는 조국 멕시코 땅에서 가톨릭 종교에 대한 증오를 촉발하는 종교 박해가 심각해졌을 때,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맡은 직책을 잘 수행하기 위해 적극 투신하였습니다.
이분들은 모두 자신들의 박해자들을 명백하게 용서하면서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평온하면서도 침착하게 그리고 자유로운 태도로 순교하였습니다
이분들은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교회 공동체의 물질적 복지 향상에도 기여하면서 이 공동체에 깊이 뿌리를 내린 삶의 결실로서 드러난 하느님께 대한 성실한 믿음과 가톨릭 신앙에 대한 충직한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오늘날 전 세계 모든 교회와 특히 멕시코 사회에 큰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멕시코 전역에 불어 닥친 박해의 광풍 앞에서 온갖 시련을 꿋꿋이 견뎌온 교회는 이제 성인으로 선포된 이분들의 신앙에 대한 증거로 큰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이 사회를 살아가는 멕시코 그리스도인들이 평화와 조화 속에 살면서 복음이 지닌 풍부한 가치로 이 사회를 변혁시키기를 축원합니다.
교회는 박해를 받을 때 수많은 사제와 수도 성소자가 생겨났고 많은 가족이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바대로 양성되었으며, 멕시코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젊은이들은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자라나기 때문에 앞으로 교회는 더욱 성장하고 발전할 것입니다.
크리스토발 마가야네스 하라 사제와 그의 동료 순교자들의 빛나는 모범이 하느님께 대한 여러분의 신앙을 쇄신시켜 가는 데에 힘이 되어 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신앙이 멕시코 사회를 끊임없이 변혁하는 원동력이 되어 정의와 형제애 그리고 조화로움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게 되기를 빕니다"
성 크리스토발 마가야네스 하라와 그의 동료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25일이다.
교회와 역사, 송영웅 바오로 글
ㅜ
성 훌리오 알바레스 멘도사(Julio Alvarez Mendoza)
활동년도 : 1866-1927년
신분 : 신부, 순교자
지역 : 멕시코(Mexico)
같은 이름 : 율리오, 율리우스, 줄리어:
성 훌리오 알바레스 멘도사는 1866년 12월 20일 멕시코 서부 할리스코(Jalisco) 주(州)의 과달라하라(Guadalajara)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4년 사제품을 받은 후 일생 동안 할리스코의 메코아카네요(Mechoacanejo) 본당에서 사목활동을 했다. 그는 목장 지역을 방문하며 성당에 나오지 않는 이들을 찾아나섰고, 성체성사에 대한 깊은 신심을 갖고 있었다. 멕시코 정부의 가톨릭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심해졌을 때도 그는 농장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산속의 계곡에서 세례성사를 집전했다. 결국 그는 1927년 3월 26일 사제직을 계속 수행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며칠 동안 말안장에 묶인 채로 아마로(Amaro) 장군이 있는 레온(Leon)까지 끌려가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3월 30일 산 훌리안(San Julian)에서 총살형으로 처형되었고, 그의 시신은 일생을 보냈던 본당 근처의 쓰레기 더미 위에 버려졌다. 그는 죽기 전에 "나의 죄라면 하느님의 직무 안에 머문 것일뿐, 당신들 모두를 용서한다"는 말을 남겼다.
성 훌리오 알바레스 멘도사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 하라(Christophorus Magallanes Jara) 신부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성 후스티노 오로나 마드리갈(Justino Orona Madrigal)
활동년도 : 1877-1928년
신분 : 신부, 순교자
지역 : 멕시코(Mexico)
같은 이름 : 유스띠노, 유스띠누스, 유스티노, 유스티누스, 저스틴
성 후스티노 오로나 마드리갈은 1877년 4월 14일 멕시코 서부 할리스코(Jalisco) 주(州)의 아토약(Atoyac)에서 매우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부모를 돕기 위해 몇 년 동안 신학교 과정을 중단하고 일을 하는 등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성소를 지켜 27세의 나이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헌신적인 사목자로서 고아들과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들을 돌보기 위한 수도회로 ‘성심의 클라렛 형제회’를 설립하였다.
반가톨릭적인 멕시코 정부가 교회에 대한 박해를 강화하고 있을 때 그는 피신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나는 살든지 죽든지 이곳에서 나의 양떼들과 함께 하겠다.”며 거절의 뜻을 분명히 했다. 교구 신자들에 대한 사목을 계속하기 위해 그는 본당의 보좌인 성 아틸라노 크루스 알바라도(Atilano Cruz Alvarado) 신부와 함께 인근 목장 주택을 피신처로 삼아 몸을 숨겼다. 그곳에서 두 사제는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며 사목직을 계속하기 위한 계획을 논의했다. 1928년 7월 1일 이른 새벽, 40명의 정부군이 목장을 급습해서 그의 방문을 열었을 때 그는 용감하게 “그리스도 왕 만세!”를 외쳤고, 즉시 군인들이 쏜 총탄에 맞아 순교하였다.
성 후스티노 오로나 마드리갈은 1992년 11월 2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 하라(Christophorus Magallanes Jara) 신부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성 살바도르 라라 푸엔테 (Salvador Lara Puente)
활동년도 : 1905-1926년
신분 : 평신도, 순교자
지역 : 멕시코(Mexico)
같은 이름 :
성 살바도르 라라 푸엔테는 1905년 8월 13일 두랑고(Durango) 대교구에 속한 멕시코 중북부 두랑고 주(州)의 베르린(Berlin)에서 태어났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키 크고 강인한 젊은이였던 그는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모든 이들에게 좋은 표양을 보였다. 그는 남편을 잃고 홀로된 어머니를 효성스런 마음으로 돌보았고, 자신의 일터인 광산에서도 맡은 책임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신앙생활에 열심이었고, 반교회적인 혁명 정부에 당당히 맞서던 가톨릭 액션(Catholic Action) 멕시코 청년회에 투쟁적 사도로 참여하고 있었다.
군인들이 성 다비드 롤단 라라(David Roldan Lara)와 성 마누엘 모랄레스(Manuel Morales)와 함께 그를 체포하기 위해 도착했을 때 그는 기쁨에 찬 목소리로 “나 여기 있소.” 하고 응답했다. 그는 평소와 같은 미소를 띤 얼굴로 친구이자 사촌형제인 성 다비드 롤단 라라와 함께 나란히 걸어서 처형장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성 루이스 바티스 사인스(Luis Batiz Sainz) 신부와 성 마누엘 모랄레스가 총에 맞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기도하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고, 1929년 8월 15일 총살형을 받고 하늘나라로 들어갔다.
성 살바도르 라라 푸엔테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 하라(Christophorus Magallanes Jara) 신부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성 사바스 레예스 살라사르(Sabas Reyes Salazar)
활동년도 : 1883-1927년
신분 : 신부, 순교자
지역 : 멕시코(Mexico)
같은 이름 : 사바
성 사바스 레예스 살라사르는 1883년 12월 5일 과달라하라(Guadalajara) 대교구에 속한 멕시코 서부 할리스코(Jalisco) 주(州)의 코쿨라(Cocula)에서 태어났다. 그는 과달라하라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1911년 사제품을 받은 후 과달루페(Guadalupe)의 몇몇 본당에서 사목활동을 했다. 가톨릭 교회에 대한 멕시코 정부의 박해가 계속될 때 그는 산 후안 데 로스 라고스(San Juan de los Lagos) 교구에 속한 할리스코의 토토틀란(Tototlan)에서 은밀히 사목활동을 하고 있었다. 성실하고 열정적인 그는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느님께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갖고 있었고, 자주 연옥 영혼을 위한 기도를 바쳤다. 또한 교리교육뿐 아니라 과학과 상업, 미술과 음악 분야에서 어린이와 젊은이들의 양성하는 데도 관심이 많았다. 당시는 사제로서 사는 것이 매우 위험한 박해시기였기 때문에 토토틀란을 떠나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 그는 “나는 여기 머물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보기 위해 기다릴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1927년 성주간이 시작될 때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프란치스코 비스카라(Francisco Vizcarra) 신부와 그의 동료신부들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성 사바스 레예스 살라사르 신부 외에는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군인들은 모든 분풀이를 그에게 쏟아 부었다. 그를 성당 기둥에 단단히 묶고 3일 동안 음식과 물도 주지 않으면서 다른 사제들이 숨은 곳을 말하라며 혹독한 고문을 자행했다. 군인들은 성체를 축성한다는 이유로 그의 두 손을 불태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참아냈다. 1927년 4월 13일, 성주간 수요일에 그는 마을 외곽의 공동묘지로 끌려가 총에 맞아 살해되었다. 죽기 전에 그는 온힘을 다해 “그리스도 왕 만세!”를 외치며 하늘나라로 갔다.
성 사바스 레예스 살라사르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 하라(Christophorus Magallanes Jara) 신부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성 미겔 데 라 모라 (Miguel de la Mora)
활동년도 : 1874-1927년
신분 : 신부, 순교자
지역 : 멕시코(Mexico)
같은 이름 : 마이클, 미가엘, 미구엘, 미카엘, 미키
성 미겔 데 라 모라는 1874년 6월 19일 멕시코 서부 할리스코(Jalisco) 주(州)의 테칼리틀란(Tecalitlan)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농장일과 농사를 배워 훌륭한 일꾼이 되었다. 그는 십대에 콜리마(Colima)의 신학교에 입학해 1906년 콜리마 주교좌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1912년에는 주교좌성당의 참사위원이 되었다. 멕시코 정부의 가톨릭 교회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체포되었다가 사제직 수행을 금지하라는 경고와 함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1926년 정부가 강제로 성당을 폐쇄하고 공적인 전례를 법으로 금지했을 때 친구들은 그에게 피신하라고 권고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했다.
그래서 그는 정부군의 플로레스(Flores) 장군으로부터 끊임없는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플로레스 장군은 그에게 바티칸 교황청과 무관하게 정부가 지원하던 어용(御用) 가톨릭 교회에 동참하도록 강요했다. 장군의 괴롭힘 때문에 그는 할 수 없이 콜리마를 떠나 엘 린콘 델 티그레(El Rincon del Tigre)에 있는 형의 목장으로 피신해야 했다. 정부의 회유와 강압에도 굴하지 않았던 그는 1927년 8월 7일 아침에 사복 차림으로 형과 함께 콜리마 방면으로 가던 중 체포되었다. 성 미겔 데 라 모라 신부의 도피에 격노한 플로레스 장군은 그를 마구간에 가두고 거름 한가운데 세운 말뚝에 묶은 후 형이 보는 앞에서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처형장으로 침묵 중에 걸어가면서 자신의 믿음과 성모님에 대한 사랑을 선포했고, 손에는 묵주를 쥐고 기도문을 외우며 총탄에 스러져 갔다. 8월 7일 정오의 일이었다.
성 미겔 데 라 모라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 하라(Christophorus Magallanes Jara) 신부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성 마테오 코레아 메가야네스(Mateo Correa Megallanes)
활동년도 : 1866-1927년
신분 : 신부, 순교자
지역 : 멕시코(Mexico)
같은 이름 : 마두, 마태오, 마태우스, 마테우스, 매튜
성 마테오 코레아 메가야네스는 1866년 7월 23일 멕시코 중부 사카테카스(Zacatecas)의 테페치틀란(Tepechitlan)에서 태어났다. 그는 1881년에 장학금을 받고 사카테카스의 신학교에 입학하여 1893년 27살의 나이로 사제품을 받았다. 젊은 사제로서 그는 후에 사제가 되고 순교하게 될 복자 미겔 프로(Miguel Pro, 11월 23일)에게 첫영성체를 해주었다. 그는 1898년 콘셉시온 델 오로(Concepcion del Oro)의 본당신부로, 1908년에는 콜로틀란(Colotlan)의 본당신부로 임명받았다. 1910년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이어지자 몸을 숨겼고, 1926년에는 발파라이소(Valparaiso)의 본당으로 발령받았다.
1927년 교회에 대한 정부의 박해가 계속되는 와중에 그는 한 병든 여인에게 노자성체(路資聖體)를 영해주다가 군인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정부에 대항하는 크리스테로(Cristero) 무장 세력의 일원이란 죄로 고발을 당해 사카테카스 감옥에 수감되었고 곧이어 두랑고(Durango)의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1927년 2월 5일, 그는 정부군의 장군인 오르티스(Ortiz)로부터 가톨릭 교회를 박해하는 정부에 대항하다 잡힌 몇몇 크리스테로 수감자들의 고해성사를 들어줄 것을 요청받았다. 그는 장군의 요구에 응해 수감자들의 고해를 들었다. 그러자 장군은 그들의 고해 내용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했고, 그는 고해의 비밀은 알려줄 수 없다며 강요한다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장군은 그의 머리에 직접 총을 겨누고 위협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결국 다음날 새벽, 그는 두랑고 변두리에 있는 묘지로 끌려가 머리에 총알을 맞고 순교하였다.
성 마테오 코레아 메가야네스 신부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 하라(Christophorus Magallanes Jara) 신부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성 마르가리토 플로레스 가르시아 (Margarito Flores Garcia)
활동년도 : 1899-1927년
신분 : 신부, 순교자
지역 : 멕시코(Mexico)
같은 이름 : 마르가리또, 말가리또, 말가리토
성 마르가리토 플로레스 가르시아는 1899년 2월 22일 멕시코 남부 태평양 연안에 있는 게레로(Guerrero) 주(州)의 탁스코(Taxco)에서 태어났다. 그는 칠라파(Chilapa) 교구에 속한 아테낭고 델 리오 게레로(Atenango del Rio Guerrero) 본당의 신부로서 3년의 사목활동 중에 사제직에 대한 깊은 헌신을 보여주었다. 그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멕시코 정부의 박해 때문에 교구 밖에 머물고 있을 때 성 다비드 우리베 벨라스코(David Uribe Velasco) 신부의 영웅적인 순교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자신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순교하기를 원했고 장상의 허락을 받고 교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사제로서의 자신의 여정을 시작했고 거의 그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체포되어 게레로의 툴리만(Tuliman)으로 끌려가 사형을 선고받았다. 자신을 처형하려는 군인들에게 그는 잠시 기도할 시간을 청해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 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일어서서 머리에 총알을 맞고 순교함으로써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일치를 이루었다. 1927년 11월 12일의 일이었다.
성 마르가리토 플로레스 가르시아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 하라 신부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성 다비드 롤단 라라(David Roldan Lara)
활동년도 : 1902-1926년
신분 : 평신도, 순교자
지역 : 멕시코(Mexico)
같은 이름 : 다윗, 데이비드
성 다비드 롤단 라라는 1902년 3월 2일 두랑고(Durango) 대교구에 속한 멕시코 중부 사카테카스(Zacatecas) 주(州)의 찰치위테스(Chalchihuites)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아기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로부터 정성어린 양육을 받았다. 그는 어릴 때 두랑고의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가족들의 생계를 돌보기 위해 나와서 광부가 되었다. 결국 그는 다시 신학교로 돌아가지 못했고 평신도로 남았다. 그의 친구들과 동료 노동자들은 그의 활기차고 관대한 성품과 지성과 친절함을 지닌 그의 성품을 칭찬했다. 그는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들의 감독으로서 착하고 신심 깊으며 정직한 일꾼이었다. 약혼녀에게도 그는 순수하고 완벽한 젊은이였다.
그는 가톨릭 액션을 위한 멕시코 청년회(the Mexican Youth for Catholic Action)의 책임자로서 자신의 본당신부인 성 루이스 바티스 사인스(Luis Batiz Sainz) 신부를 보좌했다. 그는 멕시코 정부의 박해로 인해 교회가 처한 상황에 고뇌하면서, 설령 그것이 순교를 의미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께 충실한 신앙인으로 남기를 소망했다. 그는 정부의 반종교적 헌법에 저항했고, 종교 자유 수호를 위한 전국 연맹(the National League for the Defense of Religious Liberty, LNDLR)의 부의장으로서 활동했다. 성 마누엘 모랄레스(Manuel Morales)와 사촌형제인 성 살바도르 라라 푸엔테(Salvador Lara Puente)와 뜻을 같이했던 그는 그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1926년 8월 15일, 성 마누엘 모랄레스와 성 루이스 바티스 사인스 신부가 총살당한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성 다비드 롤단 라라와 성 살바도르 라라 푸엔테 역시 총살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다비드 롤단 라라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 하라(Christophorus Magallanes Jara) 신부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성 마누엘 모랄레스 (Manuel Morales)
축일 : 5월 21일
활동년도 : 1898-1926년
신분 : 평신도, 순교자
지역 : 멕시코(Mexico)
같은 이름 :
성 마누엘 모랄레스는 1898년 2월 8일 두랑고(Durango) 대교구에 속한 멕시코 중부 사카테카스(Zacatecas) 주(州)의 메시야스(Mesillas)에서 태어났다. 충실한 그리스도인이자 세 명의 어린 자녀의 아버지요 남편이었던 그는 착하고 책임감 있는 노동자였다. 또한 그는 가톨릭 액션(Catholic Action)의 회원으로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열심히 영성생활을 실천했고 성체성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ㅓ그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반종교적인 헌법의 철폐를 위해 투신하는 기구인 종교 자유 수호를 위한 전국 연맹(the National League for the Defense of Religious Liberty, LNDLR)의 의장으로서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1926년 8월 15일, 교구사제인 성 루이스 바티스 사인스(Luis Batiz Sainz) 신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루이스 신부의 석방을 위해 긴밀히 움직였다. 그는 군인들이 와서 그의 이름을 부를 때까지 루이스 신부를 돕기 위한 계획을 짜느라 자신이 활동하던 연맹의 회원들과 회의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체포되어 감옥에서 자신의 사목자와 만나게 되었다. 얼마 뒤 그들은 도시 외곽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그는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니 목숨만을 살려주라고 간청하는 신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러자 그는 큰소리로 “신부님, 저는 죽지만 하느님은 죽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저의 아내와 아이들을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리스도 왕 만세! 과달루페 성모 만세!”라고 크리스테로의 모토를 외쳤다. 군인들은 총을 쏘아 그를 살해했다. 이날 그는 뜻을 함께 했던 성 다비드 롤단 라라(David Roldan Lara)와 성 살바도르 라라 푸엔테(Salvador Lara Puente)와 함께 순교하였다.
성 마누엘 모랄레스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 하라(Christophorus Magallanes Jara) 신부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성 루이스 바티스 사인스 (Luis Batiz Sainz)
활동년도 : 1870-1926년
신분 : 신부, 순교자
지역 : 멕시코(Mexico)
같은 이름 : 누수, 루도비꼬, 루도비꾸스, 루도비코, 루도비쿠스, 루수, 루이
성 루이스 바티스 사인스는 1870년 9월 13일 멕시코 중부 사카테카스(Zacatecas)의 산 미구엘 메스키탈(San Miguel Mezquital)에서 태어났다. 그는 12살에 소신학교에 들어가 1894년 1월 1일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신학교의 영성 지도신부, 사카테카스 교구 찰치위테스(Chalchihuites)의 본당신부 그리고 콜롬부스 기사회(the Knights of Columbus)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사목적 열정과 본당을 운영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가톨릭 노동자와 학교를 위한 연수회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어린이와 어른에 대한 교리교육에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했고 성체신심에도 매우 열정적이었다. 그는 “주님, 저는 순교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비록 비천한 종이지만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저의 피를 한 방울 한 방울 흘리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1926년 멕시코 혁명정부에 의해 성당이 강제로 폐쇄되기 전, 종교 자유 수호를 위한 전국연맹에서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무장반란의 가능성까지도 논의하는 자리에서 그는 강력하게 정부의 정책을 비판했다. 결국 정부에 의해 성당이 폐쇄되고 박해가 본격화되자 그는 민가로 자리를 옮겼고, 그곳에서 1926년 8월 14일 정부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대중들의 뜨거운 관심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그를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다음날 그는 사카테카스로 이송한다는 구실로 가톨릭 청년 멕시코 연맹(the Mexican Association for Catholic Youth) 소속의 세 평신도 회원인 성 다비드 롤단 라라(David Roldan Lara), 성 살바도르 라라 푸엔테(Salvador Lara Puente), 성 마누엘 모랄레스(Manuel Morales)와 함께 도시 밖으로 끌려 나가 길가에서 총살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루이스 바티스 사인스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 하라(Christophorus Magallanes Jara) 신부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성 다비드 우리베 벨라스코 (David Uribe Velasco)
활동년도 : 1889-1927년
신분 : 신부, 순교자
지역 : 멕시코(Mexico)
같은 이름 : 다윗, 데이비드
성 다비드 우리베 벨라스코는 1889년 12월 29일 칠라파(Chilapa) 교구에 속한 멕시코 남부 태평양 연안 게레로(Guerrero) 주(州)의 부에나비스타 데 쿠에야르(Buenavista de Cuellar)에서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칠라파의 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1913년 3월 2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여러 지역에서 본당사목을 수행했는데, 반가톨릭적인 멕시코 정부의 폭력에 직면하여 많은 고초를 겪었다. 그는 게레로의 이괄라(Iguala)에서 본당사목을 하며 개신교와 정부에 동조해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되려는 세력이 득세하던 지역에서 힘들게 사제직을 수행해야 했다.
1926년 가톨릭 교회의 공적인 전례 거행이 금지되고 성당마저 폐쇄되자 그는 은밀히 사제직을 수행했다. 그러나 1927년 4월 7일 체포되어 모렐로스(Morelos) 주의 쿠에르나바카(Cuernavaca)로 끌려갔다. 그를 체포한 군인은 만일 그가 가톨릭 교회를 반대하는 헌법에 서명하고 정부에 의해 설립된 어용(御用) 천주교회의 주교가 되는 것을 수용하면 모든 형태의 보장과 자유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하지만 그는 굳건한 믿음으로 이 모든 제의와 회유를 거부했다. 감옥에서 쓴 마지막 글에서도 그는 박해자들이 자신을 모함해 적용한 모든 범죄 사실에 대해 결백하며,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 모든 원수들을 용서한다고 했다. 그는 1927년 4월 12일 모렐로스 주의 산 호세 비스타에르모사(San Jose Vistahermosa) 역 근처로 끌려가 총에 맞아 살해되었다.
성 다비드 우리베 벨라스코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 하라 신부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성 로만 아다메 로살레스 (Roman Adame Rosales)
활동년도 : 1859-1927년
신분 : 신부, 순교자
지역 : 멕시코(Mexico)
같은 이름 : 로마노, 로마누스
성 로만 아다메 로살레스는 1859년 2월 27일 멕시코 서부 할리스코(Jalisco) 주(州)의 테오칼티케(Teocaltiche)에서 태어났다. 그는 과달라하라(Guadalajara)에서 사제직을 위한 공부를 계속해 1890년 11월 30일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여러 본당에서 사목하며 동정 마리아께 대한 깊은 신심을 보여주었고, 교리교육과 영신수련 지도 그리고 본당 부속학교들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동정 마리아의 딸들과 밤샘 성체조배회’를 설립하였고, 여러 목장들에 많은 경당을 건립하였다.
가톨릭 교회에 대한 멕시코 정부의 탄압이 심해지고 헌법으로 교회의 문을 닫게 했을 때도 그는 민가에서 자신의 사제 직무를 계속 수행하였다. 하지만 그는 정부군에 의해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야우알리카(Yahualica)로 보내진 그는 며칠 동안 음식도 물도 없이 묶여서 지냈다. 1927년 4월 21일 그는 빈 무덤으로 끌려가 총살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의 유해는 후에 발굴되어 노치스틀란(Nochistlan)으로 옮겨졌다.
성 로만 아다메 로살레스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 하라(Christophorus Magallanes Jara) 신부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성 다비드 갈반 베르무데스 (David Galvan Bermudez)
활동년도 : 1881-1915년
신분 : 신부, 순교자
지역 : 멕시코(Mexico)
같은 이름 : 다윗, 데이비드
성 다비드 갈반 베르무데스는 1881년 1월 29일 멕시코 서부 할리스코(Jalisco) 주(州)의 과달라하라(Guadalajara)에서 태어났다. 그는 14살 때 신학교에 들어갔고 우수한 학생이었으나 성소에 대한 회의가 들면서 3년 동안 신학교를 떠나 살았다. 그는 일을 하며 여자를 만나고 방탕한 생활을 보내기도 했다. 한 번은 술에 만취해 자신의 여자 친구를 때려 체포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사제성소에 대한 부르심을 무시하며 더 이상 무시하며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1년간의 근신 기간을 보낸 후 신학교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1909년 5월 20일 비로소 사제품을 받은 그는 아마티탄(Amatitan)에서 신학교 강사가 되었고 이어 지도교수가 되었다.
그는 멕시코 혁명이 진행되던 시기에 부상자들의 상처를 돌보고 그들의 고해를 들으며 생활했다. 그는 시가전의 희생자들을 돕기 위해 과달라하라로 가던 도중 호세 아라이사(Jose Araiza) 신부와 함께 체포되었다. 호세 아라이사 신부는 후에 몸값을 내고 감옥에서 풀려났다. 감옥에서 그는 동료 수감자들을 위로하며 자신의 처형 몇 시간 전까지도 그들에게 정성껏 고해성사를 주었다. 1915년 1월 30일, 그는 과달라하라에서 군인들이 쏜 총에 맞아 사제의 신분으로 살해를 당했다.
성 다비드 갈반 베르무데스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 하라(Christophorus Magallanes Jara) 신부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