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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문즉답
2022. 6. 18
이 시간은 여러분도 기다리겠지만 나도 많이 기다리는 시간이다.
요한복음 6장에는 떡 먹는 이야기가 나온다. 벳세다 광야에서 떡을 먹었는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먹었고 부스러기가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이다. 상징적인 표현이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많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는 말씀이 나왔다는 것이다. 우리 같으면 그 놀라운 광경을 보고 놀랐을 텐데 유대인들에게는 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사십 년 먹었다. 진수성찬을 먹던 사람이 시골집에서 어지간히 대접을 받아봐야 잘 차렸다고 하겠는가.
옛날에 어느 임금이 파천 때 도루묵이라는 생선을 먹었는데 너무 맛있게 먹어서 환궁한 후에 그 생각이 나서 가져오라고 했다고 한다. 바닷가에 가서 그 고기를 구해 요리를 해 드렸더니 먹고서는 맛이 없다며 도루묵어라고 하라고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너무 맛이 있으니까 고기 이름을 수어라고 하라고 했는데 환궁해서 먹어 보니 그 맛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도루묵이 되었다고 한다. 배부르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맛이 없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보리떡도 좋은 것인데 별로 배가 고프지 않은 사람들에게 보리떡을 줘 놓으니 크게 문제가 안되었던 것 같다.
떡에 관한 문제가 생겼다.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사십년 간 하늘로부터 온 떡을 먹고 살았다. 너는 무엇을 주겠느냐?”라는 말이 나왔다. 그때 예수께서 “그것은 먹고도 죽은 양식이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양식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그 다음에 하신 말씀이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5).”라는 말씀이다. 먹으면 죽지 않고 산다느니 영생을 한다느니 이런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무슨 양식이기에 먹으면 죽지 않는다는 것인가. 세상에 그런 떡이 어디 있겠는가.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말할 때 그런 비유를 사용하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로 가셨다. 거기 나는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는데 베드로는 거기 없다. 베드로는 십자가에서 죽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고 십자가가 싫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거기서는 자기를 찾아봐도 없다. 내가 그러했다. 십자가 얘기를 많이 했다. 막상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에게 가면 나는 거기 없다. 나는 십자가를 질 사람이 못되고 거기 참여가 안된다.
“내 살을 먹으라.” 하셨다. 그래서 ‘그렇지. 좋은 말씀이지. 믿을 것이 아니라 먹어야지. 믿기만 해서는 안되고 먹어야지.’라고 생각했다. 먹는다는 말 때문에 상당히 논란이 많았다. 지방교회에서 오기 전에는 먹는다는 말이 없었다. 그 사람들이 와서 먹는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먹기는 무엇을 먹느냐?’고 했는데 나는 그 말이 좋았다.
믿는다는 것과 먹는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다르다. 상대적으로 믿는 것은 객관적이고 먹는 것이 주관적이다. “그렇지. 먹어야 속으로 들어오지 믿기만 하면 되겠느냐.” 이것이 여러분에게 여러번 드렸던 말씀이다. ‘예수를 먹어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십자가에 가 보니 나는 없었다. 제자들도 가봤을 때는 자기는 없었을 것이다. 아무도 없었다. 혼자 십자가를 진 것이다.
십자가는 아무나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시기와 미움을 사서 빌라도에게 넘겨져서 처형된 사람이다.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죽은 것이 십자가다. 거기서는 나를 찾을 수 없었다.
기독교의 핵심이 십자가다. 십자가와 부활이 기독교의 핵심이다. 그러나 나는 거기 없다. 그래서 예수를 찾느라고 몇년 간을 헤맸다.
어디 가서 이분을 실제로, 직접 만날 수 없을까? 나는 그때 무엇을 먹은 것인가, 분명히 먹는다고 생각했는데 왜 거긴 없었을까? 무엇을 먹었던가? 내가 무엇을 먹고 먹었다고 했던가, 아니면 못먹었던가? 지금 생각해 보니 못먹었던 것 같다. 말만 그렇게 했지 먹을 수 없어서 못먹었던 것이다.
먹을 수 없는 문제다. 예수님을 떡 먹듯이 먹을 수 없었다. 그러니 없지 만일 떡 먹듯이 먹었다면 먹는대로 된다는 원칙에 따라서 그 자리에 가면 나도 있을 것 아닌가. 그러나 못먹었기 때문에 없는 것 아닌가. 일부러 먹지 않으려고 해서 먹지 않은 것이 아니다. “꼭 먹어야 된다.”고 몇번을 강조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없는 것을 보니 못먹었던 것이다. 먹고 싶어도 못먹은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먹게 되었다.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 있는 것을 보면 먹은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내가 이 복음을 전하려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주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내 간증이고 증거다.
음식을 먹고 맛이 있으면 전해서 함께 먹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 습관이다. 나는 지금도 누가 오면 꼭 먹여서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집사람은 도시에 살아서 그런 개념이 별로 없다. 늘 가게에서 늘 일을 했기 때문에 손님 대접을 할 일이 없었다. 나는 시골에서 살아서 누가 와도 무엇을 먹여 보내야 되지 그냥 보내면 미안한 생각이 든다.
우리는 잔치를 하면 먹는 것이 주다. 서양 사람들은 파티를 해도 먹는 것이 주가 아니고 커피나 마시고 양주나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고 노는데 우리는 꼭 상을 차려놓고 잔치를 해야 한다. 그것이 습관이기도 하고 관습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의 생각도 우리와 비슷한지 예수께서는 먹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지금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가 내 안에’가 된다. 먹기가 쉬워서 이렇게 된 것이다. 그때 보다 내가 더 열심히 했거나 충성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먹기가 쉬워서다.
다 돌아다녀도 먹을 데가 없었다. 예수님의 행적, 거기서는 내가 먹을 수 없었다. 그 좋은 것을 얻어다 나도 먹고 여러분에게 나누어주었다. 여러분은 잘 모를 것이나 나는 마치 새가 물고기를 잡아다 새끼들에게 먹이듯이 여러분에게 먹였다. 그래서 우리가 다 배불리 먹고 만족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했고 그런 교회가 되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떡을 만들려니까 안되고 눈먼 자를 뜨게 하려니 안되었다.
사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역사 가운데 이적을 행한 것이 거의 80%다. 말씀은 별로 없다. 중요한 말씀이 많지만 공자님 말씀, 석가모니 말씀에도 좋은 말씀이 많다. 그런 것으로 비교하면 그분들과 비교가 안된다. 그런데 단지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공자님도 먹을 수 없고 석가모니도 먹을 수 없다. 예수, 이 사람만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한 죽음의 자리에서 같이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보다 쉽게 그를 만날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여러분도 함께 이렇게 되기를 바란다. “이제는 예수 안에서 먹게 되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임경순
목사님은 귀신이 없다고 했는데 그 귀신이 사탄을 말한 것인가. 사탄의 존재가 없다면 아무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교회는 왜 완전한 연합이 안되는가.
이현래 목사
귀신이 없다고 한 것은 경순 자매가 자꾸 귀신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나도 귀신을 못보았다. 귀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경순 자매의 문제는 귀신에 시달리는 것이다. 그래서 귀신이 없다고 한 것이다.
귀신과 사탄은 다르다. 성경에 나오는 사탄은 사람을 속인 자, 거짓말 한 자다. 사탄을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그런 세력이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유혹을 받게 되는 것이다. “네가 이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라고 한 것은 선악이라는 부속적인 문제만이 아니고 하나님같이 된다고 속인 것이다.
신처럼 되면 뭐가 되는가? 안죽는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하신 것을 사람이 먹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금지하신 것이 여러가지가 있다면 모르지만 오직 한 가지만 금지 하셨는데 아담은 두말없이 먹었던 것이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해서 먹었다는 것이다. 이로 보아 정말 중요한 문제 때문에 먹은 것 같다.
우리도 어지간하면 먹겠는가. 계명도 다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못지킬 계명은 별로 없다. 마음에 없어서 그렇지 다 지킬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거하는 동산에서 오직 유일하게 이것만은 먹지 말라 하셨다. 다른 것은 임의로 먹지만 이것만은 먹지 말라 하셨는데 그것을 그렇게 쉽게 먹었겠는가.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다.
나도 처음에는 교회 안에서 시비가 많아서 ‘이것이 시비에 관한 문제구나. 이것이 교회를 방해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전에 내가 있던 교단에서 이런 문제로 4년 동안 시달렸고 결국은 그 시비 때문에 그 교단에 있지 못하고 나왔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번에 알고 보니 그것만이 아닌 것 같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처음에는 선악을 아는 문제로 인해서 혼란스러웠던 교회는 그 뒤로는 그런 문제가 없어졌다. 선악을 판단하지 않다 보니까 교회가 상당히 평안해졌다. 그래서 여러가지 방면에 있던 사람들이 와서 자유롭게 살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으로 먹지 말라 하신 계명을 어길만한 이유는 아니다. 그래서 선악과는 죽음과 관계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죽음을 드나들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든다. ‘만일 안죽고 살기만 한다면, 오래오래 산다면 내가 이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 이런 생각까지 해 보았다. 여러분도 경험해 보시면 알 게 될 것이다.
귀신과 사탄은 다르다. 경순이를 따라다니며 괴롭게 하는 것은 경순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귀신이다. 그러니 귀신이 없다고 하는 것이 맞다. 내일 또 만나면 또 없다고 할 것이다. 여러분도 경순이를 만나면 귀신은 없다고 하기 바란다.
류경미
성경에 인간들의 언어가 하나로 일치된 때가 두 번 있는 것 같다. 창세기 11장 1절에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다고 했는데 시날 평지에 모여 “하늘꼭대기까지 닿아 이름을 빛내자.”고 했고,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려와 보라.”며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제자들까지도 하나로 똘똘 뭉쳤다.
두 사건이 하나는 하늘에 오르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땅으로 내려와 보라는 것이다. 이 두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사람 예수라고 하셨다. 하늘로 올라가려는 육신으로 하나 되었고 내려와 보라는 언어로 똘똘 뭉쳤는데 둘 다 사람이다.
이 두 말의 차이와 두 사건 사람들의 다른 점은?
이현래 목사
상당히 어려운 질문이다.
사람이 말이 일치할 때가 좋을 때도 일치하고 나쁠 때도 일치한다. 원수졌던 사람도 뜻이 같아지면 일치한다. 성경에도 헤롯과 빌라도가 당일에 친구가 되었다는 말이 있다. 평소에는 안좋은 사이였는데 예수 사건을 놓고 당일에 친구가 되었다.
사람은 언어를 통해서 표현하니까 자기가 오르고 싶은데 못오르면 남도 못오르게 하려고 한다. 내가 오르고 싶은데 딴 사람이 올라가면 끄집어 내리려고 한다.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자기들도 하늘까지 올라가서 이름을 빛내고 싶은데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고 그리스도라고 하니까 시기가 나고 질투가 났을 것이다. 그래서 내려와 보라고 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사람이다. 한 사람이다. 자기가 오르고 싶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남이 오르는 것을 못보는 것이다.
공부를 하다가 옆에 학생이 자기보다 성적이 높으면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서 잠을 못자는 학생이 있다. 그래서 억지로 공부를 하는데 아는 사람이 항상 이등을 했다. 그래서 일등하는 사람을 보고 도전하고 이겨보려고 애를 썼다고 한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자기가 일등을 하고 싶으니까 그렇게 하는데 졸업할 때까지 일등을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서울대학교에 가서 박사가 되었다. 일등했던 사람은 의사가 되고 이등했던 사람은 박사가 되었다.
다 같은 사람이다. 바벨에서 “하늘에 오르자. 우리 이름을 빛내자.” 했던 사람도 이 사람이고 “내려와 보라.” 했던 사람도 이 사람이다. 때에 따라서 이러기고 하고 저러기도 하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유대인의 관원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기했다고 한다. 그것을 보면 ‘너 같은 시골뜨기가 그리스도라는 말이냐,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이냐?’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 밑에서 조롱했던 것이다.
사람의 심리가 다 그러하다. 오르고 싶은 사람은 남이 오르는 것을 못본다. 끄집어 내리려고 한다. 그런 이유도 있고 여러가지 이유가 있어서 사람의 말이 일치한다. 말이 일치한다고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꼭 말이 일치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딱 구별하기는 어렵다.
송영소
8개월 전쯤에 절에 가서 스님들을 데리고 오라고 하셨다. 나는 집사람도 못데리고 오는데 어떻게 스님들을 데리고 오느냐고 했더니 스님들도 얘기하면 오게 되어 있다고 하셨다. 이제야 답을 찾았다.
내 경험으로는 집사람이 16년 동안 송사를 했는데 새로운 복음을 알고 나서, 이 자리를 알고 나니까 집사람이 즉시 부드러워졌다. 십자가에 죽은 자리를 발견했는데 즉시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고 하나님이 해방되셨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니라 집사람이 튀어나왔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나는 돌로 떡을 만들자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살 자다.” 하시자 즉시 사탄이 물러갔다고 했는데 그 자리와 현재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새로운 복음의 자리가 어떻게 다른지?
이현래 목사
내가 말하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는 인생의 궁극적인 운명이다. 새로운 말이 아니라 처음부터 내가 해온 말이다. 아브라함은 백세에 아들을 낳았다. 낳을 수 없는 사람이 아기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삭은 눈이 멀어서 축복을 잘못했다. 어떤 사람은 이삭은 너무 편하고 한 번도 연단을 안받아서 노년에 실수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나도 옛날에는 그렇게 생각했든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만일 이삭이 눈이 밝을 때 축복했다면 절대로 야곱을 축복하지 않고 에서를 축복했을 것이다. 그래서 눈이 먼 다음을 축복을 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목적은 야곱을 축복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인간이 잘하고 잘못한 것을 그렇게 크게 관계하지 않고 하나님이 쓰신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잘못한 것이 없지 않다. 그런데 그것을 쓰신다. 우리가 최선을 다한다면, 내가 일부러 하나님을 맞서지 않는다면 내가 혹시 실수를 한다 해도 그것을 하나님이 쓰시면 은혜로운 것이 될 수 있다. 나는 이렇게 믿는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했을 때 시험한 것은 “너는 사람 아니냐.”라고 한 것이다. 사람인데 신처럼 행세하니까 한번 해 보라는 뜻이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을 보고 내려와 보라고 했던 것도 같은 말이다. 내려올 수 없는 줄 알면서 내려와 보라고 했던 것이다. 물론 속으로는 ‘내려왔으면’ 하는 소원도 있었다. 제자들은 ‘내려올 수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텐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겠는가. 별의별 사람들이 모였는데 결국은 내려오라는 말로 귀결되었다.
이것은 사람을 시험한 것이다. 사람이 별것 아니지 않느냐고 한 것이다. “사람, 너는 죽을 수밖에 없는데 나는 안죽는다. 그러니 너는 내 밑이다.”라고 한 말이다. “네가 하나님 아들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아들이다.” 이런 뜻이다. 희랍 세계에서는 유명한 사람을 보고 하나님 아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세계에서라면 “너는 별로 유명하지 않아. 내가 더 유명해.” 이런 말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어디 있는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천사보다 못한 인간을 상속자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다. 내가 본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내가 예수를 다 알겠는가. 나는 내 능력으로 이것도 저것도 못할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쓰시면 이렇게 쓰시고 저렇게 쓰실 수 있다.
나는 쓰실 없는 사람인데 쓰셨다. 나에게 무엇이 많이 있어서 쓰신 것이 아니다. 많이 배운 것도 없고 몸도 건강하지 못하고 그때 모든 것에 실패했다. 부름받을 때 내가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었으면 망설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집을 떠날 형편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혼자 객지에 두고 어떻게 떠나겠는가. 그런데 나는 어찌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라도 놔두고 떠나야 했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곳으로 가라 하신 것이 나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뭔가 있는 사람은 떠나기가 어렵다. 개화기 때 못살던 사람들은 도시로 나와서 뒤로 유명하게 된 사람이 있는데 잘살던 사람들은 안나왔다. 그래서 뒤쳐졌다. 예수를 따라온 사람들도 유명한 사람은 없다. 가난한 사람들이 왔다. 제일 유명한 사람은 니고데모였는데 왔다가 그냥 돌아갔다.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은 원천적으로 가난하다. 그런데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넉넉해. 많은 것이 있어. 지금 안가도 돼.’ 이것이 사람의 생각이다. 그런데 너무 급한 사람은 예수 앞에 왔다. “내 아들이 당장 죽게 되었습니다.” 하는 사람, 사마리아 여자 같은 사람, 이런 사람들이 급하고 살아야 하니까 예수를 붙잡고 따라왔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는 말이 있다. 하필이면 가난한 자에게 전파된다고 하셨을까? 넉넉하고 괜찮은 사람에게 전파되면 좋지 않은가? 기독교가 중국 당나라에 전파되어 당태종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러니 전도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왕이 받아들였으니 그 밑에 신하들은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경교다. 그런데 당태종이 죽고 얼마 못가서 경교는 없어져 버렸다.
그에 비해 우리 나라에는 상류층이 아니라 하류층에게 전파되었다. 양반들, 유학을 한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하류층이 받아들였고 그 중에도 여자들이 많이 받아들였다. 남존여비 사상이 심할 때여서 여자들이 한이 많고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어느 교회에나 여자가 많다.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서 시작된다. 물론 다음에는 다 되지만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된 자가 있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알 수 있다.
송영소 형제의 자매가 좋아한다니 다행이다.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좀더 앞으로 진행했으면 좋겠다.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이 찾던 사람이 나오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만나러 나오셨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왜 막아놓았는가? 하나님이 찾는 사람이 없으니까 막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찾는 사람이 나왔으니 막아 놓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거기 들어가려면 굉장히 어려웠다. 제물의 피를 받아서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갔다. 거기는 칠흑같은 어둠이 깔려서 아무것도 안보이는 곳이다. 하나님이 숨어계셨던 것이다. 자기를 지키고 계셨던 것이다. 화염검으로 동산을 가려서 문을 닫아 놓으신 것도 하나님이 자기를 지킨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올 사람이 왔으니까 하나님이 해방되신 것이다. 더 이상 사람을 두려워할 것도 없고 꺼려할 일도 없게 되었다.
사람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만 하나님도 사람을 두려워하실지 모른다. 종이 자리를 이탈해 버리면 무섭다.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을 때 종들이 나서서 주인을 죽였다. 마찬가지다. 그런데 찾던 사람이 나오니까 문을 여신 것이다.
지성소 안에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 홀로 계신다. 아마 송영소 형제는 안되는 것이 열리니까 그렇게 표현한 것 같다. 말도 안듣고 늘 불화하고 화합이 안되던 부인이 마음이 풀어지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데 그것은 아마 송영소 형제가 낮게 내려앉으니까 아내가 편해져서 그런 것 같다.
들어보니 파마를 한다고 15만원을 썼다는데 그 동안에는 송영소 형제가 너무 짜게 굴었기 때문에 못해보던 것을 해 본 것 같다. 좋은 관계가 된 것은 고마운 일이다. 내가 낮아지면 남도 낮아지고 내가 무장해제를 하면 남도 무장해제를 하게 마련이다.
이영미
목사님 덕분에 그리스도를 잘 누리고 실제로 목사님 안에서 실재의 삶을 살아서 행복하다. 목사님은 이 복음의 뿌리다. 목사님을 통해서 대구교회를 잘 누리고 있고 내려오지 못한 예수, 접점의 자리를 누리고 있다. 성도들을 목사님처럼 보살피고 살아오신 것이 나에게까지 온 것이 최고의 행운이다.
답답한 것은 가창골에, 이현래 목사님 안에 갇혀 있는 것 같다. 최첨단 교회를 누리는데 왜 이현래 안에 갇혀있을까? 외부에서는 가창골에서 개골개골하는 개구리 소리로 들린다고 한다. 바깥에 사람은 몰라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좋으면 함께 누리고 싶고 나누고 싶은데 한계가 있다. 이 문제점을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이현래 목사
좋은 질문이다. 내가 이것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 가운데 중요한 이유가 있다. 여러분은 나를 보고 교회에 왔다. 다른 사람들을 보고 온 사람도 있지만 그 중심은 나다. 그런데 나는 한계가 있다. 더 이상 없는 한계가 있다.
어떤 사람들이 묻기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라고 한다. 나는 사람으로 부름받아서 사람답게 살면 되지 않느냐고 대답했다. 나는 그것으로 어느 정도 만족했고 ‘이만큼 살면 안되나. 사람답게 살았으면 되지 않나.’라고 생각했지만 형제들은 나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어디로 데려갈 수 없다. 내 안에 포함된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숫자적으로나 질적으로 한계가 있다.
그런데 이 자리, 예수님이 계신 이 자리는 아무나 제한없이 들어올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나와 함께 이 자리에 들어오면 내 짐이 없어지는 것이다. 모두 예수 안에 포함되면 나도 동일한 사람으로 함께 참여가 되니까 내 짐이 없어진다.
그래서 나는 이 복음을 시급히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언제까지 살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두세번 혼수상태에서 죽음을 지나왔다. 잘못되었으면 죽었다. 요즘 의술이 발달하고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셔서 살아났다. 언제 어찌될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 나만 바라보고 있다가 내가 죽어버리면 어찌하겠는가.
바울이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라고 했다. 뚜쟁이가 아니라 자기도 함께 시집을 가겠다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과 함께 시집을 가고 싶다. 내가 죽기 전에 모든 사람이 빨리 참여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 안에 들어가면 나라는 사람이 따로 없다. 대구교회 목사라는 것이 없다. 다 같다. 네가 나고 내가 너다. 아무리 많아도 다 하나다. 이런 세계를 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물고기가 마치 바다로 가는 것처럼 넓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세계 안에서 내 세계가 너무 넓어졌다. 그래서 누구를 봐도 똑같다. 우리 교회에 안나오는 사람을 봐도 ‘저 사람도 나와 같구나. 같은 사람이구나.’라고 보인다.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이렇게 보인다. 얼마나 자유로운가. 얼마나 내 영역이 넓어졌는가. 그러니 가창골에 갇힌 것이 아니다. 나는 누구를 만나도 한계가 없다. 너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니까 조건이 없어졌다. 내가 가진 조건도, 네가 가잔 조건도 없는 자리다. 예수님도 자기 조건이 없어진 자리다. 그러니 내 조건이 있을 것이 없다. 조건이 없으니까 다 하나인 것이다. 우리는 그 조건 때문에 너와 내가 갈라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건없는 이 자리에 오니까 갈라질 것이 아무것도 없다. 특별한 자랑도 없고 자랑이 아닌 것도 없다.
여기서 새로운 생명, 새로운 세계, 새로운 사람이 있다. 로마서 6장에는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다. 여기서 살면 새 생명이다. 새 생활이고 새로운 영역이다. 그래서 판을 바꾸라는 것이다.
다른 판이다. 그 전에 판은 부족하지만 내가 여러분을 인도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 판은 내가 인도자가 아니다. 함께 시집가는 처녀다. 그러니 얼마나 넓어졌는가. 나는 너무나 자유롭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올수록 나와 여러분은 가까워지고 친해진다. 전에는 아무리 해도 거리가 있었다. 여러분은 ‘아이고, 목사님은 나보다 낫다.’고 했다. 이제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이런 세계니까 죽기 전에 내가 아는 사람들을 먼저 이 판 안으로 초대하고 싶다.
양승숙
새판으로 옮겨주셔서 감사드린다. 질문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이 살아 생전에 유일한 기도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는 것이었다. 목사님 소원도 목사님이 없어도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가 목사님 안에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개인 안에 이루어지는 것인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궁금하다.
이현래 목사
옛날 사람들은 내심천국(內心天國)이라는 말을 했다. 앞으로 갈 천국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천국이라는 것이다. 옛날에 경건한 신자들은 이런 생각을 했다. 내심천국도 있고 내세천국(來世天國)도 있겠지만 하나님 나라는 지금 있는 것이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너희 가운데 있다 하셨다(눅17:21).
이 천국은 만유가 하나된 자리다. 결국 나라는 사회다. 나 혼자 나라가 될 수는 없다. 인류가 하나 되는 자리가 하나님 나라다. 어디서 인류가 하나 되겠는가. 이 자리밖에는 없다. 혹시 더 좋은 나라가 있으면 가지고 오시기 바란다. 그러면 우리가 다 한꺼번에 그리 옮기면 되지 않겠는가.
나는 이 나라가 제일 쉬워서 이 나라를 전하는 것이다. 이리 모이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아니겠는가. 나라라는 말은 통치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한꺼번에 거느리는 나라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고 아들을 통해서 만유가 누리도록 하셨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모든 것을 누린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다.
이지숙
구속의 복음을 알고 새로 살아야 가치가 있다고 하셨다. 아멘이다. 그러나 목사님이 느끼는 것과 내가 느끼는 것에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이 복음을 더 깊이 받아들이고 싶은데 어찌해야 하는지?
이현래 목사
구속의 복음이라면 더 쉽다. 기독교 생활은 구속으로부터 시작된다. 종교개혁은 믿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당시 개혁의 초점이 가톨릭의 행위주의에 대항해 싸웠기 때문에 그런 이슈를 내걸었지 싶다. 그런데 믿음은 처음부터 믿음이 아니다. 처음부터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보면 믿음이 아니라 구속이 먼저다. 구속이 돼야 믿음이 있다.
그런데 믿음을 가지려고 하니 되겠는가. 기독교인은 누구나 믿음을 강조한다. CCC에 가니까 모든 것을 믿음으로 하려고 했다. 거기는 믿음이 정말 좋은 사람이 많았다. 나는 믿음에 열등생이다. 남이 믿는 것을 나는 잘 안믿어졌다.
그래서 내가 믿을 수 있는 예수를 찾은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서 못내려오고 죽은 예수를 만나니까 내가 믿을 수 있고 알 수 있다. 예수는 아는 사람인 것이다.
전에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일 때 떡은 잘 얻어 먹었어도 그 사람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었다. 죽은 나사로를 죽은지 나흘이 되었는데 살리셨다는 것은 놀랍지만 그 사람은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너무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은 이 사람은 나와 별로 다른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친근감이 생겼다. ‘야, 여기 있구나. 여기서 만나는구나.’ 예수님은 다른 데 다 계셨겠지만 내가 만날 수 없었다. 그런데 왜 내가 이 말을 하는가? 내가 만날 수 있는 예수를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가 아니라 내가 만날 수 있는 예수다.
여러분도 만날 수 있는 데서 만나면 된다. 만날 수 없는 데서 어떻게 만나겠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려면 성전에 가야 했다. “나를 만나려면 성전으로 오라.”고 법으로 정해 놓았기 때문에 거기 가면 하나님을 만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것이 없다. 어디 가서 만난다는 것이 없다.
그래서 믿음으로 만나려고 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안되는 사람들이 신비주의에 빠진다. 신비주의 속에서 예수를 만나려고 하는데 거기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사람으로 오셨으니 사람이신 예수를 만나야 하는데 사람이신 예수는 내가 너무나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와서 보면 알 것 같은 사람이다. 그러니 결혼을 하지 모르는 사람과 어떻게 결혼하겠는가. 아무리 똑똑하고 훌륭해도 전혀 모르는 사람과 결혼이 되겠는가. 앞으로는 점점 더 안될 것이다.
구속의 복음이 먼저다. 그 다음이 믿음이다. 그러니까 가장 만나기 쉬운 예수를 찾으면 된다.
우점덕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 하셨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여자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다.”고 하자 뱀이 여자에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했다.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다는 뜻인데 뱀이 “너희가 결코 죽지 않는다.”고 할 때의 죽음도 그런 의미인가?
이현래 목사
상당히 어려운 질문이다.
관계가 끊어진다는 말은 직접적으로 관계가 끊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죽는다고 한 것을 해석한 것이다. 아담은 그 후로도 죽지 않았다. 그 후손들은 800년 900년을 살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말한 것이라고 알아듣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네가 이것을 먹으면 나와의 관계가 끊어진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죽음은 육신의 죽음이든, 혼의 죽음이든 끊어지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말 자체가 관계가 끊어졌다는 말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슬픈 것이 그것이었다. 숨을 거두시는 순간에 나는 다시는 어머니라고 부를 사람이 없다는 것이 슬펐다. 허공에 대고 부르겠는가. 그것이 슬펐다. 나는 다 큰 사람이지만 어머니라고 부를 대상이 없어졌다. 끊어져버린 것이다. 육신의 죽음도 끊어진 것이고 다른 죽음도 관계가 끊어진 것이다.
이것을 굳이 구별하려고 하면 영적인 언어들은 구별하기가 어렵다. 수학적으로 구별하기도 어렵다. 그러니까 알아들어야 하는 것이다. 아까 요한복음 6장을 말했는데 들어도 알쏭달쏭하실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얘기하다가 내가 주는 살을 얘기하다가, 먹으면 영생한다고 하니까 헷갈린다. 잘 새겨들어야 한다.
둘 다 끊어진 것이다. 그런데 육신이 끊어진 것도 있고 영적으로 끊어진 것도 있고 관계가 끊어진 것도 있고 여러가지가 있으니까 상황에 따라 잘 골라서 사용하고 골라서 알아듣기 바란다.
염경선
50여년을 교회에 있으면서도 이렇게 현장에서 묻고 대답하는 것은 처음이라 가슴이 너무 뛴다. 나같이 나이 많은 자매가 나오려니 망설였는데 힘을 내서 나왔다.
지난 일요일 말씀을 듣고 메모
즉석에서 질문할 때는 이런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메모를 해 보았다. 일요일 말씀 중에 형제들이 목사님만 있으면 된다는 말에 많은 부담을 가졌다고 하셨다. 우리가 목사님만 있으면 된다고 하면 기쁘실 줄 알았는데 부담을 가지셨다니 그것도 이해는 되는데 오늘 목사님 말씀대로라면 부담 가진 시간이 40여년이 넘었을 텐데 한 번도 부담스러운 느낌을 갖지 못했다.
목사님이 희노애락을 잘 드러내지 않는 분이지만 그 부담스러운 시간이 40년이 넘었는데 한번도 내색을 안하셨다. 왜 우리는 느끼지 못했을까?
목사님은 예수님의 인격을 우리에게 늘 보이셨고 한 번도 하나님과 예수님을 갈라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으로 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알겠는데 예수님은 몰랐다고 하셨는데 하나님과 예수를 따로 말씀하신 것인가?
목사님 자신을 말하면 나는 목사님 자신을 알고 예수를 알았다. 또 예수를 아니까 하나님을 자연히 예수의 아버지로, 근원으로 알게 되었다. 그런데 목사님은 이제야 만난 예수를 어떻게 그리 시원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셨는지, 왜 부담스러운 목사님을 느끼지 못했는지?
이현래 목사
내가 부담이라고 한 것은 싫어서가 아니다. 내가 전부가 아닌데 마치 나를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서 부담스러웠다는 말이다. 물론 여러분은 나를 보고 예수를 알았고 예수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것이 당연하다.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것 때문에 외부에서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맞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나를 알고 따라온 사람들에게 참으로 감사했다. ‘나 같은 사람을 보고 저렇게까지 하는구나.’ 하고 더 이상 감사할 수 없었다. 지난번에도 말했는데 나는 사람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말을 한 적도 있다. 그에 대해서 이유 없이 예 하는 사람도 보았다. 인간 세상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 우리 사회를 모르는 사람들은 오해하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았다.
경선자매 같은 경우는 내가 한 집에서 오래 살았다. 내가 대구에 남은 이유도 이 부부때문이었다. CCC에서 나와 갈 곳이 없었다. 전부 학생들이고 객지에서 온 사람들은 자취방이고 내가 기거할 데가 없었다. 여관에 있겠는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그냥 집에 돌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부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대구에 남았던 것이다. 이 부부도 객지였지만 내가 먼저 집이 있다고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의 거취가 결정되면 그 다음에 내가 행동하려고 했다. 그랬던 것이 오늘까지 남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랑과 은혜를 잊을 수 없다.
부담스럽다는 말은 안좋아서 한 말이 아니다. 내가 전체를 다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말했듯이 더 큰 데로 옮겨야 한다. 우리가 다 누구도, 우리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자리로 옮겨야 할 것 아닌가. 내가 죽을 때가 가까워서 그런지 모르는데 이런 생각이 든다. ‘이제는 주고 가야 되겠다. 여러분이 마음대로 놀 수 있는 자리를 소개해 주고 가야겠다.’
사람들이 대부분 예수님과 하나님을 구별하지 않고 믿는다. 나는 확실히 구별되어 있다. 왜냐하면 처음에 나는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찾다가 ‘나는 내일 일도 모르는구나. 내일 일도 모르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안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왔다. 나에게서 거품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땅바닥에 주저앉은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은 편했다.
그때부터 교회를 기쁘게 다녔다. 그 전에는 교회에 가면서도 ‘내가 왜 가지? 하나님도 모르는데 왜 가지?’ 했지만 안가면 찝찝하니까 마지못해 갔는데 그 후로는 교회에 가는 것이 당연했다. 알아서가 아니라 몰랐는데도 그 현실이 당연해졌다.
그리고 나를 불러내셨을 때도 예수님이 나를 불러내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도 그렇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내셨다. 요소요소에 사람들을 배치해 놓고 내가 가는 길을 열어주셨다. 나는 스스로 열고 갈 사람이 못된다. 그런데 골목골목마다 딱 하나님이 지키고 있는 것처럼 역력하게 나를 인도해 주셨다. 나는 그분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모르기는 하지만 그런 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생각은 안해보았다. 나는 기도하려면 하나님께 했지 예수님께 기도한 적이 없다. 예수님은 내가 만났을 때 그냥 사람이었다. 교회를 다닌 사람치고는 특이하게 나는 예수와 하나님은 구별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을 알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다면 물로 포도주를 만들거나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거나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하나님이 못하실 것이 있겠는가.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끝까지 예수님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하나님이라고 믿어본 적이 없다.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나의 구속을 위해 필요한 분이다. 만일 내 경우에 구속을 몰랐다면 ‘예수님은 왜 오셨을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구속 때문에 예수님이 없으면 절대로 안되는 것이다.
다른 것은 하나님이 다 하실 수 있다. 내가 굶지 않게 해 주실 수도 있고 다른 것도 다 할 수 있는데 구속만은 하나님이 못한다. 사람이 아니면 구속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예수는 구속이 전 사역의 목표고 초점이다. 이것을 빼놓고 예수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이 구속의 주님을 소개하는 것이다. 이 자리가 우리가 다 하나되는 자리다.
여러분이 처음에는 누구를 보고 교회에 왔다. 우리 교회에서 아브라함이라 하는데 결국은 나를 보고 온 셈인데 이것은 한계가 있다. 무한정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한계가 없는 세계로 여러분을 인도하고 싶다. 거기 가면 다 하나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도 “너와 나는 하나다.”라고 한다. 이런 입장에서 말을 하니까 너무나 자유롭다.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똑같다.
사람들이 나에게 올 때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긴장하고 오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내가 전혀 그런 생각이 없이 말을 하니까 한참 얘기를 듣다보면 저절로 무장이 해제되어 나갈 때는 자연스럽다.
우리 세계가 이런 세계다. 이 세계는 너와 내가 따로 있는 세계가 아니라 네가 나고 나가 너다. 이런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구속이 필요하다.
나는 예수를 어떻게 만날까 하다가 만났는데 와 보니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도 충분한 자리다. 예수는 우리를 포함하신 분이다. 석가모니도 나를 포함하지 못하고 공자님도 나를 표함하지 못한다. 그분들이 훌륭하기도 더하고 좋은 말도 더 있고 능력도 더 있을지 모르지만 나를 포함할 사람은 예수밖에 없다.
내가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으로 한 자리에 있고 포함되려면 예수가 필요하다. 내가 따로 똑똑해 지려면 예수 안에 있으면 안된다. 다 똑같아져 버리니까 안된다. 똑똑해지려면 유아독존이 되든지 성인이 되든지 해야 되지
공자님 제자 가운데 성인 반열에 들어간 분이 많다. 학문에 있어서 아주 탁월한 분들이다. 우리가 잘 아는 주자는 학문적으로 유교 전체에서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분이다. 그렇게 차이가 생긴다. 부처님 밑에도 그런 제자들이 있다. 그러나 예수 안에는 아무도 따로 없다. 베드로도 바울도 따로가 아니다.
예수 안에는 다 하나다. 다 하나인 자리, 이 자리로 우리를 이끄신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였다. 나는 여기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발견했다. 어떻게 쓸모없는 인생을 가지고 이렇게 귀중하게 만드셨는가! 다 버린 헌 것을 갖다가 어떻게 위대한 것을 만들어냈는가.
공부를 잘하려면 타고나야 한다. 예체능은 말할 것도 없다. 노력만으로는 안된다. 머리 좋은 어떤 형제가 전교에서 일등을 해서 머리가 좋은 줄 알았는데 대학에 들어가서 보니까 자기보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했다. 그는 책을 세 번을 봐야 외워지는데 어떤 학생은 한번만 보면 다 외웠다는 것이다. 의과대학이니까 외워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사람의 재주가 어디까지인지 모른다. 차별이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예수 안에만 차별이 없다. 아무리 차별없게 살자고 부르짖어도 안된다. 차별을 없앨 방법이 없다. 구속 안에만 차별이 없다. 얼마나 자유롭고 좋은 세계인가!
내가 무슨 특별한 것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왜 이 사람을 보냈는가? 그 원인이 다 여기 있다. 나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했는데 왜 그런 사람들이 필요했던가? 이제 보니 구속 때문이다. 잃어버린 사람을 찾기 위해서 이 사람을 찾았던 것이다. 나도 어쩌면 쓸모없는 사람인데 하나님은 나를 쓰셨다. 나는 항상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별것도 아니고 쓸모도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쓰셨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도 이렇게 쓰는 것이 맞지 않은가.
나는 고물상을 좋아한다. 고물상에는 쓸만한 것인데 쓸모가 없어져서 버린 것, 재활용할 것이 많아서다. 한번은 약탕기 하나를 오백원을 주고 샀다. 그것을 몇년을 썼는데 쓸 때마다 고소했다. 버려진 것을 몇 년을 썼으니까 기분이 좋았다. 나는 가까운 데 고물상이 있으면 늘 가보고 싶다. 제주에서 영호 형제가 고물상을 하는데 거기 가 보면 아까운 것이 많았다. 고물상에서는 그런 물건을 따로 작업을 한다. 그래도 작업비가 충분히 빠진다.
하나님의 지혜는 자기가 지으신 사람을 잃지 않고 찾으려면 잘난 것으로는 안되니까 버린 것을 가지고 하셨다는 것이다. 나도 생각해 보니까 천재들이 좋은 것, 하나님의 사랑이니 희생이니 하는 것들은 다 가져가 버리고 쓸모없어서 버린 자리가 내 몫이 되었다. 못내려온 자리는 버린 자리다. 그러니까 내 차지가 된 것이다. 내가 잘나서 그 사람을 만났겠는가.
잘났으면 더 좋은 자리에서, 누구에게도 자랑스러울 자리에서 만났을 것이다. 부활한 자리에서 만났더라면 들고 나가서 “내 주님은 부활하신 분이요.”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그럴 자신이 없어서 못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말씀할 때도 사람에게 인격을 입히시는 분을 말했지 피켓을 들만한 분을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너무 쉬운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어렵게 생각한다. 너무 쉬운데, 보기만 하면 되는데……,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쳐다 보기만 하면 살아난다고 하셨다. 그래서 독사에 물린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살아났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자기로 비유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6).” 하셨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말이 나온다. 무엇을 이처럼 사랑하셨는가? 사랑하신 것이 많지만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랑하사’가 지금 생각하니까 ‘구속의 주님으로 주셨구나. 만민이 함께 할 자리를 나에게 주셨구나.’라고 생각된다.
김경미
목사님 말씀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목사님에게 머물지 말고 예수께로 가라는 말로 들렸다. 목사님의 갈망이 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인데 숙제가 생겼다. 이 말을 안하면 안되는데 어떻게 풀어야 할지 숙제다. 종교인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이현래 목사
전도를 하려면 상대방의 형편에 맞춰서 상대가 알아듣는 말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가 폭넓게 알고 있어야 때에 따라 적용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그렇다. 실력이 충분해야 응용이 가능하다.
누가 우리 교회 자매와 결혼한다고 왔기에 교회에 가보았느냐고 물으니 한번도 안가보았다고 했다. 옛날에는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교회를 한번도 안가보았느냐고 시작했을 텐데 “교회에 가는 이유는 분수를 알려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 말을 듣더니 한쪽 귀를 열었다. 그래서 “사람이 분수를 알면 무엇을 해도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분수를 모르면 무엇을 해도 실패한다.”고 하니까 또 한쪽 귀를 열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결혼하면 오기로 했다.
교회 오면 인간의 분수를 안다. 이것이 구속이다. 꼭 구속이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상황에 따라서 그 내용을 말할 수 있다. 내가 충분히 소화해야 이 말이 가능하다. 다른 말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꼭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했다는 말을 안해도 된다. 그래도 속에는 이것이 있어야 되지 이것도 없이 하면 안된다. 속에 이것이 있어서 결정적인 순간에 나와야 한다. 앞으로 기대가 된다.
김희영
내가 숨쉬고 살아있는 이유가 목사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육신적으로도 목사님을 만나 말씀을 듣고 살아났다. 목사님이 내 생명으로 보였고 그 생명 안에서 내가 알아졌고 목사님과 하나로 발견되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도 하나로 보여진다.
그런데 나로서는 부족하다 하시니 이 부분이 궁금하다.
이현래 목사
또 다시 말하지만 우리 교회가 전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내 안에 포함된다 해도 내가 포함할 수 있는 사람은 한계가 있다. 이 세상에 사람이 얼만가. 이것만으로 하나님 나라가 되겠는가. 나 같은 사람이 많아서 군대를 많이 거느리고 오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누구라도 다 올 수 있는 자리가 예수 안이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새로 만나기 때문에 이것을 재창조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창조자시고 예수는 구속자다. 사람을 원위치로 되돌려놓으신 분이다. 그래서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상속자를 아들이라고 한다.
나는 이렇게 돼야 우주 질서가 잡힌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사람, 하나님은 하나님, 천사는 천사로 갈라져야 한다. 갈라져서 각자 자기 역할이 있어야 온 세상이 평안할 것 아닌가.
섞여 있으면 혼란스럽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셨다고 했다. 땅이 혼돈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물에 덮이면 아무것도 못한다. 어지럽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우리 생명을 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확실하게 갈라져야 한다.
회사에서도 직원들의 임무가 갈라져 있어야 되지 뒤섞여 있으면 맨날 싸운다. 우리는 9시에 출근하면 6시까지 근무해야 하는데 미국은 선진국이라서 그런지 다르다. 우리는 놀든지 일하든지 회사에 있어야 되는데 미국 사람들은 하루에 일할 분량이 정해져 있어서 2시간만에 마치면 퇴근해도 되고 6시까지도 못하면 밤을 새워야 한다. CEO는 그 일이 얼마나 걸리는지 알고 있으니까 하루 일할 것을 주고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집에 일이 있으면 늦게 출근해도 되고 일찍 가도 된다. 일만 마치면 된다. 그러니 조용하다. 출근이 늦었느니 어쩌니 할 필요가 없이 조용히 자기 일만 하면 된다.
우주 질서도 그래야 평안해지고 교회도 그래야 조용하다. 자기 할 일은 자기가 하면 간단한데 이것 저것, 내 일 네 일이 섞여 있으면 교회가 시끄럽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창조자시다. 그가 없으면 우리도 없다. 만유가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누군가. 이 혼란한 땅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서 아버지께로 가는 사람이다. 구속자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 아주 명백하게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 했다. 우리가 언제 들어갔는가? 그런데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 하였다. 구속을 해 주셨다고 하지 않고 구속함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 안에 있는 것이 구속이다. 그 안에 있는 것이 원위치로, 인생으로, 참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쉬운가!
좋은 질문을 해주셔서 감사하다. 다음 시간에는 더 좋은 질문으로 내가 쩔쩔매게 해 주시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