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설국(雪國)'을 읽고
2002,8,12 구득영
고전의 특징은, 사람들이 읽은 척을 하지만, 실제는 읽지 않는 책들이라고 한다. 내 경우를 생각해도 말이 맞는 것 같다. 이번에 용기를 내어 도서관에 고전을 빌리려고 갔다. 도스도예프스키의 '카르마쵸프가의 형제'들과 야스나리의 '설국(雪國)'이었는데, 앞의 책은 있기는 한데 너무 오래되어서 포기하고, '설국'만 빌렸다. 내용은 대강 아는 터라 자신 있게 읽는데, 그런데 영 그것이 아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모르겠다. 소설을 자주 읽지 않아서 인가? 아니면 일본을 너무 몰라서 인가?
아무리 살펴보아도 주인공 남자가 눈으로 쌓인 곳에 휴양을 가서 기생하고 바람을 피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데, 그런데 전혀 분위기가 그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 남자에게는 전혀 아내에 대한 죄책감도 없다. 그 남자의 아내도 그렇고 말이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해서 평가하는 사람들도 전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못 보았다.
보수적인(?) 한국사람으로는 영 헛갈리게 만든다. 여자라고는 지금까지 마누라밖에는 전혀 모르는 놈이 어떻게 그런 것을 이해하겠는가? 어떻게 이런 지독한 일본적인 소설이 노벨 문학상을 탔는지 정말 궁금하다. 그리고 이 책이 고등학교 필독서라고 하는데, 누가 선정했는지 정말 존경하는 마음이다.
아참, 부산에서 방위를 받던 시절에 감전동의 유명한 뽀뿌라마치에 고참에게 억지로(?) 끌려간 일이 있었다. 참고로, 뽀뿌라마치는 그 주위에 포퓨러 나무가 많았다고 해서 붙여진 곳으로, 1차는 한 잔 하지만, 2차로 몸 주고 마음은 주는 척하는 그런 곳이다. 주위에서 신학생이라는 것을 다 아는데 가서 뭘 했겠는가? 사실 손도 제대로 못 잡아 봤다. 물론 뜬눈은 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일하던 여자가 어렸다는 것과 마음이 매우 여렸다는 측은한 생각은 지금도 듣다. 아마 십대였던 것 같다. 그것이 이 소설과 비슷하다면 비슷한 나의 유일한 추억(?)이다.
소설은 나름대로 남자 주인공 시마무라와 게이샤(기생) 고마코와 또 다른 여자 요오코, 이렇게 삼각구도로 흘러가는 것 같은데, 그것은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줄거리 파악이 잘 안 될 뿐 아니라,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 한 서너 번 읽으면 몰라도 말이다. 기대가 너무 큰 탓이었던가?
작년에 오시마 감독의 '감각의 제국' 이라는 영화를 비디오로 보았는데, 그게 그것이 아닌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일본영화를 본 것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물론 고전은 재미로 읽는 것이 아니니 이해를 못할 바도 아니다. 이제 이 책이 마누라 손에 넘어갔는데, 무슨 반응이 나올지 궁금하다. 아마 '남자는 다 그래' 라고 할지 모르겠다.
다들 그렇게 이야기도 하지만, 분명히 이 소설의 첫 문장은 두고두고 마음에 와 닿는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라는 대목 말이다. 얼마 전에 휴가를 받아서 대구에 잠시 들려서 놀다가(?) 서울에 가면서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했다. 대구에서 춘천에 이르는 고속도로이다. 그 도중에 달리다보면 무려 5km에 달하는 터널이 나온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터널이지 싶다. 사실 그 터널을 지나면서 집에 돌아가서 설국을 읽겠다고 다짐했다. 첫 대목이 생각나서 말이다.
아마 이 소설의 처음에 나오는 그 터널도 그러한가 모르겠다. 이 터널은 일본의 '동경'과 '니가타'를 연결하는 '시미즈 터널'이라고 실제로 있는 터널이라고 한다. 이 니가타는 설국의 무대가 된 지역으로, 이번에 일본에서 월드컵 첫 경기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소설의 작가 야스나리는 아이러니 하게도 노벨 문학상을 탄 몇 년 뒤에 자살했다고 한다. 설국에 하루라도 더 빨리 가고 싶어서 일까?
과연 우리들도 지금의 이 긴 터널을 빠져나가면 설국에 도착할까?
* 다른 이야기이지만, 조금 반칙성이 있기는 해도, 가람기획의 '서울대 선정, 동서고전 200선'(반덕진 편저)을 보면 이 세상을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전 4권으로, 가격은 알라딘을 통해서 구입하면 약 3만원정도이다.
====================================================
숨겨진 욕망…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남성과 여성에의 소유욕
기린(麒는 수컷이고 麟은 암컷이다) - 알라딘 독자서평, 2001년 10월 11일
1. 소외와 소유욕 그리고 음험(陰險)한 상상 ? 시마무라(島村)
고마코가 약혼자를 위해 기생이 되었다는 것도 너무 진부한 이야기로 시마무라는 솔직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심정이었다. 그것은 도덕적인 생각에 부딪힌 탓인지도 몰랐다. 이 허위의 마비는 파렴치한 위험의 냄새가 풍기고 있었고, 시마무라는 이윽히 그것을 만끽했다.
시마무라가 절실한 허망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 따뜻하고 밝은 등불처럼 고마코가 들어왔다. 간신초가 끝나자 시라무라는 비로소 안심을 하고 아아, 이 여자는 내게 반해 있구나 생각했으나, 그게 또 서글펐다. 처자가 있는 집으로 돌아갈 것조차 잊은 듯한 오랜 체류였다. 떨어질 수 없는 것도, 헤어질 수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고마코가 가끔 만나러 오는 버릇이 생겨있었다.
시마무라는 “보지않은 무용 따위를 인쇄물을 바탕으로 제멋대로 상상한 탁상공론”을 통해 “때때로 서양 무용의 소개 따위를 쓰기 때문에 문필가 나부랑이로 손꼽혀 그것을 스스로 냉소하면서도 직업이 없는 그의 소일거리가 되기도” 하는 사람이다. 즉 당대의 문화권력구조내로 온전히 편입하지 못하고 정형을 유지하지 못함으로 해서 오는 자괴감이 스스로를 권력주체에서 소외시켰으며, 그나마의 위치에 대한 미련을 갖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소외는 일탈을 조장한다. 정치권력과 문화권력과 경제권력이 아직 미분화상태였던 20세기 초반에 일본에서 문화권력에서의 소외는 일탈이란 보상을 통해 극복되고자 한다. 보통, 구조적 소외는 일반적으로 그 구조의 법칙에 일탈하는 행동을 야기시키지만, 그 일탈행동은 하나의 부문화(副文化, subculture)로 일탈집단의 구조 법칙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가부장제와 자유주의의 충돌은 일부일처(一夫一妻)와 일부다처(一夫多妻)의 사이에서 후자의 손을 들어주었으며, 그것을 하나의 부문화하였다. 권력에의 추구 못지 않게 일부다처로의 전복은 유아적 상상력만큼이나 이기적인데다가 음험하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수단으로부터의 소외는 전복에의 상상만으로 그치게 한다. 시마무라의 음험한 전복 기도는 결국 수단으로부터의 소외로 인해 자기규제의 혼재(混在) 속에서 미수에 그치고 만다.
2. 남성권력의 희생양 ? 고마코(駒子)
당당하고 자기 주장이 강한 여성은 하나의 환상이 될 수 있다. 자기 사고에 확신을 갖고, 그것이 얼마나 어설프더라도 “건방지게” 이야기할 수 있는 여자는 매력적이다. 순종적이고 기대에 충실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던간에 매력적일 수 없다. 이에 고마코란 코드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성이란 문제에 있어서 소유의 개념은 더욱 공고해진다. 남녀의 성교는 소유의 개념으로 전용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성이란 것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에게 귀속되는 경험으로써, 인간관계에서 소유로써의 개념으로 환원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스운 것은 “순결에의 맹신”이다. 성이란 소유해야하는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그 소유가 “나”에게로 전속되어야 한다는 다분히 이기적이고 편협한 사고가 여성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불평등을 낳았다. 이것은 명백히 소유에의 개념에 대한 반증이며, 다시 여성에 대한 지배력 강화와 “흠결”을 핑계로 한 자기합리화의 코드이다.
3. 남성의 향수 ? 요코(葉子)
헌신적인 여성상으로 가부장제 사회가 원하는 “적당히 바보 같은”, “죽은 사람에 대해서도 충분히 열성적일 수 있는”여성이란 돌아가야 할 고향과도 같다. 충분히 소유하고 싶은 종류의 인간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