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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겨울 자락에는
1.해운대에서
2.후-불면不眠
3.화이트아웃(whiteout)
4.소리의 딸국질
5.키스 미 케이트 (kiss me kate)
6.어느 화가의 그림, 콩
7.도시의 상공
8.황학동
9.영정사진에 핀꽃
10.무릎에서 물을 뽑다
11.성내역에서 잠실역
12.넘어지는 연습
13.금동 못신
14.방심하다가
15.해바라기처럼
해운대에서
어둠이 하늘과 바다를 다 지웠다
검은 캔버스 한 장만 남았다
검푸른 붓을 거머쥔 파도
백색의 그림을 그린다
등대불빛 한 점씩 끌어올려 먹물 닦아주고
뱃고동 소리 한쪽 모서리에 세워진다
흔들리는 모텔
비틀거리는 만취 객
중심 잃은 시간들이 구도를 잡는다
‘철썩 처르르’
낙점을 찍던 파도, 무슨 생각이 났는지
캔버스를 당기더니
흔들리는 그림, 지우고 그리고
지웠다간 다시 그리고…
허공을 담은 어둠만 지워지지 않고 서있다
후-불면不眠
창틈에서 떨고 있던 어둠이
건조한 시간을 빙글 돌린다
모래든 듯 까끌거리는 눈알
허공을 핥다가 천정 모서리에서 멈추고
이마엔 신열 토마토 빽빽이 열린다
방울방울 토해내는 시뻘건 통증이
둥글게 몸을 말고 초침을 씹는다
목숨끄트머리에서 아버지의 유전자 들락거리며
계절의 골짜기 마다 떠도는 어지러운 기억들
선득선득 가슴을 가르고
난타의 막 박자로 검은 정적은 괴성을 지른다
난자당하는 내일의 꿈
바람의 울음 털며 들까불들까불댄다
갈등의 순간순간 튕겨져 나가는 잠의 꼭지
좌우로 돌려 보지만
허옇게 날 새는 침대
헛돌기만 한다
화이트아웃(whiteout)*
상가에서 나오자 어둠이 깔린 내 앞에 택시가 섰어
하이빔으로 쏘아대는 헤드라이트에 백시白視가된 나
두어 시간 전이 하얗게 지워 졌어
무작정 차를 탔지
눈덮힌 황량한 벌판에 서 있는 것처럼
기억이 난반사 되며
원근의 감각이 마비되었지
생각의 진액을 쏟으며 내보내는 희뿌연 잔상들
찐득찐득 들러붙어 있는 망각의 얼룩 긁어 보지만
신호가 없었어
아침노을 끝에 달랑 매달린 눈송이처럼
의식 끝에서 한 순간 반짝이다
녹아버린 시간이 나를 끌고 다니며
안개 속에서 미로 더듬듯 제자리만 맴돌았지
막막한 어지러움증 저편, 물결치듯
내게로 밀려온 전화 벨소리, 말 걸어오는 장례식장
검은 상복사이로 오래된 안부오가며
웃음이 비죽이는 풍경 속에서
타고 갔던 자동차가 떠오르더군
끊어졌던 시간의 테잎 한 땀 한 땀 이어지며
껌벅거리기만 했던 기억의 쵸크 점화 되었지
*심한 눈보라와 눈의 난반사로 주변이 온통 하얗게 보이는 현상
소리의 딸국질
설한雪寒의 고비에서 과부하에 시달리는
보일러
불면증으로 빨갛게 충혈된 눈들이
10여년 낡아버린 세월을 꺼내놓는다
지치도록 같은 길만 반복 돌다가
어지럼증에 휘청
바람의 마디에 걸렸다
횡격막 사이로 피멍든 시간이
경련을 일으키며 휘어지고 있다
마비되어가고 있는 기억의 센서
명치끝에서
깔딱거리는 신음소리
어둠의 목젖을 헤집고
적막한 허방에서 떨고있다
키스 미 케이트 (kiss me kate)*
인생은 연극이라는
말이 감겨있는 실타래에서
사랑을 풀어내고 있다
깜박이는 음표로 춤을 추다가
얽히고설킨 매듭에 걸린 그들
당기고 밀고 끊어질듯
아슬아슬 고비에서
스르륵 한 쪽이 느슨해진다
조화造花같은 얼굴로 꿈을 꾸는
그녀의 화음이 거꾸로 매달려
느린 곡선으로 추억을 긁어댄다
말랑한 입속엔 독 오른 뱀처럼
송곳니를 키웠던 불온한 연애
달콤한 리듬을 따라
바닥으로 미끄러지며
어두운 그림자의 손을 잡는다
먹이 좇는 악어처럼
다가오는 그와
밤마다 키운 달을 갉아 먹는다
표정 잃은 무대에서, 절름거리는 춤은
나뭇가지에 걸린 연처럼
펄러덕 펄럭 허공을 휘젓는다
사랑의 저울에 올려진 고통의
매듭은 더욱 옥죄어가고
*세익스피어 원작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사무엘스펙웍과 벨라스펙웍이 각본, 콜퍼디(Cole porter)작사 작곡한 뮤지컬로, 2010년 7.9-8,14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함.
어느 화가의 그림, 콩
얼마나 많은 말들을 과식했는지
팽창된 내 안을
왈칵 쏟아 버리고 싶던 어느날
싱크대 위에 놓였던 그릇이, 쿵쾅거리던
팔길질에 채여 콩들을 와르르 쏟아낸다
사방팔방 튀는 콩들과
트림으로 나온 시큼한 후회가 섞인다
후미진 구석구석 이리저리
구르다가, 벌레처럼 꼼지락 대다가
존재와 여백의 경계에서 한 점으로 정지된다
차마 세상 밖으로 내보 낼 수 없어
오랜 세월 꽁꽁 가두어 놓은 말들이, 거기서
들릴 듯 말 듯 잉잉거리는 울음의 발자국으로
고통에 갇힌 영혼의 신음으로
새까맣게 뭉쳐있다
화석처럼 단단해진 시간 속에서
날카로워진 생각들 뼈 속을 찌른다
핏줄을 훑고 심장 박동을 울리며
퍼렇게 멍울진 기억의 비상벨을 누른다
도시의 상공*
어둠의 숲이 창으로 내려오면
하늬바람*의 등을 타고
그의 품에 안겨 하나가 되지
태양을 꿈꾸며 내일을 찾으려고 속력을 냈지
꽁꽁 언 겨울 하늘가, 미끄러지듯
초록을 삼킨 회색 콘크리트 지붕 위를 날았지
허공의 뼈들이 머리를 들이 받기도하고
시샘하는 밤안개가 시야를 빼앗기도 했지
세월의 갈피마다
세파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부딪히고 긁힌 마음은 상처투성이
나는, 어느새 낯선 사람이 되어 있었지
알듯 모를 듯 기억의 회로를 더듬어가니
어렴풋 떠오르는 푸른 길이 보였지
사춘기 소녀의 통통 뛰는 가슴을
사로잡던 동화속의 사랑이
추락하기를 거부하던 어느 날
검게 그을린 음습한 탄광촌 지하 단칸방엔
황색 불빛이 시름시름 졸고 있고
거리를 방황하던 피곤한 신혼의 꿈이
찌그러져 누워 있었지
도시는 온통 잿빛구름으로 칠해져 있었고.
*마르크스 샤갈의 대표작이라 할 수있음
*하늬바람-북풍
올발라(utpala)-불교에서 말하는 팔한 지옥의 하나 :찬 기운이 몹시 심해 몸빛이 청색으로 변한다는 지옥
얼음폭탄, 영하의 바리케이트가 지키고 있는 줄 알았는데
*dengue fever :‘악마의 병’이라고도 한다. 뎅기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는 모기가 사람을 무는 과정에서 감염되어 생기는 병으로 고열을 동반하는 급성 열성 질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