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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이야기
<2>디아스포라 흑산도 사람들이 전하다
지난 설 전에 영산포 '홍어1번지'에서 솔잎막걸리와 홍어를 함께 들었던 윤여정씨는 나와 알고 지낸 지도 꽤 오래 되었다. 나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토박이다. 사람들은 그를 '윤박'이라고도 부른다. 해박한 향토지식을 존중한 표현. 지명연구서를 두 권이나 출간했다.
지난 13일 홍어1번지에서 다시 만났다.'비는 추적 추적 내리고…' 술 마시기 좋은 날이었다. 나주가 광주에서 약 20㎞ 거리여서 점심시간에 만나기 좋은 거리였다.
▶영산강변에 유채꽃이 피어있다. 영산포의 전경이다. 고향을 어쩔 수 없이 떠나온 디아스포라 흑산도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일구었던 곳이다. 1872년 제작한 '전라우도나주지방흑산도지도'(규장각 소장)를 보면 영산도가 딸린 대흑산도에서 나주까지 水路280里, 陸路110里를 합하여 390里였다.
"이곳 영산포에 냉산이란 곳이 있어요. 내영산을 줄여서 부른 것이요. 영산현의 안쪽 마을이라 '內榮山'이라 한 것이제."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영산포, 즉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신시가지와는 구분되는 곳이다. 내영산은 고려시대 영산현이었다고 했다. 흑산도 사람들이 왜구를 피해 이곳으로 집단 이주해 살았던 곳이라고 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영산폐현(榮山廢縣)은 주의 남쪽 10리에 있다. 본래 흑산도 사람들이 육지로 나와 남포(南浦, 즉 지금의 영산포)에 살았으므로 영산현이라 했다.’
조선 중종25년, 즉 1530년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나주목 부분의 자료이다. 오늘날 삭혀서 먹는 홍어의 본향인 (나주) 영산포와 홍어의 주산지인 흑산도가 연결되고 있다. 홍어는 바닷고기. 어떠한 식으로든지 유통과정이 없으면 내륙에서 먹을 수 가 없는 것은 지당하다. 영산포에서는 언제부터 홍어를 먹었던 것일까. 그것이 흑산도 주민들의 이주와는 관계가 있는 것일까.
▶빨간색 원안의 섬이 바로 영산도. 글자가 거꾸로 되어 있다. 永山島이다.
이 지도는 1872년 고종대 병인-신미 두 차례의 양요를 겪은 뒤, 국방을
강화하고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제작되었다. 규장각 소장
우선 흑산도 사람들이 뭍으로 나온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고려말기에 접어들면 왜구가 우리나라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국가적 문제였다. 고려는 당초 적이 침입해 오는 길목에 위치한 섬에 군사와 주민들을 들여보내서 이들로 하여금 섬을 방비하도록 했다.
그러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왜구침입이 더욱 극성을 부리자 서남해의 주요한 섬들에 있던 관청(읍치소)을 육지로 옮기고 사람들도 강제로 옮겨 살도록 했다. 섬에서 살던 사람들을 더 이상 살지 못하도록 강제이주정책을 편 것이었다. 섬을 비우는 ‘공도(空島)정책’이었다.
나주를 '천년 목사(牧使) 고을' 이라 한다. 호남에서 왕건을 도왔던 곳으로 나주 출신 장화왕후 오씨 사이에 태어난 혜종이 왕건의 뒤를 이었다. 고려시대 나주는 전국 8목의 하나였다. 그야말로 전라도의 중심지였다. 이 때 흑산도를 비롯한 서남해 도서지역의 대부분의 섬들은 나주목의 관할이었다.
나주 목사의 관할 아래 있었던 섬들 주민들은 강제로 뭍으로 나와야 했다. 백제시대부터 관청이 있었던 흑산도, 압해도, 진도, 장산도 등지 사람들이었다. 그 강제 이주지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흑산도 사람들의 강제이주지는 나주에서 남쪽 10리에 있는 ‘영산폐현 ’이라고 했다. 원래 장산현 사람들은 나주 남쪽 20리 떨어진 곳으로, 압해현 사람들은 나주 남쪽 40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왔다.
그러면서 강제이주지의 이름도 옛 이름을 따와서 영산현, 장산현, 압해현으로 그대로 불렀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만들 당시에는 이런 현들이 없어져 ‘폐현’으로 기록된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곳에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고, 관청을 없앴다는 뜻이다.
흑산도 사람들은 바닷길을 따라, 다시 강물을 따라 나주에 까지 왔으리라. 왜구의 침입과 약탈에 시달리다 급기야는 나라의 명령에 따라 삶의 근거지를 옮길 수밖에 없는 아픔을 지닌 ‘디아스포라’가 아니고 무엇이랴. 고향을 잃은 자, 그러나 그들에겐 지명으로 전하는 그들만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다.
흑산도 사람들의 강제이주지이자, 새로 일군 터전은 고향의 이름을 따와 영산이라고 했다. 고향인 흑산도 인근 영산도(永山島)에서 따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영산도는 대흑산도와 소흑산도 사이에 있는 섬으로, 흑산도에 딸려 있다. 대흑산도에서 직선거리로 2.3㎞ 떨어져 있다. 흑산도에서 바로 보인다. 면적은 2.2㎢, 해안선 길이는 7.9㎞이다. 타향살이를 하던 이들은 영산홍이 피어나던 고향의 섬을 잊지 못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새로운 터전, 즉 영산의 앞을 지나는 강을 영산강으로, 그 강의 포구를 영산포라 했다. '永山'에서 '榮山'으로 한자의 변용과정을 거쳤다. 원지명 발음은 '영산'이었던 것이다.
▶위쪽 희미하게 보이는 섬이 영산도이다.
대흑산도쪽에서 촬영했다. 윤여정씨 제공
바닷가 사람으로 부대끼며 누대에 걸쳐 먹어왔던 홍어를 전한 것이었다. 먹고 마시는 음식 역시 사람들의 원형질을 내보여준다. 흑산도 사람들의 원형질을 상징하는 것은 홍어였을 것이다.
뭍사람들은 유배지로 가는 길로 인식했던 그 바닷길을 따라, 다시 남도의 젖줄인 (영산)강을 따라 올라왔을 때에도 그들의 원형질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리라. 나주목 영산의 흑산도 사람들은 홍어를 매개로 고향과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온 섬사람들은 그 고향을 버리지 않았다. 기회만 있으면 나라의 감시망을 벗어나 돌아가기도 했다. 섬과 바다가 주는 혜택들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관리들의 눈을 피해 몰래 섬을 출입하면서 토지를 경작하기도 하고,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기도 했다.
나주 영산에 정착한 이들과 후손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지 흑산도 앞의 영산도로 다시 돌아간 이들, 그리고 양쪽을 오가는 이들 사이에는 한 뿌리를 가진 동향의식을 바탕으로 수산물거래와 유통이라는 교역시스템이 가동하지는 않았을까.
흑산도 사람들이 애초 홍어의 단서를 제공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역시 물길을 이용한 교역체제가 뒷받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민간의 장시(場市)가 생겨난다. 그 장시가 가장 일찍 발달한 곳이 나주와 무안이었다.
조창(漕倉)이란 것이 있었다.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을 서울로 실어 나르기 위해 보관하던 창고다. 영산창이 있었다. 고려공양완때인 1390년부터 1512년까지 조창의 기능을 담당했다.이후 서울과의 거리가 멀다 하여 영광 법성창으로 기능이 옮겨졌다.이미 고려말 물길을 운송로로 국가가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조창은 육로와 물길(바다이든 강이든)의 결절점이었다.연결고리이자 매듭이 지어지는 곳에서 교역은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었다고 짐작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서거정은 “나주는 전라도에서 가장 커서 땅이 넓고 민물(民物)이 번성하다. 땅이 또한 바닷가라 하여 벼가 많이 나고, 물산이 풍성하여 전라도의 조세가 모이는 곳이다. 사방의 상인들이 몰려드는데…”라고 했다. 김종직도 “생선 파는 바다 저자(海市) 시끄럽고, 우차(牛車)는 디굴디굴 마을로 돌아가는 구나”라고 했다.
디아스포라 흑산도 사람들은 바닷길, 물길을 따라 홍어를 비롯한 해산물을 가져왔으리라. 그 길은 하루, 이틀의 길이 아니었다. 여러 날을 거쳐 물길 따라 배에 실려오는 홍어는 자연스럽게 삭혀졌을 것이다. 바로 회로 먹던 홍어는 삭혀서 ‘톡’ 쏘는 맛을 나주목 영산(폐)현에서 새롭게 냈으리라. 자신들도 미처 고향에서 알지 못하던 새로운 맛의 창출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입맛도 길들여졌고, 그 ‘톡’ 쏘는 맛이 영산강 유역권의 장시들을 통해 확산되었으리라.
“나주 가까운 고을에 사는 사람들은 홍어를 썩혀서 먹는 것을 좋아하니 지방에 따라 음식을 먹는 기호가 다름을 알 수 있다.”
유배지 흑산도에서 끝내 숨을 거둔 정약전(1758~1816)이 기록한 ‘자산어보’에 보듯, 이미 삭힌 홍어가 그곳 사람들의 독특한 기호로 정착되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 뿐 아니라 흑산도가 주요한 홍어산지이고, 그것을 매매하는 전문적인 상인이 있었다는 기록에 비춰보면, 홍어의 생산과 유통과정이 시스템을 갖추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흑산도를 다룰 때 언급할 예정이다.
▶흑산도 모습. 사방을 둘러보아도 푸른 바다이다. 이곳은 어업의 전진기지이기도 하다. 사진 송혜진
*시 한 편으로 위안을?
홍어
정일근
먹고 사는 일에 힘들어질 때
푹 삭힌 홍어를 먹고 싶다
값비싼 흑산 홍어가 아니면 어떠리
그냥 잘 삭힌 홍어를 먹고 싶다
신김치에 홍어 한 점 싸서 먹으면
지린 내음에 입안이 얼얼해지고
콧구멍 뻥뻥 뚫리는 즐거움을
나 혼자서라도 즐기고 싶다
그렇지, 막걸리도 한 잔 마셔야지
입안의 즐거움이 온몸으로 퍼지도록
한 사발 벌컥벌컥 마셔야지
썩어서야 제 맛내는 홍어처럼
사람 사는 일도 마찬가지지
한 세월 썩어가다 보면
맛을 내는 시간이 찾아올 거야
내가 나를 위로하며 술잔을 권하면
다시 내가 나에게 답잔을 권하며
사이좋게 홍어안주를 나눠먹고 싶다
그러다 취하면 또 어떠리
만만한게 홍어좆이라고
내가 무슨 홍어좆인 줄 아느냐
내가 나를 향해 고함을 치면서
세상을 향해 삿대질하면서
크게 한 번 취하고 싶다
다음 <3>편은 '서울로 간 홍어'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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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친구의 글을 읽으며 홍어와 영산포의 유래까지 많은 지식을 습득하게 되네..정일근 시인은 아마 나의 대학 선배님이 아닌가 싶네.
그런 연이 있었구만...주말 잘 보내시게나.
감명깊게 잘 읽었쑤~울 친구들 언제 모이면 꼭 홍어 묵자~당연 곁들여 막걸리도 묵어야지..홍탁~~ㅎㅎ 우웁~~크흐~!!
한 세월 썩어가다 보면 맛을 내는 시간이 찾아 올거야...글귀 너~엄 좋다. 공부 많이 하고 가네여....
흑산도 사진.... 저 위치에서 찍은 우리 사진도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