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노미야 손토쿠
가난한 농민에서 지역 재건 사업의 선구자가 되다
[ 二宮尊德 ]
요약 에도시대 중기 이후 농촌의 황폐화와 그에 따른 연공의 감소는 다이묘들을 비롯한 모든 번주들의 고민이었다. 이런 시대에 등장한 사람이 에도시대 후기를 대표하는 농정가 니노미야 손토쿠이다. 그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노동으로 집안을 일으킨 자수성가형 농민으로, 이런 자신의 경험을 지역 재건 사업으로 발전시킨 것이 보덕사법(報德仕法)이다. 보덕사법이 널리 인정받으면서 막부로부터 닛코 지역의 재건을 명받았으나, 본격적인 시행을 앞두고 사망했다. 그의 사후에 보덕사법은 제자들에 의해 계승됐다.
니노미야 손토쿠원본보기
출생 - 사망시대직업별칭가문부모
1787년 ~ 1856년 |
에도 시대 후기 |
사상가, 농정가 |
긴지로(金治郞, 통칭) |
니노미야(二宮) 가문 |
부 : 니노미야 리에몬(二宮利右衛門) 모 : 요시(よし) |
목차
생애
니노미야 손토쿠는 1787년 농민 니노미야 리에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에도 시대에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엄청난 노동력을 요구하는 것이었는데, 농사를 짓기에는 몸이 허약했던 리에몬은 손토쿠가 14세가 되던 해에 사망하고 말았다. 2년 후 어머니 요시까지 세상을 떠나자 손토쿠는 두 동생을 외가에 맡기고 자신은 숙부의 집으로 들어갔다. 이후 손토쿠는 타고난 성실함으로 집안을 일으켜 세우게 된다.
숙부의 집에서 손토쿠는 숙부와 함께 농사에 전념했고, 틈틈이 버려진 황무지에 야채를 심어 수입을 늘려갔다. 그는 낮에는 강도 높은 노동을 하면서도 밤에는 책을 읽고 산술을 배우는 학문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렇게 주경야독을 하며 재산을 모아, 20세가 되던 해에는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그 후 매년 전답을 사들이고 그것을 다시 소작으로 내주어, 26세에는 소작미 38섬을 거둬들이는 소지주가 되었다.
1812년 손토쿠는 농사를 그만두고 오다와라 번의 가로(家老)1) 핫토리 쥬로베의 신하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낮은 직급으로 잡무를 담당하였으나, 1818년에 경제적 어려움에 빠진 핫토리 가문의 재정 회복을 담당하는 책임자로 승진했다. 손토쿠는 우선 엄격한 검약을 실천하게 하여 지출을 줄였고, 번에서 빌린 차용금을 밑천으로 이윤을 늘리는 방식으로 핫토리 가문의 재정을 회복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같은 손토쿠의 능력이 인정을 받으면서 1821년에는 오다와라 번주의 분가인 우쓰 가문의 영지 사쿠라마치를 재건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손토쿠는 1823년 가산을 처분한 뒤 가족들을 이끌고 사쿠라마치로 이주, 본격적인 재건 사업에 착수했다. 사쿠라마치 재건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이후 손토쿠의 명성은 널리 퍼져나갔다. 특히 동북부 지역 다이묘들은 앞을 다투어 손도쿠에게 지역 재건을 의뢰하였다.
1853년 손토쿠는 막부로부터 닛코 령의 재건을 명받았다. 이는 그가 맡은 재건 사업 중 최대 규모였다. 손토쿠는 1855년 가족과 함께 닛코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재건 사업에 착수했지만, 끝을 보지 못하고 이듬해인 1856년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가문의 재건
16세의 나이에 부모를 잃고 가장이 되어야 했을 때 손토쿠가 물려받은 재산은 약간의 전답뿐이었다. 그나마도 불모지에 가까운 폐전(廢田)에 불과했다. 그러나 손토쿠는 바로 이 폐전에 주목했다. 사실 그의 집안을 파멸로 이끌었던 것이 바로 이 폐전이었다. 홍수로 인해 많은 농지가 쓸모없는 황무지로 변해버려서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손토쿠는 폐전을 개간하는 한편 돈이 모이는 대로 아버지 리에몬이 팔아버린 전답을 다시 사들였다. 이렇게 손에 넣은 전답은 다른 이에게 소작으로 주고 세를 받았으며, 자신은 황무지 개간에 집중했다. 에도시대에는 황폐해져 못쓰게 된 농지를 개간해 다시 농사를 지을 경우 3년간 세금을 면제해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손토쿠는 이 점을 이용하여 세금을 내야 하는 땅은 소작으로 돌리고, 자신은 개간지에 농사를 지어 면세 혜택을 받았다. 그는 이런 방법을 통해 착실하게 재산을 늘려나갔다.
손토쿠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무엇보다 남다른 그의 체력 덕분이었다. 황무지를 개간하여 이윤을 남기기까지는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하다. 손토쿠는 타고난 근면함과 체력을 통해 경지를 늘려나갔다. 그리고 봉건적 착취를 교묘하게 피해 개간지는 자신이 운영해서 세금을 내지 않았고, 반대로 일반 경지는 소작으로 돌려 소작세를 받았다. 이렇게 쌓인 자금은 이자를 붙여 다른 곳에 빌려주었다. 이렇게 하여 손토쿠는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고, 그 자신이 소지주가 되기에 이르렀다.
핫토리 쥬로베 가문의 재건
1812년 손토쿠는 돌연 농사를 그만두고 오다와라 번의 가로였던 핫토리 쥬로베의 신하로 들어갔다. 주군의 옆에서 신변과 잡무를 보살피는 와카토(若党)라는 낮은 직급이었다. 당시 핫토리 가문은 상당히 심각한 채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에도 시대 중기 이후부터 상업자본이 발달하면서 번의 재정은 악화되고, 번의 녹을 받는 가신들의 재정도 함께 악화되고 있었다. 특히 상품 구매에 의존하는 생활을 해온 다이묘나 가신들은 자신들의 녹보다 넘치는 지출을 해왔다. 지출은 점점 늘었지만 그들이 받는 봉록은 줄어들었고, 이들의 재정 악화는 번의 위기를 불러올 정도가 되었다.
당시 다이묘를 비롯한 지배층의 경제난에 대해 경세학자 혼다 도시아키는 “빚의 심연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그들의 자손 대에서도 빠져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고, 이러다가는 영지를 팔아넘길 판”이라며 조롱할 정도였으니, 당시 이들의 경제난이 얼마나 고착화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막부와 번에서도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어서, 각각 재정 회복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1818년 핫토리 가문은 손토쿠에게 재정 재건의 명을 내렸다. 많은 신하들 중 왜 손토쿠를 택한 것일까. 기록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가야마 촌에 긴지로(손토쿠의 별칭)라는 사람이 있는데, 매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부모를 잃고 가산도 거의 남의 손에 넘어가서 친척에게 몸을 의탁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가계를 다시 부흥시켰을 뿐만 아니라, 젊었을 때부터 어려운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등 천성 또한 남들보다 뛰어납니다. 그에게 가문의 재정 재건을 맡기신다면 반드시 전력을 다할 것입니다”라며 그를 추천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1천 2백 석의 자산 규모를 자랑하는 핫토리 가문의 재정을 재건하는 것은 손토쿠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우선 그는 이 제안을 바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향 가야마 촌으로 돌아가 머무르며 오랜 시간 고민했다. 일개 백성이 가로의 재정을 담당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충분한 준비, 그리고 고용주인 쥬로베의 완전한 이해와 협조 약속 없이 뛰어들었다가는 실패로 끝날 것이 뻔했다.
손토쿠가 핫토리 가문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5년을 목표로 재정을 재건하고, 그 기간 동안은 일절 간섭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핫토리 가문의 일족과 그 가솔, 신하에 이르기까지 ① 식사는 반드시 밥과 국으로 제한하고 ② 옷은 반드시 목면으로 된 것을 입고 ③ 불필요한 지출은 하지 않는다는 세 가지 사항을 지키도록 했다.
손토쿠는 핫토리 가문의 재정 재건을 위해 상업자본의 논리를 이용하고자 했다. 쌀의 상업적 매매를 시도한 것이다. 그는 쌀을 사서 미리 보관해두고 가격이 오르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되팔아서 이익을 올리려 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대실패로 끝났고, 손토쿠는 여기서 발생한 3백 량 정도의 손해를 자신의 재산으로 메꾸었다.
쌀의 상업적 매매가 실패로 끝나버리자 손토쿠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었다. 우선 높은 이자의 덫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이자가 비교적 저렴한 번의 대출을 받아서 그 돈으로 이자율이 높은 빚을 먼저 갚았다. 그리고 대출한 돈을 갚기 위해 엄격한 긴축 재정을 실시했다. 그렇다고 손토쿠가 핫토리 가문 고용인들의 생활까지 엄격하게 관리한 것은 아니었다. 손토쿠는 오히려 그들의 어려움까지 구제하려고 하였는데, 오상강(五常講)이 바로 그것이었다. 오상강이란 쓸데없는 지출을 줄이고 절약해서 모은 돈을 고용인들 중 어려운 자에게 빌려주는 것이다. 오상강이라는 이름에는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즉 오상의 덕을 지켜 반드시 돈을 갚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5년이 되는 해에 손토쿠는 최초의 약속대로 번에서 대출한 돈을 다 갚았고, 3백 량의 이윤까지 남겼다. 이런 성공적인 결과는 핫토리 가문의 일족과 가솔, 신료들이 손토쿠가 제시한 생활 기준을 잘 지켰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수지타산에 대한 손토쿠의 면밀한 계산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여기서 손토쿠의 경제 감각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다시 한 번 알 수 있다.
사쿠라마치 지역의 재건 사업과 보덕사법
핫토리 가문의 재정을 회복시킨 손토쿠의 능력이 인정받으면서, 1821년에는 오다와라 번주의 분가인 우쓰 가문의 영지인 시모쓰케 국 사쿠라마치 령의 재건 임무가 맡겨졌다. 사쿠라마치 지역처럼 황폐해진 지역을 재건하기 위한 손토쿠의 보덕사법이 성공한 최초의 예가 바로 이 사쿠라마치 령이다. 보덕사법이란 지역 재건을 위해 우선 지역 생산력(목표치)을 설정하고, 그에 맞추어 생산력을 회복해나가는 방법을 말한다.
사쿠라마치 령은 17세기 말 4천석의 영지였으나, 1800년대에 들어서 생산량이 2천석으로 줄고 농가의 수도 절반으로 감소하는 등 황폐해지고 있었다. 물론 이 지역을 재건하려는 시도는 그동안 몇 번이나 있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나면서, 한마디로 더 이상 손을 쓸 방도가 없어 방치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의 재건 의뢰를 받았을 때 손토쿠도 주저했지만, 결국 명을 받아들여 사쿠라마치로 향하게 되었다.
사쿠라마치에 도착한 손토쿠는 제일 먼저 지역을 샅샅이 시찰했다. 그러고 나서 그가 제시한 계획은 이제까지 사쿠라마치 지역에서 시도된 구제방법과는 다른 것이었다. 대부분 지역 재건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우선적으로 투입하는 방법을 써왔지만, 손토쿠의 계획은 달랐다. 한 지역의 재건을 계획하려면 토지가 본래 가지고 있는 생산력에 맞춰 합리적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물론 토지의 생산력에 더해 최선의 노동력을 투입해야 최선의 생산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은 손토쿠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젊은 시절 황무지를 개간하여 수입을 늘린 노하우를 체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지역을 다시 일으키는 것은 개인의 경험치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사쿠라마치에는 영주 우쓰 한노스케가 있었고 오다와라 번에서 파견된 관리자도 있었다. 또한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는 여러 농민들이 존재했다. 손토쿠는 사쿠라마치 지역에 생활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 서로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이익을 조절해야 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사쿠라미치는 원래 4천 석의 영지였다. 우쓰 가문은 생산량이 줄어드는 가운데서도 가문의 체면 유지를 위해 돈이 필요했고, 그런 이유로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를 거두었다. 결국 세금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도망가면서 황무지가 늘어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었다. 손토쿠는 사쿠라마치 지역의 생산력을 설정하기 위해 17세기 말부터 100년에 걸친 연공 대장을 면밀히 조사했다. 대장에 적힌 숫자를 합산하고, 여러 경우의 수를 고려하여 평균치를 계산해냈다. 1년여에 걸친 조사 끝에 손토쿠는 영주 한노스케에게 토지의 생산력에 따른 연공 한계치를 제시했다.
영주 입장에서 보면 연공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손토쿠가 제시한 과학적인 근거 앞에서, 한노스케는 생산력 2천 석, 연공 9백 62섬이라는 제한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2천 석의 수치는 현재 생산량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사쿠라마치 지역이 재건되었을 경우 얻을 수 있는 생산 가능량을 의미했다.
농민의 입장에서 토지 생산력 2천 석은 기존의 4천 석에서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니, 같은 토지라 해도 생산량이 반으로 줄어들면 그만큼 세금도 줄게 되는 것이다. 즉 손토쿠는 농민 생산력의 기준을 낮추어 농민이 부담하는 세금을 줄여준 셈이다. 이전까지 농민들은 아무리 열심히 노동을 해도 연공과 세금을 내고 나면 잉여분을 가질 수가 없었다. 손토쿠는 농민들이 잉여분을 남기지 못한다면 사쿠라마치 지역의 재건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지역 생산력에 관한 이해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끌어올리는 것은 농민들이었다. 손토쿠는 농민들이 농사를 짓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고자 노력했고, 먼저 도로, 용수로, 제방, 교량 등 농업 기반시설의 정비에 나섰다.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는 농민들로서는 이런 공공시설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는 게 당연했다. 또한 위해 비료를 도입하고 농기구를 정비하는 한편, 노동력 증가를 위해 새로운 농민들을 전입시키고 기존 농가들을 분가시키는 등 호구수를 늘렸다. 밤늦게까지 영내를 순회하며 농민들에게 근면하고 검소한 생활을 지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성실히 일한 사람을 직접 뽑아 표창하게 해서 농민들에게 동기부여가 되도록 했다.
1837년에 끝난 사쿠라마치 지역의 보덕사법은 성공적이었다. 손토쿠의 명성도 그만큼 높아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각지의 다이묘들로부터 의뢰가 쇄도했고, 1833년 이후 각지에서 보덕사법이 시행됐으며, 1845년경부터는 손토쿠의 제자들이 재건을 담당하게 되었다.
니노미야 손토쿠의 사상
손토쿠가 남긴 다수의 수기를 보면 그의 경험이 추상적인 차원에서 정리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이 유교 · 불교 · 신도의 가르침을 서로 섞어서 둥글게 만든 환약 같은 것이라고 자평했다. 그러나 세 개를 적당히 섞어서 자기 편의에 맞추어 논리화시킨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손토쿠의 독자적 방법론에 의해 일체화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손토쿠에게 있어 유교 · 불교 · 신도란 궁극적으로는 하나로 이어지는 각각의 다른 길일뿐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태극(太極)이 존재한다. 손토쿠는 이 태극을 원으로 표현하였다. 원이 쪼개지면서 그곳에서 천지, 음양 등의 구별이 생겨나는 것이다. 즉 태극이란 모든 것이 미분화된 일종의 혼돈 상태를 가리킨다. 태극은 이런 혼돈상태인 채로 언제나 중심에 존재하며, 인간은 무엇을 하든 늘 이 태극과 함께하는 것이다.
인간이 적극적으로 태극으로 다가가는 것이 인도(人道)이며, 소극적으로 다가가는 것이 천도(天道)이다. 천도만을 따라 살아가는 경우, 인간을 지배하려는 마음(人心)과 욕심이 생기게 된다. 반대로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 경우, 나 자신을 지배하고자 하는 마음(道心)이 생겨나기 때문에 욕심을 억제하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도심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모든 인간은 서로를 풍요롭게 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손도쿠의 믿음이었다.
이와 같은 손토쿠의 사상은 복잡한 논리성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손토쿠는 자신의 사상을 농민에게 설명할 때 인심, 도심 등의 추상적인 가치만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 대신 도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실리적 · 실용적으로 설명함으로써, 농민의 노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실천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니노미야 손토쿠의 후계자들
손토쿠는 후계자 양성에도 힘을 썼다. 그의 제자들에 의해 보덕사법은 메이지시대에까지 계승되었다. 도요타 다카요시는 출신지인 소마 번에서 손토쿠의 손자 니노미야 다카치카와 함께 보덕사법을 실시했다. 그 외에 후쿠즈미 마사에가 사가미 국에서, 오카다 료이치로가 토오토미 국에서 보덕사법을 실시해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후 다카요시의 보덕사법은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힘을 잃었다. 그는 행정 관리의 힘을 빌려 보덕사법을 시행했으나, 메이지 정부가 번을 폐지하고 부와 현으로 지방통치기관을 개혁하는 폐번치현(廢藩治縣)을 단행하자 행정권이 사라지면서 추진력을 잃은 것이다. 반면 마사에와 료이치로는 농민들과 연대하여 보덕결사를 조직했고, 메이지 전기의 경제불황과 맞물려 보덕운동이 확대될 수 있었다.
니노미야 손토쿠에 대한 평가
식민지시대 일본 정부는 손토쿠의 생애와 보덕사법을 교화정책에 이용했다. 러일전쟁 이후 실시된 지방개량운동이나 쇼와 공황 극복 등, 열악한 상황에도 노동을 강요하는 이데올로기로 사용된 것이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한 이후 연합군최고사령부2) 시기에 손토쿠는 재평가를 받았는데, 이번에는 민주주의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되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니노미야 손토쿠 [二宮尊德] - 가난한 농민에서 지역 재건 사업의 선구자가 되다 (일본 학자,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