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Ⅱ / 지성하 장로
학교 교정에 철골과 시멘트와 석회가루를 종합하여 호랑이, 코끼리,
얼룩말을 제작하여 천연색 물감으로 색칠한 조각가였으며,
종합예술가였습니다. 수 십년이 지난 지금도 모교인 의성 단촌초등학교
운동장에 남아 어린이들의 훌륭한 놀이터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종합 운동 선수였습니다.
젊은 시절 고향 마을에서 씨름 대회 30세 이하 부문에서
우승을 한 바 있습니다. 당시 시골 초등학교 운동회 때, 현직
교감 선생님으로서 동네 청년들괴 함께 달리기 하면 언제나 1등을 했고,
특히 장애물 경기, 주판샘하며 달리기 등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종합 육상 단거리 선수였으며, 교직원 배구 대회에서는 언제나 부동의
전위 새터로 대단한 승부욕을 가진 열정적인 종합 스포츠맨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모두가 어렵던 그 시절에, 겨울 땔감을 미리 준비하여
월동 대책을 철저히 마련함으로 이웃집의 부러움과 시기를 받은 적이
많으며, 봄이 되어 채소를 가꿀 때, 논밭이 전무했던 저희 집이었지만
작은 텃밭을 갈고 씨뿌리고 물주고... 정말 새벽부터 열심히 철저히 가꾸어,
감자, 옥수수, 수수, 마늘, 고추, 각종 채소 등 단위 면적당 채소의 종류가
다양했으며, 단위 면적당 수확량도 최대라고 확신하며 살았습니다.
냇가에 물고기와 꼴부리(다슬기)를 잡을 때, 우리 아버지의 광주리에는
언제나 우리 모두가 잡은 량을 합산한 것보다 더 많았고, 손으로
메기와 뱀장어를 잡는 실력이 대단하였습니다.
광주리(망태)를 만들기 위하여 새끼를 꼬거나, 싸리나무 빗자루를 만들 때,
이 세상에서 우리 아버지보다 더 잘 만든 것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방학이 되어 시골 큰집에 갈 때, 황토물 홍수가 나서 건널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자식들 가운데 제일 작은 놈은 목에 걸고, 그 다음은 등에 업고,
한 놈은 오른 팔에 끼고, 가장 큰 놈과 두 번 째는 새끼로 허리를 단단히 묶고,
강을 건널 때 우리는 아버지를 믿기 때문에 전혀 두려움이 없었고
오히려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아주 어릴 적에는 우리 아버지는 완전한 신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였고, 한 치의 실수도 없는 분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세월이 지나
저희들의 머리가 크고, 저희들이 고향을 떠나 도시로 상급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 우리 아버지가 점차 작게 느껴지고,
부족함이 많은 분으로 느껴졌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정말 농경사회와 아널로그 사회에서 유능한 인재였고,
예술가였으며, 맡겨진 책무에 대하여 주어진 능력으로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하신 만능 생활인이었고 모든 걸 잘 하시는 분이었으므로
아버지는 저희들 가슴에 언제나 스타였습니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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