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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 왕조 ┓♥ 스크랩 창덕궁
윤대화 추천 0 조회 66 12.09.24 16: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창덕궁                      昌德宮

 

 

 

 

 

 

 

 

 

 

 

 

 

사적 제 122호로 지정되어 있다. 태종 5년인 1405년에 완공되었으며, 면적은 약 14,000평에 이른다. 태종(太宗)이 즉위한 후 1404년 한성의 향교동(鄕校洞)에 이궁(離宮)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되었고, 이를 창덕궁(昌德宮)이라 명명하였다. 그 후 계속 인정전(仁政殿), 선정전(宣政殿), 소덕전(昭德殿), 빈경당(賓慶堂), 여일전(麗日殿), 정월전(淨月殿), 옥화당(玉華堂) 등 많은 전당을 건립하였는데, 1412년 돈화문(敦化門)을 건립하여 드디어 궁궐의 면모를 갖추었다.

 

 

 

 

 

 

 

 

 

창덕궁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소실(燒失)되었는데, 1607년(선조 40)에 그 복구가 시작되어 1610년(광해군 2)에 중건(重建)이 거의 끝났으나, 1623년 3월에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실화(失火)로 불탔으므로, 1647년(인조 25)에야 그 복구가 완료되었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특히 1917년 대조전(大造殿)을 중심으로 내전(內殿) 일곽이 소실되어 그 복구를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交泰殿)을 비롯하여 강녕전 동, 서 행각 등의 많은 건물이 해체 전용되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유일한 궁궐

 

 

 

 

보통 궁궐은 장엄하기 짓기 위하여 평평한 땅에 대칭으로 짓는경우가 대부분이다. 중국의 자금성(紫禁城)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우리나라의 경복궁(景福宮)도 같은 예에 속한다. 그러나 경복궁도 전적으로 중국식(中國式)은 아니다. 서울의 정중앙이 아니라 서북쪽에 산(山)을 기대어 지은 점이 그렇다. 그러나 평평한 땅에 대칭으로 지은 점은 중국의 법도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은 경복궁만 중극식을 따르고, 두번 째 궁궐인 창덕궁(昌德宮)부터는 조선식으로 짓게 되었다. 옛 선조들은 건축을 할 때 자연(自然)을 가능한 한 변형시키지 않고, 그 안에 건물을 살짝 ' 얹혀 놓는 ' 것처럼 짓는 것을 좋아하였다. 부석사(浮石寺)를 본 어느 서양 건축가는 절 건물이 마치 자연 안에 안긴 것 같다고 하면서 자연(自然)을 운용하는 한국인들의 능력을 찬탄한바가 있다. 창덕궁은 바로 이러한 생각으로 건축되었기에 그 한국적인 가치가 인정되어 1997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의 궁궐 가운데 유일한 경우이다.     

 

 

 

                                              경복궁과 창덕궁의 차이

 

 

 

창덕궁은 경복궁 다음에 위치하는 궁이기 때문에 이궁(離宮) 혹은 별궁(別宮)이라고 불렀다. 혹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창경궁(昌慶宮)과 함꼐 동궐(東闕)이라고도 하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경복궁은 정도전(鄭道前)을 위시한 신하들이 설계하였다면, 창덕궁은 왕 즉, 태종(太宗)의 의도에 따라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경복궁은 임금이 효율적으로 일하기에는 편하게 설계되었다. 왕의 처소인 강녕전(康寧殿) 바로 앞에 요즘의 국무회의실인 사정전(思政殿)이 있고, 그 앞에는 근정전(勤政殿)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배치는 임금이 일하기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인간이 살기에는 매우 답답한 구조이었다. 마음놓고 쉴 곳이 없다. 흡사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좁은 지역을 계속해서 왔다 갔다만 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 전기의 왕 가운데 세종(世宗)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경복궁보다는 창덕궁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반면 창덕궁은 왕의 근무 공간인 외전(外殿 .. 인정전이나 선정전 등이 있는 공적인 지역)을 왼쪽 밑으로 몰아놓고, 왕이 쉴 수 있는 정원 영역 즉, 후원(後園)을 아주 넓게 조성하였다.창덕궁은 태종(太宗)이 1405년부터 건축을 시작하였는데 1412년에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을 지으면서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리고 전에서 가장 강력한 왕이었던 세조(世祖)는 후원을 두 배도 넘게 확장하였다. 역시 강한 군주답게 자신이 쉬는 공간을 크게 만든 것이다. 이 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전소(全燒)된 뒤 선조(宣祖)가 1607년에 다시 짓기 시작하였다. 건설이 끝난 1610년부터 창덕궁은 정궁(正宮)이 되었다.

 

원래는 경복궁을 복원했어야 하는데 그곳에서 있었던 '왕자의 난' 등의 이유를 붙여 불길(不吉)하다고 창덕궁을 먼저 복원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복원된 창덕궁은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 때 또 대부분의 전각들이 소실(燒失)되었지만, 20여 년 뒤에 다시 복원되었다. 그 뒤로 창덕궁은 1868년 고종(高宗)이 경복궁을 중건(重建)할 때까지 정궁(正宮)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동궐도                  東闕圖   

 

 

 

 

동궐도(東闕圖)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조감도(鳥瞰圖) 식으로 그린 조선후기의 궁궐 그림이다. 비단 바탕에 채색(彩色)하였으며 두 점이 있다. 그 1점은 세로 273cm, 가로 584cm의 크기이며, 또 다른 한 점의 크기는 세로 275cm, 가로 576cm이다. 전자는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이고,후자는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이다.

 

국보 제249호 지정되어 있으며, 두 점 모두 16첩 병풍으로 꾸며져 있고, 작가는 미상(未詳)이나 도화서(圖畵署)의 화원들이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제작 시기는 1825년에 조영된 전사(田舍)와 순조 30년에 소실된  경복전(景福殿)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1826년에서 183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창경궁과 창덕궁은 본궁인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하여 있으므로 동궐도(東闕圖)라고 부른다. 이 그림은 주변의 산과 언덕에 둘러싸인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 모습이 오른쪽위에서 비껴 내려다보는 시각으로 포착되었다. 

 

그리고 궁궐의 모습은 각 전각과 누정(樓亭), 교량, 문, 담장은 물론 연목 괴석 등의 조경 환경과 궁궐 외곽의 경관까지 실제 배치에 따라 채색을 다하고, 머긍로 줄을 그려 색깔이 구별되게 하는 기법으로 선명하고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궁궐 주변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산과 언덕들은 남종화풍(南宗畵風)을 구사되어 있으나, 건물의 표현과 원근(遠近) 처리 등에는 미약하게나마 서양화법의 영향이 엿보인다.

 

그러나 이 그림은 회화성(繪畵性)보다는 궁궐 건물이 연구에 더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특히 이 궁궐의 평면도인 '동궐도형(東闕圖形)'이나 '궁궐지(宮闕誌)'보다 시각적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건물 배치나 양태 등의 연구와 고증에 사료적 가치가 더욱 크다.     

 

 

 

 

                                            대보단                   大報壇

 

 

 

 

 

임진왜란 때 지원군을 보낸 명나라 신종(神宗)의 은의(恩義)를 가리기 위하여 1704년(숙종 30)에 창덕궁 금원(금원) 옆에 설치하였다. 1704년 1월, 처음에는 숙종이 제의하였고, 관학유생(官學儒生) 160명이 명나라 신종(神宗) 황제의 묘(廟)를 건립할 것을 청원하였다.

 

이는 명나라가 망하고 병자호란(병子胡亂)으로 우리나라의 치욕을 씻기 위하여 군신(君臣)이 절치부심하면서 대명절의(大明節義)를 부르짖던 무렵에 청(淸)나라에 불복한다는 의미가 내포된 것이다.  1704년(숙종 30)에 예조판서 민진후(閔鎭厚)의 발의로 옛 내빙고(內氷苦)의 터에 지었다.

 

9월25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12월24일 준공될 때까지 많은 물자와 인력이 소비, 동원되었다. 공사의 감독은 당시 선공감감역(선공감감역)으로 있던 김시택(金時澤)이 맡았고, 공사의 지원은 호조(戶曺)를 비롯하여 6조의 당상(堂上)들이 돌아가면서 하였다. 공사에는 민간이 동원되기도 했으나 주로 5명의 군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규모는 건물이없는 제단(祭壇)으로 교사(郊祀)를 지내던 남교(南郊)으 규모를 따라 밖에 담장을 세우지 않고 제단의 담을 쌓았다.

 

정방형으로 한쪽의 길이가 45m이고, 단(壇)은 정방형으로 한쪽의 길이가 7.5m이며, 단의 높이는 1.5m로 바닥에서 단까지는 네 개의 계단을 두었다. 명칭의 결정은 그 해 11월 24일 예문관에서 정해 올렸다. 제사는 연 1회 2월 상순에 택일(擇日)하여 지냈다.

 

2월로 정한 까닭은 매년 2월이 중국의 황제가 정기적으로 동순(東巡)하는 시기이므로 그 시기를 이용한 것이다. 제사 때에는 팔일(八佾 ..나라의 큰 제사 때 추는 규모가 큰 춤)의 악(樂)을 사용하고, 악장(樂章)은 문묘(文廟)의 악장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제례는 임금이 친제함을 원칙으로 하였지만, 부득이한 경우 중신(重臣)을 보내 대제하게 했으며, 희생은 황우(黃牛)를 쓰고 제물과 기구는 문묘(文廟)의 예를 따르도록 하였다. 이 제도는 1884년 갑신정변이후부터 중단되었다.  

 

 

 

                                                대조전                   大造殿

 

 

 

 

 

보물 제816호로 지정되었다. 대조전(大造殿)은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內殿)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이다. 이 건물에서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이 죽었고, 순조의 세자로 뒤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이 태어나기도 하였다. 대조전은 태종이 창덕궁을 창건할 당시부터 지어져, 국가의 기틀을 이어가는 세자(世子)를 큰 그릇으로 키어야만 국리민복(國利民福)의 안녕을 누릴 수 있다는 뜻에서 ' 크게 만들라 ..대조전 '이라 명칭하였다고 한다.  

 

조선 태종 5년(1405)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를 비롯하여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불이 나서 다시 지었다. 1917년 또 화재를 당하여 불에 탄 것을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을 헐고 그 부제로 이곳에 옮겨지어 '대조전(大造殿)'이라는 현판을 걸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차례에 걸쳐 다시 지었기 때문에, 건물 자체는 물론 주변의 건물도 많은 변화를 거쳤다.

 

대조전은 현재 36칸으로 앞면 9칸, 옆면 4칸이며, 팔작지붕 건물이다. 건물 가운데 3칸은 거실로 삼았으며, 거실의 동,서쪽으로 왕과 왕비의 침실을 두었다. 각 침실의 옆면과 뒷면에는 작은방을 두어 시중드는 사람들의 처소로 삼았다. 건물 안쪽에는 서양식 쪽마루와 유리창, 가구 등을 구비하여 현대적인 실내장식을 보여주고있다.

 

 

 

                                            돈화문                     敦化門

 

 

 

 

 

 

                                           선정전                   宣政殿

 

 

 

 

 

창덕궁의 편전(便殿)이며 조선시대의 국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며 신하들과 국사를 의논하고 행하던 곳이다. 창덕궁이 건립되던 초기에는 조계청(조계청)이라고 불렀다가, 세종 즉위 7년인 1461년에 선정전(宣政殿)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인정전 동쪽 광범문(廣範門)을 나서면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중종의 게비(繼妃)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文貞王后)가 서정전에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며 조선 중기 역사의 질곡을 함께 한 역사적 건축물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재로 전소(全燒)되었고, 1647년 인조(仁祖) 때 중건되었다. 건물을 둘레에 행각으로 둘러쌓였고, 동쪽은 담장이다. 정면으로는 어로(御路)인 복도가 설치되어 있다.   

 

 

 

                                         성정각                    誠正閣

 

 

 

 

 

조선시대 세자(世子)가 거주하였던 동궁(東宮)에 속한 전각으로, 세자가 학문을 연마했던 곳이다. 창덕궁 희정당 동쪽에 위치한다. 성정(誠正)이라는 명칭은 공자(孔子)의 유교 경전인 대학(大學)에 나오는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이라는 말에서 따왔으며, 학문을 대하는 정성과 올바른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연경당                       演慶堂

 

 

 

 

 

창덕궁 후원에 있는 조선 후기의 상류주택이다. 궁궐의 후원 안에 지어졌으면서도 사랑채, 안채, 안 행랑채, 바깥행랑채, 반빗간, 서재, 후원, 정자 및 연못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주택이다. 이른바 99칸집이라고 불리고 있으나, 현재 건물의 실제 규모는 109칸 반이다.

 

궁궐 안의 다른건물들이 단청과 장식을 한껏 갖추고 있는데 비하여 이 집은 단청을 하지 않았고, 구조도 농수정(濃繡亭)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둥 위에 공포를 두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창덕궁 연경당은 1828년에 창건되었으며, 사대부의 생활을 알기 위하여 세자( 1830년에 죽은 뒤 익종으로 추존됨)가 왕에게 요청한 것이 건립동기라고 한다. 그러나 '동국여지비고', 순조실록등을 종합하여 해석하여 보면, 연경당은 1827년에 진장각 옛터에 창건되었으며, 짓게 된 동기는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경축의식을 맞아서 이를 거행할 장소를 마련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며, '연경(演慶)'이라는 이름도 경사스러운 행사를 연행(演行)한다는 의미에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옥류천              玉流川

 

 

 

 

 

창덕궁 후원 북쪽의 깊은 골짜기에 있는 개울이며, 인조 4년인 1636년에 조성하였다. 북악산 동쪽 줄기에서 흐르는 물과 인조(仁祖)가 팠다고 알려진 어정(御井)으로부터 계류가 흐른다. 소요암이라는 널찍한 바위에 U자형 홈을 파고, 샘물을 끌어 올린 다음 작은 폭포처럼 물이 떨어지게 만들었는데, 임금은 이곳에서 신하들과 더불어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었다고 한다. 소요암에는 인조(仁祖)가 쓴 옥류천(玉流川)이라는 글씨를 비롯하여 숙종이 지은 시(詩)가 새겨져 있다. 청의정, 소요정, 태극정, 농산정, 취한정 등의 정자가 옥류천 옆에 있다.  

 

 

 

 

 

 

 

                                            인정전                  仁政殿

 

 

 

 

                                                   전체 오른쪽 부분

 

 

 

 

                                                   전체 왼쪽 부분

 

 

 

 

                                              존덕정              尊德亭

 

 

 

 

 

                                               중화당              중화당

 

 

 

 

 

                                               진선문               進善門

 

 

 

 

                                                 후원               後苑

 

 

 

 

 

 

 

                                           돈화문                  敦化門

 

 

 

 

보물 제 383호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重層)의 다포식 우진각(우진각) 건물이다.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홍화문)과 함께 조선 중기에 세워진 창덕궁 정문이다. 1412년(태종 12)에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창덕궁이 복구되면서 문(門)도 함께 세워졌다. 현재의 건물은 이때 세워진 것이다.

 

 

 

 

 

 

 

돈화문은 처음에는 규모가 크지 않았다가 차츰 현재와 같은 큰 규모로 개조한 것으로 보이는데, 1451년(문종 1)에 돈화문을 고치라는 왕명이 있었으며, 1506년(연산군 12)에는 돈화문을 높고 크게 개조하라는 왕명이 있었다. 이것은 처음 별궁(別宮)으로 창건되었던 창덕궁이 차츰 본궁의 구실을 하게 되어, 외국의 사절이 이 궁의 정전(正殿)에서 왕을 배알하거나 국상(國喪)이 있을 때 상여(喪轝)가 나가게 되는 등 궁궐의 정문을 보다 위엄 있고 크게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1413년(태종 13)에는 이 돈화문에 무게 1만5천근(斤)의 동종(銅鐘)을 걸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사가 있다. 궁궐의 정문에 종(鐘)을 건다는 것은 매우 특수한 예로 종을 건 목적이나 종을 걸기 위해서 어떤 구조가 고안되었는지 흥미로우나 이때의 건물은 불타 없어졌으므로 단지 그와 같은 사실은 실록을 통해서 알 수있을 뿐이다.  

 

 

건물은 넓은 계단이 있는 장대석의 기단위 에 세워졌으나, 이 기단은 현재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어 보이지 않는다. 12개의 평주가 있고, 가운데 4개의 고주(高柱)가 있어 고주(高柱) 사이에 거대한 판문(板門)이 두 짝씩 설치되어 있다. 기둥머리에 창방과 평바이 짜여지고 그 위에 다포식의 공포가 결구되었다. 상층은 갓기둥과 아래층에서 뻗어올라온 고주(高柱)로 축부를 형성하며, 천장을 설치하지 않아 사람이 서서 활동하기에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였다. 지붕마루에는 취두(鷲頭 .. 큰 기와집의 매마루 양 끝에 세운 장식. 망세라고도 한다), 용두(龍頭), 잡상(雜像) 등을 설치하였다.

 

  

 

 

 

 

 

 

돈화문은 그 위치가 궁궐의 서남쪽 모퉁이에 치우쳐 있는데, 이는 궁궐의 지형(地形)이 동서(東西)로 길게 평지가 마련되고, 후방과 전방 동쪽에 언덕이 있어 이 지형(地形)에 맞추어 건물을 배치한 데에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궁궐의 정문과 정전(正殿)은 일직선상(一直線上)에 놓이지 않고 정문의 동북쪽에 정전이 배치되었다. 이것은 경복궁이나 창경궁의 정문이 정전과 일직선상의 위치에 있는 것과 대조된다.

 

 

 

 

 

 

                                          금천교                    錦川橋

 

 

 

 

 

 

전통적으로 궁궐에 들어갈 때는 꼭 시냇물을 건너서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이는 시냇물이 풍수설에 의한 명당수의 역할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경복궁, 창덕궁 등 궁궐 초입부 마당 어구에 흐르는 시냇물은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명당수의 의미와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해주는 경계의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에 금천(禁川)이라 불렀다.  

 

 

 

 

 

 

 

 

 

 

창덕궁 금천교(錦川橋)는 1411년 (태종 11)에 조성되었으며, 서울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다. 돈화문을 지나 진선문(進善門)으로 가는 길에 있다. 예전에는 맑은 물이 흘렀겠지만, 지금은 메마른 다리가 되었다. 현재까지도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금천교는 궁궐 북쪽에서 발원한 옥천수(玉泉水)가 대궐 앞을 휘감아 흐르도록 하여 금천교를 놓았다.

 

 

윗부분은 길이 12.9m 너비 12.5m로 의장(儀杖)을 갖춘 국왕의 행차 때 노부의 폭에 맞도록 설정된 규모이다. 창덕궁의 명당수, 즉 금천(禁川)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돈화문 오른쪽까지 와서 궐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이 어구(御溝) 물가에는 화강석 6~7단을 가지런하게 쌓은 축대를 설치하였다. 여기에 돌다리를 가로질러 조정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였는데, 이 다리가 금천교이다.

 

 

경복궁 영제교(永濟橋)나 창경궁 옥천교(玉泉橋)가 장전(正殿) 남면을 서(西)에서 동(東)으로 흐르는 명당수 위에 남북방향으로 설치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창덕궁과 경희궁 어구의 돌다리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명당수 위에 동서 방향으로 설치되었다. 돌다리의 구조는 하천 바닥의 중앙과 물가에 놓인 기반석을 토대로 홍예(虹霓)를 두 개 튼 형식이다.       

 

 

 

 

 

 

 

 

 

 

 

 

 

 

물가의 축대는 부벽(扶壁) 구실을 하고 있으며, 홍예(虹霓 ..무지개 다리) 위에는 장대석 모양의 멍엣돌을 얹었다. 다리의 상면은 볼록하게 곡면(曲面)으로 만들고 바닥을 3칸으로 구분하여 칸마다 장대석을 고르게 깔았으며, 다리 가장자리에는 돌난간을 세워 통행자를 보호하도록 하였다.

 

 

돌난간은 머리 부분을 연화보주형(蓮花寶珠形)으로 장식한 법수(法首 .. 난간 모서리 또는 끝머리의 엄지기둥 상부에 장식한 부분)와 그 사이에 세운 판석으로 이루어졌다. 판석은 하엽동자기둥(荷葉童者柱) 모양의 부조(浮彫)를 중심으로 2칸으로 분절되었고, 칸마다 4잎형 안상(眼象)을 투각하였다. 법수(法首) 밑에는 멍엣돌 위치에서 돌출된 석재에 짐승머리 모양을 한 한조(丸彫)로 조각하였는데, 천록(天祿 ..상상의 동물)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홍예 사이의 벽에는 귀면형(鬼面形) 벽사상(癖邪像)이 부조(浮彫)되어 있고, 그 아래쪽의 홍예 기반석 위에는 남쪽에 해태상, 북쪽에 거북이상 등 환조(丸彫)로 만든 동물상이 배치되어 있어서, 금천(禁川)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연출하고 있다. 이 다리는 창덕궁이 창건되고 6년 뒤인 1411년 3월 진선문(進善門) 밖 어구(御溝)에 가설되었는데, 그 후 숱한 화재와 전란(戰亂)에고 불구하고 창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현존하는 궁궐 안 돌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진선문                  進善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을 지나 금천교(錦川橋)를 건너면 나오는 중문(中門)이다. 창덕궁 창건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1908년 인정정(仁政殿) 개수공사 깨 헐렸다가, 1999년 복원공사를 완료하였다. 진선문(進善門)을 들어서면 직사각형의 넓은 마당이 펼쳐져 있으며, 마당에는 어로(御路)가 나 있다. 마당 둘레에는 인정전으로 통하는 인정문과 호위청, 상서원 등 행각이 있다. 백성의 억울함을 알리는 신문고(申聞鼓) 혹은 '동문고(東門鼓)'라 불리는 북을 태종(太宗) 때 이곳진선문(進善門)에 설치하였고, 중간에 유명무실하다가 영조(英祖) 때 다시 설치하였다고 한다.  

 

 

 

 

 

                                         인정전                        仁政殿

 

 

 

 

 

인정전(仁政殿)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이다. '인정(仁政)'은 ' 어진 정치 '라는 뜻이며, 인정전(仁政殿)은 창덕궁의 법전(法殿)이 된다. 법전(法殿)은 왕의 즉위식을 비롯하여 결혼식, 세자책봉식 그리고 문무백관의 하례식 등 공식적인 국가 행사 때의 중요한 건물이다.

 

인정전은 태종 이방원(李方遠)이 거처할 이궁(離宮)으로 창덕궁을 건립하면서 1405년에 완공되었다. 태종 때에는 정면 3칸의 작은 전각이었으나, 1418년에 규모가 큰 건물로 고쳐 지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재로 전소되었으며, 선조 때 복구공사가 시작되어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던 1607년에 다시 완공되었다.

 

이후 인정전은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정무를 행하였고,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건물이 되었다. 하지만 창덕궁은 여러차례 화재로 시달렸는데, 1803년 선정전에서 불이나 인정전까지 전소(全燒)되고 말았다. 이듬해 1804년 다시 건립되었다.   

 

 

 

 

 

 

 

 

 

인정전은 경복궁의 근정전(勤政殿), 창경궁의 명정전(明政殿)과 함께 조선 왕조 궁궐의 세 정전(政殿) 중 하나로, 건축적으로는 규모가 근정전보다는 조금 작고, 건립연대는 명정전(明政殿)보다 뒤떨어져 중간 위치에 있다고 하겠으나, 조선 왕조 역사의 주무대가 되었던 점에서 다른 정전과는 다른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건물이 역사와 함께 변화되어 왔음은 내부에 꾸며진 한말(韓末)의 서양식(西洋式) 시설에서도 찾아볼 수있다.

 

 

인정전의 앞마당에는 박석(薄石)을 깔았고, 품계석(品階石)을 설치하여 조선왕조의 법전으로 역할하였다. 건물의 방향은 남향이고 인정문과 함께 회랑(回廊)으로 둘러싸여 일곽을 형성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重層) 팔작지붕 다포집이며, 순조 때 용마루에 조선왕실을 상징하는 배꽃문양 다섯 개를 새겼다. 

 

 

기단은 2중으로 되어 있으며, 중앙과 좌우 측면에 석계(石階)를 설치하고 바닥면에는 전석(塼石)을 깔았다. 상하층으로 된 기단은 장대석(長大石)으로 쌓았고, 상하층 월대(月臺)는 돌계단을 설치하였다. 돌계단 난간에는 8마리의 석수(石獸)를 새겼고, 가운데 계단에는 답도(踏道)를 설치하여 봉황을 새겼다.    

 

 

 

 

 

 

 

 

 

 

 

 

                                                       인정전   내부

 

 

 

 

 

 

 

 

 

 

인정전(仁政殿)은 중층(重層) 건물이지만내부는 하나로 터져 고주(高柱) 위로는 대량(大樑)을 걸고 고주 밖으로는 퇴량(退樑)을 걸어 사방에 툇간을 만들었으며, 대량의 위치에 우물천장을 드리웠다. 천장 중앙에는 한 단을 높여 구름 사이로 봉황(鳳凰) 두 마리를 채색하여 그려넣었다.

 

 

후면 고주(高柱) 사이에 용상(龍床)을 설치한 어좌(御座)가 마련되어 있고, 그 디에는 ' 오봉산일월도 (五峰山日月圖) '의 병풍을 쳤다. 어좌 위에는 천장에서 달아낸 보개(寶蓋)천장을 두었는데 정교하고 섬세한 가공이 돋보이고 있다.

 

 

인정전은 한말(韓末)에 내부시설 일부를 개조하고 전등(電燈)을 가설하였다. 내부 바닥은 본래 전(塼 ..벽돌)이 깔려 있었던 것을 서양식의 쪽나무로 바꾸었으며, 창(窓)도 내부에 서양식의 들어서 여는 창을 내고 커튼을 드리웠다. 또한 궁내에 전기를 공급하는 시설을 갖추어 여러 개의 전등(電燈)을 가설하였다. 이들 새로운 시설은 황실(皇室)을 상징하는 노란색으로 장식하였다.  

 

 

 

 

 

                                    오봉산일월도                  五峰山日月圖

 

 

 

오봉산일월도(五峰山日月圖)는 하늘에 걸려 있는 붉은 해와 흰 달, 청록색의 다섯 봉우리, 골짜기에 흘러내리는 두 줄기의 폭포, 붉은 수간에 목색의 무성한 잎을 갖고 있는 소나무 그리고 파도와 포말이 출렁이는 물을 소재로 그린 그림을 말한다.

 

 

오봉산일월도는 현재 경복궁의 근정전(勤政殿)을 비롯하여 장경궁의 명정전, 덕수궁의 중화전, 창덕궁의 인정전(仁政殿) 등 각 궁 정전(正殿)의 어좌(御座) 뒤쪽 뿐만 아니라, 창덕궁의 대조전 대청 그리고 신선원전 감실 등 왕의 침전이나 선왕을 모시는 영전 내에 설치되어 왔다. 

 

 

또한 왕이 거동하여 임시로 머무는 장소, 예컨데 전시(殿試)를 치르는 과거시험장 등 야외에도 왕의 주변을 장엄(莊嚴)하는 그림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오봉산일월도는 임금이 임하는 장소이면 어떤 곳이든 필요에 따라 설치되었던 장엄용(莊嚴用) 그림이라 할 수있다.

 

 

우리나라의 오악(五嶽)은 동악 금강산, 남악 지리산, 서악 묘향산, 북악 백두산, 중악 삼각산을 가르키며 '오봉산일월도'에 보이는 해와 달은 음양(陰陽)의 이치를 나타냄으로써 천신사상(天神思想), 음양오행설과 깊은 관계가 있다. 또한 왕실과 조정을 상징하는 소나무, 산, 물을 더하여 왕과 왕실의 영원한 번영과 종묘사직의 무궁한 창달을 칭송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   

 

 

 

 

 

 

 

 

 

 

 

                                               월대                  月臺

 

 

 

 

궁궐의 정전(正殿)과 같은 중요한 건물 앞에 놓이는 넓은 대(臺)를 말하며, 궁중의 각종 행사가 있을때 이용된다. 대개 방형의 넓은 단(壇)으로, 그 위에 지붕이나 다른 시설을 하지 않는다. 월견대(月見臺) 즉, 달을 바라보는 대(臺)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궁궐에서의 하례(賀禮), 가례(嘉禮)와 같은 큰 행사 때 사람들이 올라서서 행사에 참여하는 데 이용되며 제례(祭禮) 때에도 이용된다.  

 

 

 

 

 

 

 

 

 

 

 

 

 

 

 

 

 

 

 

 

 

 

 

 

 

 

 

 

 

 

                             창덕궁 후원                            昌德宮 後苑

 

 

 

 

 

창덕궁 안에는 가장 오래된 궁궐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신하들의 하례식이나 외국 사신의 접견 장소로 사용되던 인정전(仁政殿), 나라의 정사를 논하던 선정전(宣政殿) 등의 공적(公的)인 공간이 있으며, 왕과 왕후가 거처하던 희정당(熙政堂), 대조전(大造殿) 등과 산책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의 후원(後苑) 등 사적(私的) 공간이 있다. 정전(正殿) 공간의 건축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여 높게 하였고, 침전(寢殿) 건축은 정전보다 낮고 간결하며, 위락 공간인 후원에는 자연 지형(地形)을 위압하지 않도록 작은 정자각으로 많이 세웠다.

 

 

창덕궁은 자연스러운 산세(山勢)에 따라 자연지형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고 산세에 의지하여 건물이 자연의 수림(樹林) 속에 포근히 자리를 잡도록 배치하였다. 또 왕들의 휴식처로 사용되던 창덕궁 후원은 300년이 넘은 고목(古木)과 연못, 정자 등 조원(造苑)시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이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전통 건축으로 자연 경관을 배경으로 한 건축과 조경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부용지   부용정                          芙蓉池      芙蓉亭

 

 

 

 

 

 

 

 

 

 

 

부용(芙蓉)은 '연꽃'을 의미하는데, 창덕궁 후원의 대표적인 방지(方池)이다. 동서 길이가 34.5m, 남북 길이가 29.4m에 이르는 네모 반듯한 연못으로, 연못 중앙에 소나무를 심은 작은 섬이 하나 떠있다. 네모난 연못과 둥근 섬은 '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연못은 장대석으로 쌓아올렸고, 남쪽 모서리에는 물고기 조각이 하나 있다. 잉어 한 마리가 물 위로 튀어오르는 모습을 새겼는데, 이것은 왕과 신하의 관계를 물과 물고기에 빗댄 것이다. 

 

 

연못 남쪽 위에서 보았을 때 열 십(十)자 모양을 이루는 정자가 있는데, 초석 두 개가 연못에 들어가 있다. 이 정자(亭子)는 원래 숙종 3년인 1707년에 '택수재(澤水齋)'를 지었다가 정조 16년인 1792년에 부용지(芙蓉池)로 고치면서 '부용정(芙蓉亭)'이라 불렀다.

 

 

연못 안에 팔각 석주(石柱)를 세운 다음, 그 위에 목재를 얹어서 정면 5칸, 측면 4칸, 배면 3칸의 누각(樓閣)을 지었다. 연못을 향하고 있는 쪽마루에는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돌렸고, 반대편에는 평난간을 둘렀다. 정자 안은 네 개의 방을 배치하였는데, 배면의 방이 다른 방들보다 한 단계 높다. 연못 쪽으로 난 창(窓)에는 완자살창( 卍자 모양 창살)을, 나머지에는 띠살창을 달았다. 창(窓)을 들쇠에 매달면 정자는 사방으로 트이게 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곳에서 왕이 과거(科擧)에 급제한 이들에게 주연을 베풀고 축하해 주기도 하였는데, 1795년 수원 화성(華城)을 다녀온 정조가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고 전한다.   

 

 

 

 

 

 

 

 

 

 

 

 

 

 

                                          주합루                     宙合樓

 

 

 

 

 

 

 

 

 

 

 

 

창덕궁 후원(後苑)의 왕실도서를 보관하는 규장각(奎章閣)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 지역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누각(樓閣)으로 이익공의 팔작지붕 형태의 건축양식이다. 누각 앞에는 부용지(芙蓉池)가 있고, 정면 맞은편에 부용정(芙蓉亭)이 있다. 1층은 왕실의 도서(圖書)를 보관하는 규장각(奎章閣)이고, 2층은 열람실이었는데, 이 열람실을 주합루(宙合樓)라고 한다. 요즈음에는 이 건물 전체를 주합루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곳 주합루(宙合樓)에 오르기 위해서는 왕가 신하를 물과 물고기로 비유한 어수문(魚水門 ..위 사진)을 지나야 한다. 왕은 어수문(어水門)으로, 신하들은 어수문 옆의 작은 문으로 출입하였다. 어수문(魚水門)은 왕과 신하가 만나는 상징적인 문으로, 부용지의 물고기가 현명한 물을 만나 어룡(魚龍)이 되어 하늘로 오르는 인재 등용의 등용문(登龍門)이다.    

 

 

 

 

 

 

 

 

                                                       정조의 꿈

 

 

 

이곳 주합루(宙合樓)는 창덕궁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공간이다. 창덕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곳이 부용지(芙蓉池)이고 사계절 황홀한 부용지의 경치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부용정(芙蓉亭)이 있다. 정조(正祖)는 신하들과 부용지에서 뱃놀이를 하기도 하고 낚시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조(正祖)는 바로 그 부용지 옆에 주합루(宙合樓)를 세우고, 그곳에서 새로운조선을 향한 꿈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정조(正祖)의 꿈은 그저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었다. 조선의 극심한 당쟁(黨爭)은 왕권마저 위협하는 중이었고, 노론(老論) 권력은 결국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를 목도한 어린 정조(正祖)는 왕위에 오르기까지 15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숨죽여 지내며 꿈을 꾸었을 것이다. 호망하게 죽어간 아버지의 복권을, 당쟁을 종식시킬 힘있는 왕권(王權)을, 젊은 인재들과 함께 꾸려나갈 새로운조선의 모습을....

 

 

정조 개혁정치의 핵심이었던 규장각(奎章閣)이 바로 주합루에 있었다. 정조(正祖)는 기존의 권신(權臣)들에 대항할 새롭고 젊은 인재들을 등용하는데 힘을 기울였고, 그 결과 서얼(庶蘖) 출신의 각신(閣臣)들이 규장각에 들어올 수 있었다. 국내외의 장서(藏書)들을 보관하던 규장각에서, 그리고 2층 주합루에서 정조(正祖)는 젊은 신하들과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며 새로운 조선을 향한 꿈을 함께 꾸었다. 정조가 꿈꾸던 개혁을 위해서는 참신한 정치와 더불어 정조의 꿈을 믿고 따라와줄 그의 사람들이 필요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이들과 함께 한 부용지에서의 뱃놀이도 사실상 정조가 그의 신하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어수문                      魚水門

 

 

 

정조(正祖) 즉위년(1776)에 지은 2층건물인 주합루(宙合樓)로 올라가는 문으로, 왕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신하(臣下)들은어수문 양 옆 협문(挾門)으로 드나들었다. 주합루 아래층에는 왕실의 족보(族譜), 서책 등을 보관하고, 경전과 역사를 토론하던 규장각(奎章閣)이 있었다.2층은 열람실 기능을 하였다. 어수문(魚水門)은 말 그대로 '물고기와 물의 문 '이라는 뜻으로, 임금을 물에, 신하들을 물고기에 비유하여, 군신(君臣)은 서로 융화하는 관계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일주문(一柱門) 형태의 작은 문이지만 팔작지붕에 용조각을 치장하는 등 화려한 단청 장식이 돋보이고 있다.  

 

 

 

 

 

 

 

 

 

 

                                          규장각                     奎章閣

 

 

 

규장각은 1776년(정조 즉위년) 3월, 창덕궁 내에 설치되었다. 역대 왕들의 친필, 서화, 고명(顧命), 유교(遺敎), 선보(璿譜) 등을 관리하던 곳이었으나 차츰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으로 변해갔다. 규장각은 조선 세조(世祖) 때 일시 설치되었으나, 곧 폐지되었다. 군주의 권위를 절대화시키는 규장각의 설치를 유신(儒臣)들이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그 후 정조(正祖)가 즉위하면서 외척(外戚) 및 환관(宦官)들의 역모와 횡포를 누르기 위한 혁신정치의 중추로서 설립되었다. 이를테면 단순한 서고(書庫)의 구실을 위한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즉, 정조(正祖)는 ' 승정원이나 홍문관은 근래 관료 선임법이 해이해져서 종래의 타성을 조속히 지양할 수 없으니, 왕이 의도하는 혁신정치의 중추로서 규장각을 수건(首建)하였다 '고 설립 취지를 밝혔다.   

 

 

 

 

 

 

 

 

 

 

 

위 그림의 '규장각도(奎章閣圖)'는 1776년에 창건한 창덕궁 후원의 규장각 전경을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가  그린 관아도(官衙圖)이다. 규장각을 주제로 삼아 그린 관아도(官衙圖)이기 때문에 화면 중앙에 규장각을 실제보다 크게 강조하여 묘사한 다음 그 전후좌우에 부속건물과 주변 경치를 에워싸듯 묘사함으로써 중앙의 주제(主題)를 매우 효과적으로 부각시켜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감상미(鑑賞美) 풍부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풍모를 갖추었다. 

 

 

 

 

 

 

 

 

 

 

 

 

 

 

 

 

 

 

                                          연경당                       演慶堂

 

 

 

 

 

 

 

 

 

 

 

연경당(演慶堂)은 창덕궁 비원(秘苑)에 있는 조선후기의 상류층 주택이다. 궁궐의 후원(後苑) 안에 지어졌으면서도 사랑채, 안채, 안 행랑채, 바깥 행랑채, 반빗간, 서재, 후원, 정자 및 연못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주택이다. 이른바 99칸집이라 불리고 있으나, 현재 실제 규모는 109칸 반이다. 연경당은 사랑채의 당호(堂號)이자 집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연경당은 후원(後苑)의 첫째 구역인 주합루(宙合樓), 영화당(映花堂) 일곽을 지나 애련정(愛蓮亭)과 애련지(愛蓮池) 및 의두합(倚斗閤 .. 같은 건물의 동쪽 누(樓)는 영춘루, 남쪽 마루는 기오헌이다) 등이 조성되어 있는 곳 안쪽 아늑한 골짜기에 있다.

 

 

삼면(三面)이 나즈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동쪽만이 트여 있는데 이곳에 애련정과 애련지(愛蓮池)가 배치되어 있다. 아름다운 산, 풍요로운 숲, 그리고 연못과 정자가 이루어내는 이상적인 환경 속에 자리 잡은 이 집은 건축적으로도 뛰어난 짜임새와 만듦새를 보여주고 있다.

 

 

연경당은 정남향으로 하고, 북,동,서 삼면이 산으로 불러막힌 곳에 북서쪽에서 흘러나온 물이 남쪽 즉, 집 앞을 거쳐 동쪽으로 빠져나가도록 물길을 내어 풍수적으로 명당(名堂)을 형성한 다음 방위에 맞추어 직각으로 건물군을 배치하였다. 배치 형식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예에 따라 맨 앞쪽에 행랑채를 두 겹으로 두르고, 중문(中門)이 있는 행랑채에 각각 사랑채와 안채로 통하는 출입문을 좌우로 벌려 냈다.

 

 

유교(儒敎)의 내외법(內外法)에 따르면 남녀(男女)의 공간을 엄격하게 구분하기위하여 사랑채와 안채 사이를 담으로 막고 출입문을 설치하는데, 이곳 연경다에서는 사랑채와 안채의 앞마당은 사잇담을 설치하여 구분하고 있지만, 건물은 붙여 지어 사랑채 내부에서 안채 내부를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사랑채 안 동쪽에는 누마루를 두었고, 그 동쪽 마당에 선향재(善香齋)라는 서실(書室)을 배치하였으며, 선향재 후원에 높다란 화계(花階)를 쌓아 정원을 만들고 그 위쪽 언덕에 정자를 지어 휴식처를 마련하였다.   

 

 

 

 

 

 

 

 

 

 

 

                                         선향재                        善香齋

  

 

 

 

 

 

 

 

 

 

 

창덕궁 안의 다른 건물들이 단청과 장식을 한껏 갖추고 있는데 비하여, 연경당은 단청을 하지 않았고, 구조도 농수정(濃繡亭)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둥 위에 공포를 두지 않은 민도리집이다. 그러나 문, 창문, 담장 쌓기, 문양전(文樣塼)의 벽(壁)이나 기단, 주춧돌, 기둥, 보, 서까래 등에서 보이는 다양ㅎ면서도 세련되고 섬세한 기법은 일반 사대부주택의 수준을 훨씬 넘어선 모습이다. 더구나, 농수정 주변의 연잎동자기둥을 갖춘 돌난간, 사랑 마당에 단정하게 배열된 괴석(怪石), 사랑채 출입문인 장양문(長陽門) 앞 양쪽에 놓인 궁정양식의 정료대(庭燎臺) 등은 여염집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어서, 이 집의 품격을 한층 더 높여주고 있다.

 

 

 

 

 

 

 

 

 

 

 

 

 

                                           농수정                     濃繡亭

 

 

 

 

 

 

 

 

 

 

농수정(濃繡亭)은 창덕궁 안에 있는 금원(禁苑)의 별정(別亭)이다. 정면 1칸, 측면 칸의 익공계(익공계) 사모지붕 집이다. 4면 주간(柱間)에는 토벽(土壁)이 없이 4분합이 달렸으며, 우물천장의 내부는마루를 깔고 정자 기둥 밖으로 난간을 돌렸다. 4각 기둥에는 주련(柱聯)이달렸고, 겹처마에 절병통(節甁桶)을 놓았으며, 백골집의 아담한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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