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5(철종 6)~1908.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왕산(旺山), 자는 계형(季馨). 아버지는 진사 조(祚)이다.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 희(禧)와 맏형 훈(薰)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895년(고종 32)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이어 단발령이 내려져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이기찬(李起燦)·이은찬(李殷贊)·조동호(趙東鎬)·이기하(李起夏) 등과 협의하여 의병을 일으키기로 했다. 1896년 3월 김천읍에서 수백 명의 의병으로 부대를 편성하여
이기찬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장이 되었다. 이들은 김산(金山)·성주에 진을 치고 대구로 진격하기 위해 각지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했으나 공주와 대구 관군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이은찬·조동호 등은 관군에게 붙잡혔다. 그는 잔여의병을 수습, 김천 직지사(直指寺)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충청북도 진천까지 진격했으나, 의병 해산을 명하는 고종의 밀지를 받고 부대를 해산한 후 진보로 가서 학문에 전념했다. 1899년 3월 신기선(申箕善)의 천거로 영희전봉사(永禧殿奉事)가 되었으며, 그뒤 소경원봉사(昭慶園奉事)·성균관박사·주차일본공사수원(駐箚日本公使隨員)·중추원의관·평리원수반판사(平理院首班判事) 등을 거쳐 1904년 평리원서리재판장이 되었다. 이어 의정부참찬으로 있으면서 학교건립·전기증설·노비해방·은행설치 등 10조목의 상소를 올렸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이상천(李相天)·박규병(朴圭秉)과 함께 일본을 규탄하는 격문을 살포했으며, 그해 12월에는 일진회(日進會)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정우회(政友會)를 조직했다. 그는 이 일로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다가 의정부참찬직을 사임하고 풀려났다. 1905년 3월 비서원승(秘書院丞)이 되었으나 찬정 최익현(崔益鉉), 판서 김학진(金鶴鎭)과 함께 다시 일본군에 체포되어 4개월간 구금되었다가 강제 귀향조치를 당했다. 같은 해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경상도·전라도·강원도·경기도 등을 돌아다니며 곽종석(郭鍾錫)·이학균(李學均)·유인석(柳麟錫)·정환직(鄭煥直) 등을 만나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고, 이어 군대가 해산되자 9월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뒤 적성·철원·파주·안협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병력을 증강하면서 일제 군경과 전투를 벌이고 친일 매국노들을 처단했다. 이어 전국의 의병부대가 연합하여 일본을 몰아내는 전쟁을 벌일 것을 계획하여,
이인영(李麟榮)과 상의한 뒤 1907년 11월 전국의 의병장들에게 연합의병부대를 편성하여 서울로 진격하자는 격문을 보냈다. 48개 부대의 의병 1만여 명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13도 창의군(十三道倡義軍)이 조직되자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진동창의대장(鎭東倡義大將)이 되었다. 1908년 1월말 300여 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공했으나 지원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패배했다. 이어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여 문경으로 귀향하자 대리총대장 겸 군사장(軍師長)이 되어 총지휘를 맡게 되었으나 일본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서울진공작전은 좌절되었다. 그뒤 임진강·한탄강 유역을 무대로 조인환(趙仁煥)·김수민(金秀敏)·김응두(金應斗)·이은찬의 의병부대와 함께 연합부대를 편성하여 일본군과 유격전을 벌이고 매국노를 처단했다. 항상 군율을 엄히 하여 민폐가 없도록 했으며, 군수물자를 조달할 때는 군표(軍票)를 발행하여 뒤에 보상할 것을 약속했다. 1908년 4월 이강년(李康秊)·유인석·박정빈(朴正彬) 등과 함께 거국적인 의병항전을 호소하는 격문을 전국의 의병부대에 발송했으며, 5월에는 박노천(朴魯天)·이기학(李基學) 등을 서울에 보내 고종의 복위, 외교권 회복, 이권침탈 중지 등 30개조의 요구조건을 통감부에 제출하고 요구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결사항전할 것을 선언했다. 그해 6월 11일 경기도 영평군 유동(柳洞)에서 일본군 헌병대에 붙잡혀 10월 21일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