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녀를 위한 소년소설
(대구문학 12울호에 발표한 소설임)
눈내리는 크리스마스 이브
김 한 규
우리 학급에 한 아이가 새로 전학을 왔습니다. 이름은 리라였습니다. 그 애가 전학온 후로 나를 대하는 혜영 언니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본래 나를 친 동생처럼 사랑해 주는 동숙 언니를 버리고, 혜영 언니를 친 언니처럼 따르다가 마음속의 언니로 정한 것은 혜영 언니가 아주 존경할만 하다거나 마음이 딱 맞아서는 아니었습니다.
혜영 언니가 나의 재주를 본 것처럼 나는 혜영 언니의 예쁜 얼굴에 마음을 둔 것이었습니다.
나는 내 얼굴이 못 생겼다는 게 여간 서운하지 않았습니다.
‘백합여고’ 1학년에 입학한 지난 3월에, 짓궂은 우리 학급 친구 몇 명이 ‘아프리카’란 별명을 내게 붙였습니다.
그것은 무더운 아프리카에 여행을 다녀온 남학생처럼 내 얼굴이 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별명의 소리를 듣게 되자 나는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우리 어머니나 시집간 친 언니도 나처럼 못난 편이었습니다.
과학 시간에 ‘유전’에 관한 것을 배울 때마다. 이것도 ‘유전’이거니 하는 생각이 들어 정말 싫었습니다.
3학년 언니 중에 예쁜 언니 한 사람을 마음속의 의자매 언니로 정해 보자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얼굴은 못 생겨도 친 동생처럼 아껴주는 3학년 선배 언니들이 제법 많이 생기게 된 편이었습니다. 동숙 언니나 혜영 언니도 그런 축이었습니다.
‘백합여고’ 1학년인 내가 대구시내 남녀 고교 학생 문예백일장에서 숱한 상급생들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장원으로 당선 되었습니다.
운동장 아침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으로 부터 상장을 전달 받고 ‘문학소녀’라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 후로, 교장선생님이 나를 격려해서 붙여주신 매력있는 ‘문학소녀’란 별명을 그대로 불러주는 친구와 선배들이 의외로 많이 생겼습니다.
그런 덕택으로 ‘아프리카’라는 내키지 않는 별명이 서서히 사라지게 되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었습니다.
동숙 언니는 3학년에서 최우등생일뿐 아니라 혜영 언니네 학급의 실장이었습니다.
동숙 언니도 나와 같은 지하철을 타고 다녔습니다.
한 코스의 지하철이므로 같은 차에서 서로 만나 한 좌석에 앉을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책이 있으면 동숙 언니가 보기 전에 나 먼저 빌려 주었습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같은 시험이 있을 때는 자기 공부도 제쳐둔 채로 내가 모르는 수학 문제를 풀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동숙 언니의 얼굴이 나처럼 조금 검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어느 날 쉬는 시간에, 동숙 언니가 내게 명작소설을 빌려 주려고 우리 교실엘 잠시 왔다가 간 후였습니다.
옆 자리의 짝궁이 내게 물었습니다.
“얘 영란아, 저이 너 친 언니지?”
순간 나는 전신에 오싹 소름이 끼쳐, 대답조차 못한 채로 얼굴이 화끈 달아 올랐습니다.
내 짝궁의 질문을 나는 영영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로는 동숙 언니의 친절이 도리어 지겨워졌습니다.
지하철에서 동숙 언니와 같은 자리에 앉을 때나 오후에 지하철 역으로 함께 나갈 때는 꼭 마음 속 어디선가 ‘유전, 유전’ 하는 소리가 내 가슴을 꼭꼭 찔러 주었습니다.
유전에 대한 실망과 공포의 탈출은 너무나도 어려운 시련이었습니다.
동숙 언니가 싫어질수록, 선명한 눈썹에다 또록한 눈동자랑 오똑한 코와 선연한 입술을 가진 혜영 언니의 얼굴에 마음이 너무 끌리는 것이었습니다.
혜영 언니와 나의 관계를 마음속 의자매 언니와 아우로 정한 것은 그런 내 심정으론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동숙 언니와 혜영 언니는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던 모양으로 내가 동숙 언니와 만나는 것을 싫어하는 눈치였습니다.
며칠 후 점심 시간에, 내가 동숙 언니에게 빌린 책을 주려고 3학년 교실을 잠시 들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방과 후에, 혜영 언니가 버릇처럼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내게로 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 요즘 나보다 동숙이를 더 자주 만나는구나. 오늘도 3학년 교실에 찾아 와 마음속 언니인 난 거들떠 보지도 않고 동숙이 하고만 소곤거리다가 가 버리다니 말도 안돼! 이젠 너도 학교 근처에 방을 얻어 자취를 해야겠다. 그러면 내가 너의 자취방으로 자주 놀러가도 되지 않겠니?”
하긴 나의 부모님이 비닐 하우스 농사 일로 도심의 집에서 변두리 지역에 이사한 탓으로 학교 다니기엔 오히려 먼 길이 되었습니다.
혜영 언니 말대로 방을 얻어 자취를 하고 싶지만 방세랑 생활비가 많아서 가난한 부모님 부담이 커질 뿐입니다.
아버지가 중소기업 회장이라는 부잣집 혜영 언니 편에서야 어려운 우리집 사정을 알 리가 없습니다.
결국 반대하는 부모님을 졸라서 내가 자취를 하게 된 것은 잘 사는 혜영 언니에게 가난하다는 약점을 보이기가 싫어서입니다.
내가 자취를 하게 되자, 혜영 언니는 저희 친구들을 데리고 하루 건너 만큼씩 자취방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얘, 넌 무슨 책 귀신이 들렸담? 좀 놀다가 보려무나”
내가 읽고 있는 책을 빼앗아 감추며 그들은 하모니카에 맞춰 유행가랑 랩을 부르기도 하고 편을 갈라 군음식이나 식사 내기를 하였습니다.
그것이 심상해지면 극장이나 pc방으로 몰려 갔습니다.
나도 혜영 언니를 따라 다니자니 학교 공부와 독서에는 등한해졌습니다.
식사 내기나 극장 출입에 쓸 돈이 없는 것도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두근거리는 내 마음 속을, 손톱만큼이라도 눈치 못 채는 혜영 언니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 날도 극장엘 가자고 끌었지만, 저금 통장 외에는 주머니가 텅 비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서랑 공부는 안 하고 영화 보러 극장만 다니면 어떡하니?”
내가 이런 말을 하자 혜영 언니는 샐쭉해지면서 느닷없이
“얘, 넌 언제부터 그랬니? 옛날엔 학생들의 극장 출입이 무조건 금지되었지 만, 지금은 좋은 영화는 학생들도 극장 출입이 괜찮다는구나. 그래도 싫음 관두고 책이나 보렴!”
하고는 얼른 자기 친구들을 따라가 버렸습니다.
자취를 시작한지 석달을 못 넘긴 채로 나는 자취생활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집에서 학교까지의 먼 길을 선택하여 다시 지하철로 다니게 되었습니다.
리라가 우리 학교에 전학온 것은 2학기가 시작되려는 바로 그 무렵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뮤지컬 배우라는 리라는, 장래 영화 배우가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애들이야 엄두도 못낼만큼 좋은 옷을 입고, 배우처럼 머리를 이상한 모양이나 색깔로 꾸며 다닌다고 학급 애들은 그를 ‘멋쟁이’라 불렀습니다. 혜영 언니처럼 리라도 예쁘장한 얼굴이었습니다.
공부는 좀 못해도 노래 하나만은 썩 잘 불렀습니다.
같은 합창부라는 이유로 혜영 언니와는 곧 친하게 된 모양이었습니다.
점심 시간이 끝날 때 쯤, 교실로 들어오다가 뒷창 너머로 눈을 돌리면 음악실에서 내려오는 돌층계에는 으레 함께 오는 혜영 언니와 리라가 보였습니다. 음악실 뿐 아니라 어디든 함께 얼려 다녔습니다.
그 후로 혜영 언니는 나를 잘 만나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지난 토요일만 해도 그랬습니다.
오랜만에 혜영 언니네 집을 찾아간 나는 아예 따돌림을 당한 꼴이 되었습니다.
미리 찾아온 리라와 혜영 언니 두 사람만 영화 이야기로 수다를 떨고 있었습니다.
“어제 우리 학교 시청각실에서 본 ‘신데렐라’ 말야. 난 그 영화 참 어린애 장난 같더라. 재미도 통 없구~”
리라가 혜영 언니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오랜만에 찾아가 말 한마디 없이 뚱하니 앉았기도 뭣해서 나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그래도 그 영화가 나는 참 재미있더라. 신데렐라가 부럽기도 하고...”
그러자 리라가 나를 향해 대뜸 받아 쏘는 것이었습니다.
“얘, 같은 영화를 봤는데 생각이 왜 이리 다를까? 그건 영란이 네가 극장 영화를 너무 안 보니까 그런거야. 넌 책만 보는 책벌레야, 게다가 혜영 언 니에겐 인정머리 없는 구미호야 구미호!”
쏘아붙이는 리라의 말투가 앙숙처럼 사나웠습니다.
‘책벌레’에다 ‘구미호’라는 앙심의 말에 나는 갑자기 기가 팍 죽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다툼 낌새를 눈치챈 혜영 언니는 파랗게 질린 나를 보면서도 단번에
“영란인 나랑 극장에도 안 가면서 학교에서 보여주는 영화 이야기는 너무 잘해 탈이야.”
하며 비웃듯이 대질러 버립니다.
“근데 언니, 피아노 곡 ‘소녀의 기도’와 ‘은파’ 말예요.”
방긋 방긋 웃는 얼굴로 리라는 얼른 혜영 언니 쪽으로 돌아앉아 버렸습니 다.
빨강 노랑 예쁜 옷차림을 한 단풍잎들이 한 잎 두 잎 시나브로 떨어졌습니다. 뒹구는 단풍잎을 휩쓸며 찬 바람이 싸르르 불기 시작합니다.
스산한 바람이 옷깃으로 스며드는 어느 가을 날이었습니다.
그날 아침은 지하철을 타러 가는 시각이 좀 늦었기 때문에 학교 가는 시각도 여느 때보다는 늦은 편이었습니다.
거의 다 등교한 뒤여서 늦게 가는 학생들만 띄엄띄엄 보일 뿐이었습니다.
교문에서 30m쯤 되는 곳에 다다랐을 때입니다.
엉겁결에 맞은 편 길에서 나란히 걸어오는 혜영 언니와 리라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 쪽에서도 응당 나를 봤으련만, 둘은 못 본 체 시침을 떼고 교문으로 쏙 들어가 버렸습니다.
교복 위에다 화려할 정도로 예쁜 코트를 입고 멋진 운동화를 신은 ‘쌍둥이 자매’ 같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새삼스런 패배감에 빠져 버렸습니다.
본관 교실로 바람처럼 사라지는 두 사람을 교문 근처에서 바라보는 순간, 나는 상처입은 한 마리의 비둘기 마냥 온몸의 기운이 쭉 빠져 버렸습니다. 그대로 교실에도 못갈 정도로 탈진상태가 되버린 셈입니다.
첫시간 종소리가 울릴 즈음에야 쓰러질 듯이 겨우, 교실에 들어서는 나를 본 다른 친구들은 모두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그날 오후에,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곧바로 열이 올라 방에 쓰러져 버렸습니다. 39도라는 높은 열과 몸살에 시달려 나는 사흘 동안이나 학교를
결석했습니다.
약을 먹고 몸을 추슬러 나흘만에야 겨우 학교를 가게 되었습니다.
지하철 역에서 만난 동숙 언니가 깜짝 놀란 얼굴로 두 눈이 동그래졌습니 다.
“얘 영란아, 얼굴이 왜 이리 헬쑥해졌니? 결석했다면서...”
나는 아무런 대답도 못한 채로 그냥 힘없이 가볍게 웃음만 지을 뿐이었습 니다.
“겨울이 다 된 날씨에 감기 조심을 꼭 해야 돼요. 옷도 더 두텁게 입으렴.”
동숙 언니는 내 손을 꼭 잡아 주었습니다. 동숙 언니의 따뜻한 손 기운이 내 온몸으로 짜릿하게 퍼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혜영 언니는 내가 결석한 줄도 몰랐는지 오랫동안 나를 만나 주지 않았습니다.
나도 혜영 언니네 집이나 3학년 교실 쪽으로 언니를 만나러 갈 힘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이래저래 혜영 언니와 못 만난지도 보름이나 되던 날이었습니다.
1교시 시작 전에 화장실을 다녀 오는데 뜻밖에도 혜영 언니가 까딱까딱 손짓을 하며 내게로 다가왔습니다.
“너 요즘 동숙이와 아주 얼려 다닌다지?”
층계 밑 구석으로 오더니 이렇게 입을 떼는 것이었습니다.
놀란 눈으로 내가 쳐다보자 혜영 언니는 벌써 안다는 눈빛이었습니다.
“흥, 뭐 숨길 건 없잖아? 흥...어제 오후에도 그랬잖니? 뭐, 아무래도 좋다 니까... 흐응!”
한껏 코웃음치는 냄새가 풍겼습니다.
어제 일이란 별게 아니었습니다. 어제는 오후에 우연히 만난 동숙 언니와 지하철 역으로 같이 나가던 중이었습니다.
어디엘 갔던지 역쪽에서 걸어오던 리라와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이 말이 어느 새 혜영 언니의 귀로 들어간 눈치입니다.
휴대폰으로 리라가 고자질한 모양입니다.
나를 무시한 채 날마다 리라와 얼려다니는 혜영 언니가 그깐 일로 나를 흉잡는다는 건 아무리 곱씹어 봐도 너무한 일이었습니다.
“그래두 난 할 수 없지 뭐야. 영란이 제가 그러는데 내가 어쩔 거야? 이제 20 여일만 있으면 크리스마스가 되는데 선물도 나보다 동숙에게 더 좋은 걸 사 줄테지, 그렇지?”
혜영 언니는 점점 더 기가 났습니다.
하지만 나는 동숙 언니의 선물까지는 생각지도 않던 일이었습니다.
동숙 언니에겐 크리스마스 카드 한 장 못 주더라도 의자매 언니에게만은 그래도 푸짐한 선물을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문학서적 중에도 베스트셀러 한 권을 선택하여 선물한다면 무척 기뻐할 것이라는 나의 속맘을 혜영 언니도 알아 주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12월이 되면 젊은이들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들뜨게 됩니다.
어린이들은 또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가슴을 태웁니다.
언제나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누구라 없이 펄펄 흰 눈 내리기를 기다립니다.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산타클로스는 빨간 코 루돌프와 일곱 마리의 사슴이 끄는 썰매를 타고 달려갑니다.
하얀 수염이 바람에 날립니다.
머리털도 눈썹도 모두 하얀 산타 할아버지는 빨강 옷에 빨강 고깔을 쓰고 썰매 줄을 잡고 계십니다.
썰매 위에는 세계 어린이들에게 줄 선물 꾸러미가 가득 실렸습니다.
~아 아~ 산타 할아버지가 내게는 무슨 선물을 주실까?...
어린이들은 모두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기다리게 됩니다.
늦가을도 지나 겨울의 문턱인 12월인가 싶더니 어느새 크리스마스가 내일로 다가옵니다.
오늘 밤에는 성당이랑 교회마다 크리스마스 전야제가 환하게 열립니다.
산타클로스가 눈 썰매를 타고 오신다는 크리스마스 이브가 바로 오늘 밤입니다.
눈이라도 내릴 듯이 오늘은 아침부터 잔뜩 흐린 하늘이었습니다.
학교 공부가 끝나고 나는 곧바로 혜영 언니네 집으로 갔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리라가 먼저 와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잔잔히 흘러나오는 혜영 언니네 방 한켠에는 화려한 크리스마스 트리가 네온의 불빛을 반짝이며 서 있었습니다.
그 아래에는 부모님께 받은 선물인 양 멋진 구두 한 켤레와 가방 하나가 나란히 놓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잘못 된 짐작이었습니다.
얼마 후에 혜영 언니가 내 앞으로 그 가방을 꺼내 놓는 것이었습니다.
“외제는 아니지만 영란이가 구지레한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게 보기 싫어서 새 가방을 선물 로 샀지 뭐야?”
혜영 언니는 무척 자랑스런 얼굴로 말했습니다.
그리곤 역시 뻐기는 듯한 목소리로, 이래 뵈도 서울 어느 유명 공장에서 만든 특제품으로 20만원 짜리라고 덧붙였습니다.
“영란이는 언니 복을 타고 났어. 언니 덕으로 멋진 가방까지 들어 보구.”
초라한 내 가방을 훑어보며 리라가 비아냥거렸습니다.
“언니가 선물을 내놓음 동생도 같이 내놓는 법이야.”
리라의 말에 빨개진 얼굴이 된 나는 책 한권을 내밀었습니다.
‘청마시집’인 ‘깃발, 나부끼는 그리움’ 이었습니다.
며칠전에 어머니를 졸라 겨우 마련한 돈으로 베스트셀러 라고 생각되는 책을 산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조금 후에 리라의 지껄임이 총알처럼 튀어 나왔습니다.
“야~ 책벌레가 다르긴 달라. 하지만, 고급 가방에다 책 한 권이면 너무 기 울잖아?”
나는 점점 달아오는 얼굴을 푹 숙였습니다. 혜영 언니의 시선을 따갑게 느꼈습니다.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다섯 시를 알리는 괘종소리와 함께 전등불이 켜지면서 ‘징글벨,징글벨!’ 크리스마스 캐럴이 경쾌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리라가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다시 오겠다며 일어섰습니다.
혜영 언니에게 받은 선물인 듯 포장된 물건을 들고 리라가 의기양양한 걸음으로 나간 뒤에 나도 곧장 일어났습니다.
혜영 언니가 나를 보고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난 영란이가 이깐 시집 나부랭일 선물로 가져 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 이 런 건 오빠 서재 에도 그득하단다. 리라는 저런 20만원 짜리 구둘 가져왔 는 걸 얘.”
쥐여주는 선물 가방을 들고, 나는 쫓겨 나오 듯 그 방을 나왔습니다.
어깨 너머로 쏟아지는 크리스마스 트리의 네온 불빛을 현란하게 느끼는 순간 나는 특제품 가방을 마루에 놓아 버렸습니다.
어둠이 쌓인 거리에는 어느 새 하얀 눈이 한 두 송이 희끗 희끗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나의 발걸음이 빨라짐에 따라 함박눈은 점점 더 많이 내려 뽀얗게 쌓였습니다.
달아오른 볼로 눈송이는 쉴 새 없이 스쳐갔습니다.
가난한 한 사람의 성의가 이처럼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자꾸만 눈물이 솟았습니다.
어디로 어떻게 쏘다녔는지 몰랐습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잡으며
“영란이구나!”
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을 땐 지하철 역으로 가는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돌린 곳엔 동숙 언니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역시 쓸쓸한 웃음을 띤 채로입니다.
“학교 공부 다 마치고 사뭇 너를 찾았댔어.”
동숙 언니는 무엇인가 들었던 것을 내밀었습니다.
“ 이것 가져. ‘소월시집’인 ‘진달래꽃’이란다.”
눈발 때문만도 아니게 나는 그예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동숙 언니를 와락 쓸어안아 버렸습니다.
동숙 언니도 나를 꼭 껴안아 주었습니다.
동숙 언니의 뜨거운 눈물이 내 얼굴 위로 뚝뚝 떨어졌습니다.
“언니, 내가 잘못 했수. 내가! ...”
두 사람은 꼭 껴안은 채로 눈물이 흥건한 얼굴에 눈발을 맞으며 오랜동안 한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뚜우우~웅!
여일히 뿌리는 자욱한 함박눈을 가르며 지하철의 먼 기적 소리가 은은히 들리는 듯한 밤이었습니다.
눈눈눈...눈눈눈!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에 함박눈이 그지없이 펑펑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래도 눈은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그래도 눈은 아무런 소리도 없습니다. 끝
☆ 눈내리는 크리스마스 이브 ☆
이 작품은 어린이에게 맞는 판타지나 생활 동화라고 볼수는 없습니다.
청소년이나 성인 그리고 독서력과 정신연령이 높은 어린이들의 심성에 흥미와 감동을 줄 수도 있는 글이라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소설 영역에서 창작한 소녀를 위한 소년소설이라고 밝혀둡니다.
(지은이)
<특기사항> 김한규(아동문학분야 동화)
1.문단 약력
(1) 등단지 및 등단 연도
가 ‘서울신문’신춘문예(동화)1965년도 당선 ‘분이와 들국화’
나 ‘매일신문’신춘문예(동화)1967년도 당선 ‘코스모스 병원’
다 ‘영남일보’신춘문예(소설)1968년도 당선 ‘옥색 저고리와 어머 니’
(2) 작품집: 동화집 ‘그리운 얼굴’ ‘개미나라’ ‘제비와 참새’ 등
2.계좌번호: 대구은행
3.휴대폰 번호: 010-9902-7010, 집전화 번호: (053)-768-9515
4.주소: 대구광역시 수성구 상동 55-14 번지
5.메일 주소: ykj 7010 @hanmail. 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