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성김씨(義城金氏) □
시조 김석(金錫)은 경순왕의 다섯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자로 의성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의성으로 하였다. 그리고 후손 김용비(龍庇), 김용필(龍弼), 김용주(龍珠) 형제대에 이르러 파가 갈린다.
◇ 대표적 인물 - 김안국(安國) : 대제학, 학자이다. - 김정국(正國) : 참판, 학자이다. - 김성일(誠一) : 부제학을 지냈다 - 김우굉(宇宏) : 부제학을 지냈다 - 김우옹(宇顒) : 대사헌을 지냈다 - 김성구(聲久) :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 김흥락(興洛) : 학자이다. - 김창숙(昌淑) : 독립운동가, 유학자이다.
의성(義城)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중앙부(中央部)에 위치한 고장으로 삼한(三韓)시대에 소문국(召文國)이었다. 그후 신라에 병합되어 757년(경덕왕 16) 문소(聞韶)로 개칭되었다가 고려 초에 지금의 의성(義城)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신라의 왕족(王族)인 의성 김씨(義城金氏)는 경순왕(敬順王)의 다섯째 아들 김 석(金 錫)이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외손(外孫)으로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의성(義城)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한편 [의성김씨족보(義城金氏族譜)]에는 김 석(金 錫)이 경순왕의 넷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신라김씨 2천년사(新羅金氏二千年史)]·[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 등의 문헌(文獻)과 [신라김씨분파연원도(新羅金氏分派淵源圖)]에는 다섯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개국과 함께 문호(門戶)를 개방한 의성 김씨는 8세손 공우(公瑀)의 아들대에서 크게 번창하여 세도가문(勢道家門)의 기틀을 다졌는데, 장자(長子)인 용비(龍庇)가 태자 첨사(太子詹事 : 동궁에 속한 종 3품 벼슬)를 지냈고, 차자(次子) 용필(龍弼)은 수사공(守司空)을 , 막내 용주(龍珠)는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여 명성을 날렸다. 그외 고려에서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훤(暄)과 우왕(禑王) 때 도순문사(都巡問使) 광부(光富)가 유명했 고,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내고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발문(跋文)을 적은 거두(居斗)와 정당문학(政堂文學) 거익(居翼), 추밀원부사(樞密院府使) 춘(椿),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옥(玉), 평장사(平章事) 연(衍) 등이 명문(名門)의 대를 이었다.
조선조에 와서는 옥(玉)의 아들 현주(玄柱)가 찬성사(贊成事)와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 찬제와 사명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종 2품 으뜸 벼슬)에 이르렀고, 영렬(英烈)은 태종(太宗) 때 추충분의좌명공신(推忠奮義佐命功臣)에 올랐다. 존성(存誠)의 아들 효손(孝孫)은 세종(世宗) 때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거쳐, 형조 및 예조의 참판(參判)을 지내고 대사헌(大司憲 : 사헌부의 종 2품 으뜸 벼슬)을 역임했으며, 을방(乙邦)은 고려 문신(文臣)으로 국운(國運)이 다하자 통곡하며 예안(禮安)의 요성산(邀聖山)으로 내려가 초당(草堂)을 짓고 은거(隱居)하였는데, 조선조에서 수차에 걸쳐 벼슬을 제수(除授)하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기리며 불취하자 그가 살던 마을을 둔번리(遁煩里)라 불렀다고 한다. 연산군(燕山君)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흠조(欽祖)는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검열(檢閱)을 거쳐 단양(丹陽)·제주(濟州) 등지의 목사(牧使)를 역임한 후 판결사(判決事)에 이르렀으며, 윤석(潤石)은 중종(中宗) 때 등과(登科)하여 청송 부사(靑松府使)로 나갔다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대사성(大司成 : 유학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정 3품 벼슬)에 올라 군수 (郡守) 세우(世瑀)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조선 중기에서 명문(名門) 의성 김씨(義城金氏)를 더욱 빛낸 인물은 모재(慕齋) 안국(安國)과 사재(思齋) 정국(正國)의 형제를 들 수 있다. 안국(安國)은 1478년(성종 9) 참봉(參奉) 연(璉)의 맏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당대에 이름난 석학(碩學)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닦고, 연산군(燕山君)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어 부수찬(副修撰)과 부교리(副校理)·예조 참의(禮曹參議)를 거쳐 경상도(慶尙道)와 전라도(全羅道)의 관찰사(觀察使)로 나가 각 향교(鄕校)에 [소학(小學)]을 권장하고 [벽온방]·[창진방(瘡疹方)] 등을 간인(刊印)하여 보급하였다. 특히 그는 천문(天文)·주역(周易)·농사(農事)·국문학(國文學)을 비롯한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여 당시 유명했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쌍벽을 이루었고,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한때 파직되기도 했으나 예조(禮曹)와 병조(兵曹)의 판서(判書)를 거쳐 대사헌(大司憲)·대제학(大提學)·좌찬성(左贊成 : 의정부에 속해있던 종 1품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동몽선습 (童蒙先習)]·[모재가훈(慕齋家訓)]을 비롯한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다. 안국(安國)의 아우인 사재(思齋) 정국(正國)은 김굉필(金宏弼)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1509년(중종 4)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堂 : 젊고 재주있는 문신으로 임금의 특명을 받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곳)에 뽑혔으며,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거쳐 관찰사(觀察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병조(兵曹)·예조(禮曹)·형조(刑曹)의 참판(參判)을 지낸 후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으며, 시문(詩文)이 당대에 뛰어났고 의서(醫書)에 조예가 깊어 [성리대전절요(性理大全節要)]를 비롯한 훌륭한 저서(著書)를 많이 남겨 형과 함께 후세에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한편 생원(生員) 진(璡)의 아들 5형제는 모두 당대에 이름난 거유(巨儒) 퇴계(退溪) 이 황(李滉)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문명(文名)을 날렸는데, 맏아들 극일(克一)은 내자시정(內資寺正)을, 둘째 수일(守一)은 찰방(察訪)을 지냈으며, 셋째 명일(明一)은 효행(孝行)이 지극한 학자(學者)로 유명했다. 넷째 성일(誠一)은 1568년(선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정언(正言)을 거쳐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將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부제학(副提學)·나주 목사(羅州牧使)를 역임하고 사성(司成)으로 통신부사(通信府使)가 되어 일본(日本)을 다녀왔다. 그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초유사(招諭使 : 난리가 일어났을 때 백성을 초유하는 일을 맡은 임시벼슬)로 참전하여 죽산(竹山)·함양(咸陽) 등지에서 의병(義兵)을 모아 진주성(晋州城)을 사수하다가 진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성리학(性理學)에 능통했으며 사후(死後)에 선무일등공신 (宣武一等公臣)으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막내인 복일(復一)은 명종(明宗) 때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70년(선조 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전적(典籍)·낭관 (郎官)·전라도 어사(全羅道御史)를 거쳐 울산 군수(蔚山郡守)·창원 부사(昌原府使) 등을 역임하고, 성균관(成均館)의 사예(司藝)와 풍기군수(豊基郡守)를 지냈다.
또한 삼척 부사(三陟府使) 희삼(希參)의 둘째 아들 우굉(宇宏)은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올라 숙종(肅宗) 때의 수찬(修撰) 여건(汝鍵), 대사헌(大司憲) 방걸(邦杰)과 함께 이름을 날렸고, 넷째 아들 우옹은 명종(明宗) 때 문과(文科)에 올라 선조(宣祖) 때 대사헌(大司憲)·병조 참판(兵曹參判) 등을 역임하였으며, 우굉(宇宏)의 현손으로 166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후, 대사성·강원도관찰사 등을 지낸 김성구는 의성김씨 집성촌인 바래미 입향조가 되었다 .
한말(韓末)에 와서는 영수(永銖)가 장기 군수 겸 경주 병마절제사(慶州兵馬節制使)에 재임시 선정(善政)을 베풀어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고, 철종(哲宗) 때 [북천가(北遷歌)]를 지어 국문학(國文學) 사상 중요한 업적을 남긴 진형(鎭衡)과 예조 참판(禮曹參判) 굉이 명문(名門)의 대를 이었다. 영남유림(嶺南儒林)의 거두(巨頭) 흥락(興洛)은 수차에 걸쳐 벼슬에 등용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學問)에만 진력하여 [서산집(西山集)]을 집필하였으며, 하락(河洛)은 의병대장(義兵大將)으로 무공(武功)을 세워,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원식(元植)·동삼(東三)·창숙(昌淑)·붕준(鵬濬)·황(榥) 등과 함께 가문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의성 김씨(義城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53,633가구, 219,94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