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제주폭동 대한민국의 건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 건국을 했어야 하나? 아니면 어물정 그리다 북한에 흡수되어 공산화됐어야 하나?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어디서 왔나?
제주 4.3을 접할 때 이 근본적인 물음에 먼저 답해야 한다.
해방 후 수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건국되었고 그 건국의 토대 위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 그 희생의 대가 위에 살고 있는 지금의 우리는 그때의 건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해방 후 3년간 자유민주주의로의 건국을 저지하고,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이루기 위한 무수한 무장폭동이 일어났고 그 폭동의 주동세력은 영웅으로 미화되고, 폭동을 진압하고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목숨 바친 사람들은 악마로 만들어져 있다.
그때 그 희생으로 만든 이 나라에 살면서, 이 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대척점에 서 있던 사람들이 만든 역사관으로 그때의 사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제주 4.3은 이러한 역사관의 대척점에 서 있는 제1의 최전선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을 인정하면 4.3은 무장 폭동이요,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이 한반도의 나아 갈 미래라 한다면 4.3은 무참히 짓밟힌 혁명투쟁이 된다.
4.3을 접함에 앞서 한반도에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한 대한민국이 건국되는 것이 옳았느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이 옳았느냐?를 결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명제를 단순화해서 사건의 진실을 볼 수 있기 때문이고, 우리를 파괴하고자 한 세력들이 만든 역사관으로 우리의 역사를 바라보는 왜곡된 시각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47년 3월 1일(3.1절 기념식) 1. 1947년 3.1절 기념식은 미군정과 경찰은 불허하였으나 3만에 이르는 군중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경찰의 묵인하에 거행된 불법집회 임.(장소:제주북국민학교 광장. 주최: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
*1947년 2월 16일 남로당 제주도당 ‘3.1운동 기념 투쟁 방침’ 제1차 지령서 : 당일 복장은 전투식으로 하며 인민위원회(조선인민공화국) 기를 들고, 구호는 ”인민위원회로의 정권 양도, 박헌영 체포령 철폐, 인민항쟁 관계자 석방, 남로당의 깃발 아래로의 인민의 결집“으로 하 라.
*1947년 2월 25일 조선민주청년동맹 제주읍 위원회 선전 교양부 제4차 지령서 : 3.1운동 기념일을 대중을 고무하여 끌어들이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표어는 ‘우리의 지도자 박헌영 선생 체포령 즉시 철회하라! 정권은 인민위원회로 넘기라! 우리의 지도자 박헌영, 허헌 선생, 김일성 장군 만세 등이다’
*3.1절 전날 제주도 미군정청은 집회장소를 제주북국민학교 대신 서비행장(현 제주국제공 항)에서 기념행사를 열 것과 시위 절대금지 방 침을 통고했지만, 다음날 남로당은 제주북국민학교에서 대회를 강행. 이들이 제주북국민학교를 집회 장소로 정한 이유는 제주경찰서와 제주도청, 미군정청 등이 집회 장소 부근에 있었기 때문. 제주도립병원도 주변에 위치.
2. 남로당 주최로 3만 여명(제주 총 27만)이 모여 3.1절 기념식 개최(금융조합 이사 고창무의 사회와 제주 민전 위원장 안세훈의 개회사로시작. 11시에 시작하여 오후 2시에 종료->‘적기가’ 부르고 미군 철수,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 인민공화국 만세, 남조선 과도정부 반대, 친일파 처단, 양과자를 먹지 말자 등을 외치며 집회(남로당은 이 행사를 인민공화국 건설을 향한 대중투쟁의 완성이라 함)->집회 후 집회 참가자들은 주최 측의 읍내 시위 행진 요구에 긴급 동의->읍사무소, 경찰서를 때려 부수자며 경찰서가 있는 관덕정 방향으로 스크럼을 짜고 행 진 -> 이후 시위대는 기마와 기마병을 둘러싸고 기마를 쿡쿡찌르는 등 학대하자 이에 놀란 말이 날뛰며 아이가 다치는 사고가 발 생-> 다른 쪽에서는 기마병을 끌어내리는 사건이 발생.
*시위 대원들이 플래카드용 장대를 뽑아내어 말의 항문을 찔러대는 바람에 말이 놀라 이리 저리 뛰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어린 소년 1명 이 말 발에 치이는 사고가 나자 이를 지켜본 군중들이 야유와 ‘저 놈 잡아라’라는 함성과 함께 돌맹이를 던지며 쫓아갔다. (제주시 화북동 출신 김하영씨(1933년 생) 회고).
임 경위가 탄 말이 돌에 맞아 뛰기 시작했고 흥분한 말은 경찰서로 뛰어 들어감. 군중들은 ‘저 놈 잡아라’하며 경찰서로 몰려 감. 보초를 서 던 육지 경찰과 도청 정문 망루에 있던 육지 경찰이 경찰서로 몰려드는 군중을 향해 공포를 쏘며 해산을 명령하지만, 시위 군중이 경찰서 로 계속 몰려들자 무차별 사격을 가해 6명(안덕수, 오영수, 양무봉, 김태진, 허두용, 박재옥)이 죽고, 6명이 부상. 46년 10월 대구 폭동 당 시 대구경찰서가 점거되고 경찰관이 학살 당한 경험이 있는 육지 경찰이 놀라 발포. 파견받은 경찰들은 대구 10월 폭동을 경험 한 사람.
이날 동원된 경찰은 제주 출신 330명, 47년 2월 23일 충남, 충북에서 파견받은 육지 경찰 100 명 등 총 430명.
사망자와 부상자를 도립병원으로 옮길 때 도립병원(시위장소 부근)에서 두 번째 발포 사건 발생. 이 병원에는 허화 순경이 교통사고로 입 원해 있었고 두 사람의 육지 경찰이 간호를 하고 있었음. 총성이 울린 뒤 피투성이가 된 부상자들이 들이닥치자 충남 공주경찰서 소속 이 문규 순경이 공포심에 총을 발포했고 행인 2명(장제우, 정낙중)이 중상을 입음.
미군 정보보고서 : 그들은 대전에서 훈련을 받았고 1946년 가을, 좌익들에 의해 동료 경찰이 잔혹하게 당했던 사실(46년 10월 대구폭동) 을 오랫동안 잊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미군조사단이 조사 후 경찰의 발포가 잘못이라고 결론. 3월 11일 강인수 제주도 경찰감찰 청장은 ”도립병원 앞 발포는 경찰의 무례한 행 위로서 미안스럽게 여긴다“고 잘못을 시인.
민관합동으로 3.1발포사건 조사위원회가 조직돼 진상을 조사한 뒤 결과 발표. 도립병원 앞 발포 책임자 이문규 순경은 파면.
<담화문> 조선군정청 경무부장(조병옥), 동 제주도지사(박경훈.제주인민위원회 위원장), 동 제주도 군정관(스타우트 소령) 3자의 임명에 의한 제주도 제주읍 3.1절 발포사건 진상조사위원회는 사건 관계자 및 증인에 대하여 모든 관계 사실을 조사 심리한 결과 전원 일치 아래와 같이 합의를 보았다.
1). 제주도 경찰서에서 발포한 행위는 당시에 존재한 여러 사정으로 보아 치안 유지의 대국에 입각한 정당방위로 인정함.
2). 제주도 도립병원 앞에서 발포한 행위는 당시에 존재한 모든 사정으로 보아 무사려한 행위로 인정함. 그러므로 발포 책임자인 순경 이문 규는 행정 처분에 처함이 타당하다고 인정함. (1947년 3월 19일)
*남로당 제주도당은 이 사건을 이용해 반 미군정, 대 경찰 투쟁을 대대적으로 준비. 제주도 전역에는 경찰이 발포해 6명이 사망했다는 전 단이 살포. 현장에 있지 않은 제주도민은 이 전단을 보고 경찰이 무고한 양민을 총을 쏴 죽였다는 믿음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됨.
3. 미군정은 330명의 제주도 경찰력으로는 치안을 감담할 수 없다고 보고 전라남북도에서 222명, 경기도에서 99명을 파견 보냄. 제주 출 신 경찰은 한직으로 밀려났고 육지 경찰이 핵심자리를 차지. 제주 군정장관 스타우트 소령(해임), 박경훈 제주지사(사임), 강인수 제주 경찰감찰청장(해임), 강동효 제주 경찰서장(해임)이 물러나고 총파업(48.3.10)을 선동한 임관호 제주도청 산업국장 등 500여명이 체포 돼 199명 기소됨.
4. 이 사건을 1년 후 발생하는 제주 4.3과 직접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음. 즉 대규모 시위 군중으로부터 위협을 느낀 경찰의 우발적 방 어수단으로서의 발포로 인한 사망 사건과 5.10 총선거를 무력화시킴으써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할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무장투쟁을 벌 인 4.3은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하지만 좌익들은 47년 3.1 기념식을 48년 4.3 과 직접 연결시킴으로써 48년 4.3의 무장 폭동 을 정당화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5. 이날 행사는 3.1정신을 기리는 행사라기 보다 좌익세력이 대중을 동원해 정치세를 결집하려는 목적의 행사였다. 그동안 방송이나 좌파 단체에서는 이날 행사를 ‘3만명의 평화시위대’라는 이미지로만 설명해옴. 왜냐하면 ”평화시위대를 향한 경찰의 무차별 발포였다“라는 말 한마디로 대중을 선동해 그날의 집회가 가진 정치적 기획, 조직된 선전, 혁명적 행동들을 숨기기 위한 목적임.
-왜 제주도가 5.10선거 반대투쟁의 중심지가 됐을까? 남로당 중앙당은 48년 2.7사건(5.10 총선거 방해하기 위한 총공격)을 경찰이 빠르게 진압하 는 것에 충격. 이에 따라 5.10선거 반대 투쟁은 육지에서 떨어져 진압이 어려운 제주도에서 하기로 결정. 제주도는 남로당의 당세가 강하고 한라산 등 산이 많으며 일본군이 파놓은 참호와 버리고 간 무기가 많이 남아 있음. 제주도는 2.7사건의 가담자가 적어 활동이 자유로웠음.
-4.3에 대한 남로당의 개입 근거 1. 제주도 인민유격대 내부 문건인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는 여러 차례 남로당 중앙당의 지시가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음. 중앙 당 지령에 따라 행동, 보고한 뒤 적절한 지시를 요청, 건의한 기록도 존재.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 1) 2월 중순부터 3월 5일 사이에 제주도 전역에서 폭동을 시작하라.
2) 경찰간부와 고위관리들을 암살하고 경찰 무기를 노획하라.
3) 유엔위원단과 총선거, 군정을 반대하라.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라.
주한미육군 971방첩대 ‘격주간 정보보고서’(1948. 2. 1~1948. 2. 15)
2. 1948년 2월 말 육지로 갔다가 3월 15일 제주도로 돌아 온 남로당 전남도당 파견 지도원은 제주도당이 결정한 무장 공격에 대해 ‘국경 (국방경비대)에 심어놓은 프락치는 (전남)도당에서 지도할 수 있다. 이번 무장 반격에 이것(경비대 내 프락치)을 최대한 동원하여야 한다 고 언명하였음‘이라고 언급한 내용도 기록되어 있음.
*중앙당의 폭동 지령이 떨어졌다. 아마도 그 지령은 3월 중순 쯤에 현지와 무장행동대 두목 김달삼에게 시달된 것으로 안다. 당시 중앙당 에서는 이 사건이 터질 무렵 당 군사부 책임자 이중업과 군대의 프락치 책임자 이재복 등을 현지에 파견하여 소위 현지 집중지도로써 군 사 활동의 확대를 기도했다. 또 김달삼의 장인이며 중앙선전부장 강문석을 정책 및 조직지도 책임자로 선정하여 현지에 보내었다. (박갑동(남로당 기관지 해방일보’기자)의 저서 ‘박헌영’ 198~199쪽)
3. 이때 이재복은 검거돼 있던 도당위원장 안세훈 대신 조직부장 김달삼을 만나 ”단독선거를 하면 반공국가가 탄생되어 남로당은 설 자리 가 없어진다. 단선반대투쟁을 강력하게 전개하라“라는 지령을 내림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조사과장 빈철현. 김안일 증언)
-김 달 삼 김달삼(1923~1950)은 제주4.3을 주도한 남조선노동당원. 대정읍 영락리에서 이평근의 차남으로 태어남. 본명은 이승진. 김달삼이란 이 름은 그의 장인 강문석(남로당 중앙위원)이 일제시대 상해에서 쓰던 가명. 유년시절 부모따라 대구로 이주. 대구 심상소학교를 거쳐 도일(渡日), 쿄토의 성봉중학교를 거쳐 중앙대학에서 수학하던 중 학병으로 징집되어 복지산 육군예비사관학교를 나와 일본군 소위로 임관.
1945년 1월 강문석(박헌영의 비서. 남로당 중앙선전부장)의 큰 딸 강영애와 결혼. 광복이 되자 강영애를 일본에 두고 귀국. 1946년 장인 강문석의 소개로 대구 경북지역의 각 공산당 대표들과 교분을 쌓고 특히 남로당 군사부장 이재복과 두터운 교분을 쌓음. 조선공산당 경북도당 세포조직 책임자가 됨. 46년 대구 10.1 폭동에 가담하여 이재복의 신임을 받음. 이재복은 제주4.3 당시 군사부장 이중업을 대동하고 강문석과 함께 제주에 잠입하여 김달삼을 집중 지도한 인물.
대구폭동이 진압된 후 1946년 말 대구에서 제주로 내려와 대정중학교 교사로 재직.
남로당 중앙당 선전위원 및 대정면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면서 1947년 1월 체포되어 경찰서로 호송 도중 도망. 1947년 3.1사건을 배후에서 조종, 남로당 제주도당책이 되어 한라산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군사책임자가 되었다. 학병 출신 일본군 소위였던 무장대장 이덕구, 조몽구 군사부부부장과 함께 국방경비대 제9연대 2중대장 문상길 중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1947년 8, 9월경부터 무장훈련을 비밀리에 실시.
*인민유격대가 1947년 8월에 지휘부를 한라산에 두고 각 거점별로 훈련을 실시하다가 48 년 2.7구국투쟁을 시험적으로 치르고 나서 각 지구별로 자위대를 재편성했다. (고문승 ‘제주사람들의 설움’)
*남로당 야산유격대(빨치산) 즉 무장폭도는 이중업(남로당 군사부 총책)에 의해서 46년 10 월 대구폭동 이후 조직되었는데 제주도에는 1947년 10월 조직, 2개소에서 훈련을 시켰다. (김생민 전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연락 총책)
김달삼은 인민유격대 초대사령관이 되어 인민유격대를 애월지구에는 애월면 녹고악, 한림지구에는 애월면 샛별오름(신성악) 주변에 편성했고 지구별로 잇따라 편성.
1948년 4월 3일 남로당의 지령을 받아 무장봉기. 4월 28일 구억초등학교에서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과 평화회담을 벌였으나 결렬되고, 박진경 중령 암살 후 진압작전이 강력해지자 한라산을 내려 와 월북.
1948년 8월 2일 월북. 이때 제주지역에서(7월 20일부터 8월 2일까지) 비밀리에 치러진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투표지 52,350장을 가지고 감.(이들은 남한의 5.10총선거는 반대하고 북한 정권 수립을 위한 대의원 선거에는 적극적으로 참여)
1948년 8월 21일부터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여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에 선출. 여기서 ‘제주4.3투쟁보고’를 하고 북조선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국기훈장 2급을 수여.
대의원들은 9월 2일 ‘조선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를 개최하고 김달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위원회위원으로 선정.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선포.
이후 김달삼은 강동정치학원에서 빨치산 간부교육을 받은 후 1949년 8월 초 인민유격대 태백산 지구 총수가 되어 300여 명의 유격대와 함께 경북 안동 영덕 주변에서 게릴라전 전개.
1950년 3월 21일 패잔병을 이끌고 월북하던 중 강원도 정선군 북면 반론산 근처에서 20시간 교전 후 사살되었다는 설이 있고, 6.25 발발 후 500여 명의 유격대를 이끌로 울산 신불산으로 남하해 부산으로 침투하려 했지만 1950년 8월 30일 백인엽 연대장이 지휘하는 수도사단에 의해 대부분 사살. 김달삼은 1950년 9월 30일 사망한 것으로 평양의 혁명열사릉에서는 기록.
-이덕구(1927~1949) 조천면 신촌리 부잣집 3째 아들. 어릴 때 일본 유학. 교토에 있는 입명관대학 재학 중 입대해 관동군 소위가 됨(김달삼도 일본군 장교 출신). 귀국하여 제주인민위원회 조천면 민정 책임자 됨. 1946년 3월 좌파 주도로 만들어진 사립학교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체육교사로 일함. 1947년 남로당이 미군정과 충돌한 3.1사건으로 검거, 옥살이하다 1947년 여름 돌연 자취를 감춤. 조천면 사돈 집에 숨어 지내다 남로당 간부회의 도중 검거됐다가 풀려 난 뒤 한라산으로 입산. 4.3사건 발발 후 김달삼 밑에서 행동대장으로 있다가 김달삼의 후계자가 됨. 진압된 줄 알았던 4.3사건의 불길은 이덕구가 사령관이 된 후 재점화. 1948년 10월 24일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선전포고. 1949년 6월 7일 사살(22세.). 시체는 제주경찰서 옆 관덕정 앞에 십자가에 매달아 전시(그의 왼쪽 윗 주머니에는 평소 들고 다니던 숟가락이 꽃힌 상태로 전시). 북한에서는 국가훈장 3급 추서하고 평양 애국열사묘역에 비석을 세우고 추모함.
-제주 남조선노동당 1. 제주 남로당의 뿌리는 조선공산당에 두고 있다. 1945년 조선공산당이 결성되고, 1946년 조선공산당(박헌영), 조선인민당(여운형), 남 조선 신민당(백남운) 등 3개 정파가 통합, 남조선노동당으로 출범.
2. 1946년 12월 조천면 김유환의 집에서 남로당 전남도당 제주위원회 결성. 제주위원회는 첫 사업으로 1947년 3.1절 기념집회를 배 후에서 주도.
3. 1948년 1월 22일 남로당 제주위원회 조직이 노출되고, 조천면에서 열린 남로당 집회에서 106명이 검거. 1월 26일 115명 추가 검거.
-국방경비대 1946년 1월 2일 미군정에서는 훗날 국군의 모태가 되는 국방경비대를 창설. 정부 수립 전까지 임시적 성격의 국방경비대를 만듬.
국방경비대에는 일제시대 당시 광복군 출신들, 일본군 ‘관동군’출신들, 조선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 출신들로 구성. 즉 군 경력만 있으면 국방경비대 부사관 내지 장교로 부임 가능. 병사들은 모병으로 신체검사와 구두시험으로 모집. 46년 박헌영과 남로당이 폭력을 통한 미군정타파와 정국장악으로의 전술로 전환한 뒤, 미군정의 검거를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국방경비대를 피난처로 이용. 이 과정에서 남로당 출신들이 대거 유입됨. 남로당의 핵심당원들은 조직적으로 군에 들어갔고 군 내에서 적극적으로 세포를 확장해나감.
밤마다 공산주의를 학습하고 토론하는 부대도 있었고 주말 남로당 집회에 장교가 사병들을 인솔하고 참석하는 경우도 있었음. 아예 서울 1연대는 표어를 ‘불편부당不偏不黨’이라 정해 ‘우리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어느 당도 아니다’ 라해서 ‘우리는 공산당이 아니지만 공산당이 아닌 것도 아니다’라는 희한한 정체불명의 집단으로 만듬. 송호성 국방경비대 초대 사령관은 1947년 1월 육사 3기 입교 환영식에서 “조선 경비대는 좌도 좋소, 우도 좋소. 누구든지 자본주의 사상을 따를 수 있고, 좌익으로 공산주의 이념도 가질 수 있으며 사상은 개인의 자유에 속하기 때문에 조선경비대에서는 사상에 관계없이 누구나 동등하게 대우할 것이오”라고 연설. 군 최고사령관이 이런 말을 공공연히 하던 것이 해방정국의 현실. 송호성의 말을 들은 조병옥 미군정 경무국장은 “방금 송호성 장군의 말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공산주의는 기만으로 가득 찬 허구의 철학에 의해 형성됐고 결코 인류의 복지 증진에 기여할 수 없다”라고 비판. 국방경비대 내의 이러한 현상은 정부수립 후 1948년 12월 국가 보안법이 제정될 때까지 공산당, 즉 남로당은 불법단체는 아니었기에 가능.
국방경비대는 처음에는 연대 단위로 주요 도시에 9개 연대 설치. 1연대부터 9연대까지 각각 서울, 대전, 익산이리, 광주, 부산, 대구, 청주, 춘천, 제주에 설치. 치안 상황이 악화되자 연대를 추가 설치. 수원에 11연대, 군산에 12연대, 아산온양에 제13연대, 여수에 제14연대, 마산에 제15연대를 설치. 정부수립 후 국군으로 전환.
-국방경비대 제9연대 1. 1948년 3월 말경 제주도 폭동 사건의 수괴 김달삼, 조몽구 등은 국방경비대 제9연대 내 공산 두목 문상길 중위 등과 암암리에 밀회하 여.....민간 폭도들은 제주도 내 14개 지서를 습격, 방화할 것과 국방경비대 제9연대는 제주경찰감찰청 및 제주경찰서를 기습 점령하여 일시에 도내 전 경찰에 대하여 결정적 타격을 가하여 전도를 공산계열의 수중에 넣으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공비연혁(육본 정보참모부 발행) 194~195 쪽)
2. 1946년 8월 1일 제주도가 전라남도에서 분리돼 도(道)로 성격. 제주도 방위를 위해 46년 11월 16일 모슬포에 국방경비대 제9연대가 창 설. 차출된 광주 4연대 50여 명을 중심으로 모병했지만 실제 병력은 1개 대대에 지나지 않았고 그 중에도 많은 남로당원들이 침투한 상 태였음.
*1946년 본도(本島=제주도) 3.1투쟁 직후 때마침 본도 주둔 제9연대가 신설되어 제1차 모병이 있으므로 이에 대정 출신 4동무(고승옥, 문덕오, 정두만, 류경태)를 프락치로서 입대시켰음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 중)
*육사를 졸업하고 1948년 4월 10일 제주9연대 소대장으로 처음 부임해 갔을 때 첫날 소대원 42명 전부가 증오와 살기로 나를 쳐다보았 다, 부대가 완전히 빨간 첩자로 가득 했다. (채명신 전 육군참모총장 2011. 9. 4 KBS ‘한국현대사 증언 TV 자서전’ 중)
-제주4.3 희생자 수 노무현 정부 당시 4.3진상조사위원회 공식보고서에 14,000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결론. 국내 좌파단체와 북한에서는 30,000여 명 희생됐다 주장.(남로당원과 유격대에 의한 희생과 군. 경찰 등에 의한 희생자를 합한 숫자임. 문재인은 대통령 시절 공식보고서를 부정하고 3만명이 희생됐다 연설)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1. 이덕구 사살 현장에서 생포된 양생돌이 소지하고 있던 것. 1948년 3월 15일부터 1948년 7월 24일까지 기록. 김달삼이 1948년 8월 열 릴 해주대회(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회의)보고용으로 작성한 것으로, 김달삼이 1부를 가져가고 1부는 양생돌이 소지.
2. 내용 : 1948년 2월 말 남로당 제주지부 조직지도원이 2주간 육지로 나가 남로당의 지령 을 받고 돌아와 4.3폭동 준비. 4.3을 어떻게 계 획하고 목적은 무엇이며 부대편성 방법 등을 기록. 일자별 지역별로 인민유격대가 습격한 내용 기록. 제주도 9연대에 심어놓은 프락치 에 관한 내용 그리고 이들로부터 무기와 실탄을 공급받은 내용도 기록. 5월 10일 선거일 날 9연대 문상길 중위, 김달삼 등이 만나 경비 대 병력 안의 동조자를 탈출시킬 계획을 모의하고(실제로 군부대에서 산으로 가 유격대에 합류한 군인이 75명), 경비대 내 각종 정보를 공급 받은 내용. 전투할 때 경비대는 싸우는 시늉만 하기로 한 내용도 수록. 새로 부임한 9연대장 박진경 중령을 암살할 계획도 수록되어 있음. 4.3폭동이 엄청난 피해가 예상되므로 실행 여부에 대한 결론이 쉽게 나지 않자 투표로 결정한 내용도 기록(투표 결과 12:7로 강경 파 승리)
-제주가 가진 지역적 특성 1. 1920년대부터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조직화 김명식(와세다대 졸) 1921년 1월 27일 마르크스-레닌의 사상을 추종하는 ‘서울청년회’결성. 같은 해 4월 제주에서 서울로 유학하던 김택 수, 김민화, 홍양명, 한상호, 송종현 등을 포섭하여 훈련시킨 뒤 제주도로 파견. 이들은 제주도에서 ‘반역자구락부’결성->제주 신민회로 변신->일제 탄압으로 해체. 1927년 8월 제주도 야체이카(세포)결성하나 일제탄압으로 해체. 30년대 이후는 검거와 단체해산, 재조직화 를 반복. 겉으로는 야학, 독서회, 학교 활동으로 위장. 실제로는 반일, 반자본, 반관료사상을 전파하는 방식으로 공산주의 세력을 확장해 나감
2. 해방 후 인구 유입으로 사회적 불만 고조(45년 22만, 46년 27만)
3. 반외세정서(육지로부터의 차별에 대한 반감이 좌익의 반외세 정서와 결합)
4. 태평양 전쟁기 제주도 군사기지화에 따른 폭격피해. 이로 인해 미군정에 대한 반감 커짐 태평양 전쟁 말기 제주에 일본군 10만 주둔. 패전 후 막대한 무기와 탄약을 땅에 묻거나 바다에 수장시키고 철수. 처리하지 못하고 무기 고에 그냥 두고 간 무기와 탄약이 인민유격대의 무장에 사용.
5. 제주도 문맹율 전국 최고 수준 재(在)조선 미국 군사(軍史) : 제주도의 약 6만~7만으로 추정되는 주민이 남조선노동당에 가입했다. 그들은 주로 무식하고 교육을 받지 못한 농부와 어부들인데 2차 세계대전과 전후(前後) 곤경에 의하여 심하게 혼란에 빠진 결과 남조선노동당이 그들에게 지속적인 경제적 보장을 제의한 것에 쉽게 설득 당하였다.
6. 45년 9월 10일 건준 제주지부 설치, 9월 22일 ‘조선인민공화국 제주인민위원회’ 결성(도지사(박경훈)부터 각 행정기관의 장이 대부분 남로당 계열. 제주 인구의 6만 정도가 좌익 계열)
7. 해방 직후 제주 정치의 주도권은 미군정이 도착하기도 전에 좌익이 장악. (육지와 떨어져 있는 제주도가 미군정의 관심에서 후순위로 밀 려 나감. 제주에는 육지보다 2달 정도 늦은 45년 11월에 미군 들어옴) 1) 제주지사 박경훈(공산주의 조직 인민투쟁위원장), 제주읍장(인민투쟁위원회 부위원장) 2) 남로당 기관지 ‘해방일보’ 박갑동 기자 : 지리적 특수성 때문에 해방 직후부터 공산당의 조직활동이 가장 활발했고 도민의 사상이 자 못 붉은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사면초가의 입장에 몰려 형세가 불리했고 치안은 위기에 몰려 작은 소 동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3) 1945년 10월 9일 제주인민위원회 결성. 이것은 1945년 9월 6일 박헌영. 여운형 등이 건준을 기반으로 만든 ‘조선인민공화국’의 제주 지부. ‘조선인민공화국’은 좌익 세력과 단체들이 미군이 들어오기 전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만든 단체. 4) 1947년 1월 민주청년 동맹인 민청 제주도 위원회 결성(제주도 남로당 청년조직), 1947 년 2월 23일 제주도 민주주의 민족전선(민 전) 결성, 민전이 47년 3.1기념식 주도.
-해방 후 제주지역 교육 실태 해방 후 제주지역은 남로당원이 6만(전체 인구27만)에 이를 정도로 좌익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진 곳. 교육계도 마찬가지. 1946년 후반부터 학교별로 맹휴사건이 일어났으며 1947년 양 과자 반대시위. 3월1일에는 3.1시위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1947년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제주농업학교 학생 동맹휴학 운동 전개, 오현중학교 맹휴사건 발생. 제주4.3의 주도 인물인 김달삼, 이덕구도 당시 교원이었다. 김달삼은 대정공립중학교에서 역사와 공민 과목, 이덕구도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체육 담당 교사로 근무. 남로당 제주도 위원장을 맡게 되는 김용관은 하귀국교 교장, 4.3 후 조직부장을 맡았던 고칠종은 농업학교 교원으로 재직. 4.3 후 일본으로 피신해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를 저술한 김봉현은 오현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침. 1947년 초에 제주민전의 공동의장을 맡은 현경호는 제주중 교장으로 재직.
-47년 3.1절 행사 후 남로당의 활동 1. 남로당 제주도당은 이 사건을 이용해 반 미군정, 대 경찰 투쟁을 대대적으로 준비
2. 좌익 47년 3월 10일 제주총파업. 북 군청을 제외한 제주도의 모든 관공서, 통신, 운송, 은행, 교사, 학생까지 41,211명이 참여한 대규모 파업. 애월지서, 대정지서, 중문지서 등 경찰까지 파업 동조. 미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은 파업에 가담한 경찰 66명 즉시 파면.
3. 47년 3.1절 기념식 후 경찰과 우익 인사와 그 가족에 대한 공격, 행사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남로당의 공격, 남로당 가입 강요하 고 불응시 공개처형하는 경우도 있음.
-왜 4.3의 모든 책임이 이승만 정부나 국가기관에만 집중되었을까? 1. 47년 3.1 기념식과 관련하여 사실관계에 근거하여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왜곡시켜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무고한 시민이 죽었다 는 정서의 문제, 심리의 문제로 변환시킴으로써 행사를 주도한 세력의 계획적이고 폭력적인 면을 감추어서 사건의 본질을 희석시킴. 이 런 사실을 왜곡시키는 시각은 4.3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2. ”평화 시위대를 향한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무고한 시민이 죽었다“라는 말이 온갖 언론과 좌파단체에 의해 되풀이되면서 의심할 필요도 없는 상식이 되어버림. 3.1기념식 후 제주는 남로당에 의한 대립과 갈등, 상대를 배제하는 극단적 논리가 적용됐다. 기념식에 참석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격을 받은 사례가 기록되어 있음. 남로당원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남로당 가입을 강요하고 가입하지 않으면 공개 처형한 사례도 기록되어 있음. 경찰과 우익인사들에 대한 공격은 더 처참. 경찰지서가 불타고 도망치던 가족까지 무차별적으로 공격한 사례도 기록. 이것이 당시 제주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 하지만 ‘경찰의 폭력’이라는 단어만 강조될 뿐 남로당 계열의 선행 폭력은 의도적 으로 지워버림.
3. 민간인과 유격대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강요에 의한 남로당 가입 사례가 많아 누가 협박당한 민간인인지 누가 조직적 폭력의 구 성원인지 식별하기 어려운 상황. 이 혼재된 주민구조는 진압과정에서의 비극적 결과에 직접적 영향을 줌. 이것은 국가의 의도적 공격 이 아니라 좌익세력이 만들어 놓은 ‘식별 불가능한 환경’ 때문이었다.
4. 제주에서 먼저 폭력을 시작한 쪽은 국가가 아니라 좌익조직이었다. 이 폭력의 시작은 순수하게 모인 시민의 행동이 아니라 오랫동안 제 주에 뿌리내린 좌익세력이 의도적으로 확장하고 강화해온 조직적 행동이었다.
5. 47년 3.1 기념식 사태와 관련하여 미군정의 처리 결과를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군정의 경무부장 조병옥, 제주도지사 박 경훈(인민위원회 위원장), 제주 미군정관(스타우트 소령) 삼자의 합의로 6명이 사망한 1차 발포는 정당방위 차원으로 인정했고, 도립병 원에서 2명이 부상당한 사건의 경우 발포자를 파면하는 것으로 결론. 이 결론에 남로당의 핵심 인물인 제주도지사가 동의한 것이, 모든 책임을 경찰에 돌려야 하는 그들의 입장과 배치되기 때문에 숨기는 것이다.
6. 이처럼 명확한 폭력의 기록과 증언들이 존재함에도 우리는 왜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 왜 제주4.3의 모든 책임이 이승만 정부나 국가기관에만 집중된 것일까? 결국 이것은 좌익들의 선행 폭력과 그것이 일어난 배경은 숨기고, 이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군. 경. 우익단체에 의한 양민의 죽음만을 확대 재생산하여 ‘국가가 양민을 학살했다’라는 정서적 틀에 대중을 가두어 놓고, 수십 년간 재생, 반복하다 보니 의심의 여지없는 진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진실을 외면해 온 역사학계, 정치적 이익만을 위해 이를 이용해 온 세력, 반란 과 폭동의 이미지에서 벗어나고자 한 제주 지역민들, 제주4.3으로 경제적 이익을 취해 온 단체와 구성원들의 합작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 물이다.
-4.3 진압 관련 인물 1. 조병옥 1). 해방 후 경찰조직 총괄(미군정청 경무부장. 민주당의 아버지. 대선 후보) 2). 정부수립 전까지 실질적 4.3의 진압 책임자.
3). 발언내용 : 제주인구 20만이면 20만 전부를 죽여도 좋다. 무조건 소탕하라 등 강경진압을 주문. 조병옥은 당시 제주 상황을 ”반도 전 체를 위협할 공산폭동“으로 규정. 4) 조병옥의 이러한 발언은 방송이나 강연에 등장하지 않음. 조병옥이 이승만과 정치적 대립 관계였으며, 지금 민주당의 중요한 뿌리이 기 때문이다.
2. 박진경 중령 1) 일본에서 대학 재학 중 징병된 일본군 고위 하사관 출신. 부산 5연대 사병으로 있다가 백선엽 연대장 추천으로 군사영어학교 졸업해 특채 임관. 해방 당시 일본군 제주도 부대에서 근무해 지리를 잘 알았고 일본군이 축성한 진지와 지형에 능숙했음.
2)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인사과장으로 있다 48년 5월 6일 9연대장 부임. 48년 6월 18일 남로당의 지시를 받은 부하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 등에 암살됨.
3) 부대명령 하달 : 민간인은 적이 아니다. 도민을 단 1명도 죽이지 마라. 민간인 피해를 내지 말고 질서를 회복하라. 4) 부임 후 43일 근무(남로당원 부하들에게 피살).
5) ‘30만 제주도민을 다 죽여도 좋다’는 발언은 암살범들의 재판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암살을 주도한 부하 남로당원들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임.
6) 3000명 체포설(체포된 대부분의 사람은 조사받고 석방됨)
3. 김익렬 연대장 1). 박진경 대령이 부임하기 전까지 진압 지휘 2). 남로당과 내통(무장유격대에 식량 지원, 무기도 반출)하여 진압 작전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함. 이런 사유로 미군정에서 교체 요구.
3). 김달삼과의 평화협상 (1) 김달삼의 요구조건 -도민 생활의 안전을 복구시키는 당국의 적절한 시책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경찰의 무장 해제 -경찰관의 권력 남용의 엄금 및 모모 사설단체의 숙청 등 (2) 48년 4월 28일 김익렬과 김달삼의 합의 내용 -72시간 내 전투를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는 배신 행위로 간주한다. -무장 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무장 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루어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
-제주 9연대 안 프락치 1. 문상길 중위 경북 안동 출신.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하사관으로 제주에서 복무. 육사 3기. 제주 9연대 제2중대장. 남로당 프락치. 박진경 중령 암 살 주모자.
2. 오일균 소령 1) 1926년 1월 11일 생. 충북 청원 현도면 우롱리 출신. 청주중-일본 육사 61기. 육사3기 생도 대장. 2) 제주도 만이 아닌 남로당 전체의 군 총책. 문상길은 사형당하는 순간에도 오일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음. 3) 4.3발발 후 주민신고가 들어와도 훈련상태가 미흡하다며 출동하지 않음. 최경록 연대장 부임(48년 6월 18일) 후 박진경 대령 암살 사 건에 대한 집중 수색이 강화되자 견디다 못해 대대장을 사임하고 포로수용소장을 자원해 부임. 거기서 오일균은 양민을 대신 수감하고, 시위 가담자를 석방해 인민유격대의 김달삼에게 보내는 음모를 꾸밈. 그러나 한 양민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내는 바람에 음모 는 발각 됨. 최경록의 후임으로 와 있던 송요찬 연대장이 수용소를 직접 찾아 사실임을 확인했고 오일균은 연행 됨. 오일균은 김종석 중 령과 함께 남로당의 군 총책이었음. 오일균은 군법회의에 넘겨져 국가보안법에 의해 사형을 선고 받고 1949년 2월 수원에서 총살됨.
-조병옥 미군정 경무부장 제주4.3사건 진상 발표 4월 18일 신촌에서 폭도들이 육순이 넘은 경찰관 부모의 목을 자르고 수족을 절단했습니다. 임신 6개월인 대동청년단 지부장의 아내를 참혹하게 죽였습니다.
4월 20일 선흘리에서 임신 중인 경찰관 부인의 배를 갈라 죽였습니다.
4월 25일 모슬포에서 경찰관의 노부모를 총살한 뒤 수족을 절단했으며 임신 7개월 된 경찰관의 누이를 산 채로 매장했습니다.
5월 19일 제주읍 도두리에서 대동청년단 간부의 젊은 부인(24세)과 3세된 장남을 30여 명의 폭도가 납치한 후 십 수 명이 윤간하였습니다. 김승옥의 노모 김씨(60세), 16세 된 부녀 김영념, 26세 된 김순애의 딸, 36세 된 정방옥의 처와 4세 된 장남, 20세 된 허영선의 딸과 5 세, 3세 어린이 등 11명을 납치, 감금하고 무수히 난타한 후 도두리에서 서북방 15키로 떨어진 눈오름이라는 삼(森)나무 지대에 끌고가 노소를 막론하고 50여 명이 강제로 윤간을 하고, 그리고도 부족하여 총창과 죽창, 일본도 등으로 부녀의 유방, 복부, 음부, 둔부 등을 난자한 후 미처 죽기도 전에 땅에 생매장해 버리기도 하였습니다.
-무장투쟁을 위한 준비 1. 무장투쟁에 대해 지도부 내에서 시기상조론과 강행론이 충돌. 김달삼과 이덕구 등 강경파가 당조직을 장악하여 무장투쟁 준비.
2. 제주도 좌익 세력은 지역별로 자위대 편성, 한라산의 각 오름에서 무장투쟁을 대비한 준비에 들어감.
3. 동시다발적으로 타격할 지점을 정하고, 처단 대상자를 선정하는 등 사전준비.
-48년 4월 3일 1. 남로당 중앙의 지시를 받은 김달삼이 4월 3일 새벽 5.10총선 무력화를 위해 무장봉기.
2. 경찰서 12곳, 우익단체 시설, 선거관리위원을 포함한 행정요원에 대한 공격 개시
-제주4.3 시간대별 진행 과정 1. 1948년 5.10 총선거에 이르는 과정 1) 1945년 12월 28일 미국, 영, 소련 세 나라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5년간 미국, 영국, 소련, 중국 네 나라가 한국을 신탁 통치하기로 결정. 좌우익은 모두 신탁통치 안 반대. 하지만 1946년 1월 소련의 지령을 받은 박헌영이 찬탁 입장으로 바꿈. 1946년 3~5월과 1947 년 7월에 열린 미소공동위원회 신탁통치 안 무산.
2) 그러자 미국은 한반도에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1947년 10월 28일 ‘선 정부수립, 후 외국군대 철수’안을 유엔에서 투표에 붙혀 41:0으로 가결시킴.
3) 1948년 1월 8일 유엔선거감시단 서울에 도착해 활동을 시작하고, 북한에도 들어가려 하자 소련과 김일성, 박헌영은 유엔 결의를 무시 하고 선거감시단 입국을 결사 반대. 이에 유엔에서는 선거가 가능한 남한만이라도 총선거를 치르자는 여론이 조성되기 시작함.
4) 1948년 2월 7일 남로당은 남한 단독 총선거를 막기 위해 2.7 사건을 일으킴. 박헌영이 한반도 전체 통일 선거와 남한의 단독 선거 모 두를 반대하고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 곳곳에서 다리가 파괴되고 기관차가 파괴됐으며 전선이 끊기고 전신주가 파괴됐음. 부산항만의 선박 노동자와 탄광 광부들도 파업에 동참. <2.7 사건 피해 집계> 사망 : 경찰 15명, 선거 관련 공무원 15명, 후보 2명, 양민 107명 등 총 230명 부상 : 경찰 23명, 공무원 12명, 우익인사 63명, 시위자 35명 참가인원 30만 명 중 8,479명 검거
5) 1948년 2월 26일 미국은 한반도에서 선거가 가능한 지역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하는 안을 다시 유엔에 상정. 유엔은 찬성 31, 반대 2, 기권 11표로 이 안을 가결. 이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 총선거가 실시되게 된 것.
6) 한반도에서 합법정부가 수립되게 되면 한반도 공산화의 꿈이 물거품 되는 박헌영은 단독선거를 필사적으로 막아야 하는 급박한 상황 에 처함.
2. 48년 4월 3일. 일요일 새벽 2시. 한라산 정상에 봉화가 오르는 것을 시작으로 한라산 중허리의 89개 오름마다 봉화가 오름. 남로당 인민유격대(무장대원 350여 명)가 제주도 14개 지서 중 12개 지서와 우익 주민, 선관위원을 포함한 행정관리 요원 등을 학살하면서 시작.
1) 경찰학살 : 애월면 신엄지서장인 문익도 경감은 머리가 톱으로 잘렸고 송원화 순경은 칼과 죽창에 8군데 찔려 사망. 남원지서 김석훈 은 도끼에 맞아 팔이 잘렸고 고일수 순경은 칼로 난도질당하고 목이 잘림. 강봉현 함덕지서장은 죽창으로 난도질 당해 숨졌고, 화북지 서 협조원 이시성은 불에 따 숨짐. 김장하 경찰 부부가 대창에 찔려 숨졌고 60이 넘은 경찰관 부모의 목이 잘리고 팔 다리가 절단됨. 임신 6개월 된 경찰 부인은 시동생이 대동청년단 지부장이라는 이유로 타살됨.
2) 우익 인사 학살 : 북제주군 애월면 구엄마을. 수산봉, 고내봉, 파군봉에 봉화가 오르자 100여 명의 무장대가 구엄마을 습격. 이 마을에 는 문영백의 주도로 독립촉성국민회와 대동청년단이 결성돼 이었음. 무장대가 문영백의 집을 습격하자 가족들은 급히 도망쳤지만 14살 큰딸 숙자와 10상 작은딸 정자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마당으로 끌려나옴. 언니가 동생을 안고 살려달라고 울주짖었지만 10여 명이 칼과 죽창, 낫으로 잠옷 차림의 두 소녀 를 처참하게 살해.
같은 날 새벽 구엄마을 대동청년단장인 33살 문기찬과 단원인 34살 문창순은 마을에서 3 키로 떨어진 지금의 하귀1리 사무소 앞 길가 에서 숨진 채 발견. 눈에 곡괭이가 꽂힌 문기찬의 참혹한 시신을 보고 모친은 실신을 함. 문창순은 죽창에 찔려 숨짐.
한림면 한림리에서는 인민유격대가 독립촉성회 일을 보던 양용운의 집을 습격해 불을 지르고 부부와 세 아들을 한림읍 상대리경(처나 오름) 동쪽 죄남내라는 골짜기로 끌고가 돌과 몽둥이로 쳐 죽임.
4월 4일에는 연평리 대동청년단원 36살 오승조가 대창으로 찔려 죽음. 4월 6일에는 대동청년단 총무 37살 이도연과 단원 32살 양남호가 살해됨.
*날이 밝자 경찰의 요청으로 문용채 제1구 경찰서장의 지프 차에 타고 신엄지서와 구엄 마을의 습격 뒤 모습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문 용채 서장은 시신들이 즐비하게 쓰러진 모습을 보고 흥분된 목소리로 ”이것은 폭동이다“라고 외쳤습니다. (의사 문종후의 증언)
*그들이 말한바 소위 인민봉기라고 백번 천번 굽혀서 말하자. 인민봉기를 했으면 했지 총탄에 맞아 거꾸러진 시체를 다시 칼로 난자하 고, 목을 매고, 심지어는 귀를 자르고 코를 깍아 버릴 뿐 아니라 임신부의 배를 찌르지 않으면 안 될 원한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 가. 지금 제주도는 기자가 아는 상식과 용어로는 그 처참한 광경을 표현할 수 없으리만큼 비참하다. (1948. 5. 8 동아일보 정선수 특파원)
*4.3사건의 시작은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습 니다. 그들의 명예는 회복시키고 유가족들을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1998. 11. 23 김대중 대통령 미 CNN 인터뷰 중)
*수괴급 공산무장병력 지휘관, 4.3사건 발발의 책임이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 핵심 간부, 무장유격대와 협력해 진압 군경과 가족, 선거 관 리원 등을 살해한 자, 경찰 등 가옥과 경찰서 등 공공시설에 대한 방화를 적극 주도한 자는 4.3사건 희생자에서 제외해야 한다. (2001. 9. 27 헌법재판소 결정문)
*운명의 날은 바로 1948년 4월 3일이다. 이날 미명을 기해 예정된 계획에 따라 유격대는 협력자들과 공동전략을 취하면서 일사분란의 규율 밑에 각 면 지서와 서북청년회관, 그리고 일상에 반동으로 지탄되는 자의 집에 대하여 총검을 가지고 기습하며 혹은 수류탄을 투척 하면서 공격하였다. 이 일격은 예상한 바의 성공을 거두었으며 승산이 확실한, 신성한 싸움으로 믿어지고 있었다. 모든 학교는 폐쇄되었 다. 학생들은 학과를 포기하고 투쟁에 가담했다. 개교와 취학은 혁명이 승리하고 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라고 단정하였다. (‘이제사 말햄수다-4.3증언자료집)
*이날의 폭동은 남로당의 지시를 받은 사전 계획된 정치 작전이었다. 김달삼은 수개월 전부터 각 마을에 조직원과 프락치를 심고, 무기 고 위치를 파악하고, 경찰. 선거요원. 우익 인사들의 동선을 조사. 4월 3일 첫 타격지점들은 사전에 표적이 정해져 있었던 것. 이 공격은 단순한 ‘저항’이 아니고 조직형 군사작전이었다. 경찰을 기습해 살해하거나 불을 질렀고 결박된 경찰을 끌어내어 공개 처형하거나 집을 불태우고 그 가족을 위협. 지서에서 빠져나오는 여자와 어린아이도 공격하는 장면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특히 선거 관리위원은 남로당의 가장 중요한 제거 대상이었음. 이들의 목적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저지하는 것.
*1948년 1월 22일 경찰이 남로당 조천지부 회의장을 급습해 확보한 문건 : 2월 중순부터 3월 5일까지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켜 경찰 간부와 고위 공무원을 암살하고 경찰 무기를 탈취하라.
*남로당 제주도당은 2월 초부터 5.10 총선거 저지를 위한 대책회의를 벌이다 최종적으로 ‘신촌회의(북제주군 조천면 신촌리)’에서 주. 야 3일간 토론을 벌였고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2월 20일 투표로 무장투쟁을 결정. 2월 25일 남로당 제주도당 핵심 14명이 조천읍 선흘리에 모여 개편한 구국투쟁위원회 조직도를 보면 신설된 군사부에 ‘4.3지대’라는 말이 등장. 이것은 2월 25일에 거사일을 4월 3일 로 결정했다는 추정을 뒷받침. 1948년 2월 28일 전남 오르그(조직 지도자)가 제주도 방문. 1948년 3월 15일 4.3사건 작전이 수립
*1948년 6월 20일 미 제24군단 정보참모부 헝거 상사가 남로당원을 조사한 보고서 : 인민 해방군(인민유격대)은 1948년 1월 이전 한림 지역의 오름 중턱에 설치된 일본군 군사시설에서 생활하기 시작했고 1948년 2월 초 300여 명이 애월면 샛별오름에서 대규모 군사 훈 련을 실시했다.
*4.3사건 초기에 동원된 인민유격대 무장력 1) 유격대 100명, 자위대(후속부대) 200명, 도군위 직속 특경대 20명, 99식 소총 27정, 권총 3정, 수류탄 25발, 죽창 등 무장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중) 2) 이들은 일본군이 철수 시 산중에 매몰한 무기를 수집하여 무장하고 군사훈련을 팔로군 출신들이 담당하여 중국에서 사용한 유격전 으로 자못 기세가 당당하였다. 이들의 무장 병력은 500명에 달하였고 부화뇌동한 수도 1,000명에 이르러 총수 1,5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1967년 발간 한국전쟁사 427쪽) 3) 제주 남로당의 핵심이었던 김봉현과 김민주가 함께 펴낸 ‘제주도 인민들의 4.3인민 무장투쟁사’에서는 4.3사건 초기 무장병력은 3,000명에 달했다고 기록.
3. 4월 10일 인민유격대의 세력이 강해지고 입산자가 늘면서 경찰력만으로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김영배 제주경찰감찰청장이 9연대에 지 원을 요청하나 9연대장 김익렬은 지원을 거부 (치안 상황에 군이 개입할 수 없고, 상부에서 지시가 없었다는 이유). 9연대 2대대장 오일 균 소령 (남로당 프락치)은 ”폭동사태는 경찰과 주민 간의 충돌이므로 국방경비대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며 진압 임무를 회피
*당시 국방경비대 9연대는 2대대장을 비롯, 오일균 소령, 문상길 중위, 연대정보관 이윤락 중위, 고승욱 하사, 손선호 하사 등 남로당의 침투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음
4. 4월 12일 남로당 중앙당 지시로 제주도당 대책회의가 열림. 회의 결과 무장대를 더 강화하기 위해 혁명정신과 전투경험이 있는 자를 면마다 30명씩 선발해 인민유격대에 편입해 산중 무장 게릴라 부대를 편성하기로 함. 나머지 자위대 인원은 부락 방위를 위해 하신키로 함. 체계도 정비해 도당에 3개 연대를 편성.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내용)
5. 4월 17일. 국방경비대 총사령부에서 9연대에 진압 명령을 내리지만 작전 계획은 미리 알려졌고 어쩌다 적과 만나면 서로 공격하지 않고 접전을 회피하기 일쑤. 작전상 유리한 지역인 산중으로 4키로 이상은 9연대에서 맡겠다고 해 경찰이 아예 출동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함.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9연대 안에 오일균 소령, 문상길 중위, 이윤락 중위, 고승옥 하사 등 남로당 프락치들이 숨어 있었기 때문.
6. 48년 4월 27일 김달삼은 9연대의 남로당 프락치 오일균, 문상길과 모의하여 9연대 사병 60여 명을 탈영시켜 대정, 화순, 중문지서를 습 격한 뒤 인민유격대와 합류시킴. 9연대 병력이 이들을 추격하는 동안 문상길은 2차로 40여 명이 탄약과 무기를 훔쳐 도주하게 함. 이는 인민유격대가 장기전을 할 수 있게 해준 결정적 요인이 됐음.
7. 4월 28일. 김익렬과 김달삼 간 평화협상 시작 1) 9연대장 김익렬이 사건을 평화적으로 수습하기 위하여 인민군 대표와 회담하여야 하겠다고 사방으로 노력 중이니 이를 교묘히 이용 한다면 국방경비대의 산 토벌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어 4월 하순에 이르기까지 전후 2차에 걸쳐 군책(김달삼)과 김 연대장과 면담하여......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국방경비대와의 관계’ 중)
2) 김달삼은 평화협상을 이용하여 시간을 벌어 선전전을 강화하고, 경비대의 산 토벌을 억제하는데 이용. 김달삼은 “인민군이 38선을 넘 어 수원까지 남하하고 있으니 1달만 참으면 제주도는 해방된다. 그러면 해방군이 경찰이 되고, 토지도 나눠줘 공정하고 평등한 세상이 된다”고 선전
3) 대대장 오일균 소령(남로당 프락치)의 제안으로 김익렬 연대장은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과 평화협상을 시작. 1차 회담 장소 대정 중학교는 해방 후 김달삼이 교편을 잡았던 곳이고, 제주9연대가 병영을 함께 사용하는 관계. 1차 회담에는 남로당 프락치 오일균 소령 이 배석했고, 구억국민학교에서 열린 2차 회담도 남로당 프락치 연대 정보관 이윤락 중위가 배석. 김익렬 연대장은 공산당원인 이윤락 정보관이 제공하는 보고를 그대로 믿고 사태를 잘못 판단할 수 밖에 없었음.
*봄 기운이 한참 감도는 1948년 4월 28일 김익렬 중령은 이윤락 중위와 운전병만을 데리고 지프를 타고 정문을 나섰다. 구억초등학교 정문에는 두명의 보초가 서 있다가 ‘받 들어 총’으로 예를 표했다. 5,6명의 반도(반란의 도당)가 이들을 맞았는데 그 중 군계일학 같은 수려한 미모의 청년이 나서더니 자기가 대표자 김달삼이라고 소개하며 찾아와서 고맙다고 했다. 또박또박한 서울 말씨였다. 당시 김 중 령은 27세였는데 김달삼은 25 세로 미남배우같이 잘 생긴 얼굴이었다. 인사가 끝나고 대좌하자 미제 럭키 담배와 일본 녹차가 나왔다. “당신이 진짜 김달삼이고 실권자인가?” “그렇게 묻는 의도를 알겠다. 연배보다는 애국심과 정신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하도 젊고 미 남 배우처럼 잘 생겨서 살인할 사람같이 보이지 않아 물어본 것이다”. 옆에 있던 50대 정도의 반도들은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경비 대가 당신들을 아직까지 토벌치 않은 이유를 아는가?” “우리의 궐기 동기를 이해하여 우리를 동정하고 있기 때문 아닌가?” “군대는 개 인 의사와 관계없이 명령만 하면 복종하게 되어 있다. 내가 돌담이 많은 제주도에선 박격포가 유용할 것 같아 보내 달라고 위에다 요청 했더니 보내겠다기에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순간 김달삼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김달삼은 미리 준비한 노트의 메모를 보며 30분간 열 변을 토했고 김익렬은 “민주주의나 공산주의 등 알지도 못하는 외래사상을 위해 청춘이나 생명을 바치지 말고 민족의 자주독립이 급선 무이니 무기를 버리고 귀순해 조국 건설을 위해 합심해서 노력하자”고 말했습니다. 김달삼은 안색을 바꾸고 핏대를 올리며 언성을 높 여 말했다. “연대장도 민족 반역자나 악질 경찰처럼 우리 의거를 공산주의 소행으로 덮어 씌우려는가? 당신이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더 이상 회담을 진행시킬 필 요가 없다. 이젠 믿을 데가 없으니 이북에 연락하고 마지막엔 소련의 지원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시간이 벌써 4시 30분이 되고 있었다. 김 중령이 말했다. “나는 지금 가야 한다. 5시까지 귀대치 않으면 내가 당신들에게 살해된 것으로 알고 부하들이 전투를 개시하기로 되어 있다. 회담장이 갑자기 긴장됐다. 김달삼이 말했다. ”오늘 결말이 안나면 회담은 결렬이다.“ ”마지막 으로 말하겠다. 범법자 명단을 제시하라. 당신과 지도급들은 중벌을 면치 못할 것이나 모든 폭도의 귀순과 무장해제를 책임있게 해주 면 내가 개인 자격으로 배를 마련해서 희망하는 해외로 탈출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겠다.“ 이 말이 떨어지자 회의장에는 희색이 감돌았 고 김달삼은 김 중령의 손을 잡아 흔들며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4.3은 말한다’ 김익렬 유고 중에서)
4) 4시간 30분 간의 담판 끝에 이런 내용이 합의 (1) 72시간 안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한다. 연락 미달이 있을 수 있으므로 5일 이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단정한다. (2) 무장해제는 단계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시 전투를 재개한다. (3) 친일, 민족 반역 관리 및 악질 경찰은 사실이 증명되면 해직 및 추방하며, 범법한 서북청년단 등은 처벌 및 추방한다. (4) 경찰의 인원을 감축한다. (5) 살인, 방화 등 범법자의 명단과 범죄 내용을 제출하고, 자수 시 관대히 처분하며, 폭도의 무장해제와 귀순이 원만히 이루어지면 주 모자들의 신병은 김익렬 연대장이 개인적으로 보장한다. *협상 후 ”시간을 벌기 위한 반도들의 술책에 연대장이 기만을 당했다“ ”연대장이 폭도 두목과 내통했다“이런 중상모략이 경찰 정보로 중앙에 보고. 거꾸로 김익렬이 기만전술로 귀순자들을 모아 한꺼번에 몰살하려 한다는 풍문도 나돔.
*협상 내용을 보면 현실적으로 이루어 질 수 없는 것들이다. 특히 3, 4, 5의 협상 내용은 김익렬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무장 폭동의 주모자의 신병을 보장하고 해외도주를 돕겠다는 것은 범죄행위인데 김익렬이 무장 세력과 동조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김달삼 과 무장 세력은 합의문이 지켜질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합의라고 해준 것이다. 협상 내용을 가지고 군과 경찰 등 토벌세력 간을 이간질 시키고 시간을 벌기 위한 계략이었다.
8. 48년 4월 30일 임신 중이던 제주읍 오라리 대청단원의 부인 23살 강공부가 시위자들에게 산으로 끌려가 살해되는 사건 발생.
9. 48년 5월 1일 강공부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우익 청년들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좌익 청년들의 집 12채를 방화. 산에 있던 20여 명이 급 히 내려왔다가 마주친 김규찬 순경의 모친 42세 고순생을 죽창으로 찔러 죽임. 경찰이 흥분해 출동했고 도망치던 마을 여인 고무생이 경 찰의 총에 맞아 숨짐. 놀란 김익렬은 현장을 조사한 뒤 우익청년들의 방화라고 맨스필드 미군정장관에게 보고했지만, 맨스필드는 시위 대가 먼저 평화협상을 깨고 납치와 살해를 저 질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호응을 얻지 못함. (제주 오라리 사건) *좌익들은 이 오라리 사건을 우익청년들이 아무 이유없이 좌익의 집을 방화해 발생한 사건으로 설명. 따라서 평화협상이 결렬된 것은 우익의 방화 때문이라고 덮어 씌움. 4.3관련 모든 방송에서 동일하게 재생.
10. 5월 3일. 입산했던 주민 2~3백 명이 귀순하겠다고 밝히고 오라리 부근을 통과해 제주 비행장으로 하산하는 중 정체불명의 무장대 50 여 명이 갑자기 기관총과 칼빈총을 난사. 귀순자 몇 사람이 죽고 나머지는 다시 산으로 도망침. 미군의 반격으로 무장대 5명이 죽고 몇 명이 생포. 생포된 무장대는 제주경찰서 소속이라고 주장했지만 미군정이 경찰에 조사를 의뢰한 결과 시위대가 경찰로 위장해 저지른 일로 밝혀짐. 이 일로 평화협상은 완전히 깨짐.
11. 5월 5일. 김익렬은 그가 협상한 사실과 대책회의에서 조병옥 경무부장과 싸우다 해임.
12. 5월 6일. 박진경 중령 부임
*1948년. 4.3 ~7. 20 이 기간 동안 경찰관 56명, 우익 인사와 그 가족 235명 인민유격대에 학살. 진압에 나선 경찰, 경비대와의 교전으 로 인민유격대 28명 사망. 이때까지는 경찰과 군인에 의한 양민의 희생은 없었고, 국군의 희생도 없었다.(노무현 정부의 ‘제주4.3사건 진 상보고서’ 내용). 남로당에 암살당한 박진경 연대장이 재임하던 5월과 6월에도 양민 희생은 전무. 박진경 연대장에 대한 암살은 군 에 대한 중대한 도전. 따라서 9연대는 유격대에 대한 토벌작전을 강화하고, 이들 피해 김달삼과 인민유격대는 한라산 깊숙히 은신.
13. 5.10선거 방해 공작과 선거 후 보복 1) 5.10 선거 전후로 선거관리 위원과 선거에 참여하려는 사람들과 가족 등 수십 명이 낫과 도끼, 죽창 등으로 학살 당함. 결국 북제주군 (갑, 을 선거구)에서는 투표율 미달로 제헌 국회의원을 뽑지 못했고, 남제주군에서만 선거가 치러져 오용국이 당선. 2) 5월 9일 제주읍 도두리에서는 투표하지 말고 산으로 가라는 말을 거부하는 26세 권투 선수 윤상은을 죽창으로 죽임. 3) 5월 10일 안덕면 창천마을에서는 독립촉성국민회 분회장을 맡았던 48세 오대호가 칼로 전신이 찢기고 목이 잘려 죽임당함. 부인은 이 참혹한 모습을 보고 쓰러져 두 달 뒤 세상을 떠남. 4) 5월 11일 도두리 선거관리위원장 53세 김해만, 대동청년단장 31세 정방옥, 단원 23세 김용조를 산으로 끌고가 나무에 묶어 놓고 칼 로 난도질해 죽임. 5) 인민유격대는 선거 사흘 뒤인 5월 13일과 14일 함덕지서를 습격해 주임 강봉현 경사와 강태경 순경을 살해. 입후보했다 사퇴한 65세 임창현의 부인을 학살하고 입관을 하던 둘째 아들과 손자 등 3명을 또 납치해 살해. 6) 5월 13일 아침 7시 150명 이상이 한림면 저지마을을 습격해 김인하 순경을 죽창으로 찔러 죽였고 저지 지서와 우익 인사 집 100채를 불태움. 경찰 후원회장의 아버지 65세 현명조와 경찰보조원 고성현의 53세 어머니 저지1구장 65세 문명조를 학살. 경찰 협조원 44 세 박용주를 죽창으로 난자해 죽임. 7) 5월 14일 선거관리위원 44세 김상옥과 아들 27세 김택훈을 산으로 끌고 가 죽임. 8) 5월 18일 김해만의 처 52세 장인동, 딸 19세 김순풍, 아들 9세 김광홍, 정방홍의 처 24세 김순녀, 김용조의 처 26세 문성희, 대청단 원 김성언의 어머니 56세 고정달 등을 산으로 끌고가 죽임. 대정면 영락마을에서 경찰관 부모인 63세 고성두 부부를 죽창으로 찔러 죽임. 9) 6월 16일 독립운동가이자 제주도 1호 목사 이도종 목사가 대정면 신평동 중산간도로에서 산사람들에 붙잡혀 ‘양놈 사상을 전파하는 예수쟁이’ ‘미제국주의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다른 10여 명과 생매장.
*인원수 2000여 명이 조직적 무장봉기를 하여 무기는 죽창, 일본도, 기관총, 장총, 소총, 지뢰, 수류탄을 가지고 있다. 폭도들은 지식층, 청소년이 많이 있고 경찰관, 대청단원, 우익계 인사들을 납치, 살상하며 건물을 파괴, 소각하고 있으며 심한 것은 목을 매여 걸어 놓는 만행을 하고 있다. 폭도 세력은 점점 증가하는 추세이다. (1948. 5. 15 조선일보)
14. 48년 5월 20일 박진경이 3개 대대로 연대를 강화하고 본격적인 진압에 나서자 김달삼의 지령을 받은 문상길은 5월 20일 남로당원 병 사 41명을 탈영시켜 박진경이 연대장에서 해임되게 하려는 계획을 세움. 99식 소총과 실탄 14,000발을 가지고 탈영한 이들은 대정지 서를 습격해 5명을 사살하고 입산하던 중 포위돼 21명이 사살되고 20명은 체포돼 군법회의 결과 총살 됨.
15. 48년 6월 1일 진압 작전 성공으로 박진경 대령으로 진급.
16. 48년 6월 17일 박진경 대령. 도내 기관장과 연대 참모들을 제주 관덕정의 요정 옥성정에 초청해 축하연을 가짐. 새벽 1시쯤 제주농업 학교에 주둔 중인 연대본부의 연대장실로 돌아와 취침. 새벽 3시 15분 남로당원들이 M1 소총 두 발로 박진경 연대장을 암살.
17. 1948년 6월 18일 박진경 대령 암살(28세). 김달삼으로부터 박진경 대령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은 문상길은 남로당원인 정보계 선임 하사 양회천 상사에게 이를 하달했고, 양회천은 손선호 하사, 신상우 중사, 강자규 중사, 배경용 하사에게 행동 지령을 내림.
*박진경을 사살해 다시는 경비대가 해방군을 공격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은 김달삼 동무의 지령이다.(중략) 손선호가 총을 쏘는데 두 발 을 쏘면 잠을 자던 사람들이 놀라니 한 발로 끝내야 하며 머리에 딱 한발로 죽여야 시체가 험하지 않고 증오심이 적을 것이다. 실수로 잡히면 다른 사람을 물고 들어가서는 안된다. (제주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중)
*약 4,000명의 병력으로써 국방경비대와의 충돌을 피하며 포위토벌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동시에 일면으로는 국방경비대 내부의 충 돌, 특히 대내 최고악질 반동인 박진경 연대장 암살과 탈출병 공작을 추진, 상당한 우리 쪽의 피해도 있었으나 6월 18일 오전 3 시쯤을 기하여 대내에서 박 연대장이 암살되자 적은 결정적 타격을 입어.... (제주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중)
*이 암살 사건은 익명의 투서를 기반으로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고 암살 3개월 만인 1948 년 9월 23일 수색 기지에서 23세 문상길 중위 와 22세 손선호 하사에게 사형이 집행. 이것이 대한민국 사형 집행 제1호.
18. 박진경의 후임은 최경록 연대장. 최경록은 입산했던 사람들을 선무공작으로 하산시키고 좌익과 양민을 분리시키는 전략을 사용. 경찰 과 경비대를 총동원해 360개 오름을 뒤져 1,454명의 좌익을 연행한 후 600명을 기소하고 나머지는 수용소로 보냄. 문상길은 최경록 도 암살하려고 두 차례 시도했지만 개 때문에 실패했다고 체포 후 실토.(최경록은 독일 셰퍼드를 데리고 잠을 잤다 함.)
19. 8월 2일 김달삼, 제주 성산포항에서 어선을 타고 목포에 도착해 열차 편으로 서울 도착. 38선을 통해 월북. 이때 김달삼은 북한 최고인 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투표한 유권자 52,530명의 투표용지를 가져감.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5.10 총선거를 무력화 시키기 위해 봉기했다는 제주도 인민유격대. 북한에서 반쪽짜리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대의원 선거에는 참여했다. 남한의 총선거는 민족 분열과 분단 획책이고, 북한의 대의원 선거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것인가. 이젠 말 같지도 않은 저들의 선동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들의 목적은 공산주의를 향한 인민공화국 건설이었다.
*김달삼은 8. 21~8. 26까지 열린 해주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주 사건에 대해 보고. “4월 3 일 오전 2시를 기하여 인민군이 총동원됐습 니다. 반동의 거점인 지서 20개소를 일제히 습격하여 악질 경관 10명, 11명의 테러단(서북청년단) 그리고 악질 반동 등 10명이 인민군 의 애국정신에 불타는 정의의 총칼 앞에 제거되었으며 지금 이 순간까지 경관 100여 명, 반동 400여명이 숙청되었습니다. 민주조선 완 전자주독립 만세. 조국의 해방군인 위대한 소련군과 그의 천재적 령도자 스탈린 대원수 만세.”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소의 ‘북한노획문서’에 수록된 내용)
20. 1948년 8월 2일 김달삼이 월북한 후 이덕구가 2대 인민유격대 총사령관이 됨.
21. 1948년 9월 2일 남한에서 지하선거(남한의 총유권자 8,681,746명 중 77.2%, 즉 670만 명이 선거에 참여하여 대의원 1,080명 당선) 로 당선된 월북한 대의원과 북한에서 흑백함 선거로 선출된 대의원들. 평양에 모여 조선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 개최. 김달삼은 여기 서 49명으로 구성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위원에 선출되고 국기훈장 2급 훈장을 받음.
22. 1948년 9월 9일 수상 김일성, 부수상 박헌영, 홍명희, 김책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23. 1948년 9월 15일 도순리에서 대동청년단원 문두천 학살. 1948년 9월 17일 김녕리 경찰지서 방화. 1948년 9월 18일 성산면 민보단장 김민풍과 오만순 학살. 1948년 10월 1일 중문면 도순리 경찰관 5명 살해, 2명 납치. 인민유격대 토벌에 앞장섰던 돈암리 주민 정익조, 정병택 부자, 김상혁 학 살. 1948년 10월 6일 국군, 경찰과 차례로 총격전. 군인 1명 전사, 4명 부상.
24. 1948년 10월 11일 정부, 제주도 경비사령부 설치. 토벌 재개. 9연대 1대대, 6연대 1개 대대, 5연대 1개 대대, 그리고 해군 함정과 제주 경찰대 투입. 여수에 주둔하는 14연대 1 개 대대도 제주도에 파견하려 했지만 이를 거부하는 남로당 장병들이 10월 19일 ‘14연대 반란 사건’을 일으켜서 여수순천 사건으로 확대.
25. 1948년 10월 23일 인민유격대 제주 시가에 사격하고, 제주 북방 50여 곳에 봉화를 올림. 동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가 제 주 곳곳에 게양. (미육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일일보고서)
26. 1948년 10월 24일. 소련 정권 수립한 10월 혁명 기념일. 이날을 기해 이덕구는 대한민국을 상대로 선전포고. 제주인민유격대 총책임 자 이덕구 명의로 ‘괴뢰정부에 대한 선전포고문’, ‘토벌군 및 일체의 통치기관에 대한 호소문’ 발표.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선전포를 했으니 이는 내란이다.
“친애하는 장병, 경찰들이여. 총부리를 잘 살펴라. 그 총이 어디서 나왔느냐. 우리들의 피, 땀으로 이루어진 세금으로 산 총이다. 침략자 미제를 이 강토로부터 쫓아내기 위해, 매국노 이승만 일당을 반대하기 위해, 당신들은 총부리를 놈들에게로 돌리라. 내 나라, 내 부모형 제 지켜주는 빨치산들과 함께 싸우자“
27. 1948년 10월 28일 조천면 신흥리에서 만삭 임산부 등 4명 학살.
28. 1948년 11월 2일 인민유격대는 한림에 주둔한 국군 9연대 2대대 6중대와 3중대를 공격해 국군 21명 전사.
29. 1948년 11월 5일 경찰 중문지서 습격. 면사무소 양곡 약탈.
30. 1948년 11월 7일 적화음모사건 적발
제주도 내 경찰서, 각 행정기관 등에 심어놓은 모든 프락치를 동원해 일시에 경찰서 등 전 관공서를 공격하고 우익인사, 사회단체 간부 들을 모두 살해해서 제주도를 ‘인민공화국화’하겠다고 모의한 사건. 실제로 이덕구는 이날 서귀포 경찰서를 공격하고 가옥 70여채 방 화. 그러나 제주경찰서 구내 이발소 직원으로 위장했던 남로당 프락치 서용각이 남로당의 행동에 회의를 느끼고 이 계획을 폭로하면서 음모는 무위로 돌아감. 서용각의 폭로로 경찰관 프락치 11명 등 남로당원 75명 검거.
31. 1948년 11월 11일 신엄지서 습격. 주민과 가족 몰살. 가옥 80채 방화
32.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 공산화에 직면한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경 진압 작전을 펼치기 시작. 12월 31일까지의 계엄선포 기 간 동안 인민유격대는 궤멸 수준의 타격을 입음. 그러나 인민유격대에 협조한 주민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까지 검거되거 나 즉결처형하는 사례 급증. 복수심에 눈이 먼 일부 지휘관들은 양민들을 무차별 처형. 주민들은 인민유격대에 협조하지 않았다며 학살 과 방화를 당했고 토벌군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을 전체가 잿더미가 되기도 했다. 인민유격대의 선전포고와 계엄령 선포 후 1948년 11월 2,205명, 12월 2,974명, 1949년 1월 2,240명이 목숨을 잃음.
*국군의 ‘중산간 부락 소개령(疏開令)’ ”하산시 과거 불문. 하산하지 않을 시 공비로 인정, 즉시 사살“이라는 전단 및 대자보로 자수 유도 후 토끼몰이식으로 한라산 뒤져 사살.
*중산간 부락 소개로 인한 피해 규모 완전파괴 부락 45개, 부분 파괴 부락 43개, 제주도 민가 3/1가량 파괴, 제주도민 4/1 소개돼 해안 부락 이동. (1949. 4. 1 재조선 미 육군사령부 정보참모부 보고서)
33. 1948년 12월 이덕구의 경호원인 17살 오현중학교 학생 김정진 자수. 함병선 2대대장은 김정진의 안내로 어승생악을 수색해 인민유격 대 병기창과 보급창에서 소총 370정과 실탄 수천발을 노획. 이로써 제주를 다시 공격하려던 이덕구의 계획은 실패함.
34. 1948년 12월 31일 계엄해제. 한라산에는 유격대 500~600여명, 비무장 동조자 1000~1500명 잔존.
35. 1949년 1월 1일 오동리, 6일 명덕리, 12일 의귀리에서 국군과 인민유격대 간 대규모 전투.
36. 1949년 3월 9일 유격대의 기습에 국군 36명 전사한 노루오름 전투가 벌어짐.
37. 1949년 3월 말 이덕구는 안덕면 면사무소와 지서에 방화한 뒤 국군이 출동하면 빈 군기지를 습격해 무기, 탄약, 식량, 피복을 탈취하려 는 계획을 세움. 그러나 지서에 방화한 뒤 귀환이 늦어지는 바람에 새벽 4시경 녹하악 고갯마루에서 국군과 조우해 총격전 벌어짐. 국 군은 오전 11시까지 격전을 벌인 끝에 이들을 격퇴. 이것이 이덕구의 최후의 격전인 ‘녹하악 전투’(이덕구의 최대 병력 1천여 명 동원). 이후 이덕구는 재기 불능상테에 빠짐.
38. 1949년 6월 7일 새벽 3시 이덕구는 비밀리에 하산, 제주도를 탈출해 지리산 빨치산 이현상과 합류할 목적. 그러나 하산 도중 제주읍 용강리 북받친 밭에서 경찰에 포위. 경찰은 자수를 권유하나 이덕구는 저항하다 사살 됨(나이 22세). 생포된 경호원 양생돌의 주머니 에서 극비문서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압수. 이 문서에는 남로당의 폭력투쟁 기록 이 세세히 적혀 있어서 4.3사건이 민중항쟁, 민주화 투쟁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가 되고 있다.
39. 1954년 9월 21일 무장대가 6명만 남으면서 6년 6개월 만에 사실상 사태가 종료.
40. 1957년 4월 2일 마지막 공비 39세 오원권이 북제주군 구좌면 송당리 토굴에서 생포돼 만 9년만에(1948. 4. 3~1957. 4. 2) 완전 종식.
41. 2001년 김대중 정부의 헌법재판소, ”제주 4.3사건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고 5.10총선거를 방해할 목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 화국 건설을 지지하는 공산 무장 세력이 주도한 반란사건“이라고 재판관 전원 일치 의견으로 결론.
-4.3에 대한 총평 1. 군인들이 ”16세부터 60세까지 남자는 모두 나오라. 빠지는 자가 있다면 죽을 줄 알아라 “고 명령해 남자 114명이 모였는데 새끼줄로 모 두 묶어 표선 바다 모래밭으로 끌고 가서 일시에 기관총으로 쏴 죽였다. (제주 표선면 토산리 생존자 김주담씨 증언) 토벌대나 산사람이나 모두 조금만 비위를 건드리면 ”해치우라“는 말 한마디에 죽여 버렸기 때문에 오늘 본 사람이 내일 없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4.3사건 당시 서귀포중학교 교감 현성효 씨 증언)
2. 그러나 공산세력이 국가를 전복하기 위해 선전포고를 하고 국군을 공격한 사건의 본질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4.3사건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 저지를 위한 남로당 등 좌익계의 전면적 무력 유격투쟁. 좌파들의 주장대로 정부의 탄압에 맞서는 정당방위라고 하기에는 정당방 위의 한계를 넘어서는 무력혁명투쟁이었음.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을 위한 투쟁임을 분명히 밝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를 불렀다. 오각별 공화국기를 옹포 통조 림공장 옥상과 한라산 꼭대기, 그리고 삼성 혈까지 도처 강산에 게양하였다. (제주 남로당 주동자 김봉현,김민주 공편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중)
4. 4.3폭동 진압에 실패하여 제주도가 공산세력의 손에 넘어 갔다면 6.25의 판도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들이 북한의 지원으로 군사력 을 강화하고 이들과 합세한 북한군이 후방에서 부산으로 들어 갔다면 남한은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5. 군경의 과잉진압으로 희생된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고 유족들을 위로하며 보상과 명예회복은 필요함. 그러나 인민유격대가 먼저 저지른 천인공노할 만행을 잊어서는 안된다. 국가의 존립을 위협한 무장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목숨 바쳐 일한 군과 경찰을 폭력집단으로 매도 해서는 안됨. 인민유격대 진압이 실패했다면 역사의 판도는 달라졌을 것이고 지금의 자유 대한민국은 없을 것.
6. 제주 4.3사건은 공산주의자가 주도한 모반, 폭동이다. (2010. 11. 20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이영조 위원장)
7. 국가나 민족 내부의 체제 전환이 일어나거나 기존의 체제를 갈아엎고 새로운 체제가 들어 설 때는 불가피하게 발행하는 희생이 있다. 제 주 4.3은 해방 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공산주의 체제로 갈 것이냐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갈 것이냐를 두고 싸운 체제 전쟁 이었다. 이것은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이 감내 해야만 될 운명이었다. 그들의 희생 위에 지금의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수 백만명이 죽은 6.25는 민족 간 체제 전쟁이었다. 지금을 사는 우리는 6.25를 잊은지 오래다. 14000여 명이 희생된 4.3은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며 온 갖 방송 기타 문화 매체를 이용하여 기억을 되새긴다. 따라서 우리 나라는 아직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건국의 과정에 있다. 조선의 건국 이념인 성리학이 뿌리내리는데 200여 년이 걸렸다.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인 자유민주주의는 얼마의 세월을 필요로 할까. |