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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반기룡 문학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반소메
시인 김영랑(金永郞.1903.1.16∼1950.9.29)
시인. 전남 강진(康津) 생. 본명 윤식(允植). 휘문고보 재학 중 3ㆍ1운동이 일어나자 강진에서 의거하려다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했다. 1920년 일본으로 가 토오쿄오 아오야마(靑山)학원 불문과 중퇴. 박용철과 함께 동인지 [시문학](1930)을 간행할 때부터 주옥 같은 서정시를 발표했다. 일제 말기에는 창씨개명과 신사 참배를 거부했고, 광복 후에는 향리에서 우익 민족운동에 참가, [대한독립촉성회]에 관계했으며, 강진 대한청년단장을 지냈다. 1949년 공보부 출판국장을 6개월간 지냈다. 6ㆍ25때 서울에 숨어 살다 국군이 진입한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일찍 환영 나왔다가 파편을 맞아 사망.
전남 광주 공원에 박용철과 나란히 시비가 세워짐(1970년). 전남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 211번지에 그의 생가와 시비가 있다. 시비에는 그의 대표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새겨져 있고, 광주 광역시 광주공원에도 그의 시비가 있다.
부유한 지주의 가정에서 한학을 배우면서 자랐고,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 3ㆍ1운동 때에는 강진에서 의거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이듬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학원에 입학하여 중학부와 영문과를 거치는 동안 C.G.로제티, J.키츠 등의 시를 탐독하여 서정의 세계를 넓혔다. 1930년 박용철(朴龍喆)ㆍ정지용(鄭芝溶) 등과 함께 [시문학(詩文學)] 동인으로 참가하여 동지에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쓸쓸한 뫼 앞에> <제야(除夜)> 등의 서정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詩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서정시를 계속 발표하였고, 1935년에는 첫째 시집인 <영랑시집(永郞詩集)>을 간행하였다.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한 그의 시는 정지용의 감각적인 기교, 김기림(金起林)의 주지주의적 경향과는 달리 순수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창씨개명(創氏改名)과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하는 저항 자세를 보여주었고, 8ㆍ15광복 후에는 민족운동에 참가하는 등 자신의 시의 세계와는 달리 행동파적 일면을 지니고 있기도 하였다. 6ㆍ25전쟁 때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은신하다가 파편에 맞아 사망하였다.
김영랑은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 이때부터 시심(詩心)이 자라오른 듯하다.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 독립선언문을 감추고 하향하여 독립만세를 모의했으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등부에 입학, 이 무렵 혁명가 박열(朴烈)과 같은 방에서 하숙을 하고, 또 평생의 지우(知友) 박용철과도 친교를 맺으면서 괴테ㆍ로제티ㆍ키츠 등을 탐독했다. 1921년 일시 귀국, 이듬해 다시 도일(渡日)하여 아오야마학원 영문과에 입학, 여름방학에 귀가했다가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휘문 시절에는 축구 선수를 지내고, 테니스에도 능했으며, 동서의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아악(雅樂)에 정통, 북에 알가를 이룬 명수(名手)로, 거문고에도 심취, 이 같은 음악에의 정조(情調)가 뒷날 그의 시세계의 독특한 언어미(言語美)를 이루게 되었다.
1930년 박용철ㆍ정지용ㆍ이하윤ㆍ정인보 등과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 그해 3월에 창간된 [시문학]에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4행소곡칠수(四行小曲七首)>의 3편을 발표하기 시작, [문예월간] [시원(詩苑)] [문학] 등 여러 문학지에 시를 계속 발표했다. 그의 시는 섬세하면서도 정서가 언어의 율조와 잘 다듬고 깎아낸 시형(詩型)의 정돈으로 서정시로서의 독특한 개성을 이루어 한국의 대표적 서정시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35년 박용철의 도움으로 <영랑시집>을 간행하고, 1945년 해방과 함께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 이후 대한독립촉성회ㆍ대한청년단 등에서 활동, 1949년 공보처 출판국장을 7개월간 지냈다. 그 해 10월 <영랑시선>을 간행했다.
6ㆍ25전쟁 중 서울에서 은신하다가 포탄 파편에 복부상(腹部傷)을 입고 그 다음날 사망했다.
만년에 민족주의적인 애국시를 많이 발표했으나, 역시 그 시의 본령은 가냘프면서도 질기고, 화사하면서도 애수에 차 있는 순수한 탐미주의적 서정성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백조파 시인들과 같이 단순한 감상적 영탄시인(詠嘆詩人)이 아니고, 그 정서를 여과(濾過)ㆍ순화(純化)하여 순수하고 맑은 겨울과 같은 시의 경지 위에 섬세한 상상의 세계를 구김살없이 반영시킨 백조파의 감정시(感情詩)와 현대시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김영랑의 시 세계】
"아름다움은 영원한 즐거움"이라는 키이츠(Keats,1795∼1821,영국 낭만파 시인. 진선미의 조화와 시인의 사명에 큰 관심을 둔 시인)의 말에 큰 영향을 받은 바 있다.
특히 초기시의 고요하고 미세한 감각과 내면의 세계가 보여준 아름다운 서정의 세계는 이것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순결한 삶에의 욕구가 자연과의 내적 연관을 통해 잘 드러났던 것이다.
그의 후기시가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함으로서 정갈한 시적 구조와 예술적 가치의 약화를 초래했으나 이 역시 순결한 삶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낳은 결과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는 현실 참여에 바탕을 둔 시를 발표할 때도 자신이 추구한 서정시의 본령을 끝까지 실천코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조용훈: 청주 교대 교수)
1930년 3월 박용철(朴龍喆), 정지용(鄭芝溶), 이하윤(異河潤) 등과 창간한 동인지 [시문학]에 시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등 6편과 <사행소곡(四行小曲)> 7수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시작활동 시작했다.
▶초기 :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이나 인생태도에 있어서 회의 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슬픔'이나 '눈물'의 용어가 수없이 반복되면서도 비애의식(悲哀意識)은 영탄이나 감상(感傷)에 기울지 않고, '마음'의 내부로 향해 정감의 시세계를 이룩하고 있다.
▶1940년 전후 : <거문고> <독을 차고> <망각> <묘비명> 등 일련의 시작품에서는 형태적인 변모와 함께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와 '죽음' 의식이 나타남. 이러한 죽음의식은 초기시에서와 같이 감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일제 치하의 민족관념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해방 후 : <바다로 가자> <천리(千里)를 올라온다> 등은 일제 치하의 제한된 공간의식과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새나라 건설의 대열에 참여하려는 강한 의욕으로 충만되어 있다.
【특징】
그는 목적의식을 배제하고 유미적이며 이상적인 순수시를 썼다. 그의 시는 잘 다듬어진 언어를 재료로 정교한 율조를 이루며, 이를 통해 인간 내면의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하였다.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설움받은 민족의 희망을, 봄을 기다리는 작자의 마음에 의탁하여 읊은 격조 높은 서정시이다.
1. 민요적 율조(7ㆍ5조)를 살린 전통시, 유미주의적 순수 서정시
2. 일체의 관념이나 목적의식을 배제한 한국 순수시의 개척자
3. 섬세, 영롱한 정서, 자연스러운 리듬의 언어
4. 여성적, 애수적, 비애미(悲哀美)의 추구
【영랑의 시사적(詩史的) 위치】
영랑은 순수시의 종사(宗師)로 우리 시사에 시를 예술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영랑 시의 한계】 - 이는 ‘시문학파’의 한계이기도 함
1. 비평 정신, 상황 인식의 미흡
2. 서정과 기교에의 편중
* 위와 같은 ‘시문학파’의 한계성과 그 이전의 ‘백조파’의 감상성(感傷性)에 반발하여 모더니즘 시운동이 일어남.
【영랑의 시에서의 '눈물', '슬픔'의 의미】
영랑의 시에서는 '슬픔'이나 '눈물'이라는 용어가 자주 반복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이 용어들이 나타내는 비애 의식은 그 이전의 시인들처럼 영탄이나 감상에 기울어지지 않고 '마음'의 내부로 향해 있을 뿐만 아니라. 면면한 정조의 율조로 극복되어 있다.
이런 비애 의식은 그의 초기시에 나타난다. 그는 어린 나이에 아내와 사별했는데, <쓸쓸한 뫼 앞에>에서와 같이 그는 여기서 '죽음'이나 '무덤'을 알 게 된다. 그러나 죽은 아내가 다시 화한 것 같은 '시악시'와 '색시'의 모습은 한국적인 촌리의 그것처럼 소박하고 티없이 맑다. 즉 영랑의 슬픔이나 눈물, 그리움은 모두가 전통 시가나 민요 속에 이어져 온 정한과 율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이것은 민요를 좋아했고, 민요에 일가견을 가졌던 영랑의 정서와도 관련이 있다.
【경력】
▷1903년 1월 16일 전남 강진읍 남성리 221출생
▷1915년 강진보통학교 졸업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 입학
▷1919년 3ㆍ1운동 직후 휘문의숙 중퇴, 강진에서 의거하려다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 6개월간 옥고.
▷1920년 도일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 입학
▷1922년 아오야마학원 영문과 진학
▷1923년 광동 대지진으로 학업중단 귀국
▷1930년 정지용 등과 더물어 박용철 주재의 [시문학] 동인으로 참가
▷1945년 강진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결성, 단장 역임. 대한청년단장 역임
▷1949년 공보처 출판국장 취임, 6개월만에 사임
▷1950년 9월 29일 사망
【시】<언덕에 바로 누워>(1930) <쓸쓸한 뫼 앞에>(1930)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1930) *<내 마음 아실이>(1931) *<모란이 피기까지는>(1934) *<오월(五月)>(1937) *<독(毒)을 차고>(1939)
【시집】<영랑시집>(1935.제1시집), <영랑시선>(1949.중앙문협) <현대시집 >(1950.정음사) <모란이 피기 까지는>(1975.삼중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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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랑의 삶과 문학>
▶생애 : 13세에 첫 결혼, 23세에 두번째 결혼. 당대 최고의 발레리아 최승희와 사랑에 빠짐. 고향서 친구들과 중등학교(금릉중학교) 설립. 1950. 9. 29(47세). 6ㆍ25 전쟁 중 포탄 맞아 숨지다.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용인공원으로 이장.
▶성격 : 엄한 편, 그러나 속은 여림. 큰누나의 맏딸이 죽었다는 소식 듣고 몹시 울다. 딱 두 번 우는 모습을 보았는데, 할머니 죽고 관에 못 박으면서 한 번 울고, 큰외손녀 죽고 울고.....
▶학교 생활
- 휘문의숙 재학 : 홍사용, 박종화, 정지용, 이태준 등과 함께 수학
- 일본 청산 학원(영문과) 유학 : 본격적인 문학세계를 열어줌. 시인 박용아와 교류. 청년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박열을 통해 사회주의에 접합. 관동대지인으로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
▶생가 : 전남 강진군 강진읍 탑골. 돌담집. 생가의 모습 복원(우물, 행랑채 등)
▶시어의 특징 :
- 향토적 : 고향의 정서를 담아냄. 남녘 사람들의 숨결이 배어 있다.
- 친숙한 언어. 생성과 소멸의 언어
▶문학 활동
- 강진파 시인 형성 : 박용아. 이현구, 김영랑. 인간의 마음에 고요히 스미는 시
- [시문학] 창간 : 정지용, 김영랑, 박용아. 목적주의 문학(카프)과 거리를 둠. 한국인의 정서에 부합하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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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랑론> - 이숭원(서울여대 교수)
김영랑은 강진 보통 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휘문 의숙을 다니다가 3ㆍ1운동으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이 일로 휘문 의숙을 중퇴한 김영랑은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 다시 학업을 중단하고 강진의 자택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강진에서 무료한 생활을 하고 있던 영랑에게 송정리의 벗 박용철이 찾아와 시 전문지를 같이 내자고 제안했다. 박용철은 오랜 숙의 끝에 사재를 털어 [시문학] 창간호를 1930년에 발간하게 된다.
1930년은 김영랑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그 해 3월에 간행된 [시문학] 창간호에 13편의 시를 한꺼번에 발표하며 시단에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5월에 나온 [시문학] 2호에 9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20편이 넘는 작품을 1930년 두 달 동안에 한꺼번에 발표했던 것이다.
김영랑의 시는 당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카프를 중심으로 쓰여진 경향시는 생경한 사상성과 경직된 목적 의식을 주로 드러냈기 때문에 당시의 시단은 서정시의 본령을 보여 주는 김영랑의 시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이로써 시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변화하였고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방법적 자각을 가지고 시를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김영랑의 시에는 '내 마음'이라는 어휘가 유달리 많이 보이는데 그가 이 말을 많이 사용한 것은 내면의 순결성을 표현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직접 제시하지 않고 대부분 자연의 이미지를 통하여 표현하였다.
그의 초기 시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자연의 정경은 그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는 것들이다.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에 제시된 아침 햇살처럼 빛나는 은빛의 강물, <제야>에 제시된 맑은 샘물과 밤의 심상, <가늘한 내음>에 제시된 보랏빛 노을의 고요한 아름다움, <내 마음 아실 이>에 나오는 향 맑은 옥돌의 심상 등은 모두 마음의 순결성을 나타내는 예들이다. 이렇게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자연의 정경을 통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순결한 마음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김영랑 서정시의 출발은 바로 이 순결성에 있었다. 이 순결성이 그의 시를 아름다운 해조와 서정주의의 극치로 몰아간 것이다. 그 순결한 마음은 자연의 미묘한 변화와 대응되므로 분명히 파악되지는 않는다. 순결성은 꽃가지의 은은한 그늘이나 봄날의 미미한 아지랑이처럼 모호한 상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영랑은 자연의 맑고 깨끗한 정경을 통해 마음의 순결성을 보여 주었는데, 자연의 정결한 모습에 집중하게 되면 자연히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황홀감을 갖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본래 자연을 통한 순결성의 추구는 현실 세계의 추악함을 인식하는 데서 오는 경우가 많다. 이때에 자연은 현실과 대립적 위상에 놓이게 된다. 현실은 고통과 비애가 교차되는 장소로 인식되는 반면, 자연의 아름다움과 순결함은 이 모든 현실적인 것을 망각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의 많은 시들에서 보이는 것처럼 자연의 어느 한 순간이 가져다주는 극치의 아름다움은 그의 정신을 몽롱케 할 정도로 황홀감을 안겨 준다. 저녁놀이 물드는 보랏빛 하늘, 밤 깊이 흐르는 물소리와 찬란한 별떨기, 은색으로 황홀히 빛나는 달빛, 맑은 가을날의 고요한 정경, 이 모든 것이 자연미의 한 정점을 보인 것이어서 시인은 그 황홀감에 가슴 설레며 몸둘 바 몰라 한다.
그런데 이 황홀한 순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모란이 한번 흐드러지게 피어 그 찬란한 빛을 불태웠다가 천지에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지상의 모든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쉽게 소멸하는지 모른다. 자연의 순결성도 현실 세계의 혼탁함 때문에 그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지 않으며, 자연의 황홀한 아름다움 또한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라면 영랑의 자연 인식은 비극적인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그 비극성이 그의 심혼을 긴장시키고 그의 서정시를 가능케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예컨대 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모란이 사라져 버리고 자신의 마음에 비탄과 상실의 감정이 남는 과정을 자세히 묘사해 놓았다. '뚝뚝'이라는 시어를 통해 모란이 무정히 사라져 버리는 정경을 소리로 나타내는가 하면, '떨어져 누운 꽃잎마져 시들어버리고'라는 시행을 통해 처절한 상실의 순간과 상실 뒤에 오는 형언할 수 없는 비탄의 정서를 표현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삼백예순 날을 계속 울고 지낸다는 과정적 표현을 배치하여 그리움의 정도가 대단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한편으로 영랑의 자연에 대한 인식이 시인 자신의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음악적 장단과 호응을 이루며 하나의 정경으로 표현될 때 그것은 오롯한 미의 원광을 두르게 된다. 가령 영랑의 <오월> 같은 시는 봄 들판의 약동하는 아름다움을 표현한 작품인데 시각적 이미지를 적절히 구사하여 심미감을 높이고 운율의 변화를 통하여 흥겨운 율동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서정적 표현의 한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우리 시의 역사에서 귀중히 간직하고 전수해야 할 표현 상의 백미(白眉)에 해당하는 작품이라고 판단한다.
김영랑의 시에서 인생과 사회에 대한 발언이 중심을 이룬 작품은 아주 적다. 현실에 대한 반응을 보인 예로는 <거문고>라든가, <독을 차고>, <우감(偶感)>, <춘향> 등의 작품을 들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런 점 때문에 현실주의적 시각을 가진 사람은 김영랑의 시가 우리에게 어떤 효용이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앞에서 말한 <오월>처럼 자연의 정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일관한 작품은 그런 지적을 많이 받고 있다.
그러나 인생과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만 우리의 삶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과는 관련이 없는 듯한 자연에 대한 상상도 우리의 감정을 풍요롭게 하며, 새로운 비유와 표현의 구사도 언어사용의 폭을 넓힘으로써 실제의 삶을 윤택하게 가꾸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자연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아름다운 언어와 절묘한 기법으로 표현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김영랑의 시는 그 나름의 충분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