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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삼국지 요약
1.서론(序論)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칠웅(七雄)이 합종(合從)과 연횡(連횡)의 권모술수를 다하여 싸우다가, 마침내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천하를 통일하는 이야기는 <사기(史記)>보다도 이야기로 꾸민 <동주 열국지(東周列國志)가 훨씬 많이 사람들에게 애독되고 있다. 또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의 싸움도 <사기>보다는 이야기로 꾸민 <초한춘추(楚漢春秋)가 역시 통속적인 흥미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정사 <삼국지>는 지나치게 간결하여 배송지(裵松之)의 주석이 없으면 잘모르는 부분이 있다. 그런 주석을 교묘하게 집어 넣어서 이야기를 꾸민 것이 <연의 삼국지(演義 三國志)>이다. 삼국지의 조조의 위(魏)가 5대 45년이고, 유비의 촉한이 2대 43년, 손권의 오가 4대 59년인 것이다. 이미 옛날부터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진수(陳壽)가 찬하고 배송지가 주석한 <정사 삼국지>와, 그것을 이야기로 꾸민 나관중(羅貫中)의 <연의 삼국지>는 우선 그 역사관(歷史觀)이 다르다. <정사 삼국지>에서는 한(漢)의 뒤를 계승하는 중국의 정통적인 왕조를 조조가 세운 위로 적고 있고, 유비의 촉한과 손권의 오는 위에 대해 반기를 든 지방 정권에 불과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수라는 사관(史官)이 위로부터 황제 위를 선양(禪讓)받은 진(晋)의 관원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진의 정통성을 옹호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 반면 나관중의 <연의 삼국지>에서는 유비의 촉한이 중국의 정통 왕조로 되어 있다. 한 마디로 그것은 주자학(朱子學)의 영향 때문이라 하겠다. 후에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도 한에서 위, 위에서 진으로 황제위가 선양되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정사를 원(元)말에서 명(明)초에 걸쳐 산 나관중이 주자학의 영향을 받아 유비의 촉한을 정통처럼 꾸민 <연의 삼국지>를 만든 것인데, 나관중이 붙인 원명대로라면 <삼국통속연의(三國通俗演義)>이다. 이것은 총 24권으로 되어 있고, 매권이 10절로 나누어지고 매절마다 필언시(七言詩) 한 수가 들어 있었다. 따라서 나관중이 쓴 <삼국통속연의>는 총 240회의 이야기로 된 파란만장 장대부비의 대서사시(大敍事詩)인 셈이다. 그것을 그후 3백년 쯤 지난 1666년에서 1686년에 이르는 20년 동안에 청(淸)나라의 모윤(毛淪)과 그의 아들 모종강(毛宗岡)이 120회본으로 개정했다. 그것이 조선왕조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에서 널리 애독되고 있는 <연의 삼국지>의 원본인 것이다.
2. 분구필합(分久必合)
<정사 삼국지>든 <연의 삼국지>든 위, 촉한, 오 3국의 정족과 각축은 50여 년만에 붕괴되고, 광대한 중국 대륙은 사마씨(司馬氏)의 진(晋)에 의해 다시 통일천하가 되었다. 3국 가운데서 촉한이 제일 먼저 망했다. 촉한의 후주 유선은 위의 제 5대주인 조환에게 항복하여, 나라와 백성을 위에 넘겨주고 자신은 위의 서울인 낙양으로 와서 위에서 내린 안락공(安樂公)의 봉작을 만족하면서 여명을 이었다. 이와 같이 촉한의 유선이 형식상으로는 위의 조환에게 항서를 받친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상 이때 위의 실권자는 진왕(晋王)으로 책봉된 사마소(司馬昭)였다. 그 사마소가 어느 날 안락공 유선을 불러 잔치를 베풀고 이렇게 물었다.
"그래, 고국 생각이 나지 않으시오?" 암우한 유선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 풍악 소리가 즐거울 뿐이지, 촉의 생각은 나지 않소이다." 사마소는 씁쓸하게 웃으며 옆에 시립한 모사 가충에게 이렇게 소곤거렸다. "저 따위로 용렬하니, 설사 제갈 공명이 살아 있은 들 어찌 촉을 지탱할 수 있었겠소." 그 사마소가 미구에 죽고 아들 사마염(司馬炎)이 진왕이 되었다. 부조(父祖)의 뒤를 이어 위의 실권자가 된 사마염은 기다림도 주저함도 없이 위주 조환을 협박했다. "위나라가 누구의 힘으로 이룩한 것이오?" 조환은 오로지 진왕 부조의 은공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마염은 거침없이 "吾觀陛下, 文不能論道, 武不能經邦, 何不讓有才德者主之" <내가 보건대, 폐하는 문은 도를 논할 정도가 못되고, 무는 나라를 경륜할 정도가 못되는데, 어째서 제덕이 겸비한 사람에게 임금의 자리를 양보하지 않소> 하고 지껄였다. 오만과 방자함이 이만저만이 아닌 말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며칠 후 위주 조환은 마지못하여 선양(禪讓)이라는 이름으로 위나라를 고스란히 사마염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결국 촉한과 위 두 나라가 진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러나 천하에는 아직도 제 4 대주 손호(孫皓)가 다스리는 오나라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오도 미구에 진제(晋帝) 사마염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다. 진제 사마염은 오주 손호를 귀명후(歸命侯)에 봉하고, 잔치를 베풀어 환대했다. 그 술자리에서 사마염이 이렇게 입을 떼었다. "짐이 이 자리를 마련하여 경을 기다린 지 오래요." 오주 손호는 서슴없이 대꾸했다. "신 역시 남쪽에서 이런 자리를 만들어 놓고 폐하를 기다린 지 오래였습니다." 참으로 뼈대있는 말이었다. 오의 마지막 왕 손호는, 촉한의 마지막 왕 유선보다 몇 갑절이나 훌륭한 삶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손호의 인품은, 그가 진에 항복한 뒤에도, 완강히 투항을 거부하고 진군에 항거한 광주자사 육안(廣州刺史 陸晏)과 건평태수 오언(建平太守 吳彦) 등을 초안하는 글에도 여실히 나타나 있다. 참고로 그 초안문을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지난 날 내가 덕이 없어 하늘의 버림을 받고 힘과 때를 함께 잃었소. 그래서 그만 대조(大朝)에 귀명(歸命)하고 말았소. 듣건대 경들이 성에 의거하여 굳게 지키며 위정(委政)의 정성을 베풀고 있다 하니, 심히 부끄러운 마음 이로 다 말할 수가 없소이다. 그러나 살상이 많고 생명이 땅에 떨어진다 하니 어찌 하리까. 장군께서 굳이 충의를 다할진대, 이 호(皓)의 몸에는 죄가 더해지는구려. 이미 불초 호가 나라를 잃었는데, 경들은 누구를 위하여 절의를 지키고자 하나이까. 이름 없는 싸움을 하며 거역하다니, 서촉과 전 오나라를 가지고도 능히 항거치 못하였거늘, 구구한 광주 건평의 땅을 가지고 어찌 큰 나라와 맞서 다툴 수 있단 말씀이오. 모두 어두운 일이외다. 이 글월이 이르거든 장군은 군사를 거두고 깨끗이 와서 어진 충심을 보이시오. 그리하여 국민을 보전하고 백성을 자유롭게 할진대, 그 또한 장군의 지혜가 아니 되리까. 태강(太康) 원년 8월>손호가 항복한 것이 그 해 5월이었으니, 3개월 후의 일이었다. 이렇게 하여 위, 촉한, 오 3국은 진 무제(武帝) 사마염에 의해 하나로 통일되었다. 천하가 분구필합(分久必合)하는 하늘의 섭리가 실현된 셈이다. 그것은 서기 280년의 일이었다.
3. 무제(武帝)와 태평연월(太平烟月)
진 무제 사마염은 265년에 위의 원제(元帝) 조환으로부터 강압적으로 나라를 선양 받고,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280년에 오를 병탄하여 마침내 천하를 통일했다. 그는 진의 개국 초기에는 스스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현군(賢君)이 되려는 노력을 했다. 그러나 오가 멸망하여 천하가 잔 한 나라로 되자, 무제 자신부터 마음이 해이해지고 따라서 왕족을 비롯한 문무백관이 차츰 사치와 향락을 추구하게 되었다. 한 예를 들어본다. 어느 날 무제가 사위인 왕제(王濟)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갔다. 주안상에 차려져 나온 돼지고기가 여간 맛이 있지 않았다. 무제가 그 비결을 묻자, 왕제는 대수롭잖게, 돼지를 사람의 젖을 먹여 길렀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귀족 양수(羊수)는 가양주를 익힐 때 종들을 시켜 술독을 번갈아 안고 있도록 했다. 사람의 체온으로 술을 빚은 것이다. 유명한 죽림칠현(竹林七賢)이 세상에 이름을 떨친 것도 무제 때였다. 왕융(王戎)촵산도(山濤)촵완적(阮籍)촵유영(劉영)촵완함(阮咸)촵혜강( 康)촵향수(向秀) 등 7인은 고담청론(高談淸論)을 쫓으며 자연대로 사는 생활이 곧 예술이라 했다.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사상을 숭상하며 유교적인 예의범절을 도외시했던 것이다. 그래서 7인 중의 한 사람인 완적은, 모친이 운명했다는 부음을 받고도 두던 바둑을 계속한 다음 계가(計家)까지 마치고는 술을 두 말이나 마셨다. 그리고는 곡을 시작했는데 너무 슬피 울러 피를 몇 되나 토했다고 한다.
무제는 천하를 통일한 후, 꼭 10년 동안 주지육림(酒池肉林)에서 방종을 극하다가 55세로 죽고, 둘째아들 충(衷)이 제위를 계승하여 제2대 혜제(惠帝)가 되었다. 그런데 혜제는 32세의 나이로 즉위했으나, 조정 대신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먹을 곡식이 없어 굶어 죽고 있다는 말을 아뢰자, "세상에 그 따위로 어리보기 같은 놈들이 있단 말인가. 아니, 곡식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 굶어 죽다니!" 하고, 호통칠 정도로 암우(暗愚)한 위인이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그의 황후 가씨(賈氏)는 진의 개국 공신의 가문 출신으로 영특하고 교활했었다. 따라서 모든 정치는 혜제를 제쳐놓고 가후(賈后)가 전담하게 되었다. 일찍이 무제는, 위나라가 일가친척을 주요 관직에서 배제시켰기 때문에 쉽게 멸망한 예를 거울삼아 그 반대의 정책을 채택했었다. 곧 무제는 일가친척에게 우선적으로 감투와 영토를 배분해 준 것이다. 위의 황제가 육친들에게 권력을 나누어주지 않은 것은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무제는 그 반대로 일가 친척들에게 벼슬과 영토와 병력을 주어 진나라의 방패가 되도록 기도했다. 그러나 결과는 무제의 의도한 대로 되지 않고 역사에서 이름 하는 소위 팔왕의 난(八王之亂)이 일어나고 말았다. 무제가 죽은 다음 혜제의 최고 보좌 역은 혜제의 모후인 양태후(楊太后)의 아버지 양준(楊駿)이었다. 가후는 그 두 사람을 두려워한 나머지 시동생인 초왕 사마위(楚王 司馬瑋)를 시켜 양준을 죽이고, 다시 태후마저 감금하여 굶어 죽게 하였다. 양준의 뒤를 이어 여남왕 사마양(汝南王 司馬亮)이 혜제의 후견인이 되었다. 여남왕 양은 사마의(司馬懿)의 아들로서 혜제의 종조부였다. 가후는 이번에는 여남왕을 두려워한 나머지, 또 다시 시동생인 초왕을 시켜 죽이게 했다. 이와 같이 초왕이 고분고분 황후의 명을 받든 것은 장차 제위를 계승하려는 야심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후는 초왕의 그런 야심을 미리 헤아리고 마침내는 누명을 씌워 처단해 버리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가후는 자기가 낳은 아들이 아니라 하여 황태자 마저 구실을 붙여 유배시키기에 이르렀다. 300년 4월 혜제 10년, 여남왕 양의 동생인 조왕 사마윤(趙王 司馬倫)은 가후의 전황을 보다 못해 군사를 일으켜 궁을 기습하여 가후와 그 일당을 죽이고, 혜제를 태상황(太上皇)으로 받든 다음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스스로 제위에 오른 사마윤도 불과 몇 달이 못되어 혜제의 동생인 성도왕 영(成都王 潁)과 사촌동생인 제왕 경(齊王 )과 제종조 되는 하간왕 옹(河間王)의 연합군에 쫓겨 살해되고, 혜제가 다시 복위했다. 조왕 운을 제거하자는 제의를 맨 먼저 한 것이 제왕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제왕 경이 실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도 권력을 남용하다가 역시 다른 왕들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다음에는 혜제의 또 하나의 동생인 장사왕 예(長沙王 乂)가 실권자가 되고, 그 장사왕 예 또한 성도왕 영과 하간왕 옹, 동해왕 월(東海王 越)의 질시를 받아 그들에게 살해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성도왕과 하간왕 사이에 서로 반목이 생겨 성도왕이 먼저 피살되고 하간왕 또한 얼마 못 가서 죽고 말았다. 이에 이르러 팔왕의 난이 종지부를 찍은 것이었으나, 그해 곧 306년에 혜제 또한 독살되어 16년간 재위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4. 후삼국의 대두
진나라 조정이 혜제가 즉위한 이후, 10년 동안 팔왕의 난으로 골육상잔을 계속하고 있는 사이에 천하는 다시 어지러워져서 각처에 군웅(群雄)이 할거하게 되었다. 역사에서 이름 하는 오호 십륙국(五胡 十六國)의 발호였다. 5호는 중국의 변방에 있는 흉노족(匈奴族)과 저, 강(羌), 선비(鮮卑), 갈의 다섯 부족을 말하고, 16국은 진에 반기를 들고 저마다 국호를 세운 성(成), 한(漢) 뒤에 전조(前趙)로 고침, 후조(後趙), 전연(前燕), 전양(前凉), 전진(前秦), 후연(後燕), 컨?後秦), 서진(西秦), 후양(後凉), 남양(南凉), 북양(北凉), 남연(南燕), 서양(西凉), 하(夏), 북연(北燕)을 가리킨다. 이 5호 16국 가운데서 가장 일찍 국호(國號)를 천하에 선포한 것은 성(成)과 한(漢)이었다. 성은 진 혜제 13년인 303년에 성도(成都)를 중심한 옛 촉한 땅에서 개국을 선포했고, 한은 그보다 1년 뒤인 304년에 평양(平陽)을 중심 하여 산서(山西)와 섬서(陝西) 일대를 장악하여 개국을 선언했다. 303년은 진 무제 사마염이 마지막으로 오를 멸망시키고 통일천하한 해로 따져서 23년이 되는 해이고, 무제가 위주 조환으로부터 나라를 강제로 선양 받아 진을 개국한 해로 따지면 38년이 되는 해였다.
천하가 통일된 지 겨우 23, 4년만에 광대한 중국 대륙에는 또 다시 정족지세(鼎足之勢)를 형성하여 지난날의 위촉한오의 3국 시대와 같은 형세를 나타내었다. 당연히 그 3국 간에는 간과(干戈)가 그칠 날이 없었다. 성은 옛 촉한의 땅을 차지하여 일단 그것으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꾀했기 때문에 진과의 큰 충돌이 없었다. 그 대신 한은 옛 한조(漢朝) 부흥의 기치를 내걸고 중원을 노렸기 때문에 자연 진과의 사이에 처절한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 더구나 한을 개국한 광문제 유연(光文帝 劉淵)이 촉한의 후주 유선의 일곱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의 휘하에는 촉한의 옛 명장 명신들의 기라성 같은 자손들이 운집하여 영용을 떨치고 있었다. 그래서 한은 개국한지 7년째 되는 해에는 기어이 진의 서울 낙양을 함락했고, 다시 2년 뒤에는 진의 제 3대 황제인 회제(懷帝)를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회제는 무제 사마염의 스물 다섯째 아들로서 무능을 극하다가 독살된 혜제의 뒤를 이어 제위를 승계 했으나, 재위 6년에 비참한 최후를 마친 것이다. 회제가 한에 의해 살해되자 진조의 중신들은 12세의 사마업(司馬 )을 장안(長安)에서 옹립하여 제위를 계승시켰다. 그는 무제의 손자로서 오왕 사마안(吳王 司馬晏)의 아들인데 민제(愍帝)라 했다.
이 민제는 재위 4년에 장안이 한에게 함락되자 그만 한에 항복하고 말았다. 한은 그를 일단 한의 서울인 평양으로 보냈다가 살해했는데, 그로서 진나라는 4대 52년의 짧은 역사의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사마염 무제가 통일천하한 해로 따지면 37년 밖에 안 되는 역사였다. 촉한을 멸망시킨 것은 조씨의 위였고, 위를 찬탈한 것은 사마씨의 진이었다. 그 진나라가 촉한을 세웠던 유비의 자손에게 멸망을 당한 것이다. 한은 진을 멸망시키고 기어이 대망해 마지않았던 중원을 차지했다. 지하에 있는 소열황제 유비(昭烈皇帝 劉備)와 촉한을 위해 지성과 충의를 다하고 순국한 승상 제갈무후(諸葛武侯)의 천추의 한을 그 자손들이 끝내 풀어 준 셈이다.
5. 한의 개국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한을 개국한 유연(劉淵)은 원명을 유거(劉 )라고 하는 촉의 후주 유선의 일곱째 아들이었다. 유거는 암우한 아버지 유선에 비하면 노방출주(老蚌出珠)격으로 영특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릴 때부터 꾀주머니로 불리기까지 했다. 유거는 아버지 유선이 촉한을 버리고 위의 등예에게 항서를 받치자, 눈물을 머금고 후일을 도모하기 위하여 다음의 사람들과 함께 북부 강지로 망명하여 기어이 한을 개국했다.
1).유 영(劉靈) :
소열황제 유비의 양자였던 유봉(劉封)의 아들로서, 자를 자통(子通)이라 하고 효용이 절륜했다. 유거(뒷날 유연(劉淵)으로 개명)를 도와 무수히 전공을 세우고 한나라를 개국하는데 주춧돌 노릇을 감당했다.
2).양 용(楊龍) :
제갈 공명이 죽은 뒤, 한때 촉한의 군사(軍師)를 지낸 양의(楊儀)의 아들이다.
3).제만년(齊萬年) :
촉한의 호위친병총령(護衛親兵總領)이었고, 자를 영령(永齡)이라 했다. 9척이 넘는 체구에다 붉은 얼굴, 준수한 이마, 형형한 눈매로 해서 천장(天將)을 방불케 했고, 80근 逾동?초경궁(超硬弓)의 신기(神技)를 터득한 장수였다.
4).유 총(劉聰) :
유거(유연)의 아들로서 어릴 때부터 힘이 장사였다. 궁마(弓馬)의 재주가 비상하여 후주 유선은 그를 강유(姜維)에게 의탁했다. 뒷날 한의 제 2 대 소무제(昭武帝)가 되어, 진의 회제를 죽이고 낙양을 탈취했다.
5).요 전(寥全) :
촉한의 거기장군 요화(車騎將軍 寥化)의 아들로서 유연을 도와 한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6).유 요(劉曜) :
후주 유선의 다섯째 아들인 북지왕 유심(北地王 劉諶)의 아들로서 갓난아기 때 요전의 등에 업혀 숙부 유거(유연)를 따라 성도를 탈출했다. 뒷날 한의 4대주가 되었다.
7).장 빈(張賓) :
자를 맹손(孟孫)이라 했다. 장비(張飛)의 손자이고 장포(張苞)의 아들이다. 장포의 소실 이씨(李氏)한테서 태어났는데, 이씨가 하루는 꿈속에서 신선 여동빈(呂洞賓)을 만나 그로부터 구슬 한 개를 얻고 잉태한 후 장빈을 낳았다. 장빈는 어릴 때부터 총명 영특하여 칭송이 원근에 자자했다. 그래서 강유가 특별히 그에게 제갈 공명한테서 전수 받은 모든 지략과 전술을 고스란히 물려주었다. 그러면서 강유는 이렇게 말했다. "너의 재능은 나보다 십배는 숭하다. 뒷날 반드시 만인의 앞장을 서서 큰공을 이룩하고 이름을 떨칠 것이다. 하지만 대기만성(大器晩成)을 명심하여 행동거지를 삼가도록 해라." 강유의 말대로 장빈은 유연의 군사(軍師)가 되어 한을 개국하는데 1등 공신이 되었다.
8).제갈 선우(諸葛宣于) :
승상 제갈 공명의 손자이며 제갈 첨의 둘째아들로서 자를 수지(修之)라 했다. 어릴 때부터 조부인 공명의 비전(秘傳)을 배워 육도삼략(六韜三略)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가 약관의 나이일 때, 촉한의 군사(軍師)로 있는 아버지가 출전하려는 것을 극구 간한 일이 있었다. "아버지, 소자가 천기를 살피오니 이번 출전이 결코 이롭지 않은 것 같사옵니다. 기다리셨다가 강유 도독이 돌아오시거든 출전하시옵소서." 그러나 제갈 첨은 큰아들 상(尙)을 데리고 기어이 출전했다가 등예에게 대패하고 난전을 맞아 목숨까지 잃고 말았다. 그는 장빈과 함께 한의 개국 1등 공신이 되었다.
9).조 개(趙 ) :
촉한의 명장 상산 조자룡(常山 趙子龍)의 손자이며, 정서장군 조통(征西將軍 趙統)의 장남으로서 자를 총한(總翰)이라 했다. 장빈과 함께 망명 생활을 하다가 유거(유연)가 기병 했다는 소식을 듣고 참여하여 한의 개국에 큰공을 세웠다. 뒷날 그의 막내동생 조늑(趙勒)이 석늑(石勒)이라 성명을 바꾸고 유요와 헤어져 후조(後趙)를 개국하자 동생 조염(趙染)과 함께 그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10).황 신(黃臣) :
촉한의 노장 황충(黃忠)의 장손으로 자를 양경(良卿)이라 했다. 유연을 도와 동생 황명(黃命)과 함께 많은 전공을 세우고 한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장빈은 일찍부터 이들과 더불어 팔배지교(八拜之交)를 맺어 가까이 사귀면서 정의를 두텁게 했다. 그런데 앞에 적은 인물들 외에도 뒷날 유거(개명하여 유연)이 유림천(柳林川)에서 기병하자 수많은 촉한의 유신(遺臣)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거의가 촉한의 명장 명신들의 후예였으며, 제마다 일기당천의 용맹을 지닌 장수들이었다. 그 가운데 특별히 기록되어야 할 두 인물이 있었다. 하나는 석늑(石勒)이라는 약관에도 미치지 못하는 홍안소년이었고, 하나는 그를 보좌하는 급상(汲桑)이라는 만부부당(萬夫不當)의 용사였다. 급상은 자를 민덕(民德)이라 했고, 성도의 조자룡과 조통의 집에 목마사(牧馬師)로 있었다. 효용이 절륜했으며 특히 큰 도끼를 잘 썼다. 촉한이 말하고 조개, 조염 형제와 함께 장빈을 따라 성도를 탈출할 때 어린 조늑을 등에 업고 나왔다. 그러나 도중에 도적을 만나 석늑을 업은 급상은 장빈, 조개 등과 헤어지고 말았다. 그후 급상은 어린 석늑과 함께 당대의 거부 석숭(石崇)의 숙부 되는 석현(石 ) 집에 기식하면서 조개 형제와 장빈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지냈다.
6. 진의 멸망과 한의 붕괴
316년 진의 4대주 민제(愍帝)는 낙양을 한에 빼앗긴 후 장안(長安)에서 즉위하여 있다가, 장안마저 한의 유요에게 함락되자, 그만 포로가 되어 한의 평양(평양)으로 압송되어 갔다. 이 무렵 한의 상당후(上黨侯) 석늑은 소무제 유총(昭武帝 劉聰)의 명을 받고 악릉(樂陵), 평락(平樂), 유주(幽州), 병주(幷州) 등 진나라의 각 고을을 공략하고 있었다. 민제는 장안이 함락되어 진의 민제가 사로잡혀 오고, 석늑한테서 승전보가 잇달아 내도 하자, 포로인 민제를 배석시키고 크게 축하연을 베풀었다. 그리고 술이 거나해지자 시 한 수를 읊어 도도한 흥취를 돋우었다.좌국성에서 일어나 변방을 휩쓸었도다. 평양에 나라를 세우니 위엄이 사방에 떨쳤네. 낙양을 파하여 회제를 결박하고, 장안을 치고, 진관을 빼앗았구나. 이제 전 서쪽 땅을 보전하고, 진양을 병합했건만, 어느 때 천하를 통일하여 한나라의 옛땅을 회복할 것이냐.시를 읊고 난 소무제에게 술병을 가리키며, 그것을 들고 여러 중신들에게 한 잔씩 따르라고 했다. 민제는 안색이 변하여 한동안 망설이다가 옷을 갈아입어야 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그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러자 소무제는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히 술을 따르기 싫거든 그만 두고, 과인의 옆에 앉아 부채를 들라." 민제는 부끄러움을 참고 부채를 잡고 소무제를 부쳤다. 그것을 본 민제를 따라온 신빈(辛賓)이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내달아 민제가 손에 들고 있는 부채를 빼앗아 소무제 유총의 앞가슴에 집어던지고 통곡을 했다. "폐하, 폐하께서 이런 수모를 당하시게 한 소인의 죄 죽어 마땅하옵니다." 소무제는 대로하여 무사를 호령해서 민제와 신빈을 밖으로 끌어내다 참하라 일렀다. 사마염 무제가 세운 진의 최후였다. 이렇게 진나라를 멸망시킨 한은, 소무제 유총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유찬(劉粲)이 즉위하여 연호를 한창(漢昌)으로 정했으나, 즉위한지 1개월만에 근준( 準)이라는 신하의 반역으로 살해되고, 숙부 유거(유연)에게 업혀 촉한을 탈출하여 나와, 그간 무용이 절륜한 장수가 된 유요(劉曜)가 유찬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한의 4대주가 되었다. 유요는 연호를 광초(光初)라 하고, 도읍을 장안에 옮겨 나라 이름을 한 대신 조(趙)로 고치고, 석늑을 조왕(趙王)에 봉했다. 그러나 끝내 석늑과 불화를 해소하지 못하고 재위 11년 되는 해에 석늑에게 패하여 죽고 말았다. 그래서 한은 결국 4대 25년의 역사로 그 종말을 고하기에 이르렀다. 319년 석늑(石勒)은 자립하여 후조(後趙)를 개국했다. 진ㆍ성ㆍ한 세 나라의 흥망을 중심하여 5호 16국의 난을 그린 것이 곧 『後三國志』리는 역사소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