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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3:1)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그렇게 한참을 서로 힘들게 바라만 보고 있다가 욥이 말을 한다.
이 때는 아픈지 오래됐다. 더이상 참기도 힘들고 죽을 것 같고,
얼마나 아프고 괴로운지 죽고만 싶다.
몇 달 동안 그렇게 죽을 만큼 아픈 것을 고스란히 겪으면서 지내왔기
때문에 세 사람이 앞에 있다고 해서 딱히 뭐라고 할 말은 없다.
더 이상 아프다는 말도 못하겠다. 죽겠다는 말도 못하겠다.
해봤자 소용도 없다.
어떻게 아픈지 속으로 아픈 것이 아니라 겉으로 보여 지게 아픈
것이므로 어디가 어떻게 아프다고 할 말도 없고, 어디를 가다가
떨어졌다든지 넘어졌다든지 무언가랑 부닥쳐서 사고가 났다든지
이웃 종족이 와서 갈취를 당했다든지 한 것이 아니라 뭐라고
자기의 입장을 얘기할 것은 없다. 그저 가렵고 아프다.
정말 너무 아프면 죽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하고 태어난 것을 원망한다.
부모님이 나를 나은 것을 원망한다.
아무리 신을 원망하지 않고 있어도 나아지는 것도 없고 고생고생만
하자 나중에는 욥도 신을 계속 원망하게 된다. 몇 달 동안은 그래도
신을 원망하지 않고 잘 견딘 것 같다.
그런데 세 어르신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저들하고 자기랑 비슷하게
산 것 같은데 저들은 멀쩡한데 자기는 죽을만큼 비참하니 자기의
처지를 더 크게 느낄 수도 있었다.
이때 자기는 잘못도 없는데 왜 때리시냐고? 이렇게 죄가 없는 자를
때리셔도 되는 것이냐고, 까닭 없이 왜 나를 괴롭히시냐고, 오히려 저
강도들은 잘 살기만 한다고, 신의 계산이 잘못됐다고 원망하게 된다.
욥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이 정도 되면 누구나 그럴 것이고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피부 일부만 피부병이 걸려도
얼마나 힘들고 신경이 쓰이고 고쳐 보려고 애를 쓰는데 전신이
그랬다니 입장 바꿔 놓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한 상황인 것이다.
나도 창조주 신께 직접 무슨 훈련이라는 것을 정말 실생활 같이 6개월 동안
같이 경험하고 살면서 이 것이 끝나면 무슨 좋은 큰일이 생기는 줄 알았다.
6개월간 실생활처럼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같이 살았으니까.
그런데 6개월이 지나고 이상한 훈련이라는 것도 끝나고 예전같은 일상생활로
돌아왔는데 지난날 하고 똑 같은 생활을 했다. 무슨 대단한 일이 벌어질줄
알았는데... 그리고 피부병이라는 것이 발병됐는데. 얼마나 가려운지
손등, 발등, 양팔꿈치, 양복숭아뼈근처, 나중에는 목까지 올라왔다.
한번 긁으면 속으로 가려움이 드러나 정말 기왓장이라도 있으면 긁게
생겼다. 긁을수록 가려운. 겉은 시뻘게져가지고. 칼 끝으로 세밀하게
긁은 듯한 상처가 나 있고.
몇달을 생으로 고생하다 어느날 피부과라는데를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기저기 가봤다. 기도도 드렸다.
"하나님아버지 이래뵈도 제가 나이는 많아도 여잔데 이렇게 목까지
시뻘게져가지고 아무리 스카프를 하고 감추고 다닌다고 해도그렇지
겨을에야 그렇다 치고 여름에 더워죽겠는데 어떻게 목을 감추고
다니냐"고 "제가 성가대 지휘자인데 앞에 섰을 때 목까지 피부병이
올라오고 얼굴까지 올라오면 무슨 망신이냐고" 해가면서
"내가 무슨 잘못을 그리 했길레 이렇게 피부병으로 고생을
하게 하냐"고... 욥보다 훨씬 덜 고생스럽겠지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러면 목은 낫게 해주시겠다고 하시더니
정말 같은 병원에서 같은 약을 먹었는데 목만 낫고 다른데는
그대로였다.
에휴. 그래도 그게 어디냐고 굳세게 참고 약먹고
바르고 몇년을 고생하다(2014~2017년도쯤) 좀 나아졌다가
다시 도졌다가 좀 나았다가 다시 도졌다가 해가면서 고생했다.
자기 잘못을 알지 못하고, 정말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철저하게
믿고 있으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도대체 몰라 한다.
그래도 ‘인과응보’ 라는 말은 들어봤기 때문에 무언가 내가 잘못을 했나
하는 생각은 한다. 하지만 신께서 깨닫게 해 주시기 전에는 잘 모른다.
아무리 옆에서 몇날 며칠을 이야기 해줘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다. "남 얘기하고 있네!" 하면서.
그 때 당시도 지금처럼 마귀가 그러는 것이라고, 사탄이 그러는 것이라고,
귀신이 그러는 것이라고, 교육을 받았다면 마귀나 사탄이나 귀신에게
원망을 돌리기라도 하지.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그 넘의 사탄이!,
때려 잡아야겠네 이 사탄!” 하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 외치기라도 하지.
그런 것도 아니고. 신께서 하신다는 것은 알고 있고 믿고 있는데.
욥과 세 친구들이 계속 논쟁을 일삼는 내용을 보니 이들은 그래도
신에 대해서 정확하게 교육을 받은 것 같다. 하지만 욥도 그
내용을 잘 알긴 안다. 나한테 적용을 시키지 못해서 그렇지.
그래서 자기가 이렇게 죽을 만큼 아프게 되고 자녀까지 죽은 벌에
대해서는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인지 전혀 모르겠다.
왜냐하면 자기는 도덕적으로 너무 너무 철저하게 잘 살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을만한 일도 전혀 하지 않았다.
아무리 인과응보라고 해도 잘못이 없다. 잘못을 찾을 수가 없다.
장사를 하든 사업을 하든 나름 잘했다.
욥은 그래도 이 재물은 신께서 주셨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래서 주신 이도 신이시오 가져가시는 이도 신이시라고
고백한다.(부족신인데 하나님이라고 번역된 것이다)
욥이 너무 죽을 만큼 아프니까 태어난 것을 원망한다.
안 태어났으면 이렇게 아플 일도 없을 것을.
우리도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원망스러울 때가 많다.
전에는 나도 가난했을 때 그저 침묵하고 잘 견뎠는데,
사탄이 쥐고 가는 세상이라서 어쩔 수가 없다고 교육 받았을 때는
사탄에게 핑계라도 대고, 사탄을 발로 밟아 이겨야 된다고 찬양을
인도하면서 발로 쿵쿵거리기도 하고, 하나님 빽 믿고 싸워보자 했는데,
이제 이 세상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100% 쥐고 가신다는 것을
하나님께 직접 교육 받고, '사탄' 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교육 받고 알고 있었던 하나님과도 상응하는 어떤 거대한 존재가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는 아무 것도 아니고 그저 하나님께서
사람을 관리하시기 위해서, 인생들을 다스리시기 위해서 쓰시는
도구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이젠 무슨 일이 안 되면 하나님께 투덜거리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막으신 것이니까. 실직당하는 것도.
왜 일이 이렇게 되게 하셨나요? 제가 무슨 잘못을 하긴 한 것이죠?
언제 해주실 것인데요?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신다면서 무슨 일이
이렇게 되지도 않는 것인가요? 되려고 하다 말고 되려고 하다 말고
하는 것은 도대체 왜 그런 것인가요? 제가 그렇게 미우세요?
그럼 함께 계시면 뭐해요. 함께 계신 것을 아나 모르나 삶이 똑 같다면
뭐하러 알게 하시나요? 더 감질나고 더 약 올라요. 차라리 하나님이
내 속에 함께 계시다는 것을 모르고 종교생활 했던 때가 훨씬 나아요.
그냥 어린아이처럼 헤헤 거리고 사는 것이 더 나아요.
뭐하러 사람을 만드셨어요? 뭐하러 이 세상의 삶을 만드셨어요?
왜 이렇게 인생은 힘든 것인가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세요?
우리 사람이라는 존재를 왜 이렇게 힘들게 살게 하셨어요?
아무리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다고 하셔도 우리는 보지도 못한
일인데요. 아! 이렇게 힘들게 살게 하실 바엔 그냥 지구를 터뜨려
버리세요!. 다 죽이시고 얼렁 속량을 시켜주시던지 인생을
끝내주시던지, 하나님 혼자 사세요! 라고 조르게 된다.
■(욥 3:2) "욥이 입을 열어 이르되"
너무 죽을 만큼 아픈 욥은 입을 열어서 말을 하는 것조차 힘들다.
그래도 아무 말도 안하고 있는 것보다 뭐라고 말을 하는 것이 덜
아프긴 하다. 말을 하는 동안 잊을 수가 있어서인지 몰라도.
내가 아픈 것을 하소연 하면 안하고 입 다물고 있는 것보다 낫긴 하다.
■(욥 3:3)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욥은 계속 자기가 태어난 것을 원망한다.
■(욥 3:4)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신께 쌍욕을 해서 욕이 아니라,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분이
신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나를 왜 태어나게 하셨냐고 하는 것은
간접적으로 신을 원망하는 것이며 잘못하면 신께 욕을 돌려
드리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된다.
지금 현재 나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좋던 나쁘던 "마땅하십니다"
"감사합니다" 하지 않는 모든 말들은 영의세계에서는 신을 비방하는
말로 계산된다.
■(욥 3:5)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였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더라면, 흑암이 그 날을 덮었더라면"
■(욥 3:6) 그 밤이 캄캄한 어둠에 잡혔더라면, 해의 날 수와 달의 수에
들지 않았더라면
■(욥 3:7) "그 밤에 자식을 배지 못하였더라면, 그 밤에 즐거운 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욥의 부모가 어느 날 부부관계를 가진 탓으로 자신이 태어나게 된
것을 원망한다. 욥은 그렇게 자기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자신이 태어날 수 있도록 한 세포가 조성된 '탄생 시점'을 원망한다.
■(욥 3:8) "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이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
‘리워야단’에게 잡혀 죽었더라면.
이 ‘리워야단’은 영어로 ‘Leviathan’ 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상징적인
동물이라고 알고 있었던 ‘Dragon’ 이라는 ‘용’ 이었던 것이다.
이 때는 용이 없었다. 욥이 홍수 이전 사람이라면 아마도 공룡이나
용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홍수 이후에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몸과
마음이 고통스러워 살기 힘들 때 이렇게 살 바야 레워야단에게라도
죽는 것이 낫겠다고 달려 나갔을지도 모르겠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리워야단이라는 용이 있었다는 것은 구전으로 들었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용을 잡으려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을 것이라는 것을.
■(욥 3:9)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래서 욥은 그 용이라는 것에게 부모가 죽었었더라면
자기가 이렇게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욥 3:10)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여 내 눈으로
환난을 보게 하였음이로구나"
욥의 엄마라는 존재가 '불임' 이었다면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을
것인데 불임이 아니라서 본인이 출생하게 된 것이고 이런 환난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욥 3:11)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욥은 계속 자기가 '유산' 되지 않은 것도 원망한다.
■(욥 3:12)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
■(욥 3:13)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태어나면서 죽었으면 지금처럼의 고통은 없었을 것인데.
■(욥 3:14) "자기를 위하여 폐허를 일으킨 세상 임금들과
모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욥 자신도 그냥 태어나다 죽었으면 먼저 가신 조상들과
같이 있었을 것이다.
■(욥 3:15)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을 채운 고관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부자들과도 같이 있었을 것이다.
이땅에서나 빈부귀천이 있지 죽어서 영의세계로 들어가면
모두가 평등한 존재로 있다.
■ (욥 3:16) "또는 낙태되어 땅에 묻힌 아이처럼 나는 존재하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을 것이라"
태어나지 않았으면 존재조차 없었을 것이다.
■ (욥 3:17)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피곤한 자가 쉼을 얻으며"
세포로 형성된 사람이라는 존재는 딱 이 땅에서만 삶이 주어지는 것이다.
죽으면 이 육체 자체는 땅에 묻혀 잠을 자는 것 같이 된다.
그렇게 살던 사람이 죽어서 영의세계로 들어가면 이 세상의 소요가
그치고 피곤했던 삶이 쉬게 되는 것이고 누구나 다 동등한 입장이
되는 것이다. 인생은 불에 그슬린 나무다.
■ (욥 3:18)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호통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 땅에서야 왕도 있고 노예도 있고 갇힌 자도 있고 그를
감독하는 자의 큰 소리도 있고 다양 하지만 그 곳은 평안하다.
나를 감독하는 자가 없다. 있어도 창조주 신이실텐데
그때는 사랑의 신으로 대하신다.
그런데 욥도 이땅에서는 호통치며 떵떵거리고
감독자 같이 살았다. 입장이 바뀌니 원망한다.
인생은 똑 같다.
■(욥 3:19) "거기서는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영의세계에서는 큰 자나 작은 자나 종이나 상전이나 다 동등하게 된다.
영의세계까지 가서 나는 왕이었네 나는 공주였네 나는 노비였네
나는 사장이었네 나는 대통령이었네 나는 의사였네 나는 교수였네
하는 것이 아니다.
영의세계로 들어가면 부부간도 아니고 부모 자녀간도 아니다.
그냥 동등한 하나의 개체다.
■(욥 3:20) "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죽을 수 없는 고난을 주셨고 죽을 수 없는 병고통을 주셨다.
아파도 너무 아프다. 죽는 것이 낫다.
■(욥 3:21)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죽음을 구하는 것을 더하다가"
우리는 자살이라는 것을 쉽게 하는 줄 안다.
자살도 신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할 수 없다.
자결, 사약, 그런 것도 왕이 하사하는 것이다.
죽고 싶다는 마음도 함부로 가져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사형 법에 ‘자결’ 이라는 것이 있다.
칼로 자결을 하던지 사약을 먹고 죽던지 하는 것이다.
누가 자기의 목숨을 그런 것에 의해 버리고 싶겠나?
왕이 명령을 하니 실행할 수밖에.
욥이 죽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나?
죽기를 바라도 죽음은 신께서 하락하시지 않으시면 오지를 않는다.
'사망' 도 신께서 보내시는 것이다.
■ (욥 3:22)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우리가 죽는 것이 무섭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내 눈 앞에 닥치면
마음이 오히려 담담해지는가보다. 너무 힘들면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욥 3:23) "창조주신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나에게 이 고통을 주신 신께서 나를 죽이시지 않으시고
왜 생명은 허락하셨을까? 그냥 죽이시지 하는 고통의 소리이다.
■(욥 3:24) "나는 음식 앞에서도 탄식이 나며 내가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 같구나"
전에 맛있게 먹던 음식이 몸의 아픔으로 인해 먹고 싶지도 않다.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아이구 아이구다.
■(욥 3:25)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죽음의 두려움까지 느낄 정도로 아프다.
그동안 가족을 위해 신께 제사를 지낸 것도 다 이렇게 혼날까봐
두려워서 했는데 그 무서워했던 고통이 나한테 왔구나 한다.
■ (욥 3:26)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욥이 아픈 것은 쉴 틈이 없는 계속적인 것이다. 정말 너무 아프면
1분이라도 쉬고 싶어 한다. 게다가 신은 아픔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불안까지 겸해서 주시는데 그 불안은 세상의 그 어떤 것이
아니다.
곧 죽을 것 같은데 죽지는 않고 하루 또 생명이
연장되기만 할 뿐이라는 무서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