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평생교육진흥원 「평생교육」 (2014. 7-8월호)
미지의 세계로, 스페인
대전시민대학 명예기자 채동선
설레는 마음으로
태풍 ‘산바’가 한반도의 남해안에 상륙하는 그 시각, 유도로를 벗어나 활주로 끝에 선 보잉747의 육중한 기체가 거친 파열음을 토해내며 비 젖은 활주로를 전속력으로 질주하여 기수를 하늘로 치올렸다. 좌석벨트에 몸을 맡기고 불안한 마음으로 창밖을 응시하던 나는 지상의 모든 것들이 점점 작아지고 멀어짐을 바라보면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환상이 현실로 다가옴을 확신하고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순식간에 비행기는 자욱한 안개의 모습으로 막아서는 구름층을 뚫고 하늘 높이 치솟았고 그곳엔 설원처럼 펼쳐진 구름 위에 바다색보다 짙은 또 다른 쪽빛 하늘이 나타났다. 무중력상태에 빠진 듯 느릿느릿 유영하는 기체의 날개가 창밖으로 보이자 나는 좌석 앞에 붙어 있는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비행고도 10km, 비행 속도 시속 900km」
11시간의 긴 비행 끝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키폴국제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를 갈아타고 다시 2시간 여를 날아 스페인 바르셀로나공항에 내린 것은 현지 시간으로 밤 12시가 다 되어서였다.
영원한 앙숙,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
스페인은 유럽 서남부 이베리아반도에 있는 입헌군주국으로 우리나라 전체 면적의 2.3배나 되는 큰 땅덩어리를 가진 나라다. 북동쪽은 피레네산맥으로 프랑스와 경계를 이루고 북서쪽은 대서양과 면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포르투갈, 남쪽은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아프리카대륙과 마주하고 있다.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제2의 도시로 20여 년 전 이곳에서 열렸던 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의 마라톤 우승으로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곳이다. 바르셀로나가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된 것은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작품 때문이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히는 성가족성당과 가우디의 설계 사상이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는 평을 듣는 구엘공원이 있어서다.
성가족성당은 착공 후 1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공사가 진행 중인데 종려나무를 형상화한 네 개의 아름다운 종탑과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통해 비치는 햇살의 신비함이 몽환적인 환영으로 다가와 오래도록 내게 여운을 남긴다. 구엘공원에 들어서면 불안한 인간 심리를 나타내기라도 하듯 여러 각도로 기울어져 있는 기둥과 독특한 문양의 깨진 도기의 모자이크 장식이 눈을 어지럽힌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또한 불협화음 속에서도 묘한 아름다움과 긴장감을 준다.
이베리아반도 중앙 메세타 고원에 자리한 마드리드는 스페인의 수도로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지이다. 마드리드에는 크고 작은 광장이 즐비한데, 최고 번화가인 그란비아의 스페인광장과 젊은이들의 거리인 솔광장 그리고 4층짜리 붉은 벽돌집으로 사방이 둘러져 있는 직사각형 형태의 마요르광장이 특히 유명하다. 또 이곳에는 세계 3대 미술관의 하나인 프라도미술관이 있어 수준 높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이어폰을 통해 한국어 설명을 듣긴 했으나 그림에 문외한인 내게는 역시 그림의 떡으로만 보였다.
마드리드에서 약 7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시간이 멈춘 도시 톨레도가 있다. 중세의 모습을 현재까지 고스란히 간직한 곳으로, 시 외곽의 언덕에 올라가 보면 3면이 해자처럼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도시가 하나의 요새로 보인다. 스페인 가톨릭 총본산인 톨레도대성당을 중심으로 한 거미줄처럼 이어진 좁은 골목길을 걷다 보면 내가 중세의 한 거리를 거닐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중세 문화의 보고, 안달루시아
안달루시아는 지중해와 대서양에 면해 있는 스페인 남부 곡창지역으로 토질이 좋고 기온이 온화해 예로부터 올리브를 비롯하여 보리와 포도주를 많이 생산 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스페인은 외세의 침입을 끊임없이 받아왔고 이슬람으로부터는 800년 동안이나 치욕적인 지배를 받아야 했다. 이런 탓에 스페인문화는 이슬람과 가톨릭이 혼재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그중 그라나다의 아람브라궁전과 코르도바에 있는 회교사원 메스키타가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이 걸작들을 만나기 위해 안달루시아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차창 밖으론 올리브 농장들이 끝없이 스쳐 지나갔고, 길가엔 검붉은 유두화가 도열해 바람에 머리를 숙이며 이방인을 반긴다.
아람브라궁전은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의 건축 양식이 혼합된 형태를 띤 이슬람 왕궁으로 나스르와 카를로스5세 궁전, 군사 요새인 알카사바, 그리고 이슬람 전통 정원인 헤네랄리페의 4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특히 왕이 정치를 행하던 장소인 나스르궁전엔 8천여 개의 나뭇조각을 정교하게 짜맞춘 천장과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장식된 벽면이 있어 모두가 정교함에 화려함을 더해 보는 이마다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코르도바는 안달루시아의 젖줄 과달키비르 강가에 있는 옛 로마제국의 도시로 한 때는 이슬람 왕국의 수도였다. 메스키타는 스페인에 남아 있는 유일한 회교사원인데 여러 차례의 증축을 거쳐 만들어진 중첩된 아취가 아름답고 오렌지나무로 조성된 이슬람식 중정이 특이하다. 코르도바에 가면 미로 같은 유대인의 거리나 예쁜 꽃으로 장식을 해 놓은 구시가지를 걸어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코르도바에서 아침을 서둘러 지중해의 하얀마을 미하스를 둘러보고 세비야로 향했다.
도중에 투우의 발상지인 론다가 있다. 멀리 보이는 드넓은 평원의 넉넉함을 두고 굳이 이 가파른 협곡 위에 도시를 세운 연유는 알 수 없으나 도시가 너무나 아름답고 고즈넉해 이곳에서 한번 쯤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아찔한 절벽에 걸쳐진 누에보 다리를 건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작가 헤밍웨이가 자주 거닐었다는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신시가지에 있는 노천 식당에서 허기를 달래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플라맹고의 본고장이자 오페라 ‘카르멘’의 무대로 잘 알려진 세비야는 안달루시아 최대의 도시다. 이름처럼 아름다운 마리아루이사공원을 거쳐 스페인광장에 들어섰다. 웅장하고 멋스런 이곳에서 어느 CF를 통해 우리나라 여배우 김태희가 열정적으로 플라맹고를 췄다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흥이 났다.
세비야의 자랑은 역시 세비야대성당이다. 내부에는 수십 개의 예배당과 박물관까지 갖추고 있는데 아마 성당 안에서 길을 잃으면 입구를 찾는 데만도 한나절은 족히 걸릴 것 같단 생각이 들 정도다. 웅장하지만 정교하고 예술성 높은 조각품으로 가득 찬 성당 내부를 주마간산으로 둘러보고 밤에 플라맹고를 관람하는 것으로 스페인 여정을 모두 마쳤다.
에필로그
스페인은 관광으로 먹고 사는 나라다. 그들의 전통문화는 물론이고 숨기고 싶었던 아픔의 역사까지도 모두 관광의 대상이 된다. 뿐만아니라 유명인들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곳이면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각색해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탁월함이 있는 것 같다.
짧은 여정으로 스페인을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가톨릭과 이슬람의 혼재된 스페인문화의 찬란함은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보다 더 강렬하게 내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포르투갈과 아프리카의 모로코를 포함 12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다시 긴 비행 끝에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아침이다.
출발할 때와 달리 하늘은 쾌청했다.
Ps: 이번 여행은 딸 윤영이가 살아생전에 스페인을 보고 싶어 했던 제 엄마를 대신하여 주선하고 동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