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 민영화는 한미 FTA의 의제이기도 했다. 왜 공기업 민영화에 미국이 관심을 가졌을까? 미국의 무역대표부가 미국경제계의 요구사항을 대변하는 기관임을 감안하면 미국기업들이 한국의 공기업 민영화를 요구했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그러면 미국의 기업들이 한국의 공기업을 걱정해서 민영화 대상에 FTA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을까? 당연히 한국 공기업의 민영화는 미국 기업들의 이익이 되기 때문에 요구한 것이다.
피터린치, 존 보글등과 함께 미국의 영향력 있는 펀드매니저 25인에 선정된 사회책임투자펀드의 매니저 에이미 도미니가 저술한 <사회책임투자>라는 책에서 비판한 볼리비아의 수도 민영화 사례를 보자.
"1999년 볼리비아 정부는 세계은행의 압력에 굴복하여 볼리비아 중부의 도시 코차밤바의 상수도 회사를 미국 기업인 벡텔에 팔았다. 벡텔은 몇 주도 안돼 수도요금을 2배 이상으로 올렸다. 한달 소득이 100달러도 안 되는 코차밤바의 가정들은 한 달에 20달러를 내지 않으면 수도 공급이 끊어져 버렸다. ... 코차밤바 시민들은 2000년 1~2월에 걸쳐 파업과 운송거부에 나섰다. 볼리비아 대통령은 미국 기업의 이익을 대변해 주기 위해 경찰력을 동원했고, 경찰은 이틀간 최류탄을 쏘아댔다. 이때문에 175명 이상이 부상을 입고 2명의 청년이 시력을 잃었다. 4월에는 더 많은 파업이 일어났다. 볼리피아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한밤중에 시위 지도자들을 체포했으며 라디오 방송국을 점거햇다. 급기야 군인이 쏜 총에 17세 젊은이가 얼굴을 맞았다. 시위 지도자였던 오스카 올리베리는 이렇게 말했다. "코차밤바에서 흘린 피에는 벡텔의 지문이 묻어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면 주가가 3천포인트는 간다고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왜 3천 포인트쯤은 간다고 쉽게 얘기할 수 있었을까? 민영화된 공기업의 주식시장 상장과 대운하 건설로 수혜를 볼 건설주들과 건강보험의 민영화의 주된 수혜자인 생명보험회사들의 상장을 생각해 보자. 이들 기업의 이익은 끝없이 늘어날 것이고, 당연히 주가는 상승할 것이다. 3천 포인트는 농담이 아니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민영화되는 기업의 이익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첫째, 기업의 구조조정을 통해서이다. 비용절감이란 명분으로 고용안정은 사라지고 정리해고와 명퇴가 시작되고 임금은 삭감되고 고강도의 노동이 요구된다. 비용삭감분만큼 기업의 이익을 올라가고 이익의 10배수만큼 주가는 상승한다.
둘째, 가격인상을 통해서이다. 민영기업은 '주주이익제일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울 것이다. 그러면 적정의 이윤이 보장되는 장사를 해야 한다. 고로, 원가가 높아질 때마다 소비자가격을 올리게 된다. 수도세, 전기세가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가 한국이라는 것은 타국수준만큼만 가격을 인상해도 얼마나 큰 이득을 민영화된 후의 주주들이 볼 수 있을지 예상할 수 있다.
결국 민영화된 공기업의 지분의 50% 이상은 미국의 금융기관이 차지할 것이고, 나머지 30%는 기관투자가들이 차지할 것이고 20%는 또 개인투자가들이 차지할 것이다. 영원히 망하지 않는 회사의 주식이기 때문이다. 공기업 민영화는 소수의 외국계 펀드와 관련기업에게 막대한 이익을 제공하고, 소수의 펀드투자자와 주식투자자를 위해 4,800만 국민의 복지를 희생시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비용은 향후 지속적으로 상승한다는 점이고, 둘째는 한번 민영화되고 나서는 그것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건강보험을 민영화해야 겠다는 것이 참여정부시절 건강보험 적자를 위한 선진화된 해소방안이었다고 한 것 같다. 건보에서 몇조원의 적자가 발생하는 것을 종부세로 더 거두어 들이는 세금으로 메꿈으로 종부세가 부의 재분배 역활을 하고 4,800만 국민들의 복지에 기여하는 쪽으로는 왜 생각하지 못하는가? 종부세를 낮추는 것만이 능사가 아닌 그것을 필요로 한 부분으로 배분하는 방법을. 종부세와 서민가계가 연결되면 한나라당이라도 종부세를 폐지하거나 기준을 완화하자는 얘기를 함부로 꺼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일반 서민가계에서 한달에 100만원씩 4인가족 건강보험료 내면서 살아갈 자신 있는가? 그리고 매년 보험료가 10%씩 인상되는 것을 납부하며? 미국의 2,500만명 이상이 건강보험없이 살아가야 하는 것은 현실이기에,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은 건강보험 민영화를 폐지하기 위해 90년도 부터 노력해 왔었다. 이렇게 늘어나는 삶의 비용이 기업의 이익으로 연결되고 결국 소수의 지배주주들과 투자기관들이 이익을 얻게 된다.
공기업은 공익을 위해 존재한다. 그렇다면 공기업의 경영성과 판단은 단순히 재무제표상의 수익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타국가나 민간기업에 비해 얼마나 저렴하게 전기, 수도, 건강보험, 토지, 아파트를 공급햇는가를 기준으로 그 효용성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국민들이 저렴하게 이용하게 한 것을 '감가상각'의 개념처럼 '공익'이란 항목으로 순이익에 플러스 한 것이 공기업의 진정한 가치이다. 이런면에서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전기세로 이익을 남기고 있는 한전의 경우는 선진국의 전기세와 비교할 때의 차액에 연간 전력소모량을 곱한 금액이 제무재표의 순이익에 추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엄청난 문제들에 대해 정면으로 언급하는 언론들은 별로 없다. 왜냐하면 대운하든, 건강보험 민영화든, 공기업 민영화든 그 1차적인 이해관계자가 자신들에게 광고를 주는 기업들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에게는 광고주가 늘어나는 것이기도 하고.
언론들이 민영화의 주된 논리로 사용하는 것을 보면 그동안 경박해진 인터넷 여론성향을 이용하는 면이 있다. 공기업 근로자들이 얼마나 편안하며 돈을 많이 받는가에 대해 일반 서민들의 분노를 유발해서 '나보다 좋은 혜택을 받는 공기업은 더 열악한 환경에 놓이도록 해야돼'라는 심리를 갖도록 하고 있다. 언론의 논조를 보면 다른 나라의 국민들에게 이득을 주고 있는 공기업의 역활에 대한 보도는 없고 부정적인 면을 보도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악행들이 삼성그룹 내부에서 있었던 것을 우리는 얼마전에 보지 않았던가?
미국의 사회책임투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에 대해 무기금수조치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자, 미국의 교회들이 미국의 기업들에게 남아공에서의 신규투자금지와 기업철수를 위해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 압력을 행사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도미니는 기술하고 있다. 이때문에 GM의 이사였던 흑인목사 설리반의 제안으로 '설리반원칙'이란 남아공내 투자원칙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미국에서 조성된 교회들의 압력에 굴복해서 미국 기업들은 철수를 시작했고 80년대 내내 계속되는 자본유출을 견디다 못한 남아공 경제인들이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여 흑백차별의 종언을 선언하게 하고 만델라의 출소와 흑인대통령의 탄생을 가져왔다. 이 사건은 기업에 대한 압력의 유효성을 일깨워준 사건으로 사회책임투자는 이후 사회개혁을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미국에서 주주행동주의로 발전하여 기업들의 관행을 바꾸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자본주의의 원조라고 하는 미국에서 '사회책임투자펀드매니저'가 피터 린치등과 비견하는 영향력 있는 펀드매니저로 간주되는지 생각해보자. 이것은 '주주제일주의', '수익중시주의'가 자본주의 경제의 지고지선이 아니라는 선언과도 마찬가지이다. 소수의 주주의 이익을 위해 대중의 이익을 포기하게 하는 '극단적인 시장경제론'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시장경제', '보이지 않는 손'은 사람이 이성적일 경우는 상정하고 있다. 애덤 스미스가 인용한 '보이지 않는 손'은 당시 과학자 라이프니찌가 주창한 '우주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조화를 이루고 있다'라는 잘알려진 학설을 인용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다. 사람은 이타적이기보다 이기적인 속성을 갖고 있고, 박애주의적이기 보다 탐욕적 속성을 포함하고 있다. 시장경제는 늘 '탐욕과 공포'의 반복을 계속한다. 만일 100% '수요와 공급', '시장경제'에만 맡겨놓는다면 시장경제는 불평등과 파국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정부의 적절한 간섭이 필요함을 자본주의 종주국인 미국은 선례를 남기지 않았던가?
'공기업 민영화 예찬론자'에 대해 무지하다는 말을 할 수 밖에 없다. 공기업의 영역을 인정하면서 부정적인 면이 있다면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해야지,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를 희생하는 민영화라는 극약처방을 해야 하겠는가? 몸살 걸린 환자에게 칼질 해대는 돌팔이 의사나 다를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