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가는 길은
수출의 다리 건너 광명 가는 길보다
강 건너 신촌 나가는 길보다 멀지 않아
걸어 10분인데
나는 그 길이 왜 그리 먼지 몰라
봄이면 공단로 따라
철망 사이 삐져 나온
개나리나 붉은 장미 몇 송이만 한가롭고
이전이다 폐쇄다 하여
이제는 스산해져만 가는 거리
한산한 취업공고판에
철늦은 염가세일 포스터 몇 개만 괜스레 나풀거리는
그 길이 왜 그리 먼지 몰라
한때는 이 길 걸으면
마음속 설레임으로 가득해
발길이 재지기도 하고
이마에 선연한 열기가 오르기도 했었지
비밀스러운 일도 없는데
휙휙 고개를 돌리며
수상한 눈빛을 찾기도 했던 기억들
그러나 한 번도 이 거리를 달구는
어떤 일에도 함께 하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이젠 낯뜨거움만 그득한 이 길
한빛은행 지날 때면
이제는 이 구로에 없는 사람들이
가끔 떠오르지
점심시간 짬을 이용해
은행일 보러 나오던 사람들의 물결
밀린 공과금을 처리하고
빠듯한 월급을 쪼개 고향으로
또 어디로
송금했을 사람들
사랑을 희망을 내일을
그들은 송금했을까
은행에서 100여미터 걸어가면 있는
2공단 사거리
85년 구로연투의 선봉이었던
대우어패럴과 효성물산이
마주보고 있는 사거리
지척에 두고도 그곳인 줄 모르다
이제는 지역을 떠나
보험외판을 하며 어렵게 살고 있는
한 70년대 선배에게 전화를 해보고 나서야
간신히 알 수 있었던 그곳
수천의 노동자들이
작업장 울타리를 벗어나
오거리를 향해 달리던 그 사거리
그 길에 섰던 어떤 이는
금뱃지를 달고 떵떵거리고 살기도 한다지만
대다수는 나와 같았을
무지렁이 얼굴들
어느 역사책에도 그 낱낱의 얼굴들은 나와있지 않아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
386세대다 뭐다 떠들어댈때면
가만히 찾아가 사방으로 뚫린 그 길로 불어오는
찬바람에 미움 식히고 싶은 그곳
사거리 지나 가다보면 지금도 있는 범한정기
기억도 어렴풋하지만 93년 어느 때던가
해고싸움에 이긴 그들이 지역동지들에게
감사의 자리를 마련해서
한 일 없이 밥 한 공기를 얻어먹고 오기도 했던 곳
지금은 어떤 이들이 또 긴 밤을 지새우는지
한 밤에도 불 켜져 있는 그 공장
지나서 가다보면 나오는 KDK
한때 누구보다 앞장서서 지역일로 분주하던
강아무개 위원장이 있던 곳
그의 집사람은 나도 잘 알아
한 사람은 경비교도대로 감옥생활을 하고
또 한사람은 '혁노맹'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의 조직사건으로 복역 중
얼굴도 모른 채 사랑에 빠져
후일 결혼에까지 이르렀다는
기막힌 사연을 가지고 있던 그들
수년의 조합생활에 망가진 가정을 챙기느라
이젠 이 곳을 떠난 그들
'우리 남편은 노동자라네
항상 늦게 들어온다네' 노래를
둘이서 부를 때면
아! 저것이 인생인가 보구나 하고
부러워 쳐다보던 그 때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역시 노동자 생활은 쉽지 않아
이젠 기약할 수 없는 그들의 사랑이야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가리봉 역을 지나 3공단에 이르면
역 입구 편에 있는 진도모피
한 벌에 100만원도 하고 기천만원도 하는 옷들이
쭉 걸려져 있는 진열장 뒤 공장에 다니던 한 친구
지금은 결혼하여 독산동 쯤에
문구점을 냈다기도 하는 그 친구
무작정 상경하여 공단을 헤매다
포스터 부착을 나갔던 우리를 쫄래쫄래
잘도 따라오던 눈물 많던 친구
생각하면 그와도 수많은 추억이 있어
이젠 만나지 못하는 일이 서러운 친구
잘 살거라, 잘 살면 되지 않느냐 하면서도
끝내 그 시절의 그가 떠오르는 친구
역을 나와 우측 길로 쭉 가다보면
공단 한 복판에서 제일 붐비는 길
광명 사는 사람들이
차를 갈아타는 정류장이 있는 곳
공단 안에 왠 양복쟁이들이
무수히 서서 붐비는 그곳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동해로 가는 사람들이라면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해방의 한길로 가는 사람들이라면
스치듯 지나 가는 수많은 얼굴들이
남 같지 않는 길
거기서 동해는 멀지 않아
가다보면
하나둘 아는 얼굴들을 만나게 되는 길
몇 년이 지나도 그 옷이 그 옷이어서
이젠 보지 않아도 그 사람 옷장내역을 알 수 있는 우리
이젠 누가 이 길을 가자 하여 가지도 않고
이젠 누구와 함께 이 길을 가자기도 뭐해
알아서 자기 길을 혼자씩이라도
걸어오는 사람들
만나면 반갑지만
자기 단체 자기 노조 챙기다 보면
속엣말은 해보지도 못한채
몇 년 얼굴봤냐에 따라
믿음주는 사람들
하여 도달하면 거기
1년 2개월째
원직복직 고용승계 싸움을 벌리고 있는
동해노동조합 사람들
가로수 잎이 다 떨어지기 전에는
꼭 승리하리라 했지만
그 잎 다지고 다시 새잎이 돗는
봄을 지나 여름으로 다가서는
지금까지 끝이 없는 싸움
낮에도 인적 드문 공단 구석에
처녀 넷이서 철야 텐트농성을 벌이던 작년
기억받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싸움을
그러나 질 수 없어 작은 등 밝히던
그들의 숱한 밤
페인트 칠을 하고 달걀을 던지고
삭발을 하고 화형식을 하고 혈서를 써도
벌금 몇푼이면 된다고
지노위의 복직 판결조차 무시하는
다국적 기업 오므론에 맞서
작년엔 일본원정투쟁까지 세웠었지
쌀포대를 들고 오던 사람이 있었던가
밤 마다 몰려와 뜬 눈
밤을 새워주던 규찰대들이 있었던가
몇 명이서 둘러앉은
작은 불에도 행복하던 그들
밤하늘의 별을 보며
이 세상에도 별이 있다면
그 별들이 조그마한 불을 밝히고 있으리라 생각했지
그렇게 그렇게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강을 건너 왔는가
가끔 차를 타고 이 곳 근처를 지날때면
가슴이 먹먹해와 참을 수 없다는
한 선배의 말
말 할 수 없지만 나는 아직도 꿈을 버리지 않았다는
그 수많은 사람들과
지금도 이곳에서 슬프도록 아름다운 길을
굳세게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이 거리를 지키기 위해
이 거리를 열린 세계로 가는
초입길로 트기 위해
온갖 역경 마다하지 않고 싸워왔던
이 거리의 우리, 노동자들
민주주의는 넓어졌다지만
넓어진 민주주의가 이것인가
동해가는 길은
채 10분도 걸리지 않지만
나는 이 길이 남한 현대사를 다 훑고 지나가야 하는 길만큼이나
어렵고도 멀다
어쩌면 이 짧은 길에 내 온 생애의
꿈과 희망이 배어 있어
이 길 안에 참된 민주주의와 참된 삶이 오지 않는다면
어디간들 행복할 수 있으랴
나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는 갈 수 없는 이길
참된 사랑이 없으면 걸을 수 없는 이길
좀더 큰일을 한다하여 어떤 이들은
떠나기도 하겠지만
내가 아는 길은 한 길 뿐
노동해방 한 길 뿐
이 짧은 길에
투쟁으로 섰던
지친 노동 끝 고달픈 몸으로 섰던
말못할 희망으로 섰다 좌절해간 모든 이들을
우리의 역사가 단 한사람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고 호명하지 않는 한
모든 언어와 행동은 가식이라는 것
동해 가는 길이
이렇듯 가깝고도 먼 것은
그 길이 앞에 펼쳐져 있는데도
그 길을 걷기가 세상 어느 길을 걷는 것보다
어렵기 때문
선생의 무덤에 침을 뱉고 싶어요
대가리로 치받아 그 비석을 깨버리고 싶어요
그러고 나서 다 때려 치워버리지요 뭐
이렇게 해서 뭐 하겠어요
어중띠게 사느니
권력의 개가 되는 게 낫지요
기회주의자로 사느니
솔직히 '나는 그렇고 그런 놈이었어
니가 알게 뭐야 죽은 놈이' 하며
선생 얼굴에 침을 뱉지요
치욕보다는
치욕보다는 낫겠지요
영등포 역, 신길동쪽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나는 노숙자들이 부럽다.
그들의 씻지 않아도 될 검은 피부빛이 부럽고
이빨 두어개씩 빠진 그들의 천함이 부럽다
가정이 없음으로 가정에 복무할 일도
친구가 없으니 친구에 복무할 일도
주소가 없으니 국민된 의무에 시달릴 일도
살아 영광스러운 길 없었으니 도덕에 휘말릴 일도 없는
나는 왜 자꾸 그들이 전사들로 보이는가
그들은 최소한 기만하지 않는다
지붕이 있어야만 잠들 수 있다고 기만하지 않고
더불어야만 살 수 있다고 기만하지 않고
관청이 있어야만 살 수 있다고도 기만하지 않고
대통령이 있어야만 살 수 있다고도 기만하지 않고
친구가 아닌 놈을 친구라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옷이란 무엇인가
가족이란 무엇인가
친구란 무엇인가
제도란 무엇인가
체면과 위세란 무엇인가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되묻는 그들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내 삶이 그들 삶보다 나은 게 무엇인가
그들을 들어 무엇을 계획하지 말길
오히려 계획하는 너의 옷을 벗어야지
혀를 차는 너의 혀를 뽑아야지
세계는 그들을 버렸다 하지만
세상을 버린 건 그들
그들에게 다가가기가
그들만큼 자유로워지기가
내가, 너가 무엇이 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면,
하지만 두렵다 무섭다
나는 그들처럼 살 수 있을까
모든 것을 버리고
살아 무엇을 갖고 이루겠다는 모든 가식을 버리고
몸 자체로 항명이 되어 상처에 돋은 고름딱지가 되어 살 수 있을까
후- 담배연기 가슴에 둘러붙어 나오지 않는다
나는 과연 자유로운가
하루에도 수번 이 나라를 뜨는
비행기 허연 뱃가죽 보며
시흥동, 그 철길 옆 마찌고바에
앉아서 피는 꽃
너의 이름은 용접공이다
허리가 상했으랴
무릎이 상했으랴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기차는
막힐 곳이 없지만
흑유리에 갇혀 징징거리는 마음의 불빛은
그늘진 담벼락 밑
작지만 고운 한 세상
벌겋게 달구어 놓았구나
그러나 일어서라 꽃들아
무릎을 펴고
너희가 가야 할 산 있다
넘어야 할 강 있다
산들바람에
쭈그려 앉은 얼굴 들면
수술엔 하얀 눈꼽도 얹은
철쭉,
너의 이름은 용접공
이 음악을 들어라
어깨와 무릎 정강이에서 건들거리며 듣는
이 짱짱함을 들어라
긴밤내 녹슨 근육에
새순, 피톨 튀는 소리
근질근질하게 달라붙는
이 삶의 가려움
십자와 일자 드라이버를
창창 차자장 두드리며
아싸,
꿈 많던 스무살 신참내기 되어
작업장 다시 들어서니
몽키도 스패너도
연장통 장구 패듯 치고
그라인더도 덩달아
맹렬이 돌며 이 아침을 깨운다
이 음악을 들어라
아이야
못 다 이룬 꿈일랑 접어
도면 선반 위에 두고
비지땀 한 알 한 알
드릴처럼 막힌 네 숨구멍 뚫어
네 몸 다시 열릴 때까지
이 음악을 들어라
노동이 어머니처럼 너를 부르며
끝없이 네 온몸에 전해주는
이 간절한
생명의 리드미컬을 들어라
모든 가정의 내부에는 균열이 있다
보이지 않게 숨은 균열이 있다
이 균열 사이를 아이가 훌륭히 메워주기는 하지만
가족만의 사랑으로는 채워지지않는 더 큰 균열이 있다
1차선과 2차선 사이에 그어진 금처럼
부촌과 빈촌을 가르는 도로처럼
휴전선에 그어진 금처럼
허위로 가득찬 균열이 있다
화장실 변기에 떨어지는 노란 오줌줄기를 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아무런 얘기도 없이 몇 시간을 지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언제 무너질 지 모르는 환상의 벽
놀랍도록 우리를 따스히 감싸주지만
또 놀랍도록 우리를 부드럽게 감금시키고마는
가족이라는 벽
소유라는 벽
그 벽 사이에 균열이 있다
미세한, 미세한
새로 포장을 하면서
들추어놓은 동네 진입로
콘크리트 밑,
오랜만에 마주친
땅의 가슴이 붉네
금방이라도 풀을 키울 것 같네
좀 이르긴 하네만
찬바람이 부니
이제 곧 월동준비를 해야겠네
그럴려면 냉수마찰이라도 한 번 해 두어야겠고
.........
때론 겨울이 어서 왔으면 하네
파란 옷으로 노란 옷으로
자꾸 제 모습을 바꾸어가던 것들 모두 다 지고
본질만이 남아 앙상하게 시련을 버티는
겨울이 단촐하여 좋을 때가 있네
자네 생활도 이맘때쯤이면
보수공사가 필요한 것은 아닌지
꼭꼭 여며 온 자네 가슴의
붉은 기운이 보고 싶네
밤새워 땅을 두드리던 비,
온 다음날 창 너머 먼데서 온
스산한 가을바람 맞으며
이런 저런 견딤에 대해
조용히 생각해보네. 이만 줄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