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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것이 평화이다.
무엇에 쫓기듯이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일상인 것 같다. 그래야 부지런하다는 칭찬도 받고,. 그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 양 살아왔는데, 이게 다 위에 놈들의 계책이라는 것이 버르란트 러셀의 생각이다. 우리 진짜로 잘 살아보자. -몽수리
버트란트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서문
나는 이 글을 통해 사고든 행동이든 지나치면 위험하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또한 내가 공산주의나 피시즘에 찬성할 수 없는 이유와 특히 그 둘의 공통되는 점들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를 밝혔다.
지식의 중요성에 대해선 직접적인 실용성만으로 판단할 게 아니라 폭넓게 생각하는 사고 습관을 함양시키느냐, 아니냐로 판단하자고 주장한다. 이런 식으로 보면 실용성은 많은 경우 오늘날 무용하다고 낙인찍힌 것들 중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불관용과 편협함, 그리고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정력적인 행동은 그것 자체가 존경할 만한 것이라는 믿음으로 인해 세계가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이 이 책에 실린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일반 논제이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
그렇다면 일이란 무엇인가? 일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지표면 혹은 지표면 가까이 놓인 물질을 다른 물질과 자리를 바꿔놓는 일이다. 또 하나는 타인들에게 그런 일을 하도록 시키는 일이다.
첫 번째 종류의 일은 즐겁지 못하고 보수도 박하다. 두 번째 일은 즐겁고 보수도 높다. 또한 이 일은 무한히 확대될 수 있어서 지시를 내리는 사람들뿐 아니라 어떤 지시를 내려야 할지에 대해 조언해주는 사람들도 있다. 흔히 조직화된 두 개의 집단에서 정반대되는 두 가지 조언이 동시에 나오게 마련인데 이게 소위 정치역학이다. 이런 일을 하는 데 필요한 기능은 ‘어떤 조언을 할 것인가’하는 주제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말과 글로써 설득하는 기술, 즉 선전에 관한 지식이다.
미국의 경우는 예외지만 유럽에서 이러한 일을 하는 두 계층보다 존경받고 있는 제3계층이 존재한다. 바로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남들에게 일할 수 있는 은전을 베푼 대가를 받는 사람들이다. 이런 지주들은 게으르다. 그러니 잘못하면 내가 지주들을 찬양하는 것으로 비춰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게으름은 불행하게도 타인들의 근면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사실, 안락하게 게으름을 피우고자 하는 그들의 욕망이야말로 역사적으로 볼 때 일해야 한다는 신조가 생겨난 뿌리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본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일 것이다.
문명이 시작된 이래로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인간은 열심히 일해도 자신과 가족의 생계에 필요한 정도밖에 생산할 수 없었다. 비록 그의 아내도 남편 못지않게 열심히 일했고 아이들도 나이가 차는대로 노동력을 보탰겠지만 말이다. 최소한의 필요를 웃도는 작은 양의 잉여물이 생긴다 해도 전사나 사제 집단에게 돌아갔다.
기근이 닥칠 때는 전혀 잉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일하는 사람들이 굶어죽은 반면 전사와 사제들은 평상시처럼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우리가 근로의 바람직성과 관련해 당연시 여기고 있는 많은 내용들은 이 체제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따라서 이것들은 산업사회 이전의 산물이기 때문에 현대세계는 적합하지 않다. 현대의 기술은 여가를 소수 특권계층만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공동체 전체가 고르게 향유할 수 있는 권리로 만들어 주었다. 근로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이며 현대 세계는 노예제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원시공동체의 경우 농부들은 가만히 내버려 두었더라면 얼마 안 되는 잉여를 전사와 사제들에게 나눠주기보다는 차라리 잉여가 생기지 않도록 생산을 줄이거나 소비를 늘렸을 것이다. 처음에 전사와 사제들은 힘으로 강제하여 농부들을 생산케 하고 잉여를 내놓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일한 대가의 일부를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부양하는 데로 빠져나간다 하더라도 열심히 일하는 것이 농부들의 본분이라는 윤리를 받아들이도록 유도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 방법을 쓰게 되자 강제력을 쓸 일이 적어지고 따라서 지배에 드는 비용도 줄어들었다.
오늘날도 왕이 근로자보다 많은 수입을 올려선 안 된다고 주장하면 영국 임금생활자의 99퍼센트는 아마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의무란 개념은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자기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주인의 이익을 위해 살도록 유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물론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인류 전체의 이익은 동일하다고 어거지로 믿음으로써 스스로에게도 이 사실을 은폐한다. 그런 믿음이 진실인 경우도 있긴 하다. 예컨대 노예를 거느렸던 아테네인들은 여가의 일부를 바쳐 문명에 영원히 남을 공헌을 했다. 공정한 경제체제 하에서였다면 그런 공헌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여가란 문명에 필수적인 것이다. 예전에는 다수의 노동이 있어야만 소수의 여가가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수의 노동이 가치있는 이유는 일이 좋은 것이어서가 아니라 여가가 좋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현대사회는 기술의 발전으로 문명에 피해를 주지 않고도 얼마든지 공정하게 여가를 배분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 기술은 만인을 위한 생필품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양을 엄청나게 줄였다.
이것은 전시에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때는 군대의 모든 남자들, 군수품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들, 전쟁에 관여하는 사람들 등은 모두 생산적인 일에서 손을 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국측 미숙련 임금노동자들의 물질적 복지 수준은 전쟁 전 혹은 전쟁 이후보다 훨씬 높았다. 그러나 이처럼 중요한 사실은 재정에 의해 은폐되어졌다. 차용이란 방법을 통해 마치 미래가 현재를 살찌우고 있는 듯 보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빵 덩어리를 먹고 살 수 있겠는가.
생산을 과학적으로 조직하면 현대세계는 노동력 중의 작은 일부만으로도 사람들을 편안하게 지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전쟁은 결정적으로 보여주었다. (…)
그러나 실제 상황은 옛 혼란으로의 복귀였다. 일하는 사람은 장시간 일을 해야 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일자리가 없어 굶어죽게 방치되었다. 왜? 일은 의무이므로, 사람은 그가 생산한 것에 비례해 임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근면성으로 대표되는 그의 미덕에 비례해 임금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노예 국가의 도덕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생겨난 상황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다. 그러니 결과가 비참한 것일 수밖에.
예를 들어보자. 일정한 수의 사람들이 핀 만드는 공장에서 일할 때, 전보다 두 배의 핀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한다 그러나 핀을 두 배씩이나 필요로 하지 않을뿐더러 이미 핀 값이 너무 떨어져서 더 이상 낮은 가격으로 팔 수도 없다.
이때 지각있는 세상이라면 핀 생산의 노동시간을 8시간에서 4시간으로 조정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모두 종전처럼 굴러갈 것이다. 그러나 실제 우리 세계에서 그렇게 했다간 풍속문란 행위쯤으로 여길 것이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8시간 일하고 핀은 자꾸 남아돌고 파산하는 고용주들이 생겨나고 과거 핀 제조인원은 절반이 직장에서 내쫓긴다.
가난한 사람들도 여가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부자들에겐 언제나 충격적이었다. 19세기 초 영국에서는 남자의 평일 근로시간이 15시간이었다. (…) 노동시간이 너무 길다고 하면 되돌아오는 대답은, 일이 어른들로 하여금 술을 덜 먹게 하고 아이들에겐 못된 장난을 덜 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잠깐 근로의 윤리에 대한 미신을 버리고 진솔하게 생각해보자. 모든 인간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노동의 결과물을 일정량 소비하게 되어 있다. 노동이란 것을 전반적으로 불쾌한 것으로 여긴다면 자신이 생산하는 것 이상으로 소비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물론 의료인처럼 상품 대신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먹고 자는 데 따르는 대가로 뭔가를 제공해야 한다. 이 정도 선이라면 근로의 의무를 받아들여 마땅하다 그러나 오직 이 정도까지만이다.
최소한의 일조차 피해가는 사람들, 다시 말해 많은 돈을 상속받은 이들이나 돈과 결혼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선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다. 이 사람들에게 게으름을 허용하는 것이 노동자들이 과로로 죽든가 굶어죽게 되어있다고 여기는 것만큼 해로운 것이라곤 생각지 않는다.
만일 사회를 현명하게 조직해서 아주 적정한 양만 생산하고 보통 근로자는 하루 4시간씩만 일한다면, 무두에게 충분한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고 실업이란 것도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부자들에겐 충격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여가가 주어지면 어떻게 사용할지도 모를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여가의 현명한 이용은 문명과 교육에 의해 가능하다. 평생 동안 장시간 일해 온 사람이 갑자기 일을 하지 않게 된다면 따분해질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상당한 양의 여가 없이는 최상의 많은 것들로부터 차단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박탈에서 겪어야 할 이유는 이제 더 이상 없다. 다만 우매한 금욕주의, 그나마 자기는 지키지 않으면서 남에게나 강요하는 금욕주의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과도한 노동을 주장케 할 뿐이다.
러시아에서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지배계층, 특히 노동의 존엄성에 대해 교육 선전하는 일을 하는 계층의 태도는 지배계층들이 소위 ‘정직한 무산자’들에게 항상 설교해온 것과 거의 똑같다. 근면하라, 절주하라, 먼 장래의 이익을 위해 장시간 일하려는 의욕을 가져라, 심지어는 당국에 순종하라는 것까지.
오랜 세월 부자들은 ‘정직한 노동’을 칭찬하는 글을 써왔다. 소박한 생활을 예찬하고 부자들보다 가난한 자들이 천국에 갈 가능성이 높다고 가르치는 종교를 공언해 왔으며, 육체노동자들로 하여금 물질의 공간적 위치를 변화시키는 일에는 특별한 고귀함이 있다고 믿게 만들려고 애써왔다.
우리는 경제적 정의를 이룩할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에 전체 생산물의 많은 부분이 일하지 않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생산통제의 중앙기관이 없기 때문에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이 대량 생산된다. 결국 우리는 많은 노동인구들을 놀게 만든다. 그들의 무노동은 다른 노동자들의 과도한 노동으로 보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방법들이 부적합하다고 판명될 경우에는 전쟁을 일으킨다. 많은 사람들에게 고성능 폭발물을 만들게 하고 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마치 방금 폭죽을 발견한 아이들처럼 신나게 터뜨리게 한다.
이 문제에 있어 우리는 두 가지 동기로 인해 오도되어 왔다. 하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어야 할 필요성이다. 이 때문에 부자들은 수천 년에 걸쳐 노동의 존엄성을 역설해 왔다. 자신들은 그 부분에서 존엄하지 않아도 되도록 배려하면서 말이다.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지구상에서 일으키는 매우 멋진 변화들에서 기쁨을 느끼도록 만드는 메커니즘에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동기 중 어느 것도 실제로 일하는 사람에겐 아무런 호소력이 없다. 노동자에게 “당신이 인생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뭐야?”라고 물었을 때 “나는 육체 노동을 즐긴다. (…) 노동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갈 때만큼 행복한 순간은 없다”고 대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들은 일을 생계에 필요한 수단으로만 생각할 뿐이다. 그들이 행복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바로 여가에서 나오는 것이다.
과거에는 속편하게 노는 것에 대한 수용력이 있었다. 그러나 능률 숭배로 인해 그런 부분이 사라져 버렸다. 현대 인간은 모든 일이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자체를 목적으로 일하는 법이 없다. 진지한 사람들은 영화 보러가는 습관을 비난하며 그런 버릇은 젊은이들을 범죄로 이끈다고 말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 만드는 노동을 훌륭한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이기 때문이고 돈을 벌게 해주기 때문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돈을 버는 것은 선이고 돈을 쓰는 것은 악이란 얘기다. 그 두 가지가 거래의 양 측면이란 점을 생각할 때 이런 얘기는 모순이다.
우리 사회에서 개인은 이윤을 위해 일한다. 그런데 그가 하는 일의 사회적 목적은 생산한 것을 소비하는 데 있다. 생산의 개인적 목적과 사회적 목적 사이의 이런 분리야말로 이윤창출이 산업을 자극하는 세계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명쾌한 사고를 하기 어렵게 만드는 주요인이다.-
우리는 생산에 관해선 너무 많이 생각하고 소비에 관해선 너무 적게 생각한다. 그 결과로 우리는 즐거움의 향유나 소박한 행복에는 별 중요성을 두지 않으며 생산을 그것이 소비자에게 주는 기쁨에 근거해 판단하지 않는다.
유한 계층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결코 야만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의무를 지우지 않은 채 유한 계층을 대대로 세습하는 것은 엄청난 낭비다.
또 하나 문제점은 대학의 연구 작업들이 조직화되어 있어서 다소 독창적인 연구 방법을 생각하는 사람을 좌절시키기 쉽다는 것이다. 따라서 학문기관들이 나름대로 유용한 면도 있긴 하지만 대학 바깥의 모든 이들이 여가를 즐기는 비실용적인 것을 추구하느라 바쁜 세상이 오면 문명의 이익을 지키는 수호자로 적합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하루 4시간 이상 일하도록 강요받지 않는 세상에서는 과학적 호기심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호기심을 마음껏 탐닉할 수 있을 것이고 어떤 수준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든 굶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젊은 작가들은 기념비적인 대작을 내는 데 필요한 경제력을 확보할 요량으로 감감적인 작품을 써서 주의를 끌어보려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사실, 마침내 대작을 쓸 수 있을 만한 상황이 되었을 때는 이미 취향과 재능이 달아나고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생의 행복과 환희가 충만할 것이다. 신경쇠약과 피로와 소화불량 대신에 말이다. 필요한 일만 함으로써 기력을 소모하는 일 없이 여가를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가 시간에 지쳐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므로 사람들은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류의 오락거리들만 찾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1퍼센트는 직업상의 일에 써 버리지 않은 시간을 무언가 유용한 것을 추구하는 데 바칠 것이다. 또한 그런 일들은 그들의 생계와 관련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독창성이 방해받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나이 많고 박식한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표준에 맞출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가의 좋은 점은 이런 예외적인 경우에만 확인되는 것이 아니다. 행복한 생활의 기회를 갖게 된 평범한 남녀들은 보다 친절해지고 서로 덜 괴롭힐 것이고 타인을 의심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또한 전쟁을 일으키게 되면 모두가 장시간의 가혹한 노동을 해야 할 것이므로 전쟁 취미도 사라질 것이다.
모든 자질 중에서 선한 본성은 가장 필요한 자질이다. 이것은 힘들게 분투하며 살아가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편안함과 안전에서 나오는 것이다.
현대의 생산방식은 우리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쪽 사람들에게는 과로를 다른 편 사람들에게는 굶주림을 주는 방식을 선택해왔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어리석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리석음을 영원히 이어나갈 이유는 전혀 없다. <>
첫댓글 남자들은 필짱끼고 낄낄대고 섰고 여자들은 고구마 캐고 땅을 후벼 팠다. 남자들은 둘러앉아 코리안시리즈며 꼼수 이야기며 재미있는 동안 여자들은 고구마 찌고 땅콩 삶고 설겆이 하고, 또 가끔씩 웃어주어야 하는 노동에 시달렸다. 문제는 내 행복한 게으름이 다른 사람의 피곤한 근로로 보충되어야 하는 것에는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이다.
맞다
동생은 대학못가고 나만 갔다. 당연하게도 난 사나아라서..
이제는 여자애라도 대학에도 보내고 좋은거 먹게 하고 좋은 옷 입게 하고 시집가서 두들겨맞지 않게 할거다-우리 버들이도..
이런거는 진화가 아니것지..각성인가?
다시 올린다. 수석이 말이 맞지만, 그렇다고 그게 다가 아닌 것 같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오랜 세월 부자들은 ‘정직한 노동’을 칭찬하는 글을 써왔다. 소박한 생활을 예찬하고 부자들보다 가난한 자들이 천국에 갈 가능성이 높다고 가르치는 종교를 공언해 왔으며, 육체노동자들로 하여금 물질의 공간적 위치를 변화시키는 일에는 특별한 고귀함이 있다고 믿게 만들려고 애써왔다.>
여자들은 또한 재미있게 고구마 캐고 남자들도 재미있게 앉아서 야구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평화>로운가. 말하자면 대칭적, 획일적인 평균이 아니라, 일종의 역할분담과 같은 나눔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위 댓글에 두번 나오는 '재미있게'가 과연 같은 '재미'일까? 물어봤더나? 땀나는 노동을 '재미'나 '고귀함'으로 강요하는 하이어라키 상층부들(사대부)의 음험한 전략은 아닌지. 분담된 역할에 대한 댓가의 서열이 문제라는 이야기. '그럴 수 밖에 없음', 그 보상의 기제는? 일고의 양보를 허용치 않으려는 가진 자들의 탐욕으로 부처나, 예수같은 혁명가들의 출현 2000년이 지나도록 한 치 앞도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그들이 탐욕의 세계경영을 위해 다아윈 마저도 어떻게 활용했는지 모두 잘 아는 이야기 아닌가. 어쩌면 다아윈은 오늘날 부조리의또 다른 근거를 마련하는데 기여했을 터. 삼성 등록이사 연봉 59억. 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