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처구니’의 어원
종래 ‘어처구니’의 의미를 잡상이나 맷돌의 손잡이라고 주장하는 의견들이 있으나, 명확한 근거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에 필자는 그러한 견강부회식 의미 부여의 방법에서 벗어나, 방언 자료를 밑바탕으로 한, 어원 분석을 통하여 ‘어처구니’의 의미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언어연대학과 방언지리학의 발전은 언어 변화의 법칙 설명과 함께 방언의 중요성을 크게 일깨워 주었다. 언어의 변화는 방사(放射)의 중심지(centre de rayonnment)에서 시작되어 차차 주변으로 개신파(改新波; ondes d′innovetin)가 퍼져 나간다. 방사의 중심지는 물론 도시요, 그곳이 위치한 평야이다.
이 변화는 교류가 잘 되는 주민들 간에는 빠르게 이루어지지만, 교통이 불편해서 주민들의 교류가 어렵거나 불가능한 지역에 있어서는 언어의 전파가 느려지거나 정지된다.
그러므로 언어 장벽을 형성하는 벽지나, 방사의 중심지에서 먼 곳일수록 고어형의 잔존율이 높다. 신라 향가의 찬기파랑가에 나오는 ‘물시브리[汀理]’는 오늘날까지 경상 방언에 ‘물시불(이)’로 살아 있다. ‘언저리’를 뜻하는 ‘시불’은 시불>시울의 변화를 거쳐 중앙어에서는 ‘시울>술’로 정착되었다. ㅂ> ㅸ> ㅇ의 음운 변화를 거친 것이다. 그러나 경상 방언에서는 아직도 입시불, 눈시불, 귀시불 등에 그대로 살아 있다. 경상도의 ‘입시불’은 중앙어에서는 이미 ‘입시, 입시울’을 거쳐 ‘입술’로 변하였다. 방언이 고어 연구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이다. 특히 경상 방언은 중앙어의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고어 연구에 더없이 중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 가지 설이 있는 ‘어처구니’의 어원도 방언에서 확연히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어처구니’의 어원과 그 의미를 방언에서 찾아 보자.
‘어처구니’의 뜻을 지닌 방언(경상, 전남)에 ‘얼척’이란 낱말이 있다. ‘얼척’은 ‘얼’과 ‘척’이 결합된 복합어다. ‘얼’은 ‘덜된 또는 모자라는’의 뜻을 가진 접두사로, 얼개화, 얼요기 등의 어휘를 파생시킨다. ‘척’은 ‘그럴듯하게 꾸미는 거짓 태도나 모양’을 의미하는 낱말로, ‘애써 태연한 척을 하다.’와 같이 쓰인다.
이 두 형태소의 의미를 종합해 보면, ‘얼척’이란 말은 ‘알맹이가 차지 못하고 불완전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말임을 알게 된다.
이 ‘얼척’에 ‘없다’가 더해져 ‘얼척없다’가 된다. 이 말은 중앙어의 ‘어처구니없다’와 똑같은 뜻으로, 부실(不實) 미완(未完), 의외(意外)의 뜻을 지닌다. 얼척이란 말에 이미 알차지 못하다란 뜻을 갖고 있는데 또 없다란 말을 덧붙인 것은, 의미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엉터리없다’란 말에서도 그 예를 볼 수 있다. ‘엉터리’란 말만 해도 ‘실속이 없다’란 뜻이 되는데도, 또 ‘없다’란 말을 덧붙여 그 뜻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얼척’이란 말이 어떻게 ‘어처구니’란 말로 변했을까? 그것은 ‘얼척’에 ‘구니’란 접사가 결합되어 생긴 것이다. 경남 방언에 ‘얼처구니’란 말이 있음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얼척’이 ‘구니’와 결합되는 과정에서 ㄱ이 탈락하여 ‘얼처구니’가 된 것이다. 이 ‘얼처구니’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발음의 간편화를 위하여 ㄹ이 또 탈락하여 ‘어처구니’로 변한 것이다.
다음으로 ‘얼척’에 결합된 접사 ‘구니’의 뜻을 생각해 보자. ‘구니’가 붙어서 된 말은 치룽구니, 발록구니, 사타구니, 더수구니, 조방구니 등이 있는바, 그 뜻을 일별하면 다음과 같다.
치룽구니 : 어리석어서 쓸모가 적은 사람을 조롱하여 이르는 말
✱치룽 : 싸리를 채롱 비슷하게 결어 만든 그릇의 한 가지. 뚜껑이 없음
발록구니 : 하는 일 없이 놀면서 공연히 돌아다니는 사람
✱발록하다 : 틈이 조금 바라져 있다
사타구니 : 샅의 속된 말
✱샅 : 아랫배와 두 허벅다리가 이어진 어름
더수구니 : 뒷덜미의 낯춤말
✱더수기 : 뒷덜미의 옛말
조방구니 : 오입판에서 남녀 사이의 일을 주선하고 잔심부름 따위를 하는 사람
✱조방군(助幇-) : 조방구니의 북한어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이 ‘구니’의 뜻을 보면 하나같이 ‘쓸모가 적거나 저속한 사물이나 사람’을 가리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이 ‘구니’ 또한 ‘얼척’이 내포하는, ‘알맹이가 없고 부실하다’는 의미에 가까운 명사화 접미사임을 알게 된다. 또한 ‘얼척’과 ‘구니’가 그 의미의 유사성이 있어서 쉽게 복합어로 결합되었음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어처구니’는 ‘보잘것없고 알차지 못한 것’이라는 뜻이다. 또한 ‘어처구니없다’는 ‘알차지 못하고 부실한 것조차 없다’는 뜻이다. 의외로 부족하거나 전혀 없다는 뜻이다. 곧 어이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현대의 사전에는 이 ‘어처구니’의 뜻을 ‘생각밖으로 엄청나게 큰 사람이나 물건’이라고 적고 있다. ‘보잘것없고 부실한 것’이 어떻게 이런 의미를 갖게 된 것일까? 이것은 한말로, 반어법에 의한 쓰임으로서 그 뜻이 변하여 굳어진 것이다.
‘부족하다’를 ‘푸지다(풍족하다)’로, ‘못생긴 사람’을 ‘굉장한 미인’으로, ‘포기했다’를 ‘만세 불렀다’로 표현하는 것들이 다 그러한 유이다. 우리는 의외로 적을 경우에 ‘푸지다. 푸져.’ 하는 말을 종종 쓴다. 또 실수해서 잘못을 저질렀을 때, ‘잘 한다. 잘 해.’와 같은 말을 쓰고, 못 생긴 사람을 보고, ‘참 잘났더라. 잘났어.’와 같은 말을 흔히 쓰는데, 이는 다 반어법을 사용한 것이다.
‘어처구니’도 이와 같이 통시적인 쓰임을 거치면서, 원래의 뜻과는 정반대의 뜻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어처구니가 세간에 떠도는 바와 같이, 추녀 위의 잡상이나 맷돌의 손잡이를 가리킨다는 말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첫댓글 좋은 공부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졸고에 대해 분에 넘치는 격려를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 운영하시는 귀중한 카페에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걸맞는 값을 할 수 있을지 저어됩니다. 아무쪼록 많은 채찍질 부탁드리겠습니다.
문화중심지보다 먼 지역에서 말이 더 느리게 변한다는 논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어학자들이 고대 중국어를 연구할라치면 한국어의 한자음, 일본어의 한자음, 베트남어의 한자음 등을 살펴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글에서도 그런 내용이 보입니다. 향가도 소창진평이 경상도 방언을 깊이 연구하여 읽어냈다는 천시권 교수님이 ㅇ가르치신 적도 있고요. 볍씨 찹쌀 접때 등의 ㅂ 되살아나는 음운 현상도 언어의 역사성을 잘 나타내주는 예라고 배웠습니다. 오늘 이 글을 읽으며 맷돌의 손잡이와는 전혀 상관 없는 어처구니를 알게 되어 아주 기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