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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브로 살랑살랑거리는 실바람 따라 현존재의 컨디션도 많이 회복된 것 같습니다. 중국 국경과 맞닿은 네팔 중북부 히말라야 산악지대에서 발생한 대홍수로 인한 사망자가 최소 160명으로 늘어난 가운데, 한국인 두산과 남동 근로자 9명도 행불 상태라는 보도를 듣고 있습니다. 이번 참사의 원인은 지진이 아닌 빙하 붕괴로 산사태가 하천의 배수를 막았고, 엄청난 물들이 범람하면서 대홍수로 이어졌다니 지구 온난화가 심화되는 모양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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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사 명진(76) 스님이 서귀포에서 프리다이빙 사고로 입적을 했고 오늘 다비식을 했습니다.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는 지금도 건재하던데, 명진 스님은 왜 이렇게 급히 떠나가신 걸까요? 필자의 스승이셨던 고 윤종하 총무님께서도 캐나다에서 스노클링 하다가 비슷한 나이에 소천하셨는데, 도력이 높은 분들은 바다가 친근한가 봅니다. 조만간 봉은사 한 번 더 다녀갈 생각입니다. 극락왕생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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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휴가 3>입니다."이 판국에 소주나 빨라고?! 아주 무모한 당신이네!!" 조연 인봉(박철민)은 민우의 택시회사 동료로 민우보다는 연상입니다. 월남 방위 출신에 허풍이 강하지만,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분위기 메이커입니다. 사건 마지막 날 시민 군을 해산할 때 주변인들의 권유에 따라 집으로 돌아가지만, 결국 어린 아들과 아내를 뒤로하고 시민 군에 재합류합니다. 이때 밤에 집에서 몰래 나가기 전에 어린 아들을 마지막으로 안고 오열하고, 아내 역시 자는 척하면서 흐느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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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의 공격 전에 장용대와 짧은 대화를 나누고, 전투 중 총상을 입고 김 신부에게 유언을 남긴 뒤 전사합니다. 특유의 전라도 방언 애드리브가 그야말로 절정에 달합니다. 실제로 배우 역을 맡은 박철민은 이 영화의 배경이 된 구 전남도청의 소재지인 광주광역시 동구 출신이기 때문에 서남 방언으로 대화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고 하더이다. "여러분!!! 우리 떠나가는 공수들에게 잘 가라고 노래 한 소절 불러줍시다~!!!(장용 디/박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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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있어요 잘 있어요 그 한마디였었네/잘 가세요 잘 가세요 인사만 했었네/달빛들이 호수 빛가에 앉아/내님 모습 나홀로 새기며/또다시 오겠지/또다시 오겠지/기다립니다/잘있어요 잘있어요 그 한마디 였었네/잘가세요 잘가세요 인사만 했었네" 단발머리 용대는 화순군 출신이며, 삭제 장면에 나오는 대사와 설정에 따르면, 실제 학력은 중학교도 입학하지 않은 국졸이라고 합니다. 인트로에서 인봉의 택시에 여자친구랑 탔다가 똥을 묻히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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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봉과 한차례 푸닥거리를 즐겨대면서 백수같이 놀기만 하는 그저 한심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어찌저찌해서 친해지면서 이후에는 둘이 마치 베프 마냥 콤비를 이루고 다닙니다. 인봉과 시위 현장에서 재회했을 때는 서로 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묘하게 낯이 익소?" 정도의 대사만 하다가, 물러가는 계엄군 뒤에 대고 "가서 똥이나 처먹어라!"라며 소리 지르던 와중에 똥이라는 키워드로 서로를 기억해 냈다는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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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기억한 인봉에게서 떨어져 앞으로 나아가면서 "만세!"를 외치는 용대를 향해 총으로 삿대질하면서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야!!!"라고 소리 지르는 장면이 가히 압권입니다. 도청 전투에서는 총상을 입고는 무전기로 인봉에게 "처자식이 있으니 투항하라"라고 하지만, 대답이 없는 인봉을 향해 울부짖다가 본인의 위치가 노출되면서 계엄군의 총에 전사합니다. 사망하기 전 무전기를 통해 흥수에게 고맙다고 하면서 "덕분에 양아치 장용대도 인간이란 걸 느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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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장면은 손에 꼽히는 명장면 중 하나입니다. 또한 결전의 날 직전 인봉과 함께 멀리 계신 부모님을 향해 큰절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인봉이 절을 하고 일어난 후에도 용대는 그대로 엎드려 있었고, 왜 그런가 가서 보니 엎드린 채 오열을 하고 있었습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을 어디서 주서 들었을까요? 용대의 바지 패션을 블랙&화이트 체크무늬에 후다를 달고, 제일 합섬 폴리에르테르 80% 면 20%로 카브라를 했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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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에 들어와서 패션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앞머리는 짧고 뒷머리가 긴 펑크스타일을 고집했으며, 교련복 바지에 체크 와이셔츠를 목숨 걸고 장만해야 했습니다. 5.18 때 제일 합섬 하복을 양복 기지로 맞춰 찾아온 생각이 바로 어제 일 같습니다. 순전히 단복을 입으려고 보이 스카우트를 한 놈이 접니다. 광주 대인동 가서 3만 원을 주고 맞춘 회색 단복을 뽕뺄 때까지 입었습니다. 2026년 5.18 행사 때 보이스카우트 연맹이 보여서 울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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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는 초등학교 때부터 반공방첩 표어, 포스터를 무지하게 쓰고 그렸습니다. '북괴는 노린다 우리의 빈틈을', '땅굴 파는 두더지 몽둥이로 때려잡자',아, 어찌 잊으라 6.25 그날을!' 군사정권은 시민들의 기억 속에 각인된 동족상잔의 비극을 이용해 빨갱이 프레임으로 반대세력을 제압했습니다. 고3까지 교련 집체교육을 받았으니 초6 년, 중3, 고3 도합 12년을 '이승복'교육을 받은 셈입니다. 당시 우리는 충효사상 같은 규율로 억압하던 어른들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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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상대로 벌인 최초의 대모는 고2 때이었어요. 겨우 두발과 교복자율화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교복 형태를 부수고 불법 가요를 들으며 펑크스타일을 고집스럽게 하면서 아웃사이더가 되었습니다. 80년 5월 17일부턴가 하복을 입는다고 해서 녹색 교복을 찾아왔습니다. 교복값은 2-3만 원이었을 것입니다. 규정은 스마트 학생복 기지에 흰색 카라가 있는 교복인데 나는 상의는 긴팔로 만들고 7부처럼 걷고 다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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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추 4개를 쌍으로 달아 카라를 빼버리면 정은이가 입는 사복이 됩니다. 하의는 배꼽 바지에 주머니 각도 15도 12인치 통을 히프 선에서 뚝 떨어지도록 했습니다. 뒤주 머니는 후-다라고 하는 뚜껑을 왜 고집했을까요? 검정 스파이크 대신 흰색 BB 운동화를 꺾어 신으면서 바지 밑단의 브랜드 면 20% 폴리에스테르 80%가 꼭 드러나게 했습니다. 왜 그랬냐고 물어보면 이유는 없습니다. 고2 가을 무렵 학교를 평정하고 서방으로, 충장로로 출근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자칭 전국구이었습니다. 학생 깡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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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다방(우체국)은 전라도 권 건달들의 성지입니다.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유명해진 금남로나 충장로 길은 이미 40년 전에 차 없는 거리로 핫 플레이스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껄렁거리거나 '해태 (기아) 야구' 신화는 다 억압과 누르기에 대한 반사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레드콤플렉스 같은 것 말입니다. 그 시절 운동권 대학생이 된 아들을 향해 아버지는 "왜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하고 있느냐"라고 혼쭐을 냈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대항을 했지요. 이데올로기와 시대의 상흔을 그대로 떠안고 살았던 우리 세대는(7080) 시대의 불운아 일지 모릅니다. 그래도 그리운 80년대여 응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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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 로에 꽃잎처럼 뿌려진 너의 붉은 피/두부처럼 잘려나간 어여쁜 너의 젖가슴/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나는 가끔씩 역사의 한 귀퉁이에 서 있는 나에 대한 인식을 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희비가 엇갈리면서 떠오르는 두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2002'월드컵 4강의 감격이고 다른 하나는 80년 5.18입니다. 고삐리 때 시작된 5.18의 질긴 끄나풀이 84년 수방 사 헌병대 근무로 이어졌고, 5공 시절 수도방위 사령부 제32 헌병중대에 있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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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은 30단장 장세동 씨 전역식을 한다고 영문도 모른 채 육군 대령에게 ‘받들어 총‘을 하였고, 한번은 고참병과 함께 밀대로 아스팔트 연병장에 있는 물기를 닦은 적이 있는데 그날 全 통이 방문한 날입니다. 요새 연예인 김 제동을 국정감사에 출석시킨다고 야단들이 났습니다. 김제동이가 정말 장군의 아내를 아주머니로 불렀다가 영창에 갔을까? 저는 개인적으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개연성에 한 표 걸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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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군대가 달라졌겠지만 과거에는 대통령 온다고 아스팔트 연병장의 물을 밀대로 닦았고, 30단장(육군 대령) 전역식을 수도방위 사령부(중장/이종구) 헌병단( 대령/신 윤희)에서 해준 것도 사실입니다. 김 제동은 자신의 국회 국방위 국정 감사 증인 채택 논란이 일자 “웃자고 한 얘기를 죽자고 달려들면 답이 없다"라고 받아쳤습니다. 좀 세긴 하지만 민주공화국에서 이 정도 얘기가 뭔 문제가 됩니까? 진실공방은 아직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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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관계자가 기록에는 영창 간 사실이 없다고 한 줄 기사가 나왔던데 이거 왜 이러십니까? 영창은 지휘관이 정식으로 행정처리를 하면 기록에 남지만 얼마든지 기록 없이도 그냥 갔다 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 헌병대만 하더라도 지휘관이 열받으면 영창에 집어넣다가 기록을 하지 않고 나오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정식 행정처리를 하더라도 군대 영창은 사회로 치면 유치장입니다. 15일까지만 영창이라고 하고 더 중한 죄인들(6개월 이상)은 육군 교도소로 넘어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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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들도 너무 개그맨을 코너로 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살기 힘듭니다. 격차, 소통 문제는 어제오늘 문제인가요? 국민 혈세 받아먹고 들 계시면 ‘제4차 산업혁명’이나 ‘출산 장려 대책’ 같은 밥값을 좀 하시라고요. 나는 방공 방첩 포스터와 조기 청소 때 ‘새벽종이 울렸네. ‘ 불러댔던 386 세대이면서도 어느 정도는 좌경용공적인 색깔이 내 몸 구석진 곳에 피해의식으로 남아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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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동-사태-의거, 민중항쟁으로 명칭이 변천해온 5월의 그날 무렵, 나는 전남 담양의 D 고교에 다녔습니다. 전남 대 학생시위를 돌파구로 해서 시작된 광주 시민의 시위는 다음 날인 19일, 2만여 명 이상의 가두시위로 발전하였는데 그 당시의 주요 요구사항은 `계엄령 해제, 전 두환 퇴진, 김대중 씨 석방`등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렇게 타오르기 시작한 시민들의 평화적인 시위에 난데없이 공수부대가 투입되었는데 무차별로 주검이 되어 나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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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형제를 빤히 보고서 혈기가 많지 않은 사람이라도 눈이 뒤집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무등산 타잔(박흥수/1958/사형)을 적어도 이해는 합니다. 내가 5월 18일경 하복을 찾아가지고 오다가 시민 군이 탄 대형버스(아세아 자동차)와 처음으로 만났었는데 머리띠에 붙어있는 구호가 '전 두환 퇴진' 이었습니다. 소총으로 무장한 시민 군들은 많은 희생이 있었음에도 광주 시민들의 열열 한 지지를 받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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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일대(나주, 장성, 담양 등)를 제압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무기한 휴업에 철없이 기뻐하기도 했지만 광주에서 통학하는 친구들의 생생한 진술은 지금도 내가 이따금 씩 미친놈처럼 5월 가를 부르는 이유입니다. 그때가 딸기 철이었는데 광주로 출하하지 못 한 극상품 딸기를 한 상자에 1500원에 사서 먹었고 광주에서는 배추 한 폭에 3.000원에 거래가 된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금남 록에서 충 장로(도청)까지는 약 2km 정도가 되는 거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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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며 인산인해를 이루는 명동거리 같은 곳입니다. 나는 종종 교복을 벗고 사복으로 나가서 삼양 백화점 앞 우체국까지 순찰을 했고 그 무렵 겨울엔 어머니의 삯바느질감을 delivery하느라고 주중에도 곧잘 갔었던 곳입니다. '꽃잎','모래시계','박하사탕 ' '택시 운전사' 등은 5.18을 배경으로 다룬 영화입니다. 물론 저는 4작품 모두를 이미 보았고 '꽃잎'과 '모래시계'는 가끔씩 다시 보곤 합니다. 신군부의 정권찬탈을 향한 선택된 학살로 광주는 죽음의 도시가 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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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팬티만 입힌 채 트럭에 실려 갔습니다. 아, 나는 또다시 분노하였습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제목대로 가볍게 읽으려 한다면 젊은 의사의 자유분방한 연애 담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1968년 짧았던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주인공의 행로를 따라가면 한 지식인의 결코 ‘가볍지 않은’ 존재론적인 방황이 읽힙니다. ‘프라하의 봄’보다 훨씬 짧았지만 더욱 비장했던 ‘5월의 봄’을 그린 한국 영화가 <화려한 휴가>입니다. >>
"왜 쏘았지(총) 왜 찔렀지(칼) 트럭에 싣고 어디 갔지
망월 동에 부릅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있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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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들아 동지들아 모여서 함께 나가자
욕된 역사 투쟁 없이 어떻게 헤쳐 나가리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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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머리야 쪽 바리야 양키 놈 솟은 콧대야
물러가라 우리 역사 우리가 보듬고 나간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피, 피, 피"
2.
양아치는 어떻게 시민이 되는가? 사람은 언제 ‘자기밖에 모르던 개인’에서 타인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시민이 되는가? 그리고 교복을 비틀고 머리를 기르고 불온한 노래를 듣던 작은 저항과, 1980년 광주에서 사람들이 보여준 정치적 저항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꽃게 몇 마리를 샀는데 몽땅 상해서 버렸습니다. 분명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고 샀건만 속을 알 수 없었습니다. 사람도 그렇고 역사도 그런 것 같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는 무엇이 진짜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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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휴가』의 장용대도 처음에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으로 등장합니다. 껄렁거리고, 싸움이나 하고, 제대로 배운 것도 없고, 책임감이라고는 없어 보입니다. 택시기사 인봉과는 하필 ‘똥’ 때문에 인연을 맺습니다. 영웅 서사의 주인공으로는 한참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 양아치가 시민이 됩니다.
1. “덕분에 양아치 장용대도 인간이란 걸 느꼈다”
장용대의 마지막 말은 이 영화 전체를 철학적으로 압축합니다. 그는 훌륭한 사람이어서 도청에 남은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정의감이 투철한 민주투사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건을 통과하면서 변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말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완성된 덕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행동하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만들어갑니다. 바디우의 표현을 빌리면 <사건>은 이전과 다른 주체를 만들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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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이전의 장용대와 5월 이후의 장용대는 같은 사람이지만 같은 주체가 아닙니다. 거리에서 사람이 맞고 쓰러지고, 자신이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위험에 처하는 것을 보면서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라는 경계가 무너집니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고백은 감동적입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생물학적 신분이 아니라 때로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내 문제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웅이 되려고 도청에 남은 것이 아닙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을 혼자 두고 갈 수 없어서 돌아옵니다. 그 순간 양아치가 시민이 됩니다.
2. 인봉은 왜 다시 돌아왔는가?
인봉의 선택은 더 아픕니다. 그에게는 아내와 어린 아들이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도 비겁하다고 욕할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주변에서도 가족을 생각해 돌아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아이를 마지막으로 안고 웁니다. 아내는 자는 척하면서 함께 웁니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가장 어려운 윤리적 질문을 던집니다. 가족을 지키는 책임과 공동체를 지키는 책임이 충돌하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정답을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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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에게 정치란 단순히 국가를 운영하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세계를 만들어가는 행위였습니다. 우리가 완전히 사적인 삶에만 머물면 공동의 세계는 누군가에게 맡겨집니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는 그 공동세계가 무너지면서 개인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인봉이 다시 도청으로 향하는 것은 가족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역설적으로 자신의 아이가 살아갈 세계가 어떤 세계인가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선택은 숭고하지만 동시에 잔인합니다. 시민적 용기는 언제나 멋있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떠나야 하고, 누군가는 남겨져 울어야 합니다.
3. 펑크머리와 교복개조도 저항이었을까?
여기에서 개인적인 패션 이야기가 뜻밖에 중요해집니다. 앞머리는 짧게, 뒷머리는 길게. 교련 복 속에는 체크 셔츠. 규정 교복의 칼라는 뜯어내고, 바지통과 주머니 각도까지 고쳐 입습니다. 흰 운동화를 꺾어 신고 브랜드 혼용률까지 보이게 합니다. 지금 보면 우습기도 하지만, 당시 열일곱 살에게는 제법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요? “그냥 멋있으려고.” 물론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푸코의 철학으로 한 번 더 읽어보면 다른 의미가 보입니다.
-학교·군대·교도소 같은 근대 제도는 사람의 생각만 통제하지 않습니다. 머리 길이를 정하고, 옷을 통일시키고, 줄을 세우고, 시간표에 맞춰 움직이게 합니다. 즉 몸을 규율합니다. 그렇다면 교복을 제멋대로 뜯어고치는 행동은 거창한 정치혁명은 아니더라도, "내 몸의 최종 결정권자는 나다.” 라는 작은 저항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두발자유화와 교복자율화 요구가 당시 학생들에게 강렬했던 이유도 이것입니다. 민주주의를 헌법책에서 먼저 배운 것이 아니라 머리카락과 바짓단에서 먼저 경험한 세대였던 셈입니다.
4. 그러나 반항과 저항은 다르다
여기서는 한 가지 구별이 필요합니다. 규칙을 싫어한다고 모두 민주주의적 저항은 아닙니다. 폭주하고, 싸우고, 학교를 무시하는 것도 권위에 대한 반항일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정의로운 행동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기존 질서를 탈주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디를 향해 탈주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기 위한 반항과 타인이 사람답게 살아갈 공간을 만들기 위한 저항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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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장용대의 변화가 의미 있습니다. 처음의 용대는 사회규범을 우습게 여기는 ‘반항아’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의 용대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는 ‘저항자’가 됩니다.둘 다 기존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비슷합니다. 그러나 방향이 완전히 다릅니다. 반항의 중심에는 ‘나’가 있고, 저항의 중심에는 ‘우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양아치 장용대가 시민 장용대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5. 왜 권력은 빨갱이라는 말을 필요로 했는가?
어린 시절부터 반복해서 보았던 반공 표어도 이 맥락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이라는 실제 역사적 상처가 있었고 냉전이라는 현실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공포가 정치적 반대자를 설명하는 만능언어로 확장될 때입니다. 푸코가 강조했던 것처럼 권력은 단순히 사람을 때리는 것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정상이라고 부르고, 무엇을 위험이라고 부를지를 결정하면서 작동합니다. ‘시민’이 ‘폭도’가 되고, ‘정치적 반대자’가 ‘용공세력’으로 치환되는 순간, 폭력을 정당화할 문턱이 낮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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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관련 기록은 당시 시민들의 성명서·일기·취재수첩뿐 아니라 국가기관의 상황보고와 희생자 자료까지 방대한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1,472명의 구술·증언 자료를 포함한 기록들이 보존됐고, 관련 기록물은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됐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억을 이념적 구호 하나로 다시 덮어씌우는 것이 아닙니다. 기록을 읽고, 증언을 비교하고, 틀린 기억은 고치면서도 왜 그런 폭력이 가능했는지를 끝까지 묻는 것입니다.
6. ‘난동’에서 ‘민주화운동’까지 ― 이름을 되찾는 싸움
한 사건의 명칭이 달라진다는 것은 단순한 단어 교체가 아닙니다. 어떤 사건을 ‘소요’, ‘사태’, ‘폭동’이라고 부르는 것과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건의 의미를 전혀 다르게 만듭니다. 국가기록원 자료 자체에서도 1980년에 생산된 행정문서에는 당시의 ‘광주사태’ 같은 명칭이 남아 있는 반면, 이후 보상·진상규명·기념사업 과정에서는 ‘5·18민주화운동’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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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이 제도적으로 정착된 역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일어난 사건의 목록이 아닙니다. 누가 그 사건의 이름을 결정할 것인가를 둘러싼 투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벤야민은 역사를 승자의 행렬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승리한 권력의 기록 아래에는 말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경험이 묻혀 있기 때문입니다.
7. 쿤데라의 프라하와 광주의 5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불러온 것은 좋은 연결입니다. 작품을 연애소설로만 읽으면 토마시의 자유분방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프라하의 봄과 소련의 침공을 배경에 놓는 순간, 사랑조차 정치적 의미를 얻습니다. 왜냐하면 전체주의는 의회만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사생활까지 침입하기 때문입니다. 광주도 그렇습니다.『화려한 휴가』의 인물들은 처음부터 역사적 인물이 아닙니다. 택시기사이고, 간호사이고, 신부이고, 백수이고, 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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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 장난치고, 술 마시고, 노래합니다. 국가폭력이 끔찍한 이유는 민주주의라는 추상적 개념을 침해해서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갈 권리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유는 거대한 이념인 동시에 아주 사소한 것입니다. 내 머리를 내가 결정하고,내 옷을 내가 고르고, 사랑하는 사람과 길을 걷고, 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권력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그 평범한 것들이 어느 날 사라지고 나서야 우리는 그것이 정치였음을 알게 됩니다.
8. “양아치도 인간이라는 걸 느꼈다”
그래서 이번 회의 주인공은 장용대라고 생각합니다. 박흥수 같은 인물은 처음부터 품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장용대에게는 별것이 없습니다.배운 것도 없고, 지위도 없고, 가족에게 자랑스러운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 역사가 인간에게 질문을 던지는 순간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그래도 나는 여기 남겠다.” 이것이 인간의 기묘함입니다. 좋은 사람이 반드시 용기 있는 것도 아니며, 부족한 사람이 결정적인 순간에도 부족한 것만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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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우리가 누구였는가보다 우리가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1980년의 봄은 죽음의 계절이면서 동시에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도 몰랐던 시민성을 발견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국가기록에는 당시 희생자의 직업이 무직자에서 회사원까지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고, 국가기록원이 보유한 당시 자료에서도 희생자의 대부분은 일반 시민이었습니다. 영웅들이 민주주의를 만든 것이 아니라, 택시기사와 학생과 노동자와 장사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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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영웅이라 생각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 뒤로 물러서지 않으면서 역사가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돌아보면 7080세대의 몸에는 여러 시대가 겹쳐 있습니다. 반공 포스터를 그리던 손, 교련 훈련에서 줄을 맞추던 몸, 규정 교복을 몰래 고쳐 입던 몸, 불법음반을 듣고 충장로를 어슬렁거리던 청춘. 그 몸이 훗날 민주주의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당시의 패션 집착과 반항을 단순한 철없음으로만 평가할 필요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어쩌면 아직 이름 붙이지 못했던 욕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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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당신들 마음대로 만들지 마시오.” 하지만 인간은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합니다. “나를 내버려 두라”에서 “우리 모두가 인간답게 살게 하라”로. 그 순간 반항은 정치가 되고, 개인은 시민이 됩니다. 장용대가 도청에서 발견한 것도 그것이었습니다. 양아치가 갑자기 성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장용대였습니다. 다만 마지막 순간에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혼자 마음대로 사는 자유만이 아니라, 타인의 자유가 짓밟힐 때 그 곁에 서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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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의 마지막 고백은 『화려한 휴가』 전체를 관통합니다. “덕분에 양아치 장용대도 인간이란 걸 느꼈다.” 어쩌면 민주주의란 거창한 제도 이전에 바로 그런 경험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타인의 인간성을 지키면서 비로소 깨닫는 것. 반항은 ‘내 마음대로 살겠다’에서 시작하지만, 시민적 저항은 ‘당신도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데까지 나아간다. 『화려한 휴가』의 장용대는 바로 그 경계를 넘어선다.
2026.8.28.fri.악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