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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초군청연구는 내 평생의 과제 | ||||||||||||
[시민신문이 만난 사람] 영동대 교양학부 김훈기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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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평균 한 달에 한번 이상은 오게 되는 것 같아요. 최근에는 초군청(樵軍廳) 자료 등 초군청에 관한 일로 많이 오고 집안 대소사에 참여하고 어릴 적 동무도 만나고 하죠. 고향 오는 길은 늘 그리워하는 곳이여서인지 죽령터널을 지나면 창문을 활짝 열고 운전하죠. 바람이 다른 것 같아요. 뭐랄까? 고향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랄까요.” 영동대 김훈기(53.교양학부)교수를 청국장이 맛있기로 유명한 시외버스터미널 인근 기사식당에서 만났다. 김 교수는 지난달 26일 소수서원 충효교육에서 있었던 제1회 순흥역사문화선양학술발표회 ‘순흥초군청과 지방자치’에서 “초군청(樵軍廳) 활동에는 농민의 권익신장과 항일운동의 흔적을 들 수 있다. 지방자치의 개념요소와 초군청을 연결하면 초군청이 현대적의미의 지방자치의 근본정신을 구현한 제도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지방자치제도 뿌리가 순흥에 있었다.”고 말해 순흥민과 영주시민들로 가득 메운 관객들에게 큰 자긍심을 느끼게 했다. 김 교수의 고향인 순흥 동호리(석교1리)에는 현재 형님 두 분이 농장을 경영하며 고향을 지키고 살고 계신다고 한다. 김 교수는 순흥 동호리에서 8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동호리는 김 교수의 유년시절의 추억과 초중학교 학창시절의 추억까지 고스란히 녹아있는 그야말로 또 하나의 어머니의 치맛자락 같은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청년시절 한 때 방황의 흔적까지 오롯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단다. “정월 보름이면 뒷동산에서 쥐불놀이로 시간가는 줄 모르게 겨울이면 동호리 연못에서 썰매타기, 여름이면 앞개울에서 물놀이, 친구들끼리 모여서 닭서리, 수박서리 했던 기억이 나요. 요즈음은 세상이 각박해져서 서리문화가 사라졌지만 당시는 어린 시절에만 할 수 있는 독특한 놀이문화였죠. 서리하다가 들켜서 혼이 나기도 했지만 너그러이 용서하는 것을 배웠지요.” 김 교수는 동호리에서 유년의 추억 한자리를 이렇게 풀어 놓는다. 김 교수의 남다른 고향사랑을 느껴서 일까? 지난 2011년 봄, 순흥역사문화발굴연구회 창립총회에서 김 교수에게 고문이라는 막중한 직책이 맡겨졌다. 이 창립총회에서 많은 순흥 역사이야기와 함께 순흥의 부호 김자현(金慈仁)고택복원 논의가 있었다. 논의 끝에 김자현고택은 영주시에서 복원하는 것으로 결정이 됐다고 한다. 김자현고택은 초군청 설립자 김교림(金敎林, 1865〜1938)의 집이다. 김자현고택은 김 교수의 어릴 적 추억이 많은 곳이다. 순흥 초등시절부터 1974년 김자현고택이 해체될 때까지 부친의 손을 잡고 제사를 지내러 갔던 곳이기 때문이다. “명절이면 이른 새벽에 올라가서 오후 1시까지 제사를 지내고 집에 돌아와 또 제사를 지냈지요. 복원의 시작은 고택이지만 초군청의 설립자인 윗대 할아버지(金敎林, 1865〜1938)에 대한 연구도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김 교수는 1974년 김자현고택이 허물어지면서 많은 고서와 어사화가 고서 수집상에게 팔려 나갔다는 얘기를 부친으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어릴 때 기억을 더듬으면 분명 순흥 초군청과 김자현고택에 대한 자료가 국내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 고서를 발굴하는 것이 김자현고택과 순흥 초군청 문화를 복원하는 시초가 될 것입니다. 이 일은 짧은 시간에는 불가능하고, 제 평생 연구해야 할 과제로 생각하고 있어요.” 김훈기 교수는 대학원 겨울 방학에 친구 소개로 만나 1년 교재 끝에 결혼한 부인과 사이에 1녀(공군간호장교), 1남(생명과학전공)을 두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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